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10권 양대호리(兩大狐狸)편 : 8화
제97장. 성동격서(聲東擊西)
“상황은 어떻소?”
종리황은 옷을 걸치며 자신의 방에 불쑥 들어온 양전을 향해 물었다. 양전은 다소 부스스한 모습이었다.
“산문 쪽에 종남파의 고수 하나가 나타난 모양이오. 비명 소리가 들린 것으로 보아 누군가가 다치거나 죽은 모양인데, 아직 긴급을 알리는 신호가 나오지 않는 걸 보니 위험한 상황은 아닌 듯 싶소.”
종리황은 옷을 모두 입고 동경을 한차례 본 다음 냉소를 날렸다.
“그 녀석이 아주 시기를 잘 골랐군. 이른 새벽에 급습을 하다니 머리가 좋은 녀석이오.”
새벽에는 누구나가 몸 상태가 썩 좋지 않기 마련이다. 더구나 잠자리에서 반강제적으로 일어났다면 더욱 그러할 것이다. 상대편은 미리 완벽한 준비를 하고, 이쪽은 억지로 잠자리에서 일어났다면 적어도 삼 할은 지고 들어가는 상황이라고 할 수 있었다.
양전의 표정은 의외로 심각했다.
“육 개월 동안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종남파의 고수가 갑자기 나타났다는 게 웬지 마음에 걸리오. 아무래도 무언가 꿍꿍이 속이 있는 것 같은데, 선뜻 산문으로 쳐들어왔다는 게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구려.”
종리황은 대수롭지 않은 듯 웃었다.
“서툰 술수를 쓰는 거겠지. 틀림없이 다른 쪽으로 침입하는 놈들이 있을 거요.”
“나도 그럴 것이라 생각하고 태화각에 있던 고수들 중 일부를 세 군데의 출입구로 보내어 상황을 파악케 했소. 곧 그들이 자세한 소식을 가지고 올 거요.”
“잘했소. 그런데 정씨 형제에게는 알렸소?”
양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조금 전에 일어나서 대청에서 당신이 내려오기를 기다리고 있소.”
“전 뇌괴는?”
양전의 얼굴에는 쓴웃음이 떠올랐다.
“상황이 급해지면 그때 부르라며 깨우러 온 사람을 호통쳐 돌려보냈다고 하오. 아마 지금도 침상에 있을 거요.”
종리황의 얼굴에 차가운 미소가 떠올랐다.
“전 뇌괴다운 짓이로군. 이번 일은 그의 힘을 빌리지 않고도 해결할 수 있을 테니 굳이 그를 귀찮게 할 필요는 없을 것 같소.”
“하지만 나는 왠지 불안한 생각이 드는구려. 그토록 꽁꽁 숨어 있던 자들이 이렇듯 무모한 행동을 벌인다는 게 자꾸 마음에 걸리오.”
“그들로서도 다른 수가 없었겠지. 설사 다른 수가 있다 해도 내가 이곳에 온 이상 아무 소용이 없을 거요.”
종리황은 자신에 찬 어조로 말을 이었다.
“오늘이야말로 눈엣가시 같던 종남파의 뿌리를 완전히 뽑아 버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요. 그러니 불안한 생각은 마음 한구석에 접어두고 눈앞의 일에만 집중하도록 합시다.”
양전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밖에서 누군가의 음성이 들려 왔다.
“양 대야(楊大爺), 선궁(宣宮)입니다.”
“들어오너라.”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온 사람은 눈매가 날카로운 이십대 후반의 청년이었다. 청년은 종리황에게 형식적인 인사를 하고는 이내 양전의 앞으로 다가갔다.
종리황은 이 모습을 보고 내심 냉소를 날렸다. 이곳에 있는 대부분의 고수들이 자신에게 은근한 반감을 가지고 있고, 양전의 말에만 따른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하나 일이 터진 지금의 시점에서 괜히 그런 일을 들춰내어 분란(紛亂)을 조장할 필요는 없었다.
“어찌 되었느냐?”
