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16권 봉황무종(鳳凰無踪)편 : 10화
제 165장 운개만천 (雲蓋滿天)
대원선사마저 스스로 자진(自盡)하자 장내의 이목은 이제 이존 휘에게 고정되었다.
반전(反轉)에 반전을 거듭하던 상황은 모두 정리되었고, 이제 이존휘만이 위태로운 벼랑 끝에 홀로 서 있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처음 이존휘가 이세적을 죽인 흉수로 진산월을 지목했을 때부터 매장원과 인시망, 대원선사의 거듭된 변절이 밝혀질 때까지 불과 반시진밖에 흐르지 않았지만 이곳에 모인 군웅들은 수십 성상(星霜)을 보낸 듯한 감정을 느꼈다.
이존휘의 심정은 더욱 그러할 것이다.
그런데도 이존휘는 아직도 냉정을 잃지 않고 있었다.
그는 자신을 응시하는 수많은 군웅들의 시선에는 일별조차 하지 않고 오직 진산월만을 주시한 채 빙긋 웃었다.
“과연 놀랍군. 이건 모두 당신의 솜씨인가?”
“나는 그저 자네 계획의 허점을 지적했을 뿐이야. 그 허점이 커져서 스스로 분해되어 버린 것이지.”
두 사람은 언제부터인가 서로간에 말을 놓고 있었다.
“그런가? 몰랐군. 나는 내 계획이 그런대로 완벽하다고 생각했단 말이야.”
“나는 처음부터 왜 자네가 각파에 배반자가 있다는 암시를 주는 암습을 했는지가 의심스러웠네. 그 암시는 너무나 명백해서 의심의 여지가 없었거든.”
“………………….”
“그래서 그 암시로 자네가 무엇을 얻게 될 것인지를 생각해 봤지. 각파에서 배반자가 있다는 게 분명해지면 틀림없이 배반자를 색출하게 되겠지. 그런데 사실은 배반자로 낙인찍힌 자가 배반자가 아니라면? 그리고 그를 배반자로 몰아넣은 바로 그자가 배반자라면? 그렇게 생각하자 자네의 의도가 일목요연해지더군.”
이존휘는 짐짓 탄성을 토해냈다.
“정말 대단하군. 그런 단순한 생각만으로 내 계획을 꿰뚫어 보다니 말이야.”
“처음의 생각이 어렵지 일단 그렇게 전제를 하고 나니까 나머지는 술술 풀리더군. 자네는 각파에서 자네의 의도를 파악할 가능성이 있는 자들을 배반자로 몰아 제거하고 자네의 수하들을 우두머리로 삼으려 한 것이겠지. 그래서 나는 오늘 아침에 천봉궁의 사람들에게 부탁해서 각파의 배반자 색출 작업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를 알아 오도록 했네.”
진산월의 음성은 너무나 담담해서 마치 독백을 하고 있는 것처럼 들렸다.
“아니나 다를까, 소림에서는 소신승 정화, 화산에서는 신산 곡수, 그리고 개방에서는 철심수사 모관이 배반자로 몰려 제거 당했더군. 그들은 하나같이 두뇌가 총명하고 채질이 비범하여 앞날이 창창한 젊은 인재들인 데 말일세. 그리고 매장원과 인시망, 대원선사가 모든 실권을 완벽하게 장악했지.”
이존휘는 히죽 웃었다.
“내가 생각해도 조금 잔인한 짓이기는 했어. 하지만 그자들은 너무 총명해서 이미 매장원과 인시망 등에게서 수상한 점을 발견하고 뒷조사를 하고 있었지. 그들을 제거하지 않았으면 매장원 등의 신분은 곧 발각되고 말았을 거야.”
“자네로서도 선택의 여지가 없었겠지. 아무튼 그래서 나는 은밀히 사람을 풀어 그들 세 사람의 행방을 찾게 했네. 다행히 그들은 모두 자신들이 살아날 구멍을 미리 만들어 놓고 있었더군. 나머지는 굳이 말 안 해도 되겠지?”
이존휘는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결국 그렇군. 나 한 사람으로 그런 기재들을 모두 상대하려 했으니 여기저기서 허점이 보일 수밖에. 아무튼 이래서 강호의 일이란 재미 있다니까. 정말 한치 앞도 예측하기 어려운 게 강호의 삶 아닌가?”
진산월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다가 돌연 진지한 음성으로 물었다.
“한 가지만 말해 주지 않겠나?”
“말해 보게. 대답할 수 있는 건 기꺼이 말해 주지.”
진산월은 이존휘의 얼굴을 찬찬히 주시하다가 물었다.
“자네가 취미사 혈겁을 저지른 진정한 목적이 무엇인가?”
이존휘의 얼굴에 엷은 미소가 떠올랐다.
“그걸 알고 싶나?”
진산월은 솔직히 시인을 했다.
