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즈 나이트 – 419화
먼 동이 틀 무렵, 리오와 바이칼은 뉴욕의 항구를 천천히 거닐고 있었다. 아무 말 없이 바이칼과 걷던 리오는 심호흡을 하며 멈춰 섰고, 모르고 계속 가던 바이칼은 리오가 멈춘 것을 뒤늦게 알고 투덜대며 다시 리오의 옆으로 돌아갔다.
“후우‥역시 유럽에 비해 공기는 맑지 않군. 물론 거기도 좋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어쨌든 30년 전보다는 공기가 맑아진 것이라고 하니 뭐라고 할 말은 없지.”
옆에서 묵묵히 주위를 돌아보던 바이칼은 저 멀리 상반신이 날아간 거대 석상을 우연히 보고서 리오에게 넌지시 물었다.
“‥저기 보이는 박살 난 신상은 뭐지?”
리오는 바이칼이 눈으로 가리킨 석상 쪽을 돌아보았다. 연푸른색을 띠고 있는 그 파괴된 석상은 이른 아침의 은은한 햇볕을 받아 이상하리만큼 따뜻한 느낌을 주고 있었다.
“‥자유의 여신상‥이겠지. 지크의 말로는 이 미국이란 나라의 상징이다 싶은 몇 가지 물건 중 하나라고 했는데, 30여 년 전 이 미국에 일어난 폭동 때 미사일 공격으로 상반신이 박살 났다고 하더군. 그것을 계기로 이렇게 되고 저렇게 돼서 다시 미국이 평온해졌다나‥그럴 거야. 지크가 덧붙여서 그러던데, 저 여신상은 소프트 아이스크림을 너무 좋아한 나머지 오른손에 자랑스럽게 들고 있었다고‥.”
그 말을 듣고 가만히 연상을 하던 바이칼은 곧 고개를 저으며 중얼거렸다.
“‥설마 너 그녀석의 말을 그대로 믿진 않겠지‥.”
“후훗‥글쎄.”
리오는 천천히 앞으로 걷기 시작했다. 바이칼 역시 뒤늦게 그와 함께 걸어 나갔다.
“‥지금 와서 생각하니, 넌 참 많이 변했군‥.”
리오는 바이칼이 갑자기 그런 말을 꺼내자, 왠일인가 싶어 바이칼을 흘끔 바라보았고 바이칼은 예전과는 달리 약간 풀어진 표정으로 계속 얘기했다.
“신계에서 말릴 사람이 없을 정도의 망나니였지. 처음 만났을 무렵엔 말이야.”
“‥넌 여자인지 남자인지 구별도 못할 정도의 애였고‥.”
리오가 희미한 미소를 지은 채 그렇게 말하자, 바이칼은 다시 표정을 굳히며 계속 회상하듯 말했다.
“‥그런 녀석이 점점 변하더니 지금 같은 반 플레이보이가 되었지. 사탕발림의 천재로‥. 울린 여자가 몇 명이나 되더라?”
그러자 리오는 머리를 긁적일 뿐이었다. 그러다가, 그는 바이칼의 등을 살짝 치며 씨익 웃었다.
“‥그렇다면 난 행운아군. 700년 가까이 옆에 붙어 다니며 변하지 않고 계속 날 지켜봐 준 친구가 있으니 말이야. 하하핫‥. 자, 아침이나 먹으러 가자고.”
그렇게 말하며 리오는 먼저 걸어갔고, 멈춰서서 그의 뒤를 바라보던 바이칼은 그답지 않게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계속 변하지 않고 친구로 있을 수 있다면‥.”
패스트푸드점에서 바이칼과 함께 간단히 햄버거 몇 개로 아침을 때우던 리오는 햄버거 포장지를 지겹다는 듯 구기며 중얼거렸다.
“푸우‥며칠째 계속 햄버거, 치킨, 핫도그, 햄버거, 치킨, 핫도그의 반복이니 원‥이런 걸 둘이 먹다가 하나가 죽어도 모를 정도로 수십 개를 먹어대는 지크 녀석은 정말 괴물이군. ‥근데 너 뭐해?”
리오는 햄버거 포장지를 차곡차곡, 깔끔히 접고 있는 바이칼을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눈으로 바라보았고, 바이칼은 변하지 않는 무표정으로 대답했다.
“뭘 하든 내 맘이야.”
“흐흥, 어련하실려고.”
리오는 어깨를 으쓱이며 의자에 푸욱 눌러 앉았다. 그러던 때‥.
“‥엎드려!!!”
리오가 갑자기 그렇게 소리치며 바닥에 엎드리자, 바이칼 역시 재빨리 몸을 탁자 밑으로 숙였고 가게 점원들 역시 엉겁결에 몸을 숙였다. 그와 거의 동시에 10여 미터 정도 떨어진 은행 건물에서 폭발이 일어났고, 근처 상점들의 유리창이 그 폭발로 인해 단숨이 깨어져 나갔다. 리오가 있던 음식점 사람들 중엔 유리 파편에 당한 사람은 다행스럽게도 없었다. 점원들이 아직도 몸을 숙이고 있는 것을 확인한 리오는 식후 운동 겸 잘됐다며 밖으로 뛰어 나가려고 했으나‥그때, 리오의 귀에 익히 들었던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람들이 활동해야 할 아침에 감히 시끄럽게 폭탄을 터뜨리다니, 식사 중이던 사람의 이름으로 용서할 수 없다!!”
