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17권 재출강호(再出江湖)편 : 5화
제 171 장. 위락운천(渭洛雲天)
계절은 완연한 봄이었다. 옷자락 사이로 스며들어오는 바람은 훈훈했으며, 날씨는 더할 나위 없이 청명했다. 가까운 벌판은 온통 이름 모를 꽃들로 뒤덮여 있었고, 멀리 보이는 야산은 조금씩 신록(新綠)으로 물들어 가고 있었다. 낙일방은 폐 속 깊숙이 심호흡을 했다. 신선한 공기가 가슴속을 가득 채우자 기분이 상쾌해지며 전신에서 활력이 넘쳐흐르는 것 같았다.
“아…… 좋군.”
그의 옆에서 말을 몰던 동중산이 히죽 웃었다.
“그렇지요? 이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습니다.”
낙일방의 준수한 얼굴에도 엷은 미소가 떠올랐다.
“삼년 만이지요. 그때는 날씨도 추웠고, 안 좋은 일이 많아서 별로 즐겁지가 않았는데, 오늘은 정말 기분이 좋군요. 당신은 어때요? 강호에서 행도할 때 혼자 여행하는 재미도 쏠쏠했겠지요?”
동중산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렇지 않습니다. 혼자 떠돌아다니는 게 보기에는 편하고 자유스러운 것 같아도 실제로는 별 재미가 없습니다. 오늘은 어는 곳에서 자야 할지 고민하고 내일은 또 무슨 일이 벌어질지 걱정하다 보면 재미는커녕 아주 지긋지긋해집니다. 그래서 늘 한곳에 정착할 수 있는 날만을 손꼽아 기다립니다. 그러면서도 막상 그럴 기회가 닥쳐오면 또 망설이게 되지요.”
동중산의 얼굴에 무언지 모를 씁쓸함이 스치고 지나갔다.
“떠돌이 무인(武人)들의 비애라고 할 수 있지요. 오히려 지금처럼 동료들과 함께하는 여행이 얼마나 행복하고 마음 편하지 모르겠습니다.”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손풍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신들이 잘못 알고 있는 게 아니라면 낙일방의 항렬은 동중산의 사숙뻘이 된다. 그런데 두 사람이 서로 존대를 하고 있으니 어찌된 영문인지 쉽게 이해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대체 이놈의 문파는 무슨 항렬이 이렇게 엉망진창인 거야? 사숙이 사질에게 존댓말을 하지 않나, 아버지뻘 되는 놈이 사질이라고 굽실거리질 않나. 게다가……’
그의 시선이 진산월의 옆에 바짝 붙어 있는 유소응을 스치고 지나갔다.
‘밤톨만한 꼬마놈이 기껏 몇 달 빨리 입문했다고 사형 소리를 듣고 있으니 이거야 원……’
손풍은 못마땅한 것투성이라 자신도 모르게 얼굴에 퉁명스런 표정이 떠올랐다. 때마침 주위를 둘러보고 있던 진산월이 그 모습을 보았는지 손풍을 불렀다.
“손풍, 객잔이 어디쯤 있나 알아보고 오도록 해라.”
손풍의 얼굴이 구겨졌다.
‘어째 눈만 마주치면 부려먹으려고 하는지……’
목구멍까지 욕지기가 치밀었으나 그렇다고 장문인 앞에서 싫은 표정을 지을 수 없어 그냥 짤막하게 “예.” 하고 대답하고는 말을 몰아 앞으로 달려 나갔다. 전흠이 그 광경을 보았는지 눈빛이 험악해졌다.
“저 빌어먹을 자식이……”
“제가 따라가 보겠습니다.”
동중산이 재빨리 손풍의 뒤를 따라 말을 움직였다. 자욱한 흙먼지가 관도(官道)를 뒤덮는 가운데 두 사람은 이내 길 앞쪽으로 멀어져 갔다. 전흠은 아무리 생각해도 손풍의 무례한 언행이 괘씸한지 분기가 사라지지 않는 얼굴이었다.
“저놈의 버르장머리를 고쳐놓지 않았다가는 화병이 나서 내가 먼저 쓰러지겠소. 대체 무슨 생각으로 저 망나니를 강호로 끌고 나온 거요?”
