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13권 미궁생로(迷宮生路)편 : 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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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림천하 13권 미궁생로(迷宮生路)편 : 2화


제124장. 호반유객(湖畔遊客)

응계성은 진산월을 보자 말없이 얼굴을 실룩거리고만 있었다. 금시라도 뜨거운 눈물이 홀쭉한 양 뺨을 타고 흘러내릴 것만 같았으나 응계성은 끝까지 나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진산월 또한 그의 어깨를 움켜잡은 채 아무런 말이 없었다.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삼 년 만에 만난 응계성은 사람의 몰골을 하고 있지 않았다. 그토록 숱이 무성하던 그의 머리는 박박 깎인 채 여기저기에 꿰맨 자국투성이였다. 항상 붉은색이 감돌던 얼굴은 시체의 그것처럼 창백했고, 왼쪽 발목이 이상하게 꺾여 있어 바닥에 제대로 앉아 있지도 못했다.

진산월은 한참 동안이나 그를 바라보고 있다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내가 왔다.”

응계성은 이를 악물었다. 어찌나 세게 물었는지 그의 입술은 금세 갈라져 핏물이 번져 나왔다. 그는 시뻘겋게 충혈된 눈으로 진산월의 얼굴을 하염없이 바라보더니 고개를 돌려 버렸다.

“뭐 하다 지금 왔소?”

“미안하구나.”

진산월은 이 말밖에는 할 수가 없었다.

응계성은 이내 툴툴거렸다.

“그런 말은 잘도 하는구려. 장문인 체면에 제자에게 그런 말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도 모르시오?”

진산월은 하염없는 눈으로 응계성을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 눈빛 속에는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착잡함과 짙은 슬픔이 담겨 있었다. 한참 후에야 진산월은 다시 물었다.

“몸은 괜찮느냐?”

응계성은 박박 깎은 상처투성이의 머리를 한 손으로 쓰다듬었다.

“보기보다는 견딜 만하오. 머리에 상처 몇 개가 나는 바람에 그자들이 치료 한답시고 모두 깎아 버려서 이런 우스운 꼴이 되었소.”

“다리는?”

응계성은 얼굴이 조금 일그렸다.

“암습을 받아서 부러졌는데, 치료가 늦어지는 바람에 뼈가 잘못된 상태로 붙어 버렸소. 그자들 말로는 세상에 둘도 없는 신의(神醫)라도 오기 전에는 원래 상태로 되돌리기 힘들다고 하오.”

“누구에게 암습을 당했느냐?”

“사정을 말하면 복잡하오.”

응계성은 예전의 그답지 않게 한참 동안이나 머뭇거리더니 이윽고 천천히 입을 열기 시작했다.

초가보의 습격 이후 종남산 일대를 떠돌던 응계성은 이런 상태로는 종남파의 재건에 대한 어떠한 희망도 없다는 것을 깨닫고 새로운 돌파구를 모색하게 되었다.

그가 찾은 길은 낙양의 석가장이었다.

석가장의 팔공자인 석지명은 종남파를 후원하기로 했으며, 그곳에는 정해와 상원건 부녀가 있지 않은가? 석가장으로 가서 그들을 만나 종남파의 재건에 대해 의논할 것을 결심한 응계성은 초가보의 삼엄한 경계를 뚫고 서안을 벗어나 석가장이 있는 낙양으로 향하게 되었다.

서안을 빠져 나오는 일도 쉽지 않았다. 초가보에서는 종남파의 고수들을 색출하기 위해 많은 인원을 동원하여 광범위한 추적망을 설치했기 때문에 응계성이 그들의 눈을 피해 섬서성을 벗어날 때까지 무려 석 달이 넘는 시간이 소요되었다.

응계성은 낙양에 도착하자마자 곧장 석가장을 찾아갔다.

하나 석지명을 만날 수는 없었다. 공교롭게도 석지명이 장성(長城) 쪽으로 외유(外遊)를 나갔다는 것이다.

응계성은 다시 정해와 상원건을 찾았으나, 그를 맞았던 집사는 그들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할 수 없이 응계성은 일단 석가장을 나올 수밖에 없었다.

응계성은 석가장의 근처에 자리를 잡고 석지명이 오기를 기다리면서 정해와 상원건의 행방을 수소문하기로 마음먹었다.

하나 그의 계획은 실현될 수 없었다.

그날 저녁, 그는 자신이 묵고 있는 객방(客房)에서 정체 모를 괴인에 의해 납치당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객방에서 자고 있는데 잡가기 이상한 생각이 들어 문득 눈을 떠보니 검은 복면을 머리에 뒤집어쓰고 검을 든 괴인이 방문 입구에 선 채로 나를 쏘아 보고 있었소.”

응계성은 당시를 생각하면 아직도 기분이 섬뜩한지 눈을 잔뜩 찌푸렸다.

“복면 사이로 보이는 눈빛이 어찌나 차가운지 그자와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전신이 빙굴(氷窟)에 빠진 듯한 착각이 들었소. 내가 몸을 일으키기도 전에 갑자기 그자의 신형이 흐릿해지더니 어느새 그자의 검이 내 옆구리에 닿아 있었소.”

응계성의 어깨가 한차례 가늘게 떨렸다.

