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15권 서안지란(西安之亂)편 : 10화
제154장. 암동혈투(暗洞血鬪)
지하뇌옥 안은 여전히 악취와 비린내가 짙게 풍기고 있었다. 수십 개의 석실들이 늘어선 복도도 그대로였고, 석실들 위아래로 작은 구멍이 뚫려 있는 모습도 변한 것이 없었다. 진산월은 가장 가까운 석실로 다가가 안을 들여다 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몇 개의 석실을 봐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다 네 번째 석실에서 처음으로 사람을 발견했다. 석실 안의 사람은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있다가 진산월의 시선을 느낀 듯 문득 고개를 쳐들었다. 그러다 진산월과 눈을 마주치자 화들짝 놀라며 바닥에서 벌떡 일어났다. 진산월 또한 그를 보고 황망한 심정을 가눌 수 없었다. 뜻밖에도 그 사람은 초가보의 공격 직전에 종남파를 떠났던 지일환이었던 것이다. 진산월이 비록 두건으로 얼굴을 반이나 가리고 있었지만 지일환은 단번에 그를 알아본 듯 표정이 여러 차례 변하더니 이윽고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진 장문인….”
진산월은 이내 몸을 돌려 그곳을 벗어나려 했다. 그러자 지일환이 다급한 음성으로 그를 불렀다.
“내가 어떻게 다시 이곳에 갇히게 되었는지 알고 싶지 않소?”
진산월은 걸음을 멈추었다. 지일환은 모처럼 찾아온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는 듯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이곳에서 나를 구해 주면 진 장문인께 아주 귀중한 정보를 알려드리겠소.”
진산월의 시선이 자신에게 향하자 지일환은 씁쓸하게 웃었다.
“나도 내가 얼마나 염치없는 짓을 했는지 알고 있소. 하지만 나 같이 무공도 보잘 것 없는 자가 강호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소. 불나방 같은 짓인 줄 알면서도 조금이라도 더 가능성이 많은 쪽을 쫓아갈 수밖에.”
“…!”
“나 같은 하루살이의 삶이 어떤 건지 진 장문인 같은 사람은 결코 이해하지 못할 거요.”
진산월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두건 위로 내보이는 그의 시선은 담담하기 그지없어 아무런 감정도 읽어낼 수 없었다. 지일환이 암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인 채 무거운 한숨을 내쉬고 있을 때였다.
철컹!
나직한 음향과 함께 철문이 열렸다. 지일환은 떨리는 눈으로 고개를 쳐들었다. 철문 밖에 진산월이 우뚝 선 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오지 않고 뭐 하는 거요?”
지일환의 얼굴에 한 줄기 격동의 빛이 떠올랐다. 자신이 그토록 후안무치한 짓을 저질렀는데도 이 종남파의 젊은 장문인은 다시 한 번 자신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밀었던 것이다. 지일환은 눈이 부신 듯 몇 차례나 깜박거리다가 천천히 철문을 벗어났다. 그는 진산월을 항해 그로서는 처음 본다 싶을 정도로 정중하게 포권을 했다.
“구명지은(救命之恩)에 감사드리오.”
일전에 보여 주었던 그 느물느물한 행동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고마워할 필요 없소. 단순한 거래일 뿐이니까.”
진산월이 무뚝뚝한 음성으로 말하자, 지일환의 얼굴에 또 다시 쓴웃음이 떠올랐다.
“세상의 어떤 거래라도 목숨보다 소중한 것은 없소.”
“…!”
“그럼 나도 진 장문인과의 약속을 지키겠소. 내가 다시 이곳에 갇히게 된 이유는 초가보의 총관인 악종기가 나를 이존휘에게 넘겼기 때문이오.”
진산월의 눈에 번쩍하는 섬광이 피었다가 사라졌다.
“그게 사실이오?”
“그렇소. 내가 종남파의 작전 계획을 초가보에 전했다는 건 진 장문인도 알 거요. 핑계 같지만 나는 그저 어떤 식으로든 이씨세가의 손길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 몸을 의탁하고 싶었을 뿐이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건 스스로 호랑이 아가리로 들어간 격이었소.”
지일환은 이를 부드득 갈았다.
