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11권 혈사지미(血事之迷)편 : 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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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림천하 11권 혈사지미(血事之迷)편 : 3화


제103장. 심야논쟁(深夜論爭)

밤의 공기는 차갑고 무거웠다. 달도 없는 그믐밤이라 주위는 칠흑같이 어두웠고, 한겨울처럼 매서운 추위가 느껴졌다. 진산월이 팔베개를 한 채 침상에 누워 있을 때 문밖에서 인기척 소리가 들려 왔다.

“자느냐?”

진산월은 그 음성이 전풍개의 것임을 알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닙니다. 들어오십시오.”

문이 열리며 차가운 바람과 함께 전풍개가 방안으로 들어왔다. 전풍개는 날카로운 눈으로 진산월을 쳐다보더니 진산월이 잠옷도 입지 않고 평상시와 다름없는 모습인 것을 보고는 송충이처럼 짙은 눈썹을 꿈틀거렸다.

“항상 옷도 갈아입지 않고 잠자리에 드는 거냐?”

“…!”

“장문인이란 모름지기 문파의 얼굴과도 같다. 본파의 역대 장문인들은 행동거지 하나는 물론이고 식사를 할 때나 잠자리에 들 때도 항상 자신들의 본분(本分)을 잃지 않았었다. 네가 무심코 하는 말 한마디, 행동 한 가지가 본파의 명성에 누(累)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라.”

이십여 년 만에 불쑥 나타난 사문의 웃어른이 야밤에 처소로 쳐들어와 잔소리를 늘어놓는다면 누구라도 기분이 언짢아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나 진산월은 담담한 표정으로 머리를 숙였다.

“사조의 말씀이 맞습니다. 앞으로 매사에 좀더 신중을 기하겠습니다.”

전풍개는 여전히 못마땅한 표정이었다.

“장문인 신분으로 남에게 함부로 머리를 조아리는 것도 좋은 습관은 아니다.”

“그 점도 명심하지요.”

전풍개는 진산월의 얼굴을 빤히 주시하더니 눈살을 찌푸려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넉살이 좋은 건지 배짱이 없는 건지 모르겠군. 그런데 이제 너는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이냐?”

“무엇을 말입니까?”

“본파를 능멸한 초가보를 이대로 내버려둘 생각이냐? 설마 너는 본산을 되찾은 것에 만족해서 지난날의 치욕을 묻어 두려는 것은 아니겠지?”

전풍개는 서릿발 같은 눈으로 진산월을 쏘아보았다. 마치 그의 대답 여하에 따라 한바탕의 호된 질책도 마다하지 않겠다는 듯한 모습이었다. 진산월은 조용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물론 초가보에 진 빚은 반드시 갚고야 말 것입니다. 하지만 일에는 선후(先後)가 있는 법입니다. 지금 중요한 것은 초가보에 복수하는 것이 아닙니다.”

“문파를 침범당한 원한을 갚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어디 있단 말이냐?”

“아쉽게도 지금의 본파는 아직 문파로서는 체계적인 틀을 갖추지 못했습니다. 우선은 내실(內實)을 다져야 합니다. 과거의 치욕을 설욕하고 문파를 재건하는 일은 그 다음에 생각해 볼 일입니다.”

“말은 번듯하게 잘하는구나.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놈이 지금까지 뭐 하느라 문파를 이런 꼴로 만들었단 말이냐?”

전풍개의 음성은 준엄한 추궁에 가까웠다.

“일파(一派)의 장문인으로서 문파가 풍전등화(風前燈火)의 위기에 처해 있는 것을 알면서도 몇 년씩이나 자리를 비운다는 것이 말이 되는 소리냐? 게다가 내실을 다진다는 것이 말처럼 쉽게 하루 이틀 만에 이루어질 수 있는 말이더냐?”

“…”

“조금 전에 장부를 살펴보니 그 많던 전답(田畓)과 주루도 모두 날아가 버리고 알거지 신세나 다름없는 형편이었다. 까딱하면 조만간에 식량을 걱정해야 할지도 모르는 판이더구나. 게다가 문파 제자라고 남은 사람은 달랑 네 명뿐이고, 그중에서 제대로 성한 놈은 한 명도 없는 상황인데도 너는 무얼 믿고 문파 재건 운운하는 거냐?”

