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즈 나이트 – 58화
날이 저물 때까지 계속 길을 걷고 있던 리오 일행은 리오가 한 번도 쉬자는 말을 하지 않자 리오의 심기가 불편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리카는 길 옆에 보이는 나무 밑동에 걸터앉으며 소리쳤다.
“이봐! 난 더 이상 못 걸어! 듣고 있는 거야 꺽다리!”
들었는지 듣지 않았는지 리오는 멈춰 섰다.
“그럼 쉬지 뭐.”
머셀은 배가 고픈 듯 숲으로 들어가 먹을 과일을 찾았고 클루토는 키세레의 옆에 앉아 이것저것 얘기를 나누었다. 리오도 쓰러진 나무에 앉아 디바이너를 헝겊으로 닦았다.
“아, 잊은 게 있어요. 잠깐만요 키세레님.”
말하던 도중 품 안을 뒤적거리며 리오에게 다가갔다. 키세레는 턱을 괴고서 클루토의 뒷모습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리오, 이거 받아요.”
칼을 닦던 리오는 클루토의 조그만 손에 들려있는 지도를 보았다. 마을에서 자신이 내던진 지도였다. 리오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 지도를 넘겨받았다. 두 번 접은 지도의 안에는 딱딱한 무언가가 끼워져 있었다.
“아, 이건….”
조그마한 에메랄드 조각. 리오 자신의 궁극적인 임무를 나타내 주는 물건이었다. 클루토는 한쪽 눈을 감아 보이며 말했다.
“힘내요 리오. 할 일이 아직 태산 같잖아요.”
클루토는 다시 키세레의 곁으로 갔고 리오는 지도를 집어넣으며 다시 칼을 닦기 시작했다.
“힘내라구? 훗….”
몇 분이 지난 후 머셀이 과일을 듬뿍 따가지고 오자 일행은 원기를 얻은 듯 과일을 깨끗이 먹어치웠다. 과일을 계속 씹으며 다시 출발한 리오 일행은 날이 어둑어둑해질 무렵 커다란 마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 대륙 최대의 고원인 에르파라스가 시작되는 곳에 위치한 마을이라 사람들의 발길도 잦은 곳이었다.
그러나, 이들이 도착했을 때는 주민들 외에 다른 여행객이나 모험가들은 거의 찾아볼 수가 없었다. 리오는 일행을 여관에 집어넣은 후 여관의 옆에 위치하고 있는 주점으로 들어갔다. 주점의 안은 주민들로 꽤 차 있었고 사람들의 표정은 그리 밝지만은 않았다.
리오는 주점의 주인에게 주문을 하며 슬쩍 물었다.
“저어… 아저씨. 여행객이 잘 보이지 않는데 어떻게 된 겁니까?”
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른 주인은 리오를 슬쩍 보면서 말했다.
“당신도 여행자요, 어디로 가슈?”
“음… 가이라스의 수도로 갑니다.”
주인은 피식 웃으며 손을 저었다.
“후훗, 그럴 거면 짐 싸서 빨리 떠나요 손님. 이쪽의 길로는 더 이상 갈 수가 없다오. 그 노망 난 왕이 고원의 곳곳에 괴물들을 풀어놓았다우, 허 참! 기가 막혀서….”
리오는 얼굴을 찡그리며 되물었다.
“괴물이요?”
“그렇수, 게다가 보통 괴물들도 아니지. 드래곤 좀비 같은 대 괴수들이란 말이오! 몇몇의 용감한 검사들이 기어코 올라갔는데… 살아온 사람은 딱 하나였수. 그것도 미쳐서….”
“가이라스 왕이 풀어놓았다는 게 사실입니까 아저씨?”
“그렇다니까요, 왕궁 마법사들이 오더니 이제부터 이곳으론 입산 금지라고 하더군요. 쩝… 괴물들이 갑자기 나타났다나? 그런데 그걸 누가 믿수, 그 고원엔 괴물이라곤 없었는데. 고원에 있는 거라곤 마을 다섯 개뿐이요. 아, 그건 그렇고 주문은 뭐요?”
