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33권 회람연회편 : 10화 (33권 끝)
제 331 장 구파회담(2)
진산월은 한동안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예상했던 것만큼 화가 나거나 모욕감을 느끼지는 않았다. 조금 전에 순간적으로 불타올랐던 분노는 오히려 씻은 듯이 사라져 버렸다. 대신에 냉정한 사고가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현령진인의 제안은 종남파의 입장에서는 서운하고 불만족스러운 것이었지만,한편으로는 이해하지 못할것도 아니었다. 막연히 다른 팔 개문파를 납득시키라고 했다면 도저히 받아들이지 못하겠지만,서장 무림과의 싸움에서 더 공을 세우는 문파를 구대문파의 하나로 인정하겠다는 제안은 충분히 고려해볼 만한 것이었다.
어차피 구대문파를 위시한 명문정파의 속성은 모두 비슷했다.
자신들의 지위에 무한한 자부심을 가지고,모든 일을 철저히 자기들중심으로 생각하는 것이 그들의 사고방식이었다. 그들 입장에서는 비록 종남파가 형산파를 꺾는 위세를 보였다고 해도 이십 년의 공백을 뛰어넘어 선뜻 구대문파의 일원으로 다시 받아들이기에는 아직 미흡한 면이 있다고 생각할 법도 했다.
아니면 너무나 빠르게 커가고 있는 종남파에 대한 은근한 경계심의 발로일지도 몰랐다. 어떤 식으로든 욱일승천의 기세로 타오르고 있는 종남파의 기세를 잠시 완화시키거나 제어할 장치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었다.
하나 진산월은 강호의 생리 또한 알고 있었다.
강호는 결국 강자들의 논리에 의해 모든 일이 결정되는 세계였다. 강호인들이 흔히 내세우는 협이니 대의니 하는 것도 힘이 바탕이 되지 않는다면 단순한 공염불에 불과했다.
기산취악이 바로 그 생생한 증거였다. 수백 년간 구대문파의 한자리를 굳건히 지켜왔던 명문정파가 단순히 힘이 없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제대로 항변도 해보지 못하고 구대문파에서 축출된 그 사건만큼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강호의 생리가 극명하게 표출된 사례가 없었다.
힘이 갖추어진 상태에서 나머지 요소들은 다분히 형식적인 것에 불과했다. 문제는 종남파가 쇠락한 지이십 년이 넘는 장구한 세월이 흘렀고,형산파가 아직은 과거의 종남파처럼 힘이 없는 나약한 문파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그것이 팔 개 문파가 이런저런 이유를 내세우며 당장 종남파의 복귀를 선뜻 인정하지 못하는 근본적인 원인이었다.
어찌 되었건 종남파가 구대문파에 복귀하기 위해서는 다른 팔 개 문파의 지지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상황이었다. 적어도 구대문파에 소속되기를 바란다면 그들의 합의를 무작정 무시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달리 보면 종남파가 그동안의 현격한 차이를 극복하고 형산파와 같은 선상에 서게 되었음을 확인한 것만 으로도 나름의 의미는 있다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서장 무림과의 싸움은 어차피 자신이 감당해야 할 일이 아니었던가?
다만 진산월이 우려하는 것은 달리 있었다.
이번 일로 종남파 제자들의 피가 흐르게 되는 것은 절대적으로 피해야 했다. 피는 자기 혼자만으로 충분했다. 더 이상 문파 외적인 일 때문에 제자들이 피를 홀리게 해서는 안 되었다.
그래서 진산월은 여느 때보다 단호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제안은 잘 들었습니다. 하지만 중원의 운명을 건 서장 무림과의 싸움을 두 파의 경쟁 무대로 삼는다는건 조금 마음에 걸리는군요.”
현령진인의 표정이 거의 알아차릴수 없을 만큼 살짝 굳어졌다.
“진 장문인은 우리의 제안이 별로 탐탁지 않은 모양이구려.”
“그렇다기보다는 조금 생각을 바꿀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어떻게 말이오?”
“구대문파의 자리를 단순히 한 가지 사안에 대한 경쟁이나 내기 형식으로 선정하는 건 서장 무림과의 결전에 대한 의미를 퇴색시킬 염려가 있을 뿐 아니라 구대문파의 위상에도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현령진인은 물론이고 장내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흥미 어린 눈으로 진산월을 주시했다.
“진 장문인의 의견을 말해 보시오.”
“본 파와 형산파와의 묵은 은원은 이번에 정리가 된 셈입니다. 다가오는 서장과의 싸움에서 나는 선반의 반주로서 최선을 다하는 것으로 만족하겠습니다.”