“악종기는 내게서 종남파의 작전 계획을 전해 듣고는 고맙다며 술 한 잔을 내밀었소. 별다른 의심 없이 그걸 마신 나는 곧 정신을 잃고 말았소. 다시 깨어나 보니 이미 이씨세가에 와 있었소.”
“악종기가 당신을 이존휘에게 넘겼다는 것은 어떻게 알았소?”
“내가 정신을 차린 것은 나를 실은 마차가 막 이씨세가의 정문을 통과하려는 때였소. 계속 정신을 잃은 척 누워 있었는데, 마부와 문지기가 대화하는 소리가 들려왔소. 악 총관이 이 공자(李公子)께 보내는 선물 이니 잘 간수하라고 하더군.”
지일환은 두 팔을 펼쳐 보이며 힘없이 웃었다.
“그 후로 도망갈 기회를 노렸으나 결국 실패하고 다시 갇히는 신세가 되고 말았소.”
진산월은 묵묵히 그의 말을 듣고 있다가 그의 맥문을 잡았다. 지일환은 그의 의도를 알았는지 도리질을 했다.
“나는 무공을 제압당한 게 아니니 진 장문인은 수고할 필요 없소.”
“무공을 쓸 수 없는 게 아니었소?”
“무공이 아니라 그놈의 술 때문이오. 술에 무얼 탔는지 그 뒤로 도저히 단 한줌의 내공(內功)도 끌어올릴 수 없었소.”
독에 중독되었다면 진산월로서도 달리 손을 써 볼 방도가 없었다. 진산월은 악종기가 이존휘와 내통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상 이곳에 더 머물러 있을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더 지체했다가 발각된다면 골치 아픈 일이 벌어질지 몰랐다.
“나갑시다. 내가 앞장서겠소.”
한데 의당 반색을 하고 따라올 줄 알았던 지일환이 웬일인지 머뭇거리며 그 자리에 서성거리고 있는 것이다. 진산월은 의아한 생각이 들어 물었다.
“왜 그러고 있느 거요?”
지일환은 잠시 망설이더니 무언가를 결심한 듯 눈을 빛내며 진산월을 쳐다 보았다.
“진 장문인께 한 가지 더 알려드릴 게 있소.”
“거래라면 이미 끝난 것으로 아는데.”
지일환은 고소를 머금으며 고개를 저었다.
“이건 두 번이나 목숨을 구원받은 데 대한 작은 보답일 뿐이오. 아니면 그냥 거래에 대한 덤이라고 생각해도 좋소.”
지일환이 이렇게까지 말하자 진산월도 흥미가 일어났다.
“말하시오.”
지일환은 조심스런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진 장문인은 혹시 강일비(姜一飛)란 사람을 아시오?”
“강일비!”
나직하게 중얼거리던 진산월의 눈빛에 갑자기 강한 신광(神光)이 어리기 시작했다.
“운중안(雲中雁) 강일비 말이오?”
“그렇소. 바로 귀파의 전대 장문인이었던 임장홍 대협의 사형인 그 운중안 말이오.”
운중안 강일비! 실로 너무나 오랜만에 들어 보는 이름이었다. 진산월조차도 처음에는 선뜻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오랫동안 잊혀진 이름이었다. 하나 이십 년 전만 해도 섬서성에서 운중안 강일비를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그는 종남파가 모처럼 배출한 무학(武學)의 기재(奇才)로, 종남파의 부흥을 책임질 인물로 손꼽힌 인물이었다. 그는 비단 무공의 재질이 뛰어날 뿐 아니라 인물됨이 임풍옥수(臨風玉樹) 같아서 모든 사람들의 선망의 대상이기도 했다. 많은 종남파의 선배고수들이 얼마나 그를 아끼고 사랑했는지 모른다. 그런 과중한 주위의 기대 때문이었을까? 종남파가 소림사에서 치욕을 당한 기산취악 이후 그의 모습은 홀연히 종남산에서 사라져 버렸다. 아무도 그가 갑자기 사라진 진실한 이유를 알지 못했다. 하나 언제부터인가 그가 이미 구대문파에서도 쫓겨난 종남파를 떠맡기 싫어 도망쳤다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그 소문의 진위(眞僞)를 확인할 겨를도 없이 종남파는 급속도로 몰락의 길을 걸어갔다. 그 후로 강일비를 보았다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었다. 강일비는 운중안이라는 별호 그대로 구름 속으로 사라진 한 마리 기러기처럼 모습을 감추어 버린 것이다.
