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17권 재출강호(再出江湖)편 : 1화
제 167장. 춘기만산(春氣滿山)
겨울의 냉기가 사라진 산 구릉에는 노란 산수유(山茱萸)가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진산월은 산중턱에 솟아 있는 바위에 걸터앉은 채 노란 물감을 뿌려놓은 듯 산 구릉 여기저기에 피어 있는 산수유 꽃들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별다른 이유가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저 종남파의 건물에만 며칠째 뭍혀 있다 보니 불현듯 신선한 바람과 숲의 향기를 맡고 싶었을 뿐이다. 막상 밖으로 나와 보니 산천은 이미 춘색(春色)이 완연했다. 군데군데 쌓여 있던 눈 더미도 씻은 듯이 사라져 있었고, 꽃향기가 온산에 퍼져 숨을 들이쉬기만 해도 몸속까지 노란색으로 물들어 버릴 것만 같았다.
쪼로롱!
어디선가 울어대는 산새의 울음소리가 봄바람에 섞여 귓전을 울리자 무언지 모를 묘한 감상(感像)이 마음 한구석을 소리 없이 뒤흔들었다. 문득 정신이 들어 주위를 둘러보았을 때는 이미 서산(西山)으로 붉은 해가 저물어 가고 있는 석양 무렵이었다. 진산월은 자신이 한 시진 넘게 그 자리에 앉아 있었음을 깨닫고 씁쓸한 웃음을 흘리며 몸을 일으켰다.
바위에서 일어나 가파른 비탈길을 내려오니 멀지 않은 곳에 태화각의 붉은 지붕이 눈에 들어왔다. 진산월을 찾고 있었는지 태화각 한쪽 모퉁이에서 방취아가 뛰어나오더니 빠른 몸놀림으로 그의 앞으로 다가왔다.
“장문사형, 어디를 갔다 오셨어요?”
“잠시 주위를 한 바퀴 둘러보았다.”
“아까부터 동 사질이 장문사형을 찾고 있었어요.”
“왜?”
방취아의 얼굴에 망설이는 표정이 떠올랐다.
“동 사질에게 직접 물어보세요.”
그녀가 말하기 곤란한 듯 고개를 흔들자 진산월은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방취아는 웬만해서는 마음속의 생각을 좀처럼 숨기지 않는 편이었다. 특히 진산월에게는 너무 솔직해서 가끔은 진산월이 오히려 난처할 때도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하면서도 동중산에게 떠넘기고 있으니 진산월로서는 어리둥절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의문은 때마침 동중산이 나타남으로써 곧 해결되었다.
“장문인, 이곳에 계셨군요.”
“무슨 일이냐?”
동중산은 조용하고 차분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이번 중원행에 갈 인원을 빨리 결정해야 할 듯싶습니다.”
“무슨 일이 있느냐?”
동중산의 얼굴에 약간 난감해하는 표정이 떠올랐다.
“사제들이 영 마음이 들떠서 수련에 제대로 집중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조사께서도……”
조사라면 현재 종남파의 최고 어른이자 동중산에게는 삼대조(三代祖)인 질풍검 전풍개를 가리킨다.
“사숙조께서 무어라고 하셨느냐?”
“제자께 언제 출발할 예정인지 알아보라고 하셨습니다. 제 생각에는 조사께서도 동행하실 의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 말을 듣자 진산월도 곤혹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진산월이 이번에 다시 중원에 나가려는 것은 삼년 전과는 전혀 다른 상황이었다. 당시에는 서장무림의 중원 침공에 대비하여 무림첩이 방송되었기 때문에 그 기회를 이용하여 종남파의 건재를 알리려는 뜻이 있었다.
그것은 어느 개인의 영달(榮達)을 위해서가 아니라 문파 전체를 위하려는 의도였고, 모든 제자들이 그 일에 대해 나름대로 최선을 기울였다. 당연히 중원행을 떠났던 제자들과 종남산에 남아 있던 제자들 사이에 어떠한 갈등도 존재하지 않았다. 각자가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는 것이 진정으로 문파를 위한 길임을 모두들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에 떠나려는 중원행은 어찌 보면 진산월 개인에 국한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진산월이 중원으로 가게 된 것을 알아차린 대부분의 종남파 문하들이 그를 따라나서겠다고 벌써부터 수선을 피우고 있었다. 심지어는 종남파의 최고 어른이자 진산월에게는 사숙조가 되는 전풍개마저 동행할 움직임을 보이니 진산월로서는 절로 한숨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모두 따라온다면 대체 문파는 누가 지킨단 말인가?
그렇다고 그들의 심정을 모르는 바도 아니었다. 초가보와의 처절한 사투(死鬪) 이후 비로소 종남파는 외부의 위협에서 벗어나 자신들의 생존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얼마 되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종남파는 지금 문파로서의 체제를 정비하여 차츰 체계적인 틀을 갖추어 나가고 있는 중이었다.
앞으로 남은 것은 문파의 내실(內實)을 다지며 힘을 비축하는 것이었고, 그것은 오랜 세월의 기다림을 필요한 일이었다. 그러니 한창 나이의 젊은 제자들로서는 이번 기회에 장문인과 함께 강호를 종횡(縱橫)하며 협의(俠義)를 펼치고 자신의 이름을 널리 알리고 싶은 욕구가 드는 것이 너무도 당연한 일일 것이었다.