“산문 앞에 나타난 자는 소지산이라는 인물인데, 지금 악 대협과 치열한 싸움을 벌이고 있습니다.”
양전의 눈꼬리가 꿈틀거렸다.
“소지산이라면 종남파의 일대제자일 뿐인데, 악평의 실력으로 아직까지도 그를 물리치지 못했단 말이냐?”
“그자의 솜씨가 예상보다 뛰어나서 악 대협이 조금 고전하는 모양입니다. 하지만 날수표(날手彪) 종기(宗其)와 삼랑검(三狼劍) 한충(韓沖)이 갔으니 곧 결판이 날 것입니다. 그보다는 후원 쪽에 조금 문제가 생긴 듯 합니다.”
“후원 쪽이라면… 조사전 말이냐?”
“예, 그쪽에서도 누군가가 침입하다가 발각되어 시 대협과 싸우고 있다고 합니다. 후원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던 신망 곡 대협이 황급히 그쪽으로 달려가는 광경을 보았습니다.”
양전은 종리황에게 시선을 돌렸다.
“종리 형의 말씀대로 그들이 양동작전(陽動作戰)을 벌인 것 같소.”
종리황은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정도뿐이라면 너무 실망인데…”
그는 선궁이라는 청년에게 물었다.
“동쪽에서는 별다른 움직임이 없었느냐?”
선궁은 슬쩍 양전을 쳐다보다 양전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제서야 입을 열었다.
“그쪽은 낙 대협과 육태세가 지키고 있습니다. 조금 전에 낙 대협에게 연락을 해보았더니 사냥꾼인 듯한 행적이 이상한 인물이 얼쩡거려서 조사 중이라는 대답을 들었습니다.”
종리황은 그 광경을 뻔히 보고 있으면서도 별다른 내색을 하지 않은 채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삼면 합공(三面合攻)이라, 이거지? 냄새가 좀 나는군.”
“그들이 앞과 뒤에서 소란을 피우고는 동쪽을 통해서 들어오려는 모양이오. 그쪽으로 인원을 보충해야 하지 않겠소?”
종리황은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 않소. 그곳이 주 공격대상이었다면 일부러 사냥꾼 행세를 하여 종적을 발각당했을 리가 없소. 좀 더 은밀하게 움직였거나 신속하게 돌파를 했겠지.”
“그럼 종리 형의 생각은 어떻소?”
종리황의 눈이 어느 때보다도 예리하게 번쩍였다.
“남쪽에 절벽이 있다고 하지 않았소?”
“그렇소. 하나 그곳은 거의 천길 낭떠러지에 가까워서 누구도 그곳을 통해서는 접근할 수가 없소.”
종리황은 빙긋 미소지었다.
“총관께서는 종종 강호에서는 어떠한 일도 일어날 수 있다고 말씀하셨지. 강호에는 가끔 세인(世人)들의 상상을 뛰어넘는 자들이 나타나곤 하는데, 종남파에도 그런 자가 없다고 할 수는 없지 않겠소?”
양전의 몸이 움찔거렸다.
“종리 형의 말씀은 종남파에 무서운 절대고수가 있다는 것이오?”
종리황은 이곳에 오기 전에 악종기와 자신이 나눈 대사를 그대로 전해 주었다. 그의 말을 듣고 있던 양전의 표정이 점점 심각하게 굳어졌다.
“만일 그렇다면 종리 형의 생각이 이해가 가는구려. 세 방면에서 소란을 일으켜 우리의 병력을 그쪽으로 분산시킨 다음 절대적인 무공을 가진 자가 절벽을 타고 내려와 우리의 배후를 노린다는 말이오?”
“그렇지. 양 형은 확실히 머리가 좋아서 말하기 쉽구려.”
종리황이 칭찬을 했으나 양전의 얼굴은 그다지 밝아지지 않았다. 어제도 그러더니 지금도 꼭 아랫사람을 격려하는 것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종리황은 양전의 표정이 어떻든 신경을 쓰지 않고 말을 이었다.
