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즈 나이트 – 5화
“리오가 늦네…?”
레나는 평상시에 거의 용변을 보지 않던 리오가 급한 일이 있다고 떠난 것부터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20분이 넘도록 돌아오지 않자 그 생각은 이내 걱정으로 바뀌었다.
“리오씨가 늦네요 레나씨.”
클루토가 물었다. 하지만 레나처럼 걱정하는 기색은 없었다. 하긴, 만난지 몇 시간도 안 되었으니까.
“예…그렇네요.”
클루토는 계속해서 레나가 자신들에게 존댓말을 붙이는 것이 좀 불편하게 생각되었다. 나이도 자신보다 예닐곱 살은 더 먹어 보이는 여성인데도 존댓말을 붙이니 그도 그럴 만 했다.
“레나씨. 그냥 말 놓으세요.”
“예? 왜요?”
“저희들이 불편하답니다. 그냥 동생처럼 저희들을 대해주세요.”
저쪽에서 고기를 마저 뜯고 있던 리카도 그 말에는 긍정했다.
“맞아요 언니. 그냥 반말하셔도 돼요.”
레나는 약간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래도…될까?”
“예, 그게 더 듣기 편해요.”
“음, 고마워.”
레나가 살짝 클루토에게 웃어보이자 클루토는 얼굴이 붉어지며 고개를 숙였다.
“클루토, 이리 와봐”
리카가 고기를 마저 해치운 듯 클루토를 불렀다. 불만이 섞인 목소리였다.
“응? 왜, 왜 그래?”
클루토의 안색이 금방 바뀌었다. 레나는 그의 표정을 보고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애써서 참았다. 클루토는 리카의 곁으로 조심스레 걸어갔다. 리카가 속삭였다.
“이봐, 클루토. 저 여자는 너랑 나이가 너무 차이가 난다고. 한두 살이면 모를까. 그러니 일찌감치 포기해.”
클루토는 당황하는 표정을 지으며 손을 내저었다.
“무, 무슨 소리야! 난 그런 생각 추호도 해본 적이…!”
그러나 클루토는 리카의 앞에선 이상하게도 거짓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건 네 살 때 리카를 처음 만나고부터였다.
“솔직히 말하시지… 응?”
클루토는 얼굴을 붉힌 채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 그건 저….”
그때, 숲속에서 부시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레나를 비롯한 모두가 그쪽을 향하여 시선을 집중했다. 레나는 자신의 몸이 떨린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하필이면 리오가 없을 때…!!’
리카는 자신의 검을 뽑아들었다. 그리 길지 않은 여성용의 검이었다. 1가론이 채 안 되었다. 하지만 그 검에 새겨진 문양들과 자루의 장식에서 그 검이 보통 검이 아니라는 걸 말해주고 있었다.
모두가 숨소리를 죽였다. 그때, 숲속에서 리오가 서서히 나타나며 말했다.
“잠깐, 리오예요 레나.”
레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녀는 손을 그녀가 차고 있는 소검에 갖다 대고 있었다. 사용할 줄은 몰랐지만 그래도 혹시 해서였다. 물론 사용하지 않기를 바랐지만.
“리오, 어딜 갔었어요? 걱정했잖아…요?”
레나는 리오의 품에 안겨있는 작은 아이가 시선에 들어오자 말을 멈췄다. 피투성이가 된 아이였다.
“어떻게 된 거죠, 이 아인?”
리오는 씁쓸한 표정으로 상황을 설명해주었다. 리자드맨과, 거기에서 학살된 사람들. 그리고 어머니의 품에서 겨우 살아남은 이 아이에 관해서….
“……그래서 여기로 데리고 온 거죠.”
“그래요….”
레나는 리오의 품에서 곤히 잠들어있는 아이를 보았다. 아직도 눈에 눈물자국이 있었다.
“그럼 저에게 맡기세요. 우선 아이의 몸에 묻은 피부터 닦아줘야 하겠어요. 리카, 좀 도와주겠니?”
리카는 기다렸다는 듯 레나의 곁으로 빠르게 걸어갔다.
“리오와 클루토는 물가에 가서 아이의 옷을 빨아다 주세요. 여분의 옷은 없을 테니 말이에요.”
레나는 아이의 옷을 벗긴 후 리오에게 맡겼다. 그리고는 배낭에서 수건을 찾아 그 아이의 몸에 묻은 피를 닦아주었다.