“그렇네. 많은 사람들이 자네의 목적에 대해서 각기 다른 의견을 제시했지만 단 한 가지도 내 마음에 흡족한 게 없었네. 자네는 단순한 살인광도 아니고 무림인들이 서로 죽이는 모습을 보고 쾌감을 느끼는 미치광이도 아닐세. 또 서장무림의 중원 침략을 위한 도구라고 보기에도 어폐가 있지. 자네 자신은 중원인이 아닌가? 스스로의 존재마저 부정하며 일을 꾀한다는 건 자네답지 못한 짓이지.”
이존휘의 얼굴에 떠올라 있는 미소가 조금 더 짙어졌다.
“이거 통쾌하군. 자네는 나를 진정으로 이해해 준 첫 번째 사람일세. 나의 심혈을 기울여 세운 계획을 깨뜨린 사람이 나를 유일하게 이해한 사람이라니‥‥‥ 이래서 인생은 재미 있다니까.”
“말해 주게. 자네의 목적은 무엇인가?”
이존휘는 진산월의 두 눈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진정으로 알고 싶나?”
진산월은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싶네.”
이존휘는 웬일인지 침묵을 지켰다. 말하기 싫으면 거절을 하든지 아니면 거짓말을 하면 될 텐데 그는 심각한 고민에 빠진 표정으로 생각에 잠겨 있는 것이다.
진산월 또한 더 이상은 재촉하지 않고 가만히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한참 후에야 이존휘는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무래도 안 되겠네.”
“이해하네.” 진산월이 담담한 음성으로 대답하자 이존휘의 눈이 번쩍 빛났다.
“진정으로?”
“그래. 자네 입으로 내가 자네를 이해하는 유일한 사람이라고 하지 않았나?”
“하하‥‥‥‥”
무엇이 그리도 통쾌한지 이존휘는 허공을 올려보며 한참이나 웃음을 터뜨렸다.
진산월은 하얀 이를 드러내며 마음껏 웃고 있는 이존휘를 바라보다가 혼잣말처럼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자네의 아버지를 해친 흉수가 누구인지 알고 싶지 않나?”
“………………….”
이존휘의 웃음이 거짓말처럼 그쳤다.
이존휘는 다시 고개를 떨구어 진산월을 쳐다보았다.
조금 전과는 달리 냉기가 흐르는 모습이었다.
“그런 농담은 자네답지 않은걸.”
“난 이런 자리에서 농담 같은 걸 하는 체질이 아닐세.”
그의 말의 진위를 확인하려는 듯 이존휘는 한동안 칼자국이나 있는 진산월의 얼굴을 가만히 쳐다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농담과는 거리가 먼 얼굴이로군. 자네는 정말 내 부친을 살해한 홍수가 누구인지 알고 있나?”
“그렇다고 생각하네.”
무슨 이유에서인지 이존휘는 선뜻 그에게 물어보지 않았다.
다만 무언가 상넘에 잠긴 듯한 얼굴로 가만히 서 있을 뿐이다. 그의 눈가에 의미 모를 고민이 스치고 지나갔다.
한참 후에야 이존휘는 조용한 음성으로 말했다.
“말해 보게.”
“내가 후원의 뇌옥에 잠입한 날 말일세.”
이존휘의 눈에서 번적하는 섬광이 피어올랐다.
“과연 뇌옥에서 사람을 구출해 간 자는 자네였군. 정말 멋진 솜씨였네.”
“칭찬으로 듣겠네. 그런데 그날, 나 외에도 그곳에 간 사람이 또 있었네.”
“처음에 가산에 침입했다가 쫓겨난 친구 말이군.”
“알고 있었군.”
“단순한 도적이라고 생각했지. 그런데 아닌가 보군?”
“그는 마정기란 인물일세.”
“이름은 들어 본 것 같군. 칠살추혼이던가?”
“그래. 그는 친구인 지일환을 구하기 위해 그곳에 갔던 것일세.”
이존휘는 피식 웃었다.
“정말 의리 좋은 친구로군.”
“그는 가산에서 쫓길 때 심각한 부상을 당했는데, 부상이 너무 심해 멀리 도망가지 못하고 가산 근처의 나무 위에 숨어 있었다고 하네.”
“그런데 삼경쯤 되었을 때 누군가가 가산의 앞에 나타나더니 비밀문을 열고 암도(暗道)로 들어갔다고 하더군. 그리고는 반각 후에 다시 암도 밖으로 나와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네.”
언제부터인가 이존휘의 얼굴에는 미소가 씻은듯이 사라져 있었다. 그는 눈도 깜박거리지 않고 진산월의 입을 주시했다.
“마정기는 부상이 심해 비몽사몽하는 와중에도 그자의 얼굴을 똑똑히 보았다고 하네.”