리오는 잠시 동안 곰곰이 생각하다 우유를 주문하고선 주점을 둘러보았다. 그리 눈에 띄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리오는 몇 가지 물품들을 정리한 뒤 고원으로 가는 길 쪽으로 향했다. 그들이 그쪽으로 들어가자 사람들은 불쌍하다는 듯 혀를 찼고 일행은 무슨 영문인지 몰랐다. 마을을 완전히 빠져나간 일행에게 리오가 돌아서서 말했다.
“자, 여기만 지나가면 수도의 방위 요새 도시 야룬다가 나와요. 거기까지만 도착하면 뭔가 실마리가 풀릴 겁니다. 하지만 이쪽으로 가는 길이 무척 험하니까 조심해야 해요. 너희들도 마찬가지다,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해.”
그들이 가는 에르파라스 고원은 이 대륙에서 비밀이 가장 많은 곳 중에 하나였다. 그곳에서 신전을 봤다느니, 용의 마을을 봤다느니 하는 소문이 들려와도 하나 이상할 것이 없었다. 지역도 험하고 하늘을 날아다니는 몬스터들도 살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리 많지가 않았다. 원래부터 있던 드워프 마을만이 다섯 개 있을 뿐이었다.
일행은 얼마쯤 올라가다가 마을에서 산 방한복을 착용했다. 그러나 리오는 겨우 망토 하나뿐이었다.
“리오, 망토 하나만으로 괜찮아요?”
리오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꺽다리가 입고 있는 망토는 특별하다구. 내가 저번에 입어봐서 알지. 엄청 따뜻하단 말이야.”
감기에 걸렸을 때 리카는 잠시 동안 리오의 망토를 입고 있었다. 굉장히 얇은 재질인데도 보온성이 충실했다. 마치 살아있는 망토처럼 느껴지는 것이었다. 얼마쯤 더 걷다가 리오는 우뚝 섰다. 머셀도 무언가를 느낀 듯 청각을 집중시켰다.
“이건… 재수가 없는데?”
리오는 씁쓸히 웃으며 디바이너를 뽑아들었다. 그들의 앞으로 무언가가 다가오고 있었다. 거대한… 아주 거대한 야수였다.
“쿠워어어어―”
산지에서 가끔 나타난다는 대형 육식동물인 키라버스였다. 게다가 한 마리가 아니었다. 계곡 주위를 십여 마리의 키라버스가 둘러싸고 있었다. 흰색의 털이 어딘가 위압감을 조성하고 있었다.
“전면은 내가 맡는다. 클루토와 머셀은 좌우를 맡아. 키세레님은 후방을 봐줘요.”
“예!”
각자 대답하며 고원에서의 전투는 서서히 막을 올리고 있었다.
“캬아악!”
키라버스 한 마리가 괴성을 지르며 일행의 정면으로 돌진해 들어왔다. 커다란 앞 송곳니는 어떠한 무기보다도 위협적이었다. 커다란 몸집에도 불구하고 키라버스들은 빠르게 움직였다.
“헙!”
리오는 돌진해 들어온 키라버스의 후두부를 다리로 가격했다. 키라버스는 고양이처럼 중심을 다시 잡으며 리오에게 돌격해 들어왔다. 디바이너의 자색 검광이 십자를 그리며 허공에 춤을 추었다.
“십자 격렬파(十字激烈波)!!”
파앙!
네 조각으로 몸이 잘린 키라버스는 공중에서 산산조각이 나며 차가운 돌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 광경을 본 다른 키라버스들은 더욱 맹렬하게 돌진해 들어왔다.
“화이라만!”
클루토의 손에서 시뻘건 불덩이가 야수들을 향해 토해졌다. 그것을 맞은 키라버스 몸이 불덩이로 변하여 몸부림을 쳤다.
“이것들, 왜 이렇게 끈질긴 거지? 이 정도면 서서히 떠날 때도 됐는데!”
다른 한 마리를 참수하던 리오가 소리쳤다. 머셀도 이상하다는 듯 말했다.
“그러게요! 게다가 저하고 교감이 통하지 않아요!”
