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즈 나이트 – 62화
거대한 빛의 기둥이 골렘의 몸을 뚫고 하늘로 치솟았다. 골렘의 몸은 이미 분자 단위로 분해되어 사라져 가고 있었다.
빛이 치솟은 부분에선 흰색으로 찬란히 빛나는 세인트 디바이너를 들고 있는 리오가 우뚝 서 있었다. 세인트 디바이너의 성력(聖力)을 몸에 받아들여 골렘을 없앨 수 있었던 것이었다. 세인트 디바이너의 날은 다시 빛으로 화하여 사라졌고 벌어졌던 뾰족한 물체는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리고 원래 보라색 디바이너의 날이 다시 합해지며 디바이너는 처음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리오는 지친 눈으로 동료들을 돌아보았다. 모두 무사했다.
“제기랄….”
리오는 눈앞이 캄캄해짐을 느꼈다. 디바이너에 다시 한번 의지하여 쓰러지는 것을 막으려 했으나 그럴 힘조차 없었다. 몸의 감각이 둔화되어 왔다. 손끝에 느껴지는 땅의 차가운 감촉도 무디어졌다. 바람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수정 구슬을 바라보던 검은 드레스의 여인은 차가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정말 멋진 남자야, 호호호…. 자신의 모든 것을 불태우며 동료들을 지키다니…. 어쩐지 다시 만날 것 같은 생각이 들지 않나요 전하?”
가이라스 국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표정은 하나도 변함이 없었다.
그 여인은 수정 구슬을 문질렀다. 수정 구슬에 비춰지던 광경이 투명함으로 변해갔다. 가이라스 3세는 다시 옥좌로 돌아가 앉았고 여인은 여전히 미소를 띠우며 구슬을 옷장 속에 넣었다.
“후우….”
바이칼은 옥조에서 나오며 상쾌한 듯 한숨을 쉬었다. 그의 주위에 있던 남자 신하가 그에게 큰 수건을 건네주었다. 수건으로 몸의 물기를 닦아낸 바이칼은 간단한 옷을 입으며 욕실을 나섰다. 욕실의 문 앞에는 하얀 수염을 허리 아래까지 기르고 있는 노인이 서 있었다. 바이칼은 노인을 보고 고개를 약간 숙이며 인사를 했다. 노인은 허리를 깊숙이 굽히며 예를 갖추었다.
“바이칼님, 블루 드래곤족 한 명이 알현을 청하고 있습니다.”
바이칼은 귀찮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할아범이 알아서 처리하면 안 되나요? 오랜만에 궁에서 목욕을 해 기분이 상쾌한데 말입니다.”
노인은 허허 웃으며 말했다.
“리오님의 말을 전하러 왔다고 합니다만….”
바이칼은 리오란 이름을 듣자마자 아직도 물기가 남아있는 머리를 마구 긁었다.
“또 그 녀석이야! 그 블루 드래곤은 어디 있소!”
알현실에서는 푸른 갑옷을 입은 한 사나이가 한쪽 무릎을 땅에 굽힌 채 바이칼을 기다리고 있었다. 조금 후 바이칼이 알현실에 들어오자 그는 일어서며 바이칼에게 예를 갖추었다.
“블루 드래곤족 제243연대장 퍼블·아이락입니다. 리오 스나이퍼님의 전갈을 받고 용제님의 알현을 청했습니다. 실례를 용서해주십시오.”
절도 있는 그의 모습을 보고 바이칼은 편히 하라는 손짓을 해 보였다.
“그래, 내용이 뭐냐.”
퍼블은 리오의 말을 그대로 바이칼에게 전해주었다. 바이칼은 턱을 괴고서 그 이야기를 다 들은 후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볼일은 다 끝났나?”
“예!”
“그럼 가봐라. 수고했다.”
퍼블은 경례를 한 후에 뒤로 돌아 알현실을 나섰다. 조금 생각하던 바이칼은 옆에 서있던 노인에게 말했다.
“내가 가져온 수정상은 이상 없죠?”
“예, 바이칼님이 가져오신 그대로 빛이 비춰지는 곳에 보관하고 있습니다.”
바이칼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드래곤 슬레이어를 가져와요. 지상에 내려가 봐야겠어요.”
노인은 여전히 부드러운 미소를 띠우고 바이칼의 명에 따랐다.
“빌어먹을 얼간이 녀석….”
바이칼은 중얼거리며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감각이 되살아나고 있었다. 손끝이 움직였다. 의식도 돌아와 있었다. 리오는 눈을 번쩍 떴다. 얼마만큼 햇빛을 못 보았는지는 몰라도 불빛에 눈이 부셔왔다. 또렷해진 그의 눈에 처음 비춰진 것은 무표정의 키세레였다. 리오는 몸을 일으켰다.
“여기는…?”
클루토와 머셀, 그리고 리카는 리오가 몸을 일으키자 와 하며 리오에게 달려들었다. 리오는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아이들을 다독거려주었다. 아르만도 다행이라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안심하세요, 여기는 드워프족의 제4 마을입니다. 저희가 눈을 떴을 때 제 동료들이 저희들을 여기까지 보호해주었더군요. 그리고 리오님은 하루 만에 의식을 찾으셨답니다. 그리고….”
