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즈 나이트 – 89화
“크으윽, 공격하라! 공격하라!!”
제국 주변의 소국들을 점령할 때도 이 정도의 피해를 입은 적이 없던 함장은 눈에 핏발을 세우고 반격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병사들의 사기는 거의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피해가 큽니다! 지금의 공격으로 갑판의 21%가 파괴되었고 메인 브릿지도 손상을 입었습니다!”
함장은 끓어오르는 화를 참으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는 의자에 다시 앉으며 조용히 손을 올렸다.
“… 보고는 잘 들었다. 미그바 레이크의 방향을 변방기지 우로이탄으로 돌려라.”
그는 자신의 모자를 오른손으로 벗은 뒤 꽉 움켜쥐었다. 굴욕감 때문에 다음의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요새는 포기한다, 퇴각….”
리오는 요새가 천천히 방향을 북동쪽으로 돌리자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디바이너를 집어넣었다. 아직도 군데군데에 브레스를 퍼붓던 바이칼도 공격을 멈추고 리오가 있는 쪽으로 다가왔다.
“일이 명확해졌지, 바이칼?”
리오는 바이칼의 목에 올라타며 그에게 물었다.
「그런 것 같군. 간단해져서 오히려 편할 정도야.」
둘은 시커먼 연기를 내뿜으며 퇴각을 하는 공중 요새를 뒤로하고 야룬다 요새를 향해 귀환했다. 내려가며 리오는 이제 할 일이 확실해졌다는 생각을 가졌다.
“호랑이 굴로 들어가야지… 후훗.”
예상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생각보다 제국의 간섭이 빨라진 것에 리오는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속전속결로 가이라스 왕국의 일을 끝내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이 마음속에 들었다.
리오를 지상 가까이까지 데려다준 바이칼은 다시 변하기 위해 어디론가 사라졌고 리오는 피곤한 표정을 지으며 태라트가 있는 중앙지구로 향했다. 가는 도중에 1지구 쪽에서 달려오는 외부 주둔군들과 리오는 마주쳤다. 작센이 말을 탄 채 리오에게 먼저 달려와 상황을 물었다.
“아, 무사하군요 리오. 그런데 갑자기 나타난 드래곤은 도대체 뭡니까?”
리오는 자신도 모른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글쎄요, 저 요새가 나쁜 물건인 걸 아는 현명한 드래곤이었나 보군요. 어쨌든 태라트님에겐 행운이 따르는 모양입니다.”
작센은 다행이라는 표정을 짓다가 누군가가 생각났는지 이리저리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그, 그런데 바이나 부대장은 어디 있습니까? 맨 먼저 말을 타고 질풍같이 뛰어갔는데요… 설마 다친 건 아니지요?”
“아, 요새에서 날아온 조그마한 파편에 머리를 맞고 기절했었지요. 지크가 데리고 가까운 병원이나 의무병이 있는 곳으로 갔을 겁니다.”
그녀가 기절했다는 얘기를 들은 작센은 얼굴이 파랗게 변했다. 무심코 무슨 말을 꺼내려다가 애써서 삼킨 뒤 리오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태라트가 있는 곳으로 말을 다시 달려갔다. 그가 떠난 뒤 키세레와 다른 일행이 리오에게 달려왔다. 클루토는 신기한 것을 봤다는 듯 눈을 반짝이며 리오 앞에서 주절주절 얘기했다.
“리오! 봤나요, 요새하고 싸우는 그 큰 드래곤을요!! 우와아∼! 내 생전 그렇게 큰 드래곤은 처음 봤어요!!”
머셀도 그 이야기에 동참했다.
“제가 듣던 바하고는 영 딴판이었어요. 그렇게 큰 드래곤이 있을 줄은 몰랐어요, 제일 크다는 화이트 드래곤도 그보다는 훨씬 작았을 거예요. 그리고 드래곤의 체형은 약간 배가 통통한 편인데 그 드래곤은 갑옷과도 같은 비늘에 싸여 있었고요. 진짜 리오랑 같이 다니면 신기한 걸 많이 보게 되는군요.”
리오는 속으로 웃으면서 겉으로는 자신도 신기했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런데 얼굴하고 옷에 묻은 그을음은 뭐죠? 이곳은 포격도 그렇게 심하게 당하지 않았는데 말이에요.”
키세레가 옆에 다가서서 얼굴에 묻은 그을음을 손수건으로 닦아주며 묻자 리오는 약간 얼굴을 붉히며 운이 좋았다는 듯 웃어 보였다.
“아… 하하. 포격이 심하지 않아서 그을음만 묻은 거예요. 하하하….”
키세레는 손수건을 집어넣으며 살짝 웃었다.
“다행이네요 그럼… 후훗.”