리오가 알고 있는 사람 중, 불의를 보고 이렇게 말할 정의의 용사는 단 두 사람뿐이었다. 지크, 아니면 루이체였으나 여자의 목소리인 것으로 보아 루이체가 거의 확실했다. 리오는 이해가 안 간다는 얼굴로 슬쩍 얼굴을 내밀며 중얼거렸다.
“‥이건 악몽이야‥.”
바이칼 역시 살짝 얼굴을 들어 보았다. 그의 시선엔 돈 자루를 들고 그대로 도주하려던 은행 강도 여섯과, 그들의 앞에 대치한 두 명의 복면인이 들어왔다. 한 명은 그냥 평상복을 입고 있었고, 또 한 명은 더운 지방 사람들처럼 터번과 통이 넓은 옷을 입고 있었다.
곧, 2대 6의 격투가 벌어졌고 결과는 생각보다 간단했다. 인질을 잡은 여섯의 승리였다. 리오는 피곤한 듯 머리를 감싸며 다시 중얼거렸다.
“‥그러면 그렇지‥. 아무래도 내가 나서야 할 것 같은데‥소 잡는 칼로 닭을 잡는 것 같은 느낌이라 좀 그러네‥.”
리오가 천천히 일어나며 그렇게 말하자, 옆에서 구경하던 바이칼이 덧붙여 말했다.
“어차피 나가려고 했으면서 말이 많군‥.”
리오는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한편, 은행 강도들은 우연히 지나가던 사람을 인질로 잡은 채 자신들을 막아선 둘을 희롱하기 시작했다. 물론 아직은 말로‥.
“후후후후훗‥감히 우리 앞에서 시비를 걸다니, 너무 용감한데 아가씨? 우리가 버릇을 고쳐주지‥후후후. 그리고 옆에 있는 까만 콩‥넌 남자인지 여자인지 모르겠으니 한번 벗어봐.”
“‥큭!!”
마키는 인상을 구길 뿐이었으나, 은행 강도들이 겁에 질린 인질의 입 안에 총구를 들이밀자, 마키는 어쩔 수 없이 터번부터 슬슬 풀기 시작했다. 약간 갈색인 마키의 피부와 대조적인 아마색의 짧은 머리카락이 나타나자, 은행 강도들은 음흉한 웃음을 띄며 마키에게 접근하기 시작했다.
“‥지겹지도 않나 이런 패턴. 나도 지겹군.”
루이체와 마키는 자신들의 등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눈을 크게 뜨며 뒤를 돌아보았고, 리오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둘에게 손을 흔들었다.
“요오‥잘 있었어 둘 다? 그건 그렇고 어쩌다 여기에 있는 거지? 내가 알기로는 너희들 동방 대륙에 있어야 하잖아.”
그러자, 루이체는 자신의 머리카락을 휙 쓸어 넘기며 별것 아니라는 듯 대답했다.
“그냥‥지크 오빠 혼자 있기가 그럴까 봐 서방 대륙에 남았지. 배 타고 우연히 오니까 여기더라구. 어쩌다 보니 또 이렇게 되었고‥. 근데 오빠는 왜 여기 있어? 다른 차원으로 날려가 있어야 하는 거 아니야?”
리오는 바지를 툭툭 털고 일어서며 대답했다.
“여기 있는 게 더 좋은 것 같으니까 복잡한 거 묻진 말아줘 동생님. 자, 둘은 저기 보이는 햄버거 가게 가서 바이칼이랑 같이 아침이나 먹어. 몰골을 보니 한 이틀 굶은 것 같은데‥.”
“흥, 숙소를 제대로 잡지 못한 것뿐이야 뭐!!”
루이체가 가게 쪽으로 가며 그렇게 소리치자, 리오는 손을 흔들며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알았습니다 알았어요. 자, 이제 너희들을 상대해 볼까?”
리오가 그렇게 말하자, 도로에 구부정하게 앉아 담배를 피우며 무언가를 기다리던 여섯 명의 은행 강도는 옆에서 자신들에게 불을 붙여주던 인질을 다시 붙잡고 일어서며 아까와 같이 소리쳤다.
“흥, 감히 우리와 맨손으로 싸우겠다는 거냐!! 우리가 여기 든 총이 보이지 않는 모양이군!!!”
그러자, 리오는 머리를 긁적이며 얼굴을 살짝 찡그린 채 도적들에게 말했다.
“‥나하고 저 애들하고 말하는 동안에 다른 곳으로 도망치는 것이 정상 아닌가‥? 그 시간이었다면 몇 블록 도주하고도 남았을 텐데‥. 곧 경찰도 올 거고.”
그러자, 은행 강도 중 두목으로 보이는 자가 앞으로 나서며 소리쳤다.
“흥, 우리의 목적은 이까짓 돈이 아니다!! 우리는 BSP, 곧 방송국 차량이 올 것이고 우리는 그때를 이용해 우리의 결백을 증명할 것이다!!! ‥이봐! 말은 끝까지 들어야 할 것 아니야!!!”
리오는 그 말을 무시한 채 모두가 있을 패스트푸드점으로 가며 투덜거렸다.
“젠장‥BSP라는 녀석들은 다 저런가‥? 차라리 그 시꺼먼 생체 로봇과 싸우는 게 더 이익이겠군‥.”
그러던 중, 사이렌 소리와 함께 경찰용 BX-02 대신 군용 BX-03과 군인들이 몰려왔다. 재빨리 몸을 피한 리오는 주위를 둘러보고 방송국 차량이 오지 않은 것을 확인한 후 완전 포위된 미국 지부 BSP들을 보며 고개를 저으며 중얼거렸다.
“‥내가 나서긴 해야 할 것 같군. 쯧쯧쯧‥.”