솔직히 진산월은 이번 강호행에 낙일방과 동중산만을 대동할 생각이었다. 무공이 일취월장하고 있는 낙일방에게는 보다 다양한 고수들과의 만남을 통해 절정고수가 될 수 있는 바탕을 만들어 주고, 지략이 뛰어나고 강호 경험이 풍부한 동중산에게는 길 안내를 맡길 심산이었다.
그런데 상황을 보아하니 그랬다가는 다른 사람들의 불만이 적지 않을 게 뻔했다.
한동안 생각에 잠겨 있던 진산월은 동중산에게 시선을 돌렸다.
“중산, 내일 저녁에 본파의 모든 제자를 소집해라.”
동중산은 외눈을 번쩍 빛냈다.
“사숙조님들과 사조님들도 말입니까?”
“그래, 밖에 나가 있는 사람들까지 모두 연락하여 한 사람도 빠짐없이 참석하도록 조치해라.”
옆에서 듣고 있던 방취아가 조금 긴장된 표정으로 물었다.
“장문사형, 갑자기 무슨 일로……”
진산월의 얼굴에 빙긋 한 줄기 미소가 걸렸다.
“무슨 일은. 본파도 안정되었으니 모처럼 모두 모여 저녁이나 먹자는 거지.”
방취아는 진산월의 의중이 단순히 밥 한 끼 같이 먹자는 것이 아님을 알고 있었지만 내색하지 않고 짐짓 얼굴을 활짝 펴고 진산월을 따라 배시시 웃었다.
“그래요. 그러고 보니 초가보와의 일이 끝나면 정식으로 제대로 된 연회를 하기로 했잖아요. 마침 새로 입문(入門)한 제자들도 있으니 모처럼 연회다운 연회를 벌이도록 해요.”
“이번에는 제대로 장 형의 신세를 져야겠다.”
방취하는 조금 전보다 한층 밝아진 얼굴로 뛰어갔다.
“제가 장 대가(張大哥)에게 가서 말을 해놓을께요.”
경쾌하면서도 유연한 동작으로 멀어져 가는 그녀의 뒷모습은 한 마리 나비를 연상케 했다. 신형이 몇 번 움직이지도 않았는데 그녀의 몸은 어느새 태화각 너머로 사라지고 있었다.
동중산은 그 광경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다가 나직한 감탄성을 발했다.
“사고의 신법은 날이 갈수록 놀라워지는 것 같습니다. 저 정도면 강호의 십대신법대가들에 비해도 결코 뒤지지 않는 수준이 아닐까요?”
진산월은 의외로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즉시 고개를 저었다.
“사매의 신법이 본파에서 제일 뛰어나긴 하지만 아직 그들에 미치지는 못한다.”
동중산은 진산월이 단호한 음성으로 잘라 말하자 다소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응시했다. 진산월이 좀처럼 이런 식의 말투는 사용하지 않는 성격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나는 몇 년 전에 우연히 매신(魅神) 종리궁도(鍾里宮道)가 신법을 펼치는 광경을 본 적이 있었다. 그때 그의 몸놀림은 정말 놀라운 것이었지.”
진산월의 말을 듣고 나서야 동중산은 진산월이 왜 그토록 단정적으로 말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매신 종리궁도는 강호의 십대신법대가 중 하나로 손꼽히는 절세의 고수로, 특히 신체의 불구를 극복한 입지전적인 인물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종리궁도의 신법은 어느 정도였습니까?”
“십 장 밖에서라면 천하의 누구도 그를 해칠 수 없다.”
동중산은 흠칫 놀라더니 재차 물었다.
“지금의 장문인의 실력으로도 말입니까?”
“그렇다.”
“십 장 안에서라면 어떻습니까?”
진산월의 눈빛이 유달리 낮게 가라앉았다.
“그가 피하기만 한다면 오십 초 이내에는 쓰러뜨리기 힘들 것이다. 하지만 만약에 그가 반격을 해온다면 십 초가 넘지 않을 것이다.”
동중산은 자신도 모르게 탄식을 토해냈다.
“종리궁도의 신법은 정말 대단한 것이로군요.”
동중산은 초가보의 내로라는 절정고수들도 진산월의 손에서 십 초를 넘긴 자가 거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 진산월이 단순히 피하기만 하는 종리궁도를 쓰러뜨리기 위해 오십 초나 걸린다는 것은 종리궁도의 신법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를 여실히 나타내 주는 것이었다. 반면에 반격을 해왔을 때 오히려 단숨에 승부를 가를 수 있다는 말은 신법을 제외한 종리궁도의 다른 무공은 그다지 뛰어나지 않다는 뜻이기도 했다.
진산월은 당시 종리궁도의 수중에 사로잡히는 고초를 당했을 뿐 아니라 그 와중에 그의 기경(奇驚)할 신법을 몸으로 직접 겪었기 때문에 그 심정이 각별할 수밖에 없었다. 진산월은 당시의 기억을 잠시 떠올려 보고는 다시 한 번 중얼거리듯 말했다.
“종리궁도의 매영보(魅影步)는 능히 강호일절(江湖一絶)이라 할 만하다. 실로 무영지경(無影之境)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동중산은 종리궁도의 명성은 익히 들어 왔지만 그의 무공을 실제로 본 적은 한 번도 없었기에 절로 호기심이 일었다. 진산월 같은 절세의 검객이 말하는 ‘무영지경’이란 대체 어느 정도의 수준일지 변변찮은 무공의 소유자인 그로서는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동중산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물었다.
