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즈 나이트 – 81화
태라트는 갑자기 자신이 숲속에 와 있다는 것에 어리둥절하였다. 자신의 눈앞에 펼쳐졌던 진홍색의 빛이 아직도 생생했다. 그런데 갑자기 앞이 숲으로 변했다.
“내가… 죽은 건가?”
태라트는 자신의 몸을 만져보았다. 그러나 아무 이상은 없었다.
“로이슨님! 무사하십니까!”
부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태라트는 경계하면서도 부관의 목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발을 옮겼다. 부관이 눈에 들어왔다. 뿐만 아니고 병사들까지 무사히 살아 있었다. 병사들은 함성을 지르며 태라트를 반겨주었다. 8천 명에 이르는 군사들이 모두 살아 있었다.
“여기는 도대체 어딘가 부관? 방금 전까지만 해도 분명히….”
“저희들도 깜짝 놀랐습니다. 알고 보니 그 사나이가 공간이동 마법으로 우리를 근처의 숲까지 옮겨준 것이었습니다.”
태라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자신들을 살려준 그 사나이의 모습은 정작 보이지가 않았다.
“살아 있을까…?”
“젠장할…!!”
리오는 거칠게 내뱉으며 눈을 감았다. 석 달간은 저승사자와 놀아야 할 것이다 라고 리오는 마음을 굳혔다.
“리오 스나이퍼, 꼴 좋구나.”
리오는 번쩍 눈을 떴다. 한 사나이가 왕국군 병사의 머리를 밟고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느새 머리를 밟힌 병사는 화를 내며 자신의 머리 위를 향해 무기를 휘둘렀다. 사나이는 가볍게 공중제비를 돌며 자신의 칼을 휘둘렀다. 휘두르는 것이 리오의 눈에 보였을 뿐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피 튀지 않게 배려한 거다.”
그 소리와 함께 병사들은 눈을 뒤집으며 뒤로 쓰러졌다. 공기가 베어진 압력에 의해 귀의 세반고리관이 충격을 입은 것이다. 치사량은 아니었지만….
사나이는 리오의 왼팔을 붙잡고 그를 일으켜 세워주었다. 리오는 힘겹게 일어서며 그 사나이의 머리에 자신의 머리를 부딪혔다.
“지크, 네가 여기엔 어쩐 일이냐?”
“할배가 보내서 온 거야. 네가 좋아서 온 건 아니니 좋아하진 말아.”
지크는 인상을 쓰면서 앞을 바라보았다.
“너는 문명계 전문인 줄 알았는데, 슈렌 대신에 널 보내다니 이상한걸?”
“그놈도 갑자기 일이 틀어져서 말이야…. 급한 김에 놀고 있는 내가 왔지.”
리오는 피식 웃었다. 그리고 짓궂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동안 여자를 또 몇 명이나 울렸냐?”
지크는 고개를 저으며 떫은 표정을 지었다.
“한 명밖에는… 상황이 안 좋았어.”
지크는 리오를 데리고 독립 부대가 있는 숲 쪽으로 걸어갔다. 요새에서 화살이 날아오긴 했지만 상관할 정도는 아니었다. 곧 두 명의 모습은 사라졌고 바레로그는 분함에 발을 동동 굴렀다.
“이런, 젠장할!! 어서 지원군을 요청해라, 어서!!”
오늘 벌어졌던 저항군과 왕국 방위군의 전투는 저항군의 대패로 끝이 났다. 하지만 의외의 변수가 생겨나 전사(戰使)에는 기적이라고만 기록되어졌다. 한 전투가 두 명의 사나이에게 좌지우지된 것은 흔치 않은 일이었다.
그날의 붉은 노을이 변해버린 요새 앞의 지형을 붉게 물들였다.
요새에서 멀리 떨어진 분지에서 독립 부대와 본대는 합류할 수 있었다. 이때 총 인원은 약 1만 명, 그리 많은 숫자는 아니었지만 저항군에겐 대병력이었다. 간부 회의가 바로 열렸고 그들은 병사들이 다시 재충전을 하면 2차 공격을 개시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리고 그전에 별개 부대를 조직해서 요새 안에 갇혀있는 주요 인사를 구출하자는 의견도 나왔다. 그쪽이 저항군의 사기도 올리고 지도력도 올릴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 문제는 결정되긴 했지만 논의는 내일 하기로 되었다. 오늘은 본대에겐 너무나 피곤한 하루였기 때문이었다.