“아무리 가파른 낭떠러지라고 해도 절정의 무공을 가진 고수가 몇 가지 장비를 이용한다면 못 내려올 것도 없소. 그러니 우리가 주목해야 할 곳은 다른 어디도 아닌 바로 남쪽이오.”
양전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종리황은 그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양 형은 정씨 형제와 함께 남쪽의 절벽 아래에 잠복하고 있으시오. 가급적이면 낙무인도 부르는 게 좋겠소. 동쪽은 육태세만으로도 충분히 지킬 수 있을 테니 말이오.”
양전이 무어라고 말하려 했으나 종리황은 손을 들어 그를 제지시킨 후 분명하고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그자가 대왕루에서 봉월 등을 살해한 자라면 가급적 많은 고수들이 가는 게 좋소. 절벽을 내려오기 전에 손을 써서 치명상을 입힌다면 의외의 수고를 덜게 될 수도 있으니 각별히 명심하도록 하시오.”
그것은 명백한 명령권자(命令權者)의 말이었다. 양전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분부대로 하겠소.”
양전이 선궁과 함께 방을 벗어나자 종리황은 허공을 응시하고 있더니 조용히 웃었다.
“성동격서(聲東擊西)라… 비록 약은 수를 썼다만 오늘은 상대를 잘못 만났다. 내가 이곳에 있는 이상 네놈들이 무슨 수를 쓰든 오늘 살아서 이곳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이런 짓을 해서 대체 무슨 소용이 있다는 거야?”
서문연상은 혼자 툴툴거리며 아미를 찡그렸다. 그녀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동중산이 그녀에게 부탁한 일은 규봉의 능선을 가로질러 반대편 봉우리까지 가서 돌을 몇 개 아래로 굴리라는 것이었다. 처음에 그녀는 동중산이 자신을 놀리거나 따돌리기 위해서 하는 말인 줄 알았으나, 부탁할 때의 모습이 너무 진지해서 무심코 승낙을 하고 말았다. 하나 막상 봉우리 위로 올라가서 돌을 굴릴 생각을 하니 자기가 생각해도 너무 한심한 일이라 선뜻 내키지 않았다.
“아무래도 내가 사기를 당한 건가?”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심란한 그녀의 마음과는 달리 하늘은 오늘따라 청명(淸明)하기 그지없었고, 멀리 아침해가 떠오르는 광경은 장엄하기조차 했다. 그녀는 다시 투덜거렸다.
“이렇게 좋은 날에 나같이 예쁜 여자가 이런 짓을 하고 있어야 되는 거야?”
그녀는 봉우리에 쭈그리고 앉은 채 못마땅한 표정을 짓고 있다가 근처에서 주먹만한 돌을 주워 아래로 던져 보았다. 돌은 가파른 산길을 굴러가더니 이내 아래도 뚝 떨어져 내렸다. 그녀는 호기심이 일어 봉우리 아래를 조금 내려가 보았다. 아찔할 정도로 깊은 낭떠러지가 입을 쩍 벌린 채 그녀를 쏘아보고 있었다.
“여기에 이런 절벽이 다 있었네.”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신기한 듯 절벽을 내려다보았다. 절벽의 길이는 어림잡아도 이삼백 장은 될 듯 했다. 까마득히 내려보이는 아래에 종남파의 건물들 몇 개가 놓여져 있는 모습이 마치 장난감을 보는 듯 했다.
휘잉!
한차례 차가운 바람이 불자 그녀는 두려운 듯 절벽에서 멀찌감치 떨어졌다.
“이런 곳에서 한 시진(時辰)이나 죽치고 앉아 돌 장난을 해야 하다니… 이게 만일 나를 놀리기 위한 것이었으면 그 애꾸의 한쪽 눈마저 못 쓰게 만들어 버릴 테다!”
그녀는 소녀답지 않은 흉악한 소리를 하며 다시 바닥에서 돌멩이 몇 개를 집어들었다.