“내 평생 그토록 빠른 검은 본 적이 없었소. 아니, 인간의 검이 그렇게 빠를 수 있으리라고는 믿은 적이 없다고 해야 더 옳은 말일 거요. 아무튼 그자의 검에 옆구리를 꿰뚫리는 순간, 나는 사력을 다해 누운 상태로 그에게 발길질을 했소. 하나 그는 너무도 수월하게 내 발길질을 피하며 반대쪽 손을 휘둘렀고, 나는 다리에 엄청난 충격을 느끼고 그대로 정신을 잃고 말았소.”

응계성의 얼굴에 무어라 형용키 어려운 씁쓸한 미소가 떠올랐다.

“이 다리는 그때 부러진 거요. 깨어나 보니 나는 어떤 궤짝 같은 곳에 갇힌 채 어딘가로 운반되고 있었소.”

그 후의 일은 진산월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응계성은 부상을 입은 채로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상태에서 화물 속에 갇혀 초가보로 이송 중이염, 서안에 이르렀을 즈음에 화물에서 무언가 이상함을 느낀 대응표국의 표사들이 그를 구출해 냈던 것이다.

하나 부상을 당한 상태에서 치료는커녕 좁은 화물 속에 오랫동안 갇혀 있는 바람에 그의 다리는 불구가 되었고, 전신에 크고 작은 상처가 나서 몸이 거의 만신창이가 되어 버렸다. 응계성에게 반드시 살아남겠다는 불 같은 의지(意志)가 없었다면 그는 화물 속에서 차가운 시신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진산월은 응계성의 말을 모두 듣고는 묵묵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응계성을 습격한 복면인이 누구인지는 몰라도 그가 응계성의 정체를 미리 파악하고 있었다는 것은 분명했다. 게다가 그자는 종남파에 호의를 갖고 있지 않은 것도 확실했다.

응계성이 낙양에 도착한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은 오직 석가장의 집사뿐이다. 심지어는 석지명과 정해마저 응계성이 낙양에 온 것을 알고 있지 못했다. 그렇다면 복면인은 석가장의 집사가 보낸 것이란 말인가? 하나 석가장의 집사가 응계성과 무슨 원한이 있다고 그를 사로잡아 초가보로 이송하려 했단 말인가?

진산월은 응계성을 향해 물었다.

“네가 석가장으로 갔을 때 너를 접대한 집사는 누구냐? 몇 년 전에 처음 석가장을 갔을 때 보았던 그자였느냐?”

응계성은 고개를 저었다.

“처음 보는 인물이었소. 예전에 갔을 때는 하씨 성의 집사였는데, 그날 본 자는 공(孔)씨 성을 쓰고 있었소. 나이는 대략 사십대 중반쯤 되어 보였는데, 제법 날카로운 인상을 풍기는 자였소.”

이어 그는 한차례 어깨를 으쓱거렸다.

“장문사형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겠소. 나도 화물 속에 갇혀 있으면서 내내 그 생각만 했었소. 대체 이게 무슨 일이? 누가 나를 이런 꼴로 만든 것이지? 무엇 때문에 이런 짓을 한 것일까? 머리를 굴리고 굴려 보았지만 확신할 수 있는 건 단 한 가지. 나를 이 꼴로 만든 복면인은 틀림없이 그 집사놈이 보낸 자라는 것뿐었소.”

응계성은 이를 부드득 갈았다.

“조만간 그 집사놈은 내 손으로 직접 처단할 것이오. 그러니 장문사형은 혹여 내 일에 개입할 생각일랑 하지 마시오.”

진산월은 응계성의 지금 심정을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았다. 응계성의 성격으로 남에게 그런 일을 당하고 참으라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었다.

단지 진산월은 걱정스러울 뿐이었다. 무언지 모르지만 이번 일에는 겉으로 드러난 것과는 전혀 다른 무언가 깊고 은밀한 비밀이 도사리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그 깊은 비밀의 심연(深淵)에 어설프게 발을 들여놓다가 자신도 모르는 새 깊은 수렁 속으로 빠지게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불안한 생각이 진산월의 마음을 무겁게 했다.

응계성은 문득 생각이 난 듯 눈을 번뜩이며 황급히 물었다.

“본산은 어떻게 되었소?”

“다들 그곳에서 너를 기다리고 있다.”

응계성의 눈자위가 실룩거렸다.

“다들 말이오?”

“그래. 지산과 취아, 그리고 중산이 그곳에 있지.”

응계성의 상처투성이 얼굴이 붉게 상기되었다.

“다들 살아 있었단 말이지? 일방, 그 녀석은?”

“그는 아직 오지 않았다.”

진산월은 그 말밖에는 하지 않았다. 한동안 두 사람 사이에는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다.

한참 후에야 응계성은 억지로 웃으며 말했다.

“그 녀석은 목숨줄이 나보다 긴 놈이니 어딘가에서 잘 지내고 있을 거요. 아마 여자들 품속에 허우적거리느라 세월 가는 줄 모르고 있는 거겠지. 틀림없이 그럴 거요. 장문사형도 그 녀석이 여자에게 약하다는 걸 알고 있지 않소?”

진산월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낙일방의 생각만 하면 진산월은 가슴이 아팠다. 낙일방을 마지막으로 본 사람은 동중산이었는데, 그때 동중산은 낙일방이 초가보 고수들의 합공을 견디지 못하고 피를 뿌리며 절벽으로 떨어지는 광경을 목격했다.

