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담에 떨어져도 출근을 해야 하는구나 207화
“아차차! 그건 팀장님 데스크로 보내면 됩니다, 박하 요원님.”
“예…!”
고영은은 막 정리한 자료 뭉치를 상사의 데스크에 옮겼다.
이번에 목격된 신규 초자연 재난에 관한 정보들이었다.
이제는 어둠보다 재난이라는 표현이 더 익숙해지고 있다는 것에 짧은 감상을 느끼면서.
‘후우.’
고영은은 자신의 책상에 앉았다.
그러자 같은 사무실을 쓰는 요원들이 복도에서 나누는 잡담이 희미하게 들려온다.
“…하게 됐지. 현무 1팀….”
“근데 그 신입은 나라도 그랬을 것 같…….”
“…….”
신경이 확 곤두섰다.
그 정도만 들어도 누구에 관한 이야기인지 알 수 있었다.
근 2주째 재난관리국 현장 요원들 사이에서 입에 올리기 조심스러워하면서도 화제인 것.
포도 요원.
바로 그녀의 스파이 동기에 관한 이야기다.
김솔음의 수감, 출소, 그리고 실종에 관한 말들.
그렇다.
고영은의 동기는 스파이 업무에 실패하고 실종됐다.
…그나마 잡히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할 수 있을까?
정황상 호 이사가 걸었던 금제가 들통나면서 무슨 일이 일어난 것 같은데, 쉬쉬하는 분위기상 쉽게 물어보기가 어려웠다.
수감 중 일이 좀 심각해졌다가 다시 회복됐었다는 것.
그리고 실종 후에도 김솔음에 대한 현장 요원들의 분위기가 그렇게까지 나쁘지 않다는 것.
…현무 1팀의 소식이 확 줄었다는 것.
이 정도만 고영은이 신입 요원이라는 위치에서 확실하게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물론 김솔음이 유리 감옥에서 나오자마자 증발하듯 사라지면서 뭘 더 알아내기도 어렵고 말이다.
‘도망…치신 거 맞겠지?’
고영은은 걱정으로 머리가 곤두섰다가도 결국 한숨과 함께 마무리하곤 했다.
괜히 행방을 알아내려고 하다가 정보를 흘리면 안 된다.
만일 김솔음이 성공적으로 도망간 거라면 민폐일 확률이 높고, 자신의 정체까지 들통날지도 모를 위험한 시도였다.
서로에게 안 좋았다.
자신이 김솔음과 제법 안면이 있는 데다가, 같은 신입이기 때문에 안전상 감시당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면 더더욱.
‘…스파이로 의심받고 있는 것 같기도 한데.’
모르겠다.
재난관리국 사람들은 분명 선량했지만, 천연덕스럽게 아닌 척 사람을 떠보거나 아무렇지 않게 핵심을 파고드는 일도 잘했다.
‘그렇겠지. 요원이니까.’
어쨌든 살얼음을 걷는 것 같은 스파이의 심정과는 다르게 특별히 요원들의 태도 변화는 없었다.
갑자기 유리 감옥에 끌려가는 일도 없었고 말이다.
‘그건 다행이지만….’
…솔직히, 막막하다.
들어온 셋 중 하나는 오염으로 격리, 하나는 실종.
남은 건 자신뿐인데, 신입 혼자서 멸형급 재난 문서를 탈취하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에 가까웠다.
…자신이 호 이사라면 이쯤에서 손절할 것 같았다.
‘하지만 버텨야 해.’
그리고 할 일을 해야 한다.
고영은은 패닉에 빠지지 않기 위해 차분하게 셈을 해갔다.
‘침착하게 하나씩.’
일단 흔적을 더 말끔히 처리하자.
김솔음과는 그녀가 따로 개통해 둔, 명의가 다른 스마트폰으로만 연락했었다.
그것도 정리해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리하여 그날 저녁, 퇴근한 그녀는 오피스텔로 돌아가자마자 공기계를 찾았다.
일부러 정교히 숨겨두는 대신, 마치 이전 폰처럼 낡은 잡동사니 두는 서랍에 대충 방치해 두었다. 그편이 차라리 무심코 지나치기 쉬우니까.
