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17권 재출강호(再出江湖)편 : 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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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림천하 17권 재출강호(再出江湖)편 : 2화


제 168장. 살수난입(殺手亂入)

“기분이 이상하군.”

손노태야는 침상에서 몸을 뒤척거렸다. 깊은 잠에 빠졌던 그는 요의(尿意)를 느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데 그 뒤로 좀처럼 잠이 오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고 아직 동이 트려면 멀었는데 벌써부터 일어나서 주위를 서성거릴 수도 없었다.

손노태야는 무공을 익히지 않은 대신 자신의 건강에는 각별히 신경을 기울이고 있었다. 계절마다 다른 보약(補藥)을 복용했고, 가급적이면 규칙적인 생활을 하려고 노력했다.

그가 특히 신경 쓰는 것은 잠과 식사였다. 소식(小食)을 하되 전하의 진미(珍味)를 위주로 식단(食單)를 짜서 입맛이 없어지는 걸 경계했고, 하루 네 시진씩은 어떤 일이 있어도 숙면(熟眠)을 취하려고 애를 썼다.

그래서인지 무공을 모르는 노인치고는 상당히 건강한 축에 속했다.

천하의 후레자식인 손풍에게는 무척이나 비통한 일이 되겠지만, 손노태야는 적어도 앞으로 이십 년 간은 끄떡없이 살 자신이 있었다.

설사 그 전에 죽는다 해도 손풍에게는 단 한 푼도 줄 마음이 없었다.

그때는 차라리 천하에서 가장 큰 고아원을 만들어 그곳에 자신의 전 재산을 기증할 생각이었고, 벌써 그 사전 준비도 은밀히 해오고 있었다.

손노태야가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거리고 있을 때였다.

방문이 소리도 없이 열리며 누군가가 안으로 불쑥 들어왔다.

손노태야는 침상에 누운 채로 살짝 눈을 떠 방에 들어온 인영을 조심스레 살펴보았다.

전신에 검은 야행복(夜行服)을 걸친 사내 하나가 날이 시퍼렇게 선 장검을 든 채 침상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 행동이 어찌나 민첩하고 날렵했던지 그가 방문을 열고 침상 가까이 다가올 때까지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손노태야는 한눈에 상대가 전문적인 살수(殺手)임을 알아차리고는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살수가 자신의 방까지 들어온 것은 근래 몇 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런 허수아비 놈들 같으니……’

손노태야는 두려움보다는 짜증이 먼저 일었다.

적지 않은 돈을 들여 상당한 실력을 쌓은 호위무사들을 고용해 자신의 방을 경비하도록 했는데, 살수는 태연히 방안까지 들어온 것이다.

살수의 침입을 막는 것은 고사하고 경보(警報)조차 울리지 못했으니 호위무사들은 그야말로 무용지물이나 마찬가지였다.

손노태야는 호위무사들의 나태함보다는 그럼 쓸모없는 놈들에게 그동안 투자한 돈이 아까워 더 가슴이 쓰렸다.

살수는 이미 침상에서 일 장 떨어진 곳까지 와 있었다.

손노태야는 더 이상 잠든 척을 포기하고 천천히 몸을 일으켜 살수를 쏘아보았다.

살수는 손노태야의 그런 행동이 뜻밖이었는지 다가서던 동작을 멈추었다.

손노태야는 침상에 앉은 채로 살수를 노려보며 특유의 느릿느릿한 음성으로 물었다.

“누가 시켰느냐?”

살수는 말없이 손노태야를 응시하더니 수중의 검을 들어올렸다.

쓸데없는 말을 지껄이기보다는 당장 손을 쓰겠다는 무언(無言)의 동작이었으나, 손노태야의 주름진 얼굴에는 별다른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손노태야의 태연한 모습에 살수의 눈빛이 순간적으로 조금 흔들렸다.

손노태야가 무공을 익히지 않았다는 것은 서안에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이 방을 지키고 있는 네 명의 호위무사는 이미 자신의 손에 모두 제거되지 않았는가?

그런데도 손노태야가 평온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은 한 가지 사실을 뜻한다.