“본파의 신법에 비하면 어떻습니까?”
“본파의 비연심법이나 이어룡을 비록 표홀하고 쾌속하지만 신법의 본연의 위력을 매영보에 미치지 못한다.”
진산월의 솔직한 말에 동중산은 괜한 것을 물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나 그의 마음을 짐작하고 있는 듯 진산월은 담담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오래 전에 실전(失傳)된 무염보라면 충분히 매영보와 겨루어 볼 만하겠지. 하지만 그런 식의 비교는 탁상공론(卓上空論)에 불과하다. 무공이란 어떤 것을 익혔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익혔느냐에 따라 고하(高下)가 가려지는 법이다.”
아무리 뛰어난 무공이라도 제대로 익히지 않는다면 그보다 떨어진 무공을 충실히 소화한 것보다 못할 수밖에 없었다. 무인(武人)에게 있어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무공 자체가 아니라 그 숙련도에 있다는 것이 진산월의 오랫동안 일관된 지론(智論)이었다.
“명심하겠습니다.”
동중산이 자신의 경솔한 질문을 자책하며 충심에서 우러나오는 마음으로 허리를 숙이자 진산월이 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네가 지금도 밤마다 하루도 빼놓지 않고 천하삼십육검을 연마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비록 네 나이가 적지 않은 절정(絶頂)에 이르기는 쉽지 않겠지만, 그렇다고 그 일이 불가능한 것만은 아니다. 무인의 수련이란 평생을 두고 계속되는 것이기에 시작의 늦고 빠름이나 성취의 크고 작음은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것이 좋다.”
동중산은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었다.
“제자도 당장 무슨 성과를 보려고 하는 일은 아닙니다. 다만 어린 사제들의 진경(進境)이 너무 대단해서 사형으로서 그들에게 못난 모습은 보이지 않아야겠다는 생각일 뿐입니다.”
확실히 동중산의 말마따나 최근에 입문한 종남파의 일대제자들은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는 뛰어난 인재들이었다. 서문연상은 말할 것도 없고 유소응은 나이답지 않은 침착함과 끈기를 지녔으며, 방화 또한 소심한 성격과는 달리 무학(武學)에는 상당한 재능을 나타내고 있었다.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가장 나이가 어린 단리상이었다.
동중산은 지금도 단리상이 종남파에 입문하여 처음 자신들 앞에서 무공을 시전했을 때의 놀라움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때 단리상이 진산월의 지시로 종남파의 선배 고수들 앞에서 자신이 그동안 익힌 가전무공(家傳武功)들을 펼쳐보였는데, 그것은 도저히 아홉 살 꼬맹이의 수준이라고는 볼 수 없는 탁월한 것이었다. 자세의 완벽함은 말할 것도 없고 연결 동작과 기세 또한 강호의 일류고수에 못지않아서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은 그저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할 뿐이었다.
한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일각(一刻) 가까이 펼쳐진 단리상의 시무(試武)가 끝나자 한쪽에서 말없이 보고 있던 전풍개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강일비 같은 놈이 또 있었군.”
강일비는 진산월의 사부인 임장홍의 사형으로, 전풍개에게는 사질(師姪)이 되는 인물이었다. 당시 그의 기재(奇才)는 실로 놀라운 것이어서 전풍개 등 종남삼검을 비롯한 종남파의 선배 고수들은 그에게 크나큰 기대를 걸고 있었다. 나중에 그가 아무런 사연도 남기지 않고 사라져 버렸을 때 종남파 고수들의 실망감과 상실감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것이었다. 임장홍은 죽기 전까지도 입버릇처럼 ‘강 사형이 그렇게 실종되지만 않았다면 종남파의 역사가 달라졌을 것이다.’라고 아쉬워하곤 했었다.
전풍개는 단리상의 재질이 천하의 기재였던 강일비에 못지않다고 판단한 것이다. 동중산 또한 강호에서 많은 고수들을 보았지만, 단리상 같은 나이에 그 정도의 재질을 지닌 어린아이는 아직 만난 적이 없었다. 자신과 나이 차이가 한참이나 나는 어린 사제들이 하나둘씩 늘어 가는 것은 무어라 표현하기 힘들 만큼 뿌듯한 감정이 들게 했지만, 반면에 자신의 실력이 그들에게 모범이 되기 힘들 정도로 미약하다는 것이 두고두고 아쉬움을 남겨 주었다.
‘소응과 방화 녀석만 해도 나보다 훨씬 재질이 뛰어나가고 생각했었는데 단리상, 그 꼬마 녀석은 정말 대단하다는 말밖에는 할 수가 없군.’
문득 동중산은 무슨 생각을 했는지 피식 웃고 말았다.
‘그러고 보면 가장 늦게 들어온 손풍이 그래도 나와 가장 어울릴 만한 수준인 셈인가?’
게으른데다 여자를 밝히고 불평만 일삼는 손풍의 부어터진 얼굴이 떠오르자 동중산은 치밀어 오르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오늘 오전에도 손풍은 쓸데없이 서문연상에게 치근덕거리다가 다시 한차례 쓴맛을 당하고는 자리에 누워 있는 중이었다. 서문연상은 실실거리며 ‘사저의 무공 좀 구경합시다.’하고 접근해 온 손풍을 호되게 몰아붙여 아직 몸도 성치 않은 그를 또다시 기절시켜 버렸다.
