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15권 서안지란(西安之亂)편 : 8화
제152장. 인간거래(人間去來)
회갑연은 정각 유시(酉時)에 성대하게 개최되었다. 초청된 문파의 수만도 삼십여 개에 달했고, 그중 대부분 문파는 우두머리가 직접 참석을 했다. 그 외에 서안은 물론이고 섬서성에서 어느 정도의 지명도를 가진 인물들이 상당수 참석하여 그야말로 대성황을 이루고 있었다. 심지어는 관인(官人)들의 모습도 상당수 눈에 띄었다. 현 장안지부(長安知府)가 이세적의 장인이기 때문이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중인들의 관심을 집중시킨 곳은 소림사와 화산파, 그리고 천봉궁이었다. 뜻밖에도 소림사는 상당히 멀리 떨어진 위치임에도 불구하고 장문인의 사제인 팔대신승 중의 한 사람을 보냈고, 화산파 또한 이인지라 할 수 있는 담로검 매장원이 직접 와서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특히 이씨세가와 별 관계가 없다고 알려진 천봉궁에서도 총관인 차복승이 네 명의 선자들과 함께 참석해서 사람들을 더욱 흥분시켰다. 각기 우열을 가리기 힘든 절세의 미녀 네 사람이 나란히 입장하는 광경은 보는 이의 마음을 설레게 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그 바람에 처음에 잠깐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던 종남파의 고수들은 곧 잊혀진 존재가 되고 말았다. 하나 그들을 잊지 않고 있는 사람도 있었다.
“다시 만나게 되어 반갑소.”
종남파의 고수들이 자리를 잡고 앉았을 때 제일 먼저 그들을 찾아온 사람은 다름아닌 이존휘였다. 이존휘는 진산월과 시선이 마주치자 빙긋 웃으며 포권을 했다.
“그때는 미처 진 장문인의 정체를 알지 못해 결례를 했었소. 용서해 주기 바라오.”
그의 태도는 기품이 넘쳤고, 얼굴에 떠올라 있는 미소는 친근하면서도 호감이 가는 것이었다. 진산월 또한 마주 인사를 하며 담담한 음성을 내뱉었다.
“신분을 밝히지 않은 내 책임이 더 크니 마음에 두지 마시오. 그보다 영존(令尊)의 회갑을 진심으로 축하드리오.”
“감사하오. 숙소가 그리 넓지 않을 텐데 지내기에 불편하지는 않으시오?”
“우리가 있기에는 충분하니 신경 쓰지 마시오.”
이존휘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돌연 헛기침을 했다.
“험. 진 장문인께 소개해 드릴 사람이 있소.”
그의 말이 끝나자 그의 뒤에서 한 사람이 앞으로 걸어나왔다. 그는 보통 체격에 평범한 인상의 청년이었다. 입고 있는 옷도 시중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갈삼(葛衫)이었고, 눈빛이 날카롭거나 특이한 기도를 풍기지도 않았다. 아마 다른 곳에서 보았다면 기억하지 못하고 잊어버렸을 게 분명했다. 그만큼 특별히 두드러진 곳이 없는 인물이었다. 하나 겉모습처럼 별볼일 없는 사람이라면 굳이 이존휘가 진산월에게 소개시키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 사람은 풍도(馮都)라고 하는데, 나의 오랜 친구요. 평소 진 장문인을 몹시 흠모하고 있기에 마침 기회가 닿았으니 진 장문인께 인사나 시키려고 데리고 왔소.”
갈삼청년은 진산월을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허리를 굽혀 인사를 했다.
“풍도라 합니다.”
“반갑소. 진산월이오.”
이존휘의 소개와는 달리 풍도는 그다지 진산월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은 듯 했다. 처음에만 빤히 쳐다보았을 뿐 막상 인사가 끝나자 다시 이존휘의 뒤쪽으로 물러나 있었다. 이존휘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웃었다.
“이해하시오. 이 친구가 워낙 내성적이라 남들 앞에 나서는 것을 좋아하지 않소.”
