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17권 재출강호(再出江湖)편 : 6화
제 172 장. 강변주풍(江邊酒風)
진산월 일행이 위남에 도착했을 때는 해가 뉘엿뉘엿 기울고 있는 저녁 무렵이었다. 위남은 서안에서 낙양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도시들 중 가장 크고 번창한 곳이었다. 여기저기 크고 작은 등불이 내걸린 거리는 한낮보다도 오히려 더 화려해 보였고, 잘 닦인 대로는 서안의 중앙로에 못지않았다. 낙일방은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거리를 두리번거리다가 혀를 찼다.
“무슨 축제라도 벌어지나? 왜 이렇게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많은 거지?”
동중산이 그 말을 듣고 웃었다.
“원래 위남은 위수(渭水)에 접해 있어서 물자가 풍부하고 상업이 번성했습니다. 섬서성에서도 가장 살기 좋은 곳 중 하나죠. 그래서 위남 사람들은 다른 곳에 비해 외식(外食)을 자주 하고 유흥을 즐긴다고 하더군요.”
“그래도 그렇지 이건 좀 심하군요.”
거리에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그들은 말에서 내려서 걸어가야만 했다. 위남은 위수의 영향으로 가을부터 겨울까지는 무척 추웠다. 그래서 날이 풀리는 봄부터 초여름까지는 사람들의 외출이 잦았고, 여러 가지 행사도 곧잘 벌어졌다. 오늘은 특히 날씨가 좋아서 더욱 많은 사람들이 밖으로 쏟아져 나온 모양이었다. 진산월 일행은 인파를 뚫고 <장복객잔(長福客棧)>이라는 현판이 붙은 객장으로 향했다. 장복객장은 주루와 객잔이 유달리 많은 위남에서도 상당히 큰 객잔으로, 앞에는 식사를 할 수 있는 커다란 주루가 있었고, 그 뒤로 잠을 잘 수 있는 넓은 후원이 펼쳐져 있었다. 그들은 먼저 후원으로 가서 세 개의 방이 딸려 있는 별실을 잡은 후 짐을 풀어 놓고는 앞에 있는 주루로 향했다. 시간이 시간인지라 주루는 빈자리가 없을 정도로 붐볐다. 그들을 안내한 점소리도 난처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 시간에는 합석을 하셔야 자리를 잡을 수 있습니다. 합석이라도 하시겠습니까?”
어차피 지금은 다른 곳을 가도 사정이 비슷할 게 뻔한지라 그들은 어쩔 수 없이 합석을 하기로 했다. 점소이가 그들을 안내한 곳은 오른쪽 구석에 있는 팔선탁(八仙卓)으로, 십여 명이 앉아도 충분할 만큼 거대한 크기를 자랑했다. 그 팔선탁에는 네 명의 남녀들이 식사를 하고 있었다. 점소이가 그들 중 가장 나이가 많은 중년인에게 양해를 구하고는 이내 그들을 자리로 안내했다.
“합석에 응해 주셔서 감사하오.”
동중산이 먼저 그 중년인에게 인사를 했다. 그 중년인은 푸른 청삼을 입었는데, 청수한 이목구비와 몹시 잘 어울려 보였다. 청삼중년인은 점찮게 응수했다.
“별말씀을. 이런 곳에서는 당연한 일 아니겠소?”
진산월 일행은 여섯 명이어서 그들이 모두 앉자 크게 느껴졌던 팔선탁이 꽉 차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청삼중년인의 일행은 부인인 듯한 미모의 중년여인과 한 쌍의 젊은 남녀들이었다. 중년미부는 다소곳한 표정으로 식사를 하고 있는 데 비해 젊은 남녀들은 합석한 진산월 일행에 호기심이 이는지 그들은 쳐다보았다. 그러다 일행 중 낙일방의 준수한 모습을 보고는 눈을 크게 떴다. 주루 안에 무척 많은 사람이 있음에도 단연 돋보이는 미남자였던 것이다. 젊은 남자는 그대로 곧 눈길을 거두었으나, 젊은 여자는 눈을 반짝인 채 낙일방을 연신 쳐다보고 있었다. 젊은 남자는 그 눈치를 차렸는지 얼굴 표정이 그다지 좋지가 않았다. 보아하니 두 사람은 연인 관계에 있는 모양인데, 여자가 다른 남자를 힐끔거리고 있으니 기분이 좋을 리 없었다. 젊은 남자 또한 질 좋은 화의(華衣)를 잘 차려 입었고 얼굴도 그리 빠지지 않았으나, 낙일방의 군계일학 같은 모습에 비할 수는 없었다. 젊은 여자는 약간 가무잡잡한 피부에 귀염성 있는 얼굴이었다. 흑백이 분명한 눈동자는 유달리 검은자위가 많았고, 입술 또한 도톰해서 보는 이로 하여금 묘한 분위기를 느끼게 했다. 게다가 불타오르는 듯한 홍의(紅衣)를 입고 있었는데, 몸에 착 달라붙는 옷이라 전신의 굴곡이 완연히 드러나 보였다. 진산월 일행이 주문을 하는 동안 청삼중년인은 그들을 살펴보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여인들은 준수한 낙일방에게 시선이 모아질지 몰라도 강호 경험이 풍부한 청삼중년인은 오히려 진산월에게 관심이 쏠렸다. 처음에는 나이가 제일 많은 동중산이 우두머리인 줄 알았는데 돌아가는 사정을 보니 앙상하리 만치 키가 큰 젊은이가 일행을 이끌고 있는 것 같았다. 그 젊은이는 다른 사람보다 훨씬 큰 키에 약간 마른 듯한 체격을 지니고 있었고 얼굴에는 칼자국마저 나 있었다. 당연히 차가운 인상이어야 하는데, 오히려 차분하면서도 묵직한 무게감이 느껴졌다. 더구나 행동거지 하나하나가 침착하기 그지없었고, 은연중에 여유를 담고 있어 보면 볼수록 보통 인물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나이는 그리 많아 보이지 않는데 일파(一派)의 종사(宗師)를 보는 듯한 위엄이 느껴지는구나. 이자의 정체가 무엇일까?’