나중에 동중산은 몇 번이나 그 절벽 아래를 수색했으나 낙일방의 행방에 대한 어떠한 단서도 찾지 못했다. 진산월도 동중산의 말을 듣고 일부러 시간을 내어 며칠이나 절벽 아래를 훑어본 적이 있었다. 하나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높이가 백 장에 가까운 절벽 아래를 이 잡듯이 뒤져 보았으나 낙일방의 시신은 찾을 수 없었다. 그 높이에서 떨어졌다면 인간의 몸으로 절대로 살아남을 수가 없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낙일방의 시신이 발견되지 않았다는 것에 대해서 진산월은 다행스럽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불안해야 할지 난감한 심정이었다.

하나 진산월은 좋은 쪽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낙일방은 반드시 살아 있을 것이다. 그래서 언젠가는 반드시 자신들의 앞에 나타날 것이다.

누구보다 준수한 얼굴에 언제나 미소를 잃지 않는 그의 모습을 기필코 다시 볼 수 있을 것이다. 진산월은 그렇게 되기를 간절히 염원했다.

응계성은 진산월의 표정을 살피다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비틀어진 왼쪽 다리를 억지로 버팅기며 몸을 일으키는 그의 모습은 왠지 낯설고 쓸쓸해 보였다.

진산월이 그를 부축하려 했으나, 응계성은 그의 도움을 거절했다.

“나 혼자 충분히 움직일 수 있소.”

진산월이 묵묵히 그의 얼굴을 응시하고 있자 응계성은 평소의 그답지 않게 조용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런 표정으로 나를 보지 마시오. 장문사형도 별로 보기 좋은 모습은 아니니까.”

“일어설 수 있느냐?”

“내가 이런 꼴이 됐다고 우습게 보지 마시오. 난 응계성이오. 이런 정도로 나약해지는 놈이 아니란 말이오.”

진산월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어깨를 쓰다듬었다.

“그래. 가지.”

응계성은 어디로 가느냐고 묻지 않았다. 다만 휑하니 몸을 돌려 앞서서 걸어가는 진산월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다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진산월이 향하는 종남산의 산봉을 하염없이 쳐다볼 뿐이었다.

마침내 돌아가는 것이다.

언제나 보고 싶었던 마음속의 고향, 그리운 종남파를 향해…


“이상하군. 정말 이상해.”

남호는 아까부터 계속 고개를 갸우뚱거리고 있었다. 이를 보다못한 누산산이 뾰쪽한 음성으로 소리쳤다.

“뭐가 그렇게 이상하다는 거예요?”

이곳은 평안객잔의 후원에 있는 별실이었다. 이존휘와 헤어져 숙소로 돌아온 남호와 금교교 등 천봉선자들은 숙소에서 초조한 표정으로 자신들을 기다리고 있는 누산산과 유화화를 만났다.

그런데 숙소를 돌아올 때부터 남호가 계속 뜻 모를 소리를 중얼거리고 있는 것이다. 남호는 평상시와는 달리 무언가 진지한 생각에 빠져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패권진천 위중설은 두 주먹의 위력뿐 아니라 막강한 호신강기(護身?氣)로 많은 사람들을 두려움에 떨게 한 인물이었소.”

“그런데요?”

“그런 위중설이 너무도 어이없게 목숨을 잃었단 말이오.”

“그게 뭐가 이상해요? 위중설이 아무리 대단한 고수라고 해도 둘째 언니의 수유무정도(須臾無情刀)를 맞고 살아날 수는 없다고요.”

남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내 말은 그게 아니오. 위중설도 사람이니 비도를 목에 맞으면 숨이 끊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오. 다만 그가 어째서 그토록 무방비 상태에서 허무하게 두 소저의 비도에 맞았는지 이상한 생각이 든단 말이오?”

누산산은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즉시 입을 놀렸다.

“그야 둘째 언니의 수유무정도가 워낙 빨랐으니까…”

“물론 두 소저의 솜씨야 나도 익히 알고 있지만, 위중설 정도의 인물이 자신의 정면에서 날아오는 비도를 못 알아차렸다는 것은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일이오.”

누산산의 고운 아미가 하늘로 솟구쳐 올라갔다.

“당신은 직접 눈으로 보고도 둘째 언니의 실력을 의심하는 거예요?”

그때 차분한 표정으로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정소소가 붉은 입술을 열며 침착한 음성으로 말했다.

“확실히 그때의 상황은 조금 미심쩍은 데가 있었다.”

누산산은 찔끔하여 정소소를 돌아보았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큰 언니?”

정소소는 비단 천봉팔선자 중의 첫째일 뿐 아니라 두뇌가 명석하고 성격이 침착해서 많은 사람들의 신망(信望)을 얻고 있었다. 그래서 천방지축에 무서운 사람이 없는 누산산도 그녀에게는 다른 사람처럼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위중설은 기습을 당한 상태에서도 내 무형신편(無形神鞭)을 삼 초나 피했다. 그로 미루어 보아 그자의 본신 실력은 결코 내 아래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둘째의 비도에는 너무 쉽게 당하고 말았지. 그건 확실히 강호에 소문난 그의 모습과는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다.”

정소소까지 이렇게 말하자 다른 사람들도 그제서야 모두 진지한 표정이 되었다. 누산산은 여전히 반신반의하는 모습이었으나 차마 그녀의 말을 정면으로 반박하지는 못하고 옆에 있는 두청청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둘째 언니 생각은 어떠세요?”

