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1권 강호출행(江湖出行) 편 : 5화
제4장. 만추지야(晩秋之夜)
그녀의 방이 저기 멀리 보였다.
진산월은 숨을 한 번 몰아쉬었다.
항상 그렇지만 그녀를 만나러 갈 때는 이상하게 마음이 두근거렸다. 그 기분은 결코 다른 무슨 말로도 표현할 수 없는 야릇한 것이었다. 하나 결코 기분 나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런 두근거림이 한없이 기다려지고 몇 번이고 계속 느껴보고 싶었다. 그런데 막상 그녀를 만나면 그런 두근거림은 어느새 어디론가로 사라져 버렸다. 대신에 또 다른 포근함이 전신을 감싸오곤 하는 것이다. 그런 두근거림과 포근함 뒤에 찾아오는 달콤함은 다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이었다.
진산월은 방문 앞에서 가볍게 인기척을 냈다.
“사매.”
안에서 나직한 여인의 음성이 들려왔다.
“들어오세요.”
진산월은 문을 열고 들어갔다. 언제나처럼 그윽한 그녀의 향기가 코끝에 전해져왔다.
방안은 단촐했고, 고아(高雅)했다. 이 방에 들어올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진산월은 이 방에서 풍겨오는 분위기와 정취가 마음에 들었다.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고 아늑하게 해주는 분위기였다. 그녀는 방안에서 하나밖에 없는 탁자 앞에 단정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마의(麻衣)로 짠 헐렁한 상복(喪服)을 걸쳤어도 그녀는 여전히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약간은 초췌하고 창백한 안색이 그녀의 짙은 눈망울과 어울려 얼굴 전체에 묘한 색감(色感)을 넣어 주었다.
진산월은 그녀의 앞에 놓인 의자에 걸터앉았다.
“오늘도 별로 식사를 하지 않았더군.”
그녀는 속눈썹을 살짝 내리깔았다.
“별로 식욕이 일지 않아서요.”
진산월은 그녀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조용한 음성으로 말했다.
“내일 길을 떠나려면 억지로라도 먹어둬야지.”
그녀는 천천히 내려 깔았던 눈을 들어 그를 쳐다보았다. 더할 나위 없이 영롱한 빛이 그녀의 눈에서 와르르 쏟아져 나왔다.
“두기춘이 만년삼정을 가지고 사라졌다면서요.”
진산월은 씁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리고 사형은 두기춘을 찾는 걸 포기하셨고요?”
“음…”
그녀는 한동안 별빛 같은 눈으로 진산월을 응시하다가 나직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조금 전에 응사제가 와서 말을 해주더군요. 사형이 만년삼정을 잃어버린 걸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것 같다고요.”
“계성이 쓸데없는 말을 했군.”
“저도 만년삼정만으로 절세고수(絶世高手)가 될 수 있다고는 믿지 않아요. 하지만 사형도 알다시피 그건 아주 특별한 의미가 있는 물건이에요. 아버지의 하나뿐인 유품(遺品)이란 말이에요.”
“그렇지.”
“그건 아버지의 간절한 소망이었어요. 최소한 사형에게 그 정도는 해주어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셨지요.”
진산월은 잠시 우두커니 있다가 뒷통수를 긁적거렸다.
“내가 먹은 것으로 해두지.”
그녀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건 그렇지 않아요. 다른 것이라면 모르지만… 아버지는 그것이 사형의 손에 들어가야만 진정한 가치를 가지게 될 거라고 생각하셨어요. 그래야만 아버지의 필생(必生)의 염원을 이루기 위한 밑거름이 될 거라고 말이에요.”
“…….”
“그게 다른 사람의 손에 들어가도록 방치한다는 건 아버지에 대한 죄악(罪惡)이나 다름없어요. 아버지가 그것을 아신다면 지하(地下)에서라도 눈을 감지 못하실 거예요.”
그녀의 말은 비록 그리 크지 않았으나 진산월은 그녀의 말 한마디 한마디를 들을 때마다 마음 한 구석이 납덩이를 달아맨 듯 무거워졌다. 진산월은 문득 가느다란 한숨을 내쉬었다.
“다시 되찾을 수 있는 것이라면 나도 손을 썼겠지. 나도 그걸 간절히 원했으니까.”
그녀는 묵묵히 그의 얼굴을 응시하고 있었다.
“나는 두기춘을 잘 알아. 그 녀석은 만년삼정을 품에 가지고 다닐 놈이 아니야. 아마 옥함에서 그것을 꺼내자마자 바로 복용해 버렸을걸.”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두기춘이라면 틀림없이 그랬을 거예요.”
“그러니 내가 사람을 풀어 그를 다시 잡아 들였다고 해도 이미 그의 뱃속으로 사라진 만년삼정을 어떻게 회수하겠어? 그의 배를 갈라 만년삼정의 찌꺼기라도 얻을까? 아니면 그의 생혈(生血)이라도 마셔야 하나?”
“하지만 무언가 방법이 있을 거예요.”
진산월의 입가에 한 줄기 씁쓸한 미소가 떠올랐다.
“방문좌도(傍門左道)의 사술(邪術)이라면 가능할지도 모르지. 하지만 사매도 알다시피 나는 그런 짓은 못해. 사부님도 그런 건 원하지 않으실 거야.”
그녀는 입을 다물었다.
“이건 모두 애초에 물건을 잘 보관하지 못한 내 책임이야. 두기춘이라면 의당 물불을 안 가리고 그걸 노리고 있을 거라는 걸 짐작했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어. 그러니 이번 일은 엄격히 말하면 나의 실책이란 말이야. 그런데 어떻게 다른 사람을 탓할 수 있겠어?”