전신이 붕대투성이여서 때릴 곳도 없어 보이는 사람을 인정사정 보지 않고 두들겨 패는 서문연상도 대단하지만, 그렇게 맞고도 정신이 들면 일어나 어김없이 그녀에게 다시 시비를 걸어 가는 손풍도 참으로 쉽게 만나기 힘든 인물임에는 틀림없었다. 동중산은 두 사람 중 누가 먼저 상대에게 질릴지 궁금하기도 했으나, 손풍이 진짜 골병이 들기 전에 그를 제지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손풍이 보기 드문 강골(强骨)을 자랑한다고 해도 계속 그런 식으로 맞았다가는 조만간에 몸을 크게 상할 게 분명했다.
한동안 사제들에 대한 생각에 잠겨 있던 동중산은 자신도 모르게 한 차례 깊은 심호흡을 했다.
초가보의 눈을 피해 홀로 종남산의 후미진 곳을 숨어 다닐 때가 엊그제 같았는데, 어느새 초가보를 물리치고 자신에게는 다섯 명의 사제들이 생겼다는 생각을 하자 한 줄기 감회가 솟구치는 것을 억제하기 힘들었던 것이다.
그 사제들이 하나같이 독특한 개성을 소유한 젊은 인재들이라는 사실이 그토록 마음 든든할 수가 없었다.
진산월은 동중산의 얼굴 표정만 보고도 그의 마음을 짐작할 수 있었기에 말없이 그를 지켜보고만 있었다. 평소에는 좀처럼 표정의 변화가 없던 동중산이었지만 지금은 마음속의 격동을 억누르기 힘든 듯 여러 차례 안색이 변하고 있었다.
동중산에 대한 진산월의 신뢰는 각별한 것이었다.
동중산이 종남파에 입문한 동기는 비록 불순한 것이었지만, 지난 세월 동안 그는 종남파의 제자로서 한치의 부끄럼이 없도록 처신해 왔다. 진산월보다 훨씬 많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존장(尊長)에 대한 예우를 잃지 않았고, 종남파의 재건을 위해 전력을 기울여 왔다. 이제 여섯 명이나 되는 일대제자들의 대사형(大師兄)으로서 나이 어리고 제각각인 사제들을 잘 이끌고 있는 그를 보게 되니 절로 믿음직하고 고마운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복잡한 상념에 잠겨 있던 동중산이 문득 정색을 했다.
“한 가지 우려되는 것이 있습니다.”
“말해 보아라.”
“단리 사제는 뛰어난 재질만큼이나 호승심(好勝心)이 강합니다.”
“그 나이 또래의 아이들은 대체로 그런 편이지.”
동중산의 얼굴에 쓴웃음이 떠올랐다.
“저도 단리 사제 같은 기재에게 호승심이 있다는 건 나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자만하지 않고 성장하는 데 좋은 작용을 할 수도 있겠지요. 다만……”
진산월이 쳐다보자 동중산은 평소의 그답지 않게 약간 머뭇거렸다.
“단리 사제는 특히 유 사제에게 그런 감정을 느끼고 있는 것 같습니다.”
진산월은 충분히 그럴 것이라고 생각했다.
단리상은 어려서부터 서안 일대에서 신동으로 소문이 자자한 아이였다. 주변의 많은 기대와 칭찬을 받고 자란 만큼 남들보다 호승심이 강한 것은 어쩔 수가 없을 것이다. 특히 종남파에 뒤늦게 입문하여 자기 위에 몇 명의 사형들이 있다는 걸 알게 되자 그들에게 뒤질 수 없다는 생각이 간절할 게 뻔했다.
더구나 다른 사형들과는 나이 차이가 적지 않았지만, 유소응은 그보다 불과 두 살이 많을 뿐이었다. 그러니 단리상이 유독 유소응에게 불같은 경쟁심을 느끼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었다.
“문제는 단리 사제가 유 사제를 자신의 사형이 아니라 밟고 올라가야 할 경쟁 상대로만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처음 입문해서 얼마간은 그래도 주변의 눈치를 보느라 조용했습니다만, 며칠 전부터는 노골적으로 유 사제의 신경을 건드리며 그를 자극하고 있습니다.”
“흠……”
“저도 처음에는 그 나이 또래의 아이들이라면 의당 그럴 수도 있겠다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습니다만, 요즘 들어 두 아이 사이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서 조금씩 걱정이 되고 있습니다.”
동중산이 진산월에게 언급할 정도면 단순히 심상치 않은 정도가 아니라 상당히 심각한 수준임이 틀림없었다.
그들 나이에서는 두 살 차이란 적지 않은 것이어서, 일반적으로는 쉽게 우열이 판가름이 나고 서열이 정해지는 법이었다. 하지만 단리상의 재질이 너무나 뛰어나다는 것이 문제였다.
단리상은 유소응이 비록 자신보다 나이도 많고 먼저 입문하기는 했으나 무공 실력은 자신이 훨씬 낫다고 생각하여 그를 사형으로 순순히 인정하려 하지 않으려는 모양이었다. 유소응은 나이답지 않게 과묵하고 침착했으나, 그런 만큼 마음속의 자긍심(自矜心)은 다른 누구보다 강한 아이였다. 단리상의 그런 태도가 유소응에게는 적지 않은 상처가 되고 있을 게 분명했다.