진산월이 여기까지 말했을 때 누군가가 커다란 소리로 외쳤다.
“진 장문인 이제 그만 취미사 혈겁의 범인인 이존휘를 처단하는 게 어떻겠소?”
공료는 그들의 대화가 너무 길어서 지루함을 느꼈는지 짜증스런 표정이 역력했다. 두 사람의 대화는 너무 나직해서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들은 그들이 무슨 대화를 나누고 있는지를 알지 못했다.
그러지 않았다면 이런 순간에 방해를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진산월은 그의 외침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이존휘를 쳐다보았다.
이존휘의 얼굴은 석상처럼 굳어 있었으나, 눈가에는 가느다란 경련이 쉴 사이 없이 일어나고 있었다.
“말해 주게. 마정기가 보았다는 그자가 누구인가? 이 자리에 있는 자인가?”
진산월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마정기가 본 자는‥‥ 평범한 인상의 이십대 청년이라고 했네.”
이존휘는 의외인 듯 눈을 슬쩍 치켜떴다.
“평범한 인상의 이십대 청년?”
“평범한 인상에 짙은 갈삼을 입은 청년. 그게 마정기가 나에게 밝힌 그자의 인상착의일세.”
이존휘의 신형이 멀리서도 알아볼 수 있을 만큼 확연하게 떨렸다.
마정기가 말한 그자가 누구인지를 깨달은 것이다. 진산월은 몸을 부르르 떨고 있는 이존휘를 바라보더니 조용하게 중얼거렸다.
“다행히 나는 며칠 전 그와 유사한 자를 만난 적이 있지. 자네의 소개로 말일세.”
이존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고 있을 뿐이다. 그때 누군가가 그들에게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는 공료였다.
공료는 자신이 몇 번이나 소리쳤는데도 진산월이 들은 척도 하지 않자 답답함을 참지 못하고 다가온 것이다.
“무슨 이야기가 이렇게 긴가? 이제 이쯤에서 취미사 혈겁의 흉수를 제거하고 무림의 소란을 막는 것이 낫지 않겠나?”
두 사람은 그의 말에는 신경도 쓰지 않고 서로를 가만히 응시했다.
문득 진산월의 눈을 쳐다보던 이존휘가 무언가를 느낀 듯 눈빛이 미묘하게 변했다.
그는 나직한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그놈은 연공실의 열쇠를 가질 수가 없네. 여기에 온 지 며칠밖에 되지 않았거든.”
진산월의 음성도 그에 견줄 만큼 나직했다.
“연공실의 열쇠는 다른 누군가가 그에게 주었을 걸세. 이 가주를 죽이라고 사주한 사람이.”
“그가 바로 원흉(元兇)이로군.”
“그렇지. 풍도는 단순한 소모품에 불과할 뿐이야. 진짜 원흉은 그자를 사주하고 연공실의 열쇠를 준 자일세.”
“연공실의 열쇠를 가진 자가 누구인지 아나?”
“자네 부친은 예전에 서안삼걸이란 이름으로 알려져 있었네.”
이존휘는 고개를 저었다.
“나는 잘 모르겠는걸.”
“삼십 년도 더 된 시절의 일이라 나도 이번에 알게 되었네. 그 한 사람은 내가 뇌옥에서 구출해 간 노인일세.”
“그럴 것 같았네. 부친과는 보통 사이가 아니라고 짐작했지.“
“자네 부친은 서안삼걸의 둘째였네.”
“그리고 서안삼걸의 막내는‥‥‥‥ “
그때 마침내 그들의 지척까지 다가온 공료가 버럭 노성을 질렀다.
“아무리 자네가 종남파의 장문인이라고 해도 나를 너무 무시하는 게 아닌가? 나도 어엿한 한 조직을 이끌고 있는 사람일세.”
진산월과 이존휘의 시선이 마주쳤다.
“바로 이자일세.”
진산월은 웅얼거리듯 말했고 이존휘는 알아들었다. 공료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손을 내밀어 진산월의 어깨를 잡으려 했다.
그 순간.
진산월은 몸을 빙글 돌렸다. 그러자 그의 신형은 어느새 공료의 뒤로 가 있었다. 덕분에 공료는 이존휘와 마주선 자세가 되었다.
“엇?”
공료는 손을 내밀던 자세 그대로 멈춰 선 채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와 시선이 마주치자 이존휘는 하얀 이를 드러내며 활작 웃었다.
“또 만나게 되었군요, 공 국주님. 아니 셋째 숙부님이라고 해야 하나?”
공료의 안색이 홱 변했다.
이어 그가 몸을 움직이려는 순간, 이존휘의 몸이 비호처럼 날아와 그의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공료는 사력을 다해 몸을 뒤로 젖히며 양손을 휘둘렀다.
