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14권 종남재림(終南再臨)편 : 1화
제134장. 강호연정(江湖戀情)
다음날, 종남파는 전혀 뜻밖의 손님들을 맞이했다. 정소소와 금교교를 비롯한 천봉궁의 인물들이 그들이었다. 찾아온 사람의 수는 모두 다섯 명이었다. 그중 세 명은 천봉선자들이었고, 두 명은 중년과 노년의 남자들이었다. 처음 그들을 맞이한 사람은 소지산이었는데, 소지산은 천봉선자를 만난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들이 내민 배첩(拜牒)을 보고 나서야 그들이 천봉궁의 인물들임을 알게 되었다.
“본파에는 무슨 일로 오시었소?”
원래 말이 많지 않은 소지산은 평소의 성격답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우열을 가리기 힘들 정도로 미모가 뛰어난 세 여인 중 가장 연장자인 듯한 백의여인이 입을 열었다.
“우리는 귀파의 장문인을 만나려고 합니다.”
“장문인은 무슨 일로 만나려는 거요?”
“그건 장문인을 직접 뵙고 말씀드리지요.”
소지산은 잠시 장내의 인물들을 침착한 눈으로 살펴보더니 이내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만 기다리시오. 장문인께 여쭙고 오겠소.”
소지산이 나가자 세 명의 여인들 중 가장 나이가 어린 미녀가 투덜거렸다.
“아니꼬워 죽겠네. 이깟 시시한 종남파 장문인 만나는 데 뭐가 이렇게 복잡해? 우리가 온 줄 알았으면 빨리 나와서 영접해도 시원찮은데…”
백의여인이 엄격한 눈으로 그녀를 쏘아보았다.
“산 매, 말조심해라. 우리가 이곳에 온 목적을 잊었느냐?”
누산산은 찔끔하여 급히 입을 다물었다. 백의여인, 정소소는 한차례 더 그녀에게 조심하라는 눈짓을 한 후 다시 입을 열었다.
“이곳에 와 보니 종남파가 초가보에 의해 거의 멸문당할 뻔했다는 게 믿기지 않는구나. 의외로 사람들의 수도 적지 않았고, 그들 중 몇 사람은 기도도 범상치 않았다. 조금 전에 보았던 자도 그 풍기는 기세가 맹렬하면서도 태도가 침착하고 여유가 있어서 절대로 우리의 하수(下手)로는 보이지 않았다.”
누산산은 반신반의하는 모습이었다.
“설마요.”
옆에 있던 금교교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큰언니 말씀이 옳다. 그자의 실력은 결코 우리 밑이 아니다. 대체 종남파에 언제 저런 고수들이 등장한 거지?”
금교교까지 이렇게 말하자 누산산도 무작정 못 믿겠다고 말할 수만은 없었다. 하나 그녀는 종남파의 장문인도 아닌 일개 제자가 천봉선자 중에서도 실력이 뛰어난 정소소와 비슷한 수준의 고수라는 게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삼 년 전에 그녀가 보았던 종남파 고수들의 실력은 형편없는 정도는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감탄할 만큼 뛰어나지도 않았다. 비록 그동안 적지 않은 세월이 흘렀다고 해도 종남팔라는 태생의 한계는 깰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런데도 정소소와 금교교는 조금 전의 추레하고 볼품없어 보이는 자가 자신들에 못지않은 고수라고 거듭 주장하고 있으니 그녀로서는 믿을 수도 없고 믿지 않을 수도 없는 묘한 심정이었다.
그때 문이 열리며 한 사람이 들어왔다. 조금 전에 보았던 자와는 다르게 체구가 건장하고 이목구비가 보기 드물게 뛰어난 미남 청년이었다. 청년은 중인들을 한차례 둘러보더니 이내 당당한 음성으로 말했다.
“장문인께서 당신들을 만나겠다고 하셨소. 따라오시오.”