“천천히 백까지 센 다음 하나씩 던지라고 했지만, 나는 구십까지만 세겠어. 왜? 내 맘이니까. 그리고 돌도 두 개씩 던질 거야. 그것도 내 맘이니까.”
그녀는 조잘거리며 돌멩이 두 개를 다시 아래로 던졌다. 그리고는 이내 심드렁한 표정으로 바닥에 앉아 숫자를 헤아리기 시작했다.
“무슨 소리지.”
“글쎄, 뭐가 떨어지는 소리 같은데…”
두풍(杜豊)과 진호(秦昊)는 서로를 마주보았다. 그들은 양전의 지시를 받고 어젯밤부터 절벽 아래를 지키고 있었다. 초가보에 가입한 지는 이 년쯤 되었으나, 그동안 통 활동할 기회를 찾지 못해 고민하던 두 사람은 종남파를 지키는 일에 자원하여 이곳으로 오게 되었다. 하나 이곳에서도 일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실망에 잠겨 있던 두 사람에게 기회가 찾아온 것은 어젯밤이었다. 양전이 부하들을 소집해 절벽 아래를 감시할 사람을 찾자 그들은 서로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그 일을 하겠다고 나섰다. 종남산의 겨울밤은 제법 추었으나, 그들은 첫 임무를 맡았다는 흥분에 힘든 줄도 모르고 밤을 꼬박 새웠다. 이제 몇 시진만 있으면 그들을 교대할 사람이 올 것이고, 다시 또 그들에게까지 차례가 오려면 한참을 기다려야 할 것이다.
그들은 밤사이에 천지(天地)가 개벽(開闢)할 일이라도 일어나길 기대했으나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그런데 아침해가 훤히 떠오르는 시간에 무언가 이상한 소리가 들려 온 것이다. 두풍은 절벽 위를 올려다보았다. 너무 까마득해서 끝은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다. 그는 이내 고개를 떨구었다. 아침 햇살이 눈을 찔러 왔던 것이다.
“특별히 움직이는 건 없는 것 같은데…”
“새가 지나가는 소리겠지.”
“그런가 보군. 하긴… 밤에도 아무 일 없었는데 아침에 무슨 일이 생기겠어?”
두풍은 멋쩍게 웃으며 허리를 쭉 폈다. 그때 다시 소리가 들렸다. 이번에는 두 사람 모두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서로 마주쳤다.
“들었지?”
“분명히 들었네. 돌 구르는 소리였어.”
두풍은 흥분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위에서 누군가가 내려오는 게 아닐까?”
진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럴 리가? 이 겨울에 어떤 미친놈이 저 높은 절벽을 타고 내려올 생각을 하겠나?”
“아무튼 조금만 더 지켜보세. 공연히 아침부터 양 대야를 깨웠다가 산짐승 몇 마리에 놀란 바보라는 소리를 듣고 싶지는 않으니 말일세.”
하나 그들의 걱정은 기우(杞憂)에 불과했다. 그들이 또 다른 징후를 발견하기도 전에 양전이 몇 명의 고수들과 함께 그들의 앞에 나타났던 것이다. 양전과 함께 온 사람은 쌍염라 정씨 형제와 십여 명의 고수들이었다. 두풍과 진호가 양전에게 보고를 하기도 전에 세 번째 돌 구르는 소리가 들려 왔다.
그 소리는 장내의 모든 사람들이 들을 수 있었다. 양전은 까마득한 절벽을 올려다보고 있다가 두풍에게 말했다.
“동봉(東峯)으로 가서 낙 대협을 오라고 해라.”
“정말 날다람쥐 같은 놈이로군.”
