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즈 나이트 – 678화
화이트 나이트는 릭의 안내를 받아 바이칼이 있을 알현실로 가는 중이었다. 그를 안내하면서도 릭은 얘기를 걸어볼까 말까 망설여야만 했다. 인간의 마음을 지닌 기계…. 사실 드래고니스의 과학자들도 인간에 가까운 인공지능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으나 지금까지 아무도 완성에 성공하지 못했고 수백 년 전부터 개발을 포기했었다.
‘… 그래, 시에라 꼬마도 인조 생물체니 이상할 건 없겠지.’
그렇게 생각하는 동안, 릭과 화이트 나이트는 알현실 앞에 섰고 알현실의 문에 마법이 걸려있지 않은 것을 확인한 그는 문을 열고 들어서서 옥좌에 앉아 있는 바이칼에게 허리를 굽히며 말했다.
“마마, 화이트 나이트를 모셔왔습니다.”
“… 들라 이르라.”
바이칼은 힘 없는 목소리로 릭에게 말했고, 릭은 곧바로 화이트 나이트를 알현실 안쪽에 들여보냈다.
“드십시오. 마마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 고맙소.」
화이트 나이트는 키 186cm의 릭보다 머리 둘은 더 커 보이는 육중한 몸체를 움직이며 알현실 안으로 들어갔고, 알현실의 문을 닫은 릭은 말없이 화이트 나이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
한편, 바이칼은 화이트 나이트가 걸어서 자신에게 다가오는 모습을 경악에 찬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걸음걸이, 자세, 그 모든 것이 자신이 알고 있는 누군가와 똑같았기 때문이었다. 바이칼의 가까이에 선 화이트 나이트는 곧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그에게 예를 올렸다.
「화이트 나이트, 정식 명칭 ‘WN-ΩType White Night’, 서룡족의 용제께 인사를 올립니다.」
“…….”
바이칼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알현실의 끝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릭은 바이칼이, 자신들의 제왕이 울기 직전의 사춘기 소녀와 같은 얼굴로 화이트 나이트를 바라보고 있음에 대경실색한 듯 입을 벌리고 역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리오–!!”
순간, 바이칼은 옥좌에서 일어나 자신의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화이트 나이트를 양 팔로 안았고, 차갑디 차가운 장갑판에 이마를 댄 채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이 바보 같은 녀석아, 네가 이렇게 변장하고 왔다 해서 내가 못 알아볼 것 같아!! 어서 광대 같은 차림은 벗어버려!!!!”
그러나, 화이트 나이트는 말 대신 바이칼을 다시 옥좌에 앉혀 놓았고, 그의 앞에 똑바로 선 채 나지막이 말했다.
「… 죄송하오나, 이것을 보십시오 마마.」
“…?!”
순간, 화이트 나이트의 얼굴 장갑이 부위별로 열리기 시작했고, 기계적인 내부 구조가 드러난 머리 부위도 곧바로 분해되며 그 안에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바이칼에게 증명해 주었다. 바이칼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고, 화이트 나이트는 다시 두부를 원래 모습으로 되돌린 뒤 바이칼의 앞에 다시 무릎을 꿇으며 말했다.
「… 가즈 나이트, 리오·스나이퍼님을 상당히 소중하게 생각하신 듯하군요. 하지만 전 리오님이 아닙니다. 그저 인간의 마음에 가까운 인공지능을 가진 기계일 뿐입니다. 죄송합니다 마마.」
“… 쳇.”
바이칼은 손으로 눈가를 가린 채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화이트 나이트와 릭은 볼 수 있었다. 바이칼의 손 밑으로 흘러내리는 그의 눈물을….
“… 그럼 용건이나 말하고 빨리 사라져. 얘기 오래 들어줄 기분이 아니니까.”
「… 예. 알겠습니다.」
7장 <우리들에게 남겨준 유산>
『다시 살아나고 싶지 않나.』
“… 더 이상 ‘그’를 슬프게 하고 싶지 않습니다. 저 때문에 그는 수백 년간 슬픔 속에서 살아야만 했습니다. 제가 다시 살아난다면 그는 절 찾아낼 테고, 그는 또다시 슬퍼할 테지요.”
『… 쿠쿠쿡, 자신의 감정에 솔직해지거라. 신 앞에서 위선의 가면을 쓴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지….』
“…?!”
