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15권 서안지란(西安之亂)편 : 4화
제148장. 구련조화(九蓮造化)
자은사의 아침은 언제나 고요하다.
뎅… 뎅….
짙은 운무(雲霧) 속에 울려 퍼지는 종소리는 듣는 이의 마음에 평온과 안식을 가져다주는 힘이 있었다. 진산월은 한참 동안이나 아침 안개 속에 선 채로 은은하게 들려오는 종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어깨가 안개에 촉촉하게 젖을 때 즈음에서야 진산월은 천천히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안개를 헤치고 사문(寺門)으로 접근했을 때 누군가가 문 뒤에서 불쑥 튀어나왔다.
“뉘십니까?”
나타난 사람은 아직 얼굴에 어린 기가 채 가시지 않은 사미승(沙彌僧)이었다. 사미승은 키가 껑충하게 크고 비쩍 마른 진산월의 모습을 살펴보고는 두려운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누구라 해도 짙은 안개 속에서 얼굴에 칼자국이 있는 괴인과 마주치게 된다면 가슴이 덜컥 내려앉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진산월은 사미승의 두려움에 가득 찬 얼굴을 내려보고 있다가 담담한 음성으로 말을 내뱉었다.
“이곳 후원에 내 친구가 머물고 있다고 하길래 만나 볼까 하여 들렀네.”
사미승은 여전히 경계의 빛을 띠며 진산월을 힐끔거렸다.
“본사의 후원에 머물고 있는 시주님이 한두 분이 아니신데 어느 분을 찾아오신 거요?”
“내 친구의 이름은 조일평이라고 하네.”
그 말을 듣자 그제서야 사미승의 얼굴이 밝아졌다.
“아! 조 시주님을 찾아오신 분이시군요. 어서 들어오십시오.”
조일평은 자은사의 주지인 백운대사의 손님이니 사미승이 모를 리 없었다. 진산월은 사미승의 안내를 받으며 자은사의 경내(境內)로 들어섰다. 아직 이른 아침이어서인지 넓은 자은사 내에는 돌아다니는 사람의 모습을 별로 찾아볼 수가 없었다. 가끔 아침 예불(禮佛)을 마치고 나온 승려들만이 빠른 걸음으로 지나가고 있을 뿐이었다. 사미승은 몇 군데의 불전(佛殿)을 이리저리 돌더니 객방(客房)이 쭉 늘어선 후원에 와서 걸음을 멈추었다.
“어느 분이라고 전해 드릴까요?”
“진가 성을 쓰는 친구라고 하게.”
“진씨 성의 친구분이시라고요?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사미승은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객방 중 한곳으로 들어갔다. 곧이어 사미승과 함께 짙은 흑의를 입은 청년이 밖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흑의청년은 진산월과 시선이 마주치자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자네가 나를 찾아올 줄은 몰랐군. 먼젓번 일로 아직까지 화를 내고 있을 줄 알았는데….”
진산월은 무덤덤한 음성으로 대꾸했다.
“아직도 화는 풀리지 않았네. 단지 용건이 있어서 왔을 뿐이네.”
“그런가? 아무튼 뚱한 모습이라도 보게 되니 반갑군.”
“언제까지 밖에 세워 둘 셈인가?”
흑의청년, 조일평은 피식 웃으며 몸을 돌렸다.
“들어오게, 심통쟁이 양반.”
두 사람이 안으로 들어가자 그때까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두 사람을 쳐다보고 있던 사미승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뭐야? 조 대협 같은 사람은 얼마나 대단한 친구를 만나나 했는데, 남들과 별로 다를 것도 없잖아? 나이를 먹은 사람들의 교우 관계는 뭔가 다를 줄 알았더니 그것도 아니네.”
사미승은 한참이나 그 자리에 선 채 무어라고 혼잣말로 계속 중얼거리더니 느릿느릿한 걸음으로 안개 속으로 사라져 갔다.
두 사람은 한동안 서로 마주본 채 아무런 말이 없었다. 조일평은 진산월의 얼굴을 유심히 살펴보더니 문득 입가에 가느다란 미소를 매달았다.
“그전보다는 많이 좋아졌군.”
“그전에는 어땠는데?”
“몰라서 묻나? 오래된 관(棺) 속에서 튀어나온 고루(??)와 다를 바가 없었네. 어떻게 그런 몰골로 남들 앞에서 태연히 얼굴을 내밀 생각을 했었나?”
“지금은?”
“지금은 그런대로 봐줄 만 하군. 하지만 옛날의 모습으로 돌아오려면 아직 어림없네.”
진산월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떠올랐다.
“아무리 해도 그때의 모습으로 되돌아갈 수는 없을 거야.”
조일평은 그 말을 굳이 부인하지 않았다. 확실히 진산월은 예전과 너무 달라져 있었다. 단순히 외모가 바뀌었을 뿐 아니라 사람 자체가 여러모로 달라진 상태였다. 조일평은 두 번 다시 예전의 그 사람 좋았던 진산월을 볼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하자 왠지 울적해졌다. 그런 기분을 떨쳐버리기라도 하려는 듯 조일평은 한차례 어깨를 으쓱하고는 다시 쾌활한 음성으로 물었다.
“그런데 무슨 일로 여기까지 찾아왔나? 아직은 문파를 정비하느라 정신이 없을 줄 알았는데….”
“이번에 이세적의 회갑연에 초대를 받았네. 그래서 몇 가지 일도 처리할 겸 겸사겸사 조금 일찍 산을 내려왔네.”