생각이 그에 미치기가 무섭게 살수는 전력을 다해 손노태야를 향해 달려들었다.

하나 그의 행동은 조금 늦은 것이었다.

갑자기 천장에서 하나의 인영이 살수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렸다.

그와 함께 차가운 검광이 살수의 목덜미를 향해 날아왔다.

땅!

살수는 간신히 수중의 장검으로 검광을 막았으나, 검광에 실린 역도를 감당하지 못하고 뒤로 세 걸음이나 물러났다.

살수의 앞에는 어느새 비쩍 마른 체구에 눈빛이 날카로운 중년인이 우뚝 서 있었다.

그 중년인의 손에는 쇠꼬챙이를 연상케 하는 기형검(奇形儉)이 쥐어져 있었는데, 차갑고 냉정한 중년인의 외모와 몹시 잘 어울려 보였다.

살수는 중년인을 보자마자 품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가 세차게 뿌렸다.

그와 동시에 그의 신형은 어느새 방문을 박차고 밖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쐐애액!

두 줄기의 섬광이 각각 중년인과 손노태야를 향해 무서운 속도로 날아갔다.

중년인의 손에 들린 기형검이 소리도 없이 움직이더니 이내 두 개의 섬광이 박살나 버렸다.

그와 함께 중년인의 몸은 방문 밖으로 달아나는 살수의 뒤를 바짝 추격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눈부시다고밖에는 표현할 수 없는 신속한 몸놀림이었다.

하나 살수의 동작도 그에 못지않게 빨라서 단시간 내에 뒤를 잡힐 것 같지는 않았다.

두 사람이 사라진 방안은 그야말로 난장판이었다.

박살난 비수의 파편이 사방에 박혀 있었고, 부서진 방문으로 차가운 밤공기가 사정없이 밀려들어와서 황량함을 느낄 정도였다.

“더 이상 잠자기는 틀린 것 같군.”

손노태야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면 천천히 침상에서 일어났다.

한데 그가 막 침상을 빠져 나오려 할 때 다시 하나의 인영이 방안으로 뛰어들었다.

먼젓번과 같이 검은 옷을 입은 살수였다.

천하의 손노태야도 이번만큼은 안색이 굳어졌다. 설마 또 다른 살수가 숨어 있다가 두 번째 공격을 가해 올 줄은 미처 예상치 못했던 것이다. 더구나 지금은 자신이 가장 믿고 있던 일전검(一電劍) 마익산(馬益山)마저도 살수를 뒤쫓아 밖으로 나간 상태가 아닌가?

두 번째 나타난 살수는 조금의 머뭇거림도 없이 곧장 손노태야를 향해 달려왔다. 살수의 손에 들린 장검에서 흘러나오는 검광이 손노태야에게는 죽음을 부르는 사신(死神)의 괴기스런 눈빛처럼 보였다.

바로 그때 어디선가 도자기 하나가 살수의 얼굴로 날아들었다. 막 손노태야의 목덜미를 찔러 오던 살수의 장검이 그 바람에 크게 흔들렸다.

콰창! 도자기는 산산이 박살났으나 덕분에 손노태야는 목덜미를 꿰뚫리는 참변을 피할 수 있었다. 살수가 멈칫하는 순간, 거친 숨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검을 들고 살수의 옆에서 달려들었다. 일언반구 말도 없이 자신에게 덤벼드는 상대의 맹렬한 기세에 살수는 어쩔 수 없이 손노태야에게 향했던 검을 그쪽으로 움직여야만 했다.

깡! 검과 검이 마주치며 날카로운 마찰음이 터져 나왔다. 살수를 가로막은 사람은 머리를 빡빡 깎은 이십 대 초반의 청년이었다. 청년의 번들거리는 두 눈을 보자 살수는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괴이한 살기로 이글거리는 그 눈은 정상적인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빡빡머리 청년은 거친 동작으로 검을 내밀어 살수를 후퇴시키더니 조금 전보다 더욱 사나운 기세로 살수를 몰아치기 시작했다.

