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17권 재출강호(再出江湖)편 : 4화
제 170 장. 월하검무(月下劍舞)
한동안 그들 사이에는 무거운 분위기가 감돌았다. 하나 멀리 떨어진 곳에서는 여전히 웃고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런 분위기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전풍개가 눈썹을 살짝 찌푸리더니 진산월을 돌아보았다.
“할말이 있어 모이라고 한 것 같은데 이제 그만 시작하는 게 어떠냐?”
전풍개의 음성에 공력이 실려 있었는지 주위의 소란 속에서도 모든 사람의 귀에 똑똑하게 들렸다. 진산월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장바닥처럼 시끌벅적했던 장내가 갑자기 조용해지며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그에게로 집중되었다. 진산월은 담담한 시선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와 마주친 모든 사람들의 시선 속에서 존경와 흠모, 신뢰의 빛이 담겨 있었다.
예전에 진산월은 주위의 이런 기대에 찬 시선이 부담스러웠다. 그 속에 담긴 무게를 제대로 감당하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하나 지금은 오히려 무언지 모를 친숙함과 듬직함이 느껴졌다. 그것은 아마도 그의 가슴이 예전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담을 수 있을 만큼 넓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중인들의 이목이 자신에게 쏠리자 진산월은 조용한 음성으로 입을 열기 시작했다.
“모두들 알고 있겠지만, 이번에 일이 있어 중원을 다녀와야겠다.”
중인들은 모두 침을 꿀꺽 삼킨 채 진산월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내 개인적으로 무척 중요한 일이고, 본파 전체를 위해서도 반드시 해야 할 일이다. 그동안은 본파의 안위 때문에 엄두를 내지 못했으나 이제 본파가 정상을 되찾았으니 더 이상 늦출 수가 없구나.”
진산월이 분명하게 중원행을 밝히자 종남파 제자들의 얼굴에서 서서히 흥분의 빛이 감돌기 시작했다. 중인들 속에서 진산월의 말을 듣고 있던 정해가 조심스런 음성으로 물었다.
“언제쯤 가실 계획이십니까?”
“삼 일 후에 출발할 생각이다.”
“얼마쯤 걸릴 것 같습니까?”
“짧으면 한 달이고, 길면 몇 달이 걸릴지 모른다.”
중인들의 예상보다 출발은 촉박했으며, 일정은 훨씬 길었다. 하나 그러한 점들이 중인들의 흥분된 마음을 억누를 수는 없었다. 정해는 모두가 궁금해하는 질문을 던졌다.
“누구를 대동하실 생각이십니까?”
진산월이 중인들을 둘러보자 모두들 그의 눈을 피하지 않고 마주보았다. 문파의 어른들이 모두 계신 자리여서 쉽게 나서지 못했으나 자신을 데려가 주었으면 하는 것이 중인들의 공통된 바람일 것이다.
“일방이 같이 간다. 그리고 제자들 중에는 중산, 소응, 손풍을 대동하겠다.”
그 말에 주위가 다시 시끌벅적해졌다. 이름이 지명된 사람들은 희희낙락한 반면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특히 손풍의 이름이 불린 것에 다른 사람들은 물론이고 손풍 자신조차도 어리둥절한 모습이었다.
서문연상이 도저히 참지 못하겠는지 용기를 내어 끼어들었다.
“외람된 말씀이지만 장문인께 여쭙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말해 보거라.”
서문연상은 한차례 숨을 고르고는 영롱하면서도 다부진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다른 분들을 대동하시겠다는 것은 납득이 되는데, 막내 사제가 낀 것은 잘 이해가 되지 않는군요. 그 점에 대한 장문인의 생각을 알 수 있을는지요?”
서문연상의 이런 행동은 엄밀히 말하면 장문인의 권위를 침해하는 위험한 것이었다. 중인들 중에는 벌써부터 안색이 굳어진 채 못마땅한 눈으로 그녀를 쏘아보는 사람도 있었다. 특히 소지산을 그런 면에서 누구보다도 엄격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안색이 좋지 않았다. 진산월이 눈짓을 하지 않았다면 서문연상은 말도 끝내기 전에 호되게 경을 치고 말았을 것이다.
진산월은 그녀를 나무라지 않고 자신이 그런 결정을 내리게 된 배경을 짤막하게 설명해 주었다.
“손풍은 아직 본파의 무공을 단 한 초도 익히지 못했고, 강호의 경력은 전무하다시피 하다. 그래서 그를 데리고 다니며 무공의 기초를 잡아 주려는 것이다.”