“그렇지 않아도 그 회갑연 때문에 요즘 서안 일대가 시끌벅적하긴 하더군. 그런데 명색이 장문인인데 달랑 자네 혼자 간단 말인가?”
“내일쯤 몇 사람이 더 내려올 걸세. 나는 그 전에 해결할 일이 있어서 먼저 내려왔네.”
조일평의 눈이 번쩍 빛났다.
“해결해야 할 일이란 게 뭔가?”
“한 가지는 나 혼자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고, 다른 한 가지는 자네의 도움이 필요한 일일세.”
조일평이 진산월과 친분을 갖게 된 지 오 년이란 세월이 흘렀지만, 진산월이 지금처럼 직설적으로 도움이 필요하다고 한 적은 한번도 없었다. 그런데도 조일평은 별로 의외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정말로 위험하고 긴박한 일이라면 진산월은 절대로 도와 달라는 말을 하지 않을 것이다. 진산월의 도와 달라는 말은 역설(逆說)적으로 위험을 초래할 만큼 다급한 일이 아니라는 의미였다.
“말해 보게.”
“일전에 자네가 취미사 혈겁의 첫 번째 목격자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네. 그게 사실인가?”
조일평은 진산월의 질문이 뜻밖인 듯 눈을 살짝 치켜떴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이네.”
“그 당시 자네가 본 상황을 자세히 말해 줄 수 있겠나?”
“그거야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닐세. 그런데 그 전에 왜 그걸 물어 보는지를 말해 주는 게 순서 아니겠나?”
진산월은 잠시 침음하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취미사 혈겁은 사실 본파와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네. 하지만 요즘 들어 나는 어떤 식으로든 본파가 그 일의 영향을 받게 되리라는 생각이 자꾸 든다네. 그래서 그 일에 대해 알 수 있는 한은 최대한 알아두려 하는 것일세.”
“흠. 확실히 취미사 혈겁은 겉으로 드러난 것과는 달리 무림의 많은 문파가 직간접적으로 개입되어 있어 그 불똥이 어디로 튈지 모르지. 자네는 어디까지 알고 있나?”
“예전에 우연히 이존휘를 만난 적이 있었네. 그때 그 자리에서 개방의 장안 분타주였던 소방방이 살해되는 광경도 목격을 했지.”
조일평은 눈을 살짝 치켜떴다.
“오! 그렇다면 자네도 이번 사건의 목격자 중 한 사람이로군.”
“그 일 이후 호기심을 느끼고 취미사를 찾아간 적이 있었는데, 별다른 점을 발견하지 못하고 그냥 돌아왔지.”
“취미사에 가 본 적이 있다니 말하기 편하겠군.”
조일평은 자신이 목격한 일에 대해 최대한 자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그 일이 벌어진 것은 벌써 두 달 가까이 되었으나, 워낙 사건 자체가 중대하고 그 일로 인해 조일평 자신이 적지 않은 번거로움을 겪었기 때문에 그는 아주 세세한 부분까지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진산월은 간혹 몇 가지 의문 나는 사항에 대해 짤막하게 물었을 뿐, 조일평의 말이 끝날 때까지 조용히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이상이 당시의 정황일세. 내가 첫 번째 목격자가 된 덕분에 꼼짝없이 소림과 화산파의 고수들에게 닦달을 당했지만, 내가 아는 게 거의 없다는 걸 알고 그들도 나에게 더 이상의 관심을 두지 않게 되었네.”
진산월은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잘 들었네. 그런데 그때 이존휘와 함께 취미사에 왔다는 젊은 여자 말일세.”
“왜? 이쁘다니까 갑자기 흥미가 생기나?”
조일평이 농담을 했으나 진산월은 별로 농담을 받아줄 의향이 없는 듯 했다.
“그녀에 대해 좀더 자세히 말해 보게. 나이는 몇 살쯤 되었나?”
“자네가 어린 소녀를 밝히는 취향이 있는 줄 몰랐는걸. 그녀는 십대 후반쯤 되었을 걸세. 여인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이르고, 그렇다고 소녀라고 하자니 조금 성숙해 보이더군. 이목구비까지야 생생하게 기억나지 않지만, 두 눈이 아주 생기 가득하고 활기에 차 있어서 보기만 해도 절로 사람을 흥겹게 만드는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네. 그녀에게 정말 관심이 있나?”
“그녀가 내가 아는 사람 같아서 그러네.”
조일평은 다소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진산월은 그동안 초가보와의 싸움에서 종남파를 지키느라 정신이 없었을 텐데 어느 겨를에 여자를 만났단 말인가?
“그게 누군가?”
“아직은 짐작일 뿐이네. 그런데 만약 그녀라면 왜 내게 그 일에 대해서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았던 것일까?”
진산월의 마지막 말은 거의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것이었으나, 조일평은 용케도 알아들을 수 있었다.
“아마도 자네가 취미사 혈겁과 전혀 관련이 없고 별다른 호기심도 느끼지 않는다고 생각한 것이겠지. 그런데 그녀가 누군가? 자네 주위에 그런 여자가 있다는 건 전혀 몰랐던 사실이군.”
진산월이 막 무어라고 입을 열려 할 때였다.
“조 시주님,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문밖에서 사미승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조일평은 다소 의아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나서 문 쪽으로 걸어갔다.
“누구지? 찾아올 만한 사람이 없는데….”
잠시 후에 다시 돌아온 그의 뒤에는 뜻밖의 인물이 따라오고 있었다. 노란색 나삼(羅衫)을 걸친 미모의 여인은 다름 아닌 천봉궁의 영봉 금교교였다. 금교교는 진산월을 보자 약간 놀란 듯 했으나 이내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이곳에서 진 장문인을 만날 줄은 몰랐군요.”