그녀의 핏기 없는 얼굴에도 약간은 허무하고 약간은 씁쓸한 웃음이 떠올랐다.
“사형은 항상 다른 사람보다는 자신을 탓하는군요.”
“그게 사실이니까.”
그녀는 고개를 살레살레 흔들었다.
“예전에도 사형은 그랬어요. 아버님께선 사형이 이루어질 일은 악착같이 해서 이루지만, 그렇지 못한 일은 포기도 무척 빠르다고 했어요. 좋게 말하면 결단력이 있는 거고 나쁘게 말하면 끈기가 부족한 거라고요.”
“아마 끈기가 부족한 거겠지.”
“내가 보기엔 사형이 너무 모든 고민을 혼자서만 짊어지려고 하는 것 같아요.”
“내가?”
진산월은 과장된 몸짓으로 어깨를 으쓱거렸다.
“사매도 알다시피 난 부담스러운 건 딱 질색인 사람이야.”
“나를 속일 필요는 없어요.”
그녀의 입에서 희미한 한숨소리가 흘러나왔다.
“나는 벌써 팔 년 동안이나 사형을 지켜 봐 왔어요. 그래서 이제는 사형이 어떤 사람인지 사형 자신보다도 더 잘 알게 되었어요.”
진산월은 조금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어떤 사람인데?”
그녀는 똑바로 그를 쳐다보았다.
진산월은 그 눈빛이 너무도 밝고 환하다고 생각했다. 너무 눈부셔서 똑바로 볼 수도 없을 것 같았다. 하나 그는 시선을 돌릴 수가 없었다. 그 눈빛 속의 무언가가 그를 꼼짝 못하게 붙잡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그런 눈으로 한참 동안이나 그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조용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사형은 어리석은 사람이에요.”
진산월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리석은 사람?”
“그래요. 고민을 남에게 털어놓을 줄도 모르고, 원하는 게 있어도 내색도 하지 못하는 어리석은 사람.”
“그런가? 듣고 보니 그런 것도 같군.”
“그래서 항상 사람의 마음을 속상하고 답답하고… 아프게 하지요.”
진산월은 아무렇지도 않게 웃어넘기려고 했으나
그녀의 표정이 너무도 진지해서 그럴 수가 없었다.
“사형. 혼자서만 모든 짐을 다 짊어지려고 하지 마세요. 저나 다른 사람들에게도 조금씩은 나누어주세요. 우리는 한 배를 탄 사형제들이잖아요.”
진산월은 한동안 가만히 그녀를 쳐다보고 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렇게 하지.”
탁자 너머로 그녀의 손이 다가왔다. 뼈마디가 없는 듯 나긋나긋하고 고운 손이었으나 오늘따라 조금은 창백해 보였다.
진산월은 손을 내뻗어 그녀의 손을 꼬옥 잡았다. 그녀의 손가락이 몇 번이나 그의 손등을 가만히 쓰다듬었다.
그녀가 이렇게 손가락으로 손등을 간지럽혀 주는 것을 진산월은 무척 좋아했다.
그녀가 자신의 손등을 쓰다듬을 때마다 마치 자신의 가슴이 그녀의 고운 손길에 어루만져지는 듯한 기분이 들어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고 편안한 느낌이 되곤 하는 것이다.
한동안 두 사람은 서로의 손을 맞잡은 채 조용히 앉아 있었다.
평화롭고 따스한 분위기였다.
진산월은 그녀를 바라보며 빙그레 웃었다.
“저녁때 다들 모여서 만찬(晩餐)을 하기로 했어.”
그녀는 반짝거리는 눈으로 그를 가만히 응시했다.
“좋은 생각이로군요.”
“사매가 좋아하는 녹두활어(綠豆活魚)와 국화과자(菊花鍋子)도 만들 거야.”
그녀의 입가에 엷은 미소가 떠올랐다.
“좋아요.”
“그거 말고 또 먹고 싶은 게 있으면 말해.”
그녀는 턱을 고인 채 잠시 영롱한 눈을 반짝거리다가 붉은 입술을 살짝 열었다.
“남전계퇴(南煎鷄腿).”
진산월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건 너무 기름지다고 잘 안 먹었잖아?”
“그래서 오늘은 한 번 먹어보고 싶어요.”
“그래 좋아. 또 다른 건?”
“술은 여아홍(女兒紅)이 좋겠어요.”
진산월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술도 마시려고?”
그녀는 배시시 웃었다.
“한 잔 정도는 할 수 있어요.”
진산월은 놀란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다가 활짝 웃었다.
“하하… 오늘은 취아가 강적을 만나겠군.”
“음식 이야기를 들었더니 배가 고파오는군요.”
“조금만 기다려. 재료 준비가 다 되면 바로 시작할 테니까.”
“모처럼 사형의 음식솜씨를 맛볼 수 있겠군요.”
“나는 나중에 틀림없이 좋은 남편이 될 수 있을 거야.”
그녀는 입을 가리고 나직하게 웃었다.
“호홋… 그건 왜요?”
“아내에게 결코 부엌일은 시키지 않을 테니까.”
“그러면 여자가 심심하지 않을까요?”
“여자는 여자대로 할 일이 있지.”
“그게 무언데요?”
“나를 위해 옷을 만들어주고 빨래를 해주고 애를 낳아 길러야 하니까.”
그녀는 한동안 두 눈을 반짝이며 진산월을 빤히 바라보고 있다가 그의 손을 꼬옥 움켜잡았다.
“사형은 꼭 그런 여자를 아내로 맞을 수 있을 거예요.”
진산월은 빙그레 웃었다.
“나도 알아.”
“그리고 저도 언젠가는 나만을 위해 음식을 만들어주는 남편을 얻을 수 있겠죠.”
