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11권 혈사지미(血事之迷)편 : 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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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림천하 11권 혈사지미(血事之迷)편 : 4화


제104장. 교환조건(交換條件)

“누구냐?”

동중산은 싸늘하게 소리치며 금시라도 지붕 위로 뛰어오를 듯한 자세를 취했다.
복면인은 그에게는 시선조차 주지 않은 채 진산월을 뚫어지게 응시하고 있더니 이내 음산한 웃음을 흘렸다.

“흐흐… 단번에 내 종적을 알아차리다니 이목이 대단하군.”

그의 음성은 몹시 탁하고 낮게 가라앉아 있어서 마치 깊은 동굴 속에서 흘러 나오는 것 같았다.
동중산은 그가 자신의 호통에는 아무 대꾸없이 괴이한 웃음을 흘리고 있자 외눈을 번뜩이며 다시 입을 열었다.

“너는 누구냐? 누군데 감히 본파의 중지(重地)까지 함부로 난입(亂入)한 거냐?”

복면인의 시선은 줄곧 진산월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내가 누구인지는 중요한 게 아니지. 그보다 귀하는 혹시 삼 년 전에 실종되었다던 종남파의 진산월, 진 장문인이 아니오?”

동중산은 복면이 진산월의 정체를 단숨에 알아보자 내심 마음 한구석에 불안한 생각이 떠올랐다.

‘장문인이 모습을 드러낸 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이런 자들이 찾아온단 말인가?’

그는 불과 며칠 사이에 종남파가 수복되었다는 소문이 강호 전역으로 퍼져 나가고 있다는 사실을 아직 알지 못했다.
진산월은 묵묵히 복면인을 올려다보고 있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진산월이오.”

복면인의 안광이 어둠 속에서도 확연히 알아볼 수 있을 만큼 괴이한 빛으로 번뜩거렸다.

“종남파가 재건되었다는 소문을 듣고 혹시나 했는데 사실인 모양이군. 듣자하니 당신이 초가보의 쌍염라를 단신으로 쓰러뜨렸다고 하던데 그게 정말이오?”

“궁금하면 직접 확인해 보는 게 어떻겠소?”

“흐흐… 그렇지 않아도 그러려던 참이오?”

복면인은 괴소를 흘리며 오른손을 슬쩍 들어올렸다.
그 순간 갑자기 복면인의 오른쪽 소맷자락 속에서 무언가 희끗한 것이 튀어나와 진산월을 향해 날아들었다.
그것이 날아오는 속도는 그야말로 섬전과 같아서 복면인의 손이 쳐들린 것과 진산월의 코앞으로 섬광이 날아드는 것이 같은 순간에 벌어진 일인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진산월은 슬쩍 고개를 우측으로 움직여 섬광을 피했다.
아니, 피하려고 했다.
그런데 막 그의 코앞으로 날아들던 섬광이 돌연 한차례 꿈틀거리며 그의 앞가슴을 향해 떨어져 내리는 것이 아닌가?

“앗?”

옆에서 보고 있던 동중산의 입에서 자신도 모르게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그 섬광의 움직임이 너무도 갑작스러워서 진산월이 도저히 피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과연 진산월은 피하지 못했다.

팍!

섬광은 진산월의 명치 부분에 정확히 격중되었다.

“흐흐… 과연 강호의 소문은 별로 믿을 것이 못되는군. 이 정도 실력으로 용케도 쌍염라를…”

음소(陰笑)를 흘리던 복면인이 무엇을 보았는지 갑자기 눈을 크게 뜬 채 입을 다물었다.
진산월은 왼손은 자연스럽게 늘어뜨리고 오른손은 주먹을 쥔 채 가슴 부근에 갖다 댄 자세로 서 있었는데, 복면인이 보고 있는 동안에 오른손을 천천히 펼쳐 보였다.
그의 오른손에는 어린아이의 손바닥만한 길이의 비수 하나가 놓여져 있었다.
그 비수는 전체가 은은한 은색(銀色)을 띠고 있었는데, 칼날이 손가락 넓이에 백지장처럼 얇았고 중앙에 가느다란 혈선(血線)이 그어져 있었다.
그 모습이 마치 피를 머금고 있는 것 같아 보는 이로 하여금 왠지 섬뜩한 느낌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진산월은 그 비수을 엄지와 중지로 잡은 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색혈비(索血匕)는 비록 빠르고 날카로워서 호신강기라도 쉽게 뚫고 들어가지만 그렇다고 막을 수 없는 것도 아니지.”