진산월도 다소 의외라고 생각했으나 담담한 표정으로 그녀의 인사를 받았다.
“금 소저를 다시 만나게 되니 반갑소.”
금교교는 새삼스런 눈으로 조일평과 진산월을 번갈아 가며 바라보았다.
“조 공자께 친구 분이 있다는 말씀은 들었지만, 그분이 설마 진 장문인이라고는 생각도 못했어요. 그런데 무슨 일로 여기까지 오셨나요?”
“친구를 만나는 데 이유가 필요 있겠소?”
진산월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하자 눈치가 비상한 금교교는 그가 자세한 이야기를 하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이내 화제를 바꾸었다.
“뒤늦게나마 종남파가 초가보를 물리치고 본산을 지킨 것을 축하드려요. 이제 종남파가 과거의 영예를 되찾는 것도 시간문제가 되겠군요.”
“운이 좋았을 뿐이오.”
“호호…. 어떤 일은 단순히 운만 가지고는 되지 않죠. 아무튼 종남혈사에 대한 소문은 저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답니다. 더구나 저희들이 종남파를 찾아간 다음 날에 그런 큰일이 벌어지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어요.”
“언젠가는 일어날 일이었소. 단지 시기가 조금 앞당겨졌을 뿐이오.”
“다친 분들이 많다고 들었는데, 이렇게 산을 내려오신 걸 보니 소문이 과장되었던 모양이군요?”
그녀는 말을 해놓고 아차 싶었다. 자칫 종남파의 민감한 부분을 건드린 게 아닌가 하는 우려가 생겼던 것이다.
하나 강호에 그런 소문이 파다한 것도 사실이었다. 개중에는 종남파의 고수들 중 절반 가까이가 죽거나 다쳐서 남아 있는 문하제자가 모두 합쳐도 채 열 명이 되지 않는다는 말까지 떠돌 정도였다.
비록 초가보라는 강적(强敵)을 물리쳤으나, 그 후유증이 너무 막심해서 종남파가 다시 재기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리라는 것이 많은 무림인들의 생각이었다.
그런데 종남파를 책임지고 있는 장문인이 이런 시기에 산을 내려왔으니 그녀가 의아해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다행히 진산월은 그녀의 물음에 담담한 표정으로 대답해 주었다.
“몇몇 다친 사람들이 있기는 했으나, 지금은 많이 호전되었소. 걱정해 주어서 고맙소.”
그녀는 진산월이 비꼬는 것이 아닐까 하여 그의 표정을 살짝 살폈으나 그런 것 같지는 않자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나 답지 못하게 너무 경솔한 질문이었어. 그나저나 이렇게 이른 시간에 그가 이곳에 온 이유가 무엇일까?’
그녀는 궁금증이 계속 치밀어 올랐으나 그가 말하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물을 수 없어서 치밀어 오르는 호기심을 삭일 수밖에 없었다.
그때 진산월이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왜 가려는가?”
조일평이 묻자 진산월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도 말했다시피 해결해야 할 일이 있네.”
조일평의 얼굴에 아쉬운 빛이 스치고 지나갔다. 조일평은 좀처럼 자신의 감정을 내색하지 않는 사람이었으나, 정말 모처럼 만에 가진 친구와의 호젓한 시간이 너무 빨리 끝나버린 것 같아 아쉬움을 금치 못했다.
진산월 또한 아쉬운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하나 금교교가 이런 시간에 조일평을 찾아온 것은 그와 긴히 할 이야기가 있다는 뜻인데 눈치도 없이 계속 머물러 있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일이 끝나면 다시 들를 텐가?”
“아니. 바로 이씨세가로 가야 할 것 같네.”
조일평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표정이 한층 밝아졌다.
“그렇군. 그럼 이씨세가에서 만나세.”
진산월은 멀거니 조일평을 쳐다보았다.
“자네에게도 초청장이 왔나?”
조일평은 입가에 알 듯 모를 듯한 묘한 미소를 떠올렸다.
“아직 오지 않았지만 조만간 올 걸세. 만약 안 온다 해도 오게 만들어야지.”
진산월은 피식 웃으며 이내 몸을 돌려 금교교에게 가볍게 인사를 하고는 성큼성큼 밖으로 걸어갔다. 그의 훤칠한 몸이 사라지자 장내가 갑자기 썰렁해진 느낌이 들었다.
금교교는 항상 침착하고 냉정해서 차가워 보이던 조일평이 진산월이 사라진 곳을 우두커니 바라보고 있는 광경을 슬쩍 쳐다보고는 내심 남자들의 저런 세계가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겉으로 드러나게 표현하지 않았으나 그들 사이에 흐르는 뜨거운 교감(交感)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간담상조(肝膽相照)라는 말이 생겨난 것일까?’
남자들의 세계에는 확실히 그녀 같은 여인들이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복잡 미묘한 무언가가 있는 것 같았다. 그녀는 마음 한구석을 흐르는 기이한 감정을 접으며 조일평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총관님께서 조 공자께 오늘 시간이 나면 저녁식사를 같이 할 수 있느냐고 의향을 여쭈어 보셨어요. 어떠세요?”
조일평은 주저하지 않고 승낙을 했다.
“좋소. 사제와 함께 가도 되겠소?”
“물론이지요. 장소는 아시죠?”
“북대가 끝에 있는 명일장 말이오?”
“그래요. 유시(酉時)까지 오시면 됩니다.”