진산월은 묵묵히 그의 호통을 듣고만 있었다. 사실 전풍개의 말이 틀린 소리는 아니었기에 그로서는 특별히 대꾸할 말이 없는 것도 사실이었다.

진산월이 아무 말도 안 하고 있자 전풍개는 그가 자신을 무시하고 있다고 생각했는지 눈빛이 한층 차가워지며 음성이 거칠어졌다.

“너는 명색이 장문으로서 문파의 장래에 대한 아무런 계획도 가지고 있지 않단 말이냐? 만약 그렇다면 노부는 더 이상 너를 장문인으로 여기지 않겠다. 네 사부가 무슨 생각으로 너를 장문인으로 지명했는지는 모르지만, 아무런 책임의식과 목표도 없는 놈이 장문인 자리에 앉아 있는 꼴은 도저히 두고 볼 수가 없다.”

진산월은 가만히 그의 말을 듣고 있다가 조용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계획이 없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본파가 처해 있는 상황은 단지 서두른다고 해결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사조께선 너무 조급해하지 마시고 저를 믿고 기다리십시오.”

전풍개는 주위를 질식시킬 듯한 무시무시한 광망이 뿜어 나오는 눈으로 진산월의 얼굴을 뚫어지게 주시했다.

“너를 믿고 기다리라고? 너의 무엇을 믿고 무작정 기다리란 말이냐?”

진산월은 자신을 무시하는 듯한 전풍개의 말에도 조금도 화를 내거나 인상을 찡그리지 않고 여전히 담담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제가 본파의 장문인 자리에 오른 것은 삼 년 육 개월 전입니다. 고난스러운 세월이었다는 걸 부인하지 않겠습니다. 좌절과 시련에 빠진 적도 적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저를 비롯한 본파의 제자들은 단 한순간도 본파가 재건될 수 있다는 희망을 잃어 본 적이 없습니다.”

“…!”

“이제 잃었던 본산도 되찾고 모든 제자들이 새로운 의욕에 가득 차 있습니다. 아직은 부족하지만 착실히 준비를 해나간다면 멀지 않은 시일 내에 반드시 본파를 다시 일으킬 기틀을 세울 수 있을 겁니다. 초가보에 복수하는 것은 그때 해도 늦지 않은 일입니다.”

전풍개는 묵묵히 진산월의 말을 듣고 있다가 불쑥 퉁명스런 음성을 내뱉었다.

“하지만 문파 제자라고 해봐야 겨우 네 명밖에 안 되는데 무슨 수로 문파를 일으켜 세운단 말이냐? 아니, 당장 초가보에서 다시 쳐들어온다면 그들을 막을 자신이 있기라도 한 거냐?”

“초가보는 당장에는 저희들에게 손을 쓰지 않을 겁니다.”

“그건 왜 그러느냐?”

“이제 곧 초가보에서 강북삼보의 회동이 벌어집니다. 그 회동은 초가보의 입장에서는 무척 중요한 것입니다. 그들이 강호의 유력한 문파로 등장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니 말입니다.”

전풍개는 강호의 경험이 풍부한 인물답게 이내 사정을 알아차린 듯 눈을 번쩍 빛냈다.

“그러니까 그들이 삼보회동에 전력을 기울이느라 본파에는 신경을 쓰지 못할 거란 말이구나?”

“그렇습니다.”

“그렇다고 아무런 방비도 하지 않고 있다가 만에 하나라도 그들이 소수의 정예를 파견해 온다면 큰 낭패가 아니겠느냐?”

“그 점에 대해서는 별로 걱정하지 않습니다. 초가보에서 총력을 다해 공격해 오지만 않는다면 지금 있는 인원으로도 충분히 상대할 수 있으니 말입니다. 제가 걱정하는 건 따로 있습니다.”

“그게 무엇이냐?”