그렇게 말하는 전흠의 모습도 그리 예의바른 것이라고는 할 수 없어서 낙일방은 속으로 슬며시 웃고 말았다. 진산월은 전흠의 말에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자신의 옆에 있는 유소응을 돌아보았다. 유소응으로서는 난생처음으로 말을 타고 떠나는 여행이어서 무척 설레고 흥분될 텐데도 겉으로는 평소와 별로 달라진 점이 보이지 않았다. 종남파 사람들이 놀리는 말처럼 지극치 ‘애늙은이’ 다운 모습이었다. 다만 가끔씩 주위를 둘러볼 때마다 작은 눈이 유달리 반짝거리는 것으로 보아 전혀 흥분되지 않는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말타기가 불편하거나 어렵지 않느냐?”
“괜찮습니다. 대초원에 있을 때도 말을 타고 며칠씩 돌아다닌 적이 있어서 별로 힘들지 않습니다.”
유소응은 조그만 목소리로 말하며 자신이 타고 있는 말의 목덜미를 쓰다듬었다. 아닌 게 아니라 말을 타는 자세나 말을 대하는 모습을 보니 오히려 진산월보다 더 익숙해 보였다. 진산월은 거침 대초원에서 자란 아이라 역시 다르다고 생각했다. 아마 단리상이라면 말을 타고 다니는 일에 상당히 피곤해했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이번 여행에 유소응이 따라온 것은 일행을 위해서 운(運)이 좋다고 해야 할 것이다. 낙일방이 그에게로 다가왔다.
“장문사형, 대략적인 경로는 어떻게 움직일 생각이십니까?”
“우선은 낙양으로 갔다가 개봉(開封)을 지나 합비(合肥)로 갈 예정이다.”
낙일방의 눈이 번쩍 빛났다.
“낙양이라면…… 석자장에도 들르실 겁니까?”
진산월은 고개를 끄덕였다.
“정해의 말을 들으니 진산수 뇌 대협이 아직도 석가장에서 요양을 하고 계시다고 하더구나. 그러니 지나가는 길에 찾아뵙는 게 도리겠지.”
진산수 뇌일봉은 종남파의 전대 장문인이었던 임장홍의 친구로, 강호에서 이름난 명숙이었다. 삼년 전에 그는 소림사에서 벌어진 무림맹의 집회에 참석해 종남파 고수들과 합류하여 서장으로 갔다가 불의의 사고를 당했다. 그때 그는 삼색귀파 호용의 독사에 물려 의식 불명의 상태에 빠지게 되었는데, 진산월은 급한 대로 석가장의 공자인 석지면에게 그의 안위를 부탁했다.
뇌일봉은 석가장에서 당시에 입은 독상(毒傷)을 치료해서 이 년 만에 자리에서 일어설 수 있었다. 그런데도 아직까지 석가장을 떠나지 않고 계속 그곳에 머물러 있는 것으로 보아 몸이 완전하게 회복되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낙일방은 뇌일봉의 호탕한 모습을 떠올려 보다가 고개를 흔들었다.
“석가장으로 갈 줄 알았으면 일전에 석 공자가 떠날 때 만류해서 함께 움직일 걸 그랬군요.”
석가장의 일곱 번째 공자인 석지명은 정해와 함께 종남파에 왔다가 종남파가 초가보와의 싸움에서 승리한 모습을 본 후에 다시 낙양으로 돌아갔다. 떠나기 전에 그는 진산월과 밀담(密談)을 나누었는데, 그것은 종남파에 대한 구체적인 지원을 논의하기 위함이었다.
낙일방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진산월이 무어라고 말하기도 전에 피식 웃었다.
“하긴 지금 이대로가 더 편하고 좋긴 하군요. 석 공자는 속을 잘 모를 사람이라 마음을 터놓고 대하기는 조금 망설여지더군요.”
진산월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그런 느낌이 없지 않았던 것이다.
석지명은 삼년 전에 이미 종남파에 투자할 것을 약속했었다. 하나 진산월이 실종되고 종남파가 초가보에 쫓기는 신세가 되자 소식을 끊고 있다가 종남파가 재건된 다음에야 비로소 찾아온 것이다. 그런 모습이 왠지 모르게 약삭빨라 보여서 종남파의 고수들 중에는 석지명을 탐탁지 않아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석지명이야 자신의 진로가 달린 문제이니 신중히 처신하려 한 것이겠지만, 종남파 사람들의 입장에서 그가 썩 반가운 인물만은 아니었다. 그나마 정해가 석가장에서 몇 년씩이나 신세를 졌기에 종남파의 누구도 석지명을 거부하지 않았던 것이다.
