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16권 봉황무종(鳳凰無踪)편 : 11화
제 166장 신인신풍(新人新風)
“아니 누가 사람을 끌고 오라고 했지 병신을 만들어 달라고 했소?“
동중산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말하자 누산산은 쌍심지를 돋우며 그를 꼬나보았다.
“아니 왜 소리를 지르고 난리예요? 내가 이놈 때문에 얼마나 고생했는데 ‥‥‥‥”
동중산은 그녀가 미안해하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기세등등하게 날뛰자 쓴웃음을 지으며 입을 다물어 버렸다. 천봉선자 중에서도 천방지축으로 무서운 줄 모르는 이 아가씨에게는 도저히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걸 다시 한 번 깨달았던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심해도 너무 심했다.
진산월은 정소소에게 친봉선자 중 한 사람을 보내 손노태야의 아들인 손풍을 종남파로 데려다 달라고 부탁했다. 자신은 이씨세가에서 무슨 일을 겪게 될지 몰라서 도저히 몸을 빼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누산산이 끌고 온 것은 이미 반송장이 되어 버린 피투성이였다. 처음에 동중산은 그녀가 어디서 숨이 끈어진 시체 하나를 가져온 줄로 알았었다.
그가 무어라고 하자 누산산은 반송장의 앞가슴을 풀어헤치며 큰 소리를 쳤다.
“봐요 죽긴 누가 죽어요? 아직도 심장이 뛰잖아요. 아직 한창 팔팔할 나이니까 한잠 자고 나면 벌떡 일어날 수 있을 거예요”
아직 숨이 붙어 있는 건 사실이었다. 하나 아무리 좋게 봐주어도 한잠 자고 일어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온몸이 크고 작은 타박상으로 퍼렇게 물들어 있는데다 얼굴은 얼마나 두들겨 맞았는지 도저히 원래의 모습을 알아볼 수 없었다.
무엇보다도 가슴에 찍힌 선명한 손도장은 그의 갈비뼈를 송두리째 박살내 버린 터였다. 동중산은 그녀의 모진 솜씨에 새삼 한숨이 흘러나왔다.
‘아무리 화가 난다고 여인의 몸으로 사람을 이런 꼴로 만들다니‥‥장래에 누가 이 여자를 데려갈지 모르겠지만 정말 걱정이 되는구나.’
동중산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한숨만 푹푹 쉬고 있자 기세등등하던 누산산도 조금은 풀이 죽은 모습이었다.
“미안해요. 하지만 당신도 이자가 나한테 했던 말을 들었다면 아마 참지 못했을 거예요”
누산산은 그때 일을 말하면서 다시 화가 나는지 반송장을 노려 보았다. 아마 옆에 동중산이 없었다면 다시 한 대 걷어차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동중산은 더 있다가는 정말 큰일이 나겠다 싶어 반송장을 조심스럽게 안아들고 제갈외를 찾아갔다. 지금으로서는 그가 유일한 해결책이었다.
제갈외 또한 반송장을 보고는 얼굴을 있는 대로 찡그렸다.
“아니 이놈의 문파는 어째 다 죽게 생긴 놈들만 꾸역꾸역 들어온 단 말이냐?“
제갈외는 밤새 조옥린을 치료하고는 다시 새벽이 되어 돌아온 동중산이 데려온 강일산을 돌보느라 한숨도 자지 못했다.
그리고 조금 쉬려고 하는데 이번에는 아예 반송장이 된 놈을 끌고 왔으니 화가 나지 않을 수 없었다. 동중산도 이번에는 무어라고 대꾸할 말이 없었다.
중년이 된 동중산이 머쓱한 표정으로 말도 못하고 있자 제갈외가 안됐는지 화를 내다 말고 투덜거렸다.
“에이‥‥‥ 늘그막에 내가 아주 고생문이 활짝 열렸구나. 이게 모두 그 장 털보놈의 꼬임에 넘어간 때문이니 내가 누굴 탓하겠느냐? 어서 이리 올려놔 보아라.”
동중산이 반송장을 침상 위에 올려놓자 제갈외는 그를 살펴보았다.
하나 얼마 지나지 않아 제갈외는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것이었다.