청삼중년인은 찻잔을 들어올리는 척하며 슬쩍 진산월의 주위에 있는 다른 일행들도 둘러보았다. 동중산을 제외하고는 모두 이십대의 청년들이었고, 한 명은 열 살쯤 되어 보이는 어린 소년이었다. 하나같이 개성이 강한 용모들이었고, 그중 몇 사람은 두 눈에서 신관이 번뜩이는 것으로 보아 상당한 무공을 지니고 있는 것 같았다.
‘보아하니 같은 문파의 동문(同門)들 같은데 어느 파(派)의 제자들인지 궁금하군.’
청삼중년인은 식사를 마치고도 나갈 생각을 하지 않고 느긋한 표정으로 차를 마시고 있었다. 중년미부와 홍의여인 또한 조용히 앉아 있는데, 화의청년만 불편한지 계속 몸을 뒤척였다.
마침내 화의청년이 더 이상 참지 못하겠는지 청삼중년인을 향해 입을 열었다.
“삼숙부(三叔父)님, 식사도 끝난 것 같으니 이제 그만 숙소로 돌아가도록 하죠.”
청삼중년인은 뜨거운 차를 한 모금 들이키고는 천천히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무얼 그리 서두르는 게냐? 지금부터 좁은 골방에 처박혀 운치 있는 봄밤의 정취를 누려 보지도 않을 셈이냐?”
“그러면 아예 야외로 나가도록 하지요. 마침 위수 강변에 화방(畵舫)들이 많던데 봄밤의 정취를 즐기고 싶다면 그곳이 나을 듯싶습니다.”
“알았다. 조금 있다 가도록 하자.”
청삼중년인은 말은 그렇게 해놓고도 좀처럼 일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뿐만 아니라 중년미부와 홍의여인도 차를 홀짝거릴 뿐 서두르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
화의청년은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으나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팔짱을 낀 채 아예 두 눈을 감아 버렸다. 그 모습이 어찌나 심통스러워 보였는지 마치 어린아이가 투정을 부리는 것 같았다.
그때 진산월 일행이 주문한 음식이 나와서 점소이들이 음식을 나르느나 탁자 주위가 분주해졌다. 동중산은 특별히 술도 한 병 주문했기 때문에 술이 나오자 먼저 진산월에게 권했다.
“가볍게 한잔하시는 게 피로를 푸는 데도 도움이 될 겁니다.”
진산월과 전흠은 술을 받았고, 낙일방은 사양을 했다. 손풍이 슬금슬금 눈치를 보다가 술잔을 내밀었으나, 동중산은 빙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사제는 안 돼. 아직 몸도 다 낫지 않은 상태가 아닌가?”
손풍은 속으로 툴툴거렸으나 주위 사람들이 모두 사문의 어른들인지라 무어라고 할 수도 없어 입맛만 다시고 말았다.
‘제길. 술 한잔 마음대로 못 먹는 신세가 되다니……’
그가 속으로 온갖 불평을 늘어놓고 있으리라는 걸 뻔히 알면서도 동중산은 모른 척 고개를 돌렸다. 그러다 청삼중년인과 시선이 마주치자 부드러운 음성으로 물었다.
“한잔하시겠소?”
청삼중년인은 사양하지 않고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않아도 권하지 않으면 어쩌나 걱정하고 있었소.”
“하하…… 그럴 리가 있소?”
동중산이 청삼중년인의 잔에 술을 따르자 청삼중년인은 단숨에 잔을 들이켰다. 그때 이제껏 말없이 차만 마시고 있던 홍의 여인이 대담하게도 술잔을 내밀었다.
“저도 한 잔 주세요.”
다른 사람들은 모두 놀랐으나 정작 동중산은 담담한 표정으로 그녀에게 술을 따랐다. 그녀가 술잔은 자신 쪽으로 내밀고 있지만 시선을 아까부터 계속 낙일방을 향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고마워요.”
그녀는 살짝 미소를 지으며 술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가무잡잡한 피부에 유달리 도톰한 입술을 가진 그녀는 건강하면서도 나름대로 특색 있는 매력을 풍기고 있었다.
그녀가 막 술을 마시고 잔을 내려놓았을 때, 한쪽에서 인상을 찌푸린 채 눈을 감고 있던 화의청년이 돌연 자신의 앞에 놓인 차를 단숨에 마시고는 찻잔을 세게 바닥에 내려놓았다.
탁!
요란한 소리가 주위에 울려 퍼졌다.
손풍은 아까부터 화의청년이 자신들을 못마땅해하는 것 같아 기분이 언짢아 있다가 이 광경을 보자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퉁명스런 음성을 내뱉었다.