누산산이 그 청년을 보고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두 눈을 반짝이며 손뼉을 탁 쳤다.
“당신… 나 기억 안 나요? 예전에 소림사 밑에 있는 주루에서 봤잖아요?”
청년, 낙일방은 그녀를 한차례 힐끗 보더니 무뚝뚝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기억하고 있소. 그리고 그때 소저가 내게 베푼 일장(一掌)의 은혜도 잊지 않고 있지.”
그 말에 누산산이 몸을 움찔거렸다. 그러고 보니 그때 그녀는 낙일방과 말다툼을 하다가 홧김에 그의 따귀를 때린 적이 있었던 것이다. 총명하고 영악스러운 그녀도 일시지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뭐라고 말대꾸를 하긴 해야겠는데, 당황스럽고 난처한 생각이 들어 할말이 떠오르지 않는 것이다. 때마침 금교교가 나서서 그녀를 구해 주었다.
“이제 보니 낙 소협이로군요. 정말 오랜만이네요.”
낙일방은 그녀를 향해 간단하게 포권을 했다.
“금 소저를 다시 뵙게 되어 반갑소.”
금교교는 삼 년 만에 다시 만난 그의 모습이 다소 낯선지 조금은 어색한 미소를 흘렸다.
“그동안 낙 소협도 많이 변하셨군요. 밖에서 보았다면 못 알아볼뻔했어요.”
“삼 년이란 짧은 세월이 아니니 사람이 변하는 건 당연한 일이오. 다행히 금 소저는 예전과 별로 달라지지 않아 쉽게 알아볼 수 있었소. 장문인께서 기다리고 계시니 나를 따라오시기 바라오.”
이어 낙일방은 먼저 몸을 돌려 밖으로 걸어나갔다. 금교교와 누산산 등은 너무도 달라진 그의 모습에 어안이 벙벙한 모습을이었다. 예전에는 얼굴도 곧잘 붉히고 조금은 경솔해 보였던 그가 지금은 너무도 의젓하고 당당한 남자로 변해 있는 것이다. 게다가 체구도 상당히 커져서 당시에 보았던 소년의 모습은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런데도 용모는 그때보다 더욱 준수해진 것 같았다. 누산산이 조그만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이럴 줄 알았으면 여섯째 언니를 꼭 데리고 올 걸. 하지만 너무 잘난 척하는 게 마음에 들지 않는단 말씀이야.”
천봉궁의 인물들은 낙일방의 뒤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두 채의 전각을 지나자 하나의 아담한 건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일파의 장문인의 거처라고 하기에는 너무 평범했으나, 낙일방은 그 건물 앞에 도착하자 정중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장문사형, 손님들을 모시고 왔습니다.”
안에서 조용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들어오너라.”
낙일방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안에는 그리 크지 않은 대청이 있었고, 한쪽에 침실로 향하는 듯한 작은 문이 나 있었다. 대청에는 두 명의 사람이 앉아 있었다. 그중 한 명은 조금 전에 천봉궁의 인물들이 만났던 소지산이었다. 중인들의 시선은 가운데 앉아 있는 훤칠한 키의 사나이에게로 향했다. 정소소와 금교교는 지금에서야 비로소 진산월의 얼굴을 자세히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일전에 누산산이 한 말이 결코 거짓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낙일방의 변화된 모습에 놀란 게 조금 전의 일인데, 진산월은 단순히 변한 정도가 아니라 사람 자체가 완전히 다른 인물로 바뀐 것 같았다. 체격 좋았던 몸이 앙상하게 마른 것은 둘째치고라도, 눈빛이나 전신에서 풍겨 나오는 분위기가 너무도 판이하게 달라졌다. 그 고적한 눈빛을 받자 정소소는 왠지 가슴 한구석이 아릿해짐을 느꼈다. 대체 그동안 무슨 일을 겪었기에 그는 이토록 변해 버린 것일까?