‘어떤 몰상식한 미친놈이 사람을 이런 꼴로 만들어 놓은 게냐? 아예 이럴 바에는 단칼에 목을 치는 게 낮지, 온몸의 뼈란 뼈는 모두 부서지고 앞 이빨은 몽창 빠진데다 부러진 갈비뼈가 내장을 찔러서 속까지 몽땅 상했잖느냐? 누구냐? 사람을 이렇게 만든 천하의 악독한 놈이?”
제갈외의 고함이 어찌나 컸던지 종남파의 사람들이 하나둘 들어와 보고는 반송징을 보더니 질색을 하고 밖으로 나갔다.
누산산은 아예 코빼기도 보이지 않은 것으로 보아 어디 깊숙한 곳에 숨어 있든지 아니면 귀를 틀어막고 자고 있을지도 몰랐다.
제갈외는 한참 동안이나 미친 사람처럼 악을 쓰더니 제풀에 지쳐서 바닥에 주저앉았다.
“손자의 재롱이나 보고 있을 나이에 이게 무슨 생고생이란 말이 나? 이놈의 부서진 배를 모두 잇고 뭉개진 얼굴을 고치려면 앞으로 최소한 사나흘은 꼬박 일해야 하는데 도대체 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어서 이 후미진 종남산 구석에 끌려와 이런 중노동을 해야 한단 말이냐?”
동중산으로서는 그저 그의 선처만 바랄 뿐이었다. 아마 그때 유소응이 들어오지 않았다면 동중산은 제갈외의 넋두리를 듣느라 밤을 꼬박 새우고 말았을 것이다.
유소응의 작은 몸이 나타나자 제갈외가 언제 화를 냈느냐는 듯 주름살투성이 얼굴에 환한 미소를 매달았다.
“아이구, 우리 소응이 이 할애비가 보고 싫어서 왔구나.”
제갈외가 껴안자 유소응은 피하지 않고 가만히 있더니 조그만 음성으로 말했다.
“사부님이 돌아오셨어요”
“응? 그래? 진가놈이 왔다구?”
제갈외가 심드렁하게 되물었으나, 동중산은 귀가 번쩍 뜨이는지 황급히 물었다.
“사제, 지금 장문인께선 어디 계시느냐?”
유소응은 작고 또랑또랑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태화전에서 소 사숙님과 말씀을 나누고 계세요”
“낙 사숙께선?”
“낙 사숙도 함께 돌아오셨는데 배가 고프다며 주방으로 가셨어요”
동중산은 제갈외를 향해 머리를 조아렸다.
“제갈 노인, 부탁드립니다. 이자는 제 사제가 될지도 모르는데 저런 꼴로 장문인을 뵙게 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제갈외는 눈이 옆으로 쭉 찢어졌으나 유소응이 초롱초롱한 눈으로 옆에서 자신들의 말을 듣고 있는 걸 알고는 이내 호탕한 웃음을 날렸다.
“허허‥‥‥ 별 걱정도 다 하네. 내가 누구인가? 손만 대면 죽은 시체도 살아나게 만드는 사람이 아닌가? 며칠 후면 벌떡 일어나서 오히려 예전보다 더욱 팔팔한 놈으로 만들어 놓을 테니 자네는 나 중에 술이나 한잔 받아 주게.”
“술이 문제겠습니까? 제가 장 형에게 부탁하여 진미를 올리겠습 니다. “
“그러면 나야 좋지.”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
동중산은 재차 인사를 하고는 방을 벗어났다.
제갈외는 그의 뒷 모습을 바라보고 있다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저렇게 물러터진 놈이 어째서 비천호리라는 어울리지 않는 별 호를 얻었는지 모르겠군.”
그는 다시 유소응을 바짝 끌어안았다.
진산월은 병상에 누운 강일산을 바라 보았다.
의식이 없던 강일산은 제갈외의 치료를 받고는 정신이 돌아왔다. 오랜 동안의 수감 생활로 아직 몸은 피폐해 있었으나, 그의 눈빛은 나이답지 않게 강건한 것이었다.
진산월이 그를 구하게 된 경위를 설명하는 동안 강일산은 묵묵히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말을 마친 진산월은 가만히 그를 내려다보았다.
