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17권 재출강호(再出江湖)편 : 3화
제 169 장. 춘야지연(春夜之宴)
종남파의 모든 제자들이 아침부터 서두른 덕분에 대청소는 미시(未時) 무렵에 끝이 났다. 구석구서까지 쓸고 닦고 정리하느라 모두들 얼굴에 검정이 묻고 머리가 까치집이 되어 버렸다. 서로 그 모습을 보고 킬킬 거리다가 목욕을 하고 다시 모였을 때는 어느덧 신시(申時)경이 가까워 오고 있었다. 때마침 주루를 경영하느라 서안에 내려가 있던 노해광과 정해 부부도 종남산에 올라와서 다시 한차례 반가운 인사를 하느라 정신들이 없었다. 정해는 종남산에 가까운 서안 남쪽에 신혼집을 꾸몄는데, 최근에는 서안 일대에 산재해 있는 종남파의 오래된 토지들을 둘러보느라 사오 일에 한 번씩밖에는 종남파에 들르지 못했다. 그때부터는 또다시 음식을 장만하느라 분주해졌다. 종남파에서 모처럼 벌어지는 연회인지라 제대로 차리기 위해서인지 요리를 만드고 음식을 나르느라 또 한차례 야단법석이 벌어졌다. 장승표는 오늘에야말로 자신의 진짜 실력을 보여주겠다고 큰 소리를 팡팡 쳤고, 서문연상은 그를 졸졸 따라다니며 이걸 만들어 달라 저걸 만들어 달라며 갖은 요구를 늘어놓았다. 모두들 정신없이 바쁘게 움직이는 가운데, 태평각에 있는 진산월에 거처로 한 사람이 찾아왔다. 연회가 벌어질 태화각 일대가 온통 요란법식인 반면 태평각은 산새의 울음소리도 들을 수 있을 만큼 고요한 정적에 싸여 있었다.
“장문인, 잠깐 시간 좀 내줄 수 있소?”
진산월의 방문을 두드린 사람은 전흠이었다. 처음 종남파에 올 때만 해도 거칠고 투박하기만 했던 전흠도 크고 작은 몇 차례의 혈전을 거치면서 많이 성숙된 모습이었다. 진산월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들어오너라.”
전흠은 방안으로 들어와서 진산월의 맞은편 의자에 가서 앉았다. 그는 진산월의 방은 처음 들어와 보는지라 한차례 주위를 둘러보고는 진심이 담긴 음성으로 말했다.
“정말 편안한 방이로군.”
진산월은 조용히 웃었다.
“일파의 장문인이 머무르는 곳치고는 너무 소박하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냐?”
전흠의 메마른 얼굴에도 언뜻 미소가 스치고 지나갔다.
“예전이라면 아마 그렇게 생각했을 거요. 하지만 지금은 장문인이 외양의 화려함보다는 내실을 더 중시하는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에 별로 놀랍지는 않소.”
“너도 말솜씨가 많이 늘었구나.”
전흠은 씁쓸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게 모두 종남파에 와서 워낙 여러 사람에게 시달림을 당한 탓 아니겠소?”
“그래, 무슨 일이냐?”
전흠은 몇 차례 헛기침을 하더니 조금은 무거운 표정으로 말을 꺼냈다.
“조부님에 관해서요.”
“사조님께 무슨 일이라도 생겼느냐?”
전흠은 평소의 그답지 않게 약간 망설이는 듯하더니 이내 결심을 했는지 빠른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장문인은 조만간에 중원으로 나간다고 알고 있소. 아마 오늘 연회도 정식으로 그 사실을 공표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하오.”
진산월은 부인하지 않았다. 확실히 연회를 벌이는 것에는 자신의 강호행으로 마음이 들떠 있는 제자들을 다독거리고 약간은 흐트러진 문파의 분위기를 다시 바로 세우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이다.
“조부님께서는 당신도 장문인의 중원행에 함께하겠다며 며칠 전부터 몹시 기대하고 계시오. 조부님이 원한다면 장문인도 거절하지 못할 테니 사실 그분의 중원행은 거의 결정된 거나 마찬가지인 셈이오.”
“……!”
“문제는 내가 그분의 중원행을 원치 않는다는 데 있소.”
뜻밖에 말에 진산월이 전흠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전흠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고, 눈가에는 한 줄기 시름의 빛이 감돌고 있었다.
“초가보와의 싸움에서 조부님은 냉구유의 현음신장에 커다란 내상(內傷)을 입으셨소. 그 이후 계속 상처를 치료했지만, 기력이 예전만 못하시고 몸 상태가 좀처럼 정상으로 회복되지 않고 있소.”
당시 전풍개의 상세가 얼마나 심각했는지는 진산월도 잘 알고 있었다. 제갈외가 없었다면 전풍개는 목숨을 잃었거나 운이 좋았더라도 영원히 무공을 쓰지 못하는 몸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진산월은 전풍개가 얼마 전부터 활기찬 모습으로 돌아다니는 것을 보았기에 그의 몸이 완벽하게 회복된 줄로만 알고 있었다. 그런데 전흠의 말은 그것이 사실이 아님을 나타내고 있었다.