한동안 장내에는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다. 천봉선자들은 변해버린 진산월의 모습에 놀란 듯 쉽게 입을 열지 못했고, 진산월 또한 의미를 알 수 없는 담담한 시선으로 묵묵히 그녀들을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침묵을 깬 사람은 천봉선자들의 뒤에 있던 중년인이었다.
“하하… 요즘 들어 강북무림을 뒤흔들고 있는 종남파의 장문인을 뵙게 되니 금생(今生)의 영광이 아닐까 합니다.”
진산월의 시선이 다소 호들갑스럽게 입을 여는 그에게로 향했다.
“천봉궁에서 오신 분이시오?”
중년인은 빙긋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저 같은 무명소절이 감히 천봉궁에 있을 수 있겠습니까? 저는 그냥 혼자 떠돌기 좋아하는 남호라고 하는 놈입니다. 이번에 사정이 있어 천봉궁의 고인(高人)들과 행동을 함께하게 된 것뿐입니다.”
진산월은 넉살좋게 웃는 이동정을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이내 옆에 있는 늙은이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진산월과 시선이 마주치자 늙은이의 눈에 의외라는 빛이 떠올랐다. 담담한 듯한 진산월의 눈에서 말할 수 없는 힘이 느껴졌던 것이다.
‘허허… 젊은 나이에 이와 같은 기운을 지니고 있다니… 종남파에서 희대의 신검이 배출되었다는 소문이 거짓은 아닌 모양이구나.’
늙은이는 속으로 중얼거리며 진산월을 향해 입을 열었다.
“이 늙은이는 천봉궁에서 자질구레한 일을 맡고 있는 차복승이라고 하네.”
차복승은 비록 강호에서는 천봉팔선자만큼 널리 알려져 있지는 않았으나 천봉궁에서 하나뿐인 총관으로 그 지위는 특별한 데가 있었다. 천봉궁에서는 누구나가 그를 노야(老爺)라고 불렀다. 그의 나이가 몇 살인지는 누구도 정확히 알지 못했으나, 천봉궁에 있는 어떤 사람보다도 나이가 많다는 것은 누구나가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들이 처음 천봉궁에 들어왔을 때도 차복승은 지금과 똑같이 늙은 모습으로 총관 일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정소소가 태어나기 전에도 총관이었으며, 그녀가 성장하여 어른이 되었을 때도 여전히 천봉궁의 총관이었다. 순한 인상에 주름살이 가득한 차복승은 그래서 많은 천봉궁의 인물들이 가장 따르고 존경하는 인물이었다.
진산월은 이동정을 대할 때와는 달리 앉은 자리에서 일어나서 그를 향해 포권을 했다.
“이제 보니 천봉궁의 총관이신 차 대협이셨군요. 말씀은 많이 들었습니다.”
차복승은 온화한 웃음을 머금었다.
“허허… 천봉궁에만 머물러 있는 이 늙은이를 알고 있다니 진 장문인의 이목도 대단하구려. 모쪼록 오늘 좋은 만남이 되길 바라겠소.”
두 사람의 인사가 끝나자 그제서야 정소소가 입을 열었다.
“정말 오랜만에 뵙는군요. 일전에는 저희들을 보고도 왜 그냥 가셨어요?”
정소소의 말은 며칠 전에 종남산 중턱에서 우연히 스쳐 지나갔을 때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진산월은 담담한 음성으로 대꾸했다.
“바쁜 일이 있는 것 같길래 굳이 시간을 빼앗고 싶지 않았소.”
“나중에 사실을 알고 조금 서운했었습니다.”
정소소의 말에 금교교와 누산산이 그녀를 힐끔 쳐다보았다. 정소소는 항상 침착하고 냉정해서 좀처럼 남들 앞에서 이런 식의 말을 하는 법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마치 오랫동안 사귄 벗에게 투정을 부리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어딘지 모르게 친근감을 느끼게 했다. 하나 진산월의 표정은 여전히 무심했다.