잠시 후, 자신과 클루토가 빨아온 옷을 입히고 난 후 리오가 말했다.
“어서 이 숲을 빠져나가야 해요. 리자드맨들이 언제 나타날지 몰라요.”
리오는 그 아이를 업고서 숲의 길을 따라 라이논으로 향하는 길을 재촉했다. 레나들도 리오를 따라 약간은 빨리 숲을 빠져나갔다. 아이는 리오의 술법이 좀 강했었는 듯 연 이틀 동안 그의 등에서 곤히 잠을 잤다. 아이로선 그게 더 편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레나와 리카, 그리고 클루토가 피곤한 발을 끌며 언덕을 넘어가고 있었다. 거의 쉬지 않고 이틀을 걸었기 때문이었다. 중간에 한 번 노숙했으나 피곤하긴 마찬가지였다. 클루토는 리오를 힐끗 바라보았다. 아이를 계속 업고도 전혀 지친 기색이 보이질 않았다. 게다가 어젯밤 노숙할 때도 혼자 뜬눈으로 밤을 보냈는데도 전혀 조는 기색 없이 성큼성큼 걸어갔다.
`저 사람은 인간이 아니야.’
클루토는 내심 이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그렇게밖에 리오의 엄청난 체력을 설명할 길이 없었다.
“자, 다 왔어요 레나. 저기가 라이논입니다.”
레나는 기쁜 표정으로 리오의 옆에 섰다. 긴 장성 뒤로 수도 위성도시 라이논이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리카와 클루토도 라이논의 거대한 풍경에 놀란 듯 입을 벌리고 기쁜 표정을 지었다.
말스 왕국의 수도는 긴 장성에 둘러싸여 있다. 그리고 그 장성의 동서남북에는 천연의 요새 도시가 자리 잡고 있었다. 로스라, 하리튼, 다즈론, 그리고 라이논이 그것이었다. 이들 도시는 수도의 방위를 책임질 뿐만 아니라 교통상 중요한 거점에 자리 잡고 있었기에 상거래 또한 크게 벌어지고 있었다.
리오들은 그 거대한 장성문으로 인파와 함께 다가갔다. 장성 양쪽으로 군인들이 간단한 검문을 하는 게 보였다. 하지만 건성일 뿐, 그들은 그냥 돌아다보기만 했다. 레나는 그걸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너무나 피곤했기 때문이었다.
도시 안으로 들어온 일행은 곧바로 여관을 찾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리 찾기가 어렵지는 않았다. 들어오자마자 보이는 건 여관들 뿐이었다. 리오가 그중 한 곳을 정하여 그곳에 방 2개를 잡자마자 다른 일행들은 모두 각자의 방으로 뛰어들어갔다. 리오는 자신과 클루토의 방으로 천천히 들어갔다. 클루토는 옷을 갈아입지도 않고 침대 위에서 골아 떨어져 있었다. 리오는 슬쩍 웃어보이며 등에 업고 있던 아이를 침대에 눕혀주었다. 리오는 여관 주인에게 그들이 일어나면 음식을 최고급으로 먹여주라고 부탁하며 금화를 여관주인의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주었다. 주인은 리오가 여관 밖으로 나서자 인사를 거의 직각으로 했다. 돈의 위력이었다.
“음…정보나 얻어봐야지.”
리오는 중얼거리며 근처에 위치한 큰 술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대낮인데도 술집엔 사람이 많이 있었다. 손님의 대부분은 상인들과 휴식을 취하러 나온 군인들이었다. 리오는 근처의 비어있는 탁자에 앉았다. 종업원이 물을 가져다주었다. 리오는 술을 잘 마시지 않는 타입이라 우유 한 잔을 주문했다. 종업원은 리오를 신기한 눈으로 쳐다보고는 다른 주문을 받기 위해 옆의 탁자로 갔다. 그사이에 드워프족으로 보이는 한 남자가 리오에게 다가왔다.
“안녕하시오?”
믿음직한 얼굴을 한 드워프였다. 그는 자신의 이름을 아르만이라 밝히며 리오에게 자기소개를 하였다. 그는 드워프 상인의 한 사람인데 리오의 등에 매달린 검이 예사롭지 않아서 리오에게 접근한 것이라고 솔직히 말하였다. 리오는 잘 되었다고 생각하며 수도와 이 도시에 대한 일을 물었다.