갓스펠 중 공기를 이용한 충격파로 상대방을 공격하는 [갓핸드] 주문을 사용하던 키세레는 머셀의 말을 듣고서 주문을 풀고 다른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그녀가 갓핸드 주문을 풀자 키라버스 한 마리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어딜!”
리카에게 등을 공격받은 키라버스는 마치 전기에 감전된 듯 사지를 부들부들 떨며 쓰러졌다. 리카가 가진 [룬 블레이드]의 위력이었다. 상대방의 약점을 알아서 공략해 주는 고대의 무기를 어디서 구했는지는 나중에 알 일이다. 리카의 엄호를 받으며 주문을 완성한 키세레는 공중을 향해 주문을 개방했다.
“디스펠(Dispell)!!”
공중에서 흰색의 뇌전이 키라버스들에게 떨어졌고 야수들은 잠시 동안 몸을 움직이지 못하였다. 갓스펠 중 주문 해제의 능력을 가진 4급 주문의 위력이었다.
“쿠우우우….”
다시 일어선 키라버스들은 주위를 둘러본 후 뿔뿔이 흩어져 어디론가 사라졌다. 입김을 세차게 뿜으며 클루토가 키세레에게 물었다.
“아니… 주문에 걸린 야수들이었어요?”
이마에 흐르는 땀을 모자를 벗고 닦아내며 키세레가 고개를 끄덕였다.
“엘프족의 교감이 통하지 않는 동물은 없어. 요수나 마수들 이외엔 다 통한단다. 아마도 비스트 테이머가 어디엔가 있는 것 같아.”
리오는 디바이너에 묻은 피를 닦은 후 집어넣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흐음…. 그 아저씨의 말이 틀리진 않군. 이제 뭐가 나올지 궁금해지는데?”
다시 길을 떠나는 일행을 절벽 위에서 누군가가 바라보며 화가 난 듯 중얼댔다.
“으윽, 꽤 강한 녀석들이군. 리오 스나이퍼라는 녀석 왕비님이 말씀하신 대로 정말 대단한 녀석이야. 하지만 다음 관문을 통과할 수 있을까…, 기대해보지.”
굵은 목소리는 허연 입김을 뿜으며 다시 어디론가 사라져 갔다. 발자국 소리가 보통 사람들보다 더 크게 울렸다.
디스펠의 주문이 키세레에겐 무리였는지 키세레는 걸으면서 계속 비틀댔다.
“키세레님, 괜찮아요?”
리오가 그녀의 팔을 잡고서 부축하려 하자 키세레는 거칠게 뿌리치며 소리쳤다.
“내 몸에 손대지 말아요!”
그녀의 반응에 아이들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저토록 리오를 싫어하는 줄 미처 몰랐다는 표정도 섞여 있었다.
“훗, 말씀대로.”
리오는 망토를 휘날리며 휙 돌아섰다. 클루토와 키세레는 알고 있었다. 리오가 결코 화가 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리오는 일행의 뒤에, 키세레는 앞에 섰다. 야수들이나 괴물들이 일렬로 가는 여행자를 습격할 때 뒤쪽의 사람부터 먼저 습격하기 때문이었다.
휘이잉―
계곡 사이에서 갑자기 돌풍이 일었다. 일행은 얼굴을 가리며 돌아섰고 리오는 정황을 살폈다.
“… 한 마리…. 두 마리인가?”
리오는 계곡을 빠르게 타서 위로 올라갔다. 꼭대기에 도착한 리오의 눈에 들어온 것은…. 물질계 최강의 생물이라 불리우는 드래곤이었다. 리오의 기척을 느낀 두 드래곤은 천천히 그에게 다가왔다.
“드, 드래곤?!”
드래곤을 본 일행은 그 자리에서 움직일 수 없었다. 개인의 수준으론 결코 이길 수 없는 상대이기 때문이었다. 3급의 마법까지는 결코 통하지 않는다. 그리고 입에서 뿜어내는 브레스는 4급 수준의 결계를 무시한다. 그 드래곤이 자신들의 눈앞에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