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담에 떨어져도 출근을 해야 하는구나 305화
열차 쉘터의 8번 칸.
기이하게도 벽면의 나사를 흉내낸 백일몽 물약 뚜껑을 풀자, 그 안에서 나온 쪽지를 보며 나는 굳어 있다.
정확히는 그것에 적힌 ‘작성한 자’의 이름을 보고.
‘…이강헌?’
-K.LEE: 저 C조 이강헌 대리라고 합니다ㅎㅎ
그건 최 요원의 위장 신분이었다.
정확히는, 백일몽 주식회사에서 정보를 캐어내기 위해 도용했던 직원 신분!
그럼….
이게 도용당한 그 직원이 남긴 쪽지라고?
‘잠깐만.’
나는 다급히 글을 읽어내렸다.
아마 유쾌연구소의 연구가 실패하고 고등급 어둠이 펑펑 터진 요지경에서 내 글을 읽겠지?
이거 세광특별시 말하는 거잖아!
(혹시 ↑이 문장 읽고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면 그냥 마지막 줄로 건너뛰고 나사 도로 넣어주세요ㅎㅎ)
여기서부터 꿀팁 나간다ㅎㅎ
워낙 상황이 미쳐 돌아가니까 목숨 부지도 어려울 거 아는데,
사실 이 어둠을 아예 폐기할 방법이 있어
숨을 들이 삼켰다.
답은 백일몽 주식회사야
뭐?
근본적으로는 백일몽이 연구소의 뒤통수를 쳐서 이 꼴이 난 거거든. 진짜 대단한 회사야, 아무튼….
이 사태를 수습하고 싶어?
나는 나도 모르게 다급하게 시선을 내렸다.
그럼 백일몽 주식회사가 베껴 간 꿈 배양기를 어떻게든 빼돌려
“…!!”
그걸 아직 남아 있는 유쾌연구소 시설에 설치해 봐
이 쪽지를 발견했다면 높은 확률로 이 회사 직원일 테니 시도는 해볼 수 있겠지
미안한데 나는 못 하거든
행운을 빌어!
-이강헌
그게 쪽지의 끝이었다.
‘이건 또 무슨 미친 소리야.’
뒤통수가 얼얼해지도록 단도직입적이며 터무니없는 정보를 읽는 자의 머릿속에 쏟아놓은 채로.
‘백일몽?’
나는 반사적으로 떠올렸다.
내가 세광특별시 밖에서 발견했던 꿈 배양실.
프로토타입의 꿈결 기기가 있던 그곳의 연구 노트를 다 뭉개듯 적어놓은 처절한 문구를.
-속았다속았다속았다속았다속았다속았다속았다속았다속았다
사실 정황만 봐도 퍼즐처럼 맞물린다.
백일몽은 유쾌연구소의 연구와 물약을 고스란히 가져다가 쓰고 있을뿐더러, 본관 지하에서는 유쾌연구소의 과거 모습이 출몰하는 괴담까지 있었다.
…사실 정통적으로 괴담이 생겨나는 연유 중 하나가 곧장 떠오르지 않는가.
‘원한.’
유쾌연구소은 백일몽에게 뼈 깊은 원한이 생길만한 사건을 겪었다는 것.
‘…게다가.’
내가, 소원권을 마시고 깨어났던 그 부서진 꿈 배양기 옆에 있던, 연구 노트.
백일몽이 알아냈다 들이닥쳤다 또 속임수였다 이름님을 빼앗기기 전에 빼돌려 가장 사람이 많을 장소에 숨겼다
‘또 속임수였다.’
그 표현은 이미 당해본 적이 있다는 뜻이다.
‘대체 이놈의 미친 제약회사는 무슨 짓을 하고 다닌 거냐고.’
괴담 세계관에서 직원 갈아 넣는 제약회사의 설립 자체에 끔찍한 괴담이 얼룩진 건 사실 놀랍지도 않았지만 말이다.
그리고 말이다.
‘…백일몽 꿈결 기기를 빼돌려서 유쾌연구소 시설에 부착하라고?’
맥락상, 그리고 이게 발견된 위치상… 마치 그러면 세광특별시의 멸형급 재난이 종결될 거라는 뜻 같지 않은가.
“…….”
나는 재빨리 주변을 둘러보았다.