“음… 특별한 일은 없습니다. 아, 수도에서 며칠 후에 추수 감사절 행사 중 하나인 검투기대회가 열린다고 들었습니다. 언제나 가서 보았습니다만… 그리 재미는 없었죠. 왕국의 7호장 분들도 출전 안 하시니까요.”
“7호장이라고요?”
“아니, 그러면 그분들을 모르신다는 말씀이십니까?”
아르만이 말한 7호장은 말스 왕국 초 정예 일곱 부대를 맡고 있는 장군들을 말하는 것이다. 각자의 실력은 절정에 위치하고 있어서, 같은 7호장이거나, 로하가스 제국의 오마 장군이 아니면 상대할 사람이 없다고 전해지고 있다.
“음… 대단한 사람들 같군요. 그들에 대해서 자세히 알고 있소?”
“세분은 직접 만나 뵌 적이 있지요. 그분들이 저희 촌장님께 특별한 무기를 주문하신 일이 있어서요. 한 분은 검성이라 불리우는 슐턴, 또한 분은 창의 대가 헤리온, 그리고 여장군 중 한 분이신 슈레이. 그리고 다른 두 분까지 합해서 그분들은 신예 5호장이라 불리십니다.”
리오는 이런 사람을 만났다는 걸 행운으로 생각했다. 그는 아르만에게 감사의 표시를 하고 싶었다.
“아닙니다, 전 그저 당신의 검을 한 번 보고 싶을 뿐입니다.”
별로 어려운 부탁은 아니었다. 리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음… 안 될 건 없죠.”
리오는 망토 사이에 들어있는 검을 칼집째 꺼내 보였다. 그리고 나서 천천히 검을 뽑아 보였다. 자색의 검신이 아르만의 눈에 확 들어왔다. 아르만은 신음 소리에 가까운 감탄사를 내었다.
“오오…! 이 검은……!!”
아르만은 검 쪽으로 몸을 숙여 더 자세히 그 검을 보려고 애를 썼다. 리오는 그의 그런 행동을 보고 있는 건 예의에 어긋난다고 생각하고 검을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아르만은 고맙다고 말한 후 주머니에서 빛나는 물건을 꺼내었다. 수정으로 만들어진 돋보기였다. 드워프족의 세밀함이 드러나는 수공품이었다.
“검에… 흠집이 없군요. 그리고 이 색깔, 분명히 락토레리움 같군요. 그렇죠?”
“호오… 보실 줄 아시는군요.”
“이럴 수가… 어떻게 락토레리움을 이렇게 가공할 수 있을까! 이건 아무리 저희 촌장님이시라도 몇십 년이 소요되는 것인데… 놀라워… 놀라워…!”
리오는 턱을 쓰다듬으며 물었다.
“락토레리움이 그렇게 대단한 거요?”
“예. 하지만 가공하기 전까진 그냥 보라색의 흙에 불과하지요. 그러나 가공하는 횟수에 따라 그 강도가 달라진답니다. 3년을 가공하면 보통 청동 검과 다를 바가 없지만요, 수십, 아니 수백 년에 걸쳐서 가공한다면 그 강도는 다이아몬드를 상회하게 된다고 합니다. 가공이 가능하다면 최강의 검도 만들 수 있지요. 이 검은 제가 들은 대로 보기엔… 100년 가까이 된 듯싶군요. 그것도 명인에 의해서 가공되었고요.”
리오는 드워프들의 무기 지식에 관해서 새삼 놀랐다. 정말 쪽집게 같았다.
“음…대단하시군요. 이 검에 대해서도 아실 줄이야…”
아르만은 부끄럽다는 표정으로 웃으며 말했다.
“아하하… 저희 촌장님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랍니다. 그분은 정말 대단하신 분이십니다. 후훗… 당신에게만 알려드리는 거지만 이 세계 최강 검인 파라그레이드를 제작하신 분이 바로 저희 촌장님이십니다. 그분이 여덟 살 때부터 97세가 되실 때까지 제작하신 오리하르콘 검이지요. 이 검이 음(陰)의 검이라면 파라그레이드는 양(陽)의 검이라고 할까요? 촌장님께서도 락토레리움 제의 검에 상대할 수 있는 검 중에 하나라고 말씀하셨지요.”
“그래요?”
리오는 아르만의 이야기가 흥미로워졌다. 종업원이 우유를 가져와도 마실 생각이 없어진 듯했다.
