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10권 양대호리(兩大狐狸)편 : 5화
제94장. 소면호리(笑面狐狸)
“자꾸 이상한 기분이 드는군.”
거울을 들여다보고 있던 반백의 중년인은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앞에 앉아서 차를 마시고 있던 사십대 중반의 체구가 건장한 중년인이 의아한 듯 물었다.
“뭐가 이상하다는 겁니까?”
반백의 중년인은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다가 다시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이상해.”
“…”
“요즘 들어 자꾸 마음이 불안해진단 말이야. 나이를 먹을수록 소심(小心)해진다고 하는데, 나한테도 그런 증상이 오는 걸까?”
건장한 중년인은 피식 웃었다.
“그럴 리가요. 총관(總官)께선 아직도 다른 누구보다도 정정하지 않으십니까?”
“아니야, 확실히 나는 나이를 먹었어. 요즘에 와서는 하루가 다르게 그걸 절감하고 있지. 예전만 해도 이런 일은 없었는데 말이야.”
“무엇이 그렇게 불안하십니까?”
거울 속에 보이는 반백의 중년인의 얼굴에는 씁쓸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아무래도 내가 무언가를 놓치고 있는 것 같아. 아주 중요한 건데 미처 보지 못해서 커다란 실수를 하게 될 것 같단 말이야.”
건장한 중년인은 다시 웃었다.
“총관께서 실수를 하실 리가 있습니까?”
반백의 중년인은 고개를 저었다.
“나도 사람인데 실수를 하지 않을 리가 있나? 최근의 일도 엄연한 내 실수가 아닌가?”
“그건 봉월에게 운(運)이 없었던 겁니다. 그들이 상대하지 못할 고수를 만나리라고 누가 예상이나 했겠습니까?”
“그런데 그렇지 않아. 솔직히 말하면 그때 봉월에게 부탁을 했을 때도 마음 한구석이 이상하게 꺼림칙했었네. 나중에 봉월이 잘못된 것을 알고는 마음이 아팠어. 충분히 막을 수 있는 일을 방치했다는 자책감이 들었기 때문이지.”
건장한 중년인은 이번에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의 말을 맞장구치기도, 또 무작정 부인하기도 어려웠던 것이다. 반백의 중년인은 한동안 깊은 상념에 잠긴 듯한 모습이었다. 다시 고개를 쳐들었을 때, 그는 엷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조금 전과는 달리 무언가 여유 있고 자신에 찬 미소였다.
“확실히 일이 닥치면 생각이 많아지는군. 이번 일에 대한 경우의 수를 모두 헤아려 봤는데, 나름대로의 해결책이 나오긴 하는군.”
건장한 중년인은 궁금한 듯 물었다.
“경우의 수라면 어떤 것들입니까?”
“첫째는 봉월이나 손익에게 개인적인 원한을 가진 자의 소행인 경우지. 하지만 이건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보네. 그들을 모두 쓰러뜨릴 정도의 고수가 원한 관계에 있다면 봉월 등이 나에게 말하지 않았을 리가 없지. 어찌되었건 그런 경우 원한은 이미 해결되었으므로 본보(本堡)의 일에 별다른 영향을 끼치지는 않을걸세. 다시 말해서 특별히 신경 쓸 필요가 없다는 것이지.”
“…!”
“둘째는 본보에 원한을 가진 자의 짓일 경우일세. 그런 경우라면 봉월을 해친 자는 앞으로도 계속 본보의 일을 방해할 가능성이 충분히 있지.”
건장한 중년인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본보와 그 정도로 원한 관계에 있는 자는 언뜻 생각이 나지 않는군요.”
“원한이란 항상 일으키는 쪽보다 당하는 쪽에서 깊게 생각하는 법일세. 이쪽에서 별게 아니라고 여겨도 상대편에서는 하늘보다 깊은 원한을 가질 수도 있단 말이지. 아무튼 이 경우에는 별다른 대책이 없네. 그냥 지켜보는 수밖에.”