얼마쯤 가니 멀리서 동중산이 말을 타고 되돌아오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이곳에서 오 리(五里)쯤 앞에 제법 큰 주루가 있습니다.”
동중산이 숨을 고르며 보고를 하자 전흠이 퉁명스럽게 쏘아붙였다.
“그놈은 어떻게 하고 자네가 달려온 건가?”
젊은 손풍은 주루에 편히 앉아 쉬고 있고 나이 많은 대사형이 먼 거리를 달려왔으니 그 모습이 좋게 보일 리가 없었다.
동중산은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손 사제에게는 주루에서 전망이 좋은 자리를 잡아 놓으라고 지시했습니다.”
전흠은 그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았으나, 그렇다고 그 일로 동중산을 타박하기도 곤락해서 그냥 눈을 찌푸린 채 입을 다물고 말았다. 하나 마음속으로는 기회가 닿는 대로 그 버르장머리라고는 눈을 씻고 보아도 찾을 수 없는 놈을 단단히 혼내 주어야겠다고 결심했다.
이곳은 마을이라기에는 지나치게 컸고, 도시라고 하기에는 작은 곳이었다. 동중산은 이곳의 짐여이 청파진(靑坡鎭)이라고 했는데, 진산월은 들어 본 적이 없는 이름이었다.
서안에서 동쪽으로 삼백 리쯤 떨어진 곳으로, 제법 거리가 잘 꾸며져 있었다. 진산월 일행은 청파진의 중앙에 있는 넓은 대로를 따라 말을 몰았다.
“저곳입니다.”
동중산이 가리킨 곳을 보니 <조월루(照月樓)>라는 팻말이 적힌 이층 주루가 대로변에 자리하고 있었다.
“달빛이 비치는 누각이라…… 제법 운치 잇는 이름이긴 하지만 이런 변화한 곳에서는 별로 어울리지 않는군요.”
낙일방이 주루의 현판을 보고 중얼거리자 동중산이 빙긋 웃었다.
“이 마을은 전반적으로 완만한 구릉지대에 형성되어 있습니다. 게다가 주루 자체가 가장 높은 쪽에 세워져 있으니 이층 누각에 오르면 그런대로 달은 감상하기 괜찮을 겁니다.”
낙일방은 주변을 살펴보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정말 그러네요. 하룻밤 묵고 간다면 좋을 텐데 시간이 일러서 그냥 지나쳐야 한다는 게 아쉽군요.”
전흠이 냉랭하게 쏘아붙였다.
“어차피 그믐이라 달고 뜨지 않을 텐데 별 걱정을 다 하는군.”
낙일방은 뒤통수를 긁적이며 멋쩍게 웃었다.
“그것도 그러네요.”
동중산은 하얀 이를 드러낸 채 웃고 있는 낙일방의 모습이 정말 매력적이라고 생각했다. 마침 근처를 지나가던 여인네들이 얼굴을 붉히며 연신 낙일방을 힐끔거리고 있는 것으로 보아 동중산 혼자만의 착각은 아닌 게 분명했다.
최근의 낙일방은 본래의 준수한 모습에 그동안의 충실한 훈련으로 체격까지 건장해져서 그야말로 절세의 미남자로 불려 손색이 없었다. 게다가 무공이 일취월장하면서 자신감과 여유를 지니게 되어 안과 밖이 흠잡을 곳 없이 완벽했다.
그래서인지 낙일방을 대하는 전흠의 태도는 가끔 심술궂은 데가 있었다. 투박한 외모에 사투리가 심한 전흠은 여인들에게 별로 호감을 주는 인상이 아니어서 낙일방에게 묘한 부러움과 질투를 느끼고 있는 모양이었다.
전흠은 주루로 올라가면서 다시 투덜거렸다.
“이 망할 녀석은 문파의 존장(尊長)이 왔는데 나와 보지도 않고 어디에 처박혀 있는 거야?”
동중산은 이층으로 오르는 계단을 가리켰다.
“이층으로 올라가십시오. 손 사제는 그곳에 있을 겁니다.”
이층으로 올라가니 과연 시야가 탁 트이면서 주변의 풍광이 한눈에 들어왔다. 이층에는 여덟 개의 탁자가 있었는데, 창문에 면한 곳에 손풍이 턱을 괸 채로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그 모습이 어찌나 한심스러워 보였는지 전흠은 화를 낼 생각도 못하고 멀거니 쳐다보고만 있었다. 동중산은 전흠이 홧김에 손찌검이라도 할까 봐 황급히 다가가 손풍을 깨웠다.
