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즈 나이트 – 86화
저항군의 사기는 부쩍 올라 있었다. 리오와 지크에 의해서 잡혀있던 저항군의 인물 다섯 명이 저항군으로 다시 돌아왔기 때문이었다. 잠시 쉬라는 태라트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오늘이 최대의 기회라며 출전을 요청했다. 태라트도 결국엔 승낙했고 저항군은 바로 전열을 가다듬어 출전을 시작했다. 두 시간 후, 저항군은 요새의 앞 평원까지 쉽게 진출할 수 있었고 거기에서부터 저항군과 요새 방위군의 마지막 전투가 시작되었다.
“으으윽…! 저 애송이가 살아있었다니!! 문도 박살 나서 진격해오면 끝이다, 모두 진출을 준비하라고 전해라앗!!”
바레로그는 얼굴에 붕대를 칭칭 감은 채 부관에게 명령했다. 하지만 부관은 이번의 전투가 상당히 승산이 없음을 알고 있었다. 병사들의 눈이 모조리 풀려있었기 때문이었다. 야밤의 소동으로 전 병사들이 동원되었고 그때문에 잠을 자지 못한 병사들이 태반이었다. 결국 방위군은 최악의 컨디션으로 저항군과 맞서 싸워야만 했다. 만약에 바레로그가 승려들의 도움을 간청했다면 승산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바레로그는 승려들의 치료와 보조 마법을 시간 낭비라고 밖에는 생각하지 않았다. 물론 승려들이 그를 도와줄 확률도 적었지만….
태라트는 새로 전열을 가다듬은 기마대를 선두에 위치시켰다. 적들의 상황이 나쁜 만큼 거센 돌격을 하면 쉽게 이길 수 있다 생각해서였다. 그의 예상은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성문 앞을 지키던 방위군은 제대로 저항도 하지 못한 채 성 안으로 후퇴해 들어갔고 기마대는 함성을 울려가며 안으로 돌진해 들어갔다. 성 안에선 방위군의 궁병대와 투석 부대가 기마대를 맞아 싸웠다. 그러자 기마대 대장인 로먼은 급히 병사들에게 후퇴를 명령했다. 요새와 같은 좁은 공간에서 기마대로 궁병부대나 투석 부대를 상대하기란 여간 까다로운 것이 아니었다. 저항군 기마대는 로먼의 명령대로 급히 방향을 바꿔 성문 밖으로 다시 달려나갔다. 궁병대와 투석기 부대는 환성을 울리며 자축했으나 그리 오래가지는 못했다. 란지크가 이끄는 중보병 부대가 성 안으로 밀려들어왔기 때문이었다. 두꺼운 갑옷과 방패 덕분에 그들은 기마대와는 달리 궁병대와 마음 놓고 싸울 수 있었다. 우선은 적군과 접근하는 것이 첫째 목표인 란지크는 새로 마련된 해머 프레일을 가볍게 휘두르며 궁병대의 진열을 혼란시켰다. 몇 개의 화살이 그의 거대한 몸을 향해서 날아왔으나 반은 프레일에 튕겨 바닥으로 떨어졌고 나머지는 갑옷을 뚫지 못한 채 힘없이 튕겨져 나왔다.
“전원 돌격―!!”
란지크의 우렁찬 외침과 함께 중보병 부대는 방위군을 향해 돌격해 들어갔다. 근거리 전에선 빛을 보지 못하는 궁병과 투석 부대는 바람 앞의 등불처럼 힘없이 쓰러져갔다. 간단한 가죽 갑옷 외에 별다른 것을 착용하지 않은 궁병들은 중 보병 부대의 칼이나 창에 피를 흘리며 쓰러졌고 후열의 궁병들은 요새 안쪽으로 도망치기에 급급했다. 제1 지구의 전투는 저항군의 완벽한 승리였다.
“좋아, 공격 중지! 대열을 정비하고 명령을 기다려라!!”