강일산 또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입을 굳게 다문 채 아무런 말이 없었다 한동안 장내에는 무거운 침묵만이 감돌고 있었다. 한참 후에야 침상에 누운 강일산이 기침을 했다.
“클룩‥‥‥ 를룩‥‥‥‥”
진산월이 부축하자 강일산은 몸을 바로 누웠다. 그런 다음 새삼스런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자네는 참으로 침착하군. 아니 냉정하다고 해야 하나?”
그의 목소리는 별다른 힘이 담겨 있지 않았으나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 발음이 명확했다. 언뜻 강일산의 흉터 가득한 얼굴에 씁쓸한 빛이 떠올랐다.
‘내가 누구인지 알았을 텐데도 내게 아무것도 묻지 않나? 하다못해 내 동생인 강일비가 어떻게 되었는지라도 물어 볼 수 있을 텐데 말이야.”
진산월은 모처럼 입을 열었다
“그 말씀은 언제고 해주시리라고 믿고 있습니다.”
강일산은 진산월에게는 사백(師伯)인 강일비의 친형이었다. 자연히 진산월로서는 그를 윗사람 대하듯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강일산의 얼굴에 떠올라 있는 씁쓸한 빛이 조금 더 짙어졌다.
“그래. 해야겠지. 솔직히 나는 언젠가 이 말을 하게 될 날이 오기 만을 기다리고 있었다네.”
이어 그는 잠시 숨을 고르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리고는 오랫동안 마음속으로만 묻어 두었던 전대(前代)의 비사(秘史)를 말하기 시작했다.
-자네도 알다시피 나는 서안삼걸이란 이름으로 제법 명성을 날리고 있었지. 내게는 나보다 다섯 살 어린 동생이 하나 있었는데 그가 바로 강일비였네. 어려서부터 그 녀석은 나보다도 무공에 대한 재질이 뛰어나서 모든 사람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다네.
그가 서안에서 가장 유명한 문파인 종남파의 대제자로 들어가게 된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지. 아마 종남파에서도 그에 대한 기대가 남달랐을 걸세. 나는 서른 살이 넘어서자 서로 몰려다니며 한량 짓을 하는 생활이 싫증나서 서안삼걸을 해체하려고 했네. 그런데 이세적과 공료는 나와 생각이 달랐지. 그들은 그 생활에 몹시 만족해 하고 있었다네. 결국 나는 그 후로 그들과 소원해졌지만. 그들은 두 사람만으 잘 어울려 다녔다네. 서안삼걸이 서안쌍걸(西安雙桀)이 된 셈이지.
강일비는 종남파에서 기대에 부응하여 순조롭게 성장하고 있었고, 나도 가문의 뒤를 이을 후계자 준비에 열심이었네. 아마 그 일만 없었어도 강일비는 종남파의 좋은 장문인이 되었을 테고 나도 강씨 가문의 가주가 되어 그럭저럭 살고 있었을 걸세. 그런데 그 일이 벌어진 거지. 지금도 잊혀지지 않네. 이십여 년 전의 어느 날, 종남파가 구대문 파에서 쫓겨난 치욕을 겪은 바로 그날‥‥‥ 그래. 기산취악의 그날 ‥‥ 모든 게 변한 그날 말일세. 서안의 모든 사람들이 충격을 받았지. 일비가 느끼는 감정은 나로서는 도저히 측량할 수도 없었네. 그 아이는 하루 종일 울었지. 철이 든 후로 한 번도 눈물을 보인 적 없던 아이가 방에 들어박혀 몇 날 며칠을 눈물을 흘렸네. 그처럼 비통해하는 사람의 모습을 나는 지금까지 본 적이 없었네.
그때부터 그 아이는 변했네. 그 전에는 그래도 잔정이 많은 아이였는데, 어딘지 모르게 냉혹하고 이기적으로 변했지. 사소한 일에 도 절대 양보하지 않았고 조금의 손해도 보려 하지 않았어. 그리고 미친 듯이 종남오선의 무공을 찾아다녔지. 종남오선의 무공만이 종남파의 영화를 되찾아줄 수 있다고 중얼거리면서 말이야. 하나 종남오선의 무공은 좀처럼 나타나지 않았네. 그도 그럴 것이 지난 백여 년 동안 많은 사람들이 그토록 찾아 헤매던 종남오선의 무공이 아니었나? 쉽사리 눈에 뜨일 리가 없지. 그런데 지성(至誠)이면 감천(感天)이라고 했던가? 기적이 일어났다네.
