가즈 나이트 – 33화
“!”
리오는 누군가가 주문을 외우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몇 명의 장정들을 길에 눕히며 리오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의 눈에는 곧 저편에서 주문을 외우고 있는 이리프의 모습이 들어왔다.
엇... 다크 엘프가 수면의 주문을 쓸 수 있나?
리오는 믿기지가 않았다. 엘프족이 쓸 수 있는 정령 마법과 다크 엘프들이 쓸 수 있는 정령 마법에는 차별이 명확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리프가 쓰고 있는 마법은 분명히 엘프들이 쓰는 주문이었다.
더더욱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건 이리프였다. 리오에게 분명히 수면의 주문을 사용했음에도 불구하고 리오가 동료들을 때려눕히는 기세엔 변함이 없어서였다.
“이리프! 어떻게 된 거야, 듣질 않잖아!!”
티퍼는 보채듯이 발을 동동 굴렀다. 기가 막힌 건 이리프도 마찬가지였다.
“나… 난 분명히 주문을 제대로 사용했다고!”
“그럼 빨간 머리가 너보다 수준이 높은 마법사란 말이야?!”
전사들에겐 물리적인 방어력이 있듯이 마법사에게도 마법 방어력이라는 것이 있다. 고급 마법사나 주술사가 자신보다 못한 마법사를 공격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나 같은 수준이거나 자신보다 수준이 높은 마법사를 공격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때에 따라선 주문이 아예 먹히지 않는 일까지도 벌어지곤 한다.
“그, 그럴 리가…?”
리오는 마지막으로 서 있는 장정의 후두부를 오른쪽 팔꿈치로 가격함으로써 다대 일의 전과를 또 하나 기록했다. 그는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후우-. 자, 그럼 마지막으로.”
리오는 티퍼와 이리프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두 도둑들은 도망치려고 했으나 구경 인파가 많았고 세 방향이 막힌 골목이었기에 리오에게 그대로 잡히고 말았다.
“어이, 여기 있었군 꼬마들.”
리오는 슬쩍 웃음을 지어 보인 후 그들에게 다가갔다. 티퍼는 눈을 부릅뜨며 이리프의 앞을 막아섰다. 물론 맨손은 아니었다. 허리춤에 꽂혀있던 단도를 능숙한 솜씨로 뽑아들고 있었다.
“제기랄! 이리프는 건들지 마!!”
리오는 피식하고 코웃음을 쳤다. 뽑아드는 솜씨는 능숙했으나 자세가 영 아니어서였고 티퍼의 입에서 의외의 대사가 나와서였다.
“건들진 않지. 하지만 몇 가지 물어보자.”
리오는 팔짱을 끼고서 티퍼와 이리프를 바라보았다. 티퍼와 이리프에겐 도망치기에 더없는 기회였다. 그러나 둘은 꿈쩍도 할 수가 없었다. 무언가에 눌린 듯한 느낌 때문이었다.
“너희들 이곳에서 이런 일을 얼마나 했나?”
티퍼는 포기한 듯 눈을 감으며 순순히 답했다.
“2년 됐어요.”
“2년이라… 그럼 너희들 태라트란 사람을 본 적 있나?”
리오는 잘됐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임무를 수행하기 시작했다. 태라트란 이름을 들은 이리프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무엇인가 떠올린 듯 손뼉을 쳤다.
“아, 그 잘생긴 미남? 한 8개월 전에 이곳에 온 적이 있어요.”
“그래? 근데 넌 그 사람을 어떻게 알지?”
이리프는 그녀의 뾰족한 귀를 쫑긋거린 후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우리에게 돈을 빼앗기지 않은 첫 번째 사람이니까.”
“운이 좋았지. 누구에게 들었는지 그 술집의 뒷문으로 빠져나갔더군.”
티퍼도 그때를 회상하며 자랑스럽게 말했다.
“흠… 그럼 어디로 간다는 말은 못 들었나?”
티퍼는 약간 분위기가 풀어져서인지 술술 대답했다.