란지크는 일단 병사들을 세웠다. 급히 2지구로 들어가면 작전이 깨질 뿐만 아니라 어떤 공격을 받을지 알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겉모습과는 달리 흥분을 잘 하지 않는 란지크의 성격이 작전의 성공을 도운 것일지도 모른다.
제1 지구의 점령 소식을 들은 태라트는 경 보병 부대와 창기병을 정비한 후 그들에게 명령을 하달했다.
“제3 지구는 민간인들의 집이 있다. 하지만 복병이 숨었을지도 모르니 제군들은 주의를 기울여 전투를 하라. 그리고 적군의 지휘관은 생포해라, 물론 사살해도 상관은 없지만 가급적이면 생포하기 바란다. 마지막으로 우리와 전투 의사가 없는 방위군 병사는 살상하지 말도록, 제2 부대와 3부대는 아침에 지시한 내용대로 따라주기 바란다, 이상!!”
병사들은 태라트의 말이 끝나자 함성을 지르며 사기를 드높였다.
그사이 중보병 부대는 제3 지구로 통하는 성문을 부숴 나가고 있었다. 이것도 태라트가 지시한 작전 중에 하나였다. 끝을 뾰족하게 깎은 통나무를 힘 좋은 병사들이 갑옷을 벗고 옆구리에 단단하게 낀 채 성문을 향해 달려들었다. 한번 부딪힐 때마다 건너편에서 문을 맞대어 밀고 있는 방위군 병사들이 대여섯 명씩 튕겨져 날아갔다. 태라트의 경보병 부대가 성 안에 도착하자 병사들은 마지막 힘을 쥐어짜내기 시작했고, 란지크의 어깨까지 가세하자 성문은 결국 견디지 못하고 박살 났다. 문이 부서지자 태라트가 앞장서며 대기하고 있던 병사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자! 전군 돌격!!”
저항군의 병사들은 사기가 떨어질 대로 떨어져 도망치기 직전인 방위군을 향해 일제히 함성을 지르며 돌격해 들어가기 시작했다. 제3 지구의 전투는 예상보다 빨리 끝이 났다. 방위군 병사의 대다수가 무기를 버리고 투항했기 때문이었다. 끝까지 저항한 병사들은 가이라스 왕국의 이름을 외치며 장렬히 최후를 마쳤다. 피해가 거의 없는 것을 확인한 태라트는 쉬지 않고 적군의 마지막 지역인 제5 지구를 향해 나아갔다. 빨리 끝낼수록 민간인들의 피해가 적을 것이라 생각해서였다. 군사인 작센이 건의한 내용이었다.
태라트가 한참 성 안에서 싸우고 있을 무렵에 지크와 리오는 아이들과 함께 저항군의 임시 주둔지에서 낮 한때를 보내고 있었다. 대기조로 주둔지에 남은 것이 억울해서 화가 나있던 바이나는 둘의 모습을 보자 더더욱 화를 내기 시작했다.
“이봐, 두 명! 아무리 대기조라지만 이건 너무 심한 거 아니야!! 다 큰 어른들이 아이들이랑 놀고 있다니!!”
머셀에게 활 쏘는 법을 자기식으로 가르쳐주던 지크가 바이나의 얘기를 듣고는 움찔하며 그녀를 돌아보았다.
“너도 어른은 아니잖아. 열아홉밖에 안 됐으면서 말이야… 쯧.”
“열아홉? 그럼 나보다도 어린데…?”
머셀이 그렇게 얘기하자 리오는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크게 웃었다.
“하하…, 그러고 보니 그렇군. 하지만 엘프 나이를 말하면 곤란하지 머셀.”
바이나는 얼굴을 찡그린 채 리오 앞에 다가가서 소리쳤다.
“이봐 당신, 저 마른 인간이랑 아무리 형제라지만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거야! 우리 엄마도 열아홉에 가이라스로 시집을 왔다고! 날 어린애 취급하지 마!!”