진산월은 돌연 문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중산, 그것은 네가 말씀드리는 게 좋겠구나.”

이내 문이 열리며 동중산이 엉거주춤한 모습으로 들어왔다. 동중산은 두 사람을 향해 허리를 숙여 인사를 했다.

“죄송합니다. 무심코 주변을 지나다가 늦은 밤인데도 불이 켜져 있길래 잠시 들르게 되었습니다.”

전풍개도 이미 그의 기척을 알고 있었는지 조금도 놀라지 않았으나, 얼굴 한구석에는 불쾌한 기색이 역력했다.

“네놈은 제자의 신분으로 감히 허락도 없이 장문인의 방을 기웃거리고 있었단 말이냐?”

동중산이 재차 머리를 조아리려 할 때 진산월이 담담한 음성으로 말했다.

“중산은 혹시라도 초가보의 첩자가 침입할 것에 대비해 새벽까지 본파의 구석구석을 배회하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그러니 그를 너무 책망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동중산이 멀거니 진산월을 쳐다보았다.

“장문인께서는 아시고 계셨습니까?”

“네가 어젯밤에도 삼경(三更)이 넘도록 순찰을 돌고 있는 것을 보았다.”

진산월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했으나 동중산의 외눈에는 한줄기 감격 어린 빛이 떠올랐다. 진산월이 어떻게 동중산이 밤새 순찰을 돌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까? 그것은 곧 진산월도 동중산처럼 자지 않고 본산을 경계하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전풍개는 인상을 찡그렸으나 더 이상 동중산을 꾸짖지 않았다. 대신 냉랭한 눈으로 그를 쏘아보았다.

“네놈이 말하려는 게 무엇이냐?”

동중산은 호흡을 가다듬은 다음 침착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제자가 감히 말씀드리겠습니다. 현재 초가보의 모든 일을 관장하고 있는 사람은 소면호리 악종기라는 자인데, 그는 잔꾀가 많고 일 처리가 비범하기로 유명한 인물입니다.”

“그래서?”

“또한 악종기는 신중한 성격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래서 본파를 점령하기 위해서 무리한 공격을 하기보다는 좀더 안전하고 확실한 방법을 모색하려 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동중산의 말은 사실이었다. 악종기가 신중한 성격이 아니었다면 제자도 몇 사람 남지 않은 종남파를 공격하기 위해 몇 년 동안이나 심사숙고하며 완벽한 기회를 노리고 있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그는 진산월이 실종된 후에도 이 년이 넘는 기간 동안 치밀하게 준비하고 조사하여 절대적인 자신을 가진 후에야 비로소 종남파를 멸문하기 위해 고수들을 파견했던 것이다. 그런 악종기이니 만큼 설사 삼보회동이 아니더라도 대뜸 다시 종남파를 침범하는 일은 벌이지 않을지도 몰랐다. 하나 그렇다고 무작정 안심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전풍개는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더니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너희들이 걱정하고 있는 것은 무엇이냐?”

동중산의 외눈이 유난히 번쩍거렸다.

“악종기가 삼보회동을 끝내고 다시 전열을 정비해 본산으로 쳐들어오기까지 상당한 시일이 소요될 겁니다. 하지만 그 전에 그가 다른 술수(術數)를 부릴 여지는 충분히 있습니다.”

“다른 술수라니?”

“정확한 것은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몇 가지 추측은 해볼 수 있습니다.”

“뜸들이지 말고 빨리 말해라.”

“예를 들면 본파를 다른 문파와 이간질시켜 싸움이 벌어지게 한다든지, 아니면 본파에 엉뚱한 불화살이 떨어지게 해 본파가 힘을 키울 여지를 없애려 할지도 모릅니다.”

“좀더 정확히 말해 봐라. 이간질은 누구와 시킨다는 거고 엉뚱한 불화살은 또 뭐냐?”

“그것까지는 제자도 알 수 없습니다.”

전풍개는 눈꼬리가 하늘로 솟구쳤다.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는 거냐? 얼마나 잘난 놈이기에 감히 장문인과 노부 앞에서 자신 있게 지껄이나 했더니 결국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소리만 늘어놓은 게 아니냐?”