“그때는 우리도 본파에 일이 있어서 더 시간을 지체하기도 쉽지 않은 상황이었소. 그런데 정 소저가 나를 만나려고 여기까지 찾아온 것은 단순히 그 이야기를 하기 위함이 아니라고 생각하오만.”
정소소의 얼굴에 한 줄기 씁쓸한 미소가 스치고 지나갔다. 진산월이 확실히 변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달았던 것이다. 예전의 그였다면 이렇게 직설적으로 말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물론 우리가 진 장문인을 뵙자고 한 건 한 가지 긴히 물어 볼 말이 있어서예요.”
“그것이 무엇이오?”
정소소는 유난히 반짝이는 눈으로 진산월을 응시했다.
“진 장문인은 오욕백이라는 사람을 알고 있나요?”
“혈수존자 오욕백 말이오?”
“그래요.”
“알고 있소.”
“오욕백이 최근에 종남파로 오지 않았나요?”
정소소의 음성은 여전히 조용하고 차분했으나, 금교교와 누산산 등의 얼굴에는 한 줄기 긴장 어린 기색이 감돌고 있었다. 진산월은 굳이 숨길 필요를 느끼지 않았기에 사실대로 대답했다.
“왔었소.”
누군가가 마른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정소소는 눈도 깜박이지 않고 진산월을 뚫어지게 주시하며 재차 물었다.
“그가 이곳을 찾은 이유를 알 수 있을까요?”
“그는 운자추의 행방을 내가 알고 있지 않을까 하여 나를 찾아온 것이오.”
정소소의 고개가 갸웃거려졌다. 순간적으로 운자추에 대한 일이 머리 속에 명확하게 떠오르지 않았던 것이었다.
“운자추라면… 운문세가의 대공자 말이에요?”
“그렇소. 그는 신목령의 사자였고, 삼 년 전에 나와 약간의 마찰이 있었소.”
그제서야 정소소는 당시의 일이 세세하게 머리 속에 떠올랐다. 진산월은 대수롭지 않은 듯 말했지만 그녀는 당시 운자추와 진산월 사이에 상당히 격렬한 다툼이 있었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 뒤로 운자추의 모습이 강호에 두 번 다시 나타나지 않아서 그의 존재 자체가 사람들의 뇌리에서 희미해졌으나, 당시의 운자추는 누구도 무시하지 못할 실력과 지위를 지닌 인물이었다. 운자추가 신목령의 삼호사자(三號使者)라는 것은 정소소도 알고 있었다. 그녀는 운자추의 실종이 진산월과 어떤 식으로든 관련이 있을 거라고 짐작했으나, 지금 중요한 것은 그 점이 아니었기에 자신이 가장 궁금해하는 질문을 던졌다.
“오욕백은 어떻게 되었지요?”
진산월의 대답은 그녀의 예상 밖이었다.
“사정을 설명하자 알아듣고 떠나갔소.”
정소소는 한동안 진산월을 가만히 쳐다보았으나, 진산월의 얼굴에서 그의 마음속 생각을 알아내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오욕백은 결코 말 몇 마디로 호락호락 물러날 사람이 아니었다. 그와 진산월은 어떤 식으로든 충돌이 있었을 것이다. 하나 진산월은 멀쩡한 모습으로 여기에 앉아 있으니, 경위야 어찌되었건 오욕백이 물러난 것은 사실임이 분명했다.
‘설마 그의 무공이 오욕백마저 물리칠 정도란 말인가?’
정소소는 머리 속으로 여러 가지 생각을 하면서도 겉으로는 침착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혹시 오욕백이 진 장문인과 헤어진 후 어디로 갔는지 아시나요?”
이제는 진산월도 천봉궁의 인물들이 자신을 찾아온 이유가 오욕백 때문임을 알 수 있었다. 천봉궁과 신목령은 천목지약 때문에 서로간의 일에 간섭하지 않는다고 알고 있었는데, 천봉궁의 인물들이 오욕백의 행적을 쫓고 있다니 그들 사이에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지고 있음이 분명했다.