“그런데 삼파(三派)와의 회합은 잘 끝났소?”
“그 이야기도 총관님께 직접 들으시는 게 나을 거예요.”
조일평은 그녀의 얼굴을 빤히 응시했다.
“무언가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난 모양이구려.”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예상치 못햇다기보다는 허(虛)를 찔렸다고 해야 옳은 말이겠죠.”
“누구에게 허를 찔렸단 말이오?”
“물론 이존휘, 그자에게지요.”
“이존휘가 무슨 일을 저질렀소?”
그녀는 배시시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가 직접 모습을 드러내는 자가 아니라는 건 조 공자도 잘 아실 거예요.
아주 교묘한 방법으로 사건을 점점 확대시키고 있더군요.”
“그거야 어차피 짐작한 일 아니었소?”
“그래도 그토록 노골적으로 나올 줄은 몰랐어요. 고수들을 보내 회합에 참석하러 오던 삼파의 고수들을 공격했어요. 그래서 많은 피해가 발생했어요.”
조일평의 짙은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건 너무 무모한 일 같은데….”
“그 안에 숨어 있는 복잡한 사정은 총관님께서 자세하게 설명해 주실 거예요. 아무튼 이런 와중에 회갑연을 연다고 사방에 초청장을 보내다니 그들이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군요.”
금교교는 갑자기 가느다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걱정이 되는군요.”
“무엇이 말이오?”
그녀의 고운 얼굴에는 숨길 수 없는 한 줄기의 어두운 빛이 떠올라 있었다.
“그들의 진정한 목적을 알지 못한 채 이씨세가로 가는 것이 꼭 호랑이 입으로 스스로 걸어 들어가는 것과 같다는 생각이 든단 말이에요. 우리가 너무 사태를 안이하게 보고 있는 게 아닐까요?”
조일평의 표정도 무겁게 변했다.
그는 한동안 침음하더니 이윽고 두 눈에 신광을 번뜩이며 단호한 음성으로 말했다.
“호랑이를 잡으려면 어차피 호랑이 굴로 들어가야 하오. 일단 그들의 꼬리가 드러난 이상, 그들의 정체를 파악하는 것도 시간문제요. 호랑이가 아무리 사납다 해도 결국은 사냥꾼의 손에 잡히게 되어 있소.”
금교교는 가만히 그의 굳건한 얼굴을 보고 있다가 조용한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운이 나쁘면 오히려 잡아먹힐 수도 있어요.”
“저곳입니다.”
조화심이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에는 한 채의 장원이 외롭게 서 있었다.
조옥린은 한동안 그 장원을 바라보고 있다가 천천히 몸을 움직였다.
조화심과 공손도는 서로 눈을 마주보더니 그의 뒤를 따라 걸어갔다.
“사람을 불러라.”
조옥린이 장원의 입구에 몸을 멈춰 세운 채로 말하자 공손도가 대뜸 앞으로 달려와 대문을 발로 걷어찼다.
쾅!
얼마나 세게 걷어찼는지 제법 두꺼운 나무로 이루어진 대문이 산산이 박살이 나 버렸다.
조옥린은 살짝 눈살을 찌푸렸으나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곧 장원 안이 소란스러워지더니 얼굴이 붉고 수염을 잔뜩 기른 장한이 달려 나왔다.
텁석부리 장한은 대문이 부서진 것을 보고는 눈빛이 흉흉해지더니 이내 그 앞에 우뚝 서 있는 공손도에게로 시선을 고정시켰다.
“자네의 솜씨인가?”
무척 화가 났을 텐데도 텁석부리 장한은 최소한의 예의를 잃지 않았다.
하나 공손도는 애초부터 예의를 지킬 생각 따위는 가지고 있지 않은 듯 했다.
“그렇다. 어쩔 테냐?”
그의 도발적인 말을 듣자 텁석부리 장한의 가뜩이나 붉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랏다.
그와 함께 그의 콧김이 거칠어지며 입에서 거친 음성이 흘러나왔다.
“천둥벌거숭이 같은 놈이로군. 네놈은 무슨 일로 이곳까지 와서 행패를 부린단 말이냐?”
공손도는 음산한 웃음을 흘렸다.
“흐흐…. 알 것 없다. 그보다 차복승, 그 늙은이나 빨리 나오라고 해라.”
자신보다 한참이나 어린 공손도가 계속 반말을 지껄이는 데다 할아버지뻘이 되어도 부족할 차복승을 함부로 들먹거리자 텁석부리 장한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노한 외침을 토하며 공손도를 향해 달려들었다.
“내가 오늘 총관님께 혼나는 한이 있어도 네놈의 버르장 머리를 단단히 고쳐 주고야 말겠다.”
공손도는 겉으로는 큰 소리를 탕탕 치고 있었으나, 이미 마음속으로는 단단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곳이 어떤 곳인지를 알고 온 이상 상대를 경시하는 생각 같은 건 아예 있지도 않았다.
그는 텁석부리 장한이 자신을 향해 신형을 날리자마자 즉시 손에 들고 있던 섭선을 세차게 휘둘렀다.
달려들기는 텁석부리 장한이 먼저 달려들었는데 막상 공격은 공손도가 먼저 한 형국이었다.
파파팡!
공손도의 손에 들린 섭선에서 마치 북을 치는 듯한 음향이 거푸 터져 나오며 세찬 경기가 텁석부리 장한의 전신을 폭풍노도처럼 휘몰아쳐 갔다.
이 광경을 보자 깜짝 놀라며 이를 갈아붙였다.