“손 사제, 장문인께서 오셨네.”
손풍은 침까지 질질 흘리며 자고 있다가 동중산이 몸을 흔들자 퍼뜩 일어났다.
“응? 누가 왔다구?”
비몽사몽간에 깨어난 손풍은 게슴츠레한 눈을 떴다가 진산월 일행이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며칠간 잠을 제대로 못 잤더니 너무 피곤해서 그만…… 어서 앉으십시오. 제가 가장 전망 좋은 자리를 잡아 놓았습니다.”
전흠이 마침내 참지 못하고 싸늘하게 쏘아붙였다.
“대체 밤에 무슨 짓을 했길래 잠도 자지 못했단 말이냐?”
“이런저런 생각 할 게 많아서 뒤척이다 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손풍의 넉살스런 대답에 전흠의 얼굴이 험악하게 변했다. 그때 진산월이 그의 옆을 스치듯 지나가면 자리에 앉았다.
“어서 앉아라. 오늘 위남(渭南)까지 가려면 서둘러야 할 게 다.”
다른 사람도 모두 앞을 다투어 자리에 앉았다. 그 바람에 전흠은 화를 낼 기회를 놓쳐 버렸다. 전흠은 인상을 찡그리고 손풍을 노려보았으나 이런 쪽으로는 의외로 눈치가 비상한 손풍은 엉뚱한 곳을 보며 딴청을 부렸다.
때마침 점소이가 쪼르르 달려왔다. 어차피 허기를 면하기만 하면 되었기에 일행은 간단한 음식들을 주문했다. 그런 연후에야 비로소 주루 안을 둘러볼 여유가 생겼다.
점심시간이 이미 지난 탓인지 주루 안은 생각 외로 한산했다. 여덟 개나 되는 탁자에 손님은 그들 외에 단 한 명이 있을 뿐이었다.
그는 머리가 허옇게 센 늙은이였다. 그 늙은이는 진산월 일행에게서 두 개의 탁자를 건넌 곳에 있었는데, 남자들로만 이루어진 진산월 일행에 호기심이 생기는지 식사를 하면서 가끔씩 힐끔거리고 있었다.
종남산을 내려온 진산월 일행은 모두 여섯 명이었는데, 그중 네 명이 이십대의 청년들이었고 사십 줄에 접어든 중년인이 한 명, 그리고 열 살 남짓한 어린아이가 하나 있었다. 쉽게 보기 힘든 인월 구성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음식은 그런대로 만족스러웠다. 따뜻한 봄날 오후에 경치가 좋은 이층 주루의 창가에 앉아 있으니 세상에 부러운 것이 없었다. 기분 같아서는 좀 더 느긋하게 이곳에 앉아 봄의 정취를 만끽하고 싶었으나 아쉽게도 그럴 여건이 주어지지 않았다.
그들이 막 식사를 끝냈을 때 구석에 있던 늙은이가 그들을 향해 다가왔던 것이다.
늙은이는 주름살투성이에 평범한 외모를 하고 있었는데, 진산월은 한눈에 그가 무공을 익힌 무림인임을 알아보았다. 일부러 무공을 숨긴 것 같지는 않고, 자연스레 걸어오는 움직임에서 무인 특유의 분위기가 풍겼다.
“실례하겠소.”
생면부지의 늙은이가 불쑥 말을 걸어 오자 몇 사람은 어리둥절하고 몇 사람은 긴장한 모습이었다.
동중산은 진산월에게 자신이 나서도 되겠느냐는 눈짓을 슬쩍 보냈고, 진산월이 고개를 끄덕이자 곧바로 늙은이를 향해 물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노인장?”
늙은이를 대하는 동중산의 태도는 정중하면서도 일단의 경계심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었다. 늙은이는 한차례 헛기침을 하고는 늙수그레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초면에 찾아와서 실례하오. 혹시 귀하들은 종남산에서 오지 않았소?”
동중산은 전혀 표정의 변화가 없이 외눈을 부드럽게 반짝였다.
“우리들을 아십니까?”
늙은이는 짧게 웃었다.
“맞는 모양이구려. 귀하들의 용모가 소문으로 듣던 것과 비슷하여 혹시나 했는데 내 짐작이 용케도 틀리지 않았구려.”
동중산은 여전히 침착한 표정을 잃지 않고 있었다.