팍팍팍! 마치 도끼질을 하듯 수중의 장검을 미친 듯이 난무하는 빡빡머리 청년의 기세에 눌려 살수는 뒤로 주춤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하나 덕분에 빡빡머리 청년의 움직이는 모습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절름발이?’ 살수는 자신을 매섭게 몰아치는 빡빡머리 청년의 발동작이 무언가 어색함을 알아차리고는 이내 날카로운 반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검을 휘두르는 기세와 힘은 빡빡머리 청년이 월등했으나, 대적이라는 경험과 예리함은 살수가 더 뛰어났다. 더구나 살수는 청년이 한쪽 다리를 제대로 쓰지 못하는 불구임을 알고는 빠른 몸놀림으로 청년의 좌우측을 돌며 공격을 하는 바람에 빡빡머리 청년이 쉽게 우위를 점하지 못하고 있었다.

두 사람이 치열하게 공방(攻防)을 하고 있을 때 소리도 없이 세 번째 살수가 나타났다. 그는 맹렬하게 검을 부딪치고 있는 두 사람은 본 척도 하지 않고 곧장 손노태야를 향해 무서운 속도로 달려들었다. 손노태야가 세 번째 살수의 기척을 알아차렸을 때는 이미 살수의 검이 손노태야의 이마를 향해 쏘아져 오고 있었다.

이번에야말로 손노태야는 죽음을 피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런데 이번에도 손노태야는 무사할 수 있었다. 제삼(第三)의 구원자가 나타났기 때문은 아니었다. 두 번째 살수와 싸우고 있던 빡빡머리 청년이 갑자기 들고 있던 장검을 세 번째 살수에게 집어던졌던 것이다.

덕분에 손노태야는 당장에 죽음을 면할 수 있었으나, 방안의 사태는 더욱 심각해졌다. 빡빡머리 청년이 세 번째 살수에게 장검을 던진 순간, 두 번째 살수의 검은 한치의 착오도 없이 빡빡머리 청년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생사(生死)를 다투는 와중에 수중의 장검을 엉뚱한 쪽으로 내던진다는 것은 죽음을 자초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막 살수의 검이 가슴을 쑤시고 들어오는 순간, 빡빡머리 청년은 멀쩡한 오른다리를 축(軸)으로 하여 맹렬하게 몸을 회전시켰다.

파악! 그 바람에 그의 가슴을 찔러 왔던 검은 그의 어깨와 등짝을 가르고 지나갔다. 핏물이 분수처럼 뿜어 나왔으나 덕분에 빡빡머리 청년은 가슴이 꿰뚫리는 참변을 피할 수 있었다. 회전하는 탄력을 이용해서 빡빡머리 청년은 두 번째 살수의 앞쪽으로 바짝 다가섰다.

“엇?” 두 번째 살수가 움찔 놀라 황급히 내뻗었던 장검을 회수하려는 찰나, 빡빡머리 청년은 그의 머리를 사정없이 들이받았다.

뻑! 뼈와 뼈가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두 번째 살수가 휘청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빡빡머리 청년의 이마도 깨어져 피가 샘물처럼 흘러내렸다. 하나 빡빡머리 청년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두 번째 살수의 앞가슴으로 뛰어들며 그의 오른쪽 옆구리를 있는 힘껏 후려쳤다.

꽈직! 갈비뼈가 으스러지는 소리가 들리며 두 번째 살수의 입에서 시커먼 핏물이 흘러나왔다. 두 번째 살수가 옆구리가 으스러지는 통증에 허리를 부여잡고 쓰러지는 순간, 빡빡머리 청년은 어느새 세 번째 살수를 향해 몸을 날리고 있었다.

그때 세 번째 살수는 막 자신에게 날아온 장검을 쳐내고 다시 손노태야를 향해 검을 휘두르려던 참이었다. 빡빡머리 청년이 검도 없이 맨손으로 자신을 향해 달려들자 세 번째 살수는 주저 없이 검을 그에게로 돌렸다.

파팟! 세 번째 살수의 실력은 이전의 두 사람보다 훨씬 뛰어난 것이었다. 단순히 검을 앞으로 내뻗은 것 같았는데, 빗발 같은 검광이 빡빡머리 청년의 상반신을 갈가리 찢어 놓을 듯 무섭게 휘몰아쳤다.