리오는 간이 의무막사 안에 누워 천정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른팔은 아직 움직여주지 않고 있었다. 당장 움직이진 않을 것이다, 바이론이 혼신의 힘을 다해 가한 일격이어서였다. 심심하던 차에 태라트와 얘기를 마친 슈가 막사를 찾아와주었다.
“리오! 다쳤다고 들었는데 이 정도였어요?!”
“하하… 어떻게 하다 보니…. 미안해.”
쓴웃음을 짓는 리오 옆에 슈는 의자를 끌어다 앉으며 그동안의 얘기를 했다.
“리오는 여기까지 오면서 어땠어요?”
“훗, 짐만 늘었지 뭐. 그건 그렇고 저 지크 녀석 어때?”
“어떻다니요?”
슈는 알아듣지 못했다는 듯 큰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
“성격이 고약하진 않냐고….”
“흐흠… 약간요. 사람의 이름을 제대로 부르지 않는다는 게 제일….”
리오는 예상한 결과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리오처럼 좋은 사람이에요. 자유롭고, 재미있고, 그리고 강하구요.”
“그래… 강하기야 강하지. 후후….”
슈는 분위기가 왠지 어색해진 것 같아서 얘기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
“아, 리오는 엔션티드 엘프라는 것 들어봤어요?”
리오는 눈을 감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저항군과 만나기 전에 이리프에게 일이 있었어요.”
“일?”
슈는 차근차근히 요우시크가 이리프를 납치해 간 정황을 리오에게 설명해주었다. 리오의 표정은 어느 때보다도 더 굳어졌다.
“이리프가 엔션티드 엘프라고! 진짜야?”
“예, 요우시크가 직접 그렇게 말했어요. 근데 그렇게 위험한 일인가요?”
리오는 다시 눈을 감으며 설명을 해주었다.
“마법만으론 현자와 화이트 드래곤을 능가하는 초 마력의 엘프야. 태어날 확률도 적고 자신이 엔션티드 엘프라는 걸 알지 못하고 생을 마감하는 수가 허다하지. 그러나 만약에 자신의 존재를 자각하거나 다른 이에게 각성을 당한다면 책에 쓰여진 모든 주문과 주문법을 흡수하는 덴 몇일 걸리지가 않아. 만약에 동료가 되면 그 이상 좋은 동료는 없고 적이 되면 극악이지. 불가능이라 칭해지는 연속 주문도 가능할지 몰라…. 그건 그렇고 그 애가 엔션티드 엘프였다니… 상황이 나빠지는데?”
“예? 그럼 설마…!”
“아마도 언젠가는 싸우게 될 거야. 요우시크의 손에 들어갔다면 타르자의 손도 반드시 거치게 되는 것이 관례니까. 시간 문제일 뿐이야….”
슈는 다른 얘기를 마저 한 후에 막사를 나갔다. 다시 혼자가 된 리오는 오래간만에 잠을 청하기로 했다. 그편이 오른팔의 근육을 재생시키는데 더없이 좋은 방법이었다.
야룬다 요새의 경비는 약간은 풀어진 상태였다. 저항군의 주력 부대가 깨끗이 쓸려버렸다는 소리가 병사들 사이에서 돈 탓이었다. 그러나 사령관인 바레로그는 긴장을 풀지 않고 수도에 지원을 요청하는 비둘기를 보냈다. 비둘기는 달도 서쪽으로 기울 무렵에 답신을 가지고 도착했다. 그 답신을 읽어본 바레로그의 표정은 한결 환해졌다.
“후후후… 템플 나이트들이 와 준다면야. 이틀 후면 도착한다고 쓰여있군. 좋아, 독립 부대니까 주력만큼 강하진 않을 게야. 이번에야말로 깨끗이 정리해주마!”
답신을 책상 위에 올려둔 바레로그는 장식장에서 술병을 꺼내어 승리감을 만끽하기 시작했다.
다음 날, 바레로그는 술을 너무 마신 탓에 정오쯤에나 사령부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는 아직도 술이 깨지 않았는지 의자에 푹 눌러앉아 직무도 보지 않았다. 그런 그가 의자에 제대로 앉은 것은 한 병사의 보고가 있을 때였다.
“사령관님, 남쪽 성문에서 수상한 자들을 잡았습니다.”
“보고해라.”
“예, 아이 두 명과 엘프족 한 명, 드워프 한 명에 자신을 수녀라고 밝히는 여성 한 명입니다.”
바레로그는 고개를 끄덕인 후 자리에서 일어섰다.