“그렇겠지.”
“언젠가는….”
그녀는 나직하게 뇌까렸다.
그렇다.
언젠가는…. 하나 그날은 어쩌면 영원히 찾아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그것은 죽은 아버지의 유명이 완수된 다음에나 이루어질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군림천하의 꿈!
그것을 이룰 때까지 두 사람은 서로의 조그만 소망을 접어둘 수밖에는 없었다.
진산월과 임영옥(林靈玉)의 작고 소박한 소망!
그것은 과연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인지….
만찬은 화려했다.
제일 먼저 달걀을 조린 과로단(鍋로蛋)과 삶은 배추잎에 돼지고기를 넣고 찐 증불수백채(蒸佛手白菜) 같은 전채(前菜) 요리가 나오기 시작하더니 이어 탕채(湯菜) 요리인 내탕환자(냉湯丸子), 생선의 흰 살을 튀긴 건작어괴(乾炸魚塊), 새우에 달걀 흰자위를 입혀 하얗게 튀긴 고려하인(高麗蝦仁), 소라를 볶은 초향라(炒香螺), 녹두와 잉어로 만든 녹두활어 등 본격적인 요리가 쏟아져 나왔다.
그 중에서도 탁자의 한 가운데에는 보기만 해도 군침이 자르르 흐르는 닭다리 구이가 수북히 놓여져 있었다. 그것은 닭고기 중에서도 다리 쪽의 살만 요리한 것으로, 그 냄새와 풍취가 아무리 음식에 문외한(門外漢)인 사람도 손가락을 꼽을 만큼 탁월했다.
이것이 바로 남전계퇴였다.
“야! 이거 정말 맛있겠다!”
낙일방이 큰 소리를 지르며 황급히 젓가락을 가져갔다.
하나 그의 젓가락이 채 반도 뻗어지기 전에 누군가가 그의 손을 탁 쳤다.
낙일방이 돌아보니 방취아가 아미를 치켜 뜨며 눈짓을 보내고 있었다.
낙일방이 무슨 영문인지 몰라 멍하니 그녀를 쳐다보고 있자
그녀가 답답한 듯 그의 귀에 대고 나직하게 소근거렸다.
“이런 멍청이. 그건 대사형이 사저 주려고 특별히 만든 거란 말이에요.”
그제서야 낙일방은 사정을 알아채고 멋적은 웃음을 지었다.
“어쩐지… 생전 안 올라오던 닭다리 구이가 다 올라오더라니… 걱정 마. 난 원래 닭고기 요리는 잘 안 먹어.”
낙일방은 젓가락을 쭉 뻗어 남전계퇴의 옆에 놓인 새우튀김을 하나 집어들었다.
“난 새우가 좋아. 닭고기 빼놓곤 다 좋아.”
천연덕스럽게 외치며 정신없이 새우튀김을 먹고 있는 낙일방을 보자
방취아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정말 못 말려.”
그녀는 소매를 걷어붙이더니 낙일방에게 뒤질세라 이것저것 마구 집어먹기 시작했다.
이미 반대편 식탁에서는 응계성과 정해가 술잔을 주고받으며 식사에 열중해 있었다.
성격이 깐깐한 매상과 말이 별로 없는 소지산도 열심히 먹고 있는데,
유독 임영옥(林靈玉)만은 다소곳이 앉은 채 젓가락을 들 생각도 하지 않고 있었다.
방취아는 막 커다란 생선살을 한 덩어리 입 속으로 집어넣다가 이 광경을 보고 급히 말했다.
“사저. 식기 전에 어서 드세요…”
그녀는 입에 음식을 잔뜩 넣은 채로 용케도 파편을 튀기지 않고 잘도 지껄였다.
임영옥은 조용하게 웃었다.
“난 괜찮으니 먼저 먹어.”
“그 동안 제대로 드시지도 못했잖아요.”
“조금 있다가….”
그때 문이 열리며 진산월이 다시 몇 개의 접시를 잔뜩 들고 들어왔다.
잘 구운 오리구이와 규화동계(叫化童鷄)라는 닭찜, 그리고 여러 가지 재료가 담뿍 담긴 밑이 낮은 솥이었다.
진산월은 오리구이와 닭찜을 양옆에 놓고 중앙 한 가운데 팔팔 끓고 있는 솥을 올려놓았다.
솥 위에는 국화(菊花)모양으로 썰어진 생선과 잘게 썰어진 닭고기, 해삼, 전복, 새우, 죽순(竹筍), 두부, 은행(銀杏), 송이버섯, 국수 같은 온갖 종류의 다채로운 재료들이 수북히 쌓여 구수한 냄새를 풍긴 채 보글보글 끓고 있었다.
진산월은 호주머니에서 계란 하나를 꺼내 재료들의 제일 위에 깨뜨렸다.
이것은 국화과자(菊花鍋子)라는 것으로, 진산월이 가장 자신하는 요리 중 하나였다.
국화과자마저 갖추어지자 진산월은 비어 있는 자리로 가서 털썩 앉았다.
“자. 이제 나도 좀 먹어볼까?”
진산월이 김이 모락모락 나는 닭찜을 한 움큼 뜯어 입으로 가져가자 그제 서야 임영옥도 젓가락을 집어들었다.
방취아는 입안 가득 음식을 우물거리면서도 이 광경을 보고 배시시 웃었다.
“그래도 대사형을 제일 생각해주는 사람은 역시 사저밖에 없군요…”
그때 문득 진산월이 임영옥에게 술잔을 내밀었다.
“한 잔 들지.”
임영옥은 고개를 끄덕이며 잔을 받았다.
진산월은 그녀의 잔 가득히 술을 따랐다.