삽시간에 빡빡머리 청년은 가슴과 어깨에 이검(二劍)을 맞고 피투성이가 되었다. 하나 빡빡머리 청년은 물러서기는커녕 오히려 두 눈을 번뜩이며 세 번째 살수를 향해 정면으로 돌진해 들어왔다.

왼쪽 다리를 거의 움직이지 못하는 절름발이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움직임은 조금도 거침이 없어서 선불 맞은 멧돼지를 연상케 했다. 세 번째 살수는 빡빡머리 청년이 검을 맞으면서도 자신의 앞으로 맹렬하게 달려들자 순간적으로 눈빛이 차갑게 굳어졌다.

‘미친놈……!’

세 번째 살수는 주저 없이 빡빡머리 청년의 목덜미를 향해 검을 내찔렀다. 그의 검이 어찌나 빨랐던지 한 줄기 빛살이 그의 손에서 빡빡머리 청년의 목으로 쏘아져 나가는 것 같았다.

“헛!”

빡빡머리 청년의 뒤에 서 있던 손노태야의 입에서 짤막한 침음성이 흘러나왔다. 빡빡머리 청년이 영락없이 그 검에 목을 꿰뚫린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세 번째 살수의 검은 확실히 날카로웠다. 아마 빡빡머리 청년의 두 다리가 멀쩡했더라도 그 일검을 피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빡빡머리 청년도 이를 알았는지 가뜩이나 매섭게 생긴 얼굴이 험상궂게 일그러졌다. 그의 눈동자가 붉은색으로 번들거리더니 달려들던 몸을 피하지 않고 계속 돌진해 오며 왼손을 앞으로 쭈욱 내뻗었다. 빡빡머리 청년의 목을 찔러 오던 세 번째 살수의 검은 한치의 착오도 없이 청년의 왼손을 그대로 관통해 버렸다.

“크흡!”

손바닥이 꿰뚫리는 통증에 빡빡머리 청년의 눈이 부릅떠졌다. 하나 덕분에 그는 상대의 치명적인 일검을 간신히 막을 수 있었다.

세 번째 살수는 설마 상대가 맨손으로 자신의 검을 막을 줄은 몰랐는지 순간적으로 움찔하다가 황급히 검을 회수하려 했다. 빡빡머리 청년은 물러서기는커녕 오히려 자신의 손바닥을 뚫고 나간 장검의 검날을 힘껏 움켜잡으며 앞으로 끌어당겼다.

세 번째 살수의 몸이 순간적으로 한 걸음 앞으로 움직였다. 그러자 빡빡머리 청년은 세 번째 살수의 가슴팍으로 사력을 다해 돌진해 들어갔다. 그야말로 몸을 던졌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세 번째 살수가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을 때는 이미 빡빡머리 청년의 어꺠가 그의 가슴에 거의 도달해 있는 상태였다.

쾅!

벼락을 치는 듯한 음향과 함께 세 번째 살수의 몸이 뒤로 주르르 밀려났다. 빡빡머리 청년의 어깨 공격은 상당히 위력적인 것이어서 세 번째 살수는 가슴뼈가 으스러지는 듯한 통증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그의 입과 코에서 뜨거운 핏물이 뿜어 나왔다. 그는 통증을 억누르며 빡빡머리 청년의 손을 꿰뚫었던 장검을 움직이려 했으나, 그때 빡빡머리 청년의 이마가 그의 눈앞으로 바짝 다가왔다.

빠악!

빡빡머리 청년의 이마가 세 번째 살수의 콧들을 완전히 으스러뜨려 놓았다. 그와 함께 빡빡머리 청년은 검에 꿰뚫린 자신의 왼손을 세차게 앞으로 내뻗었다.

순간, 세 번째 살수는 무언가 차갑고 예리한 것이 자신의 목덜미를 뚫고 들어옴을 느끼고 두 눈을 찢어질 듯 부릅떴다. 빡빡머리 청년의 손바닥을 관통했던 자신의 검이 어느새 자신의 목을 뚫고 반대편으로 뚫고 나갔던 것이다.