“무슨 소문을 들으셨습니까?”
“강호에 좀처럼 보기 힘든 몇 명의 고수들이 새롭게 나타났는데, 그들 중 두 사람이 종남파에서 배출되었다고 했소. 그중 한 사람은 눈이 번쩍 뜨일 만한 미남자이고, 다른 한 사람은 훤칠한 키에 얼굴에 칼자국이 있는 청년이라고 했소.”
우연인지 늙은이의 시선이 낙일방과 진산월을 스치고 지나갔다.
“게다가 귀하 같은 용모 또한 흔한 게 아니니 나 같은 별볼일 없는 늙은이도 어렵지 않게 귀하들의 정체를 추측할 수 있었소.”
동중산은 희미하게 웃었다.
“내 용모가 그렇게 특이합니까?”
늙은이의 시선이 다시 동중산에게로 향했다. 늙은이의 주름 진 눈은 깊은 빛을 띠고 있었다.
“강호에 애꾸는의 고수는 그리 많지 않소. 그리고 요즘 섬서 성 일대에서 가장 유명한 애꾸는 종남파의 고수인 비천호리 요.”
동중산은 자신의 정체를 부인하지 않았다.
“내가 그렇게 유명한 사람이 되었을 줄은 미처 몰랐군요.”
“당신뿐 아니라 종남파의 모든 고수들은 적어도 섬서성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소. 사람들은 입만 열면 당신들에 대해 떠들어대곤 한다오. 아마 요즘 강북에서 사람들의 입에 가장 많이 오르내리는 이름을 꼽으라고 하면 종남파의 고수들 대부분이 들어가 있을 거요.”
동중산은 물론이고 낙일방과 전흠 등도 미처 이런 사실을 몰랐는지 반신반의하는 모습들이었다. 하나 늙은이의 말은 사실이었다. 많은 섬서성 사람들은 절박한 상황에서도 굴욕을 참고 일어나 다시 재기한 종남파를 자랑스러워했다. 그들이 강력한 초가보의 도전을 뿌리치고 다시 문파를 재건하리라고는 누구도 예상치 못한 것이었으나, 그렇기 때문에 그들에 대한 성원과 칭송 또한 대단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와중에 몇 사람의 이름이 사람들의 입에 많이 오르내렸다.
준수한 얼굴에 가공할 권법 실력을 지녀 초가보의 두 명의 공봉들을 모두 격파한 옥면신권, 장문인도 없는 문파를 초가보의 위협에서 삼년 간이나 꿋꿋하게 지켜내고 마침내는 자신도 절정검객의 반열에 오른 대해검, 혜성같이 나타나 무서운 검술을 선보인 폭뢰검 등이 바로 그들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 신검무적이 있었다. 십년 내 강호에 배출된 최고의 검객이라는 찬사가 그의 뒤를 따랐다. 그는 몇 달 사이에 한 자루 검으로 수십 명의 절정고수들을 연파했고, 무너져 가는 종남파를 다시 일으켜 세웠다. 그의 명성은 짧은 시일 내에 섬서성을 거쳐 중원 전역으로 퍼져 가고 있었다. 심지어는 무림구봉이 무림십봉(武林十峯)이 되어야 한다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이 종남파의 떠오르는 이름들이라면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혀졌다가 다시 되살아나는 이름들도 있었다. 종남파가 풍전등화의 위기에 빠졌다는 말을 듣고 노구를 이끌고 수천 리를 달려온 질풍검 전풍개, 강호의 흑도(黑道)들 사이에서 상당한 명성을 날리고 있던 철면호 노해광, 그리고 초가보의 공격에 한쪽 눈을 잃었으면서도 종남파를 위해 헌신한 비천호리 동중산 등은 그동안 사람들의 기억에서 멀어졌다가 다시 새롭게 부각되고 있었다.
늙은이는 각별한 눈으로 종남파의 고수들을 찬찬히 둘러보고는 이내 진산월에게로 시선을 고정시켰다. 늙은이는 진산월의 얼굴을 유심한 시선으로 바라보더니 그와 눈이 마주치자 정중하게 포권을 했다.
“안녕하시오. 이 늙은이는 복필(宓弼)이라 하오. 대명이 자자한 진 장문인을 뵙게 되니 금생의 영광이 아닐까 하오.”
복필이라는 말에 동중산이 눈을 빛내며 진산월에게 나직하게 소곤거렸다.