여아홍 특유의 달콤하면서도 쌉싸름한 냄새가 풍겨왔다.
모두들 이것을 보고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평소에 임영옥은 술을 전혀 입에도 대지 않는 성격이었던 것이다.
진산월은 방취아와 낙일방의 잔에도 술을 부었다.
“오늘은 마음껏 먹고 마시자구. 앞으로 이런 날도 흔치 않을 테니 말이야.”
낙일방은 히죽 웃었다.
“흔치 않긴요. 소림사에 갔다 오면 한 번 더 연회를 열자고요.”
그때 이미 술이 거나하게 오른 응계성이 퉁명스런 음성으로 말했다.
“그럴 기회가 있을까? 아마 그때쯤에는 모두 쪽박이 깨져 거리로 나앉게 되어 있을걸.”
방취아가 입을 삐쭉거렸다.
“응사형은 매사에 너무 비관적(悲觀的)이에요.”
“두고 봐. 내 말이 틀림없을 테니.”
응계성이 큰 소리로 외쳤으나 아무도 그 말에 별다른 신경을 쓰지 않았다.
응계성도 술김에 한마디 내뱉고는 이내 자신이 한 말을 잊어버렸다.
훗날 일을 생각해보면 이때 응계성은 선견지명(先見之明)이라도 가지고 있었던 것이 틀림없었다.
하나 당시에는 당사자인 응계성 자신을 포함하여 어느 누구도 그 말을 그렇게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
한동안 모두들 식사에 열중했다.
진산월을 좋아하는 사람이든 싫어하는 사람이든 그가 만든 음식이 맛있다는 사실만은 누구나가 인정을 했다.
그는 비단 음식을 잘 만들 뿐 아니라, 음식 만드는 일 자체를 좋아했다.
일전에 방취아는 땀을 뻘뻘 흘리며 주방에서 음식을 만들고 있는 진산월을 한참 동안 지켜보다가 이렇게 물은 적이 있었다.
“대사형이 일하는 모습을 보면 정말 타고난 요리사 같아요. 요리하는 게 그렇게 좋아요?”
진산월은 그녀는 쳐다보지도 않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요리를 하면 마음이 편안해지거든.”
“왜요?”
“배고프지 않아도 되니까.”
방취아는 그의 말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진산월은 담담한 음성으로 말했다.
“어렸을 때 나는 항상 배가 고팠거든. 아무 거라도 먹고 싶었지만 도무지 먹을 걸 구할 수 있어야지. 추운 겨울에는 더 심했어. 오 일 동안 만두 하나만 먹고 견딘 적도 있었지.”
진산월이 종남파에 오기 전에 떠돌이 거지였다는 것은 방취아도 들은 적이 있었다.
하나 그토록 굶주렸다는 것은 그녀도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배고픈 건 정말 무서운 거야. 무엇이라도 먹을 수 있지. 하지만 어떤 때는 그 무엇조차도 구할 수 없을 때가 있거든.”
“그 정도일 줄은 몰랐어요.”
“그래서 나는 생각했지. 나중에 내가 무엇이든 할 수 있을 때가 되면 반드시 유명한 숙수(熟手:요리사)가 되겠다고. 그러면 원하는 음식을 무엇이든 만들어 먹을 수 있을 테니 얼마나 좋겠나 하고 말이야.”
그 말을 할 때의 진산월의 표정은 아주 차분했다.
하나 방취아는 왠지 코끝이 시큰거려 금방이라도 눈물이 흘러내릴 것만 같았다.
“그랬군요. 전 그런 내력이 있는 줄은 몰랐어요.”
진산월은 그녀를 돌아보며 빙긋 웃었다.
“처음에는 내가 좋아하는 음식만 잔뜩 만들어서 혼자 실컷 먹는 게 소원이었는데 남들도 그 음식을 맛있게 먹는 것을 보고 마음이 조금 변했지.”
“어떻게요?”
“내가 만든 음식을 다른 사람들이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면 기분이 좋아진단 말이야. 그래서 지금은 나보다도 남을 주려고 음식을 만들 때가 더 많아.”
방취아는 배시시 웃었다.
“어쩔 수 없는 요리사 체질이로군요.”
“하하… 그렇지.”
“하지만 사형은 이제 더 이상 요리사가 될 수 없어요.”
“……..!”
“사형은 언젠가는 본 파를 이끌어 갈 장문인이 될 거란 말이에요. 그러니 아무리 요리사가 되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어요.”
그때 진산월은 아무 말 없이 그녀를 쳐다본 채 웃기만 했다.
그 웃음을 본 순간 방취아는 왠지 그가 그 꿈을 버리지 않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언제까지고 영원히 그 꿈을 가슴속에 간직하고 있을 것만 같았다.
지금도 방취아는 진산월을 보면서 그 생각을 했다.
‘대사형은 혹시 장문인이 된 지금까지도 그 꿈을 버리지 않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것은 그녀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분위기가 무르익었을 때 응계성이 건배(乾杯)를 하자고 제의했다.
“좋아요. 그런데 무엇을 위해 건배하지요?”
낙일방이 묻자 응계성이 그의 머리를 툭 쳤다.
“뭐긴. 우리의 역사적인 무림출도(武林出道)를 위해서지.”
“에이. 그건 좀 시시한데…”
낙일방이 시큰둥한 표정을 짓자 응계성이 험악한 눈으로 그를 꼬나보았다.
“이 자식은 내가 하는 말은 무조건 반대만 하려고 해.”
“그게 아니에요. 생각해봐요. 무림출도는 언제라도 할 수 있는 건데 그게 무슨 대단한 일이라고 건배까지 하자니까 조금 우습잖아요.”
