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즈 나이트 – 82화
“떠나다니요?”
바레로그는 감옥문을 닫으며 말해주었다.
“템플 나이트들이 지원군으로 내일 이곳에 도착하오. 그들이 아마 당신을 수도까지 모셔갈 것이오. 준비나 해 두시오, 하하하…!”
키세레는 템플 나이트란 이름을 듣고서 섬뜩함을 느꼈다. 예전에 수도원에서 있었던 일들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리고 그전의 일도….
“그, 그런…!”
그녀는 두 손을 모으고 벽에 기대어 천천히 몸을 움츠렸다. 두려움에 몸을 떨기 시작했다.
“어, 티퍼에게 누나가 있었어?”
리오는 오른팔을 굽혔다 폈다 하면서 티퍼에게 말했다. 티퍼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으음, 그러니까 나중에라도 누나를 찾아달라 이거지? 좋아, 할 수 있는 데까지 해보지 뭐. 인상착의를 말해줘.”
“으음, 검은 머리예요, 눈이 약간 커요. 그리고 눈썹은 얇고 짙은 편이고….”
리오는 잠시 팔을 멈추고 티퍼의 말을 이었다.
“키는 큰 편에다 속눈썹이 길지 않니?”
티퍼는 놀란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 어떻게 알았어요! 설마 누나를…!!”
“아아, 비슷하게 생긴 사람을 알고 있을 뿐이야. 나이만 알면 글쎄다… 몇 살이니?”
“저하고 일곱 살쯤 차이가 나니까… 스무 살에서 스물한 살쯤요?”
리오는 머리를 굴렸다. 자기가 들은 바로는 키세레의 나이가 분명히 스물다섯 살이었다. 그는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으음… 비슷하긴 해도 나이가 좀 많구나. 아닌 것 같다. 알았어, 부탁은 들어줄 테니까 걱정 말고 쉬어라.”
티퍼를 겨우 막사로 돌려보낸 리오는 오른팔에 남아있는 흉터를 바라보았다. 붉은 주름이 아직도 잡혀있었다. 다크 팔시온에 베인 상처였기에 더 오래가는 것 같았다. 리오는 눈을 감고 기를 오른팔에 돌렸다. 집기법(集氣法)에 의한 치료를 위해서였다. 곧 오른팔 전체에 푸르스름한 기가 맺히기 시작했고 상처의 길이가 조금씩 작아졌다. 이런 식으로 한다면 한 시간 내에 치료가 가능할 것 같았다.
“치료 중인데 방해하는 건 아닌가 모르겠군, 리오 스나이퍼.”
리오는 눈을 뜨고 자신을 부른 사람을 찾았다. 검은 머리에 미소년 같은 얼굴, 말스 왕국의 정식 계승자인 태라트였다. 리오는 일어서서 정중히 예의를 갖추었다.
“아, 지금은 그럴 필요 없네. 나중에 말스 왕국에 돌아갔을 때나 예의를 갖춰주게나. 그때까지는 가벼운 인사를 해주게. 그건 그렇고, 자네와 단둘이 할 말이 조금 있는데 말이야….”
리오는 알겠다는 듯 태라트와 함께 의무 막사 안으로 들어갔다. 리오의 부탁으로 특별히 비워진 막사였다. 리오와 태라트는 마주 앉아 얘기를 시작했다.
“자네… 직업이 정확히 뭔가?”
리오는 움찔하며 언제나처럼 둘러대기 시작했다.
“전 떠돌이 기사일 뿐입니….”
태라트는 그 얘기가 아니라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에게도 숨길 이야기가 있나? 내 앞에서 그런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고도?”
리오는 잠시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 세계에서 처음으로 자신의 정체를 밝히게 되는 것만 같았다.
“… 가즈 나이트지?”
태라트의 물음에 리오는 미소를 띠우며 슬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내가 존댓말을 써야 하는 건가? 후훗….”
“아닙니다. 당신은 제가 무엇이 되었든지 존댓말을 쓰셔서는 안 됩니다. 당신께서 존대어를 쓸 유일한 분은 말스 3세뿐이십니다.”
태라트는 황색 가죽 장갑을 벗으며 리오에게 여러 가지를 묻기 시작했다.
“100년 전에 일을 마치고 어디론가 사라졌다고 들었는데, 어째서 다시 돌아온 거지?”
“가스트란을 아시죠? 그 녀석과 결단을 내려고 다시 이 세계에 돌아온 것입니다. 그건 그렇고 태라트님은 말스 1세님과 정말 놀랄 만큼 닮으셨군요. 머리 스타일까지도… 제가 보았던 그분의 그때 모습과 다른 점이 한 군데도 없군요. 아, 있다면 옆에 장비하신 검이 틀릴 뿐입니다. 그냥 철검은 보기 그렇군요.”