『… ‘그’가 아직도 널 사랑하고 있다 생각하나. 천만에, 그 녀석도 인간…. 수백 년간 너 하나를 위해 산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 녀석도 지겨울 대로 지겹겠지. 만났다 생각하면 곧바로 죽어버리는 그런 여자를 계속 사랑할 이유는 아무에게도 없다. 자, 이걸 보라. 그 녀석의 행복한 모습을…. 녀석의 곁엔 이제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새 여자가 생겨 있다. 신이지. 아름답고 상냥한 여신이지…. 그 여신이라면 영원히 그 녀석의 곁에 있을 수 있다. 녀석도 그걸 알고 있지….』
“… 다행이군요. 그가 행복할 수 있다면 전….”
『또 위선!! … 쿠쿠쿡… 억울하지 않나? 마음속 깊이 뜨거운 무언가가 샘솟고 있지 않나? 너도 솔직히 녀석을 만날 때마다 죽고 싶어서 죽는 건 아니잖나. 다 녀석의 쓸데없는 일에 휘말려서 죽는 것뿐이잖나! 난 널 이해한다…. 그 녀석이 만난 여자 중에서 너만큼 녀석을 생각해 주는 여자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녀석은 이제 너라는 존재를 지우려고 한다. 억울하지 않나! 수백 년간 수십 번씩 죽음의 고통을 당했는데도, 심지어는 목을 베이기도 했는데도 녀석은 널 잊으려 하고 있다….』
“….”
『… 쿠쿡, 이제야 위선을 버리려는가. 그래, 그거다…. 넌 지금 실망하고 있어…. 그리고 녀석은 널 배신했다…. 넌 이대로 ‘절망’의 나락에 빠져 추악한 미물로 다시 태어날 수밖에 없다…. 하하하하하하하핫…!!!』
“… 아, 아니에요! 리오 씬, 리오 씬 절 잊지 않으셨을 거예요! 당신의 말을 믿지 않습니다!!”
『호오… 그래? 신이 말하는 건데 믿지 않겠다….』
“…!”
『… 난 네가 너무나 가엽다. 오직 녀석 하나를 믿고 전생과 죽음의 고통을 반복해 온 네가 가련하도다…. 자아, 어떠냐. 녀석을 ‘영원히’ 너의 곁에 두고 싶지 않은가?』
“… 여, 영원히…?”
『그래, 영원히! 마치 애완동물처럼 네 곁에만 녀석을 두는 것이다!! 네가 지금 가진 힘으로, ‘절망’의 힘으로 말이다!! 쿠쿡… 보고 싶지 않으냐? 너의 녀석을 영원히 곁에 두려 했던 그 추악한 여신의 표정을! 녀석이 네 곁에만 있게 됐을 때의 표정을 말이다…. 자아, 내 손을 잡아라. 너에게 힘을 주겠다….』
“… 당신은… 누구십니까?”
『… ‘아롤’, 인간의 본성인 ‘악’의 최고위 신…! 으하하하하하하하핫…!!!!』
……………………. . . . . . . . . .
아란은 조용히 눈을 떴다. 그리고, 소파 옆에 세워 둔 자신의 검, 디스파이어를 뽑아 들고 미소를 띄운 채 가만히 그 핏빛의 날을 바라보았다. 아란은 곧 혀끝으로 디스파이어의 날을 핥았고, 검의 자루에 얼굴을 부비며 나지막이 웃기 시작했다.
“… 후훗… 하하하핫….”
아란은 다시금 자신의 손으로 앞머리를 약간 거칠게 누르며 히스테릭하게 머리를 흔들기 시작했다.
마치 무언가를 잊고 싶은 사람처럼….
※※※
바이칼과 장로, 가즈 나이트들과 전룡단 단장들이 모인 자리에서, 화이트 나이트는 대회 의실 앞에 설치된 대형 스크린에 자신의 코드를 연결시킨 뒤 자료를 전송하기 시작했다. 자료 전송이 끝난 뒤, 모니터엔 거대한 컴퓨터의 설계도가 떠올랐고 화이트 나이트는 기계음이 섞인, 하지만 차갑진 않은 목소리로 모두에게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불과 몇 개월 전까지 인류 최대의 적이라 불리우던, ‘MOTHER’의 본모습입니다.」
“무어라?! 거짓말하지 마 깡통!!! 인류가 20년 가까이 싸워온 최대의 적이 그딴 대형 컴퓨터란 말이야!!! 어디서 주워온 공상과학 소설 읽지 말고 똑바로 말해!!”
순간, 지크가 몸을 벌떡 일으키며 화이트 나이트를 향해 소리치기 시작했고, 상당히 흥분한 상태의 지크를 사바신과 레디가 말리는 동안 화이트 나이트는 계속 설명을 이어 나갔다.