방취아가 낙일방을 거들었다.
“맞아요. 더구나 이번에 무림에 나가지 않는 사람도 있는데 너무 억울해요. 좀 더 그럴듯한 거로 해요.”
“이런 제기랄. 이렇게 마음이 안 맞아서야…”
응계성이 툴툴거리고 있을 때, 정해가 눈을 반짝이며 끼어들었다.
“이건 어떨까? 종남파의 부흥(復興)을 위해서.”
낙일방과 방취아는 귀가 솔깃한지 서로 마주보았다.
“그거 괜찮은데요?”
“나도 찬성이에요. 너무 거창하지도 않고 아주 현실적인 제안 같아요.”
응계성은 너희들끼리 잘 해봐라 하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굳게 다물었다. 낙일방이 진산월을 돌아보며 물었다.
“장문사형. 어때요?”
“나는 아무래도 좋아.”
“무슨 대답이 그래요?”
“종남파의 부흥도 좋고, 무림출도를 위해서도 좋다는 말이지.”
임영옥이 차분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이렇게 하면 어때요? 각자 돌아가면서 자기가 원하는 걸 한 가지씩 말하기로. 그 모든 걸 위해서 건배하는 거예요.”
낙일방이 활짝 웃으며 손뼉을 딱 쳤다.
“와! 그거 정말 멋진 생각이군요.”
방취아와 정해도 반색을 했다.
“정말 좋아요. 사저의 생각은 내 마음에 꼭 드는군요.”
“나도 찬성입니다.”
낙일방이 잽싸게 주위를 둘러보며 물었다.
“다른 분들은 어때요?”
매상과 소지산은 물론이고 심통이 잔뜩 난 모습으로 앉아 있던 응계성도 만족스런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장문사형은?”
진산월은 빙그레 웃었다.
“이런 분위기에서 거절하면 장문인 자리에서 쫓겨날지도 모르겠는데?”
모두 와!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낙일방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술잔을 높이 쳐들었다.
“그럼 제가 먼저 말하지요. 저는 ….”
그때 방취아가 잽싸게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왜 낙사형이 먼저 하려는 거예요? 서열로 따지자면 대사형이 첫 번째고, 반대 서열로 하자면 내가 제일 첫 순서인데…”
낙일방의 얼굴이 구겨졌다.
“취아야. 그거 아무나 먼저 하면 안 되냐?”
“싫어요. 빨리 서열순으로 할 건지, 그 반대로 할 건지 결정해요.”
“알았다. 알았어. 네가 먼저 해라.”
낙일방이 못 말리겠다는 듯 손을 휘휘 내저으며 자리에 앉았다. 그제야 방취아는 취기가 올라 빨갛게 상기된 얼굴에 함박 웃음을 머금었다.
“호호… 그럼 제가 먼저 하지요. 저는… 본 파의 무궁한 발전을 위해서 건배하고 싶어요.”
낙일방이 헛기침을 하며 일어섰다.
“흠. 그럼 다음엔 나군. 저는 본 파가 다시 일어나 과거의 영광을 되찾고 군림천하 하는 그 날을 꿈꾸며 건배 하렵니다.”
“호호… 너무 거창하군요.”
“이게 뭐가 거창하냐? 사실은 천만년(千萬年) 계속 강호를 제패하고 싶다는 말을 하고 싶었는데…”
“호호… 낙사형다운 생각이에요.”
정해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천천히 일어났다.
“이번에는 나로군.”
낙일방의 바로 윗서열은 원래 두기춘이었다. 하나 두기춘이 종남파를 떠났기 때문에 그다음 서열인 정해가 일어난 것이다. 정해는 목소리를 가다듬은 다음 낭랑한 음성으로 말했다.
“저도 낙사제처럼 본 파의 부흥과 발전을 바라겠습니다.”
다음은 응계성의 차례였다.
“강호에 출도하여 절정고수로 명성을 떨칠 그날을 위해 건배하겠습니다.”
응계성의 윗서열은 그와 나이는 동갑이나 입문(入門)이 몇 달 빠른 소지산이었다. 소지산은 짤막하게 말했다.
“잘 다녀오시오.”
응계성이 어이가 없다는 듯 피식 웃었다.
“뭐 이래? 그런 걸로도 건배가 되나?”
그의 말을 받은 건 매상이었다.
“누구나 자기가 원하는 걸 위해 건배할 수 있지. 나는 내 검(劍)을 위해 건배하겠다.”
모두들 지극히 매상다운 말이라고 생각했다. 매상은 자기중심(自己中心)적인 사고방식에 철저한 사람이었다. 방취아의 시선이 임영옥에게로 향했다.
“사저는 무얼 위해 건배하시겠어요?”
임영옥은 조용한 음성으로 말했다.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을 위해.”
낙일방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산 사람과 죽은 사람? 무슨 뜻이지요?”
정해가 재빠르게 말했다.
“산 사람은 여기 있는 우리들을 말하는 거야.”
“그럼 죽은 사람은요?”
“물론 돌아가신 선사(先師)님이지.”
낙일방은 그제야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러니까 사저의 말뜻은 우리들과 선사님, 모두를 위한다는 뜻이로군요.”
“그렇지. 다시 말해서 우리가 선사님을 잊지 말고 그분의 유명을 잘 받들어 달라는 의미가 있는 거야.”
“굉장히 심오하군요.”
모두의 시선이 진산월을 향했다.
“이제 장문사형이 마지막을 장식해 주시죠.”
진산월은 술잔을 든 채로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주위를 한 번 둘러보더니 담담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다음에 다시 만났을 때 오늘처럼 웃으면서 볼 수 있게 되기를…”
낙일방이 다시 정해에게 물었다.