하나 진산월은 그 일에 대해 별다른 호기심은 일어나지 않았다. 지금 그의 최대 관심사는 머지않아 있을 초가보와의 싸움을 어떻게 승리로 이끄느냐 하는 것이었다. 그 외의 다른 어떠한 것도 그에게는 관심 밖의 일에 불과했다.
“알지 못하오.”
그의 짤막하면서도 분명한 대답에 천봉궁 사람들의 얼굴에 희미한 실망의 빛이 떠올랐다. 모두들 그가 거짓을 말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나 막상 오욕백의 행적을 이곳에서 놓치게 되자 그들의 마음속에는 짙은 아쉬움이 자리할 수밖에 없었다.
정소소는 잔뜩 품었던 기대가 무위로 돌아갔는데도 남들처럼 허탈한 마음은 들지 않았다. 오욕백이 아직 서안 일대를 떠나지 않았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의 행방을 찾는 것도 아주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이제 용건이 모두 끝났으니 이곳에 더 머물러 있을 이유는 없었다. 그런데도 정소소는 선뜻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하지 않았다. 대신 그녀는 깊은 눈빛으로 진산월을 응시했다.
“개인적으로 진 장문인과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데 시간을 내어주실 수 있으신가요?”
그녀의 말은 모두에게 당혹감과 의아함을 선사했다. 그녀가 진산월과의 독대(獨對)를 원하자 종남파의 고수들은 그녀의 의중을 몰라 어리둥절했고, 천봉궁의 인물들은 그들대로 정소소의 뜻하지 않은 말에 당황한 표정이었다. 하나 진산월은 의외로 순순히 그녀의 제의를 받아들였다.
“그렇게 하리다. 지산, 다른 손님들을 태화각으로 모시도록 해라.”
소지산은 그의 지시대로 천봉궁의 인물들을 처음에 그들이 들어왔던 태화각으로 안내했다. 다른 사람들이 순순히 따라가는 데 반해 누산산은 무언가 할말이 있는지 몇 번이나 입을 열려고 했으나, 금교교가 반 강제적으로 끌고 가는 바람에 입도 뻥긋 못하고 끌려가고 말았다.
낙일방까지 나가자 실내에는 진산월과 정소소, 두 사람만이 남게 되었다. 별로 넓지 않은 공간에 젊은 남녀 두 사람이 동그마니 앉아 있으니 남들이 볼 때는 무언가 야릇한 느낌을 받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하나 진산월이나 정소소나 전혀 표정의 변화가 없어 담담한 모습이었다.
주위가 조용해지자 정소소는 그제서야 실내를 찬찬히 둘러보았다.
“참 아늑한 곳이군요. 화려하지 않으면서도 은은한 멋을 풍기고 있어 주인의 심성을 나타내는 것 같아요.”
“이곳은 원래 선사(先師)의 거처이셨소. 살내장식이나 가구들도 모두 그분이 직접 꾸미신 거요.”
“그렇군요. 직접 뵙 적은 없지만 어떤 분이셨는지 알 수 있을 것 같군요.”
갑자기 정소소는 진산월의 얼굴을 정면으로 쳐다보았다. 그녀의 별빛처럼 반짝이는 눈에는 여러 가지 색깔의 빛이 담겨 있어 속내를 짐작하기 어려웠다. 그녀는 그런 눈으로 진산월을 한참이나 응시하더니 조용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사실 그동안 진 장문인의 행방을 무척 찾았어요. 너무 오래 소식이 없어서 변(變)을 당한 것이 아닌가 걱정했지만, 이렇게 다시 만나고 보니 그동안의 걱정이 모두 부질없는 것이 되고 말았군요.”