“우리가 물었을 때는 엘프족들이 살고 있는 숲으로 간다고 했어. 하지만 만약 그곳으로 갔다면 살기 힘들 거야. 그곳은 호비트나 엘프족이 아니면 길을 헤쳐갈 수가 없다구.”
“…… 그래? 알았다, 대답해줘서 고맙군.”
리오는 뒤로 돌아서서 자신이 묵고 있는 여관으로 향하려고 했다. 그러자 이리프가 그의 망토를 붙잡으며 소리쳤다.
“이봐요! 정보를 알려줬으면 돈을 줘야 할 거 아니야!!”
리오는 깜빡 잊었다는 듯 이리프 쪽으로 돌아섰다. 그리고 나서 그녀를 천천히 뜯어보았다.
“뭐… 뭘 봐요!”
리오는 주위를 살핀 후에 조용히 말했다.
“너, 솔직히 말해서 다크 엘프가 아니지?”
이리프는 정곡이 찔린 듯한 표정을 지으면서 뒷걸음질 쳤다.
“엇! 그것은 나랑 이리프만이 알고 있었는데…?!”
리오는 오른손으로 자신의 앞머리를 감싸며 미소를 지었다.
“하긴, 다크 엘프족이면 사람들이 함부로 건들지 않으니까. 엘프족의 여성은 남자들 사이에선 있기가 힘들 거야. 특히 도둑들 틈에선 말이지.”
이리프는 잠시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둘 다 리오의 말에 표정이 바뀌어 있었다. 리오는 무슨 사연이 있는 듯해서 여관에 가기를 보류하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기로 마음먹었다.
“일이 있나 본데… 말해봐. 도와줄 수 있는 일이면 도와주지.”
슈는 몹시 화가 난 표정으로 여관방 안에서 이리저리 돌아다니고 있었다.
“주점에서 여자들이랑 히죽히죽 웃고 있을까…”
슈는 이 생각 저 생각을 하다가 지친 듯 침대에 털썩 주저앉았다. 말스 왕국의 일도 걱정이 되었다. 아마 지금쯤은 영주들 중에 한 명이 정권을 잡았을 것이 분명했다. 그 생각이 들 때마다 이렇게 앉아있는 시간도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아… 어쩌지…?”
슈는 한숨을 푹 쉬었다. 그러던 도중에 뱃속에서 꼬르륵 소리가 들려왔다. 리오 때문에 아침과 점심을 거른 그녀였다. 슈는 먹은 후에 계속 기다려보기로 한 듯, 아래층으로 내려가기 위해서 방문을 열었다.
“어엇?!”
슈는 방문을 열자마자 놀란 듯이 소리쳤다. 자신이 기다리고 있던 빨간 머리의 남자가 갈색의 엘프족 여성과 함께 방으로 들어가고 있어서였다.
“어, 슈잖아. 난 또 누구라고… 자 어서 들어와.”
리오는 전혀 걸리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이리프를 데리고 방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리… 리오!! 도대체…!!!”
슈가 갑자기 소리를 버럭 지르는 바람에 다른 여관방의 사람들이 놀란 듯 문을 살짝 열고 고개를 내밀어 세 사람을 보았다. 리오는 난처하다는 표정으로 슈를 바라보았다.
“왜, 왜 그래 슈?”
슈는 몸을 휙 돌리며 화가 난 듯이 말했다.
“리오가 이런 사람인 줄은 몰랐어요, 태자님은 저 혼자 찾겠어요.”
그때 티퍼가 복부를 만지작거리며 2층으로 올라왔다. 티퍼는 복도에 리오와 이리프가 서 있는 것을 보고서 뭐하느냐는 듯이 이리프를 쳐다보았다.
“뭐야, 먼저 올라갈 테니 일 보고서 빨리 올라오라고 했으면서 멍하니 서있어.”
리오는 슈 앞에서 양손을 슬쩍 들어 보인 후 자신의 방문을 다시 열었다.
“자아, 자초지종을 들어보자구.”