그리고 전원을 켜는 순간.
마찬가지로 일부러 번호를 여기저기 뿌리며 방치한 스팸 문자들이 우르르 쏟아졌다.
상담실 권유로 위장한 호 이사의 연락마저도 스팸처럼 보일 정도로.
“후우.”
고영은이 차례로 스팸을 클릭해 모조리 삭제하고 있을 때였다.
[태평하게 앉아있지 말고 내리세요! 이번 역에서 ★특가할인★ 강남역…]
손이 멈췄다.
“…잠깐만.”
태평, 내리세요, 이번 역….
“…!”
벼락 맞은 듯이 기억할 수밖에 없었다.
심연교통공사의 지하철.
이건 그 미친 입사 괴담을 같이 겪어온 사람만 알 수 있는 암시였다. 그리고 이 시점에서 이걸 스팸인 척 보낼 만한 사람은…….
하나뿐이다.
고영은은 당장 해당 문자를 클릭했다.
[태평하게 앉아있지 말고 내리세요! 이번 역에서 ★특가할인★ 강남역 할인폰판매영업점 왼쪽 카운터로 오직 17일 21시까지만 (무료수신거부)]
“…….”
장소와 시간.
고영은은 재빨리 인터넷으로 검색했다.
강남역에 있는 할인폰판매영업점을.
그리고 한 시간 후.
고영은은 강남역 할인폰판매영업점 근처에 있는 물품보관함 락커를 발견하게 된다.
“…….”
처음에는 설마 매장 앞에서 만나자는 건가 싶었으나, 문자에 고지된 21시가 넘어도 아무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러다가 ‘왼쪽 카운터’에 주목해 매장 왼쪽을 보자, 물품보관함으로 가는 통로가 단번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여기라고?’
그녀는 머뭇거리다가 물품보관함의 칸들을 보았다.
17번 칸이 들어있었다.
문자에 명시된 숫자.
“…….”
그렇다면.
비밀번호 칸에 마찬가지로 문자에 명시된 숫자의 조합, 1721을 입력하자….
삐리릭.
“……!”
락커가 개방되었다.
고영은은 요금 지불을 마친 카드를 황급히 챙기며, 락커의 안을 들여다보았는데….
그 안에는, 작은 종이봉투가 있었다.
일부러 익숙지 않은 손으로 적은 듯, 삐뚤빼뚤한 메모가 붙은.
집에서 열어보세요
“…….”
고영은은 얼른 봉투를 챙겨서 집으로 돌아갔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뭐지?’
정황상 이걸 남긴 사람은 김솔음이 거의 확실했다.
하지만 대체 뭘 건네는 거란 말인가.
설마 이걸 통해 정보를 주고받는 걸로 스파이 업무 방침이 바뀐 건가, 이런저런 생각에 싸인 채 고영은은 식탁에서 봉투를 열었다.
‘상자 둘?’
검은 상자가 있었다.
고영은이 의아해하면서 그중 하나의 상자를 개방한 순간….
오색찬란한 빛이 새어 나왔다.
“…!!”
백일몽 직원은 도로 기겁하며 상자를 닫았다.
‘소, 소원권!’
저 홀로그램 오로라 같은 미친 광채의 물약은 틀림없이 소원권이었다!
‘김솔음 씨!’
설마 자기 혼자 스파이 일을 해결해 버리고 소원권을 타온 건가? 아니, 무슨 수로? 이거 현실인가? 현실 맞나? 지하철 락커에 소원권이… 잠깐만.
‘…상자가 두 개였잖아.’
고영은의 머릿속에서 심장이 뛰는 소리가 울렸다.
다른 쪽 상자로 손을 뻗어서, 그것을 개봉하자….
마찬가지로 휘황찬란한 빛이 빠져나온다.
‘맙소사.’
그런데, 그 사이로 작은 쪽지 하나가 떨어졌다.
“…!”
얼른 주워들었다.
영은 씨.
저희 일은 끝났습니다.
원하시는 것을 하세요.
다시 복귀하실 필요 없습니다.
“…….”
머리가 멍할 정도의 충격.
하지만 쪽지의 내용은 끝나지 않았다.