“무작정 지켜본단 말입니까?”
반백의 중년인은 담담하게 웃었다.
“때로는 기다리는 것도 좋은 방법이지. 봉월을 해친 자가 본보에 원한이 있는 자라면 틀림없이 다시 모습을 드러내게 될걸세. 그리고 그때가 바로 그자의 숨통을 끊어놓을 수 있는 기회가 되는 거지.”
입 밖으로는 섬뜩한 말을 하면서도 반백의 중년인은 여전히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건장한 중년인은 그가 온화한 겉모습과는 달리 얼마나 무서운 사람인지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오히려 이런 모습에 가슴 한구석이 서늘해졌다.
“문제는 세 번째 경우란 말이야. 그때는 정말 복잡해져서 자칫하면 일이 심각하게 꼬일지도 모르네.”
건장한 중년인은 그의 입에서 심각하다는 말을 들어 본 기억이 거의 없는지라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즉시 물었다.
“그게 어떤 경우입니까?”
“내가 봉월을 그곳에 보낸 건 그곳에 찾아올지도 모를 종남파의 잔당을 제거하기 위함이었네. 그런데 봉월이 맞닥뜨린 인물이 실제로 그들이었다면?”
건장한 중년인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종남파에 봉월을 상대할 만한 고수가 있을 리 있습니까? 그런 일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강호에서는 어떤 일도 가능하지. 사실 그게 가장 자연스런 생각 아닌가? 종남파의 잔당을 소탕하라고 보낸 사람이 엉뚱한 고수를 만나 살해당했다고 하는 것보다, 실제로 그 잔당들과 고수를 만나 살해당했다고 하는 것보다, 실제로 그 잔당과 맞닥뜨려 싸우다 다 죽었다고 보는 게 더 개연성이 높은 일 아닌가 말일세.”
“그렇긴 하지만…”
“나는 모든 경우의 수를 헤아려 보았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그중 가장 확률이 높은 것은 세 번째 경우란 말이야.”
“화산파의 소행일 가능성은 없을까요?”
반백의 중년인은 피식 웃었다.
“그들이 취미사의 혈겁을 우리가 한 짓으로 판단하고 보복을 했을 거란 말인가? 용진산이 그렇게 경솔한 사람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군. 게다가 자조심 높고 콧대 센 화산파가 그런 짓을 벌이고도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는다는 것도 별로 믿어지지 않고 말이야.”
건장한 중년인은 아무래도 미심쩍은 모습이었다.
“그래도 종남파의 잔당들 중에서 그들을 쓰러뜨릴 만한 고수가 있다는 것보다는 더 가능성이 높지 않겠습니까? 종남파의 최고수라고 해봐야 몇 년 전에 종남파를 떠난 매상이란 놈일 텐데, 그놈의 실력으로는 봉월은커녕 손익의 상대도 되지 못할 겁니다.”
“이치상으로야 그렇지. 하지만 종남파에 그들만 있는 것은 아니란 말이지.”
건장한 중년인의 짙은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종남파에 호감을 가지고 있는 누군가가 나섰을 수도 있고, 오랫동안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고수가 다시 나타났을 수도 있지. 예를 들면 종남삼검의 후예라든지…”
“백동일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아니면 오래전에 실종되었던 장문인이라든지…”
건장한 중년인은 흠칫 몸을 굳혔다.
“죄송한 말씀이지만 총관님의 말뜻을 잘 이해하지 못하겠군요.”
반백의 중년인은 조용히 웃었다.
“백동일을 아니야. 그는 젖혀두고 종남삼검의 다른 두 사람은 아직도 행방이 묘연하다네. 만약 그들이 아직까지 살아 있다면 종남파가 멸문의 위기에 처했다는 소문을 듣게 되면 당연히 부리나케 돌아오지 않았겠나?”