“나도 처음에는 조부님의 연치(年齒)가 너무 많으셔서 단순히 회복이 늦는 것으로만 생각했었소. 그런데 아무래도 조부님의 상태가 심상치 않아 제갈 노인을 찾아가 보았소. 제갈 노인의 말씀으로는 현음기(玄陰氣)에 진원지기(眞元之氣)가 손상당해 앞으로도 영영 예전 상태로는 돌아가지 못할 거라고 하더이다.”
진산월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전풍개는 누가 뭐라 해도 현 종남파의 최고 어른일 뿐 아니라 진산월을 제외하고는 가장 실력이 뛰어난 절정고수였다. 종남파가 풍비박산의 위기에 처해 있을 때 수천 리 먼 길을 달려와 주었고, 초가보와의 처절한 혈투에서 누구 못지않은 커다란 역할을 해주었다. 단지 무공뿐 아니라 전풍개의 존재 자체가 진산월에게는 더 할 나위 없이 든든한 버팀목이었다. 그런데 전풍개가 두 번 다시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없다니 어찌 놀라고 당혹스럽지 않겠는가? 진산월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황급히 물어 보았다.
“영약(靈藥)의 도움을 받거나 내공(內功)으로 치유하는 방법은 없다고 하느냐?”
전흠의 음성은 우울한 장송곡처럼 들렸다.
“그것도 물어 보았소. 젊은 사람이라면 모르지만 조부님의 연세에는 별 도움이 안 된다고 하더군. 오히려 세월이 흐를수록 급격히 노쇠해지고 기력이 떨어질 확률이 높으니 조심하라고 신신당부하기까지 했소.”
“며칠 전에 그분이 방화가 천하삼십육검을 연무하는 것을 도와주시기에 완전히 쾌유되신 줄로만 알았는데……”
“조부님께선 혹시라도 당신의 몸이 정상이 아님을 장문인이 알게 되면 중원행을 말릴까 봐 일부러 정상인 듯 움직이신 거요. 하지만 방으로 돌아오시면 몹시 힘들어 하시곤 했소. 무엇보다도 걱정스러운 것은……”
전흠의 표정은 침울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시력이 그전보다 떨어져서인지는 모르지만 무공을 보는 안목이 예전과 같지 않으시다는 거요. 어제 나는 조부님 앞에서 성라검법의 낙성빈분을 펼쳐 보았소. 낙성빈분은 모두 열여섯 개의 변화가 있는데. 나는 일부러 그중 두 개의 변화를 일으키지 않았소. 그런데도 조부님께선 ‘네 무공의 기세가 많이 매서워졌구나.’ 라며 오히려 칭찬을 하셨소. 아마 예전이었다면 두 개의 변화가 빠진 걸 알아차리시고 불같은 호통을 치셨을 거요.”
전흠은 걱정이 가득 담긴 눈으로 진산월을 쳐다보았다.
“조부님은 장문인과 함께 중원으로 가면 반드시 형산파에 들르려고 할 거요. 이십 년 전의 복수를 위해서 말이오. 하지만 지금 조부님의 상태로는 오히려 과거보다 더욱 참혹한 일을 당할지 모르오. 나느 그런 일이 벌어질 것이 다른 무엇보다 두렵소.”
진산원을 한동안 침음한 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전흠의 말이 그에게 적지 않은 충격을 준 것은 분명했다. 한참 후에 진산월은 조용한 음성으로 물었다.
“내가 어떻게 해주었으면 좋겠느냐?”
전흠의 음성 속에는 간절한 염원이 담겨 있었다.
“조부님이 이번 중원행에 가지 못하도록 그분을 설득시켜 주시오.”
“그게 말처럼 쉽지 않다는 것은 너도 알고 있을 것이다.”
물론 전흠도 알고 있었다. 전풍개는 결코 자신이 약해졌다는 것을 수긍하지 않을 것이며, 천하의 누구라도 그의 면전(面前)에서 그의 몸이 예전 같지 않으니 중원행을 갈 수 없다는 말을 할 수 없을 것이다. 설사 진산월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전흠은 절실한 눈으로 진산월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장문인 외에는 그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것도 사실 아니오?”
진산월의 대답은 전흠에 기대에 어긋나지 않는 것이었다.
“내가 방법을 모색해 보마.”
연회는 즐거웠다. 모두들 마음껏 웃고 떠들며 먹고 마셔댔다. 그중에서도 장승표의 목소리가 가장 크고 시끄러웠다.
“글쎄 정말이라니까. 그때 내가 구해 주지 않았으면 너희 장문인은 더 이상 세상 구경을 못할 뻔했단 말이야.”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그의 말을 듣고 있던 서문연상이 입술을 삐죽거렸다.