진산월은 동중산의 걱정 어린 얼굴을 보고는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더니 이내 담담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잠시 후에 그들을 연무장으로 오도록 해라.”
“알겠습니다.”
동중산을 공손하게 머리를 조아리기는 했으나, 진산월이 어떤 처방을 내릴지 마음속으로는 궁금하기 짝이 없었다. 자신도 몇 번인가 나서려 했으나, 자칫하면 민감한 나이의 아이들에게 예상치 못한 상처를 줄까 두려워 묵묵히 지켜보기만 했던 것이다.
‘장문인이라면 틀림없이 합당한 조치를 내리실 것이다.’
동중산은 진산월에 대한 신심(信心)이 두터웠기 때문에 그동안의 불안감을 씻어 버릴 수 있었다.
진산월은 자신의 앞에 나란히 서 있는 두 명의 소년들을 바라보았다.
유소응과 단리상은 여러 가지 면에서 판이하게 달랐다.
유소응이 조실부모(早失父母)하여 외할아버지 밑에서 힘든 유년 시절을 보낸 반면, 단리상은 서안의 유력한 명문세가 출신에 양친(兩親)이 모두 살아 계신 최상의 조건 속에서 성장해 왔다. 유소응이 거친 대초원의 바람을 맞으며 자라 온 잡초라면 단리상은 온실 속에서 많은 관심과 혜택을 받으며 커 온 화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두 사람의 외모 또한 비슷한 구석이 한 군데도 없어 보였다. 유소응은 몽고인의 피를 이어받은 혼혈이어서인지 눈이 유달리 작고 피부는 거칠었으며, 체구도 왜소한 편이었다. 그에 비해 단리상은 여자처럼 하얀 피부에 두 눈에는 총기가 번뜩였고, 어려서부터 체계적인 훈련을 해온 탓에 신체의 발달도 잘 이루어져 있었다.
혈통부터 성장 과정과 외모, 심지어는 성격마저 전혀 다른 두 소년이 어깨를 맞댄 채 나란히 서 있는 광경은 보는 것만으로도 색다른 재미가 느껴질 정도였다. 주변에는 부르지도 않았는데 동중산을 비롯해 방화와 서문연상이 서성거리고 있었고, 전흠은 아예 한쪽 벽에 걸터앉아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장내를 주시하고 있었다. 소지산과 방취아도 어깨를 나란히 한 채 지켜보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동안 두 소년 사이에서 벌어진 신경전이 얼마나 종남파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는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진산월의 물처럼 고요한 시선과 마주친 두 소년은 전혀 다른 반응을 나타냈다. 유소응은 별다른 표정의 변화가 없이 침착한 표정을 유지하고 있는 데 비해, 단리상은 얼굴이 약간은 상기된 채 도발적이리만치 강한 눈빛으로 진산월을 마주 응시하고 있었다. 그 모습은 마치 자신의 가치를 제대로 평가해 달라는 무언(無言)의 요구 같았다.
진산월은 한동안 두 소년을 찬찬히 바라보고 있다가 특유의 나직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내가 조만간에 중원으로 나간다는 것은 너희들도 알고 있을 것이다.”
두 소년은 진산월이 자신들을 부른 이유를 대충 짐작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름대로 긴장해 있다가 그가 전혀 뜻밖의 말을 하자 약간은 의아하고 당혹스런 표정을 지었다. 두 소년뿐 아니라 주위에 모여 있던 사람들도 모두 귀를 쫑긋 세우는 모습들이었다.
“그때 너희 둘 중 한 명을 데려갈 생각이다. 너희들 의견은 어떠냐?”
그 말에 두 소년뿐 아니라 중인들의 눈이 일제히 크게 뜨여졌다. 설마 진산월이 이런 말을 하리라고는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것이다. 진산월은 소년들의 얼굴에 놀라움에 찬 표정이 떠오르는 광경을 지켜보고 있다가 먼저 유소응에게 시선을 던졌다. 유소응은 그와 시선이 마주치자 이내 공손하게 머리를 조아렸다.
“사부님께서 허락해 주신다면 제자는 따라가고 싶습니다.”
진산월의 시선이 그 옆에 있는 단리상에게로 향했다. 단리상은 마른침을 꿀꺽 삼키더니 아이답지 않은 당찬 표정을 지어 보였다.
“저도 물론 가고 싶습니다. 강호에 나가는 것이 꼭 좋아서만은 아니고, 좀 더 사부님 곁에 가까이 있고 싶기 때문입니다.”
아홉 살짜리 아이의 말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야무진 대답에 놀랐는지 중인들 중 누군가가 나직하게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다. 진산월은 한차례 더 단리상을 응시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담담한 음성으로 말했다.
“두 사람 모두 따라가고 싶다니 그렇다면 공평하게 결정하도록 하마. 비무(比武)를 하여 이긴 사람을 데려가도록 하겠다.”
유소응의 표정은 별로 변하지 않은 데 비해 단리상의 얼굴은 눈에 띄게 밝아졌다. 그러다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황급히 물었다.
“비무에서 꼭 본파의 무공만 사용해야 하는지요?”