“광풍선법(狂風扇法)? 이제 보니 네놈이 바로 그 찢어 죽여도 시원치 않을 공손도라는 놈이구나!”
텁석부리 장한은 두 주먹을 불끈 쥐고는 풍차처럼 마구 휘두르기 시작했다. 그가 휘두르는 주먹은 언뜻 보기에는 무질서한 듯 했으나 주먹에서 흘러 나오는 권풍(拳風)과 권풍이 서로 합치더니 이내 무시무시한 위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텁석부리 장한은 규염객 장평이었다. 장평은 천봉궁에서 내로라하는 고수들인 팔대시장 중에서도 용맹스럽기로 소문난 인물이었다. 지금 그가 펼치는 것은 광마권법(狂馬拳法)이라는 것으로, 이름 그대로 미친 말이 날뛰는 것처럼 사납고 위력적인 절학이었다. 장평이 펼쳐낸 광마권의 권풍이 공손도의 선영(扇影)과 정면으로 격돌했다.
콰앙!
벽력이 치는 듯한 굉음과 함께 공손도의 신형이 뒤로 주르르 밀려났다. 정면 대결에서는 아무래도 나이가 어린 공손도가 장평의 심후한 내공을 당해낼 수가 없었다. 공손도는 단 한 번의 부딪침으로 자신이 다섯 걸음이나 격퇴당하자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생긴 건 산 도적 같은 놈이 내공 하나는 끝내주는구나.’
그는 감히 장평의 주먹에 정면으로 맞서지 못하고 옆으로 피하면서 장평의 허점을 노리기 시작했다. 하나 장평은 단순히 내공만 강한 고수가 아니라 누구 못지않은 풍부한 강호 경험을 가지고 있는 인물이었으니 결코 쉽사리 허점을 보일 리가 없었다. 공손도가 처음부터 내공의 부족을 깨닫고 광풍선법 특유의 변화무쌍한 공격을 시도했다면 지금처럼 형편없이 몰리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아무리 강호에 신목령 십이사자의 명성이 드높다 해도 장평과 같은 강적과 싸운 경험이 일천하다는 약점이 그대로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조옥린은 공손도가 처음 대문을 부술 때부터 못마땅한 모습이더니, 그가 장평을 도발하여 싸움을 시작하자 표정이 좋지 않았다. 그런데 이제는 일방적으로 몰리는 판국이 되었으니 심기의 불편함이 겉으로 송두리째 드러났다. 결국 조옥린은 공손도가 장평의 주먹에 쓰러지기 직전이 되자 앞으로 한 걸음 나서며 오른 소맷자락을 슬쩍 흔들었다.
“멈추시오.”
손을 내젓는 듯한 가벼운 동작이었는데, 그 순간 장평은 한 줄기 막강한 압력이 자신에게 다가옴을 느끼고 깜짝 놀랐다. 그는 막 공손도의 옆구리를 가격하려던 주먹을 급히 회수하였다가 그 압력이 다가오는 곳으로 내찔렀다. 그런데 그가 주먹을 회수하자마자 그토록 맹렬한 기세로 다가들던 압력이 씻은 듯이 사라져 버렸다. 덕분에 장평은 텅 빈 허공을 향해 주먹을 내뻗는 볼썽사나운 모습이 되고 말았다.
‘절정고수구나.’
장평은 안색이 딱딱하게 굳어지며 원래의 위치에 표표히 서 있는 조옥린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이번에는 당신이 덤빌 테요?”
조옥린은 씁쓸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이번 일은 전적으로 너무 성급하게 손을 쓴 우리의 잘못이오.”
한쪽에서 숨을 헐떡거리고 있던 공손도가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숙부님….”
조옥린의 차가운 시선이 공손도를 쓸어보았다. 공손도는 그 칼날 같은 시선에 감히 한 마디도 입을 열지 못했다. 조옥린은 단 한 번의 시선으로 공손도를 침묵하게 한 후 다시 장평을 향해 말했다.
“원래는 조용히 사람을 불러 우리가 찾아온 목적을 말하려고 했는데, 내 조카 녀석이 젊은 나이에 쓸데없는 객기를 부린 모양이오. 사과드리겠소.”
조옥린이 정중하게 포권을 하자 장평도 더 이상은 그를 향해 화를 내지 못했다. 조옥린의 풍모가 워낙 헌앙(軒昻)한 데다 그 기상이 한 마리 학(鶴)과 같이 고고한 데가 있어서 함부로 대할 사람이 아님을 알아차렸던 것이다. 장평은 한차례 큰 숨을 몰아쉬고는 그를 향해 마주 포권을 했다.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니 이 일은 더 추궁하지 않겠소. 하지만 부서진 대문은 변상해야 할 거요.”
“당연히 그래야지요. 한데 귀하는 혹시 귀염객이라 불리는 장평, 장 대협이 아니시오?”
장평은 상대가 자신을 한 눈에 알아보자 더욱 상대를 경원(敬遠)하는 마음이 생겼다.
“그렇소만, 존성대명이 어찌되시오?”
조옥린은 조용하게 웃었다.
“존성대명이랄 것까지는 없고, 나는 조옥린이라 하오.”
장평의 어깨가 한차례 부르르 떨렸다. 조옥린이라는 이름이 주는 무게감은 장평과 비교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이제 보니 낙화수사이셨구려. 몰라뵈어 죄송하오.”
“별 말씀을.”
“그런데 본장에는 무슨 일로 오시었소?”
조옥린은 담담한 신색을 유지한 채 입을 열었다.
“귀장에 차복승 총관께서 와 계시다는 말을 듣고 그분께 인사를 여쭙고자 찾아왔소.”
