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즈 나이트 – 667화
“리오 숙부님. 대련을 부탁드립니다.”
“… 뭐.”
플루소의 갑작스러운 부탁에, 한참 TV로 화이트 나이트의 영상 자료를 감상하고 있던 리오는 흠칫 놀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플루소의 눈은 진지하기만 했다.
“… 왜 이 사람이나 저 사람이나 나만 보면 1 ON 1을 하자니, 대련을 하자니 이러는 거지…. 뭐, 좋아. 이유나 들어보지.”
“예. 아버님께서 지금보다 더 강해지고 싶다면 리오 숙부님께 한 수 가르침을 받으라는 말씀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 나 말고 지크는 안 될까.”
리오는 힘겹다는 표정을 지으며 플루소에게 부탁하듯 말했으나, 플루소의 결심은 아주 단단했다. 플루소는 단호히 고개를 저으며 리오에게 말했다.
“… 부탁드립니다 숙부님. 그리고, 숙부님께서 어느 정도 강한 분이신지 제 눈으로 확인하고 싶습니다. 제발 부탁드립니다.”
플루소의 간절한 요청에, 한참 망설이던 리오는 잠시 시계를 바라본 뒤 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TV를 끄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 좋아. 단, 지금 시간이 오후 한 시 반… 미안하지만 내가 오후 세 시 반까지는 바이칼에게 가 봐야 하니 세 시까지만 하도록 하지. 괜찮겠어?”
“예! 영광입니다!”
플루소는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하며 감사를 표했고, 리오는 망토와 검을 챙겨 플루소와 함께 집 밖으로 나섰다. 마침, 옆집(세이아의 집)에 잠시 머물고 있는 리진 역시 집 밖으로 나왔고 플루소와 함께 나오는 리오의 모습을 본 리진은 리오에게 손을 흔들며 인사를 했다.
“어머, 리오 씨! 조카분하고 어딜 가세요?”
“아, 리진양. 오래간만이군요. 조카가 부탁한 일이 있어서 제궁 안 훈련장으로 가는 중입니다. 리진양은 어딜 가시죠?”
“우웅… 중동 지방의 수비 부대들에게 물자를 보급하라는 지시가 있어서 지금 부두로 가는 중이에요.”
“… 그렇군요. 그런데, 설마 혼자 보급부대의 호위를 맡으신 건….”
리오의 말을 들은 리진은 곧 곤란하다는 미소를 지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 헤헤…. 사실 좀 늦었거든요. 늦잠을 자느라…. 마키랑 티베가 전화로 절 깨워줘서 지금 부랴부랴 가는 중이에요.”
“저런…. 아, 부두까진 저희들과 방향이 같으니 얘기도 나눌 겸 같이 가시겠습니까? 요즘 통 리진양을 뵙질 못해서 심심하던 참이었거든요.”
“어머, 정말요? 저야 당연히 거절할 이유가 없죠, 호호호홋….”
………………….. . . . . .
“저어… 숙부님께선 왜 모든 여자분들께 그렇게 잘 해주십니까?”
리진을 부두까지 바래다주고 제궁으로 향하는 길에, 플루소는 넌지시 리오에게 그런 질문을 던졌고, 리오는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플루소를 바라보았다.
“음? 무슨 뜻이지?”
“아, 아뇨. 예전에 포로 신분이었던 저에게도 정말 잘 해주셨고… 지금도 그러시지만 말입니다. 그리고 챠오, 사이키 중위님께도 잘 해주시고, 티베, 마키 소위님께도 잘 해주시고, 리디아 공주님께도 잘 해주시고, 세이아, 라이아님께도 잘 해주시고, 심지어는 넬과 데스 발키리들에게도 잘 해주시고…. 이유를 듣고 싶습니다 숙부님.”
플루소가 나열한 여자들의 이름을 한참 듣고 있던 리오는 자신이 그 정도였나 생각하며 피식 미소를 지었다. 그러다가, 다시 플루소를 바라보며 말하기 시작했다.
“… 플루소는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플루소가 나열한 사람들에겐 공통점이 있지. 물론 여자라는 것도 포함되지만, 그 사람들은 모두 나와 친한 사람들이야. 친한 사람들에게 잘 해주는 것은 이상한 것이 아니지. 남녀 관계이긴 하지만 잘 해준다 해서 이상하게 생각되어질 이유는 없다고 생각해. 그리고 난 그 이상의 일(?)을 하진 않았으니까. 이해해 줄 수 있겠지?”
“… 예.”
