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즈 나이트 – 87화
템플 나이트 743명은 야룬다 요새 북쪽 성문에서 말 위에 올라선 채 조용히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의 지휘자, 라칸·펠바크는 짙은 남색의 투구 사이로 성문의 위쪽을 주시하고 있었다.
예전의 템플 마스터가 홀연히 퇴직 의사를 밝히고 어디론가 사라진 후, 어수선해진 템플 나이트를 살리려고 노력한 인물인 라칸은 그 노력의 대가로 부하들의 강력한 신임을 얻게 되었다. 예전에 왕 앞에서도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아 거의 물러날 위기까지 처한 일화가 그의 강직한 면을 증명해주고 있었다.
“태라트 황태자는 아직 안 나왔나….”
차가운 가을의 바람이 말 사이를 지나갔다. 그렇게 기다린 지 반시간 후, 활을 든 병사들이 성벽 위에서 나타났다. 그리고 중앙에선 태라트의 모습도 보여졌다.
“템플 나이트들은 들어라! 이 야룬다 요새는 저항군이 방금 전에 점령했다! 그러니 서로에게 피해를 입히지 말고 순순히 돌아가주기 바란다!”
태라트의 목소리를 들은 라칸은 투구 안에서 아무도 모르게 씨익 웃었다. 그리고 그는 손을 말 안장에 붙어있는 주머니에 가져가며 태라트에게 소리쳤다.
“이대로 돌아갈 순 없소! 적어도 우리들은 기사들이니 말이오! 임전무퇴의 기사도를 모르는가 보오 당신은!! 하하하…!”
태라트는 고개를 저었다. 역시 말로서 물러갈 템플 나이트들이 아니었다.
그는 천천히 손을 올렸다. 궁병대에게 발사 명령을 내리기 위함이었다. 그 모습을 본 템플 나이트들은 각자의 방패를 꺼내며 방어 태세를 갖추었다.
“자, 전 궁병대… 엇?! 잠깐! 쏘지 마라!!”
발사 명령을 내리려는 순간 태라트는 명령을 잠시 보류했다. 안장 주머니에서 나온 라칸의 손에는 흰색의 헝겊이 들려져 바람에 휘날리고 있었다.
“당신과 얘기를 하고 싶소, 태라트 황태자!”
태라트는 지금 생긴 의외의 일에 정신이 혼란했지만 아군 측에 피해가 없이 이번 일을 끝낼 수 있다는 안도감이 그의 마음을 진정시켜주었다. 태라트는 부관에게 명령을 전달했다.
“성문을 열어주게나. 우리와 싸울 의사는 없는 것 같으니까.”
조심성이 많은 그의 부관은 태라트의 결정에 흠칫 놀라면서도 그의 명령에 따라 성문을 개방했다. 그 안으로 템플 나이트 전원이 들어온 것은 아니었다. 오직 라칸 한 사람뿐이었다.
그가 들어오자 병사들은 각자의 무기에 손을 가져간 채 라칸을 경계했다. 그러나 라칸 자신은 그리 신경 쓰이지 않는 듯했다. 그는 태라트가 기다리고 있는 예전의 사령실로 부관에게 안내되어 들어갔다. 태라트는 앉아있지 않고 선 채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라칸은 투구를 벗으며 태라트에게 인사를 겸한 농담을 건넸다.
“의심이 많은 분이시군요, 태라트님. 후후후….”
“아, 아닙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그런데 저와 얘기하자는 것은 무엇입니까?”
성격이 조금 급한 면이 있는 태라트였다. 라칸의 입가에는 미소가 사라지지 않았다.
“… 가이라스 왕국에서 저항군을 결성하신 이유를 듣고 싶습니다. 그 대답 여하에 따라서 당신의 앞길을 뚫어줄 수도, 막을 수도 있으니 신중하게 대답해주십시오.”
태라트는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라칸에게 앉을 것을 권유했다. 라칸도 동의하며 자리에 앉았다.
“제가 이 가이라스 왕국에 찾아온 이유는 원래 저항군을 결성하여 싸운다는 것과는 전혀 무관한 것이었습니다. 저의 부왕께 드릴 약을 찾으려고 이곳에 온 것이 진짜 이유이지요. 그러나, 약을 찾기 위해 여러 마을들을 돌아다니던 중, 병사들이 민간인을 괴롭히는 장면을 목격할 수 있었습니다. 전 그 이유를 묻기 위해 그 병사들의 최고 상관을 찾아갔지요, 하지만 그와 대화도 하기 전에 저는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다른 마을도 마찬가지더군요. 그러다가 전 가이라스 왕실에서 내려진 공문을 보고 경악을 금치 않을 수 없었습니다. 심한 말이지만 가이라스 3세께서 정신이 온전하지 않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군인들에게 모든 곡식과 세금의 징수를 자율로 맡긴다는 명령이 잘 된 것입니까? 그리고 다시 몇 일이 지나 세금을 걷는 날, 저는 이 가이라스 왕국의 백성들이 괴로워하며 쓰러지기 시작하는 것을 직접 눈으로 볼 수가 있었습니다. 전 생각했습니다, 이건 결코 일국의 왕으로서 할 옳은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전 그 질문을 위해 수도로 찾아갔습니다. 만나 뵌 가이라스 국왕님은 1년 전에 뵌 분이 아니었습니다. 마치… 살아있는 시체와도 같은 눈을 가지고 계셨지요. 그래서 전 약을 찾고 돌아가려는 생각을 버렸습니다. 저의 능력이 닿는 데까지 이 왕국의 국민들에게 다시 한번 평화를 주고 싶었습니다. 그런 제 생각에 도중에 사귄 여러 친구들이 동참해주었습니다. 그것이 저항군이 된 것입니다.”