진산월은 고개를 저었다.
“암수(暗手)를 쓰지만 않는다면 어떤 무공을 펼치든 상관없다.”
“알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는 단리상의 얼굴에는 자신에 찬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단리상은 종남파에 입문한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 제대로 펼칠 줄 아는 종남파의 무공이 별로 없었다. 그러니 진산월의 말은 그의 유일한 약점을 해결해 준 것이나 다름없었다. 최소한 단리상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서 비무를 위해 유소응과 마주 보고 섰을 때도 그의 안색에는 별다른 긴장의 빛이 보이지 않았다. 단리상은 다섯 살 때부터 조부인 단리장천에게서 직접 무공의 기초를 배웠으며, 그 뒤로 단 하루도 무공 연마에 소홀히 한 적이 없었다. 계절마다 몸에 좋은 보약을 복용했고, 한 달에 한 번은 반드시 추궁과혈(推宮課穴)로 혈맥을 넓혀 탄탄한 기반을 닦았다.
단리상은 적어도 비슷한 또래에서는 천하의 누구와 겨루어도 패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게다가 듣기로는 유소응은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무공을 익히기는커녕 대막 일대를 떠돌아다니던 고아 신세였다고 하지 않는가? 비록 자신보다 종남파에 입문이 몇 달 빠르기는 했으나, 무공이란 절대로 일조일석(一朝一夕)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님은 단리상 자신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단리상은 이번 비무가 자신의 승리가 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어쩌면 사부님은 이번 강호행에 자신을 떳떳하게 데리고 나가기 위해 일부러 이런 비무를 하라고 했을지도 몰랐다. 자신이 사부의 입장이라고 해도 떠돌이였던 유소응보다는 명문가의 후예로 뛰어난 무재(武才)를 지닌 자신을 더 총애할 것이 분명하지 않겠는가?
이런 생각은 다른 사람들도 비슷한지 비무를 하러 나가는 유소응을 바라보는 중인들의 시선에는 안쓰러운 기색이 담겨 있었다.
비록 단리상이 보기 드문 기재라고 해도 그동안 함께 고충을 겪어 와서인지 유소응에게 더 정이 가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런 중인들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유소응은 단리상의 앞에 조용히 다가섰다. 별다른 말도 없었고, 별다른 표정도 없어서 어찌 보면 이번 승부를 자포자기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단리상은 형식적으로 유소응을 향해 인사를 했다.
“잘 부탁합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이 광경을 보고 있던 동중산은 씁쓸하게 웃고 말았다.
‘저 녀석…… 끝까지 사형이란 말은 하지 않는군.’
두 소년이 서로 마주보고 서자 장내에는 제법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비록 나이 어린 소년들이었지만 비무에 임하는 자세와 기백만큼은 강호의 여는 고수들 못지않았다. 먼저 공격한 사람은 단리상이었다. 단리상은 처음부터 가전무공인 풍한팔식(風漢八式) 중의 천풍신격(天風迅擊)을 권으로 변형치켜 유소응의 가슴을 찔러 왔다. 풍한팔식은 단리 가문의 절학인 풍뢰도법을 익히기 위한 입문무공(入門武功)으로, 단리상은 일곱 살 때 조부인 단리정천에게서 직접 이 무공을 전수받았다. 비록 도(刀)가 아닌 맨손으로 펼치는 상황이었으나, 유소응의 앞가슴을 향해 빠르게 날아드는 무먹은 결코 아홉 살 소년의 솜씨라고는 보기 힘든 매서운 것이었다. 유소응은 단리상의 날카로운 공격에 압도당했는지 그 자리에 가만히 선 채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 중인들은 유소응이 단 한 초식도 받아내지 못할까 봐 절로 조마조마한 심정이 되었다. 막 단리상의 주먹이 유소응의 가슴을 가격하려는 순간, 갑자기 유소응이 슬쩍 옆으로 한 걸음 비켜섰다. 언뜻 보기에는 사납게 날아오는 단리상의 주먹을 피하기 위한 무의식적인 행동 같았으나, 진산월은 그것이 어설프게나마 장괘장권구식 중의 천성탈두(天星奪斗)를 펼치기 위한 기수식(起手式)임을 알아보았다. 아니나다를까? 시기적절하게 옆으로 이동하여 단리상의 주먹을 피하자마자 유소응은 재빨리 단리상의 앞쪽으로 다가서며 그의 아랫배를 손등으로 가격했다. 단리상은 비쩍 마른 체구에 비실해 보이는 유소응이 의외로 날카로운 반격을 가하자 흠칫 놀랐으나 이내 눈을 반짝이며 양손을 교차로 움직였다. 단리상은 왼손으로 유소응의 손등을 막음과 동시에 오른 주먹으로 그의 옆구리를 가격해 갔다. 이번의 일식은 풍권천운(風捲穿雲)이라는 것으로, 한 번에 각기 다른 두 가지 변화를 일으켜 상대를 공격하는 수법이었다. 단리상의 공수(攻守)를 겸한 초식 운용은 어린아이답지 않은 노련한 것이어서 지켜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절로 감탄성을 발하게 했다. 유소응은 뒤로 주춤 물러나 간신히 단리상의 주먹을 피했으나 대신 앞가슴이 환하게 노출되어 버렸다. 단리상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내뻗었던 오른 주먹을 끌어당기며 팔꿈치로 유소승의 가슴팍을 찔러 갔다. 그 초식의 변화는 물 흐르듯 매끄럽기 그지없었다. 동중산은 이번에야말로 유소응이 당하고 말 거라고 생각했다. 동중산 자신도 이런 상황이라면 완벽하게 피할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그 다급한 순간에 유소응은 돌연 왼속은 쭈욱 내뻗어 손바닥으로 단리상의 팔꿈칠르 막음과 동시에 슬쩍 위로 치켜 올렸다. 그 바람에 단리상의 팔이 오히려 자신의 얼굴을 치는 격이 되어 버렸다.