하지만 눈치가 빠른 사람들은 그 외에 또 다른 이유가 있음을 알아차렸다. 종남파에 입문해서도 제 버릇을 못 고치고 망나니 짓을 일삼는 손풍의 행실을 이번 기회에 바로잡으려는 것이다. 또한 사사건건 충동을 일삼는 서문연상과 그를 떼어놓으려는 의도도 숨어 있었다.
서문연상은 누구보다 총명한 여인이기에 그런 점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자신이 빠지고 손풍이 뽑힌 것이 왠지 모르게 억울하고 분했다.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투정부리는 음성이 흘러나오고 말았다.
“하지만…… 소응도 뽑혔는데, 저만 여자라고 쏙 빼놓았다는 생각이 자꾸만 듭니다.”
진산월은 그녀의 심정을 훤히 알고 있기에 화를 내기는커녕 부드럽게 웃으며 그녀를 달래 주었다.
“그럴 리가 있느냐? 원래 제자들 중에서 소응과 상아 중 한 명을 데리고 가고 너와 방화는 두고 갈 생각이었다.”
“왜 그런 거죠?”
“너와 방화는 앞으로 일이 년이 가장 중요하다. 지금 무공의 체계를 확실히 잡아두지 않으면 본파의 무공도 제대로 익히지 못하고 실력도 퇴보되는 별볼일없는 고수가 되고 만다. 하지만 소응이나 상아는 당장은 기본을 익히는 데만 충실하면 되니 이번 기회에 강호가 어떤 곳인지를 스스로 느끼도록 해줄 생각이었다.”
진산월이 이렇게까지 말하니 서문연상도 더는 무어라고 할 수가 없었다. 단지 운 좋게 중원행에 따라가게 된 손풍이 괘씸하고 얄미워서 그를 잔뜩 흘겨보는 것으로 아쉬움을 달랠 수밖에 없었다.
서문연상이 자리로 돌아가자 진산월의 시선을 방취아에게로 향했다.
“미안하구나. 이번에 기대를 했을 텐데 너를 데리고 갈 수는 없었다.”
방취아는 이해한다는 듯 엷은 미소를 머금었다.
“알아요. 남자들만 잔뜩 가는데 여가가 한 명이라도 끼면 무척 불편하다는 걸.”
진산월은 그녀가 농담을 하는 것을 보고는 마음이 놓였다.
“그런 면이 없는 건 아니지. 하지만 너를 데려가자니 혼자서 외로워할 지산을 생각하면 도저히 어쩔 수가 없더구나.”
“호호…… 걱정 말고 잘 다녀오세요. 대신에 장문사형이 돌아오시면 저와 소 사형만 따로 여행을 떠날 테니 그리 아세요.”
진산월은 빙긋 웃었다.
“그때는 꼭 보내 주지.”
이어 그는 소지산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이번에도 네게 본파를 부탁해야겠구나.”
소지산은 듬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당분간은 본파에 큰일이 없을 테니 심려 놓으십시오. 그보다 정말 손풍을 데려가도 괜찮겠습니까?”
소지산은 진산월의 이번 강호행의 가장 큰 목적이 구궁보에 있는 임영옥을 데려오기 위한 것임을 알고 있었다. 구궁보는 누가 무어라 해도 당금 강호의 최정산을 달리는 곳이었다. 그러니 이번 일은 앞날을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위험천만한 여정(旅程)이 될지 몰랐다.
그런 중대한 일에 손풍 같은 망나니를 대동한다는 게 영 마음에 내키지 않았던 것이다.
“어쩌겠느냐? 그게 그래도 가장 나은 선택인 걸 너도 알지 않느냐?”
진산월의 말대로 손풍이 이곳에 남아 있다면 그건 더 큰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진산월이 떠나면 소지산은 고양이 손이라도 빌어 와야 할 만큼 손이 모자라 허덕일 게 뻔했다. 그런 와중에 손풍을 통제할 여유가 있을 리 없었다. 통제는 고사하고 서문연상과 날마다 싸움질이나 하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그런 면에서 다른 방법이 없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소지산은 못내 걱정이 되었다. 강호는 워낙 험난한 곳이라 자신의 몸을 건사하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인데, 무공도 거의 모르는 애송이들을 둘씩이나 데리고 다닌다는 것은 손발을 묶고 다니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중간에 말썽이라도 부린다면 여간 골치 아픈 일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장문사형도 나름대로의 생각이 있겠지.’
소지산은 그저 진산월을 믿는 수밖에는 다른 방도가 없었다.
진산월이 소지산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전풍개가 다가왔다.
“이번 여행에는 노부도 동참하고 싶구나.”