“…… 자, 태라트님이 계신 곳으로 가세요. 그곳에 키세레 씨의 도움이 필요할지 모르니까요. 전 다른 곳을 둘러보고 뒤따라가지요. 그럼….”
리오는 손을 살짝 흔들며 다른 곳으로 걸어갔다. 키세레는 잠시 리오를 바라보다가 태라트가 있는 중앙지구로 의무병과 함께 향했다.
그들이 멀리 떨어질 때쯤 바이칼은 인간의 모습이 되어 옷을 만지작거리며 리오 앞에 나타났다. 그도 포격을 맞아서인지 얼굴과 옷이 약간 시커멓게 변해 있었다.
“어이구, 새까만 용제님이 나타나셨군.”
바이칼은 리오의 말을 듣고서 얼굴을 매만져 보았다. 손에 시커먼 그을음이 묻어나자 바이칼은 마법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손수건을 꺼내어 얼굴을 닦았다.
“젠장, 내 잘생긴 얼굴이 이렇게 되다니…. 그건 그렇고, 그 얼굴이 빨간 여자 말이야….”
“음? 그애는 네가 알아서 꼬시기로 했잖아?”
바이칼은 얼굴을 닦으며 계속 말했다. 그리 웃기는 얘기는 아닌 듯했다.
“그게 아니구, 그애 자기 입으로 드래곤 킬러라고 했지? 검도 분명히 드래곤 킬러라고 소리쳤고.”
리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때까지 리오는 그리 드래곤 킬러라는 직업을 중요하게 보지는 않은 상태였다. 하지만 용들의 왕인 바이칼의 경우에는 얘기가 달랐다.
“우리 아버지가 소환계에 계시다는 거 너도 잘 알지?”
바이칼은 근처의 건물 파편에 앉으며 얘기를 시작했다. 리오는 맞은편에 앉으며 바이칼의 흔치 않은 진지한 얘기를 듣기 시작했다.
“내가 아이였을 때, 700여 년 전에 말이야. 갑자기 아버지께서 환수계로 빨려 들어가 버리셨다는 얘기를 장로에게 들었어. 장로는 그 이유가 사고라고만 했는데, 내가 새로운 용제에 즉위한 후 진실을 알게 되었지. 아버지는 인간들 대신 싸워주시려고 환수계에 스스로 들어가신 것이었어. 거뜬히 이길 수도 있는 전투를 일부러 져주시고서 말이야. 결국에 그 인간들은 자신들을 세상에서 없애려는 마귀를 물리치는 데 성공했고 그 후로 난 아버지의 모습을 본 적은 한 번도 없어.”
리오는 턱을 괴고서 가만히 바이칼을 바라보았다.
“그 이야기를 들려주는 이유가 뭐냐?”
바이칼은 조금 후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을 했다.
“바로 내가 제일 싫어하는 무기와 인간들의 직업이 `드래곤 킬러’이기 때문이야. 훗, 그 인간들은 잘 쓰지도 못하는 고급 무기들을 가지면 거뜬히 드래곤들을 쓰러뜨릴 수 있다고 착각하지. 아버지를 쓰러뜨린 것처럼… 그래서 난 자신을 드래곤 킬러라 자칭하는 녀석들과 대결해본 후 그 녀석이 용을 물리칠 수 있는 녀석이면 살려주고, 그렇지 못한 녀석이면 없애버린 후 그 녀석이 가지고 있던 드래곤 킬러를 파괴해버렸지. 내 드래곤 슬레이어는 무기가 좋길래 그냥 쓰고 있는 것이지만 말이야.”
리오는 굳은 표정을 지으며 바이칼을 바라보았다.
“그럼…, 바이나도 그들처럼 싸운 후 없애버릴 거냐?”
바이칼은 일어서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글쎄다, 내 맘이지 뭐. 하지만 없애든 안 없애든 그건 이번 일이 끝난 후야. 나도 가스트란 사냥에 나서야 할 처지니까.”
리오도 일어서며 전에 들었던 말을 꺼내었다.
“루브레시아 공작 때문에 그러지?”
바이칼은 고개를 끄덕였다.
“잘도 아는구나. 장로 노인네가 나에게 그러더라고, 루브레시아 공작이 가스트란의 힘에 의해서 부활했다고 말이야. 이미 힘의 반을 찾았다고 전해지더군. 내 종족들도 몇 명 피해를 입었고… 그 녀석이랑 싸울 수 있는 드래곤은 나뿐이니까, 어쩔 수 없지.”
“그래… 그렇다면 가이라스 수도까지 같이 갈 거냐?”
“그래야 하겠지. 하지만 전투에 참가하는 건 내 맘이야.”
리오는 맘대로 하라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바이칼도 살짝 웃어 보였다. 두 청년은 천천히 중앙지구로 발걸음을 돌렸다. 어떻게 바이칼의 정체를 둘러댈 것인가를 생각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