진산월도 사부인 임장홍에게서 강일비에 대한 말을 몇 번 들었을 뿐이었다. 강일비를 이야기할 때마다 임장홍의 얼굴은 아련한 빛으로 물들었고, 눈가에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아쉬움가 안타까움이 감돌고 있었다.
- 강 사형(姜師兄)은 결코 책임이 무서워 회피할 사람이 아니다. 아마 필연적인 다른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그분이 장문인이 되셨다면 본파가 이런 꼴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 말을 할 때의 임장홍의 얼굴에 떠올라 있던 서글픈 표정을 진산월은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일환의 입에서 그 이름을 다시 듣게 될 줄이야….
지일환은 무거운 표정으로 생각에 잠겨 있는 진산월을 응시하며 신중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이곳에 갇혀 있는 수인(囚人)들 중 유난히 늙고 꾀죄죄한 노인이 한 사람 있소. 언제부터 이곳에 있었는지 모르지만 일전에 내가 잡혀 왔을 때도, 그리고 이번에 다시 갇힐 때도 그 노인은 이곳에 먼저 와 있었소.”
진산월의 뇌리에 문득 일전에 보았던 흉터가 잔뜩 나 있는 험악한 인상의 늙은이가 떠올랐다. 그렇다면 그 노인이 강일비란 말인가? 지일환은 진산월의 의중을 짐작하고 있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진 장문인도 그 노인을 본 모양이구려. 하지만 그 노인은 강일비가 아니오. 강일비는 나도 오래 전에 한번 본 적이 있소. 그때 나는 어린 소년이었는데, 정말 같은 남자가 보아도 반할 정도로 멋진 인물이어서 지금까지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지. 그가 살아 있다면 아마 오십대 초반 정도 되었을 거요.”
진산월은 내심 실망을 금치 못했다.
“그런데 왜 강일비의 이야기를 꺼낸 거요?”
“내 말을 들어 보시오. 그 노인은 하루의 거의 대부분을 정신을 잃고 누워 있는 사람이오. 그런데 가끔 며칠에 한번씩 그가 의식을 되찾을 때가 있소. 그때마다 노인이 누군가의 이름을 불렀는데….”
“그게 바로 강일비란 말이오?”
“그렇소. 노인의 말은 언제나 똑같았소. ‘일비야… 미안하구나, 일비야… 정말 미안하구나….’ 언제나 꼭두각시처럼 이 말만을 되풀이하고 있었소.”
진산월의 마음속에 다시 한 가닥의 기대가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이십 년이나 세월이 지난 지금 강일비를 다시 찾는다고 특별히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소문대로 그가 스스로 종남파를 등진 것이라면 찾는다는 것 자체가 의미 없는 일이었고, 설사 다른 사정이 있었다 해도 이십 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연락 한 번 못할 정도면 다시 돌아오기는 무망(無望)한 일이었다. 그런데도 그가 가슴 설레어 하는 것은 순전히 사부인 임장홍의 서글픈 얼굴 때문이었다. 만에 하나라도 강일비가 다시 종남파로 돌아올 수만 있다면 지하에 계신 사부가 얼마나 기뻐할 것인가? 설사 돌아오지 못할지라도 그의 행방을 수습하는 것만으로도 임장홍은 크게 기꺼워할 것이다. 사부의 얼굴에 한 조각의 웃음이라도 되찾게 할 수만 있다면 진산월은 어떤 일이라도 기꺼이 할 수 있었다.
꽝!
벼락 치는 듯한 음향과 함께 철문이 고리째 떨어져 나갔다. 진산월은 철문 안으로 성큼 걸어 들어갔다. 지일환이 갇혀 있던 석실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악취가 코를 찔렀으나 그는 눈썹 하나 까닥하지 않고 바닥에 누워 있는 늙은이를 바라보았다. 백발 성성한 그 늙은이는 새우처럼 몸을 웅크린 채 잠들어 있었다. 철문이 쓰러지는 커다란 음향도 그의 잠을 깨우지 못한 모양이었다. 얼굴의 여기저기에 흉터가 나 있어 험상궂게 생긴 노인의 주름진 얼굴에는 오랜 동안의 수감(收監) 생활로 인한 피폐함이 여실히 드러나 있었다. 진산월은 번쩍 노인을 안아들었다. 노인의 몸은 생각보다 훨씬 가벼워서 마치 어린아이를 드는 것 같았다. 노인의 몸을 안아들자 조금 전보다 훨씬 심한 악취가 풍겨 왔으나 진산월은 아랑곳하지 않고 석실을 빠져 나왔다. 뇌옥의 입구에서 서성이고 있던 지일환이 바짝 긴장한 표정으로 다가왔다.