그러자 거무튀튀한 장력이 노도와 같은 기세로 뿜어 나왔다. 그의 성명절기(聲名絶技)인 흑살장(黑殺掌)이었다. 그는 이 흑살장으로 강북무림에서 장력(掌力)으로는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 고수가 될 수 있었다.
하나 이존휘는 피하기는커녕 더욱 빠르게 그의 품속으로 다가들며 오른손을 앞으로 주욱 내뻗었다. 그의 손이 평상시보다 두 배쯤 커진 듯한 착각이 들었다.
하나 그것은 착각이 아니었다.
꽈꽝!
귀청이 터지는 듯한 폭음이 터져 나오며 처절한 비명이 장내를 송두리째 뒤흔들었다.
“끄아아악!”
놀랍게도 흑살장을 펼쳤던 공료의 몸이 지푸라기처럼 허공을 훌훌 날아오 장 밖으로 나가떨어지고 있었다. 피분수를 뿌리며 날아가는 그의 몸은 하나의 혈구(血球)에 지나지 않았다.
그의 몸은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바닥에 떨어졌다.
“으음‥‥‥‥
중인들의 입에서 도저히 억누르기 힘든 신음이 흘러나왔다.
공료는 가슴 부근이 움푹 꺼진 채 칠공(七孔)으로 시커먼 피를 뿌리며 숨이 끊어져 있었던 것이다. 대체 얼마나 강력한 장공이기에 공료가 전력을 다해 흑살장을 펼쳤는데도 이런 꼴을 당한 단말인가? 중인들 중 한 사람이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공료의 앞가슴을 들춰 보았다.
“아‥‥‥!”
그의 입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움푹 꺼진 공료의 앞가슴에는 보통 사람의 두 배쯤 되는 듯한 거대한 손자국이 선명하게 적혀 있었던 것이다.
그 손바닥을 보는 순간 사람들의 입에서 다급한 외침이 터져 나왔다.
“대수인(大手印)…………….이것은 밀종(密宗)의 대수인이다!”
그 말은 가득이나 소란스러운 장내를 삽시간에 난장판으로 만들었다.
“뭐라고
‘서장의 제일무공인 대수인이 나타났다!”
“만상공자 이존휘가 밀종의 후예란 말인가?”
중인들의 시선이 피투성이로 변한 공료에게서 이존휘에게로 향했다. 이존휘 또한 완벽하게 무사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이마에 쓴두건이 풀어 헤쳐지고 얼굴이 시체처럼 창백하게 변한 채 입가에는 가느다란 핏줄기를 흘리고 있었다.
하나 그는 곧 몸을 똑바로 멈춰 세운 채 빙긋 웃으며 공료의 시체를 쳐다보았다.
“저놈이 바로 쾌의당의 서안 책임자였군.”
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뜻밖의 소리에 중인들이 어리둥절했다.
이존휘는 입가로 계속 피를 흘리면서도 진산월을 돌아보며 말했다.
“풍도는 내가 자네를 해치워 달라고 부탁하여 쾌의당에서 보낸 살수(殺手)일세. 그런 풍도를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 자는 쾌의당의 서안 책임자뿐이지.”
“그리고 풍도가 무슨 수법으로 부친을 살해했는지도 알겠네. 그 건 바로‥‥‥‥ ”
바로 그때였다.
어디선가 하나의 검이 날아와 이존휘의 옆구리를 그대로 관통해버렸다. 그 검이 날아드는 속도는 너무도 빨라서 설사 이존휘가 알고 있다 해도 피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헉!”
이존휘는 허리를 반으로 접은 채 그대로 바닥에 허물어져 버렸다.
순간 진산월의 신형이 한쪽으로 날아갔다.
그곳에는 막 검을 날려 이존휘를 쓰러뜨린 매장원이 차가운 눈빛을 뿌리며 우뚝 서 있었다.
그의 손에는 어느새 또 다른 장검 하나가 쥐어져 있었다.
진산월과 시선이 마주치자 매장원의 입가에 냉랭한 미소가 떠올랐다.
“마침내 만났구나.”
“많은 사람들이 네가 백년 만에 나타난 최고의 검객이라고 하더군. 하지만 나도 사십 년이 넘게 검 하나에 모든 것을 바치며 살아온 사람이다. 그리고 검으로는 화산과의 누구에게도 뒤진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지. 심지어는 사형인 용진산에게도 말이야. 그래서사형이 더욱더 나를 부담스러워 했는지도 모르지.”
매장원은 이미 자신은 화산파의 제자가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화산파의 장문인인 용진산의 이름을 함부로 불렀다.
하나 그의 전신에서 피어 나오는 구름 같은 기세를 본 중인들은 아무도 그에게 무어라고 하지 못했다. 그러한 기세는 평생을 검과함께 살아온 절정의 검객만이 발출할 수 있는 것이었다. 매장원은 수중의 장점을 한 손으로 잡은 채 천천히 들어올렸다.