“젠장. 음식 맛 떨어지게 뭐 하는 짓인지 모르겠군.”
그의 목소리는 그리 크지 않았으나 화의청년은 감았던 눈을 번쩍 뜨며 날카로운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당신 뭐라고 그랬소?”
손풍은 그에게 시선도 돌리지 않은 채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귀가 밝다고 해야 하나, 어둡다고 해야 하나? 제대로 들은 것 같은데 왜 말귀는 못 알아먹는 거야?”
화의청년의 눈꼬리가 부르르 떨리며 두 눈에서 싸늘한 빛이 줄기줄기 흘러나왔다. 하나 그가 막 화를 내려는 순간, 동중산이 먼저 손풍을 향해 호통을 쳤다.
“손 사제, 처음 본 사람에게 그게 무슨 말버릇인가? 어서 사과드리게.”
손풍은 심드렁한 표정이었으나, 동중산을 비롯한 다른 사람들이 모두 매서운 눈으로 자신을 쏘아보자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뭐 일단은 미안하게 된 것 같소. 하지만 당신 행동도 그리 보기 좋은 것만은 아니었소.”
중인들은 그 말을 듣자 모두 어이가 없었다. 화의청년도 쌍심지를 돋우며 냉랭하게 쏘아붙였다.
“그걸 지금 사과라고 하는 거요?”
손풍은 오히려 눈을 부라렸다.
“그럼 이게 사과가 아니면 뭐란 말이오? 머리라도 조아려야 된단 말이오?”
화의청년은 분기가 미치는지 하얗던 얼굴에 한 줄기 붉은 기운이 어렸다.
“지금 나하고 장난하자는 거요, 아니면 시비를 거는 거요? 장난이라면 지금 그런 걸 받아줄 기분이 아니니 당장 그만두는 게 좋을 거요. 그리고 시비라면……”
화의청년의 눈에서 화광(火光)이 이글거리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남자답게 당장 밖에 나가서 결판을 내도록 합시다.”
이번에는 손풍이 분기탱천했다. 가뜩이나 종남파에 들어온 이래 이리저리 치여서 불만이 쌓여 있던 참에 얼구만 희멀건 놈이 자신에게 한판 붙자고 하니 분통이 터지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이 서안을 누니고 다닐 때 언제 이런 수모를 당한 적이 있었는가?
손풍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려 했으나 동중산이 눈치 빠르게 알아차리고는 탁자 밑으로 그의 무릎을 살짝 움켜잡았다. 그 바람에 손풍은 몸을 일으키지도 못하고 얼굴만 시뻘겋게 변하고 말았다.
장내의 공기가 험악해지자 청삼중년인이 화의청년을 제지했다.
“저 청년이 틀린 말을 한 것도 아닌데 무얼 그리 흥분하는 게냐? 일의 발단은 네가 만들지 않았느냐?”
화의청년은 억울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삼숙부님. 제가 언제……”
청삼중년인은 준엄한 시선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네가 먼저 버릇없이 군 것이 사실이다. 잘 생각해 보거라.”
“저는 그냥 차 한 잔 마신 것밖에는 아무것도 한 일이 없습니다.”
화의청년이 끝까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자 청삼중년인은 나직하게 혀를 차더니 갑자기 한숨을 내쉬었다.
“어린 나이도 아닌 녀석이 이토록 제멋대로라니…… 게다가 툭하면 싸움부터 거는 그 못된 버릇을 아직도 고치지 못했구나.”
화의청년은 여전히 불만스러운 표정이었으나 청삼중년인이 눈살을 찌푸리자 감히 더 이상 무어라고 말하지는 않았다.
손풍 또한 욕설이 목구멍까지 치밀어 올랐으나, 아무리 막돼먹은 성격이라도 장문인까지 있는 앞에서 함부로 행동할 수는 없는지라 간신히 억눌러 참는 모습이었다. 양쪽에서 한 명씩 인상을 잔뜩 찡그리고 있으니 장내의 공기가 영 어색할 수밖에 없었다.
청삼중년인이 동중산을 보고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아무래도 더 이상 어울릴 분위기는 아닌 모양이구려. 우리는 이만 일어나야겠소.”
동중산 또한 손풍이 언제 성질을 부릴지 몰라 절로 조마조마한 심정이었기 때문에 고개를 끄덕이며 웃어 보였다.
“그런 것 같소. 다음에 기회가 닿는다면 제대로 통성명을 나누도록 합시다.”
청삼중년인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중년미부와 홍의여인도 차례로 일어났다. 홍의여인은 귀여워 보이는 외모와는 달리 키가 상당히 훤칠했는데, 그래서 굴곡이 완연한 몸매가 더욱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
청삼중년인은 아직도 퉁퉁 부은 얼굴로 앉아 있는 화의청년을 지그시 노려보았다.
“너는 일어나지 않을 셈이냐?”
화의청년은 한차례 손풍을 쏘아보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인사도 하지 않고 휑하니 몸을 돌려 주루 밖으로 걸어 나갔다.
“다음에 다시 보길 기대하겠소.”
청삼중년인은 동중산을 향해 포권을 하고는 중년미부와 홍의여인을 대동하고 화의청년을 따라 나갔다. 몸을 돌리기 직전에 홍의여인은 각별한 시선으로 낙일방을 쳐다보더니 생긋 미소 짓는 것이었다.