그 긴 이야기를 듣는 중에도 라칸의 얼굴에는 중후한 미소가 지워지지 않았다. 라칸은 다시 입을 열었다.
“당신이 하고 계시는 일이 틀린 일이라는 생각을 가져본 적이 있습니까?”
태라트는 라칸의 그런 질문에 자신 있게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선왕 말스 1세께서도 그러셨듯이 제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옳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해 본 적은 추호도 없습니다. 제가 하는 일이 끝난 다음에 후대에게 평가가 되겠지요. 어쨌든 지금 전 옳은 일을 하고 있습니다.”
태라트의 말을 다 들은 라칸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자신의 장검을 허리에서 뽑아 들었다. 태라트는 흠칫 놀라며 자신도 검을 뽑으려 했지만 이미 늦어있는 상황이었다.
“… 당신은 확실히 왕이란 직업이 어울리는군요. 이 검을 받으십시오.”
라칸은 검을 돌려 자루를 태라트에게 향했다. 태라트는 표정을 굳힌 채 검을 받아 들었다. 라칸은 무릎을 꿇으며 고개를 숙였다.
“가이라스 폐하의 유언에 따라 당신을 새 주인으로 모시겠습니다. 받아주십시오.”
태라트는 그의 말을 듣고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유언이라고요?! 그렇다면 지금의 국왕 폐하는…!!”
라칸은 나지막이 말을 이어주었다.
“지금의 국왕 폐하는 껍질에 지나지 않습니다…!”
성문 위의 망루에서 조용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던 저항군 병사 두 명은 기쁨에 겨워 민간인 지역에서 받은 술을 나누어 먹고 있었다. 만약 적발된다면 가차 없이 기합을 받는 것이 뻔했지만 그들은 이미 그런 것을 잊은 듯 술에 취해 잡담을 늘어놓고 있었다. 고향에 두고 온 애인 얘기, 가족 얘기, 전장의 얘기 등등….
“… 하하하! 정말 재미있군그래… 어, 그런데 이상하지 않나?”
코가 빨개진 병사가 술에 젖은 눈으로 앞의 병사를 바라보았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하늘이 맑았는데 말이야… 갑자기 어두워져서…?”
망루에서 머리를 내밀고 병사는 근처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근처의 평원에는 햇살이 아직도 비치고 있었다. 야룬다 요새 전체가 거대한 그림자에 가려져 있는 것이었다.
“어라… 그림자잖아? 구름이 이렇게도 컸었나…?”
병사는 술병을 든 채 공중을 쳐다보았다. 놀라 떨어질 뻔한 것을 다른 병사가 붙잡아주었다.
“히이익―?! 저게 뭐야!!”
요새 상공에 떠있는 거대한 무엇. 그것은 로하가스 제국의 개입이라는 첫 신호의 깃발이었다.
문을 박차고 부관이 태라트와 라칸이 있는 방에 숨을 몰아쉬며 들어왔다. 안에서 얘기를 나누던 태라트는 심각한 얼굴로 부관에게 물었다.
“무슨 일인가! 노크도 없이 갑자기 들어오다니!!”
“큰일입니다 로이슨, 아니 태라트님!! 제국의 공중 요새가 야룬다 상공에 나타났습니다!!!”
라칸은 눈을 부릅뜬 채 사령관실의 창문을 열었다. 그리고 하늘을 보고서 신음하듯 말했다.
“이럴 수가…! 저건 로하가스 공중 대 요새 `미그바 레이크’…!! 제국이 왜 가이라스의 일에 간섭하는 거야!!”
그의 외침과 함께 제6 지구인 민간인 생활 구역엔 미그바 레이크의 폭격이 시작되었다. 드래곤 10마리의 브레스와 필적할 정도의 파괴력이 민간인 지구를 덮쳐왔고 사령실에 있는 세 명의 눈엔 제6 지구에서 솟아오르는 거대한 화염 기둥이 눈에 들어왔다. 태라트는 분노에 몸을 떨며 소리쳤다.
“안 돼―!!!”