“저건 또 무슨 뜻이죠?”
“바보. 저건 그냥 말 그대로 다음에 웃으면서 다시 만나자는 얘기야.”
낙일방은 싱겁게 웃었다.
“그렇군요. 난 또 대사형이 무슨 심오한 이야기를 하나 그랬어요.”
그때 매상이 불쑥 지나가는 듯한 음성으로 말했다.
“나름대로 심오한 이야기지. 그렇게 될 수만 있다면…”
낙일방과 정해가 움찔하여 그를 쳐다보았으나 매상은 묵묵히 손에 든 술잔만 바라보고 있었다. 진산월이 술잔을 높이 쳐들었다.
“자. 건배하지. 지금까지 말한 모든 것을 위하여.”
모두들 술잔을 높이 들었다.
“건배!”
“종남파를 위하여!”
“종남파의 영광과 군림천하를 위하여!”
“건배!”
밤이 깊어갔다.
하늘에는 여인의 눈썹 같은 초생달이 그린 듯 고운 자태를 반쯤 구름 사이에 감추고 있었다.
어디선가 한 줄기 바람이 불어와 뜨락을 스치고 지나가자 마치 파도소리 같은 나뭇잎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쏴아아….
진산월은 숲이 빤히 내려다보이는 얕으막한 바위 위에 걸터앉은 채 멍하니 허공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밤 공기는 제법 차가웠다.
그 차갑게 식은 밤 공기가 얇은 옷자락을 뚫고 피부에 와 닿자 얼큰히 올라왔던 취기가 조금은 가시는 것 같았다.
진산월은 오늘 상당히 많은 양의 술을 마셨다.
진산월 뿐만 아니라 다들 많이 취해서 낙일방과 응계성은 만찬이 벌어졌던 대청 한 구석에 누운 채 잠에 골아 떨어졌고, 방취아도 얼굴이 새빨개진 채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자기 방으로 간신히 기어 들어가 버렸다.
정해는 물론이고 좀처럼 술에 취하지 않던 매상과 소지산도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할 정도로 취해 자기들 방으로 돌아간 지 오래였다.
진산월도 자신의 방으로 가려다가 문득 걸음을 돌려 뒤쪽 언덕 위로 올라온 것이다.
이상하게 가슴이 답답했다.
오늘 술을 평소보다 많이 마신 이유도 그 답답함을 없애기 위해서일지 몰랐다.
하나 술을 마실수록 답답함이 없어지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커져서 주체할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진산월은 몽롱한 눈으로 구름 사이에 걸려 있는 일점편월(一點片月)을 올려다보았다.
그 편월 위로 한 사람의 모습이 떠오르고 있었다.
비쩍 마르고 온화하게 생긴 중년인의 모습이었다.
평범한 모습이었으나 진산월에게는 그 중년인의 머리카락 한 올, 눈, 코, 귀, 입 하나 하나가 너무나도 선명하게 떠올랐다.
“사부님….”
진산월은 사부의 환영을 올려다본 채 상념(想念)에 잠겨 들었다.
“네놈은 꼭 삼십 년 전의 나 같구나. 나를 따라가지 않겠느냐?”
벌써 팔 년이나 흘렀지만, 사부를 처음 만났을 때의 그 음성이 마치 오늘 일처럼 생생하게 기억되었다.
사부를 따라 종남산(終南山)에 왔을 때의 그 생소함.
그리고 이내 자신은 더 이상 굶주리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알았을 때의 그 안도감과 평안함, 몇 년 만에 처음으로 욕실에서 목욕다운 목욕을 하고 밖으로 나왔을 때 자신을 보고 놀란 눈을 크게 치켜 뜨던 그 귀여운 댕기머리 소녀의 깜찍한 모습….
그리고 그 소녀가 점차로 자라서 하나의 아름다운 여인이 되어 가는 것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느꼈던 따스하고 달콤한 감정…
처음에 자신과 사매 뿐이었던 종남의 문하에 하나둘씩 제자들이 늘어갔을 때의 뿌듯함,
그리고 ‘너희들을 군림천하 하도록 해주겠다’며 제자들에게 먹일 영약을 찾아 심산유곡을 헤매고 다니던 사부가 몇 달 만에 지치고 허탈한 모습으로 돌아왔을 때의 그 안쓰러움과 미안함.
다른 문파의 고수들에게 모욕을 당하고도 빙그레 웃으며 뒤돌아섰던 사부가 혼자 피눈물을 뿌리며 뒷동산에서 미친 듯이 검을 휘두르는 광경을 몰래 지켜보았을 때 느꼈던 그 비통함과 억울함, 처절한 분노…
어디선가 우연히 용문산에 있다는 만년삼정의 행방을 알고 뛸 듯이 기뻐하는 사부를 보고 함께 기뻐했던 자신의 모습과, 만년삼정을 자신의 손에 쥐어준 채 피투성이가 되어 숨을 거두었던 사부의 마지막 모습이 교차되어 가슴을 저미게 했다.
“산월아. 너만은 반드시 군림천하를 해야 한다.”
자신의 손을 꼭 움켜쥔 채 간절한 눈으로 자신을 응시하던 사부의 마지막 눈망울을 잊을 수가 없었다.
그날 이후, 진산월은 단 하루도 깊은 잠을 자 본 적이 없었다.
자신이 과연 사부의 유명(遺命)을 지킬 수 있을까?
무림 사상 누구도 이루지 못했던 군림천하의 꿈을 이룰 수 있을까?
나를 믿고 따르는 여덟 명의 아우들을 과연 군림천하의 길로 인도할 수 있을까?
그로부터의 하루하루는 그에게 지옥과도 같은 고통과 번민의 나날들이었다.