“또 그 말도 안 되는 허풍을 떠는군요. 장문인의 무공이 얼마나 높은데 그깟 바위에서 미끄러져 절벽으로 떨어질 뻔했단 말이에요? 그리고 장문인이 떨어질 정도의 절벽이라면 털보 아저씨 실력으로는 죽었다 깨어나도 장문인을 구하지 못했을 거예요.”
장승표는 답답한지 자신의 가슴을 탁탁 쳤다.
“정말 미치겠구나. 너는 왜 내 말은 무조건 믿지 않는 거냐?”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 믿죠. 털보 아저씨는 그런 허풍이 통하리라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그건 털보 아저씨가 무공을 전혀 모르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장문인 정도의 무공이라면 산에서 미끄러져 절벽으로 떨어질 리도 없고, 진짜로 떨어졌다면 장문인보다 신법이 뛰어나지 않는 한 구할 수 없단 말이에요.”
“너는 심보를 그렇게 쓰다가는 시집가서도 구박을 받을 거다. 그때 너희 장문인은 절벽의 중턱에 매달려 있었으니, 내가 밧줄을 내려 주지 않았다면 힘이 빠져서 결국은 떨어지고 말았을 게 아니냐?”
서문연상의 눈이 샐쭉하게 찢어졌다.
“거기서 시집 얘기가 왜 나와요? 나 좋다는 남자들이 얼마나 많은데……”
“하긴. 네 성격에 구박하는 시늉이라도 했다가는 시댁에 무슨 풍파가 불어 닥칠지 모르니…… 아무튼 내 말은 한 톨의 거짓도 없는 진짜니 너는 무조건 믿어라.”
“귀는 그냥 장난삼아 뚫어 둔 거예요? 내가 말했잖아요. 장문인 실력이라면 절벽에 매달려 있었더라도 벽호공(劈虎功)을 쓰든지 해서라도 혼자 올라왔을 거라구요. 게다가 한겨울에 장문인이 화산에는 왜 갔겠어요? 그리고…… 밧줄은 또 어디서 난 거예요?”
장승표의 수염투성이 얼굴이 시뻘겋게 변했다.
“어이구. 이 아가씨가 정말 생사람 잡겠군. 내가 무엇 때문에 없던 일을 만들어서 거짓말을 한단 말이냐? 밧줄은 산에 익숙한 사냥꾼이라면 누구나가 가지고 다닌다. 산에서 무슨 일을 당하지 모르니 최소한의 생명줄로 가지고 다니는 것이다.”
“피…… 거짓말.”
장승표가 고리눈을 부릅떴다.
“한 번만 더 내 말을 거짓말이라고 하면 앞으로 두 번 다시 내가 만든 음식을 먹을 생각 하지 마라.”
“치사라게 먹는 거 가지고 협박하기는. 그럼 믿어 줄 테니 내 일 홍배웅장을 만들어 줘요.”
“아니 지금 어디 가서 곰을 잡아온단 말이냐? 더구나 그걸 만들려면 최소한 삼 일 이상 걸린다고 하지 않았느냐?”
“싫으면 말고요. 나도 안 믿을 테니까.”
서문연상이 횅하니 고개를 돌려 버리자 장승표가 바짝 약이 올라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서문연상도 장승표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장승표는 허풍이 심하긴 하지만 있지도 않은 일을 만들어 낼 사람은 아니었다. 다만 그의 반응이 너무 직선적이어서 이런 식으로 그를 놀려먹는 게 재미있기에 그의 말을 믿지 않는 척할 뿐이었다. 주위에서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사람들도 이런 속사정을 짐작하고 있기에 모두 낄낄거리고 있었다. 겉모습과는 달리 순진한 장승표만이 답답한 듯 화를 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가 하며 안절부절못하고 있을 뿐이었다. 서문연상은 몇 차례 더 그를 놀려 주려다 장승표가 너무나 실망하고 있는 것 같자 생각을 바꾸어 그를 위로해 주었다.
“걱정 말아요. 털보 아저씨가 눈 덮인 겨울산에서 길을 잃고 있는 장문인을 만나 도와주었다는 정도는 믿을 테니까요. 어쨌든 그렇게 장문인과 처음 알게 되었단 말이죠?”
장승표는 너무 속상해서 더 말을 할 기운도 없는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서문연상이 생글생글 웃으며 조잘거렸다.
“얼굴 풀어요. 가뜩이나 험상궂게 생긴 사람이 그런 표정을 하고 있으니까 음식이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않잖아요.”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그녀는 앞에 놓인 음식을 잘도 먹어댔다.
“이거 정말 맛있네. 이 요리 이름이 뭐랬죠?”
장승표는 여전히 입을 굳게 다문 채 표정이 풀어지지 않았다. 서문연상은 얄밉도록 맛있게 앞에 놓인 음식을 실컷 먹고는 그때까지도 화가 풀어지지 않고 있는 장승표를 힐끗 바라보더니 술잔을 내밀었다.