처음 만나는 사람이니 이해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는 일이었다. 진산월은 그런 일을 마음에 두는 사람이 아니었다. 하나 이존휘가 왜 하필 그를 자신에게 소개시켜 주었는지는 생각해 봐야 할 문제였다. 이존휘는 아무 뜻 없이 이런 행동을 할 사람이 아니었다. 그때 누군가가 그들에게 다가왔다.
“휘아야, 옆에 계신 분이 누구냐? 나도 인사를 하자꾸나.”
말을 걸어 온 사람은 듬직한 체구의 금의인(錦衣人)이었다. 그가 입고 있는 금의는 언뜻 보기에도 그 화려함이 여느 옷과 달랐다. 고급스러운 옷감에 귀한 금사(金絲)로 꼼꼼하게 바느질을 했고, 군데군데 오색실로 자수(刺繡)를 놓아서 마치 곤룡포(袞龍袍)를 보는 것 같았다. 그런데도 그 금의가 썩 잘 어울려 보이는 것은 아마도 그 금의인의 태도가 너무도 당당하고 표정에 자신감이 넘쳐흐르기 때문일 것이다. 이존휘는 금의인을 보자 한쪽으로 조용히 물러나며 머리를 숙였다.
“아버님, 이분은 종남파의 진 장문인이십니다.”
금의인은 오늘 연회의 주인공인 이세적이었다. 이세적은 장안대호라는 별호로 널리 알려져 있거니와, 누가 뭐라 해도 현재 서안에서 가장 큰 힘을 지닌 인물이었다. 이세적은 진산월을 향해 활짝 웃어 보였다.
“아! 일검(一劍)에 구름을 일으킨다는 바로 그 전설의 주인공을 눈앞에 두고도 몰라봤구려. 정말 죄송하오. 나는 이세적이라 하오.”
“종남파를 맡고 있는 진산월입니다.”
이세적은 유심한 시선으로 진산월을 주시했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 진 장문인을 한 번 만났던 것도 같은데….”
“육 년 전에 선사(선사)와 함께 뵌 적이 있습니다.”
“오! 내 기억이 잘못된 것이 아니었구려. 그런데 그때와는 모습이 많이 달라진 것 같소이다.”
“육 년이란 짧은 세월이 아니지요.”
진산월의 차분한 음성에 이세적은 빙긋 미소 지었다.
“옳은 말이오. 그 세월이면 기울어 가는 문파가 다시 일어날 수도 있고, 홍안의 소년이 강호를 진동시키는 절정고수로 탈바꿈할 수도 있는 기간이지.”
그의 말 속에는 은근한 뼈가 담겨 있었으나 진산월은 아무 것도 모르는 듯 담담한 모습이었다.
“그동안 이 가주께서는 거의 변하신 것이 없는 듯 합니다.”
“하하…. 내 생활이야 항상 같은 일상의 반복일 뿐이니 변하고 싶어도 변할 게 없소.”
이세적의 웃음소리는 호탕하면서도 은은한 위엄이 있어 한 지역의 웅주(雄主)로 손색이 없어 보였다. 이세적은 한차례 주위를 둘러보더니 다시 진산월을 향해 가볍게 포권을 했다.
“아무튼 불초한 이 사람의 회갑 때문에 먼 길을 오신 것에 다시 한 번 감사 드리오. 앞으로 좀 더 자주 봤으면 좋겠소.”
“그렇게 될 것입니다.”
이세적은 다시 한 번 빙그레 웃더니 이내 몸을 돌려 다른 쪽으로 걸어갔다. 이존휘도 곧 진산월에게 작별을 고했다.
“나도 이만 가 봐야겠소. 끝까지 함께 자리하지 못해서 미안하오.”
“괜찮소. 어서 가 보시오.”
이존휘는 묘한 눈으로 진산월을 쳐다보았다.
“나는 우리가 조만간에 꼭 다시 만날 것 같은 예감이 드는 데 진 장문인은 어떠시오?”
진산월의 반응은 무덤덤했다.