비명 한마디 지르지 못하고 세 번째 살수는 빡빡머리 청년을 노려보다가 그대로 허물어지듯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헉헉……”

그제서야 빡빡머리 청년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허물어지듯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두 번째 살수가 방안에 뛰어들어 왔을 때부터 빡빡머리 청년이 그의 앞을 막아서고, 다시 세 번째 살수가 들어와서 그의 손에 쓰러질 때까지는 그야말로 숨 몇 번 내쉴 시간밖에 흐르지 않았다. 그만큼 장내의 싸움은 격렬하고 흉험했다.

평생 동안 수도 없이 험악한 일을 겪었던 손노태야도 지금처럼 살벌한 싸움은 보지 못했는지 낯빛이 무겁게 굳어져 있었다.

그때 다시 한 사람이 방안으로 뛰어들어 왔다. 그는 첫 번째 살수의 뒤를 쫓았던 냉막한 인상의 중년인이었다. 중년인은 피바다로 변한 장내의 광경을 일견하고는 가뜩이나 차가운 인상이 철갑처럼 딱딱하게 변해 버렸다.

그때 손노태야가 바닥에서 바둥거리고 일어나려던 두 번째 살수를 턱으로 가리켰다.

“저놈을 잡아라.”

중년인은 황급히 두 번째 살수에게 다가갔다. 두 번째 살수는 이마가 으스러지고 오른쪽 갈비뼈가 모두 부러져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헐떡거리고 있다가 중년인이 다가오자 이를 악물었다.

중년인이 무엇인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을 때는 두 번째 살수는 시커먼 피를 토하며 숨이 끊어진 후였다. 중년인은 두 번째 살수의 몸을 살펴보더니 손노태야를 향해 고개를 흔들었다.

“자결했습니다. 아마도 입 안에 독단(毒丹)을 숨겨 놓았다가 깨문 것 같습니다.”

손노태야는 별반 표정 없는 얼굴로 그에게 물었다.

“먼저 쫓아간 놈은?”

“너무 반항이 심하기에 어쩔 수 없이 목을 베었습니다.”

손노태야는 한동안 가만히 죽은 살수의 얼굴을 내려다보더니 나직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이놈들의 정체를 아느냐?”

중년인은 고개를 저었다.

“처음 보는 자들입니다.”

손노태야의 시선이 세 번째 살수의 시신을 향했다.

“저놈도 모르겠느냐?”

중년인은 목을 자신의 장검에 꿰뚫린 채 쓰러져 있는 세 번째 살수의 모습이 특이했는지 눈을 빛내며 그의 시신을 살펴보았다. 그러다 이내 짤막한 경호성을 터뜨렸다.

“아! 이자는 일전에 본 적이 있습니다.”

“누구냐?”

“전귀(錢鬼) 막고(莫古)라는 자입니다. 돈만 주면 어떤 일이든 한다고 해서 붙은 이름입니다. 그래도 검술 실력이 상당히 뛰어나서 서안 일대에서는 최고의 살수(殺手) 중 하나로 꼽히고 있습니다.”

“전귀라…… 들어 본 적이 있는 것도 같군. 소속된 방파(幇派)는?”

“특별한 곳은 없을 겁니다. 주로 혼자 활동하면서 그때그때 조건에 맞는 일을 한다고 들었습니다.”