장평은 내심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이 명일장이 천봉궁의 비밀 거점임을 알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더구나 차복승이 이곳에 머무르고 있다는 것은 천봉궁 내에서도 극소수만이 알고 있는 사실인데, 조옥린이 어떻게 알아차렸단 말인가? 조옥린이 신목령의 오천왕 중 한 사람이라는 것을 생각해 보면 실로 가슴 떨리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상대가 뻔히 알고 찾아왔는데 무작정 부인할 수가 없어서 장평은 머뭇거릴 수밖에 없었다. 그때 그를 구해 주는 음성이 들려왔다.
“허허…. 조 대협께서 오신 줄도 모르고 이 늙은 것이 후원에만 죽치고 앉아 있었구려. 장평, 조 대협을 안으로 모시고 오게.”
사람은 보이지 않는데 늙수그레한 음성만이 들려왔다.
조옥린은 그것이 전설의 육합전성(六合傳聲)임을 깨닫고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천봉궁에서 가장 상대하기 힘든 사람은 두뇌가 뛰어난 영봉(靈鳳)도 아니고, 무공이 강한 혈봉(血鳳)도 아닌, 금시라도 무덤 속으로 들어가도 이상할 것이 없는 늙은 노총관이라고 하더니 허언이 아니었군.’
차복승의 음성을 듣자 장평은 커다란 짐을 던 사람처럼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이내 앞으로 먼저 걸어갔다.
“나를 따라오시오.”
조옥린은 느긋한 걸음으로 그를 따라 몸을 움직였다. 조화심과 공손도는 서로 눈짓을 주고받더니 말없이 그의 뒤를 따라가기 시작했다.
장평이 그들을 안내한 곳은 작은 연못 위에 마련된 조그마한 정자였다. 정자에는 붉은 글씨로 <봉심정(鳳心亭)> 이라고 쓰인 작은 현판이 있었는데, 아담하면서도 아름답게 지어진 정자와 무척 잘 어울려 보였다. 봉심정 안에는 눈처럼 새하얀 백발의 노인과 백의나삼(白衣羅衫)을 걸친 미녀가 다과를 앞에 놓은 채 앉아 있었다. 조옥린은 의젓한 걸음으로 봉심정 안으로 들어가 백발노인을 향해 허리를 숙였다.
“말로만 듣던 노총관님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조옥린이라 합니다.”
조옥린의 태도는 당당하면서도 예의 바른 것이어서 차복승의 얼굴에는 흐뭇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허허… 어서 오시오. 내가 바로 너무 늙어서 죽지도 못하고 있는 차복승이오. 그리고 이 아이는 팔선자 중의 맏이요.”
백의여인이 공손하게 인사를 했다.
“정소소라 합니다.”
조옥린은 정소소의 미모를 보고는 싱긋 웃었다.
“정 소저의 염명(艶名)은 익히 들었소. 과연 소문이 잘못된 것이 아니었구려. 내가 벌써 이순(耳順)을 바라보는 나이가 된 것이 아쉬울 뿐이오.”
정소소는 조옥린이 젊었을 때 풍류남아로 이름이 높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에 조용히 웃기만 했다. 그 모습은 성숙한 여인의 미를 느끼게 하기에 족한 것이었다. 차복승의 시선이 조옥린의 뒤에 나란히 서 있는 조화심과 공손도에게로 향했다.
“뒤의 두 젊은이들도 하나같이 기개가 헌앙하고 뛰어난 용모를 지니고 있구려. 노부에게 소개해 줄 수 있겠소?”
“별로 대단치 않은 재주를 지닌 아이들이어서 노총관님의 눈 밖에 날까 두렵습니다.”
조옥린은 두 사람에게 눈짓을 했다.
“직접 인사를 올리거라. 강호의 어떤 고인(高人)들보다 배분이 높으신 천봉궁의 노총관이시다.”
속마음이야 어떻든 조화심과 공손도는 공손하게 포권을 했다.
“불초는 조화심이라 합니다.”
“공손도입니다.”
차복승은 부드럽고 온화한 시선으로 그들을 보고 있다가 조화심을 가리켰다.
“저 아이는 조 대협과 같은 성씨를 쓰고 있구려. 혹시 조 대협과 인척 관계가 되지 않소?”
“그렇습니다. 제 친조카입니다.”
“어쩐지 젊은 날의 조 대협을 보는 듯 수려한 용모를 지니고 있구료. 두 사람 모두 신목령주께서 아끼는 제자들이라고 들었소.”
조옥린은 그 말에는 아무 대답도 없이 빙그레 웃기만 했다. 사실 신목령주의 제자는 열두 명이나 되지만, 그들 중 진짜로 신임을 받는 인물들은 따로 있었다. 차복승이 이런 사실을 알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듣는 조화심과 공손도의 기분이 유쾌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차복승의 주름진 노안이 다시 조옥린에게로 향했다.
“조 대협께서 이 외진 곳까지 늙은이를 찾아온 것은 다만 주름살 투성이의 얼굴을 보기 위한 것만은 아니었을 텐데….”
“사실은 한 가지 여쭈어 볼 것이 있어서 실례를 무릅쓰고 찾아왔습니다.”
“오, 잘된 일이오. 노부도 마침 조 대협을 만났으면 했는데, 공교롭게도 조 대협이 먼저 찾아와서 얼마나 기쁜지 모르오.”
조옥린은 잠짠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었다.
“저를 만나려고 하셨다니 어떤 일인지 궁금하군요.”
차복승은 부드럽게 웃었다.