“털보 아저씨는 그런 표정이 어울리지 않는다니까요. 어린아아처럼 그렇게 토라져 있지 말고 술이나 한잔 받으세요.”
장승표는 참으려고 했으나 어느새 손이 움직여 그녀에게서 술잔을 받고 있었다. 그녀는 술을 따르면서 하얀 이를 드러내며 배시시 웃었다.
“영광인 줄 아세요. 검보에서도 내가 술시중을 든 사람은 아버님과 할아버지밖에는 없으니까 말이에요.”
그녀가 술을 절반쯤 따르고 술병을 거두자 장승표가 퉁명스런 음성으로 말했다.
“왜 따르다가 마느냐? 가득 부어라.”
“하도 말을 안 하기에 입이 고장 나서 술도 못 마시는 줄 알았더니 그건 아니군요.”
옆에서 듣고 있던 방화가 키득거렸고, 장승표의 털북숭이 얼굴에도 순간적으로 붉은 기가 감돌았다. 장승표는 한차례 헛기침을 하더니 이내 눈을 슬쩍 치켜떴다.
“나보고 술도 마시지 말라는 건 아예 죽으라는 소리다. 빨리 술이나 마저 따르도록 해라.”
“어련하시려고요.”
서문연상이 술을 따르자 장승표는 단숨에 술잔을 들이켰다.
“크, 좋군. 한 잔 더 따라 봐라.”
서문연상은 순순히 술을 따랐다. 장승표는 그렇게 연거푸 석 잔을 들이키고 나서야 간신히 얼굴의 화기가 풀렸다. 서문연상은 눈을 초롱초롱하게 반짝이며 장승표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뭘 그렇게 보느냐?”
장승표가 의아한 듯 묻자 서문연상은 눈도 깜빡이지 않고 장승표를 쳐다보고 있더니 갑자기 탄식을 토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사내답게 생긴 사람이 여자보다 더 잘 삐친다니…… 아마 밖에 나가 이 말을 하면 아무도 내 말을 믿지 않을 거야.”
“무슨 쓸데없는 헛소리를 하는 거냐? 술잔 빈 거 안 보니니? 아무 말 말고 술이나 따르거라.”
장승표는 그녀가 또 무슨 말을 해서 자신의 속을 뒤집어 놓을지 불안하여 술이나 따르라고 채근했으나, 서문연상은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한숨을 폭폭 내쉬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여자들이 사내답고 씩씩한 겉모습을 보고 반해서 털보 아저씨한테 시집온다고 하면 그가 얼마나 속이 좁고 화를 잘 내는 술고래인지 말해 주어야겠다. 같은 여자로서 불행의 구렁텅이 속으로 빠져드는 걸 어떻게 지켜보고만 있겠는가?”
장승표의 얼굴이 대추처럼 붉어졌다.
“정말 계속 그럴 거냐?”
서문연상은 짐짓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머. 속으로 중얼거렸는데 들렸어요? 이제 보니 귀가 제 역할을 하긴 하는 모양이네요. 사내다운 용모에 귀까지 밝다니…… 정말 모르는 여자들이 넘어가기 딱 좋네.”
장승표는 우거지상을 하며 손을 내저었다.
“됐다. 날이 풀리면 나가서 곰이라도 잡아올 테니 제발 그만 하거라.”
그제서야 서문연상을 혀를 낼름거리며 배시시 웃는 것이었다.
“그러게 진작 말할 때 승낙했으면 위신도 서고 얼마나 좋아요? 아무튼 주는 복도 못 받아먹는다니까.”
장승표의 얼굴이 다시 한 번 사정없이 구겨졌다. 하나 그가 무어라고 대꾸하기도 전에 서문연상이 갑자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런대 그놈이 안 보이네.”
“그놈이라니? 여자가 그게 무슨 말버릇이냐?”
서문연상을 별걸 다 간섭한다는 눈으로 장승표를 꼬나보았다.
“그렇게 부를 만하니까 그러는 거죠. 그럼 내가 사제한테 존댓말이라도 써야 된단 말이에요? 더구나 그런 개망나니 같은 자식한테?”
서문연상의 얼굴에 사나운 빛이 떠오르자 장승표는 자신에게 불똥이 떨어질까 봐 재빨리 머리를 흔들었다.
“아니다. 나도 그 녀석 얼굴이 왜 안 보일까 궁금하던 참이다.”
때마침 서문연상이 말하던 ‘그놈’이 어슬렁거리며 장내에 나타났다. 제일 늦게 입문하여 문파에서도 가장 막내 항렬인 손풍이 연회의 중반쯤에 모습을 드러내자 중인들은 한심하다는 모습들이었다. 개중에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사람도 있었다. 남들이 그러거나 말거나 손풍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연회장을 쓸어보더니 아무데나 가서 떨썩 앉았다. 마침 그곳을 서문연상의 맞은편 자리였다. 서문연상의 꽃같이 고운 얼굴이 얼음장처럼 차갑게 변했다.