현령진인은 진산월이 말 속에 담긴의미를 파악하지 못하겠는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되물었다.
“형산파와의 대결에는 더 이상 관심이 없다는 말이오? 하지만 형산파에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거요.”
“그들이 어떤 생각을 하건 본 파와는 상관이 없는 이야기입니다.”
현령진인은 진산월의 의중을 파악하려는 듯 그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진 장문인의 말은 구대문파로의 복귀에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겠다는 말처럼 들리는구려.”
얼핏 그 말은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그에 대한 추궁이나 비아냥으로 들릴 수도 있었다.
진산월은 희미하게 웃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그건 지난이십 년간 본 파 모든 제자들의 한 결같은 염원이었습니다.”
조용한 음성에 담담한 웃음이었다.
그래서 더욱 사납게 들렸다.
장내에 앉아 있는 사람들은 모두 각 문파를 대표하는 장문인들이거나 최고의 수뇌들이었지만,지금 이 순간만큼은 무언지 모를 오싹함에 순간적으로 몸을 떨어야 했다.
특히 진산월과 마주 보고 앉아 있는 현령진인은 전신의 모공이 활짝열렸다가 다시 닫힌 것 같은 섬뜩함을 느꼈다. 그것은 마치 성난 맹수가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며 으르렁거리는 광경을 코앞에서 지켜본 사람의 공포 같기도 했고,끝도 보이지 않는 천 길 낭떠러지를 내려다보는 산사람의 두려움 같기도 했으며,거센 폭풍우가 휘몰아치는 망망대해 속을 표류하는 어부의 절망 같기도 했다.
현령진인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 다시 진산월을 바라보았으나, 진산월의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도 떠올라있지 않았다.
현령진인의 눈꼬리가 가늘게 떨렸다. 현령진인 또한 당금 무림의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고강한 무공의 소유자였다. 그런 현령진인조차도 일순 가슴이 덜컥 내려앉을 정도로 가공할 기세가 그의 몸을 한바탕휩쓸고 지나가 버린 것이다.
일정 수준 이상의 기세는 심령(心靈)에도 영향을 끼친다. 진산월이 홀린 기세는 나타날 때보다 더욱 빠르게 사라졌지만, 그 흔적은 여실히 남아서 현령진인은 아직도 심령상의 압박을 느끼고 있었다.
그는 곧 마음을 가다듬고 나직하게 헛기침을 했다.
“험. 빈도의 억측이 지나쳤던 것같소. 진 장문인의 생각을 좀 더 정확히 알고 싶구려.”
진산월은 나직하면서도 더할 수 없이 분명한 음성으로 말했다.
“앞으로 형산파와의 무의미한 경쟁이나 대결은 더 이상 하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너무도 단호한 그의 말에 현령진인은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혔는지 멀거니 그를 쳐다보고만 있었다.
다른 장문인들도 일부는 날카로운눈으로,일부는 우려의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으나,누구도 선뜻 입을 여는 사람은 없었다. 모두들 그의 말속에 숨은 뜻을 헤아리느라 머리가 복잡한 표정들이었다.
현령진인은 한 차례 머리를 흔들고는 이내 정색을 하고 되물었다.
“진 장문인의 말뜻을 쉽게 이해할수 없구려. 옥석(玉5)을 구분하기 위해서는 경쟁은 필연적인 것이오.
진 장문인은 우리가 어떤 식으로 두파의 거취를 판단해야 한다고 생각하시오?”
“그건 순리대로 따르면 될 것입니다.”
“순리?”
“강호의 순리 말입니다. 이번 서장무림과의 싸움이 끝나면 양 파의 거취는 자연적으로 결정될 것이라고 봅니다.”
현령진인의 얼굴에 순간적으로 쓴웃음이 떠올랐다. 진산월이 말하는 강호의 순리가 어떤 것인지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진산월의 말인즉,시간이 흐를수록 힘이 더 강한 문파가 우위에 올라서게 될 테니 서장무림과의 싸움이 끝날 즈음이면 굳이 두 파 중 어느 문파가 구대문파의 한 자리를 차지하게 될지 따질 필요가 없이 자연스레 한 문파로 귀결될 거라는 뜻이었다.
말 자체는 홈을 잡을 수 없는 지극히 정론적인 이야기였다. 하나 그말대로라면 다른 팔 개 문파가 굳이 힘들게 합의를 한 의미도 없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진산월이 팔 개 문파의 합의를 거절했다고 보기도 힘들었다. 오히려 그 합의를 충실히 따르면서 가장 무난한 방법을 제시했다고 할 수 있었다.