손노태야는 더 이상 묻지 않고 무언가 상념에 잠겼다. 중년인은 일전검 마익산이란 인물로, 십여 년 전부터 손노태야를 그림자처럼 호위해 오고 있었다. 그는 비단 무공이 뛰어났을 뿐 아니라 냉정하고 판단력이 뛰어나서 손노태야의 두터운 신임을 받고 있었다. 손노태야는 갑자기 살수들에 대한 흥미를 잃어버렸는지 심드렁한 표정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는 한쪽 구석에 앉아서 거친 숨을 헐떡이고 있는 빡빡머리 청년에게 다가가더니 무심한 시선으로 그를 내려보았다. 빡빡머리 청년은 이마가 깨어지고 여기저기에 검상(劍傷)을 입어 전신이 피투성이였다. 게다가 전귀 막고의 검에 꿰뚫린 왼쪽 손은 억지로 검날을 잡고 있던 탓에 손바닥뿐 아니라 손가락마저 모두 베어져 뼈를 드러나 보일 정도였다. 급히 지혈(止血)은 했으나 빨리 치료를 받지 않으면 정상적인 상태로 돌아올 수 없을 게 뻔했다. 손노태야는 차가운 눈으로 그를 내려보더니 냉량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바보 같은 놈. 네가 조금 전에 집어던진 도자기가 어떤 것인 줄 아느냐? 남송(南宋)때의 보물인 청화당초문대병(靑花唐草紋大甁)이란 말이다.”

빡빡머리 청년은 통증을 억누르느라 비 오듯 땀을 흘리면서도 공손하게 머리를 조아렸다.

“도자기 값은 제 급료에서 공제해 주십시오.”

손노태야의 얼굴이 얼음장처럼 냉랭해졌다.

“정신 나간 놈. 청화당초문대병이 얼마짜리인 줄 아느냐? 황금 오십 냥이 넘는 것이다. 네놈이 평생 벌어도 갚지 못한다 말이다.”

빡빡머리 청년은 머리를 숙인 채로 말했다.

“갚을 수 있을 겁니다.”

“네놈이 무슨 재주로? 일전에 말했다시피 네 급료는 한 달에 은자 열 냥이다.”

빡빡머리 청년은 천천히 고개를 쳐들었다. 손노태야와 시선이 마주치자 그는 땀과 핏물에 젖은 얼굴로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노야(老爺)께선 신상필벌(信賞必罰)에 엄격한 분이라고 들었습니다. 그게 사실이라면 제 급료는 앞으로 계속 오를 겁니다.”

손노태야의 주름진 얼굴이 살짝 찌푸려졌다.

“무얼 믿고 그리 자신하는 거냐?”

빡빡머리 청년, 응계성의 얼굴에 떨올라 있는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제 자신을 믿고 있습니다.”

손풍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한데?’

이른 아침이었다. 평상시라면 연무장을 제외하고는 쥐죽은듯 조용할 텐데 오늘 따라 유달리 주위가 소란스러웠다. 새벽마다 무공을 연마하는 몇몇 제자들을 제외하고는 아침부터 소란을 피울 만한 사람은 적어도 종남파에는 없었다.

‘아니지. 그 여우같은 마녀(魔女)와 털복숭이 곰 아저씨는 무슨 일을 저질러도 이상할 게 없는 사람들이지.’

손풍은 독살스런 서문연상과 호탕한 웃음을 잘 짓는 장승표의 우악스런 표정을 떠올리고는 자신도 모르게 인상을 찡그렸다. 그의 이십 평생에 요즘처럼 힘들고 괴로운 나날들은 일찍이 없었다. 아버지인 손노태야 밑에서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살아온 손풍이 날이면 날마다 자기보다 나이 어린 계집애에게 두들겨 맞고 기절하는 인생을 살게 될 줄이야 어찌 상상이나 했겠는가? 게다가 더욱 얄미운 건 장승표라는 산적 비슷한 작자였다. 그가 그 계집애의 손에 맞을 때마다 옆에서 어찌나 배꼽을 잡고 웃어대는지 아픈 것보다 약이 올라서 기절하는 경우가 더 많을 지경이었다. 그러면서도 얼굴만 마주치면, “자네 제법 배짱이 있군. 마음에 들었어. 몸이 다 나으면 술이나 한잔하자구.”라며 솥뚜껑 같은 손으로 등짝을 두들겨대서 속이 다 울렁거릴 지경이었다. 술이라면 손풍도 어지간히 좋아하는 사람이었고, 자신보다 두 배 가까이 나이가 많은 사람들과도 곧잘 어울리고는 했다. 하지만 그것도 정도가 있지, 어떻게 하면 그 얄미운 계집애에게 본때를 보여주나 하고 노심초사하고 있는 사람에게 눈이 마주칠 때마다 실실거리며 약을 올리는 자하고 같이 술 마시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어이구……”

손풍은 억지로 몸을 일으키다가 앓는 소리를 내며 다시 침상 위에 누워 버렸다. 그동안은 순전히 악으로 버텼으나 오늘도 어제처럼 맞았다가는 도저히 견뎌내기 힘들 것 같았다. 그렇다고 이대로 당하고 참기에는 너무나 억울했다. 손풍은 갑자기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어쩌다 내 팔자가 이렇게 됐지?’