“일어나라.”
그 음성이 어찌나 싸늘했던지 장승표의 가슴이 섬뜩해질 정도였다. 손풍은 이 계집애가 왜 또 시비를 거나 하여 그녀를 쳐다보았다.
“나는 밥도 먹지 말라는 거요?”
서문연상은 칼로 찌를 듯 예리한 시선으로 손풍을 쏘아보았다.
“자리에서 일어나 장문인과 선배 어르신들에게 먼저 문안 인사를 해라. 그런 다음 저 끝에 가서 공손하게 앉아서 조용히 처먹어라. 그게 예의라는 거다.”
손풍이 입을 열려는 순간, 서문연상의 단호한 음성이 어어졌 다.
“만약 네놈이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이번에는 반드시 팔다리 중 하나를 잘라 버리렀다.”
손풍은 비록 막되어먹고 제멋대로이긴 했으나 그렇다고 눈치가 아주 없는 바보는 아니었다. 그는 그녀의 심상치 않는 표정을 보고 그녀의 협박이 거짓이 아님을 직감적으로 알아차리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항상 오만 불손했던 손풍이 서문연상의 추상같은 말에 고분고분 따르자 옆에서 지켜보던 장승표와 방화는 어안이벙벙한 모습이었다. 하나 손풍의 속마음은 조금 귀찮고 성가셔도 인사하고 마음 편히 있는 게 낫지 잔뜩 독이 올라 있는 암고양이의 성질을 일부러 건드릴 필요는 없다는 것이었다. 사지(四肢) 중 하나가 잘린다는 건 몇 대 맞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손풍은 중앙의 상석에 앉아 있는 진산월의 앞으로 가서 넙죽 허리를 굽혀 인사를 했다.
“장문인을 뵙니다.”
제딴에는 공손하게 인사를 한다고 했으나, 남들 눈에는 천하에 버릇없는 행동이었다. 진산월은 아직도 상반신을 온통 붕대로 감싸고 있는 손풍을 찬찬히 바라보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늦었구나. 몸은 움직일 만하느냐?”
손풍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보시다시피 견딜 만합니다. 소싯적부터 제법 주먹질로 단련이 돼서 이 정도 상처는 별로 신경도 쓰지 않습니다.”
그의 말을 듣고 있던 중인들이 어이가 없는지 입을 딱 벌렸다. 문파의 막내 제자가 하늘같은 장문인에게 하는 말치고는 건방지기 이를 데 없는 소리였다. 전풍개는 꼴도 보기 싫은지 아예 고개를 돌린 채 엉뚱한 곳을 쳐다보았고, 진산월의 우측에 앉아 있던 노해광만이 흥미있는 시선으로 손풍을 응시했다. 노해광은 손풍의 입문식 때 오지 않았기 때문에 그를 처음 보는 셈이었다. 한동안 손풍을 이리저리 살펴보던 노해광이 얼굴에 의미심장한 미소를 띠었다.
“네놈이 바로 그 손노태야의 망나니 아들 녀석이군. 듣던 대로 뱃심은 제법 있어 보이는구나.”
손풍은 인상을 찡그리며 못마땅한 표정으로 노해광을 쏘아보았다.
“당신은 누군데 남의 집 귀한 아들을 망나니라고 부르는 거요?”
종남파의 제자들이 그 버르장머리 없는 모습에 발연대로했으나 노해광은 오히려 껄껄 웃었다.
“하하…… 성질과 말버릇이 하도 개차반이라서 손노태야도 학을 떼었다더니 소문이 사실이로구나. 이놈아! 나는 네놈에게는 사조뻘이 되는 노해광이라는 어른이시다. 내 앞에서 한 번만 더 그런 모습을 보였다가는 제발 죽여 달라고 빌도록 만들어 줄 테니 의심나면 한번 해보도록 해라.”
노해광은 여전히 빙글빙글 웃으며 말했으나, 그의 시선을 받자 손풍은 뱀을 본 생쥐처럼 삽시간에 안색이 창백하게 굳어졌다. 처음 볼 때는 단순히 마음씨 좋은 장사꾼 같았던 노해광의 인상이 얼굴에 미소를 띠면 띨수록 점차로 살벌해져서 천하에 다시없는 흉신악살(凶神惡殺)처럼 보였던 것이다. 손풍은 어려서부터 서안의 뒷골목을 누비고 다니며 각양각색의 사람들을 만나 보았기 때문에 이런 웃음을 짓고 있는 부류야말로 쉽게 건드릴 수 없는 정말 무서운 사람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이 부류의 사람들은 자신보다 훨씬 더 심한 파락호 짓을 했으며, 몇 번이나 죽음의 문턱을 넘나드는 경험을 해서 자신의 생사(生死)를 별로 신경 쓰지 않는 족속들이었다. 자기 목숨도 아까워하지 않는 사람이 남의 목숨 빼앗는 걸 주저할 리가 없으니, 잘못 건드리면 그대로 황천길로 직행할 가능성이 농후한 자들이었다. 손풍은 즉시 그를 향해 정중하게 포권을 했다.