그때 그녀의 검은자위가 가득한 커다란 눈이 초승달처럼 휘어졌다. 낙일방은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해 있다가 사람들이 모두 자신을 쳐다보자 준수한 얼굴이 붉게 변했다.
“호호……”
그 모습이 우스운지 홍의여인은 나직한 교소를 터뜨리더니 이내 밖으로 몸을 움직였다. 그녀의 모습이 주루에서 사라지자 낙일방이 궁금한 듯 동중산을 보면 물었다.
“저 여자가 지금 왜 웃은 겁니까?”
동중산은 무어라고 할말이 없어 그냥 웃고 말았다.
‘낙 사숙은 이런 쪽으로는 너무 순진해서 문제로군. 앞으로 여난(女難)이 심상치 않겠는걸.’
동중산이 아무 대답이 없자 낙일방은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진산월을 쳐다보았으나, 진산월은 음식을 먹는 데만 열중할 뿐 그에게는 시선도 주지 않았다. 낙일방의 눈은 다시 전흠에게로 향했다.
하나 입도 열기 전에 전흠은 냉랭한 음성을 내뱉었다.
“쓸데없는 일로 나를 귀찮게 하지 마라.”
낙일방은 어색한 표정으로 엉거주춤하게 있다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거렸다.
“원래 웃음이 헤픈 여자였나 보군.”
그는 대수롭지 않게 중얼거리며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동중산은 하마터면 폭소를 터뜨릴 뻔했으나, 그때 마침 누군가의 커다란 음성이 주루 안에 울려 퍼졌다.
“여, 이게 누군가?”
한 사람이 그들이 있는 팔선탁으로 다가오더니 동중산의 어깨를 탁 쳤다.
동중산이 돌아보니 날카로운 인상의 흑삼인이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고 있었다. 흑삼인을 본 동중산도 반색을 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자네는 형일환(邢一煥)이 아닌가?”
두 사람은 서로 손을 맞잡은 채 반가운 인사를 나누었다. 중인들은 동중상이 누굴 보고 이토록 기뻐하는 모습을 좀처럼 본 적이 없기에 흑삼인의 정체가 몹시 궁금해졌다.
“이게 몇 년 만인가?”
“적어도 오년은 넘은 것 같군. 그때 제남(濟南)의 대명호반(大明湖畔)에서 만난 게 마지막 아닌가?”
동중산의 얼굴에 아련한 빛이 떠올랐다.
“벌써 그렇게 됐나? 그런데 여긴 어쩐 일인가? 산동(山東) 지방을 평생 안 떠날 사람처럼 큰소리치더니……”
흑삼인은 피식 웃었다.
“먹고 살려니 별수가 있나? 일자리를 찾다 보니 여기까지 오게 됐네. 그나저나 그 눈은 어떻게 된 건가?”
흑삼인이 검은 안대를 차고 있는 동중산의 눈을 가리키자 동중산은 고개를 흔들었다.
“나도 사정이 있었다고 해두지.”
흑삼인은 한동안 물끄러미 동중산의 얼굴을 바라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 초가보와의 싸움에 대한 소문을 듣기는 했네. 제법 고생을 많이 했다고 하더군. 소문에는 자네가 종남파의 제자가 되어…… 그럼 혹시……”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흑삼인의 눈이 동중산의 주위에 있는 종남파 고수들을 향했다. 그러다 진산월의 얼굴을 보게 되자 흑삼인의 신형이 한차례 부르르 떨렸다. 그의 시선은 못박은 듯 진산월의 왼쪽 빰에 나 있는 칼자국에 고정되었다.
‘큰 키에 마른 체구…… 얼굴의 칼자국……’
그건 바로 당금 천하를 송두리째 뒤흔들고 있는 한 사람의 용모를 언급할 때 반드시 들어가는 묘사가 아닌가?
동중산은 흑삼인의 시선이 진산월에게 향하자 빙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인사드리게. 본파의 장문인이시네.”
흑삼인의 입에서 자신도 모르게 신음 같은 외침이 흘러나왔다.
“신검무적!”
그 순간, 저잣거리처럼 시끄럽던 주루 안이 일순 쥐죽은 듯 조용해졌다. 음식을 먹거나 술을 마시며 떠들고 있던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소리를 친 흑삼인을 지나 진산월에게로 움직였다.
갑자기 흑삼인은 더할 나위 없이 정중한 태도로 깊게 머리를 숙였다.
“제남의 형일환이 진 장문인을 뵙니다.”
진산월은 가볍게 포권을 했다.
“종남의 진산월이오.”
다음 순간, 주루 안은 사람들의 놀란 외침으로 가득 차 버렸다.
“신검무적! 저 사람이 바로 그 유명한 종남파의 장문인 신검무적이다!”
“종남파의 고수들이 이곳에 왔다!”
여기저기서 외치는 고함 소리와 감탄성, 흥분된 숨소리로 장내는 소란의 극치를 달렸다. 개중에는 박수를 치는 사람들도 있었다. 진산월 일행은 주루의 반응에 놀라 당혹해하는 모습이었으나, 장내의 모든 사람들은 눈에 불을 켜고 그들의 얼굴을 좀 더 자세히 보기 위해 여념이 없었다.
동중산 또한 자신들 때문에 이런 소동이 발생할 줄은 미처 몰랐는지라 순간적으로 당황했으나 이내 마음을 가라앉히고 형일환을 자리에 앉게 했다. 이어 진산월을 향해 형일환에 대해 간략한 소개를 했다.
