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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즈 나이트 – 44화


한 아주머니가 오크족과 싸우다 쓰러진 청년에게 달려와 그를 흔들며 흐느꼈다. 그 청년의 어머니인 듯싶었다.

“컬트야, 컬트야! 일어나거라 컬트야, 흑흑흑…!”

청년의 몸을 껴안고 오열을 터뜨리는 아주머니에게 리오가 다가왔다. 안심을 시키려는 듯한 손짓을 아주머니에게 보낸 리오는 그 청년의 맥박을 짚어보고 상반신을 손으로 만져보았다. 천천히 아래쪽으로 내려가던 손은 청년의 늑골 부위에서 멈추었다.

“역시, 늑골이 부러졌군요. 하지만 괜찮아요. 죽지는 않을 테니까요.”

리오의 말에 아주머니는 기뻐하며 리오를 향해 몇 번이고 허리를 굽히며 인사를 했다. 리오는 괜찮다는 말과 함께 리카와 클루토에게 다가갔다.

“자, 어서 떠나자.”

리카와 클루토는 깜짝 놀랐다.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여기에서 쉬어가자던 리오가 떠나자는 말을 해서였다. 무슨 일이 있어도 쉬는 것은 확실했던 리오의 평상시의 행동과는 거리가 멀었다.

“안 갈 거야?”

“아, 아니요… 가요.”

클루토는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리오를 따라 나섰고 리카는 아까보다 심하게 기침을 하면서도 어쩔 수 없다는 듯 리오를 따라 나섰다. 그리고 리오의 눈빛 그 자체는 한마디로 얼음 그 자체였다. 너무나도 싸늘한 느낌을 뿜어내고 있었다.

“꺽다리… 아니 리오, 망토 돌려줄까?”

리카도 무엇인가 이상한 것을 느꼈는지 망토를 벗으며 말을 걸었다.

“맘대로 해. 입던지 주던지.”

리카는 그 자리에서 멈춰 섰다. 전혀 딴사람과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았다.

“이상해… 리오가 아니야…”

리카는 뒷걸음질을 치며 말했다. 전신이 떨리고 있었다. 감기 증상에서 오는 단순한 경련과는 달랐다. 리오는 리카를 돌아보며 말했다.

“난 나야. 뭐가 잘못되었다는 것이지?”

리카는 리오의 망토를 완전히 벗어서 리오에게 던져주었다. 그리고 나서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미안해… 사람을 잘못 봤어. 이제 너와는 어디에도 같이 가질 않을 거야!”

리카는 혼자서 리오가 가는 반대쪽을 향해 뛰어가기 시작했다. 리오는 리카가 가는 모습을 덤덤히 바라보고선 망토를 주워 올리며 다시 뒤로 돌아섰다.

“리오! 왜 그러는 거예요!!”

클루토는 리오의 팔을 붙잡으며 소리쳤다.

“당신 같지가 않아요! 언제나 활활 타오르는 불꽃같던 당신 같지가 않단 말이에요, 지금은 마치… 마치 얼음장과도 같다구요!! 게다가 리카에게 그런 심한 말을…!”

리오는 클루토를 살짝 뿌리치며 주머니 속에 들어있던 지도를 땅바닥에 던졌다. 그리고는 아무 말도 없이 마을을 빠져나갔다. 클루토는 그런 그의 뒷모습을 바라만 보고 있을 뿐이었다.

“어째서… 리오가 어째서…!!”

클루토는 갑자기 밀려오는 허탈감에 주저앉고 말았다. 영문을 모르던 주민들은 클루토가 주저앉자 급히 그를 부축해주었다. 클루토는 괜찮다는 말과 함께 리오가 떨어뜨린 지도를 주워 들었다.

“.. 엇?”

지도를 잡자 무엇인가 얇고 단단한 것이 손에 잡혔다. 클루토는 급히 그것을 빼 보았다.

“이건… 수정 조각이네? 설마 레나님의?!”

레나의 옷자락이 변한 수정 조각을 리오가 빼지 않고 던질 정도면 리오의 심경에 엄청난 변화가 생긴 것이 확실했다. 클루토는 지도와 수정 조각을 꼭 쥐면서 중얼거렸다.

“왜 그래요… 리오!”


다음날 클루토는 리카가 수도원에 있다는 말을 아주머니들에게 듣고서 그 수도원으로 향하고 있었다. 말에 의하면 거리에 쓰러져 있던 리카를 수녀들이 데리고 갔다는 것이었다. 길을 가던 클루토는 이상한 노인이 나무에 기대어 있다가 자신에게 다가와 다짜고짜 이야기를 하는 것에 황당하기도 했고 궁금하기도 했다. 그 노인은 진지한 표정으로 클루토에게 말했다.

“회색 사자가 슬퍼하고 있어, 자신의 무능함을 한탄하면서 말이지. 회색 사자를 버려두지 말아, 현자야. 허허… 용왕은 무얼하고 있을꼬…?”

그 노인은 말을 다 하고 나서 길을 걷기 시작했다. 클루토는 그냥 말을 흘려듣고는 다시 수도원으로 향했다.

사람들에게 물어물어 도착한 수도원엔 많은 사람들이 기도를 하기 위해 모여있었다. 규모도 그리 큰 수도원도 아닌데 사람들이 대도시의 교회보다 많이 모여있는 걸로 보아 꽤 유명한 수도원인 것 같았다. 클루토는 사람들을 인솔하고 있는 수녀에게 리카가 어디 있는지 묻기로 했다.

“저… 실례합니다만 말씀 좀 물어도 될까요?”

수녀는 사람들을 인도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녀는 클루토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하고 나서 다른 수녀 한 명을 불러주었다. 약간 어려 보이는 수녀였다.