난데없이 생전처음 보는 여자에게 말 한마디 걸었다가 정신없이 두들겨 맞고 종남파에 끌려온 것이 악몽(惡夢)의 시작이었다. 그 뒤로 눈 뜨고 일어나면 주먹질이요, 입만 벙긋하면 발길질이었다. 그것도 자기보다 몇 살이나 어린 계집애에게 그런 꼴을 당하고 있으니 스스로 자신이 호협(豪俠)하다고 생각했던 손풍으로서는 분노가 폭발할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종남파의 제자가 된 것까지는 그런대로 참을 수 있었다. 비록 예전보다는 못해도 요즘 들어와서 종남파의 이름을 여기저기서 귀동냥을 한 탓에 새롭게 일어서는 종남파에 적(籍)을 두는 것도 그다지 나쁘지는 않다고 생각했다. 최근에 강호에 나타난 검객들 중 자타가 공인하는 최고의 실력자를 사부로 모시게 되었다는 것에는 약간의 흡족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이렇게 맞고 사는 한심한 꼴이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이건 도저히 용납할 수가 없는 일이었다.

‘무슨 놈의 문파가 사람 맞는 꼴을 보고서도 말릴 생각도 안 하고 그저 멀거니 쳐다보고만 있는 거냐? 이놈의 종남파는 문파의 기본적인 규율도 없단 말인가?’

손풍은 생각할수록 울화통이 치밀어 올랐으나 지금으로선 다른 뾰족한 수가 없었다. 말을 들으니 자신은 아버지에게도 버림받은 것이 확실했고, 일단 제자로 입문한 이상 종남파를 떠나려 해도 순순히 보내 줄 리가 만무했다.

‘제길. 그때 그 애꾸가 타이른다고 넙죽 가입하는 것이 아니었어.’

손풍은 얼마 전에 서문연상에게 맞고 기절했다가 간신히 정신을 차린 다음에 자신을 잘 보살펴 주었던 동중산의 유혹에 넘어가 선뜻 종남파에 입문하겠다고 한 것을 후회했으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오늘도 그 계집애에게 당할 게 분명한데, 그걸 알면서도 자리에서 일어나려니 몸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손풍이 침상 위에서 이리저리 뒹굴거리고 있을 때였다. 똑똑…… 문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한 사람이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일어났나?”

공교롭게도 들어온 사람은 손풍이 투덜거리고 있던 대상인 동중산이었다. 손풍은 동중산을 보고도 침상에 비스듬히 누운 채 일어나지 않고 시큰둥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일이오?”

버르장머리라고는 눈을 씻고 보아도 찾을 수 없는 무례한 모습이었으나 동중산은 화를 내지 않고 오히려 빙긋 웃었다.

“오늘은 안색이 좋아 보이는군. 일어나게. 할 일이 있네.”

손풍은 붕대를 감은 자신의 팔을 들어 보이며 퉁명스럽게 쏘아붙였다.

“이게 좋아 보인다니 한쪽 눈이 없다고 제대로 보지도 못하는 모양이군. 난 꼼짝도 할 수 없으니 할 일이고 나발이고 당신이 알아서 하시오.”

동중산의 얼굴에서 미소가 걷쳤다. 동중산은 아무 말 없이 외눈을 번뜩인 채 손풍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손풍은 평소의 습관대로 입에서 나오는 대로 지껄였으니 막상 동중산이 묵묵히 쏘아보고만 있자 공연히 마음이 거북해졌다.

‘제길. 말이 조금 심했나?’

손풍은 내심 찝찝한 구석이 없지 않았으나 이내 불쑥 오기가 솟구쳐 올랐다.