복면인의 눈빛이 가볍게 흔들렸다.
색혈비는 비록 강호의 십팔대금용암기(十八大禁用暗器)에는 속해 있지 않지만, 공력을 실어 던지면 바위라도 꿰뚫어 버릴 만큼 무서운 위력을 지닌 암기였다.
더구나 그 날은 예리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어서 복면인은 지금까지 이 색혈비를 맨손으로 잡는 사람이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었다.
그는 마음속의 놀라움을 억누르며 짐짓 태연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대단한 솜씨로군. 그럼 어디 이것도 한 번 받아 보시지.”

그의 양손이 움직임과 동시에 다시 몇 개의 섬광이 날아들었다.

파파팟!

동중산이 볼 수 있는 것이라고는 지붕 위에서 무언가 하얀 선(線) 같은 것이 몇 가닥 진산월의 앞가슴을 향해 쏘아져 가는 광경뿐이었다.
색혈비가 발출되는 속도가 너무도 빨라 백선(白線)으로 보이는 것이다.
복면인은 진산월이 제아무리 고수라 해도 이번에는 허공으로 몸을 솟구쳐 피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일단 진산월의 몸이 허공으로 떠오른다면 그때는 더욱 가공할 살수(殺手)가 기다리고 있었다.
하나 진산월은 그 자리에 꼼짝도 않고 우뚝 선 채로 자신에게로 날아드는 색혈비르 하나씩 손으로 잡아챘다.
그 손길이 어찌나 유연했던지 언뜻 보기에는 마치 허공을 향해 손장난을 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런데도 무시무시한 기세로 날아들던 세 개의 색혈비는 너무도 수월하게 진산월의 손에 차례로 잡히고 말았다.
그 광경을 보고 있던 복면인은 어처구니가 없는지 입을 쩍 벌린 채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가 조금 전에 사용한 수법은 삼선탈혼(三선奪魂)이라는 절정의 암기 무공으로, 어지간한 고수라면 빛살처럼 줄지어 날아드는 세 개의 색혈비에 피할 엄두도 내지 못하고 쓰러지고 만다.
게다가 그는 지붕 위에서 아래로 색혈비를 발출했기 때문에 그 위력은 평상시보다 더욱 뛰어난 것이었다.
그런데도 진산월이 피하기는커녕 오히려 자신의 색혈비를 너무도 수월하게 잡아 버리자 경악을 넘어서 허탈한 생각마저 들었다.
진산월은 색혈비 네 개를 손에 쥔 채 혼잣말처럼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이런 실력으로 야밤에 허락도 받지 않고 본파(本派)에 들어와 시비를 걸다니… 이자는 죽고 싶어 안달이라도 난 걸까?”

그의 음성은 그리 크지 않았으나 주위가 워낙 조용했기 때문에 복면인의 귀에는 천둥처럼 크게 들렸다.
복면인의 몸이 한차례 움찔거렸다.
하나 이내 그는 정신을 차린 듯 날카로운 안광을 번뜩였다.

“진 장문인이 장기는 검(劍)이라고 알고 있는데, 이제 보니 수공(手功)도 대단하구려. 하지만 나도 그리 호락호락한 사람은 아니오.”

“그걸 증명하기 위해서 여기에 온 거요?”

“물론 아니오. 나는 진 장문인에게 한 가지 용건이 있어 왔소.”

“내게 대뜸 암기를 날려 놓고는 이제와서 용건이 있다고 하다니 모양이 우습다고 생각하지 않소?”

“이해하시오. 진 장문인이 어떤 사람인지 알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한 일이었소.”

진산월은 수중에 있는 색혈비들을 만지작거리며 담담한 음성으로 물었다.

“암기 몇 개를 던져 놓고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았단 말이오? 그 말이 사실이라면 내가 무척 단순한 사람이거나 당신이 보기 드문 천재인 게 분명하군.”

“어떤 종류의 일은 단지 상대의 행동 하나만 보아도 알 수 있는 법이오.”

“그러면 이제는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아볼 차례로군.”