리오의 대답을 들은 플루소는 가만히 생각해 보았다. 아는 사이라 해도 부부가 아니면 남녀칠세부동석의 철칙이 지켜져야만 하는 동룡족의 사상과, 아는 사이라면 문제 없이 대화를 나누고 친하게 지내는 서룡족 측의 사상은 동룡족인 자신이 이해하기엔 너무도 심오한 것이었다. 그렇게 고민하면서 걷는 플루소의 모습을 본 리오는 플루소의 어깨를 두드리며 그녀에게 말했다.
“… 무엇이든지 과하거나 적으면 좋지 않지. 이것은 예절이나 사상도 마찬가지야. 남녀 관계라 해서 부부가 아니면 같이 앉지도 못하게 하는 것이나, 남녀가 친하게 지내는 것이 너무 과해 만난 지 하루도 안 돼서 같은 방을 쓰는 것은 좋지 않지. 양쪽의 사상 자체는 나쁘지 않지만… 과하지 않으면 더 좋겠지. 그리고 그것을 조절하는 것은 양 사상권에 든 사람들이 해야 할 일이야. 플루소는 ‘사상권’을 옮긴 사람이니 이젠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해.”
“… 그렇군요.”
리오의 얘기를 들은 플루소는 말없이 리오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한참을 그렇게 바라보던 그녀는 빙긋 웃으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 어째서 다른 여자들이 숙부님을 따르는지 이유를 조금이나마 알 수 있을 것 같군. 조금이나마….’
조금 후, 둘은 제궁 안에 마련된 훈련장에 도착했고 그곳에서 마침 한참 수련을 하고 있는 슈렌을 만날 수 있었다. 플루소에게서 리오와 그녀가 대련한다는 말을 들은 슈렌은 그룬가르드를 플루소에게 넘겨주며 말했다.
“… 네 원래 무기인 삼절곤으로는 리오와 대련하기 힘들 테니 잠시 이것을 쓰도록.”
“예? 하지만 아버님. 전 삼절곤만을 써도 충분하다 생각하는데….”
“… 리오가 나와 같은 수준이라 생각하진 말아라. 그룬가르드를 쓰라는 이유는 보통의 무기로는 리오의 공격을 받아내지 못하기 때문. 그럼 지켜보겠다.”
그룬가르드를 넘겨준 슈렌은 잠시 쉬려는 듯 다른 사람들과 함께 의자에 앉아 대련장 위에 있는 리오와 플루소를 바라보았다. 플루소는 하는 수 없이 그룬가르드를 싼 헝겊을 풀었고, 리오는 미리 꺼낸 디바이너로 자신의 어깨를 툭툭 치며 플루소에게 물었다.
“좋아, 준비는 됐나 플루소.”
“… 예. 그럼, 부탁드립니다 리오 숙부님!”
시작 신호가 떨어지기 무섭게, 플루소는 그룬가르드를 앞세우며 리오에게 돌진하기 시작했다. 선제공격은 그녀의 특기이자 강점이어서 슈렌조차 보통 상태로는 그녀의 선제공격을 막거나 피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그녀의 공격은 강하고 빨랐다. 리오와의 거리를 순식간에 좁힌 플루소는 리오의 가슴팍을 향해 찌르기 공격을 날리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그 순간 플루소는 그룬가르드를 뒤로 뺐고 다시 리오와의 거리를 벌린 뒤 정신을 가다듬었다. 하지만, 리오는 그 자리에 서서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고 있었다. 그저 디바이너를 어깨에 걸친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 뭐지? 마치 벽에 부딪힌 것 같은 이 느낌은…? 틈이 보이지 않아…!!’
플루소가 잔뜩 긴장한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자, 리오는 곧바로 미안하다는 듯 머리를 긁적이며 플루소에게 말했다.
“음? 아아, 미안. 실제 상황으로 착각해 버렸어. 다시 하지.”
리오는 빙긋 웃으며 자세를 바꾸었으나, 플루소는 여전히 긴장하고 있었다. 그녀는 지금에야 쥬빌란이 왜 리오만 보면 피하라는 지시를 각 동룡족 장군들에게 내렸는지 알 수 있었다.
‘무기도 맞댄 일이 없는데… 이런 경험은 처음이야. 리오 숙부님께서 한 달 반 전만 해도 나의 적이었다니…!’
“뭐 하나 플루소. 조금 있다가 바이칼을 만나러 가야 하니 신경 좀 써 줘.”
“아, 죄송합니다 숙부님.”
리오의 재촉을 들은 플루소는 다시금 리오에게 달려들기 시작했고, 리오 역시 이번엔 앞으로 전진하기 시작했다.
“하앗–!”