“밖에 사람들이 와 있는 모양이오. 옷자락 펄럭이는 소리가 계속 들려왔소.”
진산월은 잠시 귀를 기울이다가 지일환의 말이 사실임을 알았다. 단지 지일환이 미처 모른 것은 그들의 수가 십여 명이며, 하나같이 숨소리를 죽일 수 있는 무공의 소유자들이라는 점뿐이었다. 진산월은 잠시 노인과 지일환을 바라보았다. 한 사람이라면 모르지만 무공도 펼칠 수 없는 사람을 둘씩이나 데리고 저런 고수들이 도사리고 있는 곳으로 나갈 수는 없었다. 적어도 팔 하나는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어야 검이라도 휘두르지 않겠는가? 지일환도 그 점을 알았는지 진산월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 노인을 내게 주시오.”
진산월은 지일환의 의중을 몰랐으나 일단 그에게 노인을 맡겼다. 지일환은 자신의 상의를 벗더니 노인을 업은 다음 벗은 상의로 노인과 자신의 몸을 단단히 동여맸다. 그런 다음 비장한 표정으로 진산월을 향해 말했다.
“이 노인은 내가 반드시 무사히 데리고 나가겠소. 진 장문인은 내가 암습을 당하지 않도록만 해주시오.”
진산월은 잠시 그를 쳐다보더니 이내 쓰러져 있는 철문으로 다가갔다. 이어 가볍게 검을 휘두르자 철문의 한 조각이 두부처럼 잘려 나갔다. 지일환은 그 광경을 보고 새삼 진산월의 무공에 경탄을 금치 못했다. 절정에 이른 검객이라면 물론 철판을 자를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처럼 아무런 힘도 들이지 않은 것처럼 수월하게 자르지는 못할 것이다. 더구나 철문의 두께는 여타 철판과 비교할 수 없이 두꺼운 것이었다. 진산월은 잘라낸 철판을 지일환에게 내밀었다.
“이걸 가슴 앞에 대고 있으시오. 치명적인 상처는 막을 수 있을 거요.”
지일환은 움직이는 데 거치적거리기만 하는 철판을 왜 굳이 가슴에 대라고 하는지 그 이유를 정확히 몰랐으나, 순순히 그의 말대로 철판을 자신의 앞가슴에 묶었다.
“내 뒤에서 이 장 이상 떨어지지 마시오. 그러면 아무도 당신을 위해(危害) 하지 못할 거요.”
담담한 음성이었으나, 그 음성을 듣자 지일환은 갑자기 마음 한구석이 든든해졌다. 적일 때는 한없이 무섭지만, 같은 편일 때의 진산월은 더할 나위 없이 믿음직한 동료였다. 한때나마 이런 사람과 등을 지려 했다고 생각하니 지일환은 공연히 얼굴이 뜨뜻해져 왔다. 진산월은 뇌옥의 입구인 석문 앞에 우뚝 선 채 공력을 운기해 석문 바깥의 상황을 살폈다. 석문 밖에는 적어도 열 명이 넘는 고수들이 숨을 죽인 채 잠복해 있었다. 그들 중 몇 명은 그로서도 기척을 알아내기 힘들 정도로 고강한 내공을 지닌 인물들이었다.
‘모두 열셋, 그중 세 명은 절정에 육박한 고수들이다.’
진산월은 막상 상대의 세력을 알게 되자 오히려 마음이 편안해졌다. 진산월은 자신의 얼굴을 가린 두건이 단단하게 매어져 있는지 확인하고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의 용영검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스스슥!
용영검은 순식간에 석문의 네 모퉁이를 잘랐다. 다음 순간,
“자, 이제 나갑시다.”
진산월은 지일환에게 전음을 보냄과 동시에 석문을 향해 왼손을 부드럽게 내갈겼다.
펑!