“그게 무슨…”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던 복면인의 얼굴이 조금 굳어졌다.
진산월의 수중에 있던 색혈비 중 하나가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색혈비가 날아오는 속도는 답답할 정도로 느렸다.
게다가 그 끝은 거의 알아차릴 수 업을 만큼 계속적으로 떨리고 있었다.
용케도 바닥에 떨어지지 않는 게 신통할 정도였다.
하나 그것을 본 복면인의 두 눈에는 더할 수 없는 신중한 빛이 어른거리고 있었다.
그 끝없이 흔들거리는 색혈비에 담겨 있는 가공할 힘을 알아차린 것이다.
그나마 자신이 지붕 위에 있고 진산월이 아래에 있다는 지형(地形)상의 이점이 유일한 위안거리였다.
최악의 경우에는 아래로 뛰어내리면 되는 것이다.
복면인은 두 발을 어깨 넓이로 벌린 채 신중한 눈으로 자신을 향해 날아오고 있는 색혈비를 응시했다.
그때까지도 색혈비는 그에게서 삼 장쯤 떨어진 허공을 느릿느릿 날아오고 있었다.
그 움직임이 너무도 완만해서 보는 사람이 짜증이 날 정도였다.
하나 복면인은 자신의 이마에 식은땀이 흘러내리고 있는 것을 느꼈다.
미세하게 흔들리던 색혈비의 요동이 점차로 커지며 속도 또한 조금씩 빨라지고 있었다.
그러다가 종내에는 한 줄기 빛살처럼 무서운 속도로 복면인의 인후혈(咽侯穴)을 향해 날아들었다.

쾌애액!

주위의 공기가 작은 소용돌이를 이룰 정도로 무서운 경기가 휘몰아쳤다.
복면인은 색혈비를 잡을 엄두도 내지 못한 채 오른쪽으로 재빠르게 이동했다.
하나 그의 신형이 채 안정되기도 전에 색혈비가 한차례 요동을 치더니 그에게로 방향을 바꾸었다.
마치 살아서 저절로 움직이는 듯한 그 광경에 복면인의 입에서 자신도 모르게 짤막한 경악성이 흘러 나왔다.

“요… 요공도(搖空刀)!”

복면인은 즉시 철판교(鐵板橋)의 수법으로 뒤로 벌렁 누워버렸다.
그리고도 불안하여 다시 두 바퀴나 옆으로 몸을 굴린 다음에야 벌떡 일어났다.
어찌나 놀랐는지 신형을 안정시킨 다음에도 그의 가슴은 세차게 두근거리고 있었다.
요공도는 무슨 특별한 무공이 아니었다.
어떤 물건이든 힘을 실어 던지면 약간의 요동을 일으키게 된다.
만일 공력이 최고에 달한 인물이 내공을 가득 실어 암기를 발출한다면 그 암기는 잠재되어 있는 내공력을 이기지 못하고 미묘한 요동을 일으키게 된다.

그 움직임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정교하고 변화무쌍해지면 그 자체만으로 능히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절학(絶學)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요공도의 개념이었다. 요공도는 시전자의 공력 여하에 따라 그 요동이 얼마나 정확하고 오래 지속되느냐가 결정된다. 지금 복면인에게 날아든 색혈비는 그 요동이 정교하고 클 뿐 아니라, 마지막 순간까지 변화를 숨기고 있어서 실로 살인적인 위력을 담고 있었다. 복면인은 다행히 진산월이 날린 색혈비가 요공도라는 것을 알아차려 목덜미에 구멍이 뚫리는 신세는 면했으나, 앞가슴 부근 옷자락이 너덜너덜해져 있고 온몸이 흙투성이여서 낭패스러운 모습이었다. 복면인은 진산월이 또 다른 색혈비를 날리려는 자세를 취하자 다급하게 부르짖었다.

“진 장문인! 실종된 사제(師弟)의 행방을 알고 싶지 않으시오?”

막 색혈비 하나를 다시 던지려던 진산월은 손을 멈추고 그에게 시선을 고정시켰다. 그의 얼굴은 여전히 냉정했으며, 눈빛 또한 침착하게 가라앉아 있어 복면인의 말을 듣고도 전혀 흔들림이 없어 보였다.

“좀더 정확한 말을 해주면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판단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군.”

복면인은 한차례 심호흡을 하고는 조금 전보다 한결 안정된 표정이 되었다.

“조금 전에도 말했다시피 내가 어떤 사람인지는 중요하지 않소. 중요한 건 내가 진 장문인을 만나려는 용건이 무언가 하는 거요.”