동중산은 머리를 조아렸다.

“제자가 불민해서 죄송합니다.”

전풍개가 다시 그를 향해 무어라 호통치려 할 때 진산월의 조용한 음성이 들려 왔다.

“제가 걱정하는 게 바로 그겁니다.”

전풍개의 칼날 같은 시선이 그에게로 향했다.

“뭐라고?”

“악종기가 어떤 수단을 쓸지 모르기 때문에 불안한 겁니다. 악종기가 이대로 삼보회동이 끝날 때까지 가만히 있을 사람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는데, 막상 그가 무슨 수를 쓸지 예상할 수 없다는 것이 제가 걱정하고 있는 이유입니다.”

전풍개는 진산월을 힐끗 쳐다보더니 특유의 퉁명스런 어조로 말했다.

“결국 너희들이 지금 할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다는 말이구나.”

“아주 없는 건 아니지요.”

“초가보가 어떻게 나올지 전혀 예상도 못하고 있으면서 무얼한단 말이냐?”

“조금 전에 제가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그동안 우리는 내실을 다지고 있으면 됩니다.”

전풍개의 얼굴이 잔뜩 찌푸려졌다.

“또 그 소리냐?”

“초가보가 어떻게 나오든 결국 언젠가는 그들과 우리는 정면으로 격돌하여 승부를 가려야 합니다. 그때를 위해서라도 지금부터 착실히 내실을 다져 놓을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다 악종기란 놈이 무슨 괴상한 음모를 꾸며서 공격해 온다면?”

진산월의 비쩍 마른 얼굴에 처음으로 희미한 미소 같은 것이 떠올랐다. 유령(幽靈)의 웃음처럼 차갑고 냉정한 미소였다.

“악종기가 무슨 술수를 쓸지는 예상할 수 없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있습니다.”

“그게 무엇이냐?”

“그가 무슨 수를 쓰든 최종 목표는 바로 저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제가 쓰러지지만 않는다면 악종기의 음모는 결국 실패로 돌아가고 말 겁니다.”

담담한 음성이었으나, 전풍개는 왠지 가슴 한구석이 서늘한 느낌이 들었다. 흐릿한 미소와 담담한 음성 속에 담긴 결연한 의지를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전풍개는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너는 정말 악종기가 무슨 수를 쓰든 감당해 낼 자신이 있느냐?”

진산월은 전풍개를 쳐다보더니 다시 빙긋 웃었다.
조금 전과 비슷하긴 했으나, 하얀 이가 살짝 보여서 전혀 다른 느낌이 나는 웃음이었다.

“악종기나 초가보에 꺾일 몸이었다면 저는 지금 이 자리에 서 있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더구나 군림천하의 꿈 같은 건 아예 꾸지도 않았겠지요.”

전풍개의 주름진 눈이 가늘게 떨렸다.

“군림천하라고? 이놈! 정말 터무니없는 생각을 하고 있구나!”

진산월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전풍개는 그를 향해 무어라고 말하려다 인상을 찡그리며 입을 다물었다.
그는 미심쩍은 눈으로 진산월과 동중산의 표정을 주시했으나, 두 사람 모두 별다른 표정의 변화가 없자 못마땅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네놈들이 무슨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조금이라도 본파에 해가 되는 짓을 했다가는 내 손으로 네놈들을 처단할 테니 그런 줄 알아라.”

그때 동중산이 외눈을 번쩍이며 불쑥 입을 열었다.

“사조의 말씀은 조금 지나치신 것 같습니다.”

전풍개의 눈빛이 험악해졌다.

“지금 뭐라고 했느냐?”

동중산은 조금도 기가 죽지 않고 나직하면서도 분명한 음성으로 말했다.