“단명수(斷命手)라는 별호로 널리 알려진 고수입니다. 하북 성 쪽에서 주로 활동했다고 들었는데, 이곳에서 보게 될 줄은 몰랐군요.”
진산월이 늙은이를 향해 가볍게 답례를 했다.
“진산월이오. 복 대협을 뵈어 반갑소.”
“오늘 이 늙은이가 초면에 결례를 무릅쓰고 진 장문인을 찾아온 건 강호에 전설이 되어가고 있는 진 장문인의 존안(尊顔)을 보기 위한 것도 있지만, 한 가지 긴히 말씀드릴 게 있기 때문이오.”
복필의 진산월을 대하는 태도는 나이나 명성에 비해 지나치게 공손하 것이어서 보는 이가 무안함을 느낄 정도였다. 낙일방은 삼년 전의 중원행 때 진산월이 다른 무림인들에게 어떤 대접을 받았는지 똑똑하게 기억하고 있기 때문에 복필의 이런 모습을 보자 감회가 새로웠다. 격세지감(隔世之感)이란 바로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하실 말씀이란 게 어떤 건지요?”
복필의 표정에 진지한 빛이 떠올랐다.
“진 장문인께선 혹시 위락운천(渭洛雲天)이란 말을 들어 본 적이 있으시오?”
진산월은 잠시 생각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낙남(洛南)에 있는 운문세가(雲門世家)의 위세를 나타내는 말이 아니오?”
“바로 그렇소.”
위락운천이란 ‘위수(渭水)와 낙수(洛水) 일대는 운문세가의 천하(天下)다’ 라는 뜻이었다. 운문세가는 섬서성과 하남성의 경계 부근에서 누구도 무시 못할 세력을 지닌 명문세가로, 백년이 넘는 세월 동안 이 일대에서 가장 강력한 위세를 떨치고 있었다.
“조금 전에 본의 아니게 진 장문인께서 위남까지 가신다는 말을 들었소. 이 늙은이가 진 장문인을 뵙자고 한 것은 그 생각을 재고해 보시라고 권하기 위해서요.”
이것은 어찌 보면 오해를 사기 딱 좋은 말이었다. 생면부지의 낯선 사람이 불쑥 찾아와 목적한 곳을 가지 말라고 하고 있으니 누가 보기에도 시비를 걸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진산월은 복필의 잔주름이 가득한 얼굴을 가만히 쳐다보더니 담담한 음성으로 물었다.
“복 대협이 그런 말씀을 한 것에는 필유곡절(必有曲折)이 있을 것이라고 짐작되는데, 그걸 알 수 있겠소?”
복필은 진산월의 차분한 모습에 내심 감탄을 금치 못했다.
‘신검무적이 나이답지 않게 침착하고 생각이 깊어 그를 대하는 사람이 모두 감복한다고 하더니 허언이 아니었구나.’
젊은 나이에 명성을 얻은 사람들은 대개 남의 말에 귀를 잘 기울이려 하지 않는 특성이 있는데, 진산월은 그런 것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복필은 목소리를 가다듬고는 신중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진 장문인께서 오늘 밤에 머무를 예정인 위남은 섬서성에서도 운문세가의 영향력이 가장 강한 곳 중 하나요. 심지어는 ‘위 남에 있는 상가의 절반은 어떤 식으로든 운문세가와 연관이 있다’ 라는 말까지 나올 정도요.”
“……!”
“노부가 듣기로는 운문세가는 과거 진 장문인과 사소한 일로 시비가 붙어 상당히 안 좋은 상황까지 간 적이 있다고 알고 있소. 게다가 그들은 화산파와 친분이 깊어 평소에도 종남파에 좋지 못한 감정을 가지고 있소. 이런 상황에서 진 장문인이 위 남으로 간다면 어떤 식으로든 운문세가와의 충돌을 피하기 어려울 거요.”
진산월은 묵묵히 그의 말을 듣고 있을 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복필은 진산월이 운문세가를 경시하여 자신의 말을 신경 쓰지 않는 게 아닌가 하여 재차 강조를 했다.
“진 장문인의 실력으로 그들을 두려워하지는 않겠지만, 조금 전에 말했다시피 위남은 운문세가의 안마당이나 마찬가지인 곳이오. 그러니 공연히 호랑이 아가리로 들어갈 필요는 없는 게 아니겠소?”
진산월은 문득 복필의 두 눈을 가만히 응시했다.