“좋아, 할 일도 없으니 가보기나 하자. 그런데 뭐가 수상하다는 것이냐?”
병사는 그와 감옥으로 향하며 정황을 설명해주었다.
“예, 성 안으로 들어오며 저항군 얘기를 꺼내었습니다. 조사하려 하자 그자들은 완강히 저항하였습니다. 결국 생포하긴 했지만 감옥에서 계속 소리를 질러대는데….”
“아아, 알겠다. 만나보면 알겠지. 아, 그 수녀는 미인이던가?”
바레로그의 본성이 발동하는 순간이었다.
“예, 하지만 어디서 많이 보던 수녀였습니다. 아마도 템플 나이트들이 찾아다니던 남쪽 수도원의 키세레 수녀와 비슷하게 생긴 것 같습니다.”
바레로그는 눈을 반짝였다.
“호오… 키세레 수녀라면 남쪽 지방에서 손꼽히는 미녀 아닌가? 좋아좋아… 후후후.”
어느덧 바레로그는 감옥의 내부로 들어서고 있었다.
“이봐! 약이라도 줘야 하는 거 아니야!! 사람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놓고 맛없는 식사만 달랑 주는 게 어디 있어!!!”
리카는 감옥문의 창에 대고서 고래고래 소리쳤다. 그러나 아무 반응이 나타나지 않았다. 리카도 지친 듯 벽에 기대어 스르르 쓰러졌다.
“난 괜찮아 리카. 그보다 너도 많이 다쳤을 텐데….”
얼굴이 흉하게 부어있는 클루토가 리카에게 말했다. 둘의 입에는 아직도 핏자국이 선명했다. 머셀은 가만히 누워만 있었다.
“쳇, 리오 그 바보는 도대체 일을 어떻게 처리한 거야? 우리가 이 지경이 돼도 찾아올 기미가 안 보이니 말이지.”
“올 거야, 그렇게 생각하면 더 안 올 수도 있다구. 반드시 우리를 구해줄 거야.”
리카는 한숨을 푸욱 쉰 후에 머셀에게 다가갔다. 체력이 약한 탓에 계속 누워만 있는 머셀이었다.
“그보다 키세레님과 아르만은 괜찮을까? 키세레님은 괜찮으시다고 해도 아르만은 엄청난 부상을 입었는데….”
이런저런 걱정을 하고 있을 무렵, 그들은 누군가의 발자국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하지만 군화의 소리였기 때문에 그들은 고개를 숙이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
“누구지? 내가 볼까?”
리카는 몸을 일으켜 다시 밖을 내다보았다. 바레로그와 한 병사가 키세레와 아르만이 갇혀있는 감옥을 향해서 걸어가고 있었다.
“아르만, 괜찮아요?”
키세레의 치유 마법이 효과가 있었는지 아르만은 하루 만에 눈을 뜰 수가 있었다.
“으윽…! 여기는 어디죠?”
“요새의 감옥이에요. 아, 그리고 아직 움직이지 말아요, 뼈가 아직 달라붙지 않았으니까요.”
“예… 고맙습니다 키세레님. 그리고 죄송해요.”
키세레는 다시 치유 마법 주문을 외우려다 아르만의 말을 듣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예? 뭐가요?”
“제가 서두르자는 의견만 내지 않았어도 이렇게 고생하시는 일은 없었을 텐데요. 모두 제 탓입니다.”
키세레는 부드러운 표정을 지으며 아르만에게 치유 마법을 써 주었다.
“하지만 저 때문에 이렇게 상처 입은 사람이 누구인데요. 오히려 제가 죄송해요.”
치유가 거의 끝날 무렵 감옥문이 열리고 두 사람이 안에 들어왔다. 바레로그와 병사였다.
“오, 자네가 말한 대로 진짜 키세레 수녀로군, 수도에서 몽타주를 몇 번 본 적이 있어, 확실해. 후후후… 이거 승진할 기회가 점점 많아지는데?”
“누구시죠 당신은?”
키세레는 정색을 하며 바레로그를 쏘아보았다. 바레로그는 미소를 지으며 자신을 소개했다.
“난 이 야룬다 요새의 사령관 바레로그·돈 페리거라고 하오. 이렇게 만나뵙게 돼서 약간 죄송하군, 후후후…. 별일은 아니오, 그저 확인만 하려고 왔을 뿐이오. 내일이면 어차피 이곳을 떠나게 되실 거요 키세레 수녀.”
“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