리오는 어깨를 으쓱하며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오, 그럼 실례했군. 그런데 말이지 아가씨, 등에 차고 있는 그 검은 어디서 주운 거지? 꽤 비싼 거 같은데 말이야….”
“주운 거라니! 이 검은 드래곤 킬러야!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신… 앗! 모, 못 들은 걸로 해!!”
바이나는 검의 출처를 말하다 말고 어디론가 멀리 사라졌다. 리오는 이상하다는 듯 계속 쳐다보았지만 그들의 옆에서 약품과 무기를 정비하던 키세레와 아르만은 침을 꿀꺽 삼켰다.
“저, 저 아가씨가 설마…?!”
키세레는 떨리는 목소리로 바이나가 달려간 방향을 멍하니 주시하고 있었다. 하지만 리오와 지크는 별것 아니라는 표정으로 계속 아이들과 놀아주었다. 그러다 조금 후….
“음? 저게 뭐지 지크?”
리오는 야룬다 요새 방향의 뒤쪽에 있는 산꼭대기를 가리키며 말했다. 지크도 눈을 살짝 찡그리며 그곳을 바라보았다. 보통 인간의 시력을 훨씬 능가하는 그들의 시력이었다. 지크와 리오의 표정은 곧 굳어졌다.
“젠장할…! 모두들 여기서 꼼짝 말고 기다려, 그리고 아르만은 군사 작센에게 내가 말한 그대로 전해줘! 알았지!!”
아르만은 그들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얼떨떨하면서도 리오의 말을 빠짐없이 들었다. 그리고 리오의 말을 들은 아르만의 표정은 아까 전보다 더 하얗게 변해갔다.
“고, 곧바로 전하겠습니다!!”
리오와 지크는 야룬다 요새를 향해 다시 한번 뛰기 시작했다. 그들이 만약 늦게 도착한다면 야룬다 요새 안에 있는 민간인과 군인들이 모두 상공에 떠서 오고 있는 거대한 물체에 의해 잿더미로 변할 것이 뻔했기 때문이었다.
태라트의 부대는 요새 방위군의 마지막 부대와 맞서 힘겨운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시가전이라 더욱 그러했지만 민가 곳곳에 민간인 차림으로 잠복해 있는 군인들에게 당한 피해가 극심했다. 그리고 바레로그가 직접 지휘하고 있는 부대의 용맹도 대단했다. 성격과 가치관은 영 아니었지만 군대의 방어와 공격면에서 왕국의 장성 중 서열 5위에 드는 바레로그였다. 그가 직접 이끄는 부대였으니 더욱 그러했다. 하지만 규모에서 밀리기 시작한 그들도 어쩔 수는 없었다. 막판에 몰린 바레로그는 직접 자신의 대검을 손에 쥐고 싸우기 시작했다. 그는 장군인 만큼 무술 실력도 대단했다. 보통 병사들은 그의 대검 앞에 무참히 목을 날려야만 했다. 보다 못한 태라트가 결국엔 드워프 족장이 선물한 하이바렌을 단단히 거머쥐고 바레로그 앞에 섰다.
바레로그는 태라트의 얼굴을 잘 알고 있었다. 예전에 태라트가 말스 왕국의 태자 자격으로 왕국을 한번 방문했을 때 몇 번 본 기억이 있어서였다. 그때는 머리를 조아렸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지금은 그의 머리를 날려야만 했다. 바레로그는 오히려 기쁜 표정이었다.
“후후후… 네 녀석 태라트! 감히 가이라스 국민들을 선동해서 이 왕국을 집어삼키려 하다니, 나 바레로그가 절대 용서 못 한다!”