폭격은 제6 지구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었다. 10지구로 나누어진 야룬다의 전부를 차례차례 포격으로 달구어 놓고 있었다. 화살이나 활이 아무리 좋다고 해도 그 요새를 떨어뜨리는 덴 역부족이었다. 드래곤 30마리의 전투력과 필적한다는 그 거대 공중 요새를 막을 무기를 저항군과 템플 나이트들은 갖추고 있지 못했다. 종종 야룬다 안에서 마법의 화염탄이 날아오르긴 했지만 요새 역시 마법의 결계로 보호되고 있었기에 아무 뜻 없는 저항으로 끝나고 말았다. 20분도 채 지나지 않아, 6지구에 있던 민간인 2,143명은 모두 행방불명이 되었고 다른 지구에서도 사상자가 속출했다. 태라트로선 예전에 부딪힌 바이론보다 더 큰 위기에 직면한 셈이었다.
미그바 레이크의 함장은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사령실의 화면을 지켜보고 있었다.
“후훗… 아직 포문을 반도 열지 않았는데 이 정도라니, 황제께서도 너무 조심스러우셨군. 아직 제국에는 이보다 더 큰 공중 요새가 20대나 남아있는데 말이야. 전투력이 어중간한 축에 드는 미그바 레이크로도 이 정도니 황제 폐하 전용 요새인 우르즈로하가스(위대한 로하가스란 뜻) 였다면 후훗, 야룬다의 흔적도 남기지 못했겠군. 우하하하…!”
그때, 대기 조절 장치를 관찰하고 있던 한 제국군 병사가 함장에게 큰 소리로 보고했다.
“함장님! 선체 좌현에 거대한 이상 기류 발생입니다, 요새에 충격이 올지 모르겠습니다!!”
“뭐라고!!”
쿠쿵―!!”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요새엔 약간의 충격이 엄습해왔다. 피해 상황이 보고되기 시작했다.
“좌현 장갑판, 9% 손상! 그 이외엔 손상 없음!!”
함장은 벌떡 일어서며 소리쳤다. 믿기 어렵다는 표정이었다.
“뭣이! 가이라스 왕국에서 이 요새의 고도까지 충격을 줄 수 있는 무기가 존재한단 말이야! 믿을 수 없다, 화면을 충격이 발생한 장소로 돌려보아라!!”
사령실의 화면이 빠르게 바뀌었고 그곳을 지켜본 사령실의 병사들과 함장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거대한 회오리가 돌들을 밀어 올린 흔적이 남아있었다.
“무슨―! 갑자기 회오리바람이 일어 요새에 돌을 날렸단 말이냐!! 에잇, 볼 것 없다, 적 중에 마법사가 있는 것이 확실하다! 하단부의 포문을 전부 열어라, 야룬다 요새를 박살 내는 거다!!”
“하단부 제3 포문에 고열의 이상 물체가 급속으로 접근 중! 충격이 올 것입니다!!”
함장은 기가 막히다는 듯 보고한 병사를 쳐다보았다.
“무엇이?!”
쿠쿵―!!!
아까보다 더한 충격이 공중 요새를 덮쳐왔다. 병사들도 약간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선체 하단부 제3 포문 20% 효율 저하!! 나머지는 이상 없음!!”
“젠장! 요새까지 올라가기 전에 마법력이 떨어지고 있어! 왜 저렇게 높이 올라가 있는 거지!!”
리오가 손을 풀며 심하게 투덜대자 지크도 동참했다.
“쳇, 진언문도 범위가 짧아서 안 통해! 요새의 갑판까지 올라갈 수만 있다면 문제는 없는데!!”
둘에겐 충분히 요새까지의 거리를 공격할 수 있는 기술이 존재하고 있었다. 하지만 기를 대량으로 소모하는 기술이었기 때문에 지금의 그들 상황으로선 쓸 수가 없었다. 기를 모을 시간 동안에 요새의 폭격으로 야룬다가 박살 날 것은 뻔했기 때문이었다.
“으윽…! 제1 안전 주문이 풀어지면 저기까지 날아오르는 건 문제가 안 되는데…!!”
리오는 안타까운 듯 요새를 올려다보았다.
“난 아예 못 날잖아 멍청아! 만약… 타고 갈 생물이나 기구가 있다면…!!”
그때, 그들의 뒤에서 웃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흥분한 둘은 그곳을 쏘아보며 소리쳤다.
“누구냐!!”
그 웃음의 주인공은 망토를 펄럭이며 둘의 눈앞에 나타났다. 날카로운 뾰족귀에 늘씬한 몸매, 미소년 같은 얼굴을 가지고 있지만 눈에는 어쩐지 이상한 기운이 감도는 청년이었다.
“마음대로 날지 못하니까 너희들은 나보다 약한 거야. 이제야 절실히 깨달았나 보군. 후후훗….”
리오는 검을 거두며 퉁명스럽게 그 미청년의 이름을 불렀다.
“이제 오다니… 너무 느리잖아 바이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