“한치 앞도 모르는 게 강호의 일이니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누가 알겠소?”
“하하… 맞는 말이오. 하지만 내 예감은 지금까지 별로 틀린 적이 없으니 다시 만나게 될 그때를 기대하고 있겠소.”
이존휘는 한차례 웃음소리를 남기고 멀어져 갔다. 풍도라고 자신을 소개했던 갈삼청년이 거의 알아차릴 수 없을 만큼 살짝 고개를 숙이고는 그 뒤를 따라갔다. 낙일방은 멀어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보고 있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특이한 사람이군요.”
동중산이 물었다.
“이존휘 말입니까?”
낙일방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저 풍도란 자 말입니다.”
낙일방은 아직도 동중산에게 하대(下待)를 하는 데 어색해 했다. 처음에는 동중산이 질색을 하고 몇 번이나 하대를 하라고 사정했으나 낙일방은 존대에 가까운 호칭을 사용했다. 그런 세월이 삼 년이 넘게 지속되자 지금은 모두들 그러려니 하고 눈감아 주는 형편이었다.
“확실히 너무 평범해서 오히려 조금 이상하긴 하더군요.”
“그게 아니라, 저자가 걸을 때 발걸음 소리가 들리지 않았어요.”
동중산의 외눈이 크게 뜨여졌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처음에 이존휘가 소개시켜 준다고 했을 때도 발자국 소리가 안 들려서 잘못 들었나 싶었어요. 그런데 지금 분명히 알겠군요. 저자는 발자국 소리를 거의 내지 않고 걷고 있어요.”
동중산은 자신도 모르게 사람들 속으로 막 사라져 가는 풍도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아직 공력이 절정에 이르지 못한 그로서는 이 많은 사람들 속에서 한 사람의 발자국 소리를 구별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나 낙일방이 공연한 헛소리를 할 리는 없었다.
‘낙 사숙의 무공은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고 있구나….’
동중산은 낙일방이 이토록 소란스러운 가운데에서도 그런 사실을 알아차린 것이 대견해서 뿌듯한 생각이 들었다. 하나 다음 순간, 그의 안색이 갑자기 바뀌었다. 낙일방이 그것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도 이제 깨달았군요. 강호에서 발자국 소리를 거의 내지 않고 움직이는 부류는 딱 하나밖에 없어요.”
“으음….”
“바로 살인(殺人)을 직업으로 하는 부류들이지요. 저자는 전문 살수(專門殺手)가 확실합니다.”
연회가 절정에 다다르고 있을 즈음, 진산월은 응계성을 대동하고 손노태야를 찾아갔다.
손노태야의 본명은 손결(孫缺). 자신이 직접 지은 이름이었다.
어려서부터 천애고아(天涯孤兒)로 자라온 터라 항상 모든 것이 부족했기 때문에 스스로 그런 이름을 붙인 것이다. 손결은 모진 고생 끝에 스무 살이 넘어서야 간신히 지독한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약간의 돈이 생기자 그가 뛰어든 것은 고리대금업(高利貸金業)이었다. 하나 뚜렷한 인맥(人脈)도 없고, 무공도 알지 못한 그가 거친 고리대금업계에 발을 붙이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강도를 만난 적도 여러 번 있었고, 돈을 뜯긴 적은 셀 수도 없었다. 심지어는 다른 업자(業者)에게 두들겨 맞고 앓아누운 적도 많았다. 그래도 손결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모든 실패를 경험으로 삼아 꾸준히 사업을 확장해 갔다. 돈을 뜯기지 않기 위해서 상대의 뒷조사를 철저히 했고, 확실한 담보(擔保)를 제공해야만 거래를 했다. 강도를 방지하기 위해서 금싸라기 같은 돈을 쪼개 가며 호위무사를 고용했고, 조금씩 인맥을 넓혀 나갔다.