“…!”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소. 나는 진 장문인과 아주 가까운 누군가의 행방을 알고 있소.”

진산월은 여전히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복면인을 응시하고 있었다. 복면인은 진산월의 표정을 유심히 살피며 신중한 음성으로 재차 입을 열었다.

“그는 응(應)씨 성을 쓰고 있고, 강호에서는 소벽력(小霹靂)이라고 부르는 자요.”

어느새 다가왔는지 진산월의 뒤에 서 있던 동중산이 나직하게 소곤거렸다.

“응 사숙의 별호가 소벽력입니다.”

소벽력! 성질이 불같이 급하고 화를 잘 내는 응계성에게는 너무도 어울리는 별호가 아닐 수 없었다. 이상하게도 진산월은 그토록 찾던 응계성의 소식을 처음으로 접하게 되었는데도 별로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그저 담담한 시선으로 복면인을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 무심한 시선에 복면인은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몰라 마음 한구석이 불안해졌으나, 칼자루를 잡고 있는 것은 자기라는 판단에 짐짓 음산한 웃음을 흘렸다.

“흐흐… 어째 진 장문인의 얼굴을 보니 내 말이 별로 반갑지 않은 모양이구려. 진 장문인이 나와 대화할 생각이 없다면 나는 이만 가 보겠소.”

그는 포권을 하며 몸을 돌리려 했다. 그때 진산월의 조용한 음성이 들려 왔다.

“그의 행방을 알려 주면 당신이 본파를 찾아와 저지른 무례를 용서해 주겠소.”

복면인은 어처구니가 없는지 우두커니 진산월을 쳐다보더니 이내 냉소를 터뜨렸다.

“알량한 실력 하나만 믿고 너무 안하무인으로군. 종남파 정도로 나를 어쩔 수 있다고 생각했다면 그건 큰 오산이오.”

그는 즉시 발을 박차고 지붕을 떠나려 했다. 그때 갑자기 그의 등뒤에서 차가운 음성이 들려 왔다.

“올 때는 마음대로 왔을지 몰라도 갈 때는 어림도 없다. 본파가 그렇게 함부로 들락거릴 수 있는 곳인 줄 아느냐?”

복면인은 심장이 목구멍 밖으로 튀어나올 정도로 놀라 황급히 몸을 돌리려 했다. 하나 어느사이에 그의 목덜미에는 싸늘한 장검이 닿아 있었다.

“헉…!”

안색이 굳어진 채 고개를 돌린 그의 눈에 백발이 성성하고 피부가 검은 강퍅한 인상의 노인이 들어왔다. 노인의 매처럼 날카로운 시선과 마주치는 순간 복면인은 모골이 송연해짐을 느꼈다. 절세의 검객에게서나 느낄 수 있는 예리한 기운이 전신을 송곳처럼 찔러 왔던 것이다. 복면인이 채 무어라고 입을 열기도 전에 노인은 주름진 손으로 그의 마혈(麻穴)을 짚은 채 목덜미를 움켜쥐었다. 그리고는 훌쩍 지붕에서 뛰어내려 진산월의 앞으로 다가갔다.

“수고하셨습니다.”

진산월이 가볍게 목례를 하자 노인은 퉁명스런 음성으로 말했다.

“네놈 말대로 이놈을 잡아왔다. 늙은이를 부려먹을 생각을 하다니 못된 놈이로군.”

노인은 물론 전풍개였다. 진산월의 방에서 나와 자신의 숙소로 가려던 전풍개는 문득 소란스런 소리를 듣고는 다시 돌아왔다가 지붕 위에 복면인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때 마침 그의 모습을 본 진산월이 그에게 전음을 날려 복면인을 제압해 줄 것을 부탁했던 것이다.

사실 복면인의 무공 실력으로 아무리 전풍개의 무공이 뛰어나다 해도 이토록 맥없이 제압당할 리는 없었다. 하나 전풍개가 있는 위치가 누각의 뒤편 그늘이어서 복면인에게는 사각(死角)지역이었던데다 복면인의 신경이 온통 진산월에게만 집중되어 있던 터라 미처 전풍개의 접근을 알지 못하고 제대로 반항 한 번 해보지 못한 채 제압당하고 말았던 것이다.