그녀의 음성은 그윽했고, 눈빛도 부드러워서 모르는 사람이 보았다면 그녀가 연인(戀人)에게 밀어(蜜語)를 속삭이는 것으로 착각했을지도 몰랐다. 다행히 진산월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담담한 음성으로 대꾸할 수 있었다.
“정 소저께서 그토록 나를 찾았다니 뜻밖이오. 불민한 이 사람에게 특별히 볼일이라도 있으셨소?”
하나 정소소의 다음 말은 냉정함을 유지하고 있던 진산월의 마음을 송두리째 뒤흔들어 놓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진 장문인은 귀 사매의 소식이 궁금하지 않으세요?”
진산월의 얼굴은 삽시간에 딱딱하게 굳어져 흡사 석상(石像)을 보는 것 같았다.
사매… 사매라…
왜 궁금하지 않겠는가? 지난 세월 동안 단 한시도 그녀를 잊어본 적이 없지 않은가?
지금 이곳에서 그녀에 대한 말을 듣자 그토록 강철처럼 단단하던 진산월의 마음은 세찬 격랑을 만난 작은 배처럼 쉬임 없이 흔들렸고, 머리 속은 번갯불에 강타당한 듯 일시지간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았다.
진산월은 냉정해지려고 노력했다. 그가 마음속의 흔들림을 가라앉히고 다시 평소의 모습으로 되돌아온 것은 순식간의 일이었으나, 진산월에게는 다른 어떤 시간보다 긴 시간이 흐른 것처럼 여겨졌다. 문득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니 식은땀이 흥건히 고여 있었다. 진산월은 땀에 젖은 손바닥을 정소소가 눈치채지 않게 옷자락에 닦았다.
“정 소저는 내 사매의 소식을 알고 있소?”
다행히 목소리가 떨려 나오지는 않았다. 정소소는 그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있었다.
“물론 알고 있어요.”
“정 소저가 나를 따로 보자고 한 이유가 내 사매의 소식을 알려주기 위해서였소?”
“그래요.”
“왜 내게 그런 친절을 베풀려는 거요?”
뜻밖에도 정소소는 가느다란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그동안 줄곧 내가 본의 아니게 두 사람 사이를 갈라놓는데 일조(一助)를 했다는 생각에 마음이 불안했어요. 그래서 진 장문인에게 귀 사매의 일을 알려 주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도리라고 생각했어요.”
“그건 정 소저의 탓이 아니오.”
“나도 알아요. 하지만 진 장문인과 임 소저를 생각하면 늘 마음이 무거웠어요.”
진산월은 한동안 그녀를 쳐다보면서도 좀처럼 입을 열지 않았다. 사매의 소식을 물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그 후에 듣게 될 말들이 두려워졌다. 마음 같아서는 이대로 자리에서 일어나 훌쩍 어디론가로 떠나고 싶었다. 자신은 사매와의 이년지약을 지키지 못했다. 그것은 어떠한 변명으로도 핑계를 댈 수 없는 일이었다. 그동안 사매에게는 과연 무슨 일들이 일어났을까?
정소소는 침울할 정도로 무겁게 굳어 있는 진산월의 얼굴을 가만히 쳐다보다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귀 사매는 현재 구궁보에 있어요.”
진산월은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떼었다.
“사매는 무사하오?”
“구음향에 대한 것이라면 그녀는 완벽하게 그 후유증에서 벗어났어요. 작년부터 구궁보의 신공을 익히면서 곧 완쾌되었다고 하더군요.”
일단 입을 열자 다음 질문을 하기는 한층 수월해졌다.
“그녀는 지금 어떻소?”
“잘 지내고 있어요. 구궁보의 여러 사람들이 그녀를 무척 소중하게 생각한다고 하더군요.”
“그녀를 본 적이 있소?”
정소소는 고개를 끄덕였다.
“반 년 전에 구궁보에 간 적이 있어요. 그때 임 소저를 잠깐 만났는데, 건강상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하더군요.”