“별로 대단한 일은 아니오. 그보다 먼저 조 대협께서 이 늙은이를 찾아온 이유를 알고 싶구려.”
조옥리느이 얼굴에 한 줄기 엄숙한 빛이 떠올랐다. 조옥린은 풍류남아로 이름을 떨쳤지만, 평생 실언(失言)을 하거나 함부로 행동한 적이 없었다. 단순히 외모가 준수하거나 언변(言辯)이 뛰어나다고 해서 풍류남아로 인정받지는 않는다. 조옥린은 강호인들이 풍류(風流)의 전형(典型)으로 생각하는 인물이었다. 그는 태도가 진중하고 말을 아꼈으며, 무엇보다 여인들에 대한 배려가 뛰어났다. 평생 단 한 번도 강제로 여인을 취하지 않았고, 남에게 책잡힐 행동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탁월한 무공과 고고한 기상을 함께 갖추고 있었다. 그야말로 문무(文武)를 겸비한 그의 모습은 모든 무림인들의 숭앙(崇仰)을 받기에 족한 것이었다. 이십 년이 넘는 세월이 흘러도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이 그를 풍류제일남아 (風流第一男兒)로 손꼽는 것도 그런 연유에서였다.
그런 조옥린이 얼굴을 굳히자 여유로운 표정을 짓고 있던 차복승조차도 다소 긴장하는 모습이었다. 조옥린은 침중한 표정으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얼마 전에 저와 친분이 두터운 오욕백이 서안으로 왔었습니다.”
오욕백의 이름이 나오자 차복승과 정소소의 눈에 날카로운 신광이 번뜩이고 지나갔다.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조옥린은 허공을 응시하며 계속 입을 열었다.
“그는 몇 가지 임무를 띠고 왔는데, 개인적인 일을 처리한다고 잠깐 나가더니 종적이 끊겼습니다. 그의 평소 성격으로 보아 임무를 망각한 채 사라질 리가 없는데도 말입니다.”
“…!”
“저는 며칠 동안 그의 행방을 수소문한 끝에 그가 종남산 쪽으로 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가 종남산으로 간 날에 천봉궁의 몇몇 고수들 또한 그쪽으로 갔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어제 저녁, 저는 종남산 산자락 밑에서 그의 시신을 발견했습니다.”
조옥린은 천천히 시선을 내려 차복승의 주름진 얼굴을 응시했다.
“그의 시신은 상처투성이였고, 수십 개의 검흔(劍痕)과 장력(掌力)의 흔적들이 전신을 뒤덮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이 치명적인 사인(死因)은 다른 데 있었습니다. 그의 뒤통수를 보니 완전히 함몰되어 형체를 분간하기 어렵도록 파괴되어 있더군요.”
차복승과 정소소는 묵묵히 조옥린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아실지 모르겠지만, 오욕백은 혈령신공이라는 특이한 호신강기를 연마하여 어지간한 무공으로는 그의 피부에 상처를 입힐 수 있을 뿐, 뼈를 부수지는 못합니다. 그런데도 그의 뒤통수 머리뼈는 산산이 박살나 있더군요. 그 부서진 자국은 아홉 개의 작은 꽃무늬를 형성하고 있었습니다.”
그 말을 듣자 정소소의 안색이 조금 창백해졌다. 그에 비해 차복승은 여전히 주름진 얼굴 표정 그대로였다. 어찌 보면 천하의 어떤 일로도 그의 얼굴 표정을 바꾸지 못할 것 같았다.
“마치 연꽃이 활짝 피듯 선명하게 찍혀 있는 그 장인(掌印)을 보자 저는 문득 오래 전부터 무림에 떠돌던 어떤 무공이 생각났습니다. ‘구련(九蓮)이 피면 천지가 조화(造化)를 이룬다’는 전설의 무공이 말입니다.”
문득 차복승의 굳게 닫힌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그 장인이 아홉 개의 꽃 문양을 이루고 있다고 했소?”
“그렇습니다.”
“그것 참 희한하군. 본궁의 구련조화인(九蓮造化印)도 아홉 송이의 꽃 문양이 새겨진 흔적을 남긴다오. 천하는 넓다더니 그렇게 비슷한 무공도 존재하는구려.”
이번에는 조옥린이 입을 다물었다. 이토록 분명한 증거를 제시했는데도 차복승이 발뺌을 하리라고는 미처 생각지 못했음이 분명했다. 차복승은 심연(深淵)처럼 깊은 눈으로 조옥린을 응시했다.
“천지는 광활하고 사람들의 수는 셀 수도 없을 정도로 많아서 무림에서는 온갖 상상도 못했던 일들이 일어나곤 한다오. 누군가가 죽은 시체에 약간의 장난을 해서 특정한 무공과 유사한 흔적을 만들어 내는 일쯤은 심심치 않게 일어날 수도 있다는 말이오.”
“…!”
“이번에는 노부가 조 대협을 만나려는 이유를 들어 보겠소? 본궁의 팔선자 중에 비봉 유화화라는 아이가 있소. 얼굴도 이쁘고, 성격도 상냥해서 노부도 친손녀처럼 귀여워하던 아이였지. 열흘 전쯤 되었나? 팔선자의 다른 아이들이 밖에 나갔다가 돌아와 보니 그 아이가 차디찬 시신이 되어 쓰러져 있었소. 가슴에 시뻘건 장인 하나를 남긴 채 말이오.”
이번에는 조옥린의 안색이 가볍게 변했다.