리오는 오다가 내려놓은 자신의 배낭을 지크에게 부탁해 회수할 수 있었다. 그 배낭에는 예전에 드워프족 장로가 맡겨둔 미스릴 검이 끼워져 있었다. 리오는 그 검을 꺼내어 태라트에게 건네주었다.
“자, 이것은 드워프족 족장님께서 저에게 맡겨주신 검입니다. 태라트님께 전해달라고 하시더군요.”
태라트는 리오에게 검을 받아 겉을 싸고 있는 헝겊을 풀었다. 화려하지도 않고 소박하지도 않은 칼집이 태라트의 눈에 들어왔다. 태라트는 천천히 그 검을 뽑아보기 시작했다. 미스릴의 독특한 광택이 막사의 안을 밝혔다.
“오오… 굉장한데? 내 손에 딱 맞게 되어있어! 이 검의 이름은 뭐라고 하시던가?”
“검의 이름은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냥 태라트님의 검이라고만 하시더군요. 하지만 제가 보기에도 굉장한 명검 같습니다.”
태라트는 기분이 좋은 듯 검을 집어넣으며 검의 이름을 즉석에서 지었다.
“좋아, 그럼 오늘부터 이 검의 이름을 하이바렌이라 하지. 정말 마음에 드는 검이야. 하하하….”
리오와 태라트는 옛날에 대해 더 얘기한 후 오늘 밤에 벌어질 요새 잠입작전에 대해 본격적으로 얘기했다.
“날랜 병사를 한 10명쯤 뽑아서 잠입하려 하는데… 자네 생각은 어떤가?”
“전 반대입니다. 10명도 너무 많거든요.”
태라트는 눈을 크게 떴다. 5인을 구출하는 데 10명이 많다니…? 이해가 가지 않는 말이었다. 리오는 씨익 웃으며 자신의 작전을 설명했다.
“저와 지크, 이 두 명이면 끝입니다. 저희들에게 맡겨주십시오.”
“아니, 자네는 오른팔도 다 낫지 않았잖나?”
리오는 걱정하지 말라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리오에 대해서 아직 잘 알지 못하는 태라트는 그 표정을 보아도 걱정이 되었다.
“괜찮겠나?”
“걱정 마십시오. 나중에 구출할 사람들의 명단과 인상착의를 알려주시면 됩니다. 그리고 태라트님은 내일 아침까지 병력을 요새와 가까운 곳까지 옮겨주십시오. 후속 부대가 올 가능성이 많으니까 주의해주시고요.”
태라트는 결국엔 리오에게 이 일을 맡기기로 결정했다. 태라트는 부탁한다는 말을 남기고 막사에서 나갔고 리오는 오후가 될 때까지 자신의 팔을 치료하는 데만 전념했다.
이윽고 밤이 찾아왔다. 리오와 지크는 함께 야룬다 요새의 성벽 아래에서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지크는 투덜대며 싫다는 표정만을 계속 짓고 있는 상태였다.
“제길, 하필이면 왜 나하고 이곳에 오냐고. 난 침투라면 진저리가 난단 말이야!”
“시끄러워. 넌 내가 하라는 대로만 하면 되는 거야. 내가 성문을 부수고 들어가 난동을 부리고 있을 때 넌 성안에 잠입해서 감옥 안에 있는 사람들을 구출하라고. 방법은 각자대로 하는 거다. 알았지?”
지크는 팔짱을 낀 채 고개만 끄덕였다. 시큰둥한 얼굴이었다.
“젠장, 빨리 안 들어가고 뭐해!”
리오는 조용히 성문 앞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지크도 역시 나름대로의 준비를 시작했다. 항상 옆에 어중간하게 차고 있는 무명도를 등허리에 바짝 장비했다. 행동하는 데는 불편한 점이 없는 방식이었다. 그리고 손을 두어 번 턴 후 기어오르지 못하도록 외부로 비스듬히 기울어진 성벽을 곤충처럼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야룬다의 성문은 두 명의 병사가 지키고 있었다. 보통 때와 마찬가지였다. 두 병사는 하품을 하면서 들고 있는 창에 기대어 졸고 있는 상태였다. 저항군이 쳐들어 가기엔 절호의 기회일 것이다. 각 부대의 지도자가 없는 것이 태라트의 가슴에는 한일지도 모른다.
“어이, 병사들. 이렇게 졸면 어떡하나?”