‘이게 대체 어찌된 일이냐? 무너졌던 종남파가 기사회생(起死回生)한 줄은 알았지만 이토록 고강한 실력의 장문인에 어디서 이런 괴물 같은 늙은이까지 튀어나오다니…’

복면인은 자신이 종남파를 너무 경시하여 자신의 안전을 소홀히 한 것을 후회했으나 이미 때늦은 일이었다. 진산월은 동중산에게 턱짓을 했다.

“복면을 벗겨라.”

동중산은 서슴없이 복면인에게 다가와 그의 복면을 벗겼다. 그러자 비쩍 마른 얼굴에 싸늘한 인상의 사십대 초반으로 보이는 중년인의 얼굴이 드러났다. 중년인의 왼쪽 뺨에는 길다란 검상(劍傷)이 나 있어 차갑고 냉혹해 보였다.

“아는 사람이냐?”

동중산은 중년인의 얼굴을 이리저리 살펴보다 고개를 저었다.

“제자가 모르는 사람입니다.”

진산월은 중년인의 두 눈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이제는 자신이 누구인지 밝힐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소?”

중년인은 두 눈을 감았다.

“이런 상황에서는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소.”

그 말을 끝으로 그는 입을 다물었다. 질끈 감은 눈과 굳게 다문 입술이 그의 다부진 각오를 느끼게 했다. 진산월은 담담한 눈으로 중년인을 응시하더니 돌연 동중산을 향해 입을 열었다.

“중산, 함부로 본파를 난입한 자는 어떻게 처단하느냐?”

동중산은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한쪽 팔을 자릅니다.”

중년인의 얼굴이 조금 굳어졌다. 진산월은 다시 물었다.

“본파의 장문인을 위해(危害)하려는 자는 어떤 처벌을 받느냐?”

“두 발을 자르고 무공을 폐쇄합니다.”

“이자는 심야(深夜)에 본파의 장문인 거처를 함부로 난입한데다 장문인인 내게 두 번이나 살수(殺手)를 썼다. 이자를 어떻게 처벌해야 하느냐?”

“한 손과 두 발을 모두 자르고 내공을 폐한 후 산문 밖으로 내쫓는 게 마땅한 줄 압니다.”

“그대로 시행해라.”

진산월이 단호한 음성으로 잘라 말하자 중년인은 두 눈을 부릅떴다. 그의 아래턱이 자신도 모르게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창!

동중산이 허리춤에 차고 있던 장검을 뽑아 들자 중년인의 표정이 눈에 띄게 창백해졌다. 동중산은 엄숙한 표정으로 중년인을 쳐다보았다.

“같이 무림에 몸담고 있는 사람으로서 당신에게 이런 짓을 하게 된 것을 유감으로 생각하오. 당신은 그저 자신의 운(運)이 없음을 탓하기 바라오.”

이어 그는 검을 번쩍 쳐든 채 중년인의 팔을 자르려 했다.

“자… 잠깐!”

중년인의 입에서 다급한 고함성이 터져 나왔다.

“이… 이런 법이 어디 있소? 나는 종남파의 문인(門人)도 아니거늘…”

“당신이 종남파의 문인이었다면 목을 베었을 거요. 비록 팔다리가 없는 몸이라고 해도 손 하나는 남게 되니 먹고 사는 데 불편이 있을지언정 커다란 지장은 없을 거요.”

동중산이 다시 검을 휘두르려 하자 중년인이 갑자기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졌소, 진 장문인.”

진산월은 묵묵히 그를 응시했다. 중년인의 얼굴에는 씁쓸한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정말 고명한 수법이오. 나는 송천기(宋天紀)라 하오.”

진산월은 들어 본 적이 없는 이름이었다. 동중산의 표정으로 보아 그도 전혀 모르는 인물임이 분명했다. 진산월이 여전히 아무런 말이 없자 송천기는 부담을 느껴는지 다시 입을 열었다.

“내 이름은 진 장문인도 처음 들어 보았을 거요. 그래서 내가 누구인지는 중요한 게 아니라고 했던 거요.”

그제서야 진산월은 조용한 음성으로 물었다.

“응계성의 행방을 알고 있소?”

“그렇소.”

“그가 지금 어디에 있소?”

송천기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조금 전의 놀라움과 두려움에 찼던 표정은 어느새 사라지고 다시 예의 냉정하면서도 용의주도한 모습으로 되돌아와 있었다. 아마도 진산월이 자신을 쉽사리 해치지 않을 것이라는 나름대로의 확신이 선 모양이었다.