추신) 가능하다면 다른 상자는 본래 받으셔야 하는 분께 전달을 부탁드립니다. 불가능하다면 그때까지 보관을 부탁드립니다.
“아니…!”
내가 중간에 빼돌리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고작 이런 쪽지로 소원권을 두 병이나 덥석 넘기는 건데!
…하지만 그렇게 말하면서도, 이 선량하고 머리 좋은 스파이는 알았다.
자기가 이 말을 지킬 것이란 점을.
“…….”
고마움, 부채감, 환희, 부담감이 섞인 모든 것이 머릿속을 일렁이게 한다.
그래서….
고영은은 모종의 결심을 하나 더 마쳤다.
그리고 무언가를 챙겨 집에서 뛰어나갔다.
* * *
‘잘 전달됐네.’
나는 카페에서 마시던 음료가 바닥을 드러낸 것을 보았다.
여기는 강남역 지하상가의 카페.
고영은 씨가 지하철 락커에서 폰을 가져가는 모습을 지켜본 것도 벌써 한 시간 반 전이었다.
그사이에 다른 특이사항은 없었으니, 슬슬 일어나도 될 것 같았다.
‘이걸로 된 거야.’
…고영은 씨라면 소원권을 빼돌리지 않고 주인에게 돌려줄 것이다.
그리고 아직 재난관리국에서 근무 중이니, 나보다 접근할 기회도 잦겠지.
‘…재난관리국이 적성에 더 맞아 보이기도 하셨고.’
이제 스파이 업무 자체가 끝났으니, 원하신다면 재난관리국에서 더 근무하실 수도 있을 것이다.
다행히 재난관리국 요원들의 미행도 없었다.
…잘 마무리된 것 같다.
이제 나에게 남은 소원권 물약은, 하나뿐.
‘그럼 이제 나도 마시면….’
그렇게 생각할 때였다.
물품보관함 쪽으로 낯익은 인영이 뛰어서 돌아왔다.
“…!”
…고영은 씨다.
뭐가 잘못된 건가?
그러나 고영은 씨는 침착하게 소원권이 들어있던 17번 락커를 다시 개방하더니, 그 안에 뭔가를 집어넣고 꽉 닫았다.
그러고는 다시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자리를 떠났다.
“…….”
락커에 뭘 넣으신 거지?
‘설마… 장허운 씨 몫의 소원권을 도로 돌려놓으신 건가.’
그럴 수도 있다. 나라도… 지금 격리되어 언제 다시 만날지 모를 다른 사람에게 소원권을 전달해 달라는 부탁은 들어주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래.’
애초에 무리한 부탁이었다.
나는 고영은 씨가 완전히 사라지고 미행이 없었던 것까지 확인할 정도의 시간이 흐른 후, 조용히 카페에서 나와서 물품보관함으로 향했다.
그리고 17번 락커를 열었다.
…그 속에는 내 예상대로 상자가 있었다.
‘어쩔 수 없지.’
나는 그것을 챙겨 들었다.
그런데… 묘하게 무게가 다르다.
“……?”
재빨리 화장실로 들어가서, 칸에서 조심스럽게 상자를 열었다.
그러나 오색찬란한 빛 대신 여린 푸른 빛이 나타났다.
새순 같은 연두빛.
C등급 재생 물약이었다.
“…….”
나는 멍하니 그것을 보았다.
상자 안에는 쪽지가 붙어 있었다.
내가 붙였던 것처럼.
최대한 해볼게요.
감사합니다.
몸조심하세요.
뭐라 말할 수 없는 기분이 속에서 휘몰아친다.
자기도 포인트로 겨우 한 병 샀을 텐데.
아마도 내가 팔이 없는 것을… 재난관리국에서 나오며 도깨비불로 대체하기도 어려워졌다고 생각해서 주신 모양이었다.
‘…감사합니다.’
나는 상자를 조심히 챙겨서 소중히 품에 넣었다.
그날 밤.
나는 재생 물약을 들이켰다.
그리고 멀쩡해진 양손으로 작별인사들을 남겼다.
메시지 전송 예약.
내일 아침으로 해두었다.
이전 D조의 상사들과… 몇몇 내가 신세를 졌던 사람들에게 보내는 문자들이다.