“엇?”
단리상은 순간적으로 당황하여 황급히 몸을 옆으로 비켜서려 했다. 그 순간, 어느 사이에 유소응의 오른손이 그의 앞가슴을 때리고 지나갔다. 팍!
“음……”
단리상은 가슴이 뽀개지는 듯한 통증을 느끼고 인상을 찡그리며 뒤로 주춤 물러났다. 하나 이내 이를 악물고 다시 유소응을 향해 덤벼들려 했다.
“됐다. 그만 멈추어라.”
진산월이 제지하자 단리상은 준수한 얼굴을 빨갛게 상기시킨 채 소리쳤다.
“저는 아직 더 할 수 있습니다.”
진산월의 음성은 담담했으나 거역할 수 없는 힘이 담겨 있었다.
“이미 승부는 가려졌다.”
단리상은 얼굴이 울그락불그락하게 변한 채 거친 숨을 몇 차례 몰아쉬더니 이내 힘없이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크윽!”
마음속의 상심이 적지 않은 듯 조그만 얼굴에 비통함이 가득했다. 어찌 그렇지 않겠는가? 당연히 자신이 이길 줄 알고 있었는데, 제대로 실력도 발휘해 보지 못하고 불과 몇 수 만에 패하고 말았으니 한편으로는 어이없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수치스러워서 가슴이 터져 버릴 것만 같았다. 또래에는 자신의 적수가 없을 거라는 자부심이 산산이 깨어져 버린 것이다. 진산월은 고개를 숙인 채 어깨를 가늘게 떨고 있는 단리상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조용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네가 펼친 무공의 이름이 무었이냐?”
단리상은 기어들어가는 듯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풍한팔식이라고 합니다…….”
“단리세가의 무공이냐?”
“그렇습니다.”
“팔식을 모두 익혔느냐?”
진산월의 질문이 계속되자 단리상은 조금씩 마음을 가라앉는지 목소리가 안정을 되찾았다. 하나 착잡한 빛을 완전히 거두지는 못했다.
“예……”
“너의 풍한팔식은 제법 쓸 만했다. 보아하니 초식을 아주 제대로 익혔더구나.”
뜻밖의 칭찬에 단리상은 고개를 들어 진산월을 올려다보았다. 단리세가에서 몇 년씩이나 무공을 익히 자신이 종남파에 입문한지 두세 달밖에 되지 않은 신출내기에게 패했는데도 사부가 자신의 무공을 비꼬거나 펌하하지 않는 게 의아했던 것이다. 사부는 보통 사람보다 머리통 하나는 더 큰 신장이어서 아직 어린 단리상으로서는 한참을 올려다보아야만 했다. 게다가 비쩍 마르고 강퍅한 얼굴에는 별다른 표정이 떠올라 있지 않아서 단리상은 처음 보았을 때부터 그가 어렵고 엄해 보였다. 그런데 지금 올려다본 사부의 얼굴은 여전히 무심하고 덤덤했으나 눈빛만큼은 무어라 형용할 수 없을 만큼 온화하고 부드러웠다. 다린상은 한참 동안이나 진산월의 얼굴을 우두커니 올려다보았다. 마치 그의 말 속에 숨은 진위를 찾으려는 듯이.
“네 무공은 나쁘지 않았다. 그런데 왜 패했는지 아느냐?”
단리상은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계속 진산월을 응시하며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습니다.”
“너는 소응이 본파의 무공을 얼마나 익혔는지 아느냐?”
“모릅니다.”
“소응이 본파 무공의 가장 기초가 되는 장괘장권구식을 익히기 시작한 것은 불과 한 달도 되지 않는다. 게다가 내가 좀처럼 시간을 낼 수 없어서 장괘장권구식 중 세 개의 초식만을 간신히 가르쳤을 뿐이다.”
단리상의 눈이 크게 뜨여졌다.
“그가 배운 게 겨우 세 초식뿐이라고요?”
“그렇다. 천성탈두와 영양괘각(羚羊卦角), 그리고 단봉조양(丹鳳朝陽)이 바로 그것이다.”
단리상을 믿기지 않았으나, 그렇다고 사부가 자신에게 거짓말을 했다고는 더더욱 생각지 않았다. 단지 무공을 익힌 지 한 달고 안 되었고, 게다가 아는 초식이라고는 달랑 세 개뿐인 유소응에게 자신이 졌다는 것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을 뿐이다. 진산월은 단리상의 경악에 찬 얼굴을 가만히 내려보고 있다가 담담하면서도 차분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너를 보니 네 할아버지가 얼마나 정성을 들여 너를 키웠는지 알겠더구나. 아마 그동안 네가 배운 무공은 열 가지도 넘을 것이고, 알고 있는 초식 또한 수백 개는 족히 될 것이다.”
