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17권 재출강호(再出江湖)편 : 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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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림천하 17권 재출강호(再出江湖)편 : 7화


제 173장. 심야혈풍(深夜血風)

예리한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던 낙일방이 진산월을 향해 입을 열었다.

“상당히 많은 숫자로군요. 그중에서도 특히 다섯 명 정도는 저도 예측하기 힘든 고수들입니다.”

진산월은 차분한 표정으로 물었다.

“너는 별 이상이 없는냐?”

낙일방은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전부터 취기가 계속 오르고 있습니다만, 이 정도면 몸을 움직이는 데 특별한 지장은 없을 것 같습니다. 장문사형은 석 잔 정도 드신 것 같은데 괜찮으십니까?”

낙일방은 그나마 한 잔밖에 마시지 않았는데도 취기가 느껴지는 모양이었다.

“견딜 만하다.”

진산월의 말에 옆에 있던 동중산의 표정이 조금 어두워졌다. 견딜 만하다는 건 몸 상태가 완벽하지는 않다는 뜻이었다. 진산월 같은 절정고수가 술 석 잔에 몸에 이상을 느낄 정도이니 태백소가 얼마나 독한 술인지 알 수 있었다.

“산탁취정(散濁聚精)을 해보셨습니까?”

산탁취정이란 내공(內功)을 이용하여 몸속의 주독(酒毒)을 없애는 방법이었다. 강호의 고수들 중에는 이 수법으로 취기를 이기는 경우가 많았다.

“조금 전에 해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단순한 주독은 아닌 모양이다.”

동중산의 얼굴에 착잡한 표정이 떠올랐다.

“죄송스럽게도 제자는 별 도움이 못될 것 같습니다. 지금도 간신히 쓰러지지 않을 정도입니다.”

동중산은 오랜만에 친구를 만난 기분에 제법 많은 양을 마셨으니 견디지 못할 게 뻔했다. 지금도 시간이 갈수록 그의 얼굴에 붉은 기가 짙어지고 눈빛이 흐려지는 것으로 보아 취기를 감당하기 힘든 모양이었다.

한쪽에서 불안한 표정으로 이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손풍이 아무래도 안 되겠는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다 신형을 완전히 일으키기도 전에 휘청거리며 쓰러질 뻔했다.

“어?”

앉아 있을 때는 몰랐는데 막상 자리에서 일어나려니 머리가 핑 돌면서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했던 것이다.

“내가 왜 이러지? 술 한 잔에 취했을 리도 없고……”

손풍은 멋쩍게 웃으며 아무렇지도 않은 듯 몸을 바로 세웠으나, 얼굴은 이미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진산월은 연신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는 손풍을 향해 말했다.

“잠시 후에 공격이 시작되면 너는 중산에게서 떨어지지 않도록 해라.”

손풍은 눈을 크게 떴다.

“예? 공격이라니요?”

진산월은 그 말에는 대꾸도 하지 않고 낙일방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낙일방은 그의 의중을 알았는지 인사불성인 채 한쪽에 쓰러져 있는 전흠을 힐끔 쳐다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전 사형은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부탁하마.”

이어 유소응에게 고개를 돌리자 유소응은 어느새 일어나 초롱초롱한 눈으로 진산월을 보고 있었다. 진산월은 유소응과 시선이 마주치자 빙그레 웃었다.

“너는 나와 함께 움직이자꾸나.”

유소응은 또렷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예, 사부님.”

전흠을 살펴본 낙일방이 진산월에게 다가왔다.

“다행히 전 사형은 취해서 잠이 들었을 뿐 특별한 이상은 없는 것 같습니다.”

“잠시 들었다니 오히려 어설프게 취해 있는 것보다 나은 셈이다. 그의 검을 잘 챙겨라.”

“알겠습니다.”

낙일방은 날카로운 시선으로 다시 한차례 주위를 둘러보고는 목소리를 낮추어 물었다.

“운문세가일까요?”

“곧 알게 되겠지.”

진산월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정자 밖의 송림 속에서 몇 개의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별로 서두르지도 않고 느긋한 걸음으로 정자 위로 올라왔다.

모두 다섯 사람이었는데, 그중 한 사람은 안면이 있는 자였다.

유난히 새하얀 얼굴에 백삼을 걸친 공자는 진산월과 시선이 마주치자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이게 누구신가? 쓸데없는 일에 끼어들기 좋아하는 종남파의 장문인 아니신가?”

백삼공자는 다름아닌 운문세가의 이공자인 운자개였다. 그는 진산월의 손에 죽은 운자추의 이복 형으로, 과거에 진산월 일행과 시비를 벌인 적이 있었다.