리오의 일격이 전광석화처럼 플루소의 옆을 노리고 들어왔고, 생각보다 느린 공격이다 생각하며 플루소는 여유 있게 그 공격을 받아내었다.
파아앙–!!!!
“으윽!?”
공격을 받아낸 순간, 플루소는 옆으로 주욱 밀려나 버렸고 대련장 밖으로 튕겨져 나가는 것을 겨우 멈춘 플루소는 부들부들 떨리는 자신의 손을 바라보며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자신의 눈에 보일 정도로 상당히 느린 공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공격 한 방에 실린 파워는 그녀가 지금껏 느껴보지 못했던 강렬한 것이었다.
그러나, 플루소는 모르고 있는 사실이 있었다. 공격 자세는 물론 플루소가 볼 수 있을 정도로 느린 것이었지만, 리오가 타점과 거의 밀착하기 직전에 공격 속도를 급가속했다는 사실은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 중 슈렌 말고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아, 이런…. 손이 저릴 정도로 했다니, 나도 참…. 괜찮아 플루소? 더 할 수 있겠어?”
“… 아, 아닙니다. 감사합니다 리오 숙부님. 다음에 다시 부탁드리겠습니다.”
리오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상태를 물어오자, 플루소는 허리를 굽혀 리오에게 감사를 표한 뒤 더 이상의 대련을 사양했고, 리오는 고개를 끄덕이며 디바이너를 거두었다.
“좋아, 그럼 다음에 다시….”
“리오님! 큰일입니다!!”
그때, 제1 전룡단 단장 릭이 훈련장 안으로 급히 들어와 리오를 찾았고, 리오는 순간 표정을 굳히며 릭에게 물었다.
“무슨 일인가 릭?”
리오의 물음에, 릭은 이마에 흐르는 땀이 코 끝에 맺히는 것도 무시한 채 리오에게 보고를 하기 시작했다.
“화이트 나이트입니다!! 화이트 나이트가 중동 지역에 보급할 물자를 싣고 가던 보급부대에 접근해서…!!”
“뭐라고!? 그럼 보급부대를 습격했단 말인가!!!”
“아, 습격당한 것은 맞지만 습격한 건 화이트 나이트가 아닙니다. 동룡족 기동부대의 습격으로 교전을 벌이는 중에, 화이트 나이트가 나타나서…!!”
“…!?”
※※※
한참 불꽃을 튀기던 전장은 갑자기 나타난 한 존재에 의해 침묵의 도가니로 변했다. 격전을 벌이던 마키, 티베, 그리고 리진은 자신들의 앞에 나타난 순백색의 웨드, 화이트 나이트의 위용에 숨이 멎을 것만 같았다.
“… 티, 티베… 저게 바로 그 괴물 웨드, ‘백야’야?”
“그런 것 같은데… 왜 아무런 반응도 나타나지 않지? 생명 반응이 없어. 내 웨드가 잘못된 건가? 마키는 어때?”
“… 기도 느껴지지 않아. 그냥 기계 덩어리 같아 보여. 하지만… 뭔가 강력해.”
웨드 부대를 지휘하던 셋은 아직도 팔짱을 낀 채 공중에 두둥실 떠 있는 화이트 나이트가 움직이기만을 기다렸다. 화이트 나이트가 움직이기 시작한 것은, 동룡족 기동부대가 구축함에서 중형 기동 병기 ‘촌정’을 꺼냄과 거의 동시였다.
“….”
하반신이 잘려나간 신상처럼 생긴 촌정은 곧 어깨와 가슴 부위에서 대량의 미사일을 쏟아내기 시작했고 그 미사일들이 자신들을 향해 날아오자 리진 등은 급히 라이플을 잡으며 반격할 자세를 취했으나 그것보다는 화이트 나이트의 등에 장비된 대형 라이플이 더 빨랐다. 라이플 중 하나를 옆구리에 낀 화이트 나이트는 즉시 라이플의 방아쇠를 당겼고, 광선이 발사됨과 함께 리진들은 광선의 위력에 상응하는 엄청난 반동을 몸으로 받아야만 했다.
“우, 우아악–!!!”
힘없이 뒤로 밀려나간 리진 등과는 달리 대형 라이플을 이용해 미사일들을 소거한 화이트 나이트는 라이플을 거둔 뒤 검을 뽑고 동룡족 기동부대를 향해 빠른 속도로 돌진하기 시작했다. 그런 화이트 나이트의 모습을 보던 리진, 마키, 티베 셋은 마치 환상을 보듯, 믿을 수 없다는 얼굴을 한 채 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 리오 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