“이제 보니 사조님이셨군요. 손풍이 사조님을 뵈옵니다.”
진산월을 대할 때와는 천양지차로 노해광에게 더할 나위 없이 예의바르게 인사를 하자 중인들은 어처구니가 없어 실소가 나올 지경이었다. 노해광은 여전히 입가의 미소를 그치지 않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냐. 앞으로 자주 볼 일은 없겠지만, 내 귀에 네놈이 본파에 와서도 예전 버릇을 고치지 못했다는 소문이 들리면 만나게 될 것이다. 그때 무슨 일이 벌어질지 기대해 보거라.”
손풍은 몸을 한차례 흠칫 떨더니 억지로 웃어 보였다.
“제자는 이미 종남파에 온 뒤로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누가 무슨 헛소문을 퍼뜨릴지 모르지만, 사조님께 폐를 끼치는 일은 없을 겁니다.”
손풍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그의 입에서 나온 것이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공손한 말이었다. 중인들의 불신(不信)에 찬 시선을 아는지 모르는지 노해광은 부드럽게 웃었다.
“그거야 앞으로 지내보면 자연히 알게 되겠지. 시장할 텐데 그만 가 보도록 해라.”
“예, 사조님.”
손풍은 노해광에게 다시 한 번 공손하게 인사를 하고는 잠깐 머뭇거리다 진산월과 전풍개에게도 차례로 머리를 숙였다. 그리고는 올 때와는 딴판인 의젓한 걸음걸이로 한쪽 구석에 가서 앉는 것이었다. 마치 사람이 달라진 듯한 그 모습에 전풍개가 냉랭한 코웃음을 날렸다.
“흥! 천둥벌거숭이 같은 놈이로군. 단단히 쓴맛을 봐야 정신을 차릴 것이다.”
노해광은 점잖게 웃었다.
“귀엽게 봐주십시오. 저 녀석도 나름대로 사연이 많은 놈입니다.”
전풍개의 칼날 같은 검미가 꿈틀거렸다.
“저놈에 대해서 제법 잘 알고 있는 모양이구나?”
“일전에 손노태야에 대해 조사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조금 알게 된 것뿐입니다.”
노해광은 사람 사귀기를 좋아하고 호탕한 겉모습과는 달리 의외로 꼼꼼하고 치밀한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서안에 자리를 잡을 때도 사전에 서안 일대의 유력 인사들의 뒷조사를 철저히 했던 것이다. 실제로 노해광은 서안 일대에서 가장 발이 넓고 소식이 정통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었다. 배짱이 좋고 안면이 넓어서 철면호(鐵面弧)라는 별호가 붙기도 했고, 모르는 소식이 없다고 하여 순이통(順耳通)이라 부르는 사람도 있었다. 노해광은 자신이 알고 있는 손풍의 이야기를 했다.
“손노태야는 깐깐한 인물입니다. 자기 자신은 물론이고 자식에게도 비정하리 만치 철저하고 엄격했지요. 결국 큰아들은 상인들의 암투에서 전면에 나섰다가 희생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손풍에게는 달랐습니다. 형과는 달리 어려서부터 끔찍이도 아꼈지요.”
그것에는 이유가 있었다. 원래 손풍은 세상에 나오지 못할 뻔했었다. 손풍의 어머니가 만삭이었을 때 사고를 당해 치명적인 부상을 입었기 때문이다. 당시 손노태야는 워낙에 장사에 바빠서 아내가 사경(死境)을 헤매는 것도 알지 못했다. 그가 소식을 듣고 집으로 달려갔을 때는 이미 아내는 숨이 끊어진 후였다. 손풍은 죽은 어머니의 뱃속에서 기적적으로 살아 나왔지만, 그 때문에 어려서부터 잔병에 시달려야만 했다. 손노태야는 아내에 대한 미안한 마음을 손풍에게 갚으려는지 그에게 지극정성을 베풀었다. 온갖 크고 작은 병에 시달리는 손풍을 위해 좋은 영약을 아낌없이 구입했고, 손풍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해주었다. 덕분에 손풍이 유아기를 지났을 때는 몸뚱어리 하나만큼은 더할 수 없이 튼튼해져 있었다. 손풍이 열다섯 살 때 손풍의 아홉 살 많은 형인 손화가 살수의 암습을 당해 죽고 말았다. 그때부터 손노태야의 손풍에 대한 애정은 과도할 정도로 강해졌고, 그에 비례하여 손풍의 망나니짓도 점차로 심해졌다. 그로부터 삼년 후에 손노태야는 자신이 그토록 애지중지했던 하나 남은 아들이 천하의 인간말종(人間末種)임을 알게 되었다.