단리상은 부인하지 않았다.
“그렇습니다.”
“그런데도 단 세 초식만을 익힌 소응에게 네가 패한 것은 오직 한 가지 이유 때문이다.”
단리상은 자신도 모르게 황급히 물었다.
“그게 무엇입니까?”
“소응은 그 세 초식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다. 언제 어떤 상황에서 써야 하는지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지. 하지만 너는 그러지 못했다.”
단리상은 아직도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자신이 그동안 얼마나 열심히 무공을 익혔는데 초식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니…… 풍한팔식의 여덟 초식들은 눈을 감고도 시전할 수 있을 만큼 능숙하게 펼칠 자신이 있었다. 하나 진산월이 말하는 것은 단순한 초식의 능숙함이 아니었다.
“소응은 처음부터 너와 오래 싸울 생각이 없었다. 자신이 알고 있는 게 단 세 초식뿐이므로 오래 싸우면 반드시 패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에게 단 한 번의 기회밖에는 없고, 그것을 놓치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 그가 어떻게 기회를 노리고 그것을 잡았는지 들어 보겠느냐?”
“예.”
“소응은 처음부터 너에게 선공(先攻)을 양보했다. 세 초식만 알고 있는 그로서는 먼저 공격하여 너를 쓰러뜨린다는 게 불가능한 일이었지. 그래서 네가 먼저 손을 쓸 때까지 그는 묵묵히 기다렸다. 네가 선공을 가하자 그는 천성탈두의 식으로 반격을 해왔다. 천성탈두는 비록 빠르고 날카롭지만 투로(套路)가 단순하여 상대에게 역습을 당할 위험이 있는 초식이지.”
진산월의 말마따나 단리상은 어렵지 않게 유소응의 반격을 막고 오히려 풍권천운의 식으로 그를 궁지에 몰아넣었다. 아니, 궁지에 몰아넣었다고 생각했다.
“그때 네 대응은 충분히 공감할 만한 것이었다. 소응은 버티지 못하고 가슴팍에 허점을 드러냈고, 너는 놓치지 않고 그 허점을 공격해 들어갔다. 하지만 그것이 바로 소응이 노리고 있던 기회였다.”
“……!”
“네가 소응을 팔꿈치로 공격했을 때, 소응은 영양괘각의 수법으로 막으며 오히려 네 품속으로 뛰어들어 단봉조양을 펼친 것이다. 일단 이 연환식(連環式)에 걸려들면 일류고수라 해도 피하기가 힘들지.”
“그럼 그가 허점을 드러낸 것이 일부러 그랬단 말씀입니까?”
“일부러일 수도 있고, 네 반격이 날카로워서 그랬을 수도 있지. 중요한 것은 소응이 자신의 허점을 이용하여 완벽하게 기회를 잡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너는 그동안 익힌 무공을 제대로 펼쳐보지도 못하고 그의 손에 패하고 만 것이다.”
단리상은 그의 말을 곱씹어 보듯이 진지한 표정으로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단 세 초식뿐이었지만 소응은 자신이 익힌 초식들의 묘용(妙用)을 충분히 파악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반격을 당하기 쉬운 천성탈두를 먼저 사용하여 너를 유인했고, 수비력이 좋은 영양괘각으로 너의 공격을 막은 후 가장 빠르고 날카로운 단봉조양으로 단숨에 승부를 가른 것이다. 그가 펼친 수법들의 순서와 운용 방법을 곰곰히 되짚어 보면 그의 초식에 대한 이해가 얼마나 탁월했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진산월은 부드러운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이제 내가 말한 것이 무슨 의미였는지를 알겠느냐?”
단리상은 한참 동안이나 심각한 얼굴로 생각에 잠겨 있더니 이윽고 공손하게 머리를 조아렸다.
“제가 초식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부님의 말씀을 이제야 알겠습니다. 제가 배운 무공에도 틀림없이 그 초식들처럼 상대를 빠져 나올 수 없게 만드는 연환식들이 있을 겁니다. 제가 알고 있는 초식의 수가 많으니 훨씬 더 많이 있겠지요. 그런데도 저는 그런 것을 알지 못하고 오히려 단 하나뿐인 유 사형의 연환식에 당하고 말았으니 무공을 배우기만 했지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던 셈입니다.”
조리 정연한 단리상의 말에 진산월의 입가에 언뜻 엷은 미소가 스치고 지나갔다.
“알았으면 됐다. 앞으로 너는 본파의 무공을 배움에 있어 그러한 점을 잊지 말고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각골명심하겠습니다.”
진상월은 단리상에게는 패인을 자세히 분석해 준 반면 유소응에게는 특별한 말을 하지 않았다. 단지 그의 작은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 주었을 뿐이다. 그것만으로도 유소응은 만족을 했는지 작은 얼굴에 좀처럼 보기 힘든 엷은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동중산은 진산월과 함께 멀어져 가는 두 소년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가 빙긋 웃고 말았다.
‘결국 패한 다음에야 사형 소리를 하는구나. 그나저나 소응도 승부 근성이 참으로 대단하군. 앞으로 저 두 녀석을 지켜보는 재미가 무궁무진하겠는걸.’
동중산은 어깨를 들썩이며 소리 없는 웃음을 허공에 흘려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