두청청은 정소소를 힐끔 쳐다보더니 특유의 냉랭한 음성으로 말했다.

“큰언니 같은 실력자의 말을 안 듣고 쓸데없이 나한테는 왜 물어보는 거냐? 큰언니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그 말투가 너무 퉁명스러워 누산산은 절로 찔끔하는 표정이었다.

“그래도… 둘째 언니가 당사자이니 당시의 상황에 대해서 제일 잘 알 거 아니에요?”

“흥. 내 손에 죽은 놈이 한둘도 아닌데 그런 걸 일일이 기억하고 있겠느냐? 그놈은 큰언니의 무형신편을 피하느라 정신이 없어서 내 비도가 날아갈 때까지도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럼 둘째 언니는 그의 죽음에서 별다른 이상한 점을 느끼지 못했다는 말씀이에요?”

“사람 죽는 모습은 다 똑같다. 모두들 자기가 남의 손에 죽게 되리라고는 도저히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들을 하고 있지. 그자도 예외는 아니었어. 그런데…”

차가운 표정으로 말을 하던 두청청의 얼굴에 한 줄기 묘한 빛이 떠올랐다.

“왜 목에서 비도를 뽑았을까?”

“네? 그게 무슨 말씀이에요?”

“그자도 고수이니 목에 박힌 비도를 섣불리 뽑았다가는 오히려 상처가 벌어져서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한다는 걸 알고 있을 거야. 그런데 그자는 태연히 자신의 목에 박혀 있는 비도를 뽑더군. 그래서 나는 순간적으로 그가 비도를 맞아도 견딜 수 있는 특이한 마공(魔功)이라도 익힌 게 아닌가 하고 의심했었지. 그런데 비도를 뽑자마자 너무도 맥없이 쓰러져 버리더군. 이번 일에서 굳이 의문 나는 점을 꼽자면 그것밖에는 없다.”

그 말을 끝으로 두청청은 입을 굳게 다물어 버렸다. 누산산은 그녀에게 몇 가지를 더 물어보고 싶은 모습이었으나, 두청청의 냉랭한 얼굴을 보고는 이내 마음을 돌려먹고는 애꿎은 남호를 들들 볶았다.

“말해 봐요, 당신 생각은 뭐예요? 위중설의 죽음에 무언가 비밀이라도 있단 말이에요?”

남호의 대답은 그녀를 실망시키기에 족했다.

“미심쩍은 구석이 있기는 하지만 지금으로선 무어라고 말할 수 없소.”

누산산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손가락을 세우며 그를 향해 다가섰다.

“기껏 멀쩡히 있는 사람들을 들쑤셔 놓고는 이제 와서 할 말이 없다니, 그게 무슨 헛소리죠?”

남호는 그녀가 당장이라도 자신의 옆구리를 손가락으로 쿡쿡 찌를 듯하자 한발 뒤로 슬쩍 물러나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직접 시체를 보고 의심나는 점을 알아보기 전에는 백 마디 말이 헛일이라는 이야기요.”

“그럼 당장 그곳으로 가서 확인해 보면 되잖아요?”

“그렇지 않아도 그럴 참이오.”

남호는 약이 바짝 올라 있는 누산산을 피해 슬쩍 금교교에게로 다가갔다.

“금 소저의 생각은 어떻소?”

금교교는 아직도 어깨의 부상이 낫지 않았는지 낯빛이 조금 파리했다. 하나 눈빛만큼은 어느 때보다 영롱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당신이 그렇게 생각한다면 가 보는 것이 좋겠군요. 확실히 이번 일을 이대로 내버려두기에는 마음이 개운치 않아요. 큰언니 생각은 어떠세요?”

정소소는 단호하면서도 분명한 음성으로 말했다.

“내 생각도 그렇다. 최근 들어 위태로워지기는 했어도 오랫동안 유지되어 오던 천목지약이 이토록 쉽게 깨어졌다는 것은 심상치 않은 일이다. 어쩌면 이번 일에는 우리가 미처 알지 못한 음모가 도사리고 있을지 모르니 반드시 다시 가서 좀 더 자세히 조사해 봐야겠다.”

남호가 재빨리 끼어들었다.

“그러면 이러고 있을 게 아니라 어서 가 봅시다.”

모두들 자리에서 일어났다. 막 숙소를 나가려 할 때 누산산은 문득 생각난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이번 일에 무언가 음모가 있다면 과연 위중설의 시체가 아직도 그 자리에 그대로 보존되어 있기나 하겠어요?”

남호는 한 방 먹은 표정으로 멍하니 있다가 씁쓸하게 웃었다.

“그런 일이 없기만을 바라는 수밖에.”

불행히도 누산산의 예감은 그대로 적중했다. 그들이 다시 서십왕촌의 주루로 갔을 때, 그곳에는 아무런 시신도 누워 있지 않았던 것이다. 남호는 주루 안을 샅샅이 훑어보고는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깨끗하군. 위중설의 시신은 누군가가 완벽하게 수거해 갔소.”

누산산은 부서진 탁자와 의자와 파편들로 어수선한 주루 안을 기웃기웃거리고 있다가 재빨리 그에게 다가왔다.

“누가 시신을 가져갔단 말이에요?”