“이 사람은 제가 강호에서 사귄 몇 안 되는 친구 중 하나입니다. 산동 지방에서만 활동했기 때문에 이곳에는 별로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쪽에서는 그래도 혈리도(血狸刀)라는 외호로 제법 인정을 받고 있습니다.”
그 말에 중인들의 시선이 형일환의 허리춤을 향했다. 아닌 게 아니라 그의 허리에는 은은한 붉은빛이 감도는 한 자루의 칼이 매달려 있었다.
형일환은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명서이 자자한 종남파의 고수들 앞에서 내세울 만한 이름이 못됩니다. 그저 평생을 산동에서만 지내다 보니 평소 친한 지인(知人)들이 장난삼아 붙여 준 이름일 뿐입니다.”
겸손한 말과는 달리 진산월은 형일환의 어깨가 잘 발달되어 있고 손마디에 굳은살이 박여 있는 것으로 보아 상당한 수련을 쌓은 고수일 거라고 짐작했다.
동중산은 모처럼 만난 친구가 무척이나 반가웠는지 평소의 침착했던 모습과는 달리 입가에 미소를 그치지 않았다. 두 사람은 무슨 할 얘기가 그렇게 많은지 나직하게 속닥거리다가도 가끔은 호탕하게 웃으면서 서로의 어깨를 두드리고 있었다. 중년의 두 사내가 모처럼 만나 서로 우의(友誼)를 확인하는 광경은 보는 사람을 흐뭇하게 만들기에 족한 것이었다.
그때 누군가가 조심스럽게 일행에게 다가왔다.
“실례합니다.”
동중산이 돌아보니 이마에 기름기가 잘잘 흐르는 뚱뚱한 체구의 중년인 하나가 안절부절못하는 표정으로 손을 비비고 있다가 황급히 허리를 있는 대로 숙였다.
“당신은 누구요?”
동중산이 묻자 뚱뚱한 중년인은 감히 얼굴도 제대로 들지 못하고 공손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소…… 소인은 이곳 주루의 주인인 하태보(夏泰寶)라고 합니다. 평소 흠모해 마지않던 진 장문인과 종남파의 여러 대협들을 뵙게 되어 실로 천하에 다시없을 영광이라고 생각합니다……”
동중산도 중년인의 뒤에 점소이 몇 명이 공손하게 서 있는 것으로 보아 주루의 주인이 아닐까 생각하고 있었다.
“반갑소. 그런데 무슨 일이오?”
하태보는 호빵 같은 얼굴에 비지땀을 흘리면서도 연신 머리를 조아렸다.
“하늘같이 존경한는 분들이 누추한 저희 가게를 찾아 주신 것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하태보가 뒤를 향해 슬쩍 손짓을 하자 뒤에 있던 점소이 중 하나가 재빨리 들고 있던 술단지 하나를 내밀었다. 하태보는 그것을 탁자 위에 올려놓으면 안면 가득 웃음을 지었다.
“이것은 저희 주루에서 비장(秘藏)하고 있던 태백소(太白燒)라는 술입니다. 약소한 것이지만 받아주시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
하태보가 팔선탁 위에 올려놓은 술단지는 잘 밀봉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을 취하게 하는 듯한 은은한 주향(酒香)이 풍겨 나오고 있었다. 하태보는 그 술단지가 별것 아닌 것처럼 말했으나 사실 그 술단지는 무려 백년이나 묵힌 천하의 명주(名酒)였다. 귀한 만큼이나 값이 너무 비싸서 일반인들은 평생에 단 한 번도 마실 엄두를 내지 못하는 것이었다.
동중산은 사양하려 했으나 하태보가 간절한 표정으로 바라보자 차마 거절하지 못하고 진산월을 돌아보면 의향을 물었다. 진산월이 승낙을 하자 그제서야 동중산은 술단지를 받았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하태보는 비싼 태백소를 선물하고도 오히려 감읍해하는 모습이었다. 하태보가 희희낙낙해하며 돌아가자 동중산은 쓴웃음을 지었다.
“아무래도 여기 더 있다가는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겠습니 다. 장문인, 자리를 옮기는 게 어떻겠습니까?”
진산월은 그렇지 않아도 주위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이 부담스러웠던지라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자. 마침 날도 좋으니 우리도 강변으로 가 보자꾸나.”
형일환이 재빨리 끼어들었다.
“제가 마침 적당한 곳을 알고 있습니다. 풍광이 제법 수려하고 전망이 좋아서 술 한잔 걸치며 야경(夜景)을 감상하기에는 쓸 만한 곳입니다.”
진산월은 깊게 고민하지 않았다.
“그럼 안내를 부탁하겠소.”
점소이가 오리구이를 비롯한 몇 가지 술안주에 어울릴 만한 요리들을 싸 주자 진산월 일행은 무언가에 쫓기는 사람들처럼 황급히 주루을 빠져 나왔다. 그때까지도 주루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시선은 그들에게 고정되어 있었고, 흥분된 속삭임과 감탄성이 계속 들려오고 있었다.
“휴…… 이거 주루에 갈 때마다 이런 일을 당하면 곤란한데……”
낙일방은 혀를 차면서도 그다지 싫은 표정이 아니었다. 종남파의 위상이 그만큼 올라갔음을 나타내는 반증(反證)인데 사람들의 흠모에 찬 시선이 조금 불편하다 해도 기분이 나쁠 리가 없었다.
