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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즈 나이트 – 77화


야룬다 요새의 사령실에선 두 명의 사나이가 술병을 기울이고 있었다. 황색의 수염을 더부룩하게 기른 건장한 체구의 중년 사나이와 회색빛의 얼굴을 가진 날카로운 눈매의 젊은이였다. 중년의 사나이는 이 요새의 사령관인 바레로그 돈 페리거, 얼굴에 새겨진 무수한 상처자국이 그의 생활을 말해주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앞의 젊은이는 바이론·필브라이드. 몇 일전에 나타나 가이라스 정규군을 살려낸 장본인이었다. 일명 가즈 나이트….

“바이론님, 역시 당신의 힘은 굉장하더군요. 그 저항군 머저리 1200여 명을 단숨에 쓸어버릴 줄은, 후후후… 정말 몰랐소이다.”

바이론의 표정은 바레로그의 아첨에도 불구하고 냉정함을 잃지 않았다. 아니, 냉혹함이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회색의 피부와 맞게 그의 표정은 싸늘했다.

“왕비님께서 직접 보내시는 원군이라고 해서 수만의 군사일 줄 알았는데, 원군은 단 한 명의 새파란 젊은이. 그때 전 절망적이었으나 당신이 성벽 위에 올라서서 밀려오는 저항군을 없애버릴 때는 왕비님의 깊은 뜻을 알았습니다. 역시 현명한 국모이셨습니다. 후하하하―!!”

“시끄럽군, 사령관.”

바레로그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자신을 보고 있는 바이론의 눈이 너무나도 싸늘해서였다. 자칫 잘못하면 자신의 목도 날아갈 것 같았다. 바이론은 다시 말문을 열었다.

“술이나 계속 들라구….”

그러나 술이 제대로 넘어갈 것 같지 않았다. 그는 약간 남은 술을 비운 후 자리에서 일어섰다. 바이론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자신의 술잔을 다시 채우기 시작했다.


“피해 인원은…?”

침통한 표정의 한 청년이 옆에 서있는 부관에게 물었다. 부관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자신의 앞에 적혀있는 숫자를 자신도 읽고 싶지가 않아서였다.

“빨리 대답해!!”

청년은 탁자를 주먹으로 내려치며 부관에게 소리쳤다. 부관은 천천히 피해 상황이 적힌 종이를 내려 읽기 시작했다.

“보고입니다… 전 인원 12400여 명 중 1159명이 가즈 나이트의 프레아 마법에 의해서 완전 사살되었고, 33명이 후퇴 중 적군의 화살에 사망했습니다. 그리고 실종자는 7명입니다. 현재 총 인원은 10400여 명입니다. 물자는 아직 충분하며….”

“그만, 됐네. 가서 자네도 쉬게.”

청년의 표정은 변해있질 않았다. 부관은 우두커니 서서 그 청년을 근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로이슨님….”

“괜찮다니까. 어서 쉬게나, 내일은 더 힘들 거야.”

청년은 웃으며 부관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억지 웃음이라는 게 얼굴에 쓰여 있었다.

“그럼, 안녕히 주무십시오 로이슨님.”

부관이 나간 후 태라트는 침상에 누워 눈을 감아보았다. 오늘 오후에 자신의 앞에서 펼쳐졌던 대 학살의 장면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성벽 위의 한 사나이, 그리고 그 사나이의 손으로부터 뿜어져 나온 진홍색의 빛, 대폭발…. 태라트는 다시 일어서며 양손으로 머리를 감쌌다.

“어떻게… 가즈 나이트가 어떻게 우리를 공격할 수 있는 거지!!”

그가 어렸을 때 증조부, 말스 1세로부터 들어왔던 가즈 나이트의 모습과, 자신이 오늘 직접 본 가즈 나이트의 모습은 너무나도 틀렸다. 얼음보다 차가운 냉혹함… 그것뿐이었다.

“이제 어쩌지? 가즈 나이트와 대결할 수 있는 건 드래곤 로드뿐인데, 내 부하들이나 난 둘 중에 아무것도 아니란 말이야!”

그렇게 말하면서도 태라트의 눈빛은 변함이 없었다. 〔포기〕란 단어는 적어도 없었다.

“…무슨 방법이 있을 거야, 반드시! 난 지금 옳은 일을 하고 있어!!”

그는 뜬눈으로 그날 밤을 보냈다. 내일 기마대가 도착하면 전달해줄 작전을 짠 것이었다. 태라트란 말스 왕국의 태자는 바로 이런 남자였다.


“…으음….”

바이나는 마차가 갑자기 덜컹거리는 바람에 잠에서 깨어날 수 있었다. 어젯밤 의무병이 준 안정제를 먹고 겨우 잔 것이 지금까지였다. 티퍼는 이불을 뒤집어쓴 채 아직도 곤히 자고 있었다. 옆에는 어젯밤 의무병에게 부탁해놓은 자신의 갈아입을 옷들이 준비된 상태였다.

“설마, 그 얼간이가 또 들어오지는 않겠지?”

상의를 갈아입던 중 티퍼가 일어섰다. 윗옷을 완전히 벗은 상태의 바이나는 급한 김에 이불로 몸을 가렸다. 아이니까 보지 말라고 말해도 문제는 없을 거라 바이나는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웅…. 일어났어 빨간 누나? 너무 일찍 일어난 것 같은데….”

이불을 걷고 나타난 건 상상하지도 못했던 결과여서 바이나는 입을 다물 수 없었다.

“티, 티퍼는…?”

지크는 눈을 비비면서 말했다.

“응, 꼬마는 어제 자기 잠자리에 가서 자겠다며 나갔어. 지나가던 길에 의무병이 옷 꾸러미를 가지고 가길래 대신 내가 네 옆에 놓아두었지. 그다음은 졸려서 기억이 안 나. 하아암∼.”

바이나의 표정은 하나도 변하지 않은 채였다.

“여, 여기서 잤다고…?!”

지크는 피식 웃으며 다시 잠자리에 누웠다.

“걱정 마셔, 난 옷 입고 잤으니까 오해는 하지 말라고. 이 몸은 계속 잘 테니까 옷이나 맘 놓고 갈아입어.”

바이나는 계속해서 옷을 갈아입었다. 하지만 넋이 완전히 나간 상태였다. 19세의 소녀에겐 너무나도 큰 충격이었던 것이다. 이 일에 대해서 알고 있는 사람은 다행히도 이 둘뿐이었다. 물론 바이나의 행동이 약간 이상해졌다는 걸 많은 사람이 느끼기 시작한 건 오래 지나지 않아서였다. 목에 붕대는 아직도 감겨 있었다. 의무병에 따르면 일주일은 있어야 회복된다고 했다. 물론 마법이 아닌 약초에 의한 치료였다. 하루 만에 장교 막사로 복귀한 바이나는 계속해서 직무를 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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