“이백 년 전만 해도 종남파의 검법이 강호제일이라고 들었다. 네가 이백 년 만에 종남파의 검법을 재현(再現)했다면 나의 좋은 적수가 될 만하다. 그렇지 않고 떠들기 좋아하는 호사가(好事家) 들의 입방정에 불과하다면‥‥‥ 너는 오늘 이곳에서 뼈를 묻게 될것이다.”
진산월은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천천히 허리춤에차고 있는 용영검을 뽑아 들었을 뿐이었다. 소리도 없이 빠져 나온 용영검은 특유의 우윳빛 검광을 뿌린 채 그의 손에 쥐어졌다. 매장원은 두 눈을 빛내며 그를 응시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검을 잡은 자세는 완벽하군. 네 나이에 그런 자세를 잡을 수 있다면 그동안 얼마나 피땀 어린 노력을 기울여 왔는지 알겠다. 검은다른 무공과 달라서 아무리 재질이 뛰어나도 본신의 노력이 없이 는 결코 절정에 이르지 못하는 법이지.”
진산월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당신의 자세도 몹시 좋소”
언뜻 매장원의 차가운 얼굴에 냉랭한 미소가 스치고 지나갔다.
“내가 농담한 줄 아느냐? 현재의 화산파에서 검으로 나를 이길 자는 아무도 없다. 비슷한 실력을 지닌 자는 한두 명 있겠지만 말이다.”
그의 음성은 그리 크지 않았으나 자신감에 가득 차 있어 누구라도 믿지 않을 수 없었다. 실제로 화산파의 고수들은 대부분이 자신 들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만큼 매장원은 외부에 알려진 것보다 더욱 뛰어난 검객이 었다. 진산월은 매장원의 투명하도록 차가운 두 눈을 가만히 보고 있다가 불즉 물었다.
“당신도 쾌의당의 인물이오?”매장원의 눈가가 살짝 찌푸려 졌으나 이내 정상으로 돌아왔다
“내 검을 꺾으면 말해 주지.”
“좋소”
진산월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를 향해 성큼 다가갔다. 언뜻 경망스러워 보이는 그의 이 모습에 중인들은 눈살을 찌푸렸 으나, 몇몇 고수들은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아무 생각도 없이 걷는 것 같아도 검을 든 채 움직이는 순간 그몸은 검과 하나가 되어 날카로운 기세를 뿜어내고 있었다. 그야말로 검신동체(劍身同體)가 되어 버린 것이다.
매장원도 그것을 느꼈는지 눈빛이 더욱 매섭게 변했다.
진산월이 자신에게서 삼 장 떨어진 곳까지 접근했을 때 매장원이 먼저 발검(拔劍)을 했다. 어지간한 고수들의 눈에는 그가 발검하 는 모습이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다.
단지 그의 오른쪽 소매가 흔들린다 싶은 순간, 무언가 차가운 검광이 진산월의 코앞으로 쏘아져 가는 광경을 보고 그가 검을 휘둘렀음을 알아차렸을 뿐이다.
진산월의 반응 또한 그에 못지않게 신속했다.
진산월은 걸음을 옮기는 자세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용영검을 움직여 매장원의 길을 막아 갔다.
한데 검과 검이 부딪치려는
순간,
빙글!
매장원의 검이 기이하게 꿈틀거리더니 용영검의 검신(劍身)을 타고 주르르 미끄러져 내려왔다. 진산월이 한차례 손목을 떨치자용영검에서 막강한 경기가 흘러나와 매장원을 저만치 밀어냈다.
한데 바로 그때였다.
용영검에서 경기가 흘러나오는 순간, 그 경기를 타고 매장원의 점이 빠르게 튀어 올랐다.
마치 진산월이 그런 식으로 검을 떨치길 라는 것을 알고 있는 것처럼 매장원의 검은 시의 적절하게 튀어 올라 진산월의 목덜미를 향해 무서운 속도로 날아들 었다. 별다른 초식도 없이 날아오는 이와 같은 공세는 진산월도 아직 받아 본 적이 없었다.
그때 진산월은 막 걸음을 내딛고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옆으로 피하든지 용영검을 움직여 공격을 막는 수밖에 없었다. 진산월이 선택한 것은 용영검으로 매장원의 공세를 막는 것이었다.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기세를 타고 있었기 때문에 흐름을 깨기 싫었던 것이다. 한대 용영검이 막아서려 하자 매장원의 검이 미묘한 변화를 뿌려내더니 무려 일곱 개의 매화 송이가 튀어나왔다.
이 칠지매화(七枝梅花)의 검초는 이십사수 매화검법 중의 최정화라 할 만한 무시무시한 수법이 었다. 더구나 진산월이 막 용영검으로 자신의 목 부 분을 보호하는 시기라서 일곱 개로 나뉘어져 들어오는 매화 송이를 모두 막을 수는 없었다.