“하지만 그들의 실력으로 봉월과 손익 등을 쓰러뜨릴 수 있을까요? 제가 생각하기에는 종남파의 무공으로 백동일 이상 가는 고수가 되기는 힘들다고 봅니다.”
“그런 장담은 하지 말게. 이백 년 전만 해도 종남의 이름 앞에는 천하제일(天下第一)이라는 수식어가 붙어 있었네. 한 번이라도 정상(頂上)에 선 문파라면 그 잠재력은 무궁무진한 거야.”
건장한 중년인은 고개를 끄덕였으나, 크게 수긍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이백 년이란 너무 긴 세월이었다. 아무리 한때 천하제일을 구가했던 문파라도 그 장구한 세월의 흐름 속에서 무딜 대로 무디어진 칼날로 다시 예전의 날카로움을 되찾는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최소한 건장한 중년인은 그렇게 생각했다.
“실종되었던 장문인 말씀은 무엇입니까?”
“자네도 알고 있겠지만, 삼 년 전에 종남파의 장문인이 갑자기 실종되었네. 당시의 그는 상당히 영특하고 나름대로 장래가 기대되는 인물이었지.”
“저도 들었습니다. 삼절무적이라는 별호로 알려져 있더군요. 심계와 언변, 배짱이 좋다고 하여…”
“그래, 다분히 비꼬는 의미에서 붙인 것이겠지만, 그래도 의미 있는 별호일세. 그만큼 상대하기 만만치 않은 인물이라는 뜻이거든. 더구나 내가 알기로 그자는 책임감이 무척 강한 인물이었네. 그런 사람이 갑자기 실종되었다는 건 무심코 지나칠 일이 아니야.”
그제서야 건장한 중년인은 그의 말뜻을 알아들었는지 눈빛이 예리하게 빛났다.
“총관께선 그 실종되었던 장문인이 놀라운 고수가 되어 다시 나타난 게 아닌가 의심하고 계시군요.”
“그것도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 중 하나라는 것이지. 종남파에 호감을 갖고 있는 누군가가 나선 것일 수도 있고, 아니면 종남삼검의 다른 후예들이 나타난 것일 수도 있고… 여러 가지 경우의 수 중 하나로 생각해 봄직한 이야기일 뿐이야.”
“만일 그런 경우라면 어떻게 대처하실 생각이십니까?”
반백의 중년인은 거울 속의 자신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뭐 특별히 대처할 게 있나? 방법은 오직 하나뿐인걸.”
“하나뿐이라니요?”
“그들이 누구든 종남과 관계 있는 인물이라고 가정하면 그들이 최우선적으로 노리는 목표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건장한 중년인은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조심스런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본보를 직접 노릴 리는 없을 테고… 자신들의 본산을 되찾으려 하지 않을까요?”
“바로 그거야. 그러니 상대가 노리는 목표를 분명히 안다면 대처하는 방법도 확실해지지 않겠나?”
“그곳에는 이미 양전과 적지 않은 고수들이 지키고 있지 않습니까?”
“봉월과 손익, 그리고 사수가 덤벼도 못 당한 고수가 노리고 있다면 양전만으로는 어림도 없지.”
“그럼 누구를 보내실 생각이십니까?”
반백의 중년인은 자신의 머리를 정성스레 쓰다듬었다.
“정씨 형제(程氏兄弟).”
건장한 중년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이라면 충분할 겁니다.”
“전 노괴(典老怪)도 함께 보낼 생각이네.”
“그까지 말입니까?”
“그동안 여기서 실컷 놀고 먹었으니 이제 밥값을 해야지.”
“하지만 그는 자존심이 무척 강한데, 그의 신분으로 정씨 형제의 말을 들으려고 할까요?”
반백의 중년인의 시선이 거울 속에서 그를 향했다.
“그래서 자네도 가 주어야겠네.”
건장한 중년인은 흠칫하다가 이내 자신 있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맡겨 주십시오. 종남파에서 누가 오든 살려 보내지 않겠습니다.”