진산월은 다음 질문을 던지려다 입을 다물었다. 그의 마음은 지금 들은 사실만으로 만족하고 싶었다. 더 이상의 자세한 소식은 듣지 않는 게 나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하나 그의 그런 심정을 비웃기라도 하듯 정소소의 음성이 들려왔다.
“그녀는 모용 공자와 무척 친밀한 사이가 되었어요. 구궁보 사람들의 말로는 모용 공자가 그녀에게 쏟는 관심이 각별하다고 하더군요.”
진산월은 말없이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몇 차례 힘주어 손을 움켜쥐자 그제서야 떨림이 멎었다. 진산월이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자 정소소는 다시 가느다란 한숨을 내쉬었다.
“그동안 모용 공자는 임 소저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 상당한 정성을 기울였다고 해요. 돌아오는 중추절(仲秋節)에 모용 공자는 서장의 제일인자인 야율척과 삼 년 전에 못다 이룬 승부를 겨루기로 했어요. 그 승부에서 이길 경우, 모용 공자는 임 소저에게 정식으로 청혼(請婚)할 거라고 하더군요.”
“…!”
진산월의 표정은 의외로 담담했다. 정소소는 그가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을 거라고 짐작했으나, 진산월의 얼굴에서는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정소소는 두 사람이 아주 각별한 사이임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진산월이 사매의 소식을 듣고도 별반 표정이 없는 것에 잠시 묘한 기분이 되었다. 마치 자신이 임영옥이 되기라도 한 양 왠지 모르게 서운하고 아쉬운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진 장문인께서 임 소저를 찾아가시려면 아마도 그 전에 가야할 거라고 생각되는군요.”
그녀의 이 말은 사실 불필요한 것이었다. 진산월이 앞으로 어떻게 행동하느냐 하는 것은 전적으로 진산월 자신이 판단해야 할 문제였다. 그녀도 이 점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으나, 무심한 진산월의 모습을 보고는 자신도 모르게 충동적인 말이 튀어나왔던 것이다. 진산월은 그녀를 향해 정중하게 포권을 했다.
“사매의 일을 알려 주어 고맙소.”
정소소의 얼굴에 한 줄기 씁쓸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의 사례를 받기 위해 한 일이 아니지 않은가?
“내가 진 장문인을 만나고자 한 것은 그 일 때문이었어요. 이제 저는 이만 가 보아야겠군요.”
그녀는 더 이상 머무르고 싶은 생각이 없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진산월은 그녀를 제지하지 않았다. 태평각을 나서는 정소소의 마음은 이곳에 올 때와는 달리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하나 그녀는 자신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진산월의 무표정한 얼굴 뒤에 얼마나 깊고 큰 아픔이 도사리고 있는지를 짐작조차 하지 못할 것이다.
정소소마저 나가자 대청은 그 자신 외에는 아무도 없는 텅 빈 공간이 되었다. 진산월은 허공의 한 점을 응시한 채 고요한 침묵속에 잠겨 있었다. 정소소에게서 사매의 소식을 들었을 때 진산월의 심정은 표현할 수 없는 고통과 슬픔, 그리고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애절함이 혼합된 것이었다. 다만 그런 깊은 감정의 흐름은 그의 마음 가장 깊숙한 바닥에서 흐르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래서 겉으로는 누구도 그의 마음속 흐름을 알아차릴 수 없었다.
마침내 사매의 소식을 알게 되었다. 그녀는 무사했고, 건강을 회복했다. 그 외의 나머지 일은 굳이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기다려, 사매…’
진산월은 흡사 눈앞에 임영옥이 있는 듯 허공의 한 점을 무서운 눈으로 노려보았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반드시 데리고 올 테니 조금만 더 기다려줘.’
지금의 그로서는 이 말밖에는 할말이 없었다. 진산월은 허공을 응시한 채 언제까지고 꼼짝도 않고 앉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