운자개는 진산월을 이리저리 살펴보더니 짐짓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오, 헌칠하고 당당했던 모습을 어디로 사라지고 이렇게 초라한 몰골이 되셨을까? 그동안 못난 사제들을 돌보느라 마음고생이 많으셨던 모양이외다.”

이어 그는 바닥에 굴러다니는 술단지를 보며 웃었다.

“저 술은 따로 백일취(百一醉)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한 잔만 마셔도 백일 동안 취해서 붙은 이름이지. 워낙 귀한 것이라 나도 아직 마셔 보지 못했는데 비루먹게 생긴 장문인께선 잘 드셨나 모르겠군.”

운자개의 비아냥거리는 말에 정작 당사자인 진산월은 가만히 있는데 오히려 옆에서 듣고 있던 손풍이 더 화를 냈다.

“장문인, 계집년도 아닌데 얼굴에 분첩을 처바른 것 같은 저 풍뎅이 새끼는 누굽니까?”

그 말에 운자개의 가뜩이나 하얀 얼굴이 핏기 한 점 볼 수 없을 정도로 창백하게 굳어졌다. 그는 평소에도 누가 자기의 얼굴색을 가지고 놀리는 걸 극도로 싫어했던지라 분첩 운운하는 손풍의 말에 불같은 살심(殺心)이 끓어오른 것이다.

반면에 종남파 고수들은 항상 손풍의 말버릇 때문에 골치가 아팠었는데 지금은 오히려 이상한 통쾌감 같은 것이 느껴졌다. 운자개는 두 눈에서 진득한 살기를 뿜어내며 손풍을 노려보았다.

“정말 종남파의 잡종들은 하나같이 마음에 드는 구석이 없구나. 오늘 네놈은 반드시 내 손으로 찢어 죽이겠다.”

말로 하는 공갈협박이라면 서안에서 질리도록 경험하여 누구보다도 일가견이 있는 손풍이었다. 손풍은 조금도 기가 죽지 않고 오리려 눈을 부라렸다.

“정말 여자 같은 말만 하는구나. 너 같은 놈 마음에 들어 무엇 하겠느냐? 이 어르신이야말로 오늘 네놈의 껍질을 홀라당 벗겨 진짜 계집년이 아닌지 확인하고야 말겠다.”

운자개는 너무도 화가 치밀어 제대로 말을 잇지 못했다.

그때 운자개의 옆에 서 있는 금의를 입은 노인이 앞으로 나서며 불쑥 입을 열었다.

“종남파가 강호에 이름을 날린 이유가 무공 때문이 아니라 입심 때문이었구나.”

금의노인은 얼굴이 대춧빛으로 붉었고, 노인답지 않게 당당한 체구를 가지고 있었다. 호화로운 금의 허리춤에는 청옥(靑玉)으로 만든 요대를 차고 있었으며, 머리는 잡티 하나 없는 백발이었다.

특히 부리부리한 호목(虎目)에서 뿜어 나오는 안광은 어찌나 강렬했던지 주위를 질식시킬 것만 같았다.

금의노인이 나서자 운자개는 입을 굳게 다문 채 뒤로 물러났다. 손풍 또한 금의노인의 두 눈에서 이글거리는 신광을 보고는 자신이 나설 상대가 아니라고 판단했는지 슬그머니 진산월 뒤로 몸을 숨겼다.

진산월은 금의노인의 패도무쌍한 모습을 보자 문득 떠오르는 이름이 있었다.

“귀하는 혹시 패왕권(覇王拳) 담소광이 아니오?”

금의노인은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흐하하…… 한눈에 노부를 알아보다니 과연 대단한 안목이구나. 노부가 바로 담소광이다.”

금의노인의 음성은 얼굴에 떠올라 있는 표정만큼이나 광오하고 거칠 것이 없었다. 담소광은 충분히 그런 자격이 있는 인물이었다.

패왕권이라는 별호처럼 그는 권법에 관한 한 강북무림에서도 몇 손가락 안에 꼽히는 절정고수였다. 특히 금혼신공(金魂神功)과 철마권법(鐵魔拳法)의 양대 절기는 수십 년간 그의 명성을 확고하게 만든 유명한 무공들이었다.

담소광은 패도적인 무공만큼이나 성정(性情) 또한 과격하기 이를 데 없는 인물이었다. 그런 그의 성격은 말투에서도 그대로 드러났다. 한 문파의 장문인인 진산월을 나이 어린 후배 대하듯 하는 것이다.

“네가 요즘 강호에서 제법 명성을 날리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하지만 노부 앞에서는 어림도 없는 얘기다.”