슈는 뭔가 잘못되었다는 표정으로 우두커니 서 있었다. 둘을 자신의 방으로 들여보낸 리오는 슈를 보고서 피식 웃었다.
“…… 미안해요.”
리오는 들어오라고 손짓을 했다.
“슈도 이 아이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는 게 좋을 거야. 태자님의 일도 껴있을지 모르니까 말이야.”
슈는 금세 표정이 밝아지며 방으로 들어갔다. 리오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방문을 닫았다.
“전 리오씨가 말한 대로 엘프가 맞아요. 저와 티퍼가 이 도시에서 도둑으로 변하게 된 것은 2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답니다.”
이리프는 거리에서와는 다른 분위기를 자아내면서 자신들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때 전 영곡의 숲이란 곳에서 나무들과 이야기하며 어머니와 함께 한때를 보내고 있었어요. 그러던 도중에 숲의 동편에서 사람들의 비명소리가 들려왔었죠. 어머니와 전 그쪽으로 살며시 다가가 갔어요. 그곳에는 인간의 남자가 자신의 아이를 데리고서 처음 보는 괴물들과 전투를 벌이고 있었지요.”
티퍼가 계속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그때 그 아이가 나고, 어른은 우리 아버지셨지. 아버지는 사실 가이라스 왕국의 기사 단장이셨는데 갑자기 그 직책을 그만두시고 고향으로 가시는 중이셨어. 그러다가 숲속에서 이상한 괴물의 습격을 받았지. 곤충 같기도 하고… 사람 같기도 하고…”
리오는 미간을 일그러뜨리며 말을 끊었다.
“혹시 그 괴물들 몸에 녹색의 반점이 있었나?”
티퍼와 이리프는 고개를 갸웃하더니 생각이 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응, 분명히 있었어.”
리오는 깍지를 낀 후에 턱을 받치며 중얼거렸다.
“마병들이군… 좋아, 계속해.”
“그 녀석들은 엄청나게 강했어. 아버지께서도 힘겨워하셨으니까. 그러다가 위기에 몰린 아버지는 검을 놓치셨고 우리는 꼼짝없이 죽을 수밖에 없었어. 하지만 그때 이리프와 이리프의 어머니가 우리를 도와줬어.”
“그렇지만 도와주는 과정에서 저희 어머니와 티퍼의 아버지께서 그들의 체액을 맞고 말으셨죠. 처음에는 별 문제가 없었으나 그들을 가까스로 물리친 뒤에 일이 벌어졌죠.”
“독에 중독되었겠지… 아마도.”
리오의 말에 이리프는 깜짝 놀랐다.
“아시는군요? 어쨌든 저희들은 두 분들을 엘프족의 마을로 모셔가서 족장님께 도와달라고 부탁드렸죠.”
“방법이 있다고는 하셨지만 매우 힘들었지. 이 대륙의 최고봉인 슈하자이마 산의 정상 부근에서만 자생한다는 [이노]란 꽃이 필요하다고 하셨어. 하지만 그 꽃은 꺾기가 거의 불가능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어. 그곳의 정상 주변에는 명계로 통하는 입구가 있어서 보통 사람이 아니면 갈 수도 없을 정도니까.”
“하지만 이 도시에 그 꽃을 가진 사람이 있다고 하셨어요. 하지만 족장님께서는 말씀을 해주시지 않았지요. 하지만 결국 알아본 바로는 이 도시의 도적단 두목이 가졌다고 하시더군요. 그래서 저희는 도적단 두목을 직접 만났어요.”
티퍼는 고개를 푹 숙이며 힘겨운 듯 말을 이었다.
“그 녀석은 우리의 말을 듣고는 공짜란 없다며 돈을 주든지 그만큼의 일을 하라고 조건을 내세웠어. 그래서 결국은…”
슈는 그들의 말을 들어보고는 측은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말로만 들어왔던 도적단의 횡포에 분노를 느꼈다.
“… 리오, 우리 이들을 도와줘요.”
“……”
리오는 아무 말 없이 고개만 끄덕거렸다. 어차피 도와줄 생각을 가지고 있던 리오였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