장태(章泰)는 이를 부드득 갈아붙였다. 장태는 육태세 중의 셋째로, 누구보다도 신법이 빠르다고 알려진 인물이었다. 그런데 눈앞에서 이리저리 몸을 피하는 사냥꾼을 영 따라잡을 수 없는 것이다. 차라리 사냥꾼의 신법이 그보다 훨씬 뛰어나다고 한다면 그다지 기분이 나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보아도 사냥꾼은 신법이 그다지 뛰어난 것도 아니었고, 장태보다 몸이 날쌘 것도 아니었다. 단지 주위의 지형지물을 기가 막히게 꿰뚫고 있어서 미끄러운 산길을 자기 집 안방처럼 요리조리 빠져나가고 있는 것이다. 처음 그 사냥꾼을 발견한 사람은 육태세 중의 막내인 뇌인(雷人)이었다. 이곳을 책임진 독수금륜 낙무인은 육태세를 두 명씩 한 조(組)를 이루게 해서 동봉의 세 군데에 배치를 했다. 이곳은 능선이 비교적 완만하고 샛길이 많아서 그런 식으로 배치를 하지 않으면 자칫 잠입하는 자를 발견하지 못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장태와 뇌인은 육태세 중에서도 서로 사이가 좋아서 자연스레 한 조가 되었다. 새벽 동이 터 올 무렵, 산문 쪽에서 미약한 폭음이 들려 왔다. 그때부터 장태와 뇌인은 바짝 긴장하여 경계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 그리고 반시진이 지날 무렵, 뇌인은 동쪽 산등성이를 가로질러 이쪽으로 접근해 오는 그림자 하나를 발견하게 된 것이다. 자세히 보니 그 그림자는 털옷을 입고 머리에는 털가죽으로 된 모자를 깊게 눌러쓰고 있어서 평범한 여느 사냥꾼처럼 보였다. 하나 평범한 사냥꾼이 이른 새벽부터 종남산 근처의 산등성이를 서성일 리는 없었다. 이 일대는 산세(山勢)가 그리 깊지 않아서 산짐승이 많이 서식하지도 않았고, 무엇보다 초가보가 종남파를 접수한 후로는 모두들 이쪽으로의 출입을 삼가고 있었다. 더욱 이상한 것은 그 사냥꾼의 행동이었다. 마치 누군가에게 발각당할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처럼 커다란 나무 사이로 몸을 숨기며 조금씩 전진해 오고 있었던 것이다. 장태와 뇌인은 그 사냥꾼을 일단 사로잡기로 결정하고 그가 자신들에게 가까이 올 때까지 숨어서 기다리기로 했다. 하나 사냥꾼의 눈치가 보통이 아니었던지, 십 장쯤 떨어진 곳까지 왔을 때 그들의 종적을 알아차리고 도망가기 시작했다.
“내가 저자를 쫓을 테니 자네는 다른 사람들에게 상황을 알리도록 하게.”
장태는 뇌인에게 말하고는 재빨리 사냥꾼의 뒤를 쫓기 시작했다. 처음 장태는 도약질 몇 번으로 쉽사리 사냥꾼을 잡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나 자신의 판단이 잘못된 것을 알아차리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소요되지 않았다. 사냥꾼은 능숙한 발길로 눈 덮인 산비탈을 이리저리 가로질러 가며 좀처럼 그의 추격을 허용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곳은 산비탈이라 워낙 눈이 많이 쌓여 발이 푹푹 빠지는데다, 바위마다 얼음이 얼어 있어 자칫 잘못하면 제풀에 나가떨어지기 십상이었다. 그런데도 사냥꾼의 행동은 거침이 없었다. 분명 그다지 빠른 동작은 아닌 것 같은데, 장태는 그와의 거리를 좁힐 수 없었다. 결국 뇌인이 다른 두 명의 태세를 불러올 때까지도 장태는 사냥꾼의 십 장 밖에서 그를 쫓는 형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뇌인 등이 가세하자 추적은 훨씬 수월해졌다. 장태는 그를 잡기만 하면 일단 저놈의 다리부터 분질러 버리리라 작심하고 거친 숨을 몰아쉬며 바람처럼 달려갔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사냥꾼은 사태가 위급함을 알아차렸는지 조금 전보다 더욱 움직임이 빨라져서 그야말로 눈 위를 달려가는 한 마리 여우 같았다.
“이얍!”