낙일방은 혹시나 하여 뒤를 돌아보았으나, 자신들을 쫓아오는 사람은 없었다. 만일 밖에까지도 사람들이 졸졸 따라오며 쳐다본다면 아예 숙소로 돌아가는 게 더 나을 것이다.
형일환이 일행을 데려간 곳은 위남의 시가지에서 북쪽으로 일 리쯤 벗어난 곳이었다. 작은 구릉 하나를 넘자 시야가 갑자기 탁 트이며 넓은 강(江)이 나타났다. 이곳이 바로 위수였다. 형일환은 강가로 내려가지 않고 구릉을 따라 조금 더 걸어갔다. 그러자 제법 커다란 송림(松林)이 나타났고, 그 앞에 작은 정자(정자) 하나가 서 있었다.
“저곳입니다.”
형일환이 앞장서서 정자 위로 올라갔다. 정자에 올라서자 과연 위수의 전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비록 주위가 어두워져서 아주 멀리까지 볼 수는 없었으나 거무스름한 강물과 하얀 모래밭이 내려보이는 광경은 정말 일품이었다. 게다가 위수의 강물 위에는 형형색색의 등(燈)을 내건 작은 배들이 수십 척이나 떠 있어 색다른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었다.
“야, 정말 좋구나.”
낙일방이 감탄성을 말하자 형일환이 웃으며 말했다.
“한낮의 풍경도 좋지만 오을 같은 밤에는 야경이 더 볼 만하오. 저 화방들은 많을 때는 정말 위수 일대를 뒤덮을 정도인데, 그때는 가히 불야성(不夜城)이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는 장관(壯觀)이라오. 오늘은 그래도 생각만큼 화방이 많지는 않구려.”
“이 정도만 해도 정말 볼 만한데요. 그런데 화방은 강남(江南) 쪽에만 있는 줄 알았는데, 이곳에서 볼 수 있다니 뜻밖이군요.”
“화방이 이곳에 나타난 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소. 십여 년 전에 이곳 태생의 상인 한 사람이 강남으로 가서 큰돈을 벌었다고 하오. 그가 나이를 먹어 고향으로 돌아왔는데, 강남에서 자기가 보았던 기억을 되살려 화방을 만든 것이 사람들에게 인기 를 끌어 그 뒤로 하나둘씩 생겨나다 보니 어느새 이 지역의 명물(名物)이 되어 버렸소.”
“그렇군요.”
낙일방은 새삼스런 눈으로 형일환을 바라보았다.
“형 대협은 외지인이면서도 이곳 사정을 잘 알고 계시는군요.”
“하하…… 그 정도는 위남에서 한 달만 살면 알게 되는 것들이오. 그나저나 귀하는 혹시 옥면신권 낙 소협이 아니시오?”
“그렇습니다. 인사가 늦었군요. 제가 바로 낙일방입니다.”
형일환은 관옥(冠玉)과도 같은 낙일방의 모습을 찬찬히 살펴보더니 빙그레 웃었다.
“과연 소문대로 헌양한 모습이시오. 낙 소협께서 아직 약관의 나이로 무림에서 오랫동안 명성을 날리던 노괴물들인 신편과 현음상인을 물리쳤다는 말을 듣고 얼마나 통쾌했는지 모르오.”
“운이 좋았습니다.”
“그들이 어떤 자들인데 운만으로 이길 수 있었겠소? 오늘 뵙고 싶었던 낙 소렵을 만났으니 정말 기쁘기 한량없소이다.”
형일환이 낙일방에게만 관심을 기울이는 것 같자 전흠의 표정이 그리 좋지 않았다. 하나 형일환 입장에서는 진산월은 이미 강호의 거봉(巨峰)과 같은 사람이라 대하기가 부담스러웠고, 전흠은 표정이 삭막해서 쉽게 다가서기 어려워 보여 그중 인상도 좋고 말도 잘 받아준 낙일방과 주로 대화를 나누게 되었던 것이다.
동중산이 어느새 자리를 깔고 가져온 음식들을 펼쳐놓았다. 그리고는 조금 전에 하태보가 선물한 태백소의 뚜껑을 땄다. 튼튼하게 밀봉된 마개를 열자마자 그윽한 술 냄새가 정자 안에 가득 찼다.
“냄새만 맡아도 좋군.”
동중산이 주향을 맡고는 제일 먼저 진산월의 앞에 놓인 술잔에 술을 가득 따랐다.
태백소는 이름처럼 무색 투명한 술이었다. 주향이 상당히 강해서 술맛도 진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담백한 맛이었다. 진산월은 한 잔 마시고는 짤막한 촌평을 했다.
“좋은 술이군.”
전흠이 나직한 웃음소리를 내더니 자신도 한 잔 들이켰다. 그리고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것이었다.
“뭐 이래? 너무 싱겁잖아.”
낙일방도 모처럼 한 잔 마시고는 한마디했다.
“부드러운데요.”
동중산과 형일환은 오랜만에 만난 친구 사이답게 건배를 하고는 동시에 들이켰다.
“상당히 깔끔한 맛이군.”
“여인의 숨결 같군 그래.”
