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즈 나이트 – 92화
키세레는 원래 마련되어 있던 병동과 임시 천막으로 지어진 병동을 수시로 오가며 환자들을 돌보고 있는 중이었다. 3일이나 계속 환자들을 돌본 탓인지 키세레도 매우 지쳐있는 상태였다. 그러나 환자들이 그녀의 치료를 받고서 점점 나아가는 것을 보면 그녀의 마음도 어느 정도 편해졌다.
“후우….”
정오가 되어 잠시 쉬는 시간이 왔을 때, 키세레는 창가에 턱을 괴고서 조용히 창밖을 바라보았다. 매우 지친 표정이어서 지나가는 환자들마다 조금 쉬라는 말을 한두 마디씩 했다.
“누가 수녀 아니라고 했나, 저러다가 환자 수 하나만 느는 게 아닌지 모르겠네….”
리오는 병원에서 멀찍이 떨어져 창가에 몸을 기대고 서있는 키세레를 보며 중얼거렸다. 그는 슬그머니 망토 자락 안에서 봉지에 싼 과일 몇 개를 꺼내 보았다. 원래 생각대로라면 키세레의 손에 쥐어주고도 남아야 할 물건이었지만 이런 일은 해본 적이 거의 없는 리오여서 과일은 고스란히 체온으로 덥혀지고만 있었다.
“지나가는 사람에게 부탁할까…?”
하지만 사람들은 거의 다 상업지구나 복구에 투입된 상태라 지나가는 사람도 뜸했다.
곤란에 빠진 리오 앞에 조금 후 구세주가 걸어왔다. 3일 동안 사령실 잡일을 해주던 티퍼였다. 그 아이도 역시 피곤한 표정이었다. 리오는 반갑게 손을 흔들며 티퍼를 불러 세웠다.
“어이! 티퍼야!!”
티퍼는 터벅터벅 걸어가다가 리오가 부르는 소리를 듣고서 그곳으로 달려갔다.
“아, 리오. 무슨 일이에요?”
리오는 봉지에서 과일을 하나 꺼내 티퍼에게 던져주며 말했다.
“이거 먹으면서 말해라, 피곤해 보인다.”
티퍼는 과일을 받자마자 한 입 베어 물었다. 예전의 버릇이 나온 듯했다.
“… 과일이 왜 이리 미지근해요…?”
“그냥 먹어, 그건 그렇고 부탁이 있는데 말이지. 들어줄래?”
과일의 반을 이미 먹어치운 티퍼는 입술을 훔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말하세요.”
“이 과일 말이지, 저기 창가에서 턱 괴고 멍하니 나무 보고 있는 여자 보이지?”
티퍼는 눈을 가늘게 뜨며 리오가 가리킨 방향을 보았다.
“… 예, 원통 모자 쓰고 있는 저 여자요? 얼굴이 잘 안 보이네…?”
“찾기 쉬울 거야. 저분에게 이 과일 좀 건네줘, 그거면 된다.”
티퍼는 얼굴을 약간 찡그리며 귀찮다는 표정을 지었다.
“에이… 저 정도 높이면 리오가 부웅― 하고 뛰어서 도달할 수 있는 거리잖아요, 쉬운 일만 나에게 시키고….”
리오는 티퍼의 목을 팔로 살짝 조이며 협박 아닌 협박을 하기 시작했다.
“제발 좀 들어주라. 쉬우니까 너에게 부탁하는 거잖아. 해줄 거지?”
“아, 알았어요! 봉지나 주세요, 그리고 힘 좀 빼고요!!”
리오는 씨익 웃으며 티퍼를 풀어준 뒤 봉지를 건네주었다. 봉지를 받은 티퍼는 바로 병동으로 들어갔다. 하기가 싫긴 했지만 전에 리오에게 신세 진 것을 생각하면 할 수밖에 없었다.
“어디… 5층 창가에 있었지…?”
계단을 뛰어 올라가던 티퍼는 3층 계단에서 돌아 올라가다 회색 복장의 사나이와 옷깃을 스쳤다. 티퍼는 올라가며 죄송하다고 말했다. 회색 옷의 사나이, 라칸은 티퍼의 뒷모습을 보며 그 아이의 모습을 언젠가 한 번 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블레이크님의 아들… 비슷하게 생겼는데?”
조나단 블레이크. 최강의 템플 마스터란 이름을 남기고 홀연히 사라진 가이라스의 전설적인 인물이었다. 새로운 왕비가 간택된 뒤, 어떤 임무를 처리하고 스스로 그 임무에 대한 책임을 뒤집어쓰고 아들과 함께 사라진 그는, 라칸이 가이라스 3세를 포함해 존경했던 두 명의 인물 중 하나였다.
“… 나중에 또 보게 되겠지….”