어느 날 밖으로 나갔다가 이틀 동안 소식도 없던 일비가 미친 사람처럼 뛰어 들어오더니 나를 끌어안고 덩실덩실 춤을 추더군. 그 아이의 그처럼 기뻐하는 모습은 좀처럼 본 적이 있는지라 나는 직감적으로 그 아이가 종남오선의 무공을 발견했음을 알아차렸네. 그 일말고 그 아이를 그만큼 기쁘게 할 만한 일은 아무것도 없었거든. 과연 그 아이는 흥분이 가라앉자 자신이 겪은 일을 말하더군. 종남오선의 무공을 찾다가 지쳐 종남산의 어느 동굴에서 잠깐 잠이 들었는데, 잠결에 이상한 소리가 들리더라는 거야.
깨어나서 주위를 살펴보니 조금 떨어진 곳에 늑대 한 마리가 열심히 땅을 파고 있었다더군. 일비는 늑대가 무언가 짐승의 뼈다귀라도 파묻 있다가 다시 꺼내는 줄 알고 무심히 지켜보고 있었는데, 잠시 후 늑대가 땅에서 파헤친 것은 고색 창연한 하나의 목갑이었네. 직감적으로 그것이 심상치 않은 물건임을 알아차린 일비는 늑대를 내쫓고 그 목갑을 집어 들었네. 그리고 떨리는 손으로 목갑을 열었지. 목갑 안에는 세 권의 책자가 들어 있었다네.
<무염보요결(無艶步要訣)>
<난화지신공(蘭指指神功)>
<칠음진기비록(七陰眞氣泌錄)>
그 책자에 적힌 글귀를 읽는 순간 일비는 전율하지 않을 수 없었네. 그것이야말로 과거 종남오선 중의 일인이며 무림사상 최강 여고수라는 비선 조심향의 절학이었단 말일세. 무염보는 담대 제일의 보법(步法)이었고, 난화지 또한 적수를 찾기 어려울 정도의 절학(絶學)이었지. 하나 무엇보다도 일비를 기쁘게 한 것은 칠음진기였네. 칠음진기야말로 종남 무학의 근간이 되는 육합귀진신공 중의 하나였으니 말일세. 나는 일비에게 그가 찾은 절학을 가지고 종남파로 돌아가라고 했네.
종남파로 가도 어차피 그가 대제자이니 그가 익힐 게 뻔하지 않겠나? 하나 일비의 생각은 달랐네.
그 아이는 지금의 종남파는 미래가 없다고 판단했네. 이 상태에서 절학들을 가지고 종남파로 가 보았자 오히려 자신의 앞길만 막는 격이 된다고 생각한 걸세.
나는 몇 번이나 그 아이의 생각을 돌리려고 했으나 결국 실패하고 말았지. 고민하던 나는 과거 서안삼걸의 친우들이었던 이세적과 공료를 불러 술을 마시며 하소연을 했네. 그리고 술김에 종남파에 그 사실을 신고하겠다고 떠들었지.
술이 깬 나는 내가 뇌옥에 갇혀 있는 것을 알았네. 그 뇌옥은 이씨세가에서 은밀히 만들어 놓은 것으로, 일단 갇히면 제아무리 고수라 해도 혼자 힘으로는 탈출할 수 없도록 만들어진 것일세.
나는 처음에는 어안이벙벙했고, 조금 지나서 배반감에 몸을 떨었으며, 나중에는 절망하고 말았지.
그 아이를 마지막으로 만난 것은 내가 뇌옥에 갇힌 지 두 달쯤 되는 날이었네.
다시 본 그 아이는 어딘가 달라져 있었지. 전신에 전에 없던 활력이 넘치고 눈빛에는 자신감이 가득했으며, 얼굴에 희망이 빛이 번득이고 있었네. 나는 그의 변모된 모습에 놀랐으나, 그가 온 이상나를 곧 풀어 주리라고 기대했지. 하나 그건 나만의 큰 착각이었네.