“뻔하지 않겠소? 그 약삭빠른 조화심과 공손도가 아니면 누구겠소?”

“그들이 왜 그런 짓을 한단 말이에요?”

“누 소저 같으면 같은 동료가 죽었는데 그 시체를 그대로 내버려 두겠소?”

누산산의 눈에서 매서운 빛이 번뜩였다.

“어디서 비유를 해도 꼭 그 따위 놈들과…”

금교교가 막 발작하려는 누산산을 제지하며 남호를 쳐다보았다.

“조화심이나 공손도가 그렇게 동료애가 투철한 자들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군요. 그들이 위중설의 시체를 가져간 것에는 틀림없이 다른 이유가 있었을 거예요.”

그때 차분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고 있던 정소소가 모처럼 입을 열었다.

“위중설의 시체를 가져간 자들이 꼭 그들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겠지.”

금교교와 남호의 시선이 모두 그녀에게 향했다.

“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조화심과 공손도는 사태가 불리해진 것을 알고는 복수할 생각은커녕 같은 편을 내버리고 재빨리 도망칠 만큼 눈치가 비상하고 조심스러운 자들이다. 우리가 자신들의 뒤를 계속 쫓을지도 모르는데 위중설의 시체를 회수하기 위해 이 근처에 무작정 숨어서 우리가 돌아가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건 그들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행동이다.”

“그럼 큰언니 생각은 누군가 다른 사람이 위중설의 시체를 가지고 갔단 말인가요?”

“그럴 가능성이 있다는 말이다.”

금교교는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더니 눈빛을 반짝이며 입을 열었다.

“큰언니 생각은 잘 알겠어요. 만약 그들이 아니라면 그럴 만한 사람은 오직 하나뿐이군요.”

누산산이 자신도 모르게 재빨리 물었다.

“그게 누구죠?”

금교교는 그녀의 말에는 대꾸하지 않고 남호를 돌아보았다.

“당신은 누구일 것 같나요?”

남호는 생각해 놓은 것이 있는지 망설이지 않고 즉시 입을 열었다.

“그야 물어보나마나 아니겠소? 우리가 누구 때문에 여기까지 와서 그런 고생을 했는데…”

누산산은 깜짝 놀라 자기도 모르게 언성이 높아졌다.

“뭐라고요? 그럼 이존휘가 그런 짓을 했단 말이에요?”

남호는 피식 웃었다.

“누 소저도 정 소저의 말을 듣지 않았소? 그럴 가능성이 있다는 거지. 다시 말해서 조화심과 공손도가 위중설의 시체를 가져가지 않았다면 그 다음으로는 이존휘가 가장 가능성이 높은 인물이라는 뜻이오.”

“하지만 이존휘가 무엇 때문에…”

“그거야 난들 알겠소? 하지만 위중설이 죽은 걸 아는 사람은 당시 주루에 있던 사람들뿐인데, 우리와 그들을 빼면 결국 이존휘밖에는 남지 않으니 그를 의심해 볼 수밖에.”

누산산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남호를 빤히 쳐다보더니 이내 입을 삐죽거리며 금교교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아무래도 당신 말은 신빙성이 없어요. 아무리 좋게 보려고 해도 당신 얼굴을 보면 그 입에서 거짓말만 술술 나오는 것 같아서 믿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아요. 셋째 언니, 언니도 이존휘가 의심스럽다고 생각하세요?”

금교교는 남호의 얼굴이 구겨지는 것을 보며 입가에 조용한 미소를 매달았다.

“조화심과 공손도가 아니라면 혐의점을 둘 사람이 이존휘밖에는 없지. 애초에 우리가 그를 찾아간 것도 그가 취미사 혈겁과 무슨 관련이 있지 않나 하는 의심을 가졌기 때문이 아니냐?”

“그렇죠.”

“만약 그가 취미사 혈겁과 어떤 식으로든 관련이 있다면, 우리가 자신을 찾아간 이유가 무엇인지 짐작하지 못할 리가 없다. 그렇다면 당연히 우리를 방해하기 위해서 무언가 술수(術數)를 부리려 했겠지.”

누산산의 유달리 커다란 눈이 총기로 가득 찼다.

“그럼 그놈이 우리가 자신을 의심하는 것을 알고 차도살인지계(借刀殺人之計)를 펼쳐 셋째 언니를 제거하려 했단 말인가요?”

그녀는 아예 이존휘를 범인이라고 확신했는지 그에 대한 호칭이 판이하게 바뀌었다.

“너무 성급한 판단은 말아라. 그건 어디까지나 가정(假定)에 가정을 거듭한 것이니 말이다.”

“하나에 하나를 더하면 둘이 되는 거예요. 요즘 이 일대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일들에 모두 그놈이 개입되어 있는데 어떻게 의심하지 않을 수 있어요? 생각해 봐요. 취미사 혈겁 때도 그렇고 이번 일도 그렇고 모두 그놈이 어떤 식으로든 끼어들어 있잖아요. 그러니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이 그놈을 족치러 가요.”

누산산이 당장이라도 이씨세가를 향해 달려갈 듯한 기세이자 금교교가 고소를 머금으며 뱅어 같은 손가락으로 그녀의 이마를 톡톡 두드렸다.

“너는 그 서두르는 버릇을 고치지 못하면 언젠가는 호되게 경을 치게 될 거다. 비록 우리가 그를 의심한다 해도 뚜렷한 증거 없이는 그를 추궁할 수 없다는 걸 모르겠니?”