티퍼는 숨을 헐떡이며 키세레가 있는 창가에 도착했다. 티퍼가 뒤에 있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키세레는 계속해서 창문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가벼운 복장을 입고 있는 긴 흑발의 뒷모습을 본 티퍼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너무나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리오가 직접 전해주지 않을 만도 하구나….’
티퍼는 천천히 봉지를 들고 키세레에게 걸어갔다.
“어머…?”
다른 곳에 눈을 돌린 키세레는 병동의 한 나무 아래에 리오가 기대어서 자신 쪽을 보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었다. 리오는 키세레와 눈이 마주친 것을 눈치채고 도망치듯 병동 밖으로 걸어 나갔다. 키세레는 그의 뒷모습을 보고는 생긋 웃었다.
“후훗… 눈 한번 좋은 사람이야….”
“저어….”
키세레는 누군가가 뒤에서 아이가 자신을 부르는 듯한 소리가 들려오자 똑바로 서며 뒤를 돌아보았다. 살짝 미소를 띄우고서….
“예, 볼일이 있으신가요…?”
“…!”
티퍼는 그 자리에 멈춰 서서 키세레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들고 있던 과일 봉지도 떨어뜨리고 말았다. 티퍼가 과일 봉지를 떨어뜨리자 키세레는 깜짝 놀라며 표정을 풀었다. 그와 동시에 그녀의 몸도 굳어지고 말았다.
“세, 세레나 누나…!”
“티… 퍼?”
티퍼는 조금씩 그녀에게 걸어갔다. 키세레도 손으로 입을 가린 채 몸을 떨고 있었다. 티퍼의 표정이 울음으로 일그러졌다.
“누나! 누나 맞지!! 세레나 누나!!!”
키세레는 달려오는 티퍼를 맞아 팔을 벌려 자신의 동생을 안아주었다.
“티퍼…! 미안해, 정말 미안해…!!”
거세게 티퍼를 안은 탓인지 키세레가 언제나 쓰고 있던 모자는 바닥에 떨어져 몇 바퀴를 굴렀다. 둘은 꼭 껴안은 채 바닥에 무릎을 꿇고 계속해서 재회의 기쁨을 눈물로 보여주었다.
리오는 병동의 담장 아래에서 팔짱을 낀 채 씨익 웃었다.
“… 진작에 만나게 해줄걸… 나도 몰랐잖아.”
조용히 리오는 자신의 망토를 펄럭이며 어디론가 걸어가기 시작했다. 두 명의 재회를 속으로 축하해주며….
키세레와 티퍼는 별실에 앉아 그동안의 이야기를 나누었다. 수도를 아버지와 떠난 이유와, 숲속에서 마병과 싸운 연유로 아버지가 중독된 것, 그때문에 자신은 도둑의 소굴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는 것….
그 이야기를 들으며 키세레는 눈물을 그칠 줄 몰라 했다. 남자아이인 티퍼도 마찬가지였다.
“난… 누나를 다시는 못 보는 줄 알았어. 옆집 형의 유골이 도착했을 때 아버지와 난 모든 것을 포기했었어. 아버지는 템플 마스터의 직위도 버리시고 나와 함께 여행을 떠나셨지… 그리고 여기까지야….”
“수도원에서 수녀가 되기 위해 난 나이도 속이고 이름도 속였단다… 아버지와 너의 얼굴을 똑바로 볼 수가 없었어…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야.”
티퍼는 눈물을 소매로 훔치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난 누나를 만난 것으로도 족해. 사실 처음에 누나의 뒷모습을 봤을 때 누나인지 못 알아봤어, 그저 리오가 무언가를 전해줄 만한 예쁜 여자구나라고만 생각했을 뿐이야.”
키세레는 깜짝 놀라며 티퍼를 바라보았다.
“리, 리오 씨가?!”
티퍼는 아까 떨어뜨린 과일 봉지를 들며 말했다. 떨어질 때의 충격으로 봉지가 약간 찢어져 있었다.
“응, 나에게 이 과일 봉지를 누나에게 전해주라고 부탁했어. 아마 리오는 알고 그랬을 거야. 예전에 나와 약속을 했었거든, 누나를 꼭 찾아준다고 말이야…. 정말, 리오는 약속을 지켜주었어.”
키세레는 다시 한번 티퍼를 껴안으며 눈물을 흘렸다.
“어떻게… 어떻게 이 빛을 갚아야만 하지…? 난 가진 것도 없고… 그에게 해준 일도 없어, 그저 지금까지 도움만을 받아왔을 뿐이야…! 게다가 그를 처음 만났을 땐….”
“천천히 갚아나가면 될 거야… 리오가 모르는 사이에 갚아나가면….”
둘의 얘기는 저녁이 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티퍼는 그날 저녁, 숙소를 키세레의 숙소로 옮겼다. 이제는 떨어질 수 없다는 의지가 엿보이는 듯했다.