그가 뻗어낸 장력에 격중된 석문이 통째로 뜯겨 나가며 원래의 형상을 유지한 채 앞으로 쏘아져 갔다. 진산월은 한 손으로 지일환의 팔을 움켜잡은 채 날아가는 석문의 뒤를 바짝 따라붙었다.
“앗?”
“피해라!”
석문 뒤에서 그가 나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은 석문이 통째로 날아오자 당황한 외침을 토해내며 사방으로 몸을 피했다. 일 장에 가까운 높이에 두께만도 석 자에 달하는 석문이 날아오는 위세는 가히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더구나 석문 밖은 그리 넓지 않은 통로여서 피하는 것도 쉽지만은 않았다. 그때 그들 중 누군가가 석문 뒤에 바짝 따라가는 진산월을 발견하고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석문 뒤다! 석문을 파괴해라!”
그러자 몇몇 사람들이 석문을 향해 일제히 장력을 날리기 시작했다.
꽈르릉!
그들의 장세(掌勢)가 서로 합치며 노도와 같은 기세로 날아갔다. 한데 그들의 장세가 채 석문에 도달하기도 전에 석문이 먼저 터져 나갔다.
꽝!
부서진 돌 조각의 파편들이 통로 안을 자욱하게 뒤덮어 버렸다. 석문이 거대한 만큼이나 그 잔해 또한 엄청나서 주위는 그야말로 먼지 외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계속 약은 수를 쓰는구나!”
중인들 중 한 명이 이를 부드득 갈아붙인 채 날아오는 돌 조각에 아랑곳하지 않고 달려들었다. 그가 막 파편의 폭풍 속으로 들어서려는 순간, 갑자기 시퍼런 검광이 물밀 듯 닥쳐왔다.
“으헛!”
그는 그야말로 심장이 목구멍을 튀어나올 정도로 놀라 황급히 몸을 비틀었다. 하나 검광이 날아드는 속도가 워낙 빨라서 완벽하게 피할 수 없었다.
팟!
“크윽!”
그는 오른쪽 상반신이 피투성이가 된 채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그 광경을 본 칠팔 명의 고수들이 이를 갈아붙이며 차례로 자욱한 먼지 속으로 뛰어들었다. 하나 그들 중 대부분은 이내 튕겨지듯 뒤로 물러났다. 그들은 모두 일검(一劍) 이상 씩을 맞았는데, 그중 한 명은 목덜미를 검에 관통당해 먼지 속을 벗어나자마자 그대로 바닥에 쓰러져 버렸다.
“밥통 같은 놈들! 모두 물러서라!”
벼락 같은 호통이 터져 나오며 세 개의 인영이 허공을 훌훌 날아 장내로 뛰어들었다. 그들은 제각기 회의와 황의, 남의를 입은 중년인들이었는데, 하나같이 두 눈에서 신광을 줄기줄기 뿜어내고 있었다. 그들 중 회의중년인이 소맷자락을 떨치자 그토록 자욱하게 주위를 뒤덮었던 먼지들이 금세 가라앉으며 장내의 광경이 일목요연하게 드러났다.
“이런 빌어먹을….”
회의중년인이 이를 부드득 갈아붙였다. 먼지가 사라진 장내에는 두 구의 시신이 나뒹굴고 있을 뿐 진산월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 시신들은 제일 처음 먼지 속을 뛰어들었던 장한들이었다. 세 사람이 황급히 주위를 돌아보니 진산월은 어느새 지일환의 손을 잡은 채 통로를 거의 빠져 나가고 있었다. 진산월은 교묘하게 석문을 파괴하여 그 펴편 속으로 몸을 숨긴 다음 막상 적들이 먼지를 뚫고 다가오자 자신은 오히려 먼지 밖으로 몸을 날렸던 것이다.
“내가 네놈을 찢어 죽이지 않으면 성(姓)을 갈겠다.”
회의중년인이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며 진산월을 향해 신형을 날렸다. 그의 몸은 회색 선을 그리며 무서운 속도로 진산월의 뒤를 쫓아갔다.
“셋째, 조심해라! 상대는 검도의 고수다!”
황의인이 혹시라도 그가 실수할까 봐 황급히 그의 뒤를 따라갔다. 그의 신법은 회의중년인에 못지않은 것이어서 마치 누가 빠른지 신법 경쟁이라도 하는 것 같았다. 남의인은 석문이 무너진 뇌옥 입구를 슬쩍 바라보더니 남아 있는 중인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저자가 누구를 데려갔는지 확인해 봐라!”