누산산도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럴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는지라 혀를 낼름거리며 한풀 꺾인 목소리로 말했다.

“답답하잖아요. 일은 자꾸 꼬여 가는데 기껏 범인으로 의심되는 인물한테는 제대로 접근도 못하고 있으니, 이렇게 세월만 보내다가는 모든 게 흐지부지 되어 버릴 거예요.”

그녀의 말을 듣고 있던 정소소가 모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막내의 말에도 일리가 있다. 그를 의심만 하고 있는 것으로는 사건의 해결에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 그가 진짜 범인이든 아니면 우리가 잘못 생각한 것이든 좀 더 확실한 사실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무슨 수로 그를 조사하죠? 그는 섣불리 건드릴 수 없는 자예요.”

그 점에 대해서는 정소소도 뚜렷한 계획이 없는지 쉽게 대답하지 않았다. 누산산은 남호에게 슬금슬금 다가가서 그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당신이 말해 봐요. 앞으로 어떻게 하면 되죠?”

“내 말은 믿을 수 없다면서 왜 나에게 의견을 묻는 거요?”

“당신 상판은 마음에 안 들지만 그래도 잔꾀가 많으니 무슨 방법이 있을 거 아니에요? 솔직히 이럴 때 말고는 당신이 언제 쓸모 있는 일을 하겠어요?”

남호는 허탈한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허허… 내가 쓸모 있는 때도 있으니 정말 사는 보람이 느껴지는구려. 그런데 이존휘를 조사하기 전에 먼저 분명히 해두어야 할 것이 있소.”

“그게 뭐죠?”

“이번 사건과 취미사 혈겁은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서로 다른 사건이라는 거요. 우리가 처음 이존휘를 주목했던 것은 취미사 혈겁의 범인으로서였소. 그런데 지금은 그가 우리를 살인멸구하려고 신목령의 고수들에게 유인했다는 의심을 하고 있소. 그가 취미사 혈겁의 범인인지 아닌지는 지금으로서는 알 수가 없지만, 그가 우리를 살인멸구하려 했다는 가정에는 몇 가지 허점이 있소.”

누산산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모두 흥미로운 얼굴로 남호를 주시했다.

“허점이라뇨?”

“이존휘가 진짜로 우리를 죽이려 했다면 굳이 신목령을 끌어들이는 번거로운 일을 하지 않고도 확실한 방법이 있을 거요. 게다가 그가 신목령의 고수 몇몇과 친분 관계가 있다고 해도 단순한 그의 부탁 때문에 신목령이 천목지약을 어기고 노골적으로 천봉선자들을 제거하려 한다는 것은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오.”

금교교가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말을 받았다.

“확실히 그런 면이 있어요. 그들의 그런 행동은 천목지약을 깨라는 신목존자의 분명한 명령이 있기 전에는 불가능한 일이에요. 그리고 신목령이 어차피 천목지약을 깰 생각이라면 굳이 이존휘가 중간에서 우리를 유인할 필요도 없이 좀더 노골적이고 확실한 함정을 팠을 거예요.”

“내 말이 바로 그렇소. 이존휘의 목적이 살인멸구에 있는 것 같지는 않소.”

누산산이 약간 짜증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럼 뭐예요? 이존휘가 일부러 우리를 이곳으로 유인한 게 아니란 말이에요?”

“살인멸구가 목적은 아니지만, 유인한 것은 맞는 것 같소. 그렇지 않았다면 조화심과 공손도가 그렇게 절묘한 시기에 나타날 리가 없었을 거요.”

“그게 대체 무슨 말이에요? 대체 이존휘가 이번 일의 주모자라는 거예요, 아니에요?”

“이번 일이 우연히 일어난 사건이라고 하기에는 이상한 구석이 많다는 건 누구나 알고 있을 거요. 그렇다면 결국 누군가가 의도한 것이라는 말인데, 그럴 가능성이 가장 높은 사람은 이존휘뿐이오. 하지만 이존휘의 목적이 반드시 우리를 살인멸구하기 위한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는 게 내 생각이오.”

“그럼 그의 목적이 뭐란 말이에요?”

남호는 얄밉게 슬쩍 뒤로 한발 물러섰다.

“내가 이존휘가 아닌 다음에야 그걸 어떻게 알겠소?”

누산산의 눈썹이 하늘로 솟구치며 목소리가 송곳처럼 뾰쪽해졌다.

“뭐라고요? 이런 얌체 같으니…”

“하지만 짐작 가는 일이 아주 없는 건 아니오.”

누산산은 교묘한 남호의 말에 이대로 화를 낼까 아니면 참고 그의 말을 들어볼까 잠시 고민스런 표정이었으나, 약삭빠른 남호는 그녀가 미처 마음을 정하기도 전에 재빨리 다음 말을 계속했다.

“이번처럼 복잡하고 전모를 파악하기 힘든 경우에는 일의 진행 상황보다는 결과를 주목해 볼 필요가 있소. 다시 말해서 상대가 무슨 수법을 썼는지 알기 위해 심력(心力)을 허비하기보다는 그 일의 결과가 무엇인지를 주목하여 상대의 속셈을 꿰뚫어 보는 일이 중요하오. 누 소저, 이번 일의 결과가 무엇이오?”