“사조께서 본파를 아끼시는 마음은 알겠으나, 장문인께 그런 식의 말씀을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전풍개는 새카만 사손(師孫) 뻘인 동중산이 감히 자신에게 이런 말을 할 줄은 몰랐는지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으로 일시지간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동중산은 아예 말을 꺼낸 김에 가슴속의 말을 모두 토해내야겠다는 듯 좀더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

“선배 고수 하나 없고 제자도 몇 명 되지 않는 본파가 그래도 지금까지 버텨 올 수 있었던 것은 장문인께서 전심전력을 기울여 본파를 이끌어 왔기 때문이었습니다. 어디에 가 계신지도 몰랐다가 이십 년 만에 불쑥 나타난 사조께서 오랫동안 본파를 위해서 국궁진력(鞠躬盡力)해 오신 장문인께 처단 운운한다는 것은 본말(本末)이 전도(顚倒)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전풍개의 몸이 옆에서 보아도 확연히 느낄 수 있을 정도로 부들부들 떨리며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지금 말 다했느냐?”

동중산은 사실 전풍개에 대해 별로 신심(信心)이 없었다.
백동일의 변절을 겪어서인지 그는 오랫동안 사문을 등졌다가 홀연히 나타난 전풍개에게 그다지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동중산이 다시 무어라고 입을 열려 할 때 진산월이 그를 제지했다.

“중산, 사조께 무례를 범하지 마라.”

동중산은 순순히 머리를 조아리며 뒤로 물러났다.
하나 전풍개는 이 광경에 더욱 분노가 솟구치는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버럭 노성을 터뜨렸다.

“네놈들이 감히 노부를 앞에 두고 얕은 수작을 부리고 있구나. 노부가 종남파를 떠났다고 네놈들 일에는 참견도하지 말라는 말이냐?”

“중산의 말은 지나쳤습니다. 제가 대신 사과드리지요.”

진산월의 말에도 전풍개는 화를 삭이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노부가 입문(入門)했을 때는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놈들이 노부를 능멸하려 하다니… 임장홍이 네게 그렇게 하라고 가르쳤느냐? 노부가 떠남으로써 종남파가 몰락하게 되었다고 죽을 때까지 노부를 원망했겠지? 그래서 너희들이 노부를 이렇게 대하는 게 아니냐?”

전풍개가 죽은 사부까지 들먹이며 비난하자 진산월의 표정이 조금 달라졌다.

“중산의 말이 과하기는 했지만, 사조께서 본파를 등지셨던 과거의 일에 많은 본파의 제자들이 어느 정도의 아쉬움을 가지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전풍개의 사나운 시선이 이번에는 진산월에게 향했다.
진산월의 음성은 그리 크지 않았으나, 한 마디 한 마디가 예리한 비수가 되어 전풍개의 귓속을 파고들었다.

“이십 년 전의 사건은 본파에 커다란 충격을 주었지만, 진정으로 본파를 위태롭게 했던 것은 구대문파에서 쫓겨난 기산취악의 사건이 아니라 그후에 본파를 지탱해 나갈 기둥들이 모두 떠나버린 일이었습니다. 그 때문에 본파는 사문의 윗대(代)가 모두 끊기는 암흑의 시기를 맞이해야만 했습니다.”

“…!”

“하지만 선사를 비롯하여 우리들 누구도 떠난 분들을 원망해 본 적은 없었습니다. 그분들의 심정을 알고도 남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당시의 일은 모두에게 고통이었습니다. 지금 와서 그 고통스런 상처들을 다시 끄집어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전풍개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동중산은 격노한 그가 금방이라도 검을 뽑아 들고 진산월에게 달려드는 것이 아닌가 우려했으나, 의외로 전풍개는 몇 차례 거친 숨을 몰아쉬더니 한결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하는 것이었다.

결국 전풍개는 오결검객 중에서도 무공이 낮은 편인 사공표조차도 감당해 내지 못했던 것이다.
그후에 하원지가 형산파의 사결검객이었던 절영검(絶影劍) 비성흔(費星痕)에게 패한 것은 누구도 전혀 의외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비성흔은 그 공로로 단숨에 오결검객의 칭호를 받았으며, 종남파는 구대문파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기산취악의 일은 종남파에 엄청난 후유증을 불러일으켰다.
해조림과 전풍개는 형산파의 무고엥 미치지 못한 자신들의 실력을 자책하며 뿔뿔이 흩어져 버렸고, 관소양 또한 부상당한 하원지를 종남파에 데려다 놓고는 어디론가로 훌쩍 떠나버리고 말았다.
하원지마저 몇 달 후에 숨을 거두자 종남파는 선배 고수가 한 사람도 남아 있지 않은 비참한 현실에 처하게 되었던 것이다.