8번 칸에는 나밖에 없었으나, 분명 많은 세광특별시의 생존자들이 이 칸을 이용해 봤으리라.
‘그것까지 예상하고 이 나사를 설치했다면….’
분명 생존자 중 백일몽 주식회사의 직원이 있다면 보라고 해놓은 것이다.
그걸 내가 꺼낸 것이고.
‘…….’
[고민이 많아 보이는군요. 친구, 이 브라운은 언제나 들을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재치 있는 조언은 덤이지요.]
고민… 이라기보다는.
다른 방향으로도 생각이 흘러서 더 심란해졌기 때문이다.
이 쪽지의 말이 진실이라면, 역으로 추론해 볼 수 있는 사실이 있기에.
꿈 배양기를 다시 설치해서 이 사태가 해결된다면 말이다.
‘…결국 꿈 배양기가 잘못되어서 세광특별시가 이 지경이 됐다는 뜻이잖아.’
[호오!]
‘그런데 백일몽은 지금 그 꿈 배양기를 펑펑 쓰면서 기업을 키우고 있고.’
섬뜩한 레드플래그였다.
그리고 나는 알고 있다.
이 위키 세계관의 부제를.
아니… 사실 진정한 제목을.
[종말예언 : 어둠탐사기록]
‘…….’
미치겠네.
나는 한숨을 참으며 쪽지를 도로 접었다.
머리가 지끈거리고 심란하다.
‘어디까지 생각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다.’
이 수상쩍은 쪽지를, 앞으로의 미래와 내가 할 일을.
나는 뒤척거리며 옆으로 누웠다.
‘일단 자자.’
그리고, 잠들기 전에 마지막으로 생각한 것.
…쪽지의 내용과 별개로 마음에 걸리는 게 또 있다.
‘비슷해.’
쪽지의 자칭 ‘이강헌’의 말투가, 최 요원의 것과 유사하게 느껴진다.
나는 반사적으로 필체까지 비교해 보려고 했다. 하지만 머릿속에 남아 있는 최 요원의 필체와는 확연한 차이가 느껴졌다.
‘쪽지가 훨씬 악필인 것 같긴 한데.’
게다가 생각해 보니 서사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 구성이다.
‘최 요원이 백일몽에 다니기까지 했으면 그거야말로 메리수 캐릭터가 따로 없는데.’
초창기 재난관리국의 대표 네임드 캐릭터가 사실 과거에 백일몽까지 다닌 백그라운드가 있다니.
다인 참여형 위키에서 존재하기 어려운 형식이며, 혹시 존재하더라도 장기간 존속할 수 없다.
중간에 어떻게든 죽이거나 날리려 들기 때문이다.
최소한 최 요원 같은 네임드가 있던 시기의 어둠탐사기록은, 그러니까 무명찬란교가 본격적으로 위키 안에서 세력을 불리기 전까지는 그랬다.
이건 내가 위키의 내용 중 기억하지 못하는 부분이 생긴 것과 별개의 문제였다.
개연성의 문제.
‘…후우.’
어쩌면 그냥 세광특별시에 갇혀서 개죽음당하기 직전인 백일몽 직원이 열받아서 낚시성 정보를 뿌린 걸 수도 있지.
하지만 사건의 정황을 모두 아는 것 같은 이 표현들이 상당히 마음에 걸렸다.
그러다 보니 말투까지 신경 쓰게 된 것 아닐까 싶다.
‘…자자.’
나가면, 최 요원에게 이 쪽지를 한번 보여주는 걸로 하자.
나는 다시 한번 눈을 감고 낡은 담요를 머리까지 덮어썼다.
그리고 이런저런 걱정, 고민, 제멋대로 날뛰는 생각 속에서도 피로와 고단함에 까무룩 잠들었다.
* * *
“일어나셨어요?”
“…안녕하십니까.”
나는 다섯 시간 후에 눈을 떴다.
정오가 다 되어가는 시간이었으나 열차 내부는 계속 불이 들어와 있어서 낮인지 밤인지조차 구분하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그래서 잘 시간 때에는 전등을 가려놓는 칸도 있긴 합니다.”
고영은 씨의 고모, 역무원이라 불리는 분이 7번 칸으로 나오는 나를 보고 손을 들어 올리며 반겨주었고, 짧게 대화를 나누는 중이다.