“복 대협께서 본파를 위해 고언(苦言)을 해주신 것에 감사드리오. 그런데 복 대협은 본파와 특별한 인연이 있는 것도 아닌데 그런 말씀을 해주신 이유가 무엇인지 알 수 있겠소?”
강호는 워낙 귀계가 난무하는 곳이라 낯선 사람의 이유 없는 친절은 오히려 경계의 대상이 되기에 십상이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복필의 태도는 의혹을 사기에 족한 것이었다. 복필의 얼굴에 한 줄기 씁쓸한 빛이 떠올랐다. 무어라 형용키 힘든 묘한 표정이었다.
“숨겨서 무얼 하겠소? 이 늙은이도 한때는 종남파에 몸을 담은 적이 있었소.”
뜻밖의 말에 진산월은 물론이고 다른 사람들도 놀란 얼굴로 복필을 쳐다보았다.
“벌써 오래된 이야기요. 수십 년도 더 전에 있던 일이지. 하지만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고 불과 일년도 안 되어 스스로 산문을 나오고 말았소.”
복필의 음성에는 알 수 없는 회한(悔恨)과 아련한 그리움이 담겨 있었다.
“그 당시에는 나 같은 사람이 무척 많았다오. 고수가 되겠다는 일념에 종남파에 가입했다가 얼마 견디지 못하고 떠나가는 사람들 말이오. 나도 비록 그들과 같은 길을 밟았지만, 마음속으로는 항상 종남에 빚을 지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소. 아마 그들도 대부분이 그랬을 거요.”
“……!”
“이미 오래 전에 떠나긴 했지만 종남파에 대한 소식은 항상 귀를 쫑긋 세우며 듣고 있었다오. 종남파가 재건되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 남몰래 눈물을 흘렸던 사람은 이 늙은이 혼자만이 아니었을 거요. 그래서 진 장문인께서 종남산을 나와 중원으로 간다는 말을 듣고 혹시라도 먼발치에서나마 볼 수 있을까 하여 하루 종일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었소.”
복필은 주름살로 뒤덮인 얼굴에 엷은 웃음을 지었다.
“원래는 그저 얼굴만 보는 것으로 만족하려 했는데, 진 장문인이 위남으로 간다는 말을 듣고 불안한 마음에 용기를 내어 찾아온 것이오. 쓸데없이 진 장문인의 심기를 어지럽혔다면 용서해 주기 바라오.”
복필이 늙은 몸을 수그리자 진산월은 자리에서 일어나 정중하게 포권을 했다.
“이제 보니 본파의 선배님이셨군요. 제가 모르고 무례를 저질렀습니다.”
복필의 나이로 보아 계속 종남파에 있었다면 종남삼검과 같은 항렬이 되었을 것이다. 진산월로서는 그런 복필을 전혀 모르는 외인(外人)처럼 대할 수 없었다. 복필은 당금 강호를 진동시키고 있는 인물에게서 안사를 받자 당황하여 황급히 손사래를 했다.
“선배라니 당치않소. 종남파에 겨우 몇 달 있다가 도망쳐 나온 몸이오. 후안무치하다고 욕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충분하오.”
“그 일이 어찌 노선배만의 잘못이었겠습니까? 오래 전의 일 연을 잊지 않고 지금까지도 본파에 관심과 애정을 가져 주신 것에 충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허허…… 나는 이런 인사를 받을 만한 사람이 아닌데……”
복필의 눈자위가 실룩거렸다. 지금 자신의 앞에 있는 이 사람은 현재 강호에서 가장 유명한 고수일 뿐 아니라 새롭게 일어나는 거대한 문파의 장문인이었다. 거기에 비하면 자신은 하북 일대에서나 조그마한 명성을 알릴 뿐 거의 무명(無名)에 가까운 볼품없는 늙은이였다. 그런데도 이 사람은 자신을 천하의 이름난 대협(大俠)이라도 되는 양 진심 어린 인사를 하고 있는 것이다. 복필의 뇌리에 문득 사십여 년 전의 어느 날이 떠올랐다. 그날 복필은 종남파의 암울한 미래에 실망하여 몇 날 며칠을 고민하다가 결국 짐을 꾸려 하산(下山)하고 말았다. 함께 입문했던 자들은 진즉에 종남파를 등진 후였다. 그때 산을 내려오면서 보았던 하늘은 왜 그렇게 푸르렀는지…… 그날 이후 복필은 섬서성을 떠나 하북성에서만 주로 활동을 했다. 다행이 제법 알려진 고수의 문하에 들 수 있어서 괜찮은 무공을 익히고 나름대로 고수로 행세할 수 있게 되었지만, 마음속으로는 항상 종남의 일을 그리워하고 있었다. 