「20세기 말에서 21세기 초, 이 세계의 인류 최대의 문제는 환경오염이었습니다. 물론 전쟁이나 기아가 없는 잘 사는 나라만의 고민이기도 했지만 말입니다. 그 잘 사는 나라들의 수뇌들은 수십 년 전 한자리에 모였고, 전 세계의 환경오염을 총괄적으로 통제하고 환경을 되살릴 수 있는 초대형 컴퓨터를 몇 년간 설계, 제작하여 사람들의 축하 속에서 그 컴퓨터를 완성시켰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그때부터가 시작이었습니다.」
스크린의 화면은 곧바로 바뀌었고, 수천 개의 자료가 나열되는 모습을 보며 화이트 나이트는 설명을 계속했다.
「이 대형 인공지능 컴퓨터의 궁극적인 목적은 환경오염의 원인을 분석, 색출하여 그것을 제거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컴퓨터는 수일간에 걸쳐 환경오염의 원인을 분석했고, 자신을 창조한 과학자들마저 깜짝 놀랄 정도의 결과를 찾아내는 데 성공했습니다. 최종적인, 최고의 환경파괴 주범…. 그것은 바로 이 세계에 살고 있는 사람들, 즉 인류였습니다.」
“…!!”
회의실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경악에 휩싸여갔다. 제일 충격을 받은 사람은 누구도 아닌 지크였고, 바이칼은 손으로 입가를 가린 채 눈을 감으며 희미하게 중얼거렸다.
“… 역시, 인간들이란….”
「그 대형 컴퓨터는 곧 자신을 멈추려고 하는 주위의 인간을 먼저 제거했고, 단 몇 명만이 겨우 목숨을 건져 도망친 상태에서 컴퓨터는 곧 자신이 찾아낸 원인을 제거하는 작업에 들어갔습니다. 환경을 파괴하지 않는, 단지 환경파괴의 주범을 제거하도록 만들어진 새로운 생명체를 탄생시키기 시작했고 그 생명체들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생식 능력까지 갖추며 점점 강해져만 갔습니다. 십 년 만에 전 세계의 지하로 퍼져 나간 그 인공 생명체들은 어느 순간 내려진 그 컴퓨터의 지령에 따라 세상 밖으로 나와 환경파괴의 주범을 제거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생명체의 발생 원인을 모르는 사람들은 그들을 ‘바이오 버그’라 부르기 시작했고, 바이오 버그들의 탄생 배경을 알고 있는 이 세계 최고 권력자들은 UN이라는 연합의 산하에 인간의 능력을 최고 수준으로 끌어 올린 사람들을 모으기 시작했습니다. 바이오 버그를 없앨 수 있는 사람들의 부대, 그것이 바로 BSP… 입니다. 인류와, 인류가 남긴 유산의 전쟁은 지금까지 계속 악순환을 반복하고 있는 것입니다.」
“… 말도… 안 돼…!”
회의실의 구석에서 화이트 나이트의 얘기를 듣고 있던 리진은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채 손으로 입을 가리며 그렇게 중얼거렸고, 다른 BSP 멤버들 역시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감정을 억제하기 위해 노력했다. 화이트 나이트의 얘기는 계속 진행되었다.
「1년 전, 이 세계는 단 몇 명만이 알고 있는 이상한 사건에 빠져들었습니다. 차원 근접에 의한 우라늄의 강제 산화 현상, 블랙 프라임의 등장…. 그러나 그 사건이 일어나는 동안 바이오 버그는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차원 근접 현상이 사라진 직후 다시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일명 MOTHER라 불리우는 그 컴퓨터의 동력원인 원자로가 원자 에너지 강제 산화 현상에 의해 동작을 정지했고, MOTHER 역시 동작을 멈추어 버린 것이었습니다. 그런 연유로, MOTHER에게 행동 지시를 받지 못한 바이오 버그들은 지하 속에서 아무런 행동 없이 수면만을 취했습니다.」
아무 말 없이 굳은 표정을 지은 채 팔짱을 끼고 있던 지크는 팔걸이를 손바닥으로 툭 치며 한숨과 함께 중얼거렸다.
“… 빌어먹을, 그랬었군…!!”
「생물적인 에너지 보급, 즉 먹이를 먹지 못한 바이오 버그들의 상당수는 지하에서 그대로 굶어 죽었고, 남아있는 일부만이 원자력 에너지원의 재생과 함께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졌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의문점이 있습니다. 전원이 오랫동안 꺼져 있어 바이오 버그에 대한 모든 데이터가 지워져 버린 MOTHER를 누가 다시 재생시켰느냐 입니다.」
화이트 나이트의 말이 끝나자마자, 지크는 모든 수수께끼를 푼 사람처럼 씨익 미소를 지으며 다시금 중얼거렸다.
“… FATHER, 닥터 와카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