남호가 자신을 지목하여 묻자 누산산은 화도 못 내고 당황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니까… 위중설이 죽었잖아요.”

남호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그건 과정일 뿐이오.”

누산산이 제대로 대답을 못하고 우물쭈물하고 있자 금교교가 대신 나섰다.

“위중설의 죽음으로 신목령과 본궁 사이에 체결되었던 천목지약이 깨어졌죠.”

“바로 그거요. 과정이야 어찌되었건 결국 이번 일의 결과로 천목지약이 깨어지고 천봉궁은 신목령과 원한 관계를 맺고 말았소. 그럼 바로 이게 이번 일을 계획한 자의 목적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소? 그자가 이존휘든 아니면 다른 누구이든 말이오.”

금교교는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더니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일리가 있는 말이군요. 우리가 이존휘를 따라 이곳까지 왔다가 여러 가지 일을 겪었지만, 결과만 놓고 보자면 천목지약이 깨어지고 신목령과 등을 지게 되고 말았죠. 하지만 이번 일을 이존휘가 꾸민 것이라면 그가 대체 왜 그런 짓을 벌인 것일까요? 그리고 조화심과 공손도는 단순히 그에게 이용당한 것인가요? 아니면 그들에게 무언가 또 다른 속셈이 있는 것일까요?”

남호는 진중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런 의문들은 지금부터 차근차근 풀어야 할 거요.”

“결코 쉽지 않은 일이군요.”

“쉽지는 않지만 불가능한 일도 아니오. 무엇보다도 우리에게는 유용하게 써먹을 수 있는 패가 하나 있지 않소?”

“그게 뭐지요?”

남호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어찌되었건 두 분 소저는 이존휘의 목숨을 구해 준 거요. 그러니 아무 때고 이씨세가를 찾아가 그에게 대접을 받는다고 해도 당연한 일 아니겠소?”

“그래서요?”

“우선은 이존휘를 만나러 갑시다. 그것이 그를 심리적으로 압박하여 그의 실수를 유발할 수도 있고, 아니면 그가 또 다른 술수를 부리게끔 만들 수도 있소. 어찌되었건 지금으로서는 이존휘가 먼저 움직여야만 그의 꼬리를 잡을 수 있소.”

금교교는 머리를 굴려 보았으나 지금 상황에서는 그의 의견보다 더 좋은 계획을 떠올릴 수가 없었다. 누산산이 어느사이엔가 남호에게 다가오며 그의 어깨를 슬쩍 쳤다.

“당신 역시 잔머리 하나는 제법이군요. 당신하고 이존휘하고 머리를 굴리면 정말 볼 만한 여우들의 대회전(大會戰)이 벌어지겠네요.”

남호는 자신의 조카뻘밖에 되지 않는 이 맹랑한 아가씨와 다투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는지라 그녀의 버릇없는 말에도 그저 웃어 보일 뿐이었다.

“내 주제에 어떻게 천하에 이름 높은 만상공자와 두뇌 다툼을 할 수 있겠소? 앞으로 이존휘는 금 소저와 정 소저가 상대하고 나는 뒤에서 구경만 하게 될 거요.”

“당신 주제가 어때서요? 얼굴이 좀 재수 없게 생긴 거 말고는 말도 잘하고 잔꾀도 많잖아요. 참, 당신 본명이 뭐라고 했죠?”

누산산이 문득 생각난듯 묻자 남호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내 이름이 무언지는 중요한 게 아니요. 내가 누구인지 아는 사람은 다 알고 있으니까.”

“나는 모른단 말이에요.”

“며칠 동안 보았으면 그걸로 되지 않겠소? 소저가 나에게 특별한 관심이 있는 것도 아닐 텐데.”

누산산의 얼굴에 고집스런 표정이 떠올랐다.

“아니에요, 난 당신한테 관심이 많아요. 어서 빨리 자기가 누구인지 밝히도록 해요. 그렇지 않으면…”

누산산이 갑자기 말을 끊자 남호는 엉겁결에 물었다.

“그렇지 않으면 어쩌겠다는 거요?”

누산산의 두 눈이 영악하게 번뜩였다.

“당신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면서 당신이 하는 일마다 방해할 거예요.”

남호는 너털웃음을 터뜨리지 않을 수 없었다.

“허허… 소저같이 젊고 예쁜 여자가 내 뒤를 따라다니는 것은 나도 그리 반대하지 않소. 그런데 그 때문에 소저의 영명(英名)이 더럽혀지지 않을까 걱정되는구려.”

“말은 그렇게 하지만 내가 따라다닌다는 생각만 해도 귀찮아 죽을 지경이죠? 그러니 순순히 말해요. 당신 이름이 뭐예요?”

“허허… 이것 참…”

남호가 계속 실없이 웃고만 있자 누산산의 얼굴이 점차 사나워졌다. 그 광경을 보고 있던 금교교가 피식 웃으며 누산산의 머리를 살짝 두드렸다.

“그게 그렇게 궁금하니?”

누산산은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셋째 언니도 알잖아요. 내가 궁금한 걸 알지 못하면 밤에 잠도 자지 못하는 성미라는 걸. 지난 며칠 동안 저자가 누구인지 궁금해서 미칠 지경이란 말이에요.”

금교교는 희미하게 미소지으며 남호를 슬쩍 쳐다보았다.