은하제 대리님과 청동 요원님의 상태에 대해서도.
“무사히 받아들여졌습니다.”
다행이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오후역에 스토어를 만들어두길 잘했어.’
그 스토어에서 두 사람이 정기적으로 식량을 가져올 수 있다고 단언한 것이 협상에 아주 좋은 패로 작용한 듯했다.
뇌물로 가져간 해피메이커도 어느 정도 영향을 발휘한 모양이고 말이다.
‘강력한 진통제는 어디서든 환영받으니까.’
나는 그 외에도 내가 ‘홈쇼핑 서바이벌 상금’을 조금이나마 남기며 알뜰히 긁어 챙겼던 망상홈쇼핑의 아이템들을 떠올렸다.
물론 아무리 좋은 아이템을 뇌물로 찔렀다고 해도 순간일 것이며, 앞으로 텃세를 부릴 것 같아 다소 걱정되지만.
그래도 전직 기자답게 작은 사회 잠입에 능한 은하제 대리님이 계시니 다행이었다.
“두 분은 이제부터 영은이가 받은 자리 옆에서 같이 지낼 겁니다. 6번 칸에 있죠. 좀 좁긴 하겠지만요.”
“…감사합니다.”
“도우면서 살 수 있으면 돕는 게 좋죠. 애초에 여기도 처음엔 그렇게 만들어진 건데.”
덤덤하게 말하는 역무원은 다소 지친 얼굴이었다.
참고로 나는 ‘8번 칸에 묵었던 생존자 중 정장과 동물 가면 차림의 남성은 없었냐’라는 질문도 했으나.
“그런… 사람들은 여러분이 처음이었죠.”
“그, 그렇군요….”
이렇게 끝났다.
역시 이런 걸로는 쪽지를 남긴 ‘이강헌’을 구분해 내기 어려운 모양이다.
역무원이 한숨을 쉬었다.
“앞칸 사람들이 괜히 여러분을 경계한 건 아니라는 겁니다. 뭐, 그쪽에서 요즘… 좀 이상한 선민의식을 보이긴 합니다만.”
“…저, 앞칸과 뒤 칸의 사람들 성향이 많이 다릅니까?”
“뭐, 이런 재난 사태가 닥치면 사람은 둘 중 하나를 고르기 마련이니까요.”
상대가 어깨를 으쓱했다.
“엄청나게 배타적이고 집단이기주의적으로 굴거나, 미친 듯이 적극적으로 물자를 끌어모으게 되거나.”
“…….”
“이 열차 쉘터 사람들은 둘로 나뉘었다고 볼 수 있죠. 뭐, 8번 칸에 좀 더 머물면서 여기 사람들이 익숙해지면 말을 붙여보는 건 어떻습니까?”
“…감사한 제안이지만, 당장은 어려울 것 같습니다.”
나는 고개를 들어 정차 안내를 들었다.
이번 역은 한낮, 한낮역입니다….
“여기서 내리려고 하거든요.”
꿈속에서 어떻게 다시 잠을 잘 수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확실히 자고 나니 머리가 좀 맑아지긴 했다.
‘이제 다시 움직일 수 있어.’
그리고 쪽지가 진실이든 뭐든, 백일몽이 무슨 사고를 쳤더라도 할 일은 안 변한다.
역을 탐사하는 것.
정보와 흔적을 모으는 것.
‘…그리고 이번 역은, 혼자서도 할 수 있다.’
하지만 내가 이번 역에서 내리겠다는 소리를 들은 역무원은 표정을 굳혔다.
“…위험할 텐데. 한낮역이 이름만 들어서는 꽤 근사할지 몰라도 실제로 그런 곳은 아닙니다. 오후역보다 더 무서워하는 사람이 많아요.”
“괜찮습니다. 저도 대강 어떤 곳인지는 들었습니다. 그래도 누군가는 가봐야 할 것 같아서요.”
“후….”
역무원은 씁쓸한 얼굴이었으나, 더 말리진 않았다. 이런 재난 한복판에 고립된 상황에서는 익숙한 일일 것이다.
“영은이나, 일행분들과 인사하고 다음 정차에 나가는 건 어떻습니까?”