“시끄럽다 바레로그! 너도 지금 너희 나라의 상황을 잘 알고 있을 터, 지금의 가이라스 왕국의 행동이 옳다고 생각하는가! 정규군이 민간인을 괴롭히고, 괴롭힘을 당한 민간인이 도적 떼로 변하는 일을 눈뜨고 볼 수 있는 일이라 생각하나!!”
“흥, 난 국왕 폐하가 어떤 행동을 해도 그분을 믿고 따른다! 그분의 행동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다른 것은 몰라도 그분에 대한 충성만은 내 아들에게 떳떳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난 그분의 명령에 따라 너를 처치하고 수도를 보호할 것이다, 자 덤벼라 태라트!!!”
둘은 기합성과 함께 검을 부딪혔다. 서로의 실력은 대단했다. 아군 병사들이 모두 잡히거나 전사해서 자신만 혼자 남았다는 걸 바레로그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투지는 흔들림이 없었다. 잡혀서 포로가 된 병사들도 지금 싸우고 있는 자신들의 사령관의 진짜 모습을 보며 놀라운 눈을 감출 수 없었다.
“이야압!!”
바레로그의 공격을 막아주던 태라트의 작은 방패는 결국 부서지고 말았고 그의 손에 잡혀있는 건 장검 하나뿐이었다. 하지만 태라트는 그게 오히려 더 편했다. 바레로그의 거센 공격을 장검의 끝으로 교묘히 막아내며 태라트는 일보일보 전진해 나갔다. 가까이 붙어있을수록 태라트가 유리했다. 바레로그의 일격을 피한 태라트는 바로 어깨를 이용해 바레로그의 중심을 무너뜨린 후 그가 잡고 있던 대검을 멀리 날려버렸다. 그와 동시에 병사들은 승리의 환성을 울렸고 지휘하고 있던 란지크와 제1 지구에 들어와 있던 기마대 대장 로먼도 그 함성을 듣고 기뻐했다.
“… 굉장하군 애송이 왕자, 후후후…. 역시 만 명이 죽기 살기로 따를 만한 인물이야. 자, 그런데 어쩌지? 난 죽기 싫은데 말이야.”
태라트는 검을 거두며 나지막이 말했다.
“알고는 있군. 자, 병사들은 바레로그를 감옥에 가둬두도록 해라. 가이라스 왕이 정신을 차릴 때쯤 풀어주면 될 거야.”
바레로그는 순순히 병사들의 포박을 받으며 미소를 지었다.
“나로서 이 요새가 간단히 함락되지는 않을 거다 애송이…. 후후후, 하하하하…!!”
바레로그의 웃음소리와 함께 수도로 통하는 성문에 임시로 가있던 병사 한 명이 급히 태라트에게 달려왔다.
“큰일입니다! 적의 지원군입니다 대장님!!”
태라트는 병사를 바라보며 긴장된 목소리로 물었다.
“지원군?! 인원은 몇 명인가!”
“천 명이 되지 않습니다만, 가이라스 왕국 최정예 부대 템플 나이트입니다!!”
태라트는 입술을 깨물었다. 기사단은 한 명도 없는 저항군에겐 템플 나이트란 이름은 굉장한 무기였다. 병사들은 벌써부터 술렁이고 있었다.
“이런…! 병사들이 거의 지쳤을 때 들어오다니, 그리고 하필이면 템플 나이트…!!”
성 안에 있는 저항군 병사의 수는 5,000여 명, 그러나 1,000명이 되지 않는 템플 나이트를 상대하기란 위험천만의 일이었다. 나라를 대표하는 만큼 강한 그들이었다. 말스 왕국의 크루세이더, 가이라스의 템플 나이트, 그리고 로하가스 제국의 듀얼리스트. 이들은 각 나라를 대표하는 최강 수준의 정예 부대였다.
“… 일단 가보자!”
태라트는 승산이 없을 것을 알면서도 병사들을 이끌고 북쪽 성문으로 향했다. 공성전을 하자마자 성을 또 방어하기란 이번이 처음 있는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