“당시 노부의 상대였던 사공표는 비록 오결검객이었으나, 그 수준은 노부가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은 결코 아니었다. 단지 그의 칠살검법(七煞劍法)이 워낙 뛰어나서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것이 결정적인 패인(敗因)이었다.”

칠살검법은 형산파의 구종검학(九種劍學) 중 다섯 번째 서열의 검법이었으나, 그 위력은 강호에 널리 알려진 원고검법에 조금도 뒤지지 않았다.
특히 사공표는 다른 검법에 눈을 돌리지 않고 평생 이 칠살검법만을 익혔기 때문에 칠살검법에 대한 화후(火候)가 거의 절정에 도달해 있었다.
전풍개도 사공표와 마찬가지로 종남파의 많은 절학들 중에서도 성라검법에 애착이 많아서 수십 년 간 성라검법만을 집중적으로 연구해서 그 검법에 대해서는 나름대로 확고한 자신을 가지고 있었다.
하나 사공표와의 대결에서 패한 후 전풍개는 종남파의 무공만으로는 절대로 형산파의 검법을 이기지 못한다는 생각에 커다란 절망감을 느꼈다.
비록 성라검법과 칠살검법만의 대결이었으나, 다른 종남파의 무공도 형산파의 그것에 비해 뒤처진다는 느낌을 받았던 것이다.
결국 전풍개는 형산파의 칠살검법을 꺾기 위해서는 다른 문파의 검법을 익힐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고, 그것이 그가 종남파를 떠나게 된 가장 큰 이유였다.

  • 무슨 일이 있어도 이 치욕을 갚고야 말겠다!

당시의 전풍개의 머리 속에는 오직 이 생각밖에는 없었다.
그는 천하를 뒤지고 다닌 끝에 해남검파를 주목하게 되었다.
해남검파의 검법이 자신의 성라검법과 유사한 점이 있을 뿐 아니라, 성라검법에 절대적으로 부족한 살기(殺氣)를 지니고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가족들을 모두 데리고 해남으로 가서 거주했다.
오랫동안 정성을 기울인 끝에 그는 해남검파의 절학(絶學)들을 배울 수 있었으며, 해남검파의 상징과도 같은 남해삼십육검의 정화(精華)를 터득해 성라검법에 융합시킬 수 있었다.
그것은 실로 길고도 오랜 노력의 결과였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한 가지 충격적인 소문을 듣게 되었다.
그동안 문세(門勢)가 약해지기는 했으나 그런대로 근근히 명맥을 유지해 오던 종남파가 완전히 멸문(滅門)해 버렸다는 소문이 그것이었다.
전풍개는 암담한 절망감에 몸부림치다 종남파에 대한 복수를 하기 위해 손자를 대동하고 해남을 떠나 종남산으로 달려왔다.
그리고 뜻밖에도 멸문된 줄 알았던 종남파가 본산을 되찾았음은 물론이고, 장문인의 실력이 예상보다 훨씬 뛰어나다는 것도 알게 되었던 것이다.

전풍개의 긴 이야기가 끝나자 장내는 숙연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전풍개가 아무런 연락도 없이 종남파를 떠난 것은 종남파에게 커다란 손실이었으나, 당시의 처절했던 그의 심정은 충분히 수긍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무엇보다도 이십 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건만 아직도 종남파를 잊지 못하고 머나먼 해남에서 여기까지 노구(老軀)를 이끌고 달려온 그의 충정(忠情)에는 누구도 머리를 조아리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동안 사조의 고초가 많으셨습니다. 그런데 남해삼십육검은 해남검파에서도 일대제자 이상만이 익힐 수 있는 비전검법(秘傳劍法)이라고 들었는데, 그것을 배울 수 있었다니 운(運)이 좋으셨군요.”