“손노태야는 아직 사업에 투자하여 단 한 번도 실패한 적이 없었습니다. 유일한 실패가 바로 자식들에 대한 투자지요. 한 명은 너무 엄격하게 다루어 남의 손에 죽고 말았고, 다른 한 명은 너무 품에 감싸안아서 자기 손으로 내쫓은 격이 되고 말았으니 말입니다.”
전풍개는 묵묵히 노해광의 말을 듣고 있다가 특유의 카랑카랑한 음성으로 냉랭하게 말했다.
“동정할 가치가 하나도 없는 놈이로군. 호강에 겨워 스스로 나락에 빠져든 한심하기 짝이 없는 놈이다.”
평생을 기울어 가는 문파의 재건에 노심초사했던 전풍개로서는 서안 최고의 부자인 아버지에게서 극진한 보살핌을 받고도 방탕한 생활을 했던 손풍을 좋게 볼래야 도저히 좋게 볼 수가 없었다. 노해광은 그런 전풍개의 심정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기에 선뜻 수긍을 했다.
“물론입니다. 동정이라니 당치않은 말이지요. 다만 저는 저놈이 천하의 망나니이긴 하지만 그래도 가르치기 여하에 따라서 제법 쓸모 있는 구석도 있다는 말씀을 드리려고 했던 것뿐입니다.”
“저런 놈에게 그런 게 있을 리 있느냐?”
노해광은 소리 없이 웃었다.
“장점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전풍개는 여전히 못마땅한 눈으로 노해광을 흘겨보았다.
“저놈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말이다.”
“손풍은 서안에서 파락호 짓을 하면서 남과 다투기도 많이 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단 한 번도 아버지인 손노태야에게 도움을 청한 적이 없습니다. 때리든 맞든 항상 자기 선에서 끝을 냈지요.”
“그런 것도 장점이냐?”
노해광은 서슴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큰 장점이지요. 유력 인물을 아버지로 두고도 그 배경을 사용하지 않고 혼자 힘으로 자신의 일을 해결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원래 배경이란 없는 사람보다 있는 사람에게 더욱 큰 유혹이니 말입니다.”
전풍개는 시큰둥한 표정이었다.
“그래서 그놈이 아까 소싯적부터 주먹질을 했다고 떠들어댔군. 그 말을 들었을 때 하도 가소로워서 진짜 주먹질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려고 했다.”
“하하…… 사숙께서 저런 애송이에게 직접 손을 쓰시다니 당치않으십니다. 저런 아이들이 말하는 주먹질은 말 그대로 시정 뒷골목의 드잡이질이니 말입니다.”
“저놈이 자기 아버지 위세를 빌리지 않고 제 앞가림을 한 것도 장점이라고 치자. 그것말고 또 다른 게 있느냐?”
“제가 듣기로는 손풍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남에게 빌어 본 적이 없다고 하더군요.”
그 말에 전풍개는 어처구니가 없는지 눈을 치켜떴다.
“그건 또 무슨 말이냐?”
“사실 파락호 짓도 쉬운 게 아닙니다. 그런 생활을 하다 보면 꼭 만나는 부류들이 정해져 있지요. 그런 부류들과 어울리다 보면 필연적으로 폭력과 온갖 지저분한 협잡, 함정 같은 것에 노출되게 됩니다. 물론 사숙님 눈에는 그런 것들이 모두 치졸하기 짝이 없는 것으로 보이겠지만 그들 세계에서는 그것도 무시 못할 위협이 됩니다. 손풍이라고 그런 폭력이나 협박에 시달리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손풍은 아무리 심하게 얻어맞고 험한 꼴을 당해도 남에게 머리를 숙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제법 강단이 있다는 말이지요.”
“자랑할 게 없으니 별게 다 자랑이군. 그런데 조금 전에 네놈을 대할 때의 태도를 보니 꼭 그런 것만도 아닌 것 같구나.”
노해광의 얼굴에 떠올라 있는 미소가 조금 더 짙어졌다.
“좋게 생각하십시오. 굽혀야 할 때를 알고 있으니 앞뒤가 꽉 막힌 놈은 아니라는 증거 아닙니까?”
“꿈보다 해몽이 좋구나.”
“그 외에도 손풍을 여자를 밝히기는 하지만, 강압적으로 취하지 않을 뿐 아니라 손찌검을 해본 적도 없다고 합니다. 어설프게나마 풍류(風流)가 무엇인지 안다는 말이지요.”
“허……!”
“하하…… 물론 손풍이 제 나이 정도 되는 중년이라면 그런 게 어찌 장점이 되겠습니까만, 한창 나이 때 색을 밝히면서도 자제를 한다는 건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사숙께서도 보셔서 아시겠지만, 어려서부터 손노태야가 별의별 영약을 마구 먹인 탓인지 무공을 익히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체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비록 늦기는 했으나 지금부터라도 제대로 된 훈련을 한다면 나중에 제법 쓸 만한 고수가 될지도 모릅니다.”