“너무 자신하지 말게. 봉월도 그렇게 말했다가 그런 꼴을 당하고 말았네.”
건장한 중년인은 담담하게 웃었다.
“저를 봉월과 같이 취급하시다니 서운합니다.”
반백의 중년인은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자네를 못 믿어서 이러는 게 아닐세. 단지 요즘 들어 내 예상과 조금씩 틀어지는 일들이 계속 일어나서 심기(心氣)가 어지럽단 말일세. 앞으로 해야 할 일이 산처럼 남아 있는데, 종남파 때문에 자꾸 발목이 잡힌다면 어찌 대사(大事)를 치를 수 있겠나?”
“총관의 말씀을 잘 알아듣겠습니다. 그런데 가급적이면 전 노괴보다는 백동일을 데려가고 싶군요.”
“그는 그대로 할 일이 있네. 종남파의 본산을 지키는 일은 어디까지나 만약의 사태에 대비한 것일세. 어쩌면 아무도 찾아오지 않을지도 모르지. 그러니 숨어 있는 나머지 잔당을 소탕하는 일을 소홀히 할 수 없단 말일세.”
“그렇군요. 언제 떠날까요?”
“가급적 빠르면 좋겠네.”
“그럼 지금 준비하지요.”
건장한 중년인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발이라도 좋으니 누가 찾아왔으면 좋겠습니다. 공연히 허탕치는 일이 없도록 말입니다.”
건장한 중년인이 웃으면서 말하자 반백의 중년인은 정색을 했다.
“말썽이란 없을수록 좋은걸세. 삼보회동(三堡會同)이 무사히 끝날 때까지는 그곳을 철저히 지키도록 하게.”
“알겠습니다.”
건장한 중년인이 인사를 하고 방을 벗어나자, 반백의 중년인은 씁쓸하게 웃었다.
“종리(鍾里) 아우는 다 좋은데, 자신감이 너무 많은 게 탈이란 말이야. 양전이 잘 보좌해 줘야 할 텐데…”
그때 다른 한 사람이 안으로 불쑥 들어왔다. 기척도 없이 들어온 그 사람을 보자 반백의 중년은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위 대협(威大俠) 아니시오? 오신 걸 미처 모르고 있었소.”
들어온 사람은 훤칠한 키에 자세가 곧은 사십대 후반의 중년인이었다. 이목구비가 수려하고 푸른 청삼을 걸치고 있어 언뜻 보기에도 신태비범(神態非凡)한 모습이었다. 청삼중년인은 정중하게 포권을 했다.
“연락도 없이 불쑥 찾아와 미안하오. 아무리 궁리해도 악 총관(岳總官) 외에는 달리 부탁할 사람이 없어서 염치 불구하고 찾아오게 되었소.”
“별말씀을, 한데 무슨 일이시오?”
청삼중년인의 얼굴에 한 줄기 고졸(古拙)한 미소가 떠올랐다.
“이거 참… 말씀드리기도 민망한 일이오. 사실은 며칠 전에 본보 보주의 따님이 실종되었소.”
반백의 중년인의 눈이 번쩍 빛났다.
“서문 소저가 말이오?”
“그렇소. 별다른 준비도 없이 시비들의 눈을 피해 사라진 것으로 보아서 아마도 혼자서 장안의 풍물(風物)을 돌아보기 위해 나간 것 같은데, 며칠이 지나도록 아무런 소식도 없어서 점차로 불안한 생각이 드는구려.”
반백의 중년인은 잠시 침음하다가 물었다.
“장안에 서문 소저가 갈 만한 친척집이나 가까운 친지가 살고 있소?”
청삼중년인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전혀 없소. 며칠 째 사람을 풀어 행방을 찾았지만 아직도 오리무중이라, 결국 악 총관에게 부탁하게 된 거요.”