그 아이는 나를 보고 동생을 배반한 배반자라고 하더군. 아무리 술김이었다 할지라도 문파에 동생을 팔아먹은 자는 자신의 형이 아니라고 거부했지.
그리고 자신은 이제 더욱 큰 도약을 하기 위해 먼 길을 떠난다고 했네. 앞으로 두 번 다시 볼 일이 없을 테니 이곳에서나마 자신이 천하에 웅비하는 모습을 지켜보라며 뇌옥을 떠나갔네.
그때 비로소 나는 그 아이가 이미 내가 알던 아이가 아니었다는 것을 깨달았지. 그리고 이세적과 공료가 그 아이와 어떤 비밀스런 관계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네.
공료는 몇 번이나 나를 죽이자고 했는데, 이세적은 그동안의 친분 관계 때문에 머뭇거리고 있었네. 그러다 세월이 흐르자 나에 대해 까맣게 잊었는지 아무도 나를 찾지 않았네.
나는 내가 술김에 한 소리 때문에 아까운 동생을 잃어버린 것 같아 후회스러웠고, 그 아이가 그처럼 변할 때까지 알아보지 못한 것이 안타까웠네.
그렇게 후회와 절망의 나날을 보내다가 어느 날부터인가 정신이 든 날보다 잃은 날이 더 많게 되었지. 아마 자네가 몇 달만 늦게 왔어도 나는 그곳에서 한 구의 백골이 되어 있었을 걸세.
강일산의 긴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진산월은 한마디도 하지 않고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말을 마친 강일산은 멍하니 허공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주름진 눈에는 공허함만이 가득 담겨 있었다. 살아갈 모든 희망과 낙을 잃어버린 강일산은 이미 심지가 모두 타버린 등잔과 같았다.
그의 가문은 이미 오래 전에 몰락해 버렸고, 하나뿐인 동생은 그를 버린 채 소식이 끊겼다. 그리고 과거와의 유일한 연결고리였던 서안삼걸의 다른 두 사람은 모두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그런 그에게 살아갈 무슨 희망이 있겠는가?
결국 강일산은 그날 이후 시름시름 앓더니 사흘 만에 숨을 거두고 말았다. 그의 시체를 양지바른 곳에 묻어 준 진산월은 서안삼걸에 대한 것은 이제 모두 끝났다고 생각했다.
공료가 살수를 보내 이세적을 살해한 것은 강일산에 대한 처리 문제로 인한 갈등이 그 원인이었던 게 분명했다.
그가 자신의 생각이 잘못된 것임을 깨달은 것은 그로부터 몇 달 뒤의 일이었다.
손풍은 의외로 강골이었다.
그는 불과 사흘 만에 자리에서 일어나 주위 사람을 놀라게 했다.
정신을 차린 다음 그가 제일 먼저 내뱉은 말은
“그 빌어먹을 년이 내 돈을 가지고 갔느냐?”는 것이었다. 아마 누산산이 전날 떠나지 않았다면 손풍은 일어나자마자 영원히 자리에 눕는 불상사를 겪게 되었을 것이다.
누산산이 떠나기 전, 진산월은 그녀에게 봉황인에 대해서 물었다. 누산산은 찔끔하는 기색이었으나 자신은 모르는 일이라고 잡아떼었다.
진산월은 그녀에게 더 이상 아무것도 묻지 않았고, 그녀는 안도하는 표정으로 도망치듯 종남파를 떠나고 말았다.
정신을 차린 손풍은 며칠 동안 굶은 것을 보상받으려는 듯 무지하게 먹어댔다. 그러다가 결국 그날 저녁에 사단이 벌어지고 말았다.
그럭저럭 배도 차고 기운도 어느 정도 돌아온 손풍은 붕대로 칭칭 동여맨 몸을 이끌고 후원으로 나갔다. 그곳에서 눈에 번쩍 뜨이는 미소녀를 발견한 손풍은
‘이런 황량한 곳에 이런 아리따운 꽃이 있다니.’
하고 흥얼거리며 미소녀에게 다가갔다.
그리고는 자신이 낼 수 있는 가장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이봐, 어린 처자. 나이가 몇 살인가?”