“예, 호법(護法)님.”
서너 사람이 재빨리 뇌옥 안으로 뛰어들어가더니 이내 그중 한 사람이 다시 튀어나왔다.
“사호(四號)와 육호(六號) 석실에 있던 자들이 없어졌습니다.”
“사호라면 지일환이라는 도둑놈이고, 육호라면….”
무언가를 중얼거리던 남의인의 안색이 가볍게 변했다. 그는 재빨리 말을 꺼냈던 장한을 향해 소리쳤다.
“너는 지금 즉시 삼공자(三公子)께 가서 이 사실을 알려라.”
“알겠습니다.”
남의인은 주위에 서 있던 다른 장한들을 향해 말했다.
“너희들은 이곳을 수습하고 깨끗하게 뒷정리를 해라. 혹시라도 하객(賀客)들이 이상함을 느끼고 근처에 접근하더라도 일체 들여보내서는 안 된다.”
“예!”
남의인은 다시 한차례 주위를 둘러보다가 부서진 석문과 널브러진 시체들이 눈에 들어오자 인상을 찡그렸다.
“난장판이로군. 이곳에는 동패천(東覇天)이 직접 설치한 오로관(五路關)이 설치되어 있었는데, 대체 그 녀석의 정체가 무엇이길래 이곳에 뛰어들어 죄수를 빼내 갈 수 있단 말인가?”
남의인은 잠시 상념에 잠겨 있다 퍼뜩 정신을 차리고 회의인과 황의인이 사라진 곳으로 몸을 날렸다. 얼마 가지 않아 제심전의 입구가 보이자 그는 좀 더 공격을 끌어올려 단숨에 입구 밖으로 뛰쳐나왔다. 짙은 어둠에 싸인 신선한 공기가 그를 반겼다.
‘이상하군.’
날카로운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던 남의인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의당 이 부근에서 뇌옥을 탈출한 인물과 격전을 벌이고 있을 줄 알았건만 아무도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둘째와 셋째의 실력으로 거추장스러운 짐을 둘이나 달고 있는 놈을 놓쳤을 리는 없는데….’
남의인은 좀 더 안력을 높여 근처의 지형지물을 살폈다. 곧 그의 눈에 무언가가 들어왔다. 멀지 않은 나무 아래에 희끗한 것이 쓰러져 있는 것이다. 그것이 사람의 옷자락임을 확인한 남의인은 신형을 날려 나무 아래로 날아갔다. 그 옷자락으로 다가가는 남의인의 눈이 어느 순간부터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 옷자락은 짙은 회의였다. 떨리는 손으로 옷을 입은 인영의 몸을 뒤집어 본 남의인의 입에서 자신도 모르게 짓눌린 듯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셋째야….”
회의인은 이미 싸늘한 시신이 되어 있었다. 찢어질 듯 두 눈을 부릅뜬 채 굳어 있는 회의인의 얼굴은 그가 죽기 전에 얼마나 놀랐는지를 여실히 보여 주고 있었다. 회의인의 사인(死因)은 한눈에 보아도 알 수 있었다. 회의인의 가슴팍 부근이 처참하게 난도질된 채 질펀한 피를 흘리고 있는 것이다. 남의인은 회의인의 죽음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한동안 멍하니 그의 시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또 다른 무언가를 발견하고 주춤 앞으로 걸어나갔다. 회의인이 쓰러진 곳에서 오 장쯤 떨어진 풀밭에 다시 인영 하나가 누워 있었다.
“제발… 제발….”
아니길 바라면서도 남의인의 두 눈에는 짙은 불안감이 요동치고 있었다. 마침내 풀밭에 쓰러져 있는 인영을 보자 남의인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질끈 눈을 감았다. 그 인영은 희의인을 바로 뒤따라갔던 황의인이었던 것이다. 갑작스런 두 아우들의 잇단 죽음을 목격하자 남의인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아우들의 실력을 익히 알고 있는 그로서는 자신이 잠깐 지체했던 그 짧은 순간에 아우들이 싸늘한 주검이 되어 버렸다는 것이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대체 누가 태행산(太行山) 일대를 제왕처럼 주름잡고 있는 태행삼존(太行三尊) 북리형제(北里兄弟) 중 두 사람을 단숨에 죽일 수 있단 말인가? 차가운 밤바람이 불어오는 것도 모르고 남의인은 넋을 잃은 사람처럼 두 형제의 시신 앞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때 누군가의 음성이 들려왔다.