결국 진산월은 내딛던 걸음을 멈추고 몸을 옆으로 이동시켰다.
파파팟!
네 개의 매화송이가 무시무시한 파공음을 내며 그의 옆을 스치고 지나갔다. 하나 나머지 세 개의 매화 송이는 한치의 오차도 없이 그의 목덜미와 미간, 그리고 명치 부분을 정확히 노리고 날이들 었다.
절체절명의 순간,
진산월의 용영검이 마구 요동을 치더니 구름 같은 검기를 피워 올렸다. 마침내 진산월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유운검법중의 유운출곡(流雲出谷)을 펼친 것이다.
과연 유운출곡은 단숨에 세 개의 매화 송이를 모두 박살내고 오히려 매장원에게로 무섭게 확산되어 갔다. 하나 어느새 매장원은 더욱 무시무시한 살수를 준비하고 있었다.
유운출곡의 검세가 채 반도 뻗어 나가기 전에 산산이 흩어진 줄 알았던 매화 송이들이 합쳐지더니 다시 갈라졌다. 그리고는 무려 열두 개의 매화 송이를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닌가?
매화 송이는 사실 검으로 만든 검화(劍花)에 불과한데, 이 검화가 살아있는 꽃처럼 흩어졌다 다시 합쳐지는 것을 자유자재로 하니 그 광경이 보는 이 의 넋을 나가게 만들 정도였다.
이것이야말로 매장원으로 하여금 담로검이란 별호를 얻게 했던 십이매화로(十二梅花爐)의 수법이었다.
각각의 매화 송이가 마치난로처럼 사방으로 검기를 발출하여 종내에는 상대로 하여금 대항 할 의지조차 꺾어 버리게 만드는 것이다.
화산파의 이십사수 매화 검법에서 파생되었으나 매화검법과는 확연히 구분되는 웅혼한 위력을 지닌 초식이었다. 진산월의 용영검에 시퍼런 검기가 어리더니 마치 거대한 기둥 같은 검광이 폭사해 나왔다.
유운검법 중의 절초인 유운검봉이 펼쳐진 것이다.
유운검봉은 하나둘 늘어나더니 이내 열두 개의 검봉(劍峯)을 형성했다. 그것들은 눈 깜박할 사이에 매장원이 발출한 열두 개의 화로(花爐)들과 정면으로 격돌해 버렸다.
파파파팡!
고막이 터질 듯한 파공음이 거푸 터져 나오며 세찬 경기가 사방을 휩쓸었다.
제법 멀찌감치 떨어져서 이들의 놀라운 대결을 지켜보고 있던 군웅들은 구름 같은 검기가 사방으로 휘날리자 대경실색하여 황급히 십여 장 밖으로 물러났다.
그들의 동작이 조금만 굼떴다면 폭발하는 듯한 두 사람의 검기에 휩싸여 전신이 갈가리 찢겨지고 말았을 것이다.
하나 그들은 이내 다시 십 장을 물러나야만 했다.
두 사람의 격돌하는 여파가 점점 더 커져서 피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장내에 모인 사람들 중 고수 아닌 사람이 없었지만 모두들 입을 딱 벌린 채 두 절정검객의 싸움을 바라보고 있었다.
진산월의 유운검법은 말 그대로 무궁무진한 변화를 일으키며 매장원의 전신을 압박하고 있었고, 매장원 또한 매화 송이를 자유자재로 변화시켜 진산월의 허점을 파고 들어갔다.
순식간에 백여 초가 흘렀으나 누구도 결정적인 우세를 잡지 못했다. 처음에는 진산월이 매장원의 노련한 솜씨에 약간 밀리는 듯했으나 유운검법을 펼치기 시작한 뒤로는 백중세(伯仲勢)를 유지하고 있었다.
차차차창!
다시 요란한 검명과 함께 그들의 길이 불똥이 튀기며 수십 번의 격돌을 일으켰다. 그와 함께 무시무시한 검기가 사방으로 흩뿌려졌다.
그 검기 한 가닥 한 가닥의 위력은 실로 놀라워서 바닥이 움푹움푹 파였고, 검기가 스친 대청의 담벼락이 쩍쩍 갈라지고 있었다.
어느새 그들의 주위에는 반경 이십 장이 넘는 공간이 형성되어 있었다. 그 검기의 소용돌이 안에는 멀쩡한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다시 백 초가 지났다.
중봉을 떠난 이후 처음으로 진산월은 유운검법의 모든 초식을 펼쳤다. 그것으로 약간의 우세를 점하기는 했으나 결정적인 승기(勝氣)는 잡지 못했다.
화산파에서 검으로는 자신을 당할 고수가 없을 거라는 매장원의 장담은 허언(虛言)이 아님이 분명했다. 매장원은 그가 출도한 이후 싸웠던 어떤 고수들보다 강했다.