십 년이 지나자 그는 서안의 뒷골목에서 제법 이름난 고리대금업자가 될 수 있었다. 다시 십 년이 지나자 그는 고리대금업에서 손을 떼고 정식으로 작은 전장(錢莊)을 차렸다. 그로부터 이십 년 후, 서안 일대에서 손가전장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언제부터인지 사람들은 그를 손결이라는 이름 대신 손노태야라고 부르기 시작했고, 이제는 그의 본명보다 더욱 유명한 이름이 되었다.
손노태야의 정확한 나이는 아무도 몰랐지만, 그에게 한 명의 망나니 아들이 있다는 건 누구나 알고 있었다. 그의 이름은 손풍(孫豊)이라 했다.
항상 어렵게만 살아온 손노태야가 자신의 자식만큼은 풍요롭게 살라고 하여 붙인 이름이었다. 하나 사실 손풍은 손노태야의 둘째 아들이었다. 첫째 아들인 손화(孫華)는 스물 네 살의 젊은 나이에 앙숙지간인 다른 전장에서 청부한 자객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손노태야는 이 년 후에 그 전장을 파산(破産)시킴으로써 큰 아들에 대한 복수를 했다.
손화가 죽은 후 손노태야는 하나 남은 아들인 손풍을 끔찍이 아꼈으나, 그 바람에 아들이 잘못된 길로 들어선다는 것을 미처 알지 못했다. 그가 아들에 대한 좋지 못한 소문을 들었을 때는 이미 아들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천하에 몹쓸 무뢰한이 되어 있었다.
손노태야는 몇 년 더 아들을 지켜보았으나, 그가 하룻밤 사이에 도박으로 오천 냥이 넘는 거금을 잃자 그를 후계자 지위에서 내쫓는 것으로 아들에 대한 미련을 끊어 버렸다.
지금의 손노태야는 오직 돈 버는 것이 인생의 유일한 낙(樂)이 되어 버린 전귀(錢鬼)나 마찬가지였다.
이런 사람에게 무서운 것이 있을 리 없었다. 강호를 위진시키는 종남파의 장문인이란 이름도 그에게서 눈꺼풀을 한번 껌벅일 정도의 반응밖에는 이끌어 낼 수 없었다.
“무슨 일로 노부를 찾아왔는가?”
일파의 장문인에게 하는 말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의 언사였으나, 다행히 진산월은 단순한 감정으로 찾아온 이유를 망각할 정도로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었다.
“한 가지 상의 드릴 것이 있어 왔습니다.”
손노태야는 주름살 가득한 얼굴로 물끄러미 진산월을 쳐다보더니 알아듣기 힘든 음성으로 말했다.
“노부는 잘 모르는 사람과 상의할 일이 없네.”
“제가 말을 잘못했군요. 거래(去來)할 것이 있습니다.”
손노태야의 눈꺼풀이 다시 한 번 천천히 껌벅였다.
“거래라…. 종남파에 아직도 남과 거래할 것이 남아 있었던가?”
듣기에 따라서는 몹시 모욕적인 말이었으나, 진산월은 조금도 표정이 변하지 않았다.
사실 손노태야의 말은 틀린 말이 아니었다. 예전에 종남파가 구대문파 중 하나로 명성을 날리고 있을 때는 그 부(富)가 막대하여 많은 전답(田畓)과 수십 채의 건물을 가지고 있었지만, 지금의 종남파는 주루 몇 개 외에는 남아 있는 재산이 거의 없는 편이었다.
“미리 말해 두지만, 노부는 술이나 파는 시시한 주루 같은 건 관심이 없네.”
“제가 거래할 것은 사람입니다.”
손노태야의 가느다란 눈이 조금 크게 뜨여졌다.
“사람?”
“그렇습니다.”
손노태야는 고개를 저었다.
“노부에게 미녀라도 바치겠다는 건가? 하지만 노부는 여색(女色)에는 흥미가 없네.”
진산월은 그의 말에는 대꾸하지 않고 자신의 뒤에 서 있는 응계성을 불렀다.
“계성, 이리 오너라.”
응계성은 지금까지 얼굴이 울그락불그락한 채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비록 마음의 각오를 단단히 하고 왔지만, 잠깐 옆에서 지켜본 것만으로도 분노가 폭발할 지경이었다.