“정말 무서운 검기(劍氣)로군. 단숨에 사혈(死穴)을 끊어 놓았어.”
남의인이 퍼뜩 정신을 차려 보니 한 사람이 아우들의 시신을 살펴보고 있었다. 그는 새하얀 백의를 입은 준수한 청년이었다. 남의인은 백의청년에게 다가갔다.
“그게 무슨 말이오?”
백의청년은 황의인의 시신을 가리켰다.
“보시오. 그자는 단 일검으로 정확히 천돌혈(天突穴)을 찔렀소. 북리 대협은 어떻게든 피하려고 했겠지만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을 거요.”
남의인은 안력을 돋구어 보니 과연 황의인의 천돌혈에는 깨알만한 작은 구멍이 뚫려 있었다. 회의인의 유혈 낭자한 시신에 비하면 한결 나은 모습이었으나, 작은 구멍에서 흘러나와 있는 한 줄기 핏물은 오히려 무언지 모를 섬뜩함을 전해 주고 있었다.
“내 아우가 상대의 일검도 피하지 못했다는 건 믿지 못하겠소.”
남의인의 말에 백의청년은 고개를 저었다.
“피할 수 없었을 거요. 상대는 단 일검을 찔러 왔지만 그 안에는 무서운 변화가 숨겨져 있어 어떻게 피해야 할지 몰랐을 테니까.”
남의인은 백의청년이 자신의 동생을 너무 무시한다고 생각했는지 안색을 잔뜩 찌푸렸다.
“뭘 보고 그렇게 생각하는 거요?”
백의청년은 옆에 있는 회의인의 시신을 가리켰다.
“셋째 아우 분의 가슴에 난 상처를 보시오. 저건 무림에서도 좀처럼 찾아보기 어려운 화려함의 극치를 담은 검법에 당한 흔적이오.”
남의인은 또한 회의인의 가슴을 보자마자 그런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크게 부인하지 않았다.
“그게 둘째 아우의 죽음과 무슨 관련이 있소?”
“둘째 아우 분은 틀림없이 셋째 아우 분이 상대의 변화무쌍한 검에 제대로 반격도 해보지 못하고 쓰러지는 광경을 목격했을 거요. 그래서 상대가 자신을 향해 일검을 찔러오자 그 검이 언제 어떻게 변할지 몰라 당황했던 게 분명하오.”
“…!”
“하나 상대는 영악스럽게도 아무런 변화도 없는 빠른 쾌검을 구사했을 뿐이오. 결국 둘째 아우 분은 상대의 잔꾀에 속아 제대로 대항도 해보지 못하고 당하고 만 거요.”
백의청년의 말은 마치 자신이 그 현장에 있었던 것처럼 사실적으로 들렸기 때문에 남의인도 일시지간 불복(不服)하지 못했다. 드러난 정황으로 보아도 백의청년의 말이 크게 틀린 것은 아님이 분명했다. 그렇지 않다면 셋째보다 더욱 고강한 무공을 지닌 둘째 아우가 반항 한번 하지 못하고 천돌혈에 일검을 맞고 쓰러진 현재의 모습이 도저히 설명되지 않았다. 백의청년은 나직한 한숨을 내쉬었다.
“형제분들을 살해한 흉수는 정말 가공할 무공과 놀라운 심계(心計)를 지닌 자요.”
“삼공자는 그자가 누구인지 알고 있소?”
“내가 알기로 이 근처에서 이런 솜씨를 지닌 검객은 오직 한 사람뿐이오.”
남의인은 황급히 물었다.
“그가 누구요?”
백의청년은 문득 허공을 올려다 보았다. 구름 사이로 희미하게 빛나는 반월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어느 때보다 날카롭게 반짝이고 있었다. 한참 후에야 그는 거의 알아듣기 힘든 나직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그는 내가 요즘 들어 최고의 숙적(宿敵)으로 생각하는 자요. 사람들은 그를 신검무적이라 부르고 있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