“…아뇨. 괜찮습니다.”
막 열차 쉘터에 받아들여졌는데, 외부인이랑 당장 또 소통하는 모습만 보여줘서 좋을 게 없다.
나는 희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이미 어제 인사를 다 나눠서요.”
“…그래요.”
역무원이 고개를 끄덕인다.
문이 열립니다.
나는 역무원분이 열어주는 문으로, 열차 바깥으로 나갔다.
이전 역과 동일하게 깨끗하고 현대적인 지하철 승강장의 모습이 보였다.
세광교통공사
한낮역
“…….”
나는 승강장을 걷기 시작했다.
이미 갱신된 지 오래인 위키의 내용을 떠올리면서.
한낮역 (낮잠용 쉼터)
세광특별시의 주거지역 중앙에 위치한 지하철역.
역세권 아파트, 오피스텔, 타운하우스 단지, 빌라까지 다양한 형태의 집들이 있는 출퇴근의 성지였다.
재난의 날에 수많은 사람이 이곳으로 돌아와 집에 갈 수 있길, 가족을 만날 수 있길, 이전과 같은 일상을 보낼 수 있길 간절히 빌었다고 한다.
모조리 실패했다.
좌절된 소망, 절규, 눈물이 한낮역에 고여 수많은 집을 삼키고 낮잠용 쉼터를 구축했다.
이곳에 발을 디딘 자는 집에 온 듯 환영 받을 것이다.
그리고 쉬리라.
모두.
“…….”
그래서 한마디로 말하자면, 이 역은 세광특별시의 주택가였던 곳에 위치한다.
그리고 그에 어울리는 기믹을 가진 괴담이이었다.
“후우.”
나는 홀로 승강장에서 대합실로 향하는 계단을 걸어 올라갔다….
저 끝에서 햇살이 쏟아졌다.
“……!”
…탁 트인 공간이 펼쳐졌다.
이게 도저히 대합실 안 실내공간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광경.
햇살이 쨍쨍한 맑은 하늘 아래로 담장과 작은 건물이 들어선 주택가가 보인다.
푸릇푸릇한 정원수, 담장 저 너머 주택에서 밀려오는 점심밥 냄새. 맑고 따스한 광경이었다.
신도시의 최신형 아파트단지가 아니었다. 마치 재개발되지 않고 주택들이 남은 어느 정겨운 동네 같았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보고 놀란 게 아니었다.
“여긴 또 어디야!”
“이 대리, 뭐 건드렸어? 너 아까 만지던 게 잘못된 거 아니야?”
“아닙니다! 저 어둠 관련 물품 손도 안 대고 있었습니다!”
“여기 설마 어둠 속은 아니겠죠? 그렇다기엔 너무 정상적인데.”
“일단 보안팀부터 호출하라고!”
사람들.
수십 명의 사람들이 서로 떠들면서, 승강장 계단 근처 담장 너머에 서서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그 사람들은 모두 하얀 가운을 걸치고 있고, 과반수가 사원증을 목에 걸고 있었으며….
몇몇 사람들은 내가 아는 얼굴이었다.
특히 한 사람.
“곽 과장님, 혹시, 혹시 방금까지 뭘 하고 계셨….”
“응? 면담 나가고 있었지. 왜, 내가 연구원들 모조리 실험용으로 어둠에 던졌을까 봐? 하하하!”
“그, 그렇죠?! 하하, 저희가 무슨 마무리팀도 아니고 그러셨을려고요.”
…곽제강이었다.
저 사람들은, 전부 백일몽 주식회사의 연구팀 직원들이다…!
‘이게 무슨 미친 상황이야.’
눈이 튀어나올 뻔했다.
왜 백일몽 사람들이, 아니, 현장탐사팀도 아니고 연구팀이 이 세광특별시 지하 한복판에 있단 말인가.
재난관리국에서 봉쇄한 최고 등급 어둠에 맨몸으로 수십 명이…!
그 순간.
“…!!”
담장 너머를 두리번 보던 연구팀 한 사람이 나를 발견했다.
반사적으로 몸을 숨기려 했으나 이미 늦었다는 걸 알았다.
연구팀이 나를 손가락질했다.
정확히는, 내 정장 차림과… 동물 가면을.
“혀, 현장탐사팀??”
미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