담소광은 진산월에 대한 소문은 많이 들었지만, 강호의 소문이 대개 그러하듯 적지 않게 과장되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설사 진산월이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무공을 익혔더라도 자신의 웅혼(雄魂)한 내공 앞에서는 제대로 힘을 쓰지 못할 거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진산월은 담소광의 오만함이 가득 담긴 표정을 일견하고는 내심 생각을 굴렸다.

‘운자개는 쉽게 흥분을 하는 성격이고, 담소광은 세심함이 부족해서 이런 일을 꾸밀 자로는 어울리지 않는다. 필시 오늘 일을 주재하는 다른 누군가가 있을 것이다.’

진산월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담소광과 함께 나타난 다른 인물들에게로 향했다.

담소광의 옆에는 얼굴이 길쭉하고 눈빛이 차가운 남삼중년인과 유난히 키가 작은 갈의노인이 나란히 서 있었다. 두 사람은 눈을 빛낸 채 진산월을 주시하고 있다가 그와 시선이 마주치자 남삼중년인이 먼저 입을 열었다.

“나는 칠살검(七煞劍) 도종(陶宗)이라 하오.”

갈의노인이 그 뒤를 이었다.

“노부는 구풍도(九風刀) 포렴(包廉)이라네. 만나서 반갑네.”

진산월은 담담한 음성으로 말했다.

“이제 보니 검도쌍괴(劍刀雙怪) 두 분이셨구려. 몰라 뵈어 죄송하오.”

칠살검과 구풍도! 그들 또한 강호의 이름난 고수들이었다.

도종은 검법이 날카롭기로 유명했으며, 포렴은 변화무쌍하고 다양한 도법으로 명성을 떨쳤다. 항상 쌍둥이처럼 붙어 다니고 기행(奇行)을 일삼았기 때문에 검도쌍괴라고 불리고 있으나, 이런 일을 계획할 만큼 치밀한 두뇌를 지닌 자들은 아니었다.

검도쌍괴에게서 반걸음 뒤쪽에 한 사람이 더 서 있었다. 우연인지 그 사람의 모습은 검도쌍괴의 그림자에 가려 선명하게 보이지 않았다. 진산월의 시선이 그에게 향하자 그 사람이 그림자 속에서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누런 황삼(黃衫)을 입고 얼굴이 네모진 삼십대 초반의 장한이었다. 약간 누리끼리한 얼굴에 송충이 눈썹을 하고 있었고, 옆구리에 고색 창연한 보도(寶刀) 하나를 차고 있었다. 황삼인은 진산월이 계속 자신을 주시하고 있자 가볍게 고개를 까닥거렸다.

“난 한충(韓沖)이다.”

짤막한 말이었으나, 그 음성을 듣자 낙일방이 경호성을 터뜨렸다.

“무정도(無情刀)!”

“내가 바로 무정도다.”

황삼인이 무심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낙일방이 바짝 긴장한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한충은 강호에서의 명성이 오늘 나타난 사람들 중 단연 돋보이는 인물이었다. 물론 그의 도법이 그만큼 뛰어나기도 했지만, 더욱 중요한 이유는 그가 바로 무림구봉 중의 도봉인 금도무적(金刀武敵) 양천해(梁天解)의 사제이기 때문이었다.

향천해는 도(刀)에 관한 한 백년 내 무림에서 배출된 고수들 중 최고의 실력자로 자타가 인정하는 인물이었다. 그가 비록 거대한 세력을 형성하거나 문파를 이끄는 우두머리는 아니었으나, 사람들은 그를 하북팽가(河北彭家) 전체보다도 오히려 높게 평가하고 있었다. 그 양천해에게는 모두 네 명의 사제가 있었는데, 사람들은 그들을 무적사도(無敵四刀)라고 불렀다. 한충은 무적사도 중에서도 셋째로, 그들 중 가장 살기 짙은 도법을 뿌리는 인물로 알려져 있었다.

진산월은 담담한 눈길로 그들 다섯 사람을 찬찬히 둘러보더니 홀연 입을 열었다.

“다른 사람들도 모두 나오라고 하는 게 어떻겠소?”

그 말에 중인들의 표정이 조금 변했다. 담소광이 고리눈을 부릅뜬 채 진산월을 노려보고 있다가 이내 냉랭하게 웃었다.

“흐흐…… 과연 듣던 대로 배짱 하나는 두둑하군. 우리만으로도 부족하단 말이지?”