아르만은 다음 말을 하기 전에 키세레의 눈치를 보았다.
“… 아닙니다. 의식을 찾으셔서 정말 다행입니다.”
클루토는 눈물을 닦으며 기쁨에 겨운 듯 소리쳤다.
“역시 리오는 세상에서 제일 강해요! 아이언 골렘 일곱 마리를 단 혼자서 쓰러뜨리다니 말이에요!”
머셀과 리카도 고개를 끄덕였다. 키세레는 수건으로 손을 닦은 후 조용히 몸을 돌려 방을 나섰다. 리오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키세레의 뒷모습을 잠깐 바라보았다.
“으음, 배가 고픈데 뭐 먹을 것 없나, 아르만?”
아르만은 미소를 지으며 방을 빠져나갔다.
“조금만 기다리세요, 금방 최고급의 요리를 해 드릴 테니까요!”
방을 빠져나간 아르만은 집의 밖에서 키세레가 손을 모으고 기도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녀의 표정은 아까와는 달리 매우 다행스러운 표정이었다. 아르만은 잡다하게 생각을 하며 어디론가 뛰었다.
어느새 리오는 침대에서 일어나 몸을 풀고 있었다. 이곳저곳이 뻑적지근했다. 기가 많이 소모되었을 때 생기는 피로였다.
“리오, 정말로 괜찮아요?”
클루토는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리오를 바라보고 있었다. 의식을 잃고 탈진 상태에 빠져있던 리오가 하루 만에 정상으로 돌아왔다는 건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괜찮다니까. 그보다 너희들은 어떠냐?”
셋은 모두 건강한 모습이었다.
“피곤에 지친 것뿐이에요. 먹고 자니까 회복되더라고요.”
머셀은 양손을 뒤통수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리오는 미소를 지으며 셋을 토닥거렸다.
다음 날, 리오는 마을에서 출발하자고 일행에게 말했다. 그러나 세 명의 아이들이 극구 반대를 했다. 조금이라도 더 휴식을 취해야 장기간을 걸을 수 있다는 주장이었다. 결국 리오도 두 손을 들었고 일행은 하루 더 마을에 머물 수 있었다.
“자, 얘들아. 내가 마을 구경을 시켜줄까?”
셋은 매우 기쁜 표정을 지었다.
“예!”
아르만은 이구동성으로 대답한 아이들을 데리고 여관방을 빠져나갔다. 리오는 혼자서 넓은 여관방을 지키는 꼴이 되었다. 의자에 길게 앉은 리오는 천장을 보면서 한숨을 쉬었다.
“… 심심한데…?”
한참을 천장만 들여다보고 있는 동안 키세레가 방으로 들어왔다.
“얘들아, 뭐하니…. 아!”
키세레는 방 안에 리오 혼자 있는 것을 보고 가만히 서 있었다. 리오는 눈썹을 올리며 그녀를 힐끔 보았다.
“…….”
“시, 실례했어요.”
키세레는 방문을 닫고 다시 나갔다. 리오는 눈을 감았다. 짜증 난다는 표정을 지었다.
“쳇, 빌어먹을.”
키세레는 다시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다. 가슴에 손을 얹었다. 아직도 두근거렸다.
“왜 이러지, 내가?”
키세레는 침대 위에 털썩 쓰러졌다. 엎드린 채 그녀는 눈을 감고 이리저리 생각했다.
`어째서 내가 그런 남자를 간호해주었지….’
키세레는 기억하고 있었다. 힘없이 쓰러져 삶을 포기하고 있던 일행을 보며 안타까운 듯 소리치던 그의 처절한 모습을…. 그리고 리오는 무슨 방법을 썼는지는 몰라도 일행의 생명을 결국에는 구해내었다. 여러 가지 생각이 그의 모습과 겹쳐졌다.
“마음에 안 들어….”
오후가 되자 아르만과 구경을 갔던 아이들이 돌아왔다.
“다녀왔어요!”
명랑하게 인사하고 돌아온 아이들에게 리오는 손을 흔들어주었다. 덤덤히 손만 흔들어 보인 리오에게 리카는 심통이 났는지 들고 있던 사탕을 리오에게 집어 던졌다.
“이봐! 사람은 봐줘야 할 거 아니야!!”
리오는 날아오는 사탕의 손잡이를 잡아 리카에게 다시 돌려주었다.
“힘들다 힘들어…. 그래, 물품은 사 왔니 클루토?”
클루토는 불룩한 배낭을 들어 보였다.
“예, 준비했어요 리오.”
“좋아, 그럼 내일은 반드시 출발한다, 알았지?”
몇 시간 후 저녁 식사를 마친 일행은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오랫동안 자는 것이 나쁠지는 몰라도 여행하는 사람들에겐 더없이 달콤한 피로 회복제였다. 내일 또다시 괴물들이 자신들의 앞을 막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그들은 결코 패하지 않는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어떠한 상황에도 굴하지 않는 사나이가 자신들을 지켜주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