전풍개는 단도직입적으로 자신의 의견을 말했다. 멀지 않은 곳에 있던 전흠이 바짝 긴장한 표정으로 진산월을 바라보았으나, 웬걸? 진산월은 깊게 생각해 보지도 않고 선뜻 승낙을 하는 것이 아닌가?
“그렇게 하십시오. 그렇지 않아도 이번 강호행은 길흉(吉凶)을 예측할 수 없어 사조님같이 실력이 있는 분의 도움을 청하려던 참이었습니다.”
전풍개는 진산월이 반대할 것에 대비하여 여러 가지 말들을 생각해 놓았는데 그가 의외로 쉽게 승낙을 하자 오히려 맥이 빠져 버렸다.
“마침 노부의 도움이 필요했다니 잘된 일이구나.”
한쪽에서 전흠이 안색이 변한 채 연신 진산월에게 눈짓을 했으나 진산월은 그를 쳐다보지도 않고 전풍개에게만 시선을 고정시켰다.
“이번 일정은 하남성을 지나 안휘성(安徽省)까지 이어지니 상당히 먼 거리입니다.”
전풍개의 눈에 번쩍하는 섬광이 번뜩였다.
“안휘성이라면 호남성이 지척이로군.”
진산월은 그의 주름살 가득한 얼굴에 한 줄기 결연한 빛이 떠오르는 광경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굳이 호남성까지 갈 필요는 없을 듯합니다.”
전풍개의 눈초리가 매섭게 변했다.
“거기까지 가서 형산파에 들르지도 않고 그냥 돌아오겠단 말이냐? 기산취악의 굴욕을 씻지 않을 셈이냐?”
“그게 아니라, 굳이 형산까지 가지 않아도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게 무슨 말이냐?”
“정확하지는 않지만 무당(武當)에서 집회가 있을 예정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 소문이 사실이라면 그곳에서 형산파의 사람들을 볼 수 있을 겁니다.”
“그것 참 기대되는 일이로군.”
그제서야 전풍개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깊은 원한과 불 같은 투지가 결합된 싸늘한 웃음이었다. 진산월은 한동안 전풍개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가 불현듯 동중산을 불렀다.
“중산, 이리 오너라.”
“부르셨습니까?”
동중산이 다가오자 진산월은 그에게 짤막한 지시를 내렸다.
“내 방으로 가서 용영검을 가지고 오너라.”
“알겠습니다.”
동중산을 이유도 묻지 않고 재빠르게 대답한 후 태평각 쪽으로 몸을 움직였다. 전풍개가 의아한 눈으로 진산월을 쳐다보았다.
“연회장에서 검은 갑자기 왜 찾느냐?”
진산월은 담담하게 웃었다.
“오늘은 조사님과 본파의 제자들이 모두 모여 모처럼 벌이는 흥겨운 자리입니다. 마침 달빛도 소슬하게 흐르니 제 마음에 한 줄기 흥취가 이는군요. 사조님께서 꾸짖지만 않으신다면 미흡한 솜씨나마 한 수(手) 보이도록 하겠습니다.”
전풍개는 반색을 했다.
“그건 오히려 노부가 원하던 바다. 그동안 네 검을 제대로 보지 못했는데 오늘 눈요기를 톡톡히 하게 생겼구나.”
“실망시켜 드리지 않을까 적이 걱정되는군요. 너무 큰 기대는 마십시오.”
때마침 동중산이 용영검을 가져오자 장내의 분위기가 일변했다. 사람들은 왜 갑자기 동중산이 검을 들고 오나 쳐다보다가 그 검을 진산월이 받아든 채 몸을 일으키자 모두 시선을 그에게 집중시켰다. 진산월은 한차례 주위를 둘러보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오늘은 모처럼 본파의 제자들이 한자리에 모인 뜻깊은 날이다. 그동안 내가 외부의 일 때문에 새로 입문한 제자들을 가르치는 데 소홀함이 있었던 것 같아 이번 기회에 천하삼십육검의 진정한 위력을 보여주고자 한다.”
그 말에 모두 흥분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사실 진산월이 신검무적이란 별호로 중원 일대에 명성을 드높이고 있는 데 비해, 막상 종남파의 고수들은 진산월의 무공을 제대로 견신할 기회가 없었다. 초가보왕의 혈전에서는 워낙 긴박했던 순간이라 장문인이 어떻게 싸우는지 돌아볼 여유가 없었고, 나중에 풍문으로만 장문인이 서안에서 강호의 절정고수들을 연파하였다는 말을 들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지금 장문인이 자신들 앞에서 연무(演武)를 하겠다니 어찌 설레지 않겠는가? 심지어는 전풍개조차도 기대 어린 표정이었다. 십 년 동안 배출된 강호의 검객들 중 최고봉이라고까지 평가받고 있는 신검무적의 검법은 어느 정도일까? 그리고 자신들이 배우고 있는 천하삼십육검의 진정한 위력은 과연 어떠한 것일까? 모두들 이런저런 생각에 들떠 장내의 분위기는 후끈 달아올라 있었다.