참지 못한 뇌인이 비수(匕首)를 꺼내 던졌으나, 사냥꾼은 재빨리 방향을 바꾸어 비수를 피했다. 그 모습은 틀림없는 강호의 고수였다.
‘역시 무림인이구나. 종남파의 잔당임에 틀림없다.’
장태는 더욱 흥분하여 뇌인에게 눈짓을 했다. 뇌인은 그의 의중을 알아채고 다른 한 명의 태세와 함께 방향을 삥 돌아 반대편 능선을 향해 달음질쳐 갔다. 장태와 또 다른 태세는 일부러 요란한 소리를 내며 사냥꾼의 뒤를 추적해 갔다.
마침 사냥꾼이 도망가고 있는 방향은 다른 조(組)의 태세 두 명이 잠복해 있는 부근이었다. 장태는 내심 쾌재를 불렀다.
‘이번에야말로 네놈은 독 안에 든 쥐다.’
장태와 태세 한 명은 간격을 삼 장 정도로 넓힌 다음 사냥꾼의 뒤를 바짝 쫓아갔다. 멀리서 보면 누가 사냥꾼이고 누가 먹잇감인지 분간이 가지 않을 정도였다. 때마침 반대편을 가로질러 갔던 뇌인과 태세가 사냥꾼의 앞쪽을 막아 섰다. 사냥꾼은 움찔하더니 조금 전보다 더욱 빠른 속도로 방향을 바꾸어 미끄러지듯 비탈길을 내려갔다. 그 방향은 정확하게 다른 조의 태세 두 명이 숨어 있는 쪽이었다.
‘이놈, 넌 끝이다.’
장태의 시야에 잠복해 있던 두 명의 태세가 몸을 일으키는 광경이 들어왔다. 꼼짝없이 삼면(三面)으로 포위된 사냥꾼이 사로잡히는 것은 시간 문제로 보였다. 그런데 그 순간, 사냥꾼의 몸이 갑자기 허깨비처럼 그 자리에서 사라져 버렸다.
“엇?”
장태는 물론이고 추적을 하고 있던 다른 태세들도 모두 놀란 외침을 토해냈다.
“이게 어찌된 일이냐?”
장태는 안색이 변해 황급히 사냥꾼이 있던 곳으로 달려갔다. 사냥꾼이 신(神)이 아닌 다음에야 뻔히 여섯 명이 쳐다보고 있는데 홀연히 사라질 수는 없는 일이었다.
“으음…”
사냥꾼이 있던 곳에 도착한 장태의 입에서 나직한 신음성이 흘러 나왔다. 그곳에는 하나의 깊은 동혈(洞穴)이 뚫려 있었다. 그 동혈은 커다란 나뭇등걸과 바위 틈새에 교묘하게 위치해 있어 멀리에서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이런 곳에 동혈이 있으리라고는 누구도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하필이면 사냥꾼을 막다른 곳으로 몰아넣었다고 생각한 곳에 동혈이 있다니 이게 우연인지, 아니면 사냥꾼이 그것을 알고 일부러 이쪽으로 도망친 것인지 쉽게 분간이 가지 않았다. 장태는 씹어 뱉듯이 말했다.
“안으로 들어가야겠네. 여기까지 왔는데 그놈을 놓칠 수는 없네.”
뇌인과 다른 태세들도 같은 심정인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일제히 고개를 끄덕이며 동혈 앞으로 몰려들었다. 동혈은 사람 하나가 허리를 숙인 채 간신히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좁았다. 안은 짙은 어둠에 잠겨 있어 아무리 안력을 돋구어도 아무 것도 볼 수 없었다. 그들은 서로 눈짓을 하고는 일제히 동혈 속을 향해 암기를 발출하기 시작했다.
쐐쐐쐐!