그의 검법은 기묘하면서도 웅장했고, 영활하면서도 강력했다.
더구나 그의 대전 경험은 진산월과는 비교도 피지 않을 정도로 풍부해서 가끔은 상식을 벗어난 공격을 가해오기도 했다.
그때마다 진산월은 잠깐의 우세에서 벗어나 다시 평수(平手)를 유지해야만 했다.
진산월로서는 그야말로 모처럼 유운검법의 모든 초식을 마음껏 펼칠 수 있는 기회를 잡은 셈이었다.
삼백 초가 지났을 때,
진산월은 돌연 수중의 장검을 거두어들였다.
그때 매장원은 자신이 매화검법을 변형시켜 만든 담로검법의 가장 무서운 초식인 노화광란(爐花狂亂)을 펼치고 있었다.
지금까지 와는 다른 살벌한 검기가 사방을 뒤덮고 있는데 갑자기 진산월이 검을 거두었으니 그의 전신이 금시라도 검기에 난자당할 듯 노출된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앗!”
중인들 사이에서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진산월의 몸이 폭발하듯 피어오르는 수십 송이의 매화에 파묻히려는 순간, 그의 손에 들린 용영검이 갑자기 사라져 버렸다.
아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단지 너무도 빠르게 움직이는 바람에 중인들의 눈에서 검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된 것이다.
그와 함께 수십 송이의 매화 더미 속에서 한 줄기 구름이 피어올랐다. 구름은 그리 크지 않아서 마치 작은 솜뭉치를 연상케 했다.
하나 매화 송이에 닿으려는 찰나,
그 솜뭉치는 무서운 기세로 확산되더니 순식간에 장내를 완전히 뒤덮어 버렸다.
“아앗!”
이십 장 밖에서 구경하고 있던 중인들조차 자신들의 몸이 그 구름 속에 휩싸이는 듯한 느낌에 놀란 외침을 토하며 분분히 뒤로 물러나야만 했다.
작은 솜뭉치에서 순식간에 드넓은 대청을 완전히 뒤덮는 거대한 구름으로 변한 검광은 이내 씻은 듯이 사라져 버렸다. 대청 끝까지 몸을 피했던 중인들은 서로의 모습을 보고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분명 무섭게 확산하는 구름에 휘감긴 것 같았는데도 누구도 털 끝 하나 다친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그들은 문득 생각난 듯 싸움이 벌어졌던 중앙을 주시했다.
“아!”
누군가의 입에서 탄성인지 신음인지 모를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토록 무시무시한 검기가 휘몰이치던 장내의 싸움은 어느새 그쳐 있었다.
그리고 그 중앙에는 두 사람이 서로 점을 거둔 채 마주 보고 있었다. 진산월은 양쪽 소매의 옷자락이 잘리고 앞가슴이 반치를 베어져 있었다.
베어진 옷자락 사이로 보이는 그의 가슴에는 몇 가닥의 핏줄기가 내비치고 있었다. 그에 비하면 매장원은 지나치게 깨끗했다.
하나 진산월이 묵묵히 용영검을 검집에 넣을 때까지도 매장원은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중인들이 무인가 의혹을 느낄 순간, 매장원의 의복이 조금씩 먼지가 되어 흩날리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매장원의 상반신이 절반이나 드러났다.
그래도 매장원은 움직이지 않았다.
다만 기광이 번뜩이는 눈으로 진산월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문득 앞가슴이 친한 벌거숭이로 드러날 즈음,
매장원의 입술이 처음으로 열했다.
“이 초식의 이름은 뭔가?”
진산월은 담담한 음성을 내뱉었다.
“검정중원(劍定中原)이오”
“검으로 중원을 평정한다라‥‥‥ 정말 광오하구나. 하지만 넌 그럴 자격이 있다.”
매장원의 신형이 한차례 휘청거렸다. 그와 함께 이번에는 그의 바지 부분이 먼지가 되어 흩날리기 시작했다. 동시에 벌거숭이로 드러났던 그의 상반신에서 핏물이 뿜어져 나왔다.
“아앗!”
그 참혹한 모습에 몇몇 여인들이 비명을 지르며 눈을 감았다.
매장원은 온몸의 피부가 갈가리 찢겨져 핏물을 뿜어내면서도 표정 하나 찡그리지 않은 채 진산월을 바라보았다.
“약속대로 밝히겠다. 나는 쾌의당 칠대용왕(七大龍王) 중의 검중용왕(劍中龍王)이다. 너와 싸우게 되어 기뻤다‥‥‥‥
그 말을 끝으로 그는 숨을 거두었다. 진산월은 선 채로 숨을 거둔 그의 시신을 바닥에 누이고는 자신의 옷자락을 벗어 알몸이 된 그의 시신을 덮어 주었다.