복구 시일이 끝나고, 병사들은 이틀 후의 작전을 위해 휴식에 들어갔다. 잠이나 자겠다며 숙소로 달려가는 병사도 있었고 고향에 있는 가족들에게 편지를 쓴다는 병사도 있었다.
야룬다 요새의 젊은이들과 예전 정규군이었던 병사들은 하나둘씩 저항군에 가담했다. 태라트가 설득한 건 아니었지만 복구 작업에 병사들을 투입시킨 것이 인기의 요소로 작용했다. 그 덕분에 모은 새로운 병사들은 1000명가량, 그중에서 800여 명은 전투 경험이 있는 군인이어서 전력에 매우 도움을 주었다.
야룬다 요새를 태라트가 성공적으로 점령했다는 소식을 들은 각지의 무기 상인들은 야룬다로 모여들었다. 그들도 이상해진 가이라스 왕의 정책에 의해 피해를 입은 상인 중의 하나였다. 그들은 자진해서 몇 달간 팔지 못했던 무기를 태라트에게 주면서 이번에는 꼭 성공해달라는 이야기를 몇 번이고 했다.
하루가 지나고, 태라트는 작전의 최종 점검을 간부들과 상의 하에 실시했다.
저항군 총병력은 12,000여 명, 그리고 식량과 자재가 떨어질 염려는 없었다. 무기들과 방어구들도 거의 100%에 가까운 보급률을 자랑하고 있었으므로 문제는 없었다.
라칸이 말한 가이라스 수도의 정규 병력은 약 삼만, 그러나 사기가 많이 떨어져 있으므로 작전만 정확히 실행된다면 이기는 데 어려움은 없다고 라칸과 군사 작센이 입을 모아 말했다. 문제는 아사신, 트로이, 바리언 나이트의 초정예부대를 어떻게 상대하느냐였다. 그러나 라칸의 대답은 의외로 간단했다.
“그들은 템플 나이트가 맡겠습니다. 태라트님은 염려 마시고 저에게 모든 것을 맡겨주십시오.”
하지만 아무리 템플 나이트가 강하다고 해도 세 개의 정예부대에 대해서 이길 확률은 극히 적었다. 협공이라도 해온다면 그야말로 서적에나 적혀있는 이름이 되어버리고 마는 위험한 모험이었다. 태라트는 처음엔 반대했지만 라칸의 흔들리지 않는 의지를 확인한 뒤 결국 그의 뜻대로 하도록 허락하게 되었다.
“… 저도 사실은 자신이 없지만, 만약 그분께서 저희에게 다시 돌아와 주신다면 제가 생각하고 있는 작전은 거의 성공할 것입니다.”
“`그분’이라고요?”
태라트는 더는 묻지는 않았다. 다른 얘기가 더 중요했기 때문이었다.
“부대는 두 개로 나뉘어집니다. 템플 나이트 부대만 독립적으로 움직이게 되겠지요. 이번 작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열입니다. 중보병 부대와 궁병들의 조화가 잘 맞게 되면 아마 정예부대를 만나는 불상사가 생기더라도 피해를 최소한으로 줄일 수 있을 것입니다. 모든 분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이번 작전에서 최대의 난관은 아마 정문 돌파가 될 것입니다. 성벽을 넘어가는 것은 수가 적은 저항군에겐 어려운 일입니다. 돌파밖에는 없지만 그것도 어렵겠지요. 특별한 작전은 세울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공성전처럼 어려운 것은 없으니까요. 두 번째로 이번 작전에서 중요시되는 것은 적군을 얼마만큼 설득하느냐입니다. 성문 돌파 작전 때 그들을 많이 설득할수록 아군의 피해를 줄일 수 있습니다. 그것은 태라트님과 바이나 부대장께서 맡아주셔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성문을 돌파하면 만약 그 시기가 새벽이라 해도 본성에 진군은 하지 않습니다. 도시의 상황을 정리한 후에 다음 날이나 이틀 후에 본성에 대한 총공격을 실시합니다. 도시에서의 진로를 완전히 다듬어 놓으면 저항군은 더욱 기동력이 높아져 본성의 적군을 유린할 수 있을 것입니다. 본성에 대한 작전은 성문 돌파 후에 다시 회의를 통하여 설명해 드릴 것입니다.”
작센의 설명을 다 들은 간부들은 태라트가 일어서자 모두 같이 일어섰다. 태라트는 자신의 검, 하이바렌의 자루를 가슴에 가져가며 자리에 있는 모두에게 말했다.
“내일이면 시작됩니다, 여러분… 어떤 일이 일어나도 우리들의 궁극적인 목적을 잊지 말아주십시오. 우리들이 피를 흘려서, 가이라스 왕국, 아니 세계의 모든 종족들에게 행복의 웃음을 짓게 할 수 있다면, 우리의 목적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 여러분들에게 행운이 있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