빗발치는 듯한 암기의 세례들이 퍼부어졌다. 그러다 어느 한순간, 암기의 모습이 뚝 끊기고 장태가 동혈 속으로 뛰어 들었다. 그 뒤를 뇌인과 다른 한 명의 태세가 따라 움직였고, 나머지 세 명의 태세들은 동혈을 에워싸듯 조금 떨어진 곳에서 반원형으로 버티고 서 있었다. 동혈로 뛰어든 장태의 코를 찌르는 것은 퀘퀘한 냄새와 역겨운 비린내였다. 아마도 짐승들의 거처로 사용되던 곳인 모양이었다. 장태는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병기를 꺼내 든 채 신중한 동작으로 앞으로 전진했다. 다행히 동혈은 비어 있었는지 짐승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얼마쯤 가니 동혈이 조금 더 넓어져서 두 사람이 나란히 걸을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뇌인이 다가와서 그와 어깨를 나란히 했고, 다른 한 명의 태세는 그들을 호위하듯 뒤에서 바짝 따라왔다. 동굴은 상당히 깊었다. 수십 장은 족히 걸어 들어왔는데도 그 끝이 보이지 않았다. 뇌인이 나직하게 소곤거렸다.
“이거 지하(地下)로 한없이 들어가는 무저갱(無底坑) 같은 곳이 아닐까요?”
“그런 소리 말게. 종남산에 그런 곳이 있다는 말은 들어 본 적이 없네.”
문득 장태의 눈이 번쩍 빛났다. 저 멀리에 아득하나마 희미한 빛이 보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끝이 멀지 않았군. 암습을 조심하게.”
장태는 손에 든 검을 힘껏 움켜잡으며 속도를 높여 그 빛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그 빛은 과연 출구(出口)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안광을 번뜩이며 출구를 빠져 나오던 장태의 신형이 갑자기 멈추어졌다.
“왜 그러십니까, 형님?”
막 그의 뒤를 따라오던 뇌인이 흠칫 놀라 외쳤다. 하나 뇌인 또한 몸을 굳힌 채 그 자리에 우뚝 서 버렸다. 동굴을 빠져 나온 그들의 앞에 펼쳐진 것은 자신들이 처음 사냥꾼을 발견했던 산비탈이었다. 한 시진 가까이나 숨바꼭질하여 결국 그들은 제자리를 뺑뺑 맴돌았던 것이다.
동중산이 여섯 명의 태세들을 유인하여 환선동굴(環旋洞窟)로 사라지는 광경을 본 후 진산월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까지 그는 산등성이가 빤히 내려다보이는 봉우리의 은밀한 구석에 앉아서 장내의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상대보다 종남산 일대의 지리에 훤하다는 것은 이럴 때 큰 도움이 되었다. 특히 동중산 같이 두뇌 회전이 비상하고 몸이 빠른 사람에게는 더욱 커다란 힘이 되는 것이다. 비록 부상이 완쾌되지는 않았지만, 남과 싸우지만 않는다면 동중산의 재치로 충분히 감당할 수 있을 것이다. 걱정되는 사람은 오히려 산문을 공격했던 소지산과 조사전으로 잠입해 들어간 방취아였다. 특히 방취아는 신법이 뛰어난데다 그녀가 향한 곳이 좁은 협곡이어서 오래 버틸 수 있을지 모르나, 합공을 받기 딱 좋은 넓은 산문으로 쳐들어간 소지산은 도움이 시급한 형편이었다. 이제는 자신이 나설 차례였다. 한시라도 빨리 목적한 바를 이루고 소지산과 방취아를 구출해 내어야 했다. 진산월은 수중에 들고 있는 보자기를 풀었다. 이백 년 만에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내는 용영검(龍影劍)은 아침 햇살을 받아 어느 때보다 찬연하게 빛나고 있었다. 진산월은 손잡이에 박힌 여의주 모양의 구슬을 가만히 쓰다듬었다.
“오늘은 너의 신세를 톡톡히 져야겠다.”
진산월은 용영검을 허리에 차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다음 소리 없이 산봉우리를 내려오기 시작했다. 그의 몸은 곧 여섯 명의 태세가 모두 자리를 비워 감시망이 뻥 뚫린 동봉의 능선을 타고 종남파의 본산으로 사라져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