랜덤 이미지

괴담에 떨어져도 출근을 해야 하는구나 64화


은하제 대리는 심정이 상당히 복잡했다.

‘떠나는 마당이라면 좀 편안하게 가고 싶었는데.’

택도 없는 바람이었나 보다.

“야! 뒤로 가! 너 한번 맞힌 건 내가 모를 줄 알아?”

“아악! 좀 뒤로 가라고! 나 아직 한 번도 못 맞혔다고!”

‘트롤 새끼들….’

아비규환이 따로 없다.

방금까지도 각자도생하면서 무슨 경기 관람하듯이 구는 게 썩 좋은 그림은 아니었지만, 아예 자기들끼리 감시하고 견제하면서 악쓰는 꼴을 보니 더 심하다.

생존과 포인트.

목적이 두 개가 되니 충돌도 두 배.

마치 마찰력 때문에 움직이지 못하고 열만 잔뜩 오른 수레바퀴를 보는 것 같다….

‘노루가 진짜 보통 녀석이 아니야….’

이렇게 훌륭한 정치질은 또 오랜만이었다.

‘착한 녀석이라 다행이지.’

저 꼴을 보니 정말로 시간을 번다는 용도로는 한 시간 넘게 너끈히 버틸지도 모르겠다.

‘지금 20분 지났나?’

_ _ T R A _ _ R

그런데도 겨우 한 칸 완성된 것을 보면 말이다.

[6번째 빈칸 알파벳의 힌트입니다!]

[은하제 선생님의 비행기 트라우마를 만든 전화는, 과연 누구의 부고 소식이었을까요?]

“은 대리, 누가 죽었….”

“어 꺼져.”

하지만 시간을 유예하는 게 대체 무슨 의미가 있다는 말인가.

‘어차피 신상 다 털리고 죽는 건 똑같지 않나.’

이제 와서 자기 명예를 챙길 것도 없긴 했지만… 시간이 지체될수록 입이 쓰고 피로한 건 사실이다.

게다가 두 후배가 하려는 짓이 뭔지 추측할 때마다 아찔해진다.

‘걔네 미친 짓 하려는 것 같은데.’

은하제 대리는 아까 노루에게 들었던 속삭임을 떠올렸다.

-사형당하실 때, 이걸 명심하세요….

“…….”

설득도 안 받겠다는 듯 통보였다.

하지만.

그걸 정말로 꼭 하겠다면, 자신도 최대한 살려고 노력은 해야 도리 아닐까.

…물론, 잠시 후에도 후배 녀석들의 그 결심이 똑같을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기다려 보자.’

은하제 대리는 관념적으로 팔짱을 꼈다.

그리고 20분,

30분,

40분….

“아싸! 맞네! Believe의 B!”

[정답입니다!]

B _ T R A Y _ R

단어가 완성되어 간다.

그리고 이쯤 오면 눈치채는 사람도 나오는 법이다.

“잠깐만.”

“어어?”

단어의 정체를.

“이거 단어가….”

* * *

“노루야, 저기.”

나는 고개를 들었다.

한 시간 8분 경과.

……글자가 완성되었다.

B E T R A Y E R

배신자(Betrayer).

“…….”

[은하제 선생님을 가장 잘 표현하는 단어는 ‘배신자’입니다!]

뭐?

[은하제 선생님은 4년 전 기자였던 당시, 오랜 상사와 팀을 배신하고 홀로 특종기사를 내려다가 실패해 기삿감을 뺏겼거든요.]

[그리고 이 과정에서 오보가 나며 제보자들이 너무나 심적으로 고통스러워하다 정말 죽기까지 방치했습니다!]

“…….”

[이 일의 교훈은 무엇일까요?]

[정답은 ‘직장을 배신한 사람은 벌을 받는다’ 입니다!]

하.

[행맨은 이렇게 우리 ■■유치원에 원생들에게 권선징악의 교훈을 알려주는 훌륭한 모의 놀이입니다.]

“진짜… 욕 못 하는 게 이렇게 아쉬울 때가 없었는데.”

“…….”

“노루야.”