“저에게 말씀하세요, 마법사님.”

클루토는 아차 하며 자신이 쓰고 있는 마법사 모자를 벗었다. 그리고 나서 리카의 일을 물어보았다.

“아… 어제 길거리에 쓰러져 있던 갑옷 입은 소녀요? 지금 안에서 치료를 받고 있답니다. 안내해 드릴까요?”

클루토는 고개를 숙이며 감사를 표시했다.

“예, 그럼 부탁드립니다.”

클루토는 수녀의 안내를 받아 수도원 안으로 들어갔다. 수도사들과 수녀들은 뭔가 심각하게 이야기를 하고 있었고 사람들의 표정도 그리 밝지는 못했다. 이윽고 나무로 된 문 앞에까지 안내를 받은 클루토는 들어가 보라는 수녀의 이야기를 들었다.

“자, 이 방입니다. 다른 환자분들도 있으니 정숙해주세요.”

“예, 정말 감사합니다.”

클루토는 살며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약초 냄새가 코를 찔렀다. 하지만 클루토에게 중요한 건 리카를 찾는 일이었다. 하지만 방에 있는 환자들이 꽤 많았기에 찾는 데에는 약간의 고생을 감수해야만 했다. 이리저리 찾던 클루토는 문득 낯익은 갑옷이 눈에 들어왔다. 클루토는 갑옷의 옆쪽에 자리 잡고 있는 침대를 살펴보았다. 누군가가 이불을 푹 뒤집어쓴 채 잠을 자고 있었다. 그는 살며시 이불을 들춰 보았다. 예상대로 리카가 누워있었다.

“여기에 있었네… 열은 많이 내렸구나. 다행이야…”

클루토는 곤히 잠든 리카를 깨우고 싶지가 않았다. 한 달 만에 따뜻한 잠자리에서 자는 리카였기 때문이다. 그는 근처의 의자를 조심스럽게 끌어다 리카의 머리맡에 앉아 리카가 깨기를 기다리기로 했다.


리오는 디파스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커다란 나무 아래에 기댄 채 뜬눈으로 밤을 새우고 있었다. 그의 눈빛은 정상으로 돌아와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무엇인가가 남아있는 상태였다. 그는 밤하늘을 쳐다보고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 저도 이젠 지친 것 같습니다… 750여 년간 이런 슬픈 일을 당해왔고 더 이상 참지 못하겠어요. 저도 이제는 휴식이 필요할 것 같은데요.”

그의 말에 응답이라도 하듯 하늘에선 하얀색의 빛덩이가 내려왔고 그 빛은 리오의 얼굴 앞에 멈추어 섰다. 그리고 빛의 안에서 한 노인의 얼굴이 비춰졌다.

「리오야… 여태까지 잘 참아왔지 않느냐.」

그 노인도 그리 즐겁지 않은 표정으로 말했다.

“예, 그래왔죠. 하지만 이제는 정말…”

「지쳤다고?」

리오는 씁쓸히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훗, 아시는군요.”

노인은 마치 자식을 타이르듯 리오에게 말했다.

「가즈 나이트가 가지고 있는 세 가지 철칙은 잊지 않았겠지? 신(信), 의(儀), 그리고 인(仁)이다. 제일 중요시하라고 이른 게 무엇이더냐?」

리오는 조용히 대답했다.

“사람들에게서 슬픔이 있다면… 그것을 없애는 것입니다.”

「그래, 바로 인성이다. 거기에 따른 자신의 희생도 감수하는 것이 너희들의 숙명이 아니더냐.」

리오는 노인을 쳐다보았다.

“예… 750년 동안 그 사람들의 슬픔을 등에 업고 여기까지 왔습니다. 하지만 이제 그것도 한계인 것 같습니다!”

노인은 눈을 감으며 말했다.

「… 너희들에게 내가 실수한 것이 하나 있단다. 바로 너희들의 감정에서 사랑을 없애 버렸다는 것이지. 그래서 잔악한 면을 띄우기도 하지만 말이야. 그러나 난 너희들에게 한계란 없도록 했다. 적어도 감정상으론 말이지. 어떤 고난이 닥쳐와도 그것을 이겨낼 수 있고, 어떤 달콤한 유혹이 너희들에게 다가와도 뿌리칠 수 있는 것을 주었다. 바로 믿음, 신념이다.」

신념이란 말을 들은 리오의 눈은 크게 떠졌다.

「각자의 능력을 믿고 각자의 할 일을 믿기에 너도 750년이나 살아왔지 않느냐? 그리고 너를 믿는 사람들도 있지 않으냐.」

리오의 머릿속에서 많은 일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자신을 믿기에 홀로 병실에 남고 있는 슈. 자신을 믿었기에 그만큼 실망을 해버린 리카와 클루토. 그리고 자신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고 믿음 하나로 따라와 결국 비운의 주인공이 된 레나…

「자… 이제 어떠냐. 가즈 나이트로서의 일을 포기하겠느냐?」

노인의 물음에 리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리오는 노인을 바라보았다. 그 특유의 미소가 얼굴에 흐르고 있었다.

“750년 후에 다시 생각해 볼 겁니다.”

노인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이제 다 쉬었으니 가보십시오. 할 일이 생각났거든요.”

「허허허… 녀석…」

노인의 커다란 웃음소리와 함께 흰색의 빛은 다시 하늘로 사라졌다. 리오는 다시 힘을 얻은 듯 힘있게 일어섰다.

“좋아… 하하하핫!!”

리오는 바람같이 디파스 마을로 뛰어가기 시작했다. 동쪽으론 먼동이 조금씩 트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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