다만 형산파와의 본격적인 경쟁을 내용으로 한 현령진인의 제안과는 다소 동떨어진 길이었다.
진산월은 그들의 합의는 받아들이 면서 제안은 살짝 비틀어 거부하는 방법을 취했는데, 현령진인으로서는 이를 알면서도 무어라고 반박하기가 힘든 상황이었다.
서장 무림과의 싸움에 앞장서겠으며, 구파의 복귀에 대한 문제는 강호의 순리에 따르겠다는 말에 무슨트집을 잡을 수 있겠는가?
더구나 그 말을 내뱉은 사람이 다름 아닌 당금 강호제일검객이었으니 아무리 현령진인이 오랫동안 무림을 호령해온 무당파의 장문인이라 하더라도 그의 말을 함부로 무시할 수도 없었다.
결국 현령진인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수밖에 달리 도리가 없었다.
“진 장문인의 의견이 그러하다면 우리도 그 점을 최대한 반영해서 다시 상의해 보도록 하겠소. 다만 형산파에서 진 장문인의 뜻에 따라줄지는 장담할 수 없겠구려.”
“그건 그들이 알아서 판단해야 할 문제겠지요.”
그 날의 모임은 그렇게 끝이 났다.
속마음이야 어떻든 현령진인은 웃는 낯으로 진산월을 배웅했으며,자리를 함께 했던 다른 문파의 수뇌들도 진산월에게 별다른 거부감을 표시하지 않았다.
진산월이 막 인사를 마치고 밖으로 나가려 했을 때,그의 귓전으로 누군가의 전음이 들려왔다.
“진 장문인. 소림의 대방이오. 잠시 시간이 괜찮으시다면 빈승의 거처에서 차라도 한 잔 나누지 않으시겠소?”
그렇지 않아도 진산월은 이번 모임에 대해 궁금한 점이 몇 가지 있었기에 즉시 그에게 전음을 보냈다.
“알겠습니다. 한 시진 후에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진산월이 떠난 후 각 파의 수뇌들은 다시 회담을 열었으며,이번에는 별다른 이견 없이 쉽게 합의에 도달할 수 있었다.
진산월은 그 결과를 대방 선사의 방에서 그에게 직접 들을 수 있었다.
“진 장문인의 의견대로 일단은 서 장 무림과의 싸움이 끝날 때까지 어떠한 판단이나 선택도 하지 않고 조용히 지켜보기로 결정했소.”
그렇게 말하는 대방 선사의 얼굴에는 씁쓸한 빛이 여실히 드러나 있었다.
“당연히 그렇게 했어야 했는데,그런 결정을 내릴 때까지 너무 먼 길을 돌아온 것 같소. 새삼 중론(衆論)을 하나로 모은다는 것이 얼마나힘든 일인지 다시 한 번 깨닫게 되었소.”
진산월은 담담한 음성으로 대꾸했다.
“원래 사람들마다 생각이 다른 법이지요.”
“허헛. 진 장문인의 말씀이 옳소.
그나저나 먼저 진 장문인에게 사과 드려야겠구려.”
“무엇을 말입니까?”
“형산파와의 비무에서 승리하게 된다면 종남파를 다시 구대문파로 복귀시키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인 줄 알았는데,그러지 못했소. 아무래도 빈승의 생각이 모자랐던 것같소.”
대방 선사는 이번에 종남파의 구파복귀가 이루어지지 않은 것에 대해 진산월에게 사과를 했으나,진산월은 가만히 고개를 흔들었다.
“본 파의 구파복귀를 정식으로 발의하신 것만으로 방장께서는 저와의 약속을 훌륭히 지키셨습니다. 오히려 그 점에 대해 제가 방장께 늦게 나마 감사의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일전에 소림사에서 대방 선사는 진산월에게 종남파가 비무행을 성공적으로 치러 낸다면 종남파의 구대문파 복귀를 안건으로 발의하겠다고 제안했었다. 그때만 해도 그 일은 불가능에 가까운 조건들이 내걸린 어려운 것이었으나,종남파는 모든 조건들을 완벽하게 이루어냈고 대방선사도 자신이 한 약속을 충실히 수 행했다.
누구라도 당시의 일을 떠올려 본다면 그 짧은 시간에 강호에서 종남파의 위상이 얼마나 많이 올라갔는지 실로 격세지감을 금치 못할 것이다.
그때는 불가능해 보였던 종남파의 구대문파 복귀는 지금은 충분히 실현가능한 일이 되었으며,심지어 그것이 당장 이루어지지 않은 것에 대방 선사가 미안함을 느낄 정도로 당연한 일처럼 여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