진산월의 음성은 조용했으나, 말속에는 은근한 뼈가 담겨 있었다.
전풍개의 얼굴이 조금 찌푸려졌다.

“정말 눈치 하나는 비상한 놈이군. 물론 해남검파에서 자신들의 절학(絶學)을 외인(外人)에게 함부로 가르쳐 줄 리가 없지. 운이 좋은 건 노부가 아니라 아들 녀석이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노부의 아들은 어려서부터 무공에 자질이 뛰어나서 노부는 은근히 많은 기대를 했었다. 그런데 그 녀석은 기산취악 이후 종남파에 크게 실망을 했는지 해남도에서 해남검파의 무공을 보자 즉시 종남파의 적(籍)을 버리고 해남검파에 입문(入門)을 했다.”

전풍개는 조금 망설이다 한 마디를 덧붙였다.

“오 년 전에 그 녀석은 해남검파의 장문인(掌門人)이 되었지.”

뜻밖의 말에 진산월의 눈이 번쩍 빛났다.

“축하드릴 일이군요.”

전풍개의 표정은 별로 밝아지지 않았다.

“노부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그 녀석이 본파의 적을 버리고 해남검파에 입문한 후 노부는 그놈을 더 이상 아들로 생각하지 않았으니까. 단지 일 년에 몇 번씩 산에서 내려와 노부의 검술 상대가 되어 준 것만으로 만족을 하고 있다.”

전풍개의 말로 추측해 보건대, 그는 남해삼십육검을 직접 익힌 것이 아니라 아들과의 비무(比武)를 통해 그 정화만을 터득한 모양이었다.

“아까 보니 손자분의 무공에도 본파 검법의 흔적이 보이더군요. 손자분은 해남검파에 입문하지 않았습니까?”

“아들놈을 버렸는데 손자까지 버릴 수는 없지. 비록 해남에서 태어났지만 노부가 직접 입문식(入門式)을 해주었고, 종남파의 무공을 가르쳤다. 그 아이는 누가 뭐래도 종남파의 제자다.”

“다행스런 일이군요.”

전풍개는 문득 고개를 쳐들어 방안을 둘러보더니 잠시 감회 어린 표정이 되었다.

“이 방은 예전과 똑같군. 이 방은 선사(先師)께서 머무르시던 곳이다. 네가 이 방의 주인이 된 이상 역대 이 방의 주인들의 염원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알겠습니다.”

전풍개는 한차례 더 방안을 훑어보고는 이내 몸을 휑하니 돌려 밖으로 걸어나갔다.

“그럼 저도 가 보겠습니다. 주무십시오.”

동중산이 자신도 인사를 하고 나가려 할 때, 진산월이 그를 불렀다.

“중산, 그렇지 않아도 너에게 물어 볼 말이 있다.”

“말씀하십시오.”

“일전에 너를 치료해 준 노인이 있다고 했지?”

동중산은 진산월이 왜 갑자기 그 이야기를 꺼내는지 몰라 어리둥절했으나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그때 듣기로는 그 노인의 의술이 상당하다고 했는데, 그게 사실이냐?”

“제자가 보기로는 좀처럼 보기 힘든 신의(神醫)인 것만은 확실한 것 같습니다.”

진산월은 잠시 침음하더니 조용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내일 그 노인에게 다녀와야겠다.”

“무슨 일 때문에 그러십니까?”

“그건…”

갑자기 진산월의 눈에서 한 줄기 예리한 광채가 번뜩였다.
그는 말을 멈추더니 돌연 밖으로 걸어나갔다.
동중산은 의아한 얼굴로 그의 뒤를 따라갔다.
태평각을 나온 진산월은 지붕 위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동중산이 놀라 보니 태평각의 지붕 위에 하나의 검은 인영이 우뚝 서 있는 것이 아닌가?
그는 전신을 짙은 흑의로 감싼 복면인이었다.
드러난 것이라고는 복면 사이로 번뜩이는 두 개의 안광 뿐이어서 마치 어둠의 정령(精靈)처럼 보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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