형일환의 말까지 듣자 아까부터 침난 꼴깍 삼키고 있던 손풍이 도저히 못 견디겠는지 술잔을 내밀었다. 이번에도 따라 주지 않으면 아예 술항아리째 들이마실 기세였다. 동중산은 피식 웃으며 순순히 그에게 따라 주었다.
“딱 한 잔이야 괜찮겠지.”
“가득 부어 주시오.”
동중산이 거의 술잔이 넘칠 정도로 따르자 손풍은 의외로 단숨에 들이키지 않고 먼저 술잔을 코에 갖다 댄 후 숨을 들이마셨다. 그런 다음 한 모금을 살짝 입 안에 넣고 잠시 맛을 음미하다가 한참 후에야 술잔을 마저 들이켰다.
능숙한 술꾼과도 같은 그 모습에 모두들 눈을 크게 뜨고 지켜보았다. 손풍은 술을 마신 다음에 웬일인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침묵을 지켰다. 동중산은 그가 무슨 말을 할지 기다리다가 아무 말이 없자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술맛이 어떤가?”
손풍은 마치 도(道)라도 닦고 있는 고승(高僧)처럼 엄숙한 표정을 한 채 평소와는 달리 나직한 음성으로 말했다.
“진정한 명주는 말로 평가하지 않는 거요.”
동중산은 피식 웃고 말았다.
“제법 술꾼 같은 소리를 하고 있군. 노파심에서 말하겠는데, 장 형 앞에서는 그런 모습을 보이지 말게.”
“그 털북숭이 아저씨가 알면 어떻단 말이오?”
“장 형 앞에서 술꾼 행세를 했다가는 앞으로 편하게 살기는 힘들걸세. 그에게 붙잡혀 술독에 빠져 죽을 때까지 마시든가 아니면 그를 피해 도망 다녀야 할 테니 말일세.”
손풍도 술이라면 어지간히 좋아하고 남에게 술로 뒤진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으나, 장승표의 수염 가득한 얼굴을 떠올리자 그의 앞에서는 술 이야기는 꺼내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태백소는 담백하고 부드러운 술맛에 비해 상당히 독한 술이어서 몇 잔 마시지 않아도 취기가 느껴질 정도였다. 술 한 동이가 적은 양은 아니지만 인원이 많아서 부족하지 않을까 걱정했던 동중산은 이내 그 생각을 접어야만 했다.
전흠만이 계속 마셨을 뿐 진산월은 석 잔 정도 마시고 잔을 내려놓았고, 낙일방은 아예 첫 잔 외에는 입에 대지 않았다. 손풍만이 한 잔 가지고는 부족한지 연신 입맛을 다시고 있을 뿐이었다.
게다가 어찌된 일인지 예전에는 무척이나 술을 즐겼던 형일환조차도 마시는 속도가 영 시원치 않았다. 동중산이 건배를 제의할 때나 한 잔씩 마시는 정도였다.
“자넨 그전보다 술이 많이 줄었군. 이 술이 마음에 안 드나? 아니면 술에 취하면 안 될 특별할 이유라도 있나?”
동중산이 약간 취기가 오른 얼굴로 물어 보자 형일환은 고개를 저었다.
“아닐세. 술도 좋고 분위기도 마음에 든다네. 다만 지금은 예전처럼 마시지 않을 뿐이지.”
형일환의 얼굴에 씁쓸한 빛이 떠올랐다.
“산동에서 이곳으로 온 후 제법 많은 일들이 있었지. 그런 일들을 겪다 보니 언제부터인가 취하도록 마시지 않게 되었다네.”
“그렇군. 하지만 오늘은 모처럼 나를 만났는데 하루 정도 취한다 한들 무슨 큰일이 있겠나?”
형일환은 동중산을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이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가? 그럼 어디 한번 제대로 마셔 봐야겠군. 술은 많이 남았나?”
동중산은 술동이를 흔들어 보였다.
“아직도 절반이나 남아 있네.”
“그럼 아직도 늦지는 않았군.”
형일환은 음식이 펼쳐진 곳을 둘러보더니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주가 떨어졌군. 잠시만 기다리게. 내가 먹을 만한 걸 가져오겠네. 그때는 자네도 코가 삐뚤어질 각오를 해야 할걸세.”
동중산은 빙그레 웃었다.
“걱정 말고 빨리 갔다 오기나 하게.”
“멀지 않은 곳에 마침 아는 주루가 있네. 금방 다녀오겠네.”
형일환은 곧 정자를 벗어났다.
동중산은 그 자리에 앉은 채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형일환의 뒷들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주위는 조용했고, 가끔씩 밤바람이 불어올 뿐이었다.
형일환이 사라진 지 한참이나 되었는데도 여전히 동중산은 그 자세 그대로 앉아서 형일환이 간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진산월을 향해 머리를 조아렸다.
“죄송합니다, 장문인.”
진산월은 담담한 모습이었다.
“네 탓이 아니다.”
동중산의 얼굴에는 무어라 형용할 수 없을 만큼 착잡한 빛이 떠올라 있었다.
“제 실수입니다. 강호에서는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게 없다고 했는데 오래 전의 우정(友情)을 너무 믿고 있었습니다. 그를 알게 된 지는 십년 가량 되었고 믿을 만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오년이란 시간이 너무 길었던 것 같습니다. 확실히 세월만큼 무서운 게 없군요.”
그의 음성에는 깊은 자책과 회한(悔恨)이 담겨 있었다. 진산월은 천천히 장내를 둘러보았다.