“그걸 알려 주는 건 어렵지 않소. 하지만 한 가지 조건이 있소.”

옆에서 듣고 있던 동중산의 눈빛이 싸늘하게 변했다. 하나 그가 무어라고 전에 송천기가 단호한 음성으로 잘라 말했다.

“나를 협박해서 그자의 행방을 알아낼 생각은 하지 마시오. 별 것도 아닌 일로 팔다리가 잘리는 것은 질색이지만, 이 일에 관련된 것이라면 내 목에 칼이 들어와도 양보할 생각이 없으니 말이오.”

진산월도 그를 더 이상 추긍할 생각은 없는 듯 했다.

“조건을 말하시오.”

송천기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지금까지와는 다리 낮게 가라앉은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한 사람을 구해 주시오.”

뜻밖의 말에 진산월의 눈이 번쩍 빛났다.

“누구를 구해 달라는 거요?”

“내 친구요.”

두뇌가 영민하고 좀처럼 냉정을 잃지 않는 진산월도 지금은 당혹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대뜸 나타나 느닷없이 살수를 전개하고는 오랫동안 실종되었던 사제의 행방을 안다고 하더니 이제는 자신의 친구를 구해 달라고 부탁하니 그의 말을 어디까지 믿어야 하는지 가늠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벌써부터 동중산과 전풍개는 표정이 좋지 않았다. 성질 급한 전풍개는 물론이고 동중산도 송천기를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얼굴 곳곳에 역력히 드러내고 있었다. 송천기도 이 사실을 알아차렸는지 쓴웃음을 머금었다.

“내 말이 믿어지지 않겠지만 진 장문인의 사제가 어디 있는지 알고 있는 건 분명한 사실이오. 그러니 진 장문인이 내 친구를 구해 준다면 나도 그의 행방을 알려 주겠소.”

냉정하고 차가워 보이는 그의 얼굴 한구석에 약간은 초조하고 다급한 표정이 스치고 지나갔다. 진산월은 그의 얼굴을 가만히 지켜보더니 다시 물었다.

“무작정 친구를 구해 달라는 당신의 말은 너무 뜬금없는 소리요. 좀더 자세히 말해 보시오.”

송천기는 진산월의 말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는지 잠시 망설이다가 이내 결심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내 친구는 지금 억울한 누명을 쓰고 무림의 어느 세가에 사로잡혀 있소. 그들은 며칠 안으로 내 친구를 처벌할 거여. 그 전에 그를 구해 주면 되는 거요.”

“친구가 갇혀 있는 곳이 어디요?”

송천기는 다시 망설였다. 하나 진산월의 눈빛을 받자 이를 악물고 대답했다.

“이씨세가요.”

진산월의 눈이 번쩍 빛났다.

“장안의 이씨세가 말이오?”

“그렇소.”

동중산이 옆에서 듣고 있다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어지간히 복(福)도 없는 친구로군. 하필이면 이씨세가와 적이 되다니…”

그 말에는 은근히 진산월에게 이번 부탁을 거절하라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 확실히 장안의 이씨세가와 등을 돌린다는 것은 이제 겨우 무림에 다시 모습을 드러낸 종남파로서는 부담스럽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이씨세가의 가주인 장안대호 이세적은 말할 것도 없고, 그의 휘하에는 막강한 고수들이 구름같이 모여 있었다. 게다가 이씨세가는 대대로 이곳 서안 일대를 주름잡고 있어서 그들의 영향력은 세인들의 상상을 초월하는 엄청난 것이었다. 진산월이 생각에 잠겨 있자 송천기가 재빠르게 입을 열었다.

“내 친구를 구해 준다고 반드시 이씨세가와 적이 된다고 볼 수는 없소. 그리고 내가 알려 주지 않는다면 당신들은 절대로 응계성이 있는 곳을 알아내지 못할 거요.”

진산월이 날카로운 눈으로 쏘아보자 송천기는 비장한 표정을 지었다.

“만약 당신들이 내 제안을 거절하고 강제로 내게서 응계성의 행방을 알아내고자 한다면 나는 심맥(心脈)을 끊고 자진(自盡)할 거요. 그렇게 되면 당신들은 결코 그를 찾을 수 없소.”

동중산이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당신의 도움 없이도 그분을 찾을 수 있을 거요.”