“그 장인은 마치 어린아이의 손자국처럼 앙증맞을 정도로 작았는데, 피처럼 붉어서 언뜻 보기에는 누군가가 붉은 물감으로 장난을 한 것처럼 보이기도 했소. 그 장인을 보자 노부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아오?”
“…!”
“노부도 조 대협처럼 오래 전부터 강호에 떠돌던 어떤 무공이 생각났다오. 한번 격중되면 대라신선(大羅神仙)이 와도 살아남지 못한다는 악마(惡魔)의 장공(掌功)이 말이오.”
조옥린은 모처럼 입을 열었다.
“오욕백은 결코 나이 어린 소녀에게는 혈라인을 쓰지 않습니다. 설사 영주(令主)께서 직접 지시를 내린다 할지라도 말입니다.”
“노부가 그런 사실을 어찌 알겠소? 그저 화화, 그 어린 것의 곱디고운 가슴 한복판에 그런 장인이 새겨진 것을 보고 불 같이 분노했을 뿐이지.”
차복승의 시선이 화살처럼 조옥린의 두 눈에 꽂혔다.
“노부는 조 대협의 말을 듣고 나서 내가 그 아이의 죽음을 보고 흥분하여 너무 안이한 판단을 내렸다고 생각했소. 조 대협은 어떠시오? 아직도 오욕백을 죽인 것이 본궁의 구련조화인이라고 확신하시오?”
조옥린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나직한 한숨을 내쉬었다.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조 대협은 당연한 생각을 한 거요. 다만 다른 누군가가 그런 조 대협의 생각을 미리 읽은 것 뿐이지.”
“천봉궁이 아니라면 대체 누가 오욕백을 살해할 수 있었을까요? 그리고 제가 속을 정도로 정교한 구련조화인의 흔적을 어떻게 만들어 낼 수 있었을가요?”
“노부는 화하의 시신을 자세히 살폈소. 다행히도 그 아이는 오욕백처럼 전신이 상처로 뒤덮이지 않아서 장인을 살펴 보기에는 아주 좋았소.”
차복승의 주름진 노안에는 한 줄기 괴이한 광망이 어른거렸다.
“그건 분명히 혈라인이었소.”
그의 단정적인 말에 조옥린이 고개를 내저었다.
“유 소저를 죽인 건 오욕백이 아닙니다. 이십여 년 전에 실수로 자신의 딸을 죽인 후 오욕백은 젊은 여자에게는 절대로 살수(殺手)를 쓰지 않습니다.”
“노부도 오욕백이 흉수라고는 생각지 않소.”
“그렇다면….”
“하지만 또한 그 장인이 혈라인이 분명하다는 것도 사실이오.”
조옥린이 무어라고 말하려 할 때 차복승이 조용한 음성을 내뱉었다.
“그 장인이 혈라인이라고 해서 그게 꼭 오욕백 본인이 펼쳤다고 할 수는 없지 않겠소?”
그 말에 조옥린은 무언가에 뇌리를 강타당한 듯 표정이 굳어졌다.
‘그렇다. 내가 왜 그 생각을 못했을까?’
생각해 보면 너무나 단순한 문제였다. 단지 혈라인은 오욕백의 독문무공(獨門武功)이라는 당연한 사실에만 사로잡혀 보다 폭넓은 가능성을 염두에 두지 못했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아홉 개의 꽃 문양이 새겨졌다고 해서 모두 구련조화인이라고 할 수는 없을 거요.”
차복승은 갑자기 목소리를 낮추었다.
“그리고 조 대협에게만 밝히는 것이지만, 본궁에서도 구련조화인을 연성(練成)한 사람은 모두 세 명뿐이오.”
조옥린은 자신도 모르게 물었다.
“그들이 누구입니까?”
“본궁의 궁주와 소궁주(少宮主), 그리고 노부요. 이제 노부가 왜 오욕백의 몸에 난 장인을 보지 않고서도 그것이 구련조화인이 아니라고 믿고 있는지 알겠소?”
천봉궁의 궁주는 이미 오랫동안 강호상(江湖上)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신비의 인물이었다. 소궁주인 단봉공주 또한 삼 년 전의 무림대집회 이후 강호에 나타난 적이 없었다. 그리고 차복승은….
‘차복승이 흉수라면 일부러 구련조화인의 흔적을 남겨 위험을 자초할 리가 없을 것이다.’
조옥린은 이제야 비로소 자기가 커다란 함정에 빠질 뻔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차복승의 차분한 대응이 아니었다면 그는 천봉궁과 돌이킬 수 없는 원한을 맺고 말았을 것이다. 그것은 단순히 그 개인이 천봉궁과 적(敵)이 되는 것만이 아니다. 신목령과 천봉궁이라는 당금 강호의 거대세력 두 곳이 죽고 죽이는 무서운 살겁(殺劫)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됨을 뜻하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그가 찾아온 날에 차복승이 이곳에 머물고 있다는 것은 두 문파 모두에 커다란 행운이 아닐 수 없었다.
천봉궁 입장에서도 오욕백의 죽음을 항의하러 온 사람이 조옥린이라는 것이 천만다행한 일이었다. 유화화와 오욕백을 살해하여 두 세력을 상잔(相殘)케 하려는 흉수의 의도는 치밀하고 놀라웠지만, 차복승과 조옥린이라는 두 뛰어난 인물들의 침착성과 혜안(慧眼)이 그 음모를 깨뜨려 버렸다.
이제 조옥린에게 궁금한 것은 오직 한 가지였다. 장공으로는 대적할 사람이 없다는 절정의 고수인 오욕백을 살해하고, 구련조화인의 흔적을 남긴 흉수는 대체 누구인가 하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