아마 다른 사람이었다면 이런 중압감에서 견디지 못하고 도망치고 말았을 것이다.
하나 진산월은 그럴 수 없었다.
사부는 그에게 제이(第二)의 생명(生命)을 준 사람이었다.
사부가 아니었으면 그는 팔 년 전의 추운 겨울 어느 날, 이미 싸늘한 시체가 되어 버렸을 것이다.
사부는 그의 목숨을 구해주고, 그가 새로운 인생(人生)을 살 수 있도록 해주었다.
하나 단순히 사부에게 진 빚을 갚기 위한 것뿐만은 아니었다.
책임과 의무가 두려워 피해버린다면 그것은 이미 살아있는 것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 진산월의 생각이었다.
그것은 목숨의 빚 이전에 인간의 기본적인 도리(道理)였다.
그것이 진산월을 번민케 하는 것이다.
이제 그는 내일이면 사제들과 함께 산(山)을 내려가야 한다.
그가 의도했든 그렇지 않든 그것은 사부의 유명을 지키기 위한 첫 번째 걸음이 될 것이다.
하나 과연 그 길의 끝까지 도달할 수 있을 것인가?
진산내공(鎭山內功)도 절전(絶傳)된 보잘 것 없는 종남파의 무공과, 문하 제자라고 해봐야 단지 여덟 명뿐인 이 세력을 가지고 어느 누구도 이루지 못했던 군림천하를 달성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나 진산월은 그 길을 가야만 했다.
가다가 중도에 쓰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그는 가야만 했다.
지금의 그에게는 오직 그것만이 자신이 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었다.
진산월이 허공을 올려보며 끝없는 상념에 빠져들고 있을 때였다.
“이곳에 있었군요.”
조용한 음성과 함께 그윽한 향기가 코끝에 전해졌다.
진산월은 고개를 돌리지 않아도 그 음성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아니, 음성을 듣지 않아도 단지 향기만으로도 그는 그녀를 알 수 있었다.
흐릿한 달빛을 받으며 서 있는 임영옥의 모습은 아름답다는 형용이 무색한 것이었다.
진산월의 눈빛이 어둠 속에서 유달리 번쩍거렸다.
임영옥은 천천히 그의 옆으로 다가와 바위 위에 나란히 걸터앉았다.
그때 마침 구름 사이에 가려 있던 달이 온전한 자태를 드러내며 교교한 달빛을 사방에 뿌리고 있었다.
“달빛이 참 곱군요.”
임영옥은 은어(銀魚) 같은 자신의 손을 비추는 달빛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그녀는 달빛에 자신의 손을 이리저리 비춰보다가 그 손으로 가만히 진산월의 손을 잡았다.
진산월도 마주 손을 잡았다.
두 사람은 손과 손을 마주잡은 채 어깨를 나란히 하고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바람이 불고, 구름이 흐르고, 달이 반짝이는 밤이었다.
달빛은 차가웠으나 두 사람은 조금도 추위를 느끼지 못했다.
한참 후에 임영옥이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사형을 처음 봤을 때가 생각나요.”
“그래? 그때 어땠는데?”
임영옥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아주 작고 비쩍 마른 꼬마였어요. 난 그때 불쌍하다는 생각보다는 너무 더럽고 지저분해서 왜 아버지가 이런 애를 데려올 생각을 했을까 하는 마음이 앞섰지요.”
진산월도 따라서 웃었다.
“맞아. 그때 난 참 지저분하고 깡마르고 못생긴 꼬마였지.”
“하지만 눈빛만은 참 또랑또랑했어요. 알아요? 사형이 목욕을 하고 나왔을 때 내가 깜짝 놀랐던 것을?”
진산월은 아련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지. 그때 사매의 커다란 눈과 벌려진 입이 뇌리에 떠오르는군.”
“내가 보기 흉했나요?”
“아니. 그때도 예뻤어. 난 저런 표정을 짓고도 예쁜 아이가 다 있구나 하고 생각했었지.”
“호호… 사실 그때는 너무 놀랐어요. 목욕을 하고 나온 사형은 전혀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거든요.”
“어떻게 달랐는데?”
임영옥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글쎄요. 뭐라고 딱 꼬집어 말할 수는 없었지만 아무튼 사람 자체가 달라 보였어요.
마치 누에가 꼬치를 벗은 것처럼 누추하고 볼품없는 꼬마에서 갑자기 믿음직하고 호감이 가는 소년으로 바뀐 거에요.”
“내가 그랬나?”
“그래요. 난 그때 사형보다 잘생긴 소년들을 많이 보아왔는 데도 이상하게 사형에게 호감이 느껴졌어요. 별로 잘생긴 얼굴은 아니었지만 친밀감이 가고 다정한 얼굴이었죠. 선량한 느낌을 주는 인상이었어요.”
진산월은 빙그레 웃으며 자신의 턱을 쓰다듬었다.
“지금도 그래.”
“호호… 하지만 속은 능구렁이가 다 됐죠.”
“아니야. 난 지금도 선량해. 그건 보증할 수 있어.”
“정말이에요?”
“그게 내 유일한 자랑거리인 걸. 난 단점 투성이의 인간이지만, 착하다는 것 하나는 가장 큰 장점이지.”
“호호호…”
임영옥은 입을 가리고 나직하게 웃었다.
“말해봐. 그때 내가 그렇게 호감이 갔었어?”
“그래요.”
“그래서 그 뒤로 석 달 동안 내게 말도 걸지 않았었나?”
“그건… 사형이 소녀의 감정을 몰라서 그래요. 그 나이 또래의 소녀들은 속으로 호감이 갈수록 겉으로는 쌀쌀맞게 대하는 법이거든요.”