전흠은 오늘 마신 술의 대부분을 혼자 마셔서인지 취해서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한 상태였고, 손풍은 두 사람의 대화가 무슨 뜻인지 몰라 눈을 동그렇게 뜬 채 쳐다보고 있었다. 유소응은 여전히 애늙은이 같은 얼굴로 가만히 앉아 있었고, 낙일방만이 자리에서 일어나 날카로운 눈으로 정자 주위를 훑어보고 있었다.
‘술에 취해 혼자서는 움직일 수 없는 자 하나와 무공을 모르는 자 둘, 완전히 취하지는 않았으나 무공 실력이 떨어지는 자 하나라…… 결국 둘이서 넷을 보호해야 한단 말이군.’
진산월의 시선이 자신들이 마신 술단지로 향했다.
술에 독(毒)이 들어 있는 건 아니었다. 아니, 엄밀히 말하자면 술 자체가 독인 셈이었다. 술이 너무 독해서 무공의 고수라도 몇 잔에 취해 버린다는 게 문제였다.
석 잔만을 마신 진산월조차도 내공으로 다스리지 않는다면 몸을 완벽하게 가눌 자신이 없으니 정말 독한 술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위남이 운문세가의 안마당이나 마찬가지이니 조심하라는 충고까지 들었으면서 별다른 의심도 않고 남이 주는 술을 먹다니…… 나도 아직은 멀었군.’
진산월의 입가에 쓴웃음이 슻고 지나갔다.
사실 조심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혹시라도 술에 독이 들어 있을까 봐 동중산이 자신에게 첫 잔을 따랐을 때 진산월은 남들의 시선을 피해 손가락에 끼고 있는 반지에 술을 살짝 묻혀 보았다.
그가 손가락에 낀 반지는 종남파에 떠나기 전에 제갈외가 건네준 것이었다.
제갈외는 진산월이 강호행이 유소응을 대동하는 것을 몹시 탐탁지 않게 생각했다. 아직 무공을 배운 지 얼마 되지 않은 유소응이 혹시라도 강호에 나가 험한 꼴이라도 당할까 봐 두려웠던 것이다. 하나 그가 아무리 유소응을 아낀다고 해도 유소응의 사부인 진산월의 행사(行事)를 무조건 반대만 할 수는 없었다. 결국 제갈외는 한참이나 투덜거리고 있다가 품속에서 작은 반지 하나를 꺼내 진산월에게 던져 주었다. 제갈외가 준 반지는 겉으로 보아서는 평범한 은가락지처럼 생긴 것이었다. 중앙에 깨알만큼 작은 보석이 박혀 있다는 것 외에는 전혀 특이할 게 없어 보였다. 하나 강호무림의 제일가는 신의인 제갈외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반지를 줄 리가 없었다. 진산월이 반지를 이리저리 살펴보고 있자 제갈외는 퉁명스런 음성으로 말했다.
“네 무공으로 보아 강호에 나가서 별다른 위험은 없을 것이다. 다만, 보이는 화살은 피해도 보이지 않는 화살은 막기 어려운 법이다. 특히 독(毒)은 너 같은 놈에게는 가장 큰 위험 요소가 될 수 있지. 항상 이 반지를 끼고 있도록 해라. 어떠한 종류의 독이라도 닿기만 하면 색이 변하는 것이니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 반지의 이름은 뭐요?”
“이름 따위가 뭐가 중요하냐? 성능이 문제지. 그냥 네놈이 부르고 싶은 대로 불러라.”
제갈외는 여전히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며 있는 대로 인상을 찡그렀다.
“네놈이 이뻐서 주는 게 아니다. 네놈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저 불쌍한 소응이 곤란한 일을 당할까 봐 주는 것이다.”
진산월은 한 동안 제갈외를 바라보다가 특유의 담담한 음성으로 말했다.
“이 반지는 앞으로 사응환(思鷹環)이라고 부르겠소.”
그 말에 제갈외의 눈빛이 번뜩 빛났다. 유소응을 생각해서 건네주었다는 의미가 담겨 있기 때문이었다. 제갈외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지만, 그가 그 이름을 마음에 들어 한다는 것은 누구라도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그 사응환으로 태백소에 독이 없다는 걸 확인했기에 진산월은 술을 마셨고, 그것을 알고 있는 동중산도 마음 놓고 다른 사람들에게 술을 따랐던 것이다.
그런데 태백소에는 독보다 더욱 치명적이고 은밀한 것이 들어 있었다. 바로 천하에 보기 힘들 만큼 강력한 주기(酒氣)였으니, 그것은 진산월도 미처 짐작지 못한 일이었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태백소야말로 무림인에게는 천하의 어떤 맹독보다도 무서운 물건인 셈이었다.
문제는 태백소가 한 잔만 마셔도 취할 만큼 독한 술이라는 것이 아니었다. 언제부터인지 그들이 머물고 있는 정자 주변이 은밀히 포위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진산월 일행이 이 정자로 온 것은 계획에 없던 일로, 형일환의 안내로 온 것이다. 형일환은 그들을 이곳으로 데려온 후 술도 별로 마시지 않았고, 안주를 사 오겠다는 핑계를 대고 혼자 정자를 빠져 나갔다. 그가 정자를 나간 직후부터 정자 주변은 기이한 살기로 뒤덮여 버렸다.
진산월 일행은 뜻하지 않는 곳에서 난데없는 함정에 빠져 버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