그는 한차례 깊은 심호흡을 했다.
‘나는 할 수 있다. 두 번 다시 장문사형을 실망시키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는 조금 전보다 한결 침착한 모습으로 한쪽 다리를 절며 앞으로 걸어나왔다.
“이 사람은 제 사제입니다. 인사드려라.”
응계성은 정중하게 포권을 했다.
“방산의 응계성이라고 합니다.”
손노태야는 그를 힐끔 쳐다보더니 이내 심드렁한 표정이 되었다.
“노부는 남색(男色)에도 취미가 없네.”
진산월은 담담한 모습이었다.
“그럴 생각이었다면 좀 더 젊고 잘생긴 소년을 데려왔을 겁니다. 제가 사제를 데려온 건….”
손노태야는 손을 들어 그의 말을 막았다.
“아! 자네가 무슨 말을 할지 모르지만 노부는 관심 없네. 거래는 깨졌으니 이만 가 보게.”
응계성의 얼굴이 다시 붉어지며 숨이 거칠어졌다.
하나 진산월의 차분하면서도 흐트러짐 없는 음성을 듣자 들끓던 마음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거래란 공평해야 하는 겁니다. 제가 거래 내용을 밝히지도 않았는데 일방적으로 거절하는 건 올바른 거래가 아니지요.”
손노태야의 눈에 차가운 빛이 감돌았다.
“자네가 감히 노부에게 거래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건가?”
“저는 그저 평생을 남과 거래하며 살아온 손노태야라면 거래에 서툰 애송이를 상대할지라도 불공평한 일은 하지 않으리라고 믿고 있을 뿐입니다.”
손노태야는 주름진 시선으로 물끄러미 진산월을 바라보더니 느릿느릿 입을 열었다.
“젊은 친구가 제법 말을 잘하는군. 어디 자네가 하려는 거래가 무엇인지 말해 보게.”
진산월은 응계성의 어깨에 한 손을 올려놓았다.
“제 사제는 믿을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제 사제를 손노태야께 드리겠습니다.”
손노태야는 응계성에게는 시선조차 주지 않은 채 계속 진산월을 응시했다.
“무공의 고수라면 노부에게도 많이 있네. 더구나 절름발이 고수라면 말할 것도 없지.”
“그는 무공의 고수가 아닙니다.”
“…?”
“그는 믿을 수 있는 사람입니다.”
아까와 똑 같은 말을 반복했지만 그 풍기는 의미는 천양지차였다. 손노태야는 잠시 침음하더니 예의 잠기는 듯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자네의 사제라니 자네가 제일 잘 알겠지. 하지만 그게 어쨌다고? 노부가 손가락 하나만 까닥하면 지금 당장이라도 노부를 위해서 목숨을 바칠 수 있는 사람을 수백 명도 더 모을 수 있네.”
“그들을 믿을 수 있습니까?”
손노태야는 다시 침묵을 지켰다.
“때로는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신의(信義)를 지키는 것이 더 어려울 때도 있습니다. 제 사제는 절대로 다른 사람의 믿음을 배반하지 않습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믿고 일을 맡길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제 사제입니다.”
손노태야는 묵묵히 앉아 있었다. 크고 작은 주름살로 뒤덮여 있는 그의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도 떠올라 있지 않았고, 눈빛도 깊게 가라앉아 있어서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손노태야는 한참 후에야 다시 말문을 열었다.
“그래서 노부에게 무엇을 요구하는 건가?”
진산월의 대답은 전혀 뜻밖이었다.
“사람 하나를 주십시오.”
손노태야의 눈꺼풀이 거의 알아차리기 힘들 정도로 살짝 움직였다.
“사람을 사람과 거래하겠다? 일단 공평한 생각이군. 그래, 누구를 원하는가?”
“손풍입니다.”