“그렇게 중요한 비밀도 아닌데 밝혀도 상관없겠죠?”

남호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금교교는 그가 반대하지 않는 것을 알고는 남호의 정체를 밝히기 시작했다.

“내가 일전에 남호라는 그의 가명(假名)이 아주 적절한 거라고 했지? 그 말만 잘 기억했어도 그가 누구인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을 거다.”

“남호? 그게 적절한 이름이라니요?”

“바보. 남쪽의 가장 유명한 호수는 동정호(洞庭湖)다. 그의 이름은 이동정(李洞庭)이고 별호는 호반유객(湖畔遊客)이니 가명으로는 실로 적당한 이름이 아니겠느냐?”

누산산의 눈이 동그랗게 뜨여졌다.

“호반유객 이동정? 바로 그 약삭빠르기가 천하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들고 자신의 주변 천리 안에 벌어지는 일 중 모르는 것이 없다는 만리통(萬里通) 말이에요?”

“그렇다. 그가 바로 만리제일통(萬里第一通)이라 불리는 이동정이다.”

누산산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남호, 아니 이동정의 전신을 훑어보더니 이내 눈을 빛냈다.

“어쩐지 잔머리 굴리는 솜씨가 비상하더라니… 듣자하니 당신은 강호제일 신비인(神秘人)인 번신봉황(飜身鳳凰) 이북해(李北海), 이 대협의 하나뿐인 동생이라고 하던데 그게 사실인가요?”

이동정은 빙긋 웃으며 시원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바로 형님의 못난 동생이오.”

“당신 입으로 스스로 못났다고 하다니 이제야 비로소 제대로 된 자아발견(自我發見)을 했군요. 그런데 당신 형님인 이 대협은 지금 어디 계세요?”

번신봉황 이북해는 비단 무림구봉(武林九峯) 중의 일인일 뿐 아니라 행적이 신비하고 변장이 자유자재로워서 많은 무림인들은 그의 모습을 한 번이라도 보기를 갈망하고 있었다. 특히 삼년 전의 서장무림과의 싸움 때 그가 무림맹의 정보 조직을 총괄한 이후 무림에는 전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행방은 모든 사람들의 한결 같은 관심사였다.

이동정은 그녀의 추궁과도 같은 질문에 담담한 태도로 응답했다.

“형님은 워낙 신룡(神龍)과도 같은 분이라 나 따위가 감히 그분의 행방을 알 리가 없소. 하지만 그분도 이번 일에 관심이 많으니 어쩌면 조만간에 그분이 소저들 앞에 나타날지도 모르겠소.”

누산산은 소문으로만 듣던 이북해를 직접 만날지도 모른다는 말에 귀가 번쩍 뜨이는지 황급히 물었다.

“그게 정말이에요?”

“그럴지도 모른다는 말이오. 하지만 그분이 직접 나타난다고 해도 소저는 전혀 못 알아볼 것이니 너무 큰 기대는 하지 않는 게 좋소.”

이북해의 별호가 번신봉황인 것은 그의 변장술이 그만큼 천변만화(千變萬化) 하기 때문이었다. 누산산도 그에 대한 소문은 익히 들어서 알고 있는지라 이동정의 말이 거짓이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공연히 심술이 났다.

“흥. 한 핏줄을 타고난 형제이면서도 두 사람은 어쩌면 그렇게 달라요? 이 대협의 찬란한 태양과도 같은 명성에 비하면 당신은…”

금교교가 엄격한 눈으로 그녀를 쏘아보았다.

“산 매, 말이 너무 심하구나. 그가 비록 강호의 이름난 고수는 아니지만 엄연히 너의 삼촌과 같은 항렬인데 어찌 그리도 무례하단 말이냐?”

누산산은 찔끔하여 급히 일을 다물었다. 아닌게 아니라 이동정은 무공 실력은 별로일지 몰라도 두뇌가 비상하고 강호의 소식에 정통하여 강호에서는 아무도 그를 무시하지 못했다. 더구나 그녀의 삼촌인 누굉표는 이동정과 상당한 친분 관계가 있는 사이였다.

이동정은 아무렇지도 않은지 손을 내저으며 웃었다.

“나는 괜찮으니 금 소저는 걱정할 필요 없소. 그보다 언제 이존휘를 만나러 가겠소?”

그가 화제를 바꾸자 금교교의 시선이 절로 정소소에게로 향했다. 천봉팔선자의 우두머리는 누가 뭐래도 정소소였으며, 그녀는 천봉궁의 대외적인 일을 총괄하는 인물이었다. 그러니 그녀의 의중을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정소소는 아까부터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다가 금교교의 시선을 받자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일단은 본궁에 천목지약이 깨어진 경위를 알려야겠어요. 그리고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서 다른 사람들도 불러야 하니 이틀 정도의 시간이 필요해요. 이씨세가는 그 후에 가는 것이 좋을 것 같군요.”

이동정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그럼 이틀 후 저녁 때 이씨세가로 가도록 합시다.”

이어지는 그의 음성은 처음과는 달리 다소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아무쪼록 이번에는 어떤 식으로든 우리의 의혹이 모두 풀렸으면 좋겠소. 더 시일을 지체했다가는 정말 죽도 밥도 아니게 될지 모르니 말이오.”

모두들 그의 말에 수긍하듯 묵묵히 각기 다른 상념에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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