진산월은 중앙의 빈자리로 가서 우뚝 섰다. 언제 뽑아 들었는지 그의 손에는 용영검이 특유의 우윳빛 검광을 뿌리고 있었다. 용영검을 들고 서 있는 진산월의 모습은 왠지 보는 것만으로도 사람을 질식시킬 듯한 압박감이 느껴졌다. 흥분된 소리들이 가라앉고 장내가 이내 쥐죽은듯 조용해졌다. 창문 사이로 내비치는 월광 한 가닥이 진산월의 검끝에 머무른다고 느낀 순간, 진산월의 신형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분명 눈앞에서 검광이 번뜩이며 검날이 허공을 가르고 있는데도 별다른 파공음이 들리지 않는 것이다. 하나 귀를 기울여 보면 마치 질 좋은 비단을 스치는 듯한 삭삭 하는 음향을 들을 수 있었다. 진산월은 두 눈을 반쯤 감은 채 춤을 추듯 검을 휘둘렀다. 검이 움직일 때마다 장내로 따라 들어온 월광이 함께 움직이는 듯했다. 어느 것이 검광이고 어느 것이 월광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종남파의 고수들은 무언가에 홀린 사람들처럼 눈앞의 광경을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지금 자신들 앞에 펼쳐지고 있는 것은 분명 자신들도 익히 알고 있는 천하삼십육검이었으나, 그 검로(劍路)는 무한대로 자유스러웠고, 변화는 상상을 초월할 만큼 기묘했으며, 움직임은 유연하기 이를 데 없었다. 천의무봉(天衣無縫)이란 바로 이를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커다란 충격을 느끼고 있는 사람은 전풍개였다. 전풍개는 육십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종남파의 무공만을 익혀 온 사람이다. 특히 천하삼십육검은 눈을 감고도 그 안의 모든 변화를 훤히 되짚을 수 있을 만큼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지금 진산월이 펼치는 천하삼십육검은 전혀 다른 무공처럼 보였다.
그가 보는 견지에서 진산월의 천하삼십육검은 더 이상 오를 경지가 없을 만큼 절정에 이른 것이었다. 초식과 초식의 연계는 물론이고 검의 움직이는 변화 하나하나가 그야말로 탄성을 토할 만큼 완벽했다.’저게 바로 종남의 검이다. 본파는 이백 년 만에 처음으로 자신의 검을 되찾았구나……’
한 줄기 억제하기 힘든 격동이 전풍개의 노구를 휘감았다. 어느덧 진산월의 검초는 천하삼십육검의 중반 십이 초를 지나 후반부에 이르고 있었다. 후반의 열두 초식은 어느 것 하나 절초(絶招)가 아닌 게 없었고, 아름답지 않은 게 없었다.
폭포수처럼 검광이 쏟아져 내리는 천하수조(天河垂釣), 유성우(流星雨)를 연상케 하는 천하성산(天河星散), 황야의 거친 물살을 보는 듯한 천하도도(天河燾燾), 가장 완벽한 수비초식 중 하나라는 천하밀밀(天河密密)…
그리고 천하무궁(天河無窮)……!
마지막 초식인 천하무궁은 천하삼십육검의 최정화(最精華)일 뿐 아니라 가장 위력이 뛰어난 절초 중의 절초였다. 완벽하게 터득할 수만 있다면 삼락검의 어떤 검초도 당해내지 못하는, 그야말로 종남파의 자랑거리였다.
문제는 지난 이백 년 동안 천하무궁의 삼십육변(三十六變)을 모두 익힌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이었다.
천하삼십육검이 점차로 후반을 향해 달려갈수록 전풍개의 마음은 설렘으로 가득 찼다.
‘이번에야말로……’
이번에야말로 일검에 삼십육방(三十六方)을 찌른다는 천하무궁의 진정한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듣기로는 진산월이 이 일검으로 초가보의 권패 봉월을 비롯한 일류고수 여섯 명을 단숨에 쓰러뜨렸다고 하지 않았는가?
마침내 천하무궁이 펼쳐졌다.