한 병사가 눈을 비비며 성문 앞에서 들려온 목소리의 주인공을 찾기 시작했다. 그 병사는 잠시 후 질겁을 하며 옆의 병사를 흔들었다.
“이봐! 일어나, 일어나라고! 빨간 머리의 악마가 나타났어!!”
동료에 의해서 잠이 깬 병사는 희미한 눈으로 앞을 바라보았다. 눈처럼 보이는 푸른색 광점 두 개와 횃불에 의해 붉게 빛나는 긴 머리. 그리고 그 사나이의 손에 들려있는 보라색 검…. 그 사나이는 당장이라도 그들을 내려칠 기세였다.
“우, 우와아아아!!”
두 병사는 성문에 붙어있는 쪽문을 이용해 안으로 기겁하며 들어갔다. 리오는 씨익 웃으며 기합성과 함께 디바이너로 땅을 거세게 내리쳤다.
“가라앗! 지뢰자르기!!”
검에 의한 충격파가 지면을 통해 성문으로 굉음을 내면서 돌진해 들어갔다. 곧 성문에는 여러 개의 금이 순식간에 그어졌고 가이라스 왕국에서 두 번째로 두껍기를 자랑하던 야룬다의 성문은 종이처럼 갈라져 박살 났다. 리오는 당당하게 박살 난 성문을 밟고 요새 안으로 들어섰다. 디바이너로 오른쪽 어깨를 툭툭 치며 리오는 자신있게 소리쳤다.
“자아! 아무나 와라!!”
성문 주위에서 한바탕 소동이 벌어지고 있을 무렵, 지크는 무사히 감옥 건물 안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중간에 병사 둘을 만나긴 했지만 그들은 지크가 자신들의 사이로 빠져나가는 것을 느낄 수도 없었다. 그만큼 지크의 잠입술은 완벽에 가까웠다.
“좋아, 구출할 사람이 다섯이라고 미소년이 말했지? 좋아, 하나하나씩 들어가 보지 뭐.”
지크는 건물 안에 기척이 느껴지지 않자 주머니에 손을 꽂고서 여유있게 안을 두루두루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렇게 조용한 것도 그의 마음엔 들지 않았다.
“이상하단 말이야? 이렇게 중요한 건물 안에 경비원 하나도 있질 않고 말이지… 신기하네…?”
건물의 지하로 들어서던 지크는 지하 1층의 바닥을 밟자마자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달그락 달그락 하는 음산한 소리가 어두운 감옥 저편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역시, 기척을 느끼지 못하는 게 당연하지. 말로만 듣던 해골 바가지 같은데?”
횃불의 희미한 불빛 사이로 투구 등의 장비를 갖춘 인간의 해골들이 서서히 다가오기 시작했다. 지크는 손을 꺾으며 가볍게 몸을 풀었다.
“리오만 파티를 즐기는 게 아니군, 헤헤헷….”
성문 앞에는 어느새 병사들이 즐비하게 쓰러져 있었다. 리오는 숨도 가쁘게 쉬지 않고 디바이너를 다시 어깨에 올려놓은 채 한 발 한 발 앞에 열을 지어 서있는 병사들을 향해서 다가갔다. 병사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리오가 한 걸음 앞으로 가면 병사들은 한 걸음 뒤로 물러나는 형국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병사들의 뒤쪽에서 와 하는 함성이 들려왔다.
“엘리게이터다! 엘리게이터가 나왔다!!”
한 병사가 소리치자 모든 병사들이 큰 길을 만들기 시작했다. 리오는 가만히 멈춰 서서 앞을 바라보았다.
쿵.
거대한 발소리가 지축을 울렸다. 리오의 미소가 약간 사그라들었다. 키가 4가론(4m)은 족히 되어보이는 거대한 리자드맨의 한 종이었다. 악어의 머리에 두터운 비늘, 그리고 중형 갑옷이 검이나 창이 들어갈 틈을 내보여주지 않았다.
“크아아아―!!”
엘리게이터는 입을 쫙 벌리면서 독기를 뿜어내었다. 다른 사람 같으면 발소리만을 들어도 질렸을 것이다. 하지만 리오란 사나이의 표정은 오히려 잘됐다는 듯 했다. 그는 코웃음을 치며 검을 든 오른손에 힘을 주었다. 망토 사이로 단단한 팔 근육이 꿈틀거렸다.
“심심하던 차에 잘∼되었군. 허약한 병사들은 입맛에 안 맞았는데 말이지. 와 봐라 애완동물, 리오님이 귀여워해주마. 후후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