매장원은 그가 처음으로 만난 자신에 버금가는 실력자였다. 쾌의당에는 그와 같은 실력자가 최소한 일곱 명이 있을 것이다.
오늘 그는 검정중원을 처음으로 펼쳐 매장원을 꺾을 수 있었다.
하나 다음에는 어떠한 결과를 얻게 될지 장담할 수 없었다. 사실 강호에서 앞날을 누가 예측할 수 있겠는가? 진산월은 온몸의 피가 모두 빠져 나간 채로 숨을 거둔 매장원의 시신을 내려보고 있다가 문득 생각난 듯 이존휘가 쓰러진 곳으로 다가갔다.
이존휘는 여전히 옆구리에 장검을 꽃은 채로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조금 전의 치열한 싸움에서 이존휘 쪽으로 검기를 보내지 않기 위해 진산월은 나름대로 노력을 기울였다.
매장원 또한 그런 그를 굳이 가로막지 않았다. 아마도 그런 점이 매장원의 검을 더욱 위력적으로 만들었던 것 같았다.
매장원의 검은 무작정 강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강유(剛柔)를 겸비하여 어떤 때는 진산월의 검보다 더욱 깊이가 있어 보였다. 생각해 보면 진산월이 익힌 검법이라고 해야 종남파의 몇 개 검법뿐이었다.
그에 비해 매장원은 적어도 삼십 종 이상의 검법을 익혔음이 분명 했다.
그러한 차이는 결코 일조일석(一朝一夕)에 메워지지 않을 것이다.
진산월은 이존휘의 몸을 뒤집었다.
이존휘는 용케도 그때까지도 숨이 끊어지지 않은 채 그를 보더니 이내 웃었다.
“매장원도 꺾다니 자네는 정말 괴물이었군‥‥‥‥
진산월은 그의 얼굴이 푸르뎅뎅하게 변해 있는 것을 보고는 마음속으로 탄식을 토해냈다. 이미 죽음의 그림자가 그의 얼굴을 뒤덮고 있어 이제는 대라신선(大羅神仙)이 와도 살릴 수 있음을 알아차린 것이다.
이존휘의 얼굴에 떠올라 있는 미소가 조금 더 짙어졌다.
“이보게, 웃으라구. 자네는 승리자야. 앞으로 자네는 검을 찬 모든 검객들의 우상(偶像)이 될 거야. 내가 장담하지.”
이존휘의 눈가에 한 줄기 아련한 빛이 떠올랐다.
“이봐, 자네 처음 보았을 때부터 내가 마음에 들어 했던 거 알아? 그때 그 주루에서‥‥ 이상하게도 기억에 남더란 말이지. 나중에 자네의 정체를 알았을 때 기쁘면서도 한편으론 섭섭했어.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좋은 친구 하나를 영영 잃어버린 느낌이었지…..으으……….“
이존휘는 갑자기 전신에 경련을 일으켰다. 진산월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의 손을 힘주어 움켜잡는 일뿐이었다. 이존휘는 시퍼렇게 굳은 얼굴에 필사적인 미소를 떠올렸다.
“쾌의당의 당주를 조심하게‥‥‥ 그자는 탈혼검의 고수야. 풍도는 쾌의당주의 제자 중 한 놈에 불과하단 말이야‥‥‥‥”
진산월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다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아직도 자네의 목적이 무엇인지 말해 줄 수 없나?”
이존휘의 눈빛이 갑자기 강렬해졌다. 그는 이를 드러내며 웃었으나 그 바람에 시커먼 핏물이 꾸역꾸역 흘러나왔다.
“그렇군‥‥‥ 하마터면 잊을 뻔했어‥‥‥“
그는 사력을 다해 고개를 돌렸다. 진산월의 시선이 그가 바라보는 곳으로 향했다. 그곳은 천봉궁의 고수들이 있는 방향이었다.
이존휘의 시선은 그들의 중앙에 있는 붉은색 봉황무늬의 여인에게로 향하고 있었다.
“봉황인‥‥‥ 거의 가까이 왔었는데‥‥‥‥“
그 말을 끝으로 이존휘는 숨을 거두었다.
진산월은 그의 부릅떠진 눈을 감겨 주며 마음속으로 조용히 뇌까렸다.
‘다음 세상에서 만나면 정식으로 사귀어 보세.’
그의 주위로 중인들이 몰려들었다.
하나 진산월은 전혀 의식하지 않는 듯 이존휘의 시신을 내려본 채 가만히 서 있었다. 피로 물든 이존휘의 얼굴은 왠지 모르게 평온해 보였다.
진산월은 한참 동안이나 그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다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리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대청을 벗어나 종남산으로 향했다.
누구도 그를 향해 입을 여는 사람은 없었다.
다만 낙일방만이 묵묵히 그의 뒤를 따르고 있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