‘경비반장에게도 한 번 더 보내두자.’
주로 안전히 퇴사하게 되었으니 걱정하지 말라는 이야기였다.
이 과정에서 이자헌 과장에게 문자를 적다 보니 식은땀이 좀 나긴 했지만 말이다.
‘외계인 상점 할부….’
정말 죄송합니다. 할부 시작하자마자 야반도주하게 됐습니다.
대신 내가 가진 장비 일체를 지하철 물품보관함에 넣어두고 이자헌 과장에게 위치와 비밀번호를 보내두었다. 이걸로 부디 봐주시길 바란다….
“후우.”
그렇게 모든 정리가 끝났다.
남은 건… 도깨비불.
나는 내 주변을 맴돌며 내가 하는 일들을 관심 있게 보던 작고 푸른 불덩이에게 재생된 팔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이제 괜찮아. 봐봐, 팔도 생겼지? 돌아가도 돼.”
하지만 도깨비불은 마치 거부하듯이 번뜩이며 내 책상 앞에 앉았다.
곤란했지만…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그럼 잠깐만이라도 같이 있자. …내가 없어지면, 관리국으로 돌아가는 거야. 알았지?”
도깨비불은 풀 죽은 기색으로 고개를 끄덕이듯 움직인다.
그럼 이제 정말로 하나만 남았다.
마지막.
나는 작고 복슬거리는, 분홍빛 토끼 인형을 꺼내 들었다.
“…….”
숨을 들이켜며, ‘착한 친구’ 인형을 침대 다리에 세워두고 조명을 비춰 그림자를 드리웠다.
현실에서도 이야기할 수 있도록.
-오, 친구!
유쾌한 사회자의 목소리.
이제는 익숙해진 그 귀를 끄는 듯한 억양과 톤이 매끄럽게 말을 건넨다.
-오늘 이 호텔은 제법 나쁘지 않군요. 작고 안락한 공간이 마치 노루 씨와 지내던 방을 떠올리게 합니다. 혹시 소원성취 기념의 밤입니까?
“비슷해.”
이제 돈을 아낄 필요도 없으니까.
그리고….
“…….”
–친구?
“너는 괜찮아?”
-무엇이 말입니까?
“내가 소원권을 사용하는 것 말이지.”
계속 마음에 걸렸으나, 혹시 엄청난 대답이 나올까 두려워 묻지 못했던 질문.
“내 소원이 뭔지 알고 있잖아.”
사회자는 이미 알고 있다.
내 생각이나 지식을 어느 정도 들여다보고 있다면, 아니, 최소한 경비반장과 대화하던 시점에서 깨달았을 것이다.
내가 이 세상에서 떠나는 소원을 바란다는 것을 말이다.
“그런데 질문 한번 없어서.”
거대한 인형의 그림자를 보며, 말을 이었다.
“이상했거든.”
-오….
“혹시 내가 실패할 거라고 생각해서, 카타르시스를 위해 조용히 기다리고 있는 건가 싶기도 한데.”
-맙소사.
-다시 말하지만, 친구, 나는 당신의 실패를 바라지 않습니다…. 단지 부적절하게 관여해서 흐름과 장면을 망치는 짓을 하지 않을 뿐이지요!
-그리고 지금의 경우에는 그저….
장갑을 툭툭 두드리는 듯한 소리.
-더없이 명확한 상황이라 질문이 필요하지 않을 뿐입니다.
–친구는 집에 돌아가고 싶어 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더 멋지고 새로운 집을 소개한 이 브라운의 권유는 거절했지요….
등골이 서늘해진다.
그러나 사회자의 말투는… 여전히 평온하고 유쾌했다.
-그렇다면, 노루 씨의 선택이 이 쇼를 어디로 이끄는지 지켜보는 게 사회자로서의 존중이겠지요.
“…….”
-원하는 대로 하십시오, 친구.
-그것을 위해 지금까지 노력했으니, 이제 결과를 볼 차례입니다.
토끼 인형의 그림자가 일렁이며, 마치 손으로 무언가를 가리키는 것 같다.
탁자 위에 놓인 소원권 물약.
“…후우.”
-갑시다. 피날레와 엔딩으로!
나는 소원권을 잡아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