“그렇군. 난 그때 사매가 나를 싫어하는 줄 알고 몹시 당황했지. 쫓겨 나면 어쩌나 하는 걱정도 들었고…”
“쫓겨 나긴요. 어떻게 그런 생각을 다 했죠?”
“글쎄… 그때 나는 겁쟁이였나 봐. 마음대로 먹을 수 있고, 잠도 편하게 잘 수 있어서 너무 좋았지. 정말 행복했어. 그래서 그 행복이 날아가면 어쩌나 하고 항상 불안해하고 있었지.”
임영옥은 새삼스런 눈으로 그를 보았다.
“왜 그런 이야기를 한 번도 하지 않았죠?”
“할 수가 없었지. 그런 이야기를 하면 정말로 내쫓길까 봐. 말이 씨가 된다고 하잖아.”
“정말 그렇게 생각했어요?”
“그때는 그랬어. 웃지 마. 내 딴에는 그때 무척 심각했으니까.”
“호호… 사형처럼 낙천적이고 쾌활한 사람이 그런 면이 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아요.”
“사람은 원래 남에게는 잘 보여주지 않는 또 다른 면을 가지고 있나 봐. 지금도 내가 그때 왜 그렇게 불안해했는지 이해가 안 될 때도 있어.”
“걱정 치곤 정말 쓸데없는 걱정이었군요.”
“그래. 하지만 그리 오래가진 않았어. 두 달 정도 지나면서부터는 그런 걱정을 하지 않았으니까.”
“왜요?”
진산월의 입가에 엷은 미소가 어렸다.
“사부님이 어떤 분인지 알게 되었으니까.”
“그래서 아버님이 결코 사형을 내쫓거나 하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한 거로군요.”
“그래. 그때부터는 밤에 잠도 잘 잤고, 먹기도 더 많이 먹었지.”
“그때 사형은 정말 먹보였어요. 난 그렇게 밥을 많이 먹는 사람은 본 적이 없었어요. 하루에 대여섯 끼나 먹는 사람이 있으리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으니까요.”
“그때는 정말 먹어도 먹어도 배부른 줄 몰랐지. 사매가 눈총만 안 줬어도 두 배는 더 먹었을 거야.”
“그건 눈총이 아니라 호기심이었어요. 난 대체 사형의 뱃속에는 무엇이 있는지 궁금했었거든요.”
“사매가 내게 처음 말을 걸어왔을 때가 생각나는군.”
“저도 기억나요.”
“그때 사매가 제일 처음 한 말이 무언지 알아?”
“이런 먹보!”
“그래 맞아. 밤에 자다가 하도 배가 고파서 몰래 주방에 가서 밥솥째 들고 먹고 있는데 갑자기 사매가 불쑥 나타나서 그렇게 소리쳤지.”
“호호… 그때 밥솥을 들고 정신없이 먹고 있는 사형 모습은 정말 가관이었어요. 제가 갑자기 나타나 그렇게 소리치자 깜짝 놀라서 입안 가득 음식을 넣은 채 멍청하게 저를 쳐다보던 그 모습이 어찌나 우습고 귀엽던지…”
“우스운 건 알겠는데 귀엽다니…?”
“그때 사형은 정말 귀여웠어요.”
“끔찍한 일이군. 그런 모습이 귀여웠다니… 아무튼 난 그 뒤로 한 사나흘 동안은 밥을 입에도 못 대겠더라구. 하지만 사매가 말을 걸어줘서 정말 기뻤어.”
“정말 그랬어요?”
“그래.”
임영옥은 진산월을 바라본 채 화사하게 웃었다.
“저도 사형과 사귈 수 있어서 기뻤어요.”
“정말 좋은 시절이었지.”
“그래요.”
“머지않아 다시 그런 시절을 가질 수 있을 거야.”
임영옥은 진산월을 빤히 바라보았다.
“사형은 정말 그렇게 생각해요?”
진산월은 진지한 모습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임영옥은 한동안 진산월의 두 눈을 뚫어지게 응시하다가 그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진산월은 자신의 품에 반쯤 안긴 그녀의 머리카락을 가만히 쓰다듬었다. 그녀는 한 마리 작은 새처럼 그의 품에 가만히 안겨 있었다. 그때의 그녀의 표정은 너무도 평온하고 행복해 보였다.
진산월은 고개를 숙여 그녀의 귀에 대고 나직하게 소근거렸다.
“언젠가 우리 아이가 태어났을 때… 아들이면 이름을 억홍(憶弘)으로 짓자구.”
임영옥은 그의 품에 얼굴을 묻은 채 조그만 소리로 뇌까렸다.
“억홍…. 아버지에게서 따온 거로군요.”
“그래.”
억홍이란 임장홍을 기억한다는 뜻이었다.
임영옥은 얼굴을 반쯤 돌려 그를 올려보더니 물었다.
“딸이면요?”
“모옥(模玉).”
“모옥? 옥을 닮으라는 말인가요?”
“당신을 닮으라는 뜻이지.”
임영옥의 눈이 유달리 반짝거렸다. 그녀는 다시 고개를 숙여 진산월의 품속 깊숙이 얼굴을 파묻었다.
“그런 날이 과연 올까요?”
“올 거야.”
진산월은 그녀의 어깨를 힘주어 끌어안았다.
“꼭 오게 해야지.”
그의 마지막 말은 그녀에게보다는 자기 자신에게 하는 다짐처럼 들렸다. 늦가을의 소슬한 바람이 다시 불어왔다. 어디선가 밤늦도록 자지 않는 풀벌레의 울음소리도 들려왔다.
시월 삼일(十月三日).
달빛이 유난히도 창백한 가을의 마지막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