“아아……”
전풍개의 입에서는 도저히 억누를 수 없는 신음성이 흘러나왔다. 그의 눈앞에는 검의 폭죽(爆竹)이 펼쳐지고 있었다. 사방이 온통 검의 그림자에 가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전풍개는 무의식적으로 사방을 휘젓는 검의 움직임을 세기 시작했다. 검의 그림자는 끝도 없이 계속 이어질 것만 같았다. 그러다 어느 한순간 모든 검영이 씻은 듯이 사라져 버렸다.
중인들은 정신없이 앞을 바라보았다.
진산월은 처음의 자세 그대로 미동도 않고 서 있었다. 그의 수중에서 번쩍이는 용영검만 없었다면 달빛을 벗 삼아 유람이라도 나온 것으로 착각했을지도 몰랐다.
한동안 주위는 숨소리도 들리지 않는 고요한 정적이 감돌았다.
“이것이 본파의 천하삼십육검이다.”
진산월의 조용한 음성이 들리자, 그제서야 사람들은 숨을 내쉬며 말문을 열기 시작했다.
“정말 대단하군요.”
“그게 저렇게 변화하는 거였군.”
“아아…… 이런 경지도 있었구나.”
여기저기서 자신이 보았던 천하삼십육검의 환상적인 검초들에 대해 흥분된 목소리로 떠들어댔다. 강호무림에는 종남파의 상징처럼 널리 알려졌지만, 막상 종남파 내에서는 삼락검에 비해 한 단계 낮은 평가를 받았던 천하삼십육검이 오늘에서야 비로소 정당한 대접을 받고 있는 것이다.
장내의 흥분은 좀처럼 가시지 않았다.
진산월은 제자들을 흥분 상태에 내버려둔 채 자신의 거처인 태평각으로 들어갔고, 방취아와 소지산 등은 각자의 방으로 돌아갔다.
계속 술을 마시는 사람도 있었고, 밤바람을 쐬러 몸을 움직이는 사람도 있었으나, 모두의 얼굴에는 하나같이 흥분과 감동의 빛이 어려 있었다.
다만 단 한 사람, 전풍개만이 창백하게 굳은 얼굴로 석상처럼 그 자리에 서 있을 뿐이었다.
그날 밤, 전흠이 다시 진산월의 방을 찾아왔다.
전흠은 불문곡직하고 커다란 한숨을 토해냈다.
“후우…… 장문인은 정말 대단한 사람이오.”
그의 얼굴은 벌겋게 상기되어 있었다.
“조부님께선 장문인의 검학을 보시고 마음속에 있는 어떤 벽(壁)이 깨어진 듯한 느낌을 받았다고 하셨소. 나 자신도 종남의 무공에 새롭게 개안(開眼)한 기분이었소.”
“……!”
“조부님은 방에 돌아오셔서도 좀처럼 잠을 이루지 못하시다가 나를 불러 말씀하셨소. 당신께서 이번 중원행에 가지 않겠다고 말이오.”
진산월은 묵묵히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전흠은 다시 한차례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조부님이 그런 결정을 내리신 것은 장문인의 무공을 보고 당신의 부족함을 알아차리셨기 때문이오. 무엇보다도 천하삼십육검의 마지막 초식인 천하무궁을 보고 그런 생각을 하시게 되셨소.”
전흠의 얼굴에는 안도의 빛과 함께 어떤 아쉬움과 안쓰러움이 감돌고 있었다.
“조부님은 천하무궁의 서른여섯 가지 변화 중 서른세 가지만 보았음을 고백하셨소. 장문인이 일부러 변화를 빼먹을 사람도 아니고, 삼십육변을 모두 펼치지 못할 실력도 아니니 결국은 자신이 눈을 뜨고도 변화를 놓친 게 아니냐며 장탄식을 하시더군요.”
“……!”
“결국 조부님은 스스로의 몸이 예전과 같지 않음을 시인하셨소. 그런 상태로 장문인을 따라가 봤자 짐만 될 게 뻔하다며 이번 중원행에 동행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셨소. 그리고는 나보고 대신 가라고 하시더구려.”
전흠은 약간 의기소침한 표정이었으나 이내 머리를 몇 차례 흔들고는 다시 평상시의 모습으로 되돌아왔다. 그는 특유의 거칠고 광오한 시선으로 진산월을 응시하며 딱 부러지는 듯한 음성으로 말했다.
“조부님의 부탁대로 이번 중원행에는 내가 대신 갈 것이오. 그래서 반드시 조부님이 못다 이룬 꿈을 이루고야 말 거요. 기필코 사공표의 비응검을 부러뜨릴 것이오.”
진산월은 결연한 표정을 짓고 있는 전흠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웃었다.
“너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