“들은 말로는 이 세상에서 최강이라 칭할 수 있는 검 디바이너, 드래곤 슬레이어, 로제바인, 라이세네프와 촌장님께서 만드신 파라그레이드 등은 강도 등의 면에선 서로가 전혀 뒤지는 게 없으나 속성이 다르기 때문에 상대되는 검이 반드시 있다고 합니다. 상대성끼리 부딪힌다면 엄청난 일이 벌어질지도 모른다고 합니다만 디바이너 만큼은 무속성이라 안전한 검이라고 되어왔지요. 그 자체가 락토레리움으로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랍니다. 하지만 오리하르콘이 다른 세계에서 넘어왔고 결국 디바이너도 반대 속성이 생겨난 거죠. 파라그레이드 때문에요.”
그 말을 들은 리오는 한순간 침을 꿀꺽 삼켰다. 긴장된 목소리로 물었다.
“그…파라그레이드란 검은 어디에 있습니까?”
아르만은 아쉽다는 웃음을 지어 보였다.
“하하, 안심하세요. 당신의 검이 아무리 잘 만들어졌어도 디바이너는 절대 아니니까요.”
“예? 무슨…”
“디바이너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100년 전에 가스트란 황제와 함께 소멸되었으니까요. 칼자루만 남아있었다고 전해지더군요.”
“아, 예…”
리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르만은 한 가지를 덧붙여 말했다.
“그리고 파라그레이드는 말스 왕국에 있습니다.”
리오는 속으로 움찔했다. 설마 드워프들이 7호장들에게 가져다준 무기 중에 있을까 해서였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것도 사라져 버렸지요. 21년 전에 일어난 왕궁 반란 사건 중에 그랬지요. 하지만 자세한 건 저도 모른답니다.”
“예… 그래요.”
리오는 한숨을 푹 쉬었다. 아르만은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술집 밖으로 나갔고. 리오도 검을 챙긴 후에 우유를 마시고 밖으로 나갔다.
술집의 옥상에서 한줄기 빛이 쏟아졌다. 하지만 그 빛을 의식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그리고 그 빛에서 한 사나이가 나왔다. 짙은 군청색의 머리에, 붉은빛의 눈동자, 그리고 엘프족처럼 뾰족한 귀를 가졌지만 엘프족의 그것과는 약간 달랐다. 약간 더 날카로운 면이 있었다. 얼굴은 마치 조각상과도 같았다. 뾰족한 코에, 약간은 위로 올라간 듯한 눈초리와 그 위에 있는 그림과도 같은 눈썹. 그야말로 진정한 미남(美男)이었다. 빛이 사라지자 그의 눈동자는 검은색으로 변하였다.
차림새는 그리 무겁지 않아 보였다. 어깨 보호구에 푸른색 망토 차림이었다. 갑옷은 입지 않고 있었다. 약간 짙은 파랑의 무도복과도 같은 디자인의 옷을 입고 있었다. 그의 작은 입이 움직였다. 숨을 크게 쉬었다. 하지만 체형이 약간 호리호리한 편이라 그리 티가 나지는 않았다. 그는 바지 주머니에 왼손을 넣었다. 그리고 오른손으로 전체적인 날카로움을 보여주는 자신의 머리카락을 긁적였다.
“리오녀석…설마 여기에 오지는 않았겠지…?”
그 말을 마친 사나이는 이곳저곳을 둘러보더니 옥상 아래로 내려갔다. 술집 옆에 있는 골목길에서 나오자 가벼운 바람이 불어왔다. 약간은 처진 그의 앞머리가 부드럽게 흔들렸다. 그는 미소를 띄우면서 머리카락을 손으로 쓸어올렸다. 그 모습을 본 주위의 여성들이 모두 그에게 시선을 보냈다.
“……응?”
그는 시선을 느끼고 뒤쪽을 바라보았다. 많은 여성들이 그를 보고 있었다. 그는 살짝 그녀들에게 미소를 보내주었다. 그의 흰 치아가 햇빛에 반사되었다. 그를 지켜보던 많은 여성들 사이에서 환성이 들렸다. 그 사나이는 뒤로 손을 흔들며 인파 속에 파묻혀 보이지 않게 되었다. 여성들은 아쉽다는 표정들을 각각 지어보이고는 다시 자신들의 할 일을 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