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즈 나이트 – 65화
슈는 이리프의 어머니, 그리고 티퍼의 아버지와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이리프 어머니의 눈에선 눈물이 마르지가 않았다. 지크는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고서 집안을 이리저리 돌아다닐 뿐이었다.
“그애가… 엔션티드 엘프라고요?!”
이리프 어머니는 고개만 끄덕거릴 뿐이었다. 초 마력을 잠재하고 있는 엘프…. 만약에 악의 세력이라면 그보다 더 큰 문제는 없는 존재이다.
“그애에게도 알려주지 않은 내용인데…. 역시 이런 일을 당하게 되는군요. 불쌍한 이리프….”
지크는 더 이상 못 듣겠다는 듯 문을 열고 조용히 나갔다. 별이 반짝이는 하늘을 보며 그는 한숨을 지었다. 옆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뭐냐, 꼬마.”
지크는 주머니에 손을 넣고 돌아섰다. 티퍼가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서 있었다.
“당신도…. 리오와 같군요. 발소리만 들어도 누군지 알다니…. 굉장하네요.”
지크는 티퍼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소년의 어깨에 손을 올려놓았다.
“그 엘프를 좋아했니?”
티퍼는 약간 얼굴을 붉혔으나 자신 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정말 좋아했어요. 누나처럼요….”
지크와 티퍼는 집 옆에 있는 둥근 나무 울타리에 걸터앉았다.
“누나가 있었니?”
“예, 아주 예쁜 누나에요. 상냥하고…, 하지만 어머니께서 돌아가시고 나서 누나 혼자서 살림을 맡게 되었죠.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와 누나는 어떤 일로 싸웠어요. 결국 누나는 옆집에 알고 지내던 형과 어디론가 떠나버렸죠. 아버지께선 백방으로 수소문하셨는데 몇 달 후 돌아온 건 옆집 형의 유골뿐이었어요. 그 후론….”
지크는 티퍼의 얘기를 들으면서 생각에 빠졌다. 누나라….
“지크는 좋아하는 사람 있나요?”
지크는 티퍼를 바라보았다. 그리고선 티퍼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이 녀석, 거기에 대해선 말하지 마.”
티퍼는 머리를 쓰다듬으며 지크를 쳐다보았다.
“왜요! 지크도 물어봤잖아요 뭐. 설마 슈를 좋아하는 건 아니겠죠?”
“물론 아니지, 그렇게 싸움 잘하는 여자는 취미 없어.”
다음 날 아침, 티퍼와 함께 엘프 마을을 떠난 지크는 슈의 얼굴이 그리 밝지 않자 이상하게 생각했다. 잘 자고 일어났을 텐데….
이유는 간단했다. 티퍼의 아버지로부터 가이라스 왕국의 엄청난 일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명령에 의해 저지른 티퍼 아버지의 씻지 못할 죄…. 그 모든 것이 슈의 가슴을 압박해 왔다.
“왜 그래요? 뭔 일 있나요?”
지크는 슈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슈는 괜찮다는 듯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나 지크는 괜찮지 않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고민 있으면 말해요, 이상한 거 아니면 다 들어줄게요.”
슈는 지크의 얼굴을 밀며 고개를 흔들었다.
“아무것도 아니라니까요. 그리고 우리는 지금 저항군에게 가는 거예요. 만약에 그들을 만나게 된다면 사소한 일로 싸우지 말아요. 그들은 매우 거치니까요.”
티퍼의 아버지가 말한 대로 저항군에게 가면 태라트를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것이 슈의 생각이었다.
정오가 가까이 되자 일행은 숲을 빠져나갈 수 있었다. 그들의 눈에 처음 비친 것은 광활한 들판에 지어진 막사와 그 주위에서 어슬렁거리는 군인들이었다. 보초들도 보였다.
“누구냐!”
지크와 슈가 숲에서 나오는 것을 본 한 병사가 창을 들이대며 소리쳤다. 훈련된 병사는 아닌 듯했다. 지크는 손을 꺾으며 병사에게 서서히 다가왔다.