반백의 중년인은 청삼중년인의 쩔쩔매는 모습에 엷은 미소를 지었다.
“알겠소. 천하에 명성이 자자한 비룡검(飛龍劍)께서 그런 일로 안절부절하시다니 정말 재미있구려.”
“그건 악 총관이 몰라서 하는 소리요. 이제 삼 일 후면 본보의 보주님께서 이곳에 오실 텐데, 그때까지 그녀를 찾지 못하면 나는 아마도 두 발로 땅에 서 있지도 못하게 될 거요.”
“허허… 서문 보주께서 성격이 괄괄하시다는 말씀은 들었지만, 그래도 위 대협은 그분과는 친형제와도 같은 분이 아니시오?”
청삼중년인은 무거운 한숨을 토해냈다.
“휴우… 그것도 그분의 기분이 좋을 때나 하는 소리요. 아무튼 장안 일대는 나보다는 악 총관이 더 잘 알 테니, 무슨 수를 써서라도 삼 일 안으로 그녀를 찾아 주시오.”
“알겠소. 너무 걱정 마시오. 그녀가 장안에만 있다면 찾아내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니 말이오.”
“악 총관이 도와 주신다니 천군만마(千軍萬馬)를 얻은 것 같구려. 나는 그저 악 총관만 믿겠소.”
청삼중년인의 입가에 한 줄기 미소가 떠올랐다. 그 미소를 보자 반백의 중년인은 그제서야 그의 심산을 알아차리고 내심 냉소를 날렸다.
‘일이 잘못되면 최악의 경우에 나를 핑계로 삼으려는 것이로군. 하나 뜻대로 되지는 않을 것이다.’
반백의 중년인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두 눈이 어느 때보다도 눈부시게 반짝거렸다. 그는 앞으로 다가올 삼보회동에서 초가보의 뜻을 좀 더 쉽게 관철할 좋은 계획이 떠올랐던 것이다.
아직은 단순한 착상에 불과할 뿐이지만, 잘 다듬으면 의외의 수확을 거둘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초가보의 수석총관이며, 그를 아는 사람이면 누구나가 두려워 마지않는 소면호리(笑面狐狸) 악종기(岳鍾起)는 혼자 속으로 빙그레 미소지었다.
종남산에 다시 올랐다.
특별히 입을 여는 사람은 없었지만, 다들 감개무량한 모습들이었다. 며칠 안에 보는 종남산이었지만 모든 것이 달라져 보였다.
특히 종남산의 구석구석을 숨어 다녀야만 했던 동중산의 감회는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지금 그들이 오르고 있는 규봉(圭峯)만 해도 동중산이 무려 다섯 번이나 초가보의 추적을 피해 몸을 숨겼던 곳이었다.
원래 종남파의 본산으로 가기 위해서는 번천(樊川)을 거쳐 자오진(子午鎭)을 지나는 것이 더 빠르고 편했으나, 그들은 일부러 서쪽을 삥 둘러 가는 길을 택했다.
동중산이 구불구불하게 이어진 규봉의 산자락을 가리켰다.
“능선을 타고 규봉을 돌아가면 본파의 뒤쪽 계곡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그 계곡 중턱에 제법 커다란 동굴이 있는데, 아십니까?”
진산월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전에 수련을 하다 힘들면 그곳에 가서 잠시 쉬곤 했지. 아마 취아도 알 텐데…”
그의 뒤에서 따라오던 방취아가 생긋 웃었다.
“물론이지요. 장문사형이 갑자기 사라져서 온 산을 다 뒤지고 다니다가 결국 내가 거기서 잠들어 있는 장문사형을 찾아냈잖아요. 아무튼 그때 장문사형은 잠도 많았고, 먹기도 무척 먹었어요.”
동중산이 다시 입을 열었다.
“저도 우연히 그 동굴을 발견했습니다. 초가보에 쫓길 때 그 동굴에서 사흘 정도 기거한 적이 있었는데, 아주 은밀하면서도 제법 넓어서 우리가 거점(據點)으로 삼기에는 적합하다고 생각합니다.”