서문연상은 온몸을 붕대로 에워싼 강시 같은 놈이 음흉한 눈초리로 자신을 슬금슬금 쳐다보며 능글맞은 목소리로 말을 걸어오자 어이가 없어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걸 소녀 특유의 수줍음 때문이라고 착각한 손풍은 제 딴에는 사내의 멋이 듬뿍 담긴 목소리로 웃어 보였다.
“흐흐‥‥ 겁먹지 마라. 이 오라버니는 결코 연한 꽃을 강제로 꺾는 법이 없으니까.”
마침내 참지 못한 서문연상이 폭발하고 말았다.
“뭐가 어린 처자고 줘가 연한 꽃이냐, 이 정신병자 같은 놈아!”
그녀는 사정없이 매질을 시작했고, 손풍은 다시 한 번 동네북이 되었다. 먼젓번과 다른 것은 누산산이 발을 주로 사용한 대신에 그녀는 손을 더 많이 쓴다는 것이었다.
다행히 지나가던 동중산이 발견하고 말리지 않았다면 손풍은 정말로 붕대에 감긴 채 여자 손에 맞아 죽은 최초의 남자가 되었을 것이다.
손풍은 기절하기 직전 ‘여자가 손을 쓸 때는 남자의 가슴에 안겨 앙탈을 부릴 때뿐이다.” 라고 외쳐서 서문연상을 격분케 했다.
덕분에 동중산도 그녀가 마지막 휘두르는 일격은 막지 않고 눈감아주는 바람에 손풍은 간신히 세워놓은 콧날이 다시 부러지는 비극을 당하고 말았다.
그날 밤에 동중산과 서문연상은 “날 아예 죽여라.”라고 외치는 제갈외의 등쌀에 밤새 시달려야만 했다.
그리고 다음날, 대응표국에서 몇 명의 사람이 종남파를 찾아 왔다.
대응표국의 몇 명 남지 않은 일급표두가 인솔해 온 그 일행의 대표는 이계 겨우 아홉 살밖에 되지 않은 어린 소년이었다.
소년이 라기보다는 아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릴 정도로 작고 왜소한 몸집이었으나, 눈빛만큼은 어떤 소년보다도 더욱 매섭게 반짝이고 있었다.
소년의 이름은 단리상. 대응표국의 국주인 단리정천이 눈 속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귀여워하는 손자였다. 어린 나이였으나 벌써부터 주위에서는 일대 신동으로 소문이 자자했고 그의 재질을 탐낸 무림고수들이 제자로 삼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다고 했다.
하나 단리상은 그 많은 제의를 다 뿌리치고 종남파의 제자가 되기 위해 이곳에 온 것이다. 진산월은 그에게 구배지례를 받고는 그를 정식으로 종남파의 제자로 입적시켰다.
단리상은 가장 어린 나이에 종남파의 다섯 번째 제자가 되었고, 위로 세 명의 사형과 한 명의 사저를 두게 되었다. 그리고 종남파에 오기는 단리상보다 며칠 먼저 들어왔으나 서문연상에게 두들겨 맞고 정신을 잃었던 손풍은 단리상이 입문한 이틀 후에야 겨우 몸을 추스르고 종남파의 막내 제자가 될 수 있었었다.
입문식이 끝나고 생년월일을 밝혔을 때, 손풍은 다시 한차례 서문연상에게 두들겨 맞고 정신을 잃고 말았다.
‘이 자식 나보다 나이가 두 살밖에 안 많잖아. 게다가 생일은 한 달이나 늦고 ‥‥‥‥‘
이제 막 입문한 몸도 성치 않은 막내 사제를 두들겨 패고도 기세등등한 그녀를 보는 단리상의 작은 눈에는 은은한 두려움의 빛이 감돌고 있었다.
이제 종남파는 두 명의 선배 고수와 여섯 명의 동문사형제, 여섯 명의 일대제자, 다섯 명의 빈객, 그리고 한 명의 장문인을 두게 되었다.
스무 명밖에 안 되는 인원에 불과했으나, 비로소 하나의 문파로서의 틀을 갖추게 된 것이다.
사부의 갑작스런 즉음으로 진산월이 장문인에 오른 지 삼년 하고도 오 개월 일십팔일 만의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