송천기는 냉랭한 코웃음을 쳤다.

“천만에. 그는 당신들로서는 전혀 예상도 할 수 없는 곳에 있소. 뿐만 아니라 그 상황도 결코 좋지 못해서 이대로 있다가는 언제 숨이 끊어질지 모른다는 걸 보장하겠소.”

그 말에 동중산의 안색이 살짝 굳어졌다. 송천기의 비장한 모습에서 그의 말이 결코 거짓이 아님을 직감적으로 알아차렸던 것이다.

“당신 친구는 어디에 갇혀 있소?”

송천기는 반색을 했다.

“내 제안을 받아들이겠다는 거요?”

“그렇소.”

송천기의 냉막한 얼굴에 한 줄기 혈색이 감돌았다. 그때 전풍개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싸늘한 일성을 토해냈다.

“멍청한 놈. 일문의 장문인으로서 한낱 외인에게 협박을 당해 스스로 강적을 만들려 하다니… 네놈은 도대체 일의 경중(輕重)을 아느냐, 모르느냐?”

진산월은 전풍개의 추궁에도 전혀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저는 물론 알고 있습니다.”

전풍개의 눈꼬리가 꿈틀거렸다.

“알고 있다고?”

“문파의 제자를 구하는 일은 다른 어떤 일보다 우선한다고 생각합니다. 문파를 책임지는 사람으로서 절대로 소홀할 수 없는 일이지요.”

전풍개는 진산월의 단호한 대답에 얼굴을 잔뜩 찌푸렸으나 더 이상 무어라고 하지 않았다. 진산월은 조용한 음성으로 덧붙였다.

“그리고 갇혀 있는 사람 하나를 구한다고 해서 이씨세가와 반드시 적이 되리라는 보장도 없지 않습니까?”

“에잉, 노부는 모르겠다. 네놈이 알아서 해라.”

전풍개는 고개를 돌려버렸다. 진산월은 다시 송천기에게로 시선을 고정시켰다.

“당신 친구가 갇혀 있는 곳을 말하시오.”

“내 친구는 이씨세가의 후원에 있는 창고에 갇혀 있소. 내일이 이씨세가의 안주인인 기일(忌日)인데, 그 제사를 지내고 나면 삼 일 후 그들이 내 친구를 처단하려 할 거요.”

동중산은 문득 궁금한 생각이 들었다.

“당신 친구는 대체 이씨세가에 무슨 죄를 지은 거요?”

송천기의 눈빛이 강렬하게 번뜩거렸다.

“내 친구는 억울한 누명을 쓴 거요.”

“누명?”

“자세한 사정은 당신들이 알 필요 없소. 당신들은 그저 삼 일 내로 내 친구를 구해 오기만 하면 되는 거요.”

동중산은 그의 퉁명스런 대꾸에 화가 나기도 하고 약이 오르기도 했다.

‘정말 정나미가 뚝뚝 떨어지는 자로군.’

자연히 그의 입에서 좋은 소리가 나올 리 없었다.

“그렇게 친구 걱정에 몸이 단 사람이 왜 장문인께 무례를 범한 거요?”

송천기는 힐끔 진산월을 쳐다보더니 표정이 조금 무거워졌다.

“어쩔 수 없었소. 나로서는 진 장문인의 실력을 확인해 볼 필요가 있었으니까.”

그제서야 동중산은 그의 의중을 알아차렸다.

‘정말 제멋대로군. 장문인이 이씨세가에서 사람을 빼올 만한 실력을 지녔는지 알기 위해 살수를 썼다니… 이자의 말을 어디까지 믿어야 할까?’

동중산은 머리를 굴려 보았으나, 아무리 두뇌가 명석하고 강호경험이 풍부한 그로서도 선뜻 무어라고 결정을 내릴 수가 없었다. 하나 진산월은 이미 마음을 굳혔는지 송천기를 향해 물었다.

“당신의 제안대로 하겠소. 그럼 당신 친구를 구해서 어디로 데려가면 되오?”

송천기는 진산월이 선뜻 자신의 제안을 승낙한 것이 못내 기뻤는지 냉막하게 굳어 있던 얼굴에 한 줄기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걱정할 필요 없소. 그동안 나는 여기에 있을 테니 이곳으로 데려오면 되오. 설마 이 넓은 종남파에서 나 같은 식객(食客) 한 사람쯤 못 받아주는 것은 아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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