당시 종남파는 장문이었던 장하민이 갑작스럽게 장문인의 자리를 제자인 천치검 하원지에게 주고 모습을 감추어 버려 문파의 분위기가 어수선하기 그지없었다. 장하민의 뒤를 이어 종남파를 이끌게 된 하원지는 비록 무공은 그리 강하지 않았으나 정말 마음씨 좋고 선량한 사람이었다. 그는 모든 제자들을 공평하게 대했으며, 결코 험한 욕설을 하거나 화를 내지 않았다. 그리고 항상 웃었다. 그 모습이 바보 같다고 하여 천치검이라 는 그다지 좋지 못한 별호가 붙었으나, 하원지는 그 말을 듣고도 너털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아마 무공에 대한 열망과 강호에서 이름을 날리겠다는 욕심만 아니었으면 그런 하원지 밑에서 종남파의 제자로 지내는 것 도 그리 나쁜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복필은 안빈낙도(安貧樂道)하는 삶보다는 강호인(江湖人)으로서의 인생을 살기르 원했고, 결국 종남파를 떠나기로 결심했다. 그 이후로 많은 세월이 지났지만 복필은 지금도 그때의 선택이 잘된 것이었는지 잘못된 것이었는지를 정확히 알 수 없었다. 한동안 야릇한 감회에 젖어 있던 복필은 문득 정신을 차리고 진산월을 바라보며 정색을 했다.
“장문인께서는 이 늙은이의 헛소리라고 생각 마시고 위남으로 가는 것을 재차 생각해 보시기 바라겠소.”
그의 주름진 노안에는 한 줄기 간절한 빛이 담겨 있었다. 진산월은 복필이 한때 종남파에 몸을 담았던 사람임을 알고 난 후 그를 대하는 태도가 많이 부드러워져 있었다.
“선배님의 말씀은 감사히 새겨듣겠습니다. 하지만 그런 일 때문에 굳이 일정을 바꿀 필요는 없을 것 같군요.”
복필의 얼굴이 조금 굳어졌다. 자신이 그토록 사정을 설명했는데도 진산월이 의견을 굽히지 않자 왠지 무시당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장문인께선 내가 괜히 걱정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시오?”
진산월은 조용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럴 리가 있습니까? 단지 이제는 본파가 다른 문파와의 충돌이 두려워 몸을 사리는 일은 없어야 된다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그 말에 복필의 몸이 벼락을 맞은 사람처럼 부르르 떨렸다.
“운문세가만 본파에 감정이 좋지 않은 게 아니라 본파 또한 그들을 좋게 생각하고 있지 않습니다. 위남에서 운문세가 본파를 건드리지 않으면 그건 그들로서는 다행한 일이겠지요. 하지만 만일 본파에 먼저 도발을 해온다면……”
담담하게 가라앉아 있었던 진산월의 눈이 일순 섬광처럼 번뜩였다고 느낀 것은 복필의 착각이었을까? 그 눈빛이 어찌나 강력했던지 복필은 무엇가 강렬한 것에 자신의 몸을 관통당한 듯한 기분이 들었다. 다행이 진산월의 눈빛은 다시 평상시로 돌아와 있었다.
“운문세가란 이름은 두 번 다시 강호상에서 들을 수 없게 될 것입니다.”
나직한 음성이었고, 특별히 강한 힘을 담고 있지도 않았다. 하나 그 말을 듣는 순간 복필은 가슴 깊숙한 곳에서 무언가 울컥하는 것이 치밀어 오름을 느꼈다. 오랫동안 맺혀 있던 여러 가지 감정들이 일시에 폭발하는 것 같았다. 떠나간 문파에 대한 미안함과 그리움, 다시 일어선 문파를 보는 뿌듯함과 대견함이 한꺼번에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종남파는 이제 더 이상 남들의 괄시나 받던 문파가 아니구나.’
복필은 솟구치는 감정에 한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한참 후에야 복필은 간신히 마음을 추슬렀다.
“모든 게 이 한심한 늙은이의 기우(杞憂)에 불과했구려. 그저 한때나마 종남에 먼저 몸담았던 못난 사람의 주책이라고 생각해 주시오.”
그는 주름살 가득한 얼굴이 일그러지도록 활짝 웃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