서문연상이 이들의 말을 듣고 있다가 참지 못하고 끼여들었다.
“그런 구질구질한 동굴보다는 어디 깨끗한 절을 알아보는 게 더 낫지 않을까요? 요새 향화객(香火客)들도 없어서 절마다 빈 방이 많이 있을 텐데…”
방취아는 주제도 모르고 남의 문파의 일에 참견하는 이 말썽 많은 아가씨를 날카로운 눈으로 노려보았다. 하나 그녀가 무어라고 쏘아붙이기도 전에 동중산이 재빨리 웃으며 말했다.
“물론 그런 절이 묵기는 좋지만 아무래도 남들의 이목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소. 한겨울에 여덟 명이나 되는 인원이 우르르 찾아온다면 누구라도 우리를 의심하지 않겠소?”
서문연상도 말해 놓고도 자기가 조금 경솔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동중산이 화를 내거나 무시하지 않고 자상하게 설명해 주자 배시시 웃으며 그를 쳐다보았다.
“당신은 보기보단 친절하군요. 나중에 갈 데가 없으면 나한테로 와요. 아빠에게 말해서 본보에 일자리를 알아봐 줄 테니까요.”
방취아는 어이가 없어서 아예 고개를 돌려 그녀를 외면해 버렸다. 동중산은 화내지 않고 조용히 웃었다.
“말씀만으로도 고맙소. 하지만 나는 이미 본파(本派)에 뼈를 묻기로 결심했으니 그런 일은 없을 거요.”
“아깝네. 그런데 내가 너무 말이 많은가요?”
“왜 그렇게 생각하오?”
서문연상은 주위 사람들을 힐끔거렸다.
“내가 말을 할 때마다 다들 인상을 찡그리잖아요. 특히…”
그녀는 턱으로 방취아를 가리키며 목소릴 낮추었다.
“저 여자는 나를 볼 때마다 무섭게 노래보는군요. 나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 난 여자 같아요.”
그녀 딴에는 목소리를 최대한 죽인다고 했으나 평소에도 귀가 예민한 방취아가 그 말을 못 들었을 리 없었다.
그녀의 아미가 상큼하게 치켜 올라가며 숨이 거칠어졌다.
때마침 그때 소지산이 진산월을 조용히 불렀다.
“장문사형.”
진산월이 돌아보자 소지산은 자신들의 뒤에서 따라 올라오고 있는 방화와 유소응을 턱으로 슬쩍 가리켰다.
“저 아이들은 정산에게 맡기고 오는 게 낫지 않았을까요?”
방취아가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다른 사람은 몰라도 특히 소응, 저 아이는 무공도 모르는데 그냥 두고 오는 게 나을 뻔했어요.”
유소응이 그들의 말을 들었는지 눈을 반짝이며 그들에게로 시선을 고정시켰다.
유소응은 이제 겨우 운기토납법을 배우고 있는 중이므로, 아직 정식으로 무공에 입문(入門)했다고 할 수도 없는 처지였다.
다행히 어려서부터 초원에서 자라서인지 산길을 오르는 데 별로 힘들어하지는 않았으나, 막상 싸움이 벌어지면 거치적거리만 할 뿐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할 게 분명했다.
진산월은 유소응에게 물었다.
“네 생각은 어떠냐?”
유소응은 의외로 다부진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제자는 당연히 따라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느냐?”
“제자는 이번 일이 본파의 중흥(重興)을 위해 무척 중요한 일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제가 별 힘은 되지 못하겠지만 이런 중요한 일에는 반드시 참가해서 힘을 보태는 것이 문파의 제자로서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소지산과 방취아는 평소에는 말이 거의 없던 유소응이 뜻밖에 당찬 말을 하자 모두 의외라는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유소응은 나이답지 않게 정말 과묵하고 말이 없는 소년이어서 하루 조일 그에게서 말 몇 마디 듣기도 힘들었던 것이다.