손노태야는 가만히 있는데 옆에 있던 응계성의 입에서 억눌린 듯한 작은 신음성이 흘러나왔다. 응계성이라고 왜 손풍의 악명(惡名)을 듣지 못했겠는가? 아버지도 포기한 천하의 망나니. 술과 노름이 없으면 단 하루도 살지 못하는 희대의 주정뱅이. 아무에게나 주먹을 휘두르고 욕설을 내뱉는 세상에 둘로 없는 무뢰한(無賴漢). 모두 손풍을 지칭하는 화려한 수식어들이었다. 자신이 아무려면 그런 인간쓰레기와 같은 취급을 받아야 한단 말인가? 손노태야는 주름이 가득 뒤덮인 손으로 자신의 이마를 긁더니 다시 물었다.
“그놈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데 데려다 어디에 쓰려는가?”
진산월은 엉뚱한 말로 대답을 대신하였다.
“손노태야가 제 사제를 어떻게 대하든 저는 상관하지 않겠습니다.”
“그래서 노부에게도 상관하지 마라? 확실히 공평하군.”
“거래를 하시겠습니까?”
손노태야는 진산월의 얼굴을 가만히 응시하더니 이내 눈꺼풀을 천천히 내리감았다. 잠이 들지 않았나 의심할 정도의 시간이 흐른 후에야 손노태야의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자네는 요즘 젊은이들답지 않게 거래가 무엇인지 알고 있는 사람이군. 그놈은 화월루의 후원에서 술에 찌들어 자고 있을 걸세. 지금 이 시간 부로 그놈의 생사(生死) 소관(所關)은 자네에게 있네.”
“알겠습니다.”
진산월은 가볍게 목례를 하고는 응계성에게는 일언반구 말도 없이 떠나 버렸다. 언뜻 매정해 보이는 모습이었으나, 응계성은 그의 심정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목숨처럼 아끼는 사제의 생사(生死)를 남에게 맡기고 돌아서는 심정을 어찌 말로 표현하겠는가? 어떤 말이나 행동도 지금은 불필요한 것이었다. 손노태야는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이리 오너라.”
응계성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그에게 다가왔다.
“무릎을 꿇어라.”
응계성의 눈자위가 한차례 실룩거렸다. 하나 그는 아무 말도 없이 손노태야의 앞에 두 무릎을 꿇었다. 손노태야는 무심한 음성으로 재차 입을 열었다.
“머리를 숙여라.”
응계성이 바닥에 머리를 숙이자 손노태야는 두 발을 쭉 뻗어 그의 뒤통수에 올려놓았다.
“이제야 좀 편하군.”
얼굴을 바닥에 대고 있어서 응계성의 표정은 알 수가 없었으나, 그의 양어깨가 가늘게 떨리고 있는 것은 누구라도 알아볼 수 있었다. 갑자기 손노태야는 오른발로 응계성의 어깨를 세차게 걷어찼다.
팍!
응계성은 일 장 밖으로 나뒹굴었다. 그때 손노태야가 다시 말했다.
“이리 와라.”
응계성은 천천히 그에게로 다가왔다.
“무릎을 꿇어라.”
응계성은 무릎을 꿇었다. 이상하게도 그의 얼굴에는 엷은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손노태야는 그의 얼굴을 쳐다보더니 조금 전과 똑 같은 말을 했다.
“머리를 숙여라.”
응계성이 머리를 숙이자 손노태야는 다시 그를 걷어찼다. 그런 다음 재차 그를 불렀다. 이런 일이 몇 번을 반복해서 일어났다. 그때마다 응계성의 입가에 떠올라 있는 미소는 점점 더 짙어졌다. 다섯 번째로 응계성을 무릎 꿇게 한 다음 손노태야는 처음으로 다른 명령을 했다.
“얼굴을 들어라.”
응계성은 천천히 고개를 쳐들었다. 그의 얼굴에는 안면 전체가 일그러지도록 커다란 웃음이 떠올라 있었다. 손노태야는 물끄러미 그의 얼굴을 응시하고 있다가 나직한 음성으로 물었다.
“왜 웃는 거냐?”
응계성은 더 이상 구겨질 수 없을 만큼 활짝 웃으며 말했다.
“습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