“이, 이 녀석, 멈춰라! 안 그러면 공격한다!”
지크는 피식 웃으며 계속 다가왔다. 병사는 훈련받은 대로 기세 있게 창을 찔러갔다. 그러나 창은 허공을 찌를 뿐이었다. 지크는 창을 타고 병사에게 접근해 병사의 복부를 주먹으로 쳤다. 병사는 허리를 굽히며 쓰러져 땅을 굴렀다. 슈와 티퍼의 눈이 휘둥그레졌고 슈는 인상을 쓰며 지크에게 소리쳤다.
“지크! 도발하지 말라고 했잖아요! 아, 이런…!”
손을 털고 있는 지크의 앞에서 우우 하는 사람들의 함성이 들려왔다. 군장을 한 사람들이 떼로 몰려오고 있었다. 모두 다 다른 복장을 하고 있는 걸로 보아 저항군 독립 부대인 것 같았다.
“뭐야, 이 오합지졸들은…?”
지크는 재미있다는 듯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슈와 티퍼에겐 전혀 재미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들 중에는 드워프족도 보였고 수인(獸人)들도 보였다. 키가 큰 여성이 앞으로 나섰다. 아무래도 이들의 대장 격인 것 같았다.
“뭐지 너희들은? 가이라스의 첩자냐?”
오만한 표정을 지으며 지크들을 쳐다보고 있는 그녀가 아니꼬운 듯 지크는 표정을 찌푸렸다. 슈가 앞으로 나서며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저희들은 말스 왕국에서 온 사람들입니다, 당신들 저항군이시죠?”
키 큰 여성은 고개만 끄덕였다. 슈는 안심이라는 표정을 짓고서 계속 말했다.
“저희는 태라트님을 찾고 있습니다만, 여기 계십니까?”
“태라트님? 어떻게 그분의 본명을 알지! 확실히 첩자다! 잡아라!!”
몇 명의 군인들이 검을 뽑아 들고 슈에게 달려들었다. 그러나 지크를 넘어간 병사는 한 사람도 없었다. 다른 병사들은 동료들이 다시 자신들에게 굴러오는 것을 보고 움찔했다.
“이 녀석들, 바람의 지크님께서 최대한의 예의를 갖춰가며 대했는데 감히 공격을 해? 여기서 모든 걸 끝내고 싶나?”
자존심이 상했는 듯, 여자가 직접 등에 장비된 1.5가론(1.5미터)의 대검을 뽑아 들고 달려들 기세를 취하자 뒤에서 누군가가 그녀를 만류했다.
“저 녀석은 내가 맡겠소!”
거대한 몸집을 가지고 있는 수인이었다. 2가론이 넘는 키를 자랑하고 있었고 거대한 근육질과 황소의 머리는 상대방을 압도했다. 게다가 무기는 해머 플레일이었다.
“란지크, 네가?”
수인―란지크는 고개를 끄덕였다. 믿음직스러운 얼굴이었다.
“저 녀석에게 본때를 보여주겠소, 감히 우리를 오합지졸이라고 하다니! 용서할 수 없지!!”
그가 나서자 군인들 사이에선 환성이 울려 퍼졌다. 꽤나 인기 있는 인물임에 틀림없었다. 곧 군인들은 멀리 퍼지기 시작했고 초승달처럼 열을 세웠다. 경기장과도 같았다. 중앙에 란지크와 지크가 서서 서로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병사 하나가 어디서 구해왔는지 호른을 가져와 불 자세를 취했다. 그것을 본 슈는 예전에 왕국에서 치러졌던 검투기 대회를 연상시켰다.
뿌우―!
“후아앗!”
란지크는 무시무시한 스피드로 해머 프레일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풀들이 힘에 못 이겨 뽑혀 나갔다. 군인들 사이에선 와 하는 환성이 터져 나왔다.
“피하기만 할 거냐 빨간 옷!”
란지크는 소리치며 지크의 잔상을 정확히 강타했다. 지크는 란지크의 뒤로 돌아가 그의 다리를 걸었다. 란지크는 비틀했으나 쓰러지진 않았다.