‘내가 언제 남들 눈치 보면서 살았단 말인가? 이제 두들겨 맞는 것도 모자라 말 한마디까지 일일이 신경 써야 한다면 차라리 죽는 게 나을 것다.’

손풍은 자신에게 입을 막고 손을 묶는다면 그건 살아도 살아 있는 게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손풍은 무서운 눈길로 자신을 쳐다보는 동중산을 무시하고 몸을 돌리며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장문인이 찾거든 아파서 누워 있다고 하시오. 아니면 나를 이 꼴로 만든 그 계집애를 시키든지.”

손풍은 그 말을 끝으로 눈을 질끈 감고 억지로 잠을 청해 버렸다. 그런데 동중산에게서 아무런 반응도 없는 게 아닌가? 불같이 화를 내지는 않더라도 욕설 한마디쯤 하거나 아니면 주먹이라도 날아올 것을 각오했는데 당최 말 한마디 없는 것이다. 손풍은 한동안 누워 있다가 일부러 뒤척이는 척하며 고개를 힐끔 돌아보았다. 그런데 웬걸? 동중산은 언제 밖으로 나갔는지 방안에 없었다. 막상 이렇게 되니 손풍은 맥이 풀려 버렸다.

“이거 뭐 이래? 저 애꾸는 사람만 좋은 바보인가?”

손풍이 고개를 갸우뚱거리고 있을 때였다. 문이 다시 열리며 동중산이 들어왔다. 손풍은 그러면 그렇지 하고 그가 이번에는 어떻게 나올까 기다렸는데, 방에 들어온 동중산은 냅다 그를 향해 물을 뿌려대는 것이 아닌가? 이제 보니 나갔다가 들어온 동중산의 손에는 물이 가득 든 커다란 양동이가 들려 있었던 것이다.

“어푸! 이게 뭐야?”

꼼짝없이 침상 위에서 물벼락을 맞은 손풍은 기겁을 하고 놀라 몸을 벌떡 일으켰다. 이미 침상이고 바닥이고 온통 물바다였고, 전신에 붕대를 감고 있던 손풍의 몸은 흠뻑 젖어서 그야말로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되고 말았다. 손풍은 그야말로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대체 이게 무슨 짓이냐, 이 애꾸야?”

동중산은 화를 내지도 않고 그렇다고 웃음기도 없는 무표정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오늘은 본파에서 대청소를 하는 날이다. 원래 네 몸이 성치 않아서 연무장이나 쓸도록 하려 했는데, 이제 보니 방안이 엉망이로구나. 너는 밖에 나올 것 없이 네 방이나 치우도록 해라.”

그러고는 손풍의 대답도 듣지 않고 휑하니 밖으로 나가 버렸다. 손풍은 이를 부드득 갈며 그의 뒷등을 노려보았으나 굳게 닫힌 방문만이 시야에 들어올 뿐이었다.

“이런 망할……”

봄기운이 완연하다고 해도 아직 아침의 날씨는 쌀쌀하기 그지 없었다. 그런 상태에서 차가운 물에 흠뻑 젖어 버렸으니 냉기가 치밀어 온몸이 덜덜 떨려 왔다. 게다가 상처를 치료한답시고 알몸에 붕대만 감고 있다가 물벼락을 맞았으니 아예 옷을 벗고 있는 것보다 더 추웠다.

“이놈의 문파는 정말 갖은 방법으로 사람을 괴롭히는구나…”

손풍은 화를 낼 기력도 없어 입술을 부들부들 떨면서 붕대를 풀기 시작했다. 우선 붕대라도 마른 것으로 바꿔야 춘삼월에 얼어 죽는 꼴을 피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다 방안을 둘러보고는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불은 물론이고 바닥에 있던 옷가지에 가재도구들까지 모두 젖어 있어 방안은 그야말로 난장판이 따로 없었다. 아픈 몸을 쉬고 싶어도 누울 곳이 보이지 않았다. 쉬려면 어쩔 수 없이 이 난장판을 치워야 하는데 그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눈앞이 아득해지는 손풍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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