손풍의 몸에 대해서는 전풍개도 어쩔 수 없이 인정을 했다. 그토록 방탕한 생활에 찌들어 있으면서도 탐이 날 정도로 좋은 골격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것도 없었다면 손풍을 입문시키는 것조차 반대했을 것이다.
“몸만 좋다고 고수가 되는 것은 아니다. 어쨌든 네 말대로 그 놈들에게도 눈여겨볼 만한 구석이 있다고 치자. 하지만 저 망할 놈의 버릇을 고치지 않는다면 고수가 아니라 고수 할애비가 된다고 해도 모두 소용없는 짓이 되고 말 것이다.”
노해광은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그 점은 장문인에게 맡기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전풍개는 묵묵히 앉아서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는 진산월을 힐끗 쳐다보더니 그제서야 얼굴에 떠올라 있던 노기가 가셔졌다.
“장문인도 나름대로의 생각이 있으니까 그런 놈을 제자로 받은 것이겠지. 아무튼 네 말대로 되는지 어디 두고 보자.”
노해광은 진산월을 향해 한쪽 눈을 찡긋거렸다. 앞으로는 네 책임이니 알아서 잘 하라는 무언의 신호 같았다. 그러다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갑자기 정색을 하며 진산월을 향해 바짝 다가갔다.
“참, 오면서 소식을 들으니 오늘 손가장(孫家莊)에서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일이 발생했다고 하더구나.”
진산월의 눈이 번쩍 빛났다. 손가장은 손노태야의 집이었다. 그리고 응계성이 머물러 있는 곳이기도 했다.
“심상치 않은 일이라니요?”
“나도 워낙 총망중에 들은 것이라 자세하게 알지는 못한다. 서안에 아직 소문이 퍼진 것도 아니고…… 그저 오늘 새벽에 손가장 안에서 소란스러운 일이 벌어졌고, 그 와중에 몇 사람이 죽고 누군가가 심하게 다쳤다는 말을 들었다.”
“죽은 사람은 누구고 다친 사람은 누구입니까?”
노해광은 진산월의 얼굴을 똑바로 응시했다.
“죽은 자들은 모르겠고, 다친 사람은 새로 들어온 보표라고 하더구나.”
진산월의 표정은 적어도 겉으로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이것을 보고 노해광은 새삼 감탄하는 마음이 들었다. 진산월이 자신의 사제들을 얼마나 끔찍히 위하는지는 노해광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응계성은 진산월의 몇 안 되는 사제들 중에서도 특별한 존재였다. 그는 초가보와의 싸움에서 치명적인 상처를 입고 다리를 저는 불구가 되고 말았다. 새로운 길을 모색하던 응계성이 몸을 담은 곳이 바로 손노태야의 손가장이었다. 그 응계성이 심한 부상을 입었을지도 모른다는 말을 들었는데도 진산월은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속마음이야 어쨌든 이러한 침착성은 그의 나이를 생각하면 믿기지 않는 일이었다. 어쩌면 이러한 점이 그 어려운 시기에 종남파 제자들로 하여금 무공도 변변치 않은 장문인을 믿고 따르게 한 원동력일지도 몰랐다. 노해광은 그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않으며 말을 이었다.
“다친 사람이 누구인지는 나도 정확히 모른다. 손노태야는 비밀을 지키는 데 익숙한 사람이라 손가장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여간해서는 소문이 나지 않는다. 혹시나 하여 이곳에 왔을 때 제일 먼저 계성의 모습을 찾아보았지만 보이지 않더구나.”
진산월의 음성은 여전히 담담했다.
“계성은 오늘 부르지 않았습니다.”
“왜 부르지 않았느냐?”
“계성은 이제 손가장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가 자기 발로 돌아올 때까지는 본파의 일에 그를 개입시키지 않을 생각입니다.”
노해광은 침음하다가 물었다.
“너는 참을 수 있겠느냐?”
진산월은 홀연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어느새 날은 어두워져 창밖으로 일점편월(一點片月)이 떠올라 있었다. 진산월은 그 조각달을 올려다보더니 조용한 음성으로 말했다.
“손가장은 계성이 스스로 선택한 곳입니다. 자신이 목적한 것을 이루지 못하면 그는 그곳에서 뼈를 묻을 각오를 하고 있습니다. 저는 멀리서 그런 그를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하고 있습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그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방취아는 진산월의 말을 듣자 눈물이 핑 돌며 목이 메어 왔다. 그 말을 하는 진산월의 심정을 절실히 느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어디 방취아뿐이랴? 소지산과 낙일방, 동중산의 표정도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입을 열어 말은 하지 않았어도 그들의 마음에는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
‘응계성이 보고 싶다……’
그와 함께 웃고 울고 고민스러워하며 지낸 세월을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그 간절한 심정은 제삼자(第三者)는 결코 알 수가 없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