유소응의 얼굴에는 별다른 표정이 떠올라 있지 않았으나, 눈빛만큼은 그 어느 때보다도 초롱초롱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진산월은 다시 소지산에게 시선을 돌렸다.
“지금도 저 아이를 데려오지 않는 게 더 나았다고 생각하느냐?”
소지산은 유소응의 초롱한 눈망울과 굳게 다물어진 입술을 보고 있다가 고개를 저었다.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이번 일이 문파의 존망(存亡)을 내건 위험한 일이라는 생각만 했을 뿐, 본파의 제자라면 마땅히 이런 중대한 일에 참여해야 한다는 기본적인 사실을 미처 염두에 두지 못했습니다.”
“알면 됐다.”
진산월은 그 점에 대해서는 더 이상 그에게 무어라고 하지 않고 다른 것을 물어 보았다.
“낙하구구검은 어디까지 익혔느냐?”
“제 재주가 미약해서인지 육 초인 천강은홍(天降銀虹)까지만 간신히 펼칠 수 있습니다.”
진산월이 그에게 낙하구구검을 전수해 준 것은 불과 오 일밖에 되지 않았다.
그 짧은 시간 동안 복잡하고 변화무쌍한 낙하구구검을 여섯 초식이나 익힌 것은 소지산이 밤잠을 자지 않고 검법의 수련에 몰두했기 때문이었다.
“낙하구구검의 아홉 초식은 서로 연환(連環)되어 있어 계속해서 펼치면 펼칠수록 더욱 위력이 강력해진다. 다시 말해서 마지막 초식인 자하천래(紫霞天來)까지 완서어하지 않으면 낙하구구검의 본연의 위력을 충분히 나타낼 수 없다는 것이지.”
소지산의 얼굴에 그답지 않게 씁쓸한 미소가 떠올랐다.
“칠 초인 홍예장공(虹曳長空)부터는 아무래도 일 갑자(一甲子) 이상의 내공이 있어야만 익힐 수 있을 듯합니다. 제가 힘써 보았지만 늘 마지막 순산에 진기의 흐름이 끊겨서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내공은 단기간에 속성(速成)할 수 없는 것이므로 너무 조급하게 생각하지 마라. 내 경험으로 비추어 보건대, 꾸준히 매진하다 보면 어느 순간에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알겠습니다.”
“왼팔 팔은 아직도 전혀 쓸 수가 없느냐?”
“예, 몇 번 그쪽으로 전기를 보내 봤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아무래도 이쪽 팔은 영원히 쓰지 못하게 될 것 같습니다.”
진산월이 걱정스런 표정을 짓고 있자 소지산은 이내 담담하게 웃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낙하구구검을 익힌 것만으로도 제 무공은 과거와 비할 수 없을 정도로 향상되었습니다.”
“그래도 절정(絶頂)에 오르려면 왼팔의 도움이 필수적이다. 아무튼 그 점에 대해서는 추후에 함께 좋은 방법을 찾아보도록 하자.”
이어 진산월의 시선은 방취아에게로 향했다.
방취아는 진산월이 무엇을 물으려는지 훤히 짐작하는 듯 방긋 웃으며 입을 놀렸다.
“장문사형, 제 걱정은 하지 마세요. 천둔장법도 완벽히 익혔고, 다친 곳도 없으니 누구와 싸워도 두렵지 않아요.”
“네 비연신법은 어느 정도 수준이냐?”
“팔 성(八成)쯤 될 거예요.”
“월녀검법은 꾸준히 익혔느냐?”
미소가 가득했던 방취아의 얼굴에 찔끔하는 빛이 떠올랐다.
“그건…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는데요.”
월녀검법은 종남파의 비전검법 중 하나로 여인(女人)들에게만 전수되는 무공이었다.