주임이 내 어깨를 잡았다.

“이것만 들으면 선배님이 되게 이상한 사람인 것 같지만….”

“실제로는 본인에게 듣기 전까지는 모르는 거겠죠.”

“……!”

“이건 그런 어둠이니까요.”

심리적 고통을 주고, 희생자를 고립시키고.

나머지 탐사자들에게 벌칙으로 겁을 주어 행동을 통제하는 것.

“다 같이 살아 나간 후에 이야기해도 안 늦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주임의 얼굴이 밝아졌다.

“그렇지! 역시 노루야! 그러니까…… 아.”

터벅터벅터벅터벅터벅터벅…

나는 고개를 돌렸다.

“…오고 있다.”

열린 유희실 문 너머에서, 발걸음을 맞춘 인영들이 느릿느릿 부드럽게 걸어 들어오고 있다.

녹아내리는 검은 물질이나 비명은 없다.

말끔한 파스텔톤 차림새에 얼굴엔 미소. 그리고 앞치마와 명찰.

이마의 인두 자국.

[햇님반 ■■■]

[병아리반 ■■■]

[꿈나무반 ■■■]

“……완전히 오염되어서 여기 잡힌 사람들. 아니, 사람이었던 괴물들이야……. 눈 마주치지 마.”

“…….”

“겁먹으면 괜히 영향받을 수도 있어.”

나는 그 인영들에게서 최대한 시선을 돌렸다.

[놀이가 끝났네요!]

[그럼 마지막으로 행맨을 매달아봐요!]

“시간이 됐습니다.”

“…….”

나는 직전, 준비 중 나눈 대화를 떠올렸다.

-주임님, 혹시 너무 부담되신다면….

-너한테 떠넘기라고?

-예?

-에이, 그런 말은 좀 그렇다. 내 전용 장비잖아. 넌 애초에 못 써!

‘제가 하겠다는 말은 정말 아니었지만 음, 감사합니다….’

그리고 지금 주임의 손에는 말 그대로 본인의 전용 장비가 들려 있었다.

위장용 천.

‘흉내쟁이 머플러라고 부르던가.’

어쨌든 모습은 내가 전시회에서 도움을 받을 때와 다를 바 없었지만, 차이점이 있다.

“엄청 축축한데?”

물기가 가득 차 있었다.

바로 나한테 남아 있던 <앨리스 피크닉 세트>의 드링크제를 탈탈 쏟아부은 것이다.

화요 퀴즈쇼에서 스마일 스티커의 효과를 두 배로 증폭시키는 데에 썼던 바로 그거.

‘아낌없이 저 머플러에 절였다.’

바닥을 이물질로 너무 더럽히면 그것도 벌칙 사항이라 내 정장 자켓을 바닥에 깔아놓고 해서 거의 버리다시피 했다.

그리고 저 드링크제가 통한다면….

‘위장용 장비가, 1회성이나마 어마어마한 위력을 내겠지.’

물기가 마르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리고 우리는 어차피 타임어택을 해야 하니 안성맞춤이었다.

“그럼 써볼게.”

“예.”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주임은 힐끗 단상에 올라가기 시작하는 유치원 선생들을 보더니, 조용히 머플러를 얼굴까지 뒤집어썼다.

그리고….

완벽히 그들 중 중 하나가 되었다.

[새싹반 ■■■]

“……!”

-아, 훌륭하군요. 괜찮은 분장입니다. 오래 버티진 못할 것 같지만….

‘아주 잠깐만 버티면 돼.’

3분 정도.

그리고 나도 움직여야 했다.

나는 주임이 선생들 사이에 섞여들도록 잠시만 대기했다가, 시간차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지금이다.’

브라운이 능력을 쓸 수 있게 단상에 최대한 접근해야 했다.

그리고 저 괴물들 사이에 숨어들 박민성 주임의 운신이 더 수월하도록, 약간 시선을 끈다면 더 좋고 말이다.

‘바로 시작….’

그리고 고개를 드는 순간이었다.

“…….”

‘아.’

결정적인 걸 잊고 있었다.

내가 겁쟁이라는 거.


랜덤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