“꽤 몸이 좋군, 황소 머리!”
지크는 본격적으로 공격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오른손 스트레이트가 란지크의 복부 갑옷을 강타했다. 군인들은 손이 부서졌을 거라며 웃었으나 란지크의 복부 갑옷이 산산조각 나자 웃음을 멈췄다.
`주석 합금 갑옷인데…!!’
보통의 판금 갑옷보다 훨씬 두껍고 단단한 주석 갑옷은 어떠한 화살의 공격에서도 주인의 생명을 지켜주는 방어력을 소유하고 있었다. 창도 부러져 나갈 정도의 갑옷을 맨손으로 뚫는다는 건 상상도 못 하는 일이었다.
“이 기회에 새로 하나 장만하시지!”
“으으윽?!”
란지크의 눈앞에 무수한 주먹들이 나타났고 란지크는 몸을 움츠렸다. 복부에 지크의 피니시 블로우가 작렬하자 란지크의 갑옷은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뒤로 날아가 땅을 구른 란지크는 프레일을 다시 휘둘러 지크의 공격을 막으려 했다.
“이 무기도 갈아치우시는 게 어떤가!”
지크는 날아오는 프레일에 정면으로 권격을 가했다. 프레일의 머리 부분이 박살 나며 날아가 버렸고 란지크는 전투 의사를 완전히 잃게 되었다. 지크는 크게 웃으며 군인들, 키 큰 여성을 도발하기 시작했다.
“이 정도로 가이라스 왕국을 뒤엎어 보겠다고? 하, 웃기지 마라!”
모든 군인들이 손을 부르르 떨었으나 앞으로 자신 있게 나서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무쇠로 된 프레일을 맨손으로 부수는 것을 보고 나설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내가 나간다!”
사막의 전사 복장을 한 검은 얼굴의 사나이였다. 매우 동작이 재빨라 저항군에서도 선봉장을 맡고 있는 사람이었다. 호른 소리가 들리고 그의 날카로운 공격이 시작되는 듯했으나 지크의 털끝도 건드리지 못했다.
“이 자식!!”
화가 머리끝까지 난 그 사나이는 무서운 얼굴로 검을 휘둘렀다. 그러나 자르는 건 지크의 잔상뿐이었다.
“핫―!”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그 사나이의 귀에 들려왔다. ―당했다!
사나이는 곧바로 몸을 틀었다. 머리에 쓰고 있던 터번이 반으로 갈라졌다. 곱슬곱슬한 사나이의 머리카락이 나타났다. 여지껏 느껴보지 못했던 빠른 공격이었다.
지크는 어느새 사나이의 뒤로 돌아가 있었다. 만약 실전이었다면 그 사나이의 목은 날아가 있었을 것이다.
“계속할 건가 아저씨?”
무명도에 손을 가져간 채 지크가 말했다. 사나이는 검을 거두며 두 손을 모아 지크에게 예를 표했다.
“내가 졌소, 후후후….”
군인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돌격대장까지 패했으니 남은 건 부대장인 여자뿐이었다. 생각보다 지크가 강해서인지 그 여자는 선뜻 나서지 못하고 있었다. 지크는 팔짱을 끼고서 턱으로 그 여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자, 남은 건 너 하나뿐인 것 같은데…. 빨리 끝내자고, 난 성격이 급해서 말이야.”
원래 약간 붉은 피부를 하고 있던 그녀였지만 지크의 도발에 그녀의 피부는 시뻘개져 있었다. 등에 장비하고 있던 검을 뽑아 들며 그녀는 앞으로 나섰다.
“정식 대결이다, 난 바이나·프렌시카!”
지크는 자세를 취하며 묵묵히 그녀를 노려보았다. 바이나는 드디어 화가 터졌는 듯 주먹을 쥐고 소리치기 시작했다.
“정식이라고 했잖아! 너도 이름을 밝혀!”
여전히 자세를 취한 채 지크는 명확히 자기의 이름을 밝혔다. 약간 장난기 있는 미소도 띠우고 있었다.
“지크·스나이퍼, 됐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