물론 남자도 익힐 수 있지만, 처음 만들 때부터 여인의 몸에 적합하게 창안한 것이기 때문에 여인이 펼쳐야만 제 위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진산월의 얼굴에 엄격한 빛이 떠올랐다.
“월녀검법의 위력은 삼락검에 못지않다. 지금 본파에 여자라고는 너 하나뿐인데, 네가 월녀검법을 소홀히 한다면 자칫 그 검법의 맥(脈)이 끊어질 수도 있는 것이다.”
방취아는 ‘사저도 익혔잖아요’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치밀어 오르는 것을 억지로 눌러 삼켰다.
사실 종남파에서 월녀검법을 가장 완벽하게 익힌 사람은 임영옥이었다.
방취아가 그 검법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은 이유는 물론 지법(指法)이나 수법(手法)에 더 매력을 느꼈기 때문이었지만, 임영옥만큼 그 검법을 능숙하게 익힐 자신이 없었던 탓도 있었다.
하나 임영옥의 행적을 예측할 수 없는 지금, 그녀마저 월녀검법을 익히지 않는다면 진산월의 말마따나 그 뛰어난 검법이 절전(絶傳)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이런 식으로 문파의 절학들이 절전되는 경우는 적지 않았다.
천하삼십육검보다 오히려 뛰어난 절학이었던 삼락검이 당금에 와서 실전(失傳)되었던 것도 이백 년 전의 뛰어난 고수들이었던 종남오선이 실종되면서 그 변화무쌍한 오의(奧義)를 완벽하게 터득한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그래도 구결이라도 남겨져 있었으나, 점차로 시일이 흐르면서 구결조차 사라져 지금은 그저 말 그대로 전설로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방취아는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배시시 웃었다.
“알겠어요. 지금부터라도 열심히 연습할게요. 기본 변화는 모두 외우고 있으니 꾸준히 연마하면 곧 쓸 만한 수준에 오를 수 있을 거예요.”
그러는 동안에 그들은 규봉의 능선을 거의 지나 하나의 깊은 협곡(峽谷)에 도착하게 되었다.
그 협곡은 유난히 가파른 능선 사이에 위치해 있어서 멀리서 볼 때는 그저 짙은 그림자로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하나 가까이 가서 보면 협곡 자체가 하나의 커다란 분지(盆地)를 형성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 분지는 유난히 울창한 수림으로 뒤덮여 있었는데, 수림 사이로 몇 채의 전각들이 살짝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 분지가 내려다보이는 능선에 다다르자 이상하게도 다들 입을 다문 채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서문연상이 의아한 표정으로 동중산을 쳐다보았다.
“저기가 어디죠?”
항상 그녀에게 친절하게 대하던 동중산도 이번에는 아무 말이 없었다.
단지 그의 외눈에서 흘러 나오는 눈빛에 말로 형용못할 착잡하고 그리운 빛이 담겨 있을 뿐이었다.
동중산뿐이 아니었다.
항상 별로 표정이 없던 소지산의 얼굴에도 한 줄기 아련한 빛이 떠올라 있었고, 방취아의 두 눈에는 그렁그렁 눈물이 맺혀 있었다.
서문연상은 그제서야 무언가를 느낀 듯 혼잣말처럼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저기가 바로 종남파로구나.”
그렇다.
장장 오백 년의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종남파의 본산이 그들 눈앞에 펼쳐져 있는 것이다.
진산월은 한동안 그 자리에 못박인 듯 우뚝 서서 종남파의 전각들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 가슴속에서 우러나오는 깊은 탄식을 토해내는 것이었다.
“마침내 돌아왔구나.”
일월(一月) 이십팔일(二十八日).
소지산 등이 초가보에 쫓겨 산을 등진 지 백팔십오 일 만이었다.
그리고 진산월이 매종도의 비학을 찾아 길을 떠난 지 삼 년하고도 일 개월 이십 일 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