담소광이 슬쩍 손을 쳐들자 송림 속에서 검은 그림자들이 속속 튀어나왔다. 삽시간에 정자 주위는 수십 개의 인영에 완전히 포위되어 버렸다. 적지 않은 인원들이 움직이는데도 거의 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으로 보아 그들 개개인이 상당한 무공을 지닌 인물들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진산월은 새삼 오늘 일이 당초 예상보다 흉험(凶險)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과 낙일방뿐이라면 몰라도 몸을 제대로 움직일 수 없는 사람이 네 명이나 있으니 그들을 모두 데리고 이곳을 빠져 나가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나 속마음이야 어쨌든 겉으로 드러난 그의 얼굴은 아무런 표정의 변화가 없어 보였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야경을 구경하러 모여든 건 아닐 테고, 모두 나 때문에 온 거요?”

“흐흐…… 물어 보나마나 한 이야기 아니냐? 너에게 용건이 있지 않다면 우리가 무엇 때문에 밤이슬을 맞으며 이곳에 왔겠느냐?”

“그런데 나는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 봐도 운자개 외에는 다른 사람들과 볼일이 없는 것 같구려.”

“물론 우리는 너와 직접적인 원한은 없다. 하지만 강호에서는 한 사람만 건너면 친구나 적이 된다는 말이 있지.”

“그렇다면 당신들은 운문세가의 부탁을 받았단 말이오?”

담소광은 냉소를 날렸다.

“흥! 운문세가가 비록 이 일대에서 위세가 당당하다고 하지만 노부에게는 관심 밖의 일이다.”

옆에 있던 운자개가 움찔하여 담소광을 돌아보았다.

“담 대협, 그 말씀은 너무 지나치신 것 같습니다.”

담소광은 자신도 말이 조금 심했다고 생각했지만, 나이도 어린 운자개에게서 직접 그런 말을 듣자 무안해져서 못마땅한 얼굴로 그를 힐끗 쏘아보았다.

“노부가 틀린 말을 한 건 아니지 않나? 그리고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닐세.”

운자개는 운문세가를 무시하는 듯한 담소광의 말에 내심 기분이 언짢았으나 그의 말대로 오늘의 목적은 진산월을 상대하는 일이었으므로 솟구치는 화를 꾹 눌러 참았다. 진산월은 이내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운문세가의 뒤에 다른 누군가가 있군.’

담소광이 무심결에 내뱉은 말은 핵심을 찌른 것이었다. 운문세가가 섬서성과 하남성 일대에서 몇 손가락 안에 꼽히는 명문세가라 해도 오늘 이곳에 온 고수들 또한 만만한 인물은 한 사람도 없었다. 특히 다른 사람은 몰라도 무정도 한충은 절대로 운문세가가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담소광이 헛기침을 하고는 다시 입을 열려 했을 때, 한충이 빙긋 웃으며 천천히 앞으로 나섰다.

“담 노인은 다 좋은데 말이 너무 많은 게 흠이오. 어차피 우리가 이곳에 온 목적은 뻔한 것인데 쓸데없는 말만 늘어놓아서 무얼 하겠소? 밤이 더 깊어지기 전에 이만 시작합시다.”

담소광의 얼굴에 노기 어린 붉은빛이 감돌았다. 하나 한충은 아무리 담소광이라도 함부로 대할 수 없는 고수인지라 분노의 화살이 고스란히 진산월 일행에게로 향했다.
검도쌍괴 도종와 포렴도 한충을 따라 각기 검과 도를 뽑아 든 채 앞으로 다가왔고, 담소광은 두 주먹을 불끈 쥔 채 당장이라도 달려들 듯한 기세였다. 삽시간에 장내의 공기가 팽팽하게 긴장되며 맹렬한 살기가 퍼져 나갔다.

진산월은 이미 유소응을 왼손으로 슬쩍 안아들고 있었고, 낙일방 또한 전흠의 몸을 옆구리에 끼고 그의 검을 등 뒤에 매었다. 진산월의 뒤에 있던 손풍도 어느새 동중산의 옆에 있었는데, 동중산이 조금 전보다 훨씬 더 취기가 올랐는지 제대로 서지 못하고 연신 비틀거리는 바람에 그를 붙잡느라 쩔쩔매고 있었다.

한충은 천천히 진산월 앞으로 다가오면서 허리춤에 매달고 있던 보도를 뽑아 들었다.

스릉!

나직한 도명(刀鳴)과 함께 그의 손에는 보기만 해도 섬뜩한 빛을 발하는 두 자 반 길이의 칼이 쥐어졌다. 한충은 그 칼로 비스듬히 자신의 얼굴을 가렸다. 몹시 특이한 기수식(起手式)이 아닐 수 없었다.

이미 사전에 계획을 한 듯 검도쌍괴 도종과 포렴은 진산월의 양쪽 옆으로 돌아가고 있었고, 담소광은 거친 기세로 낙일방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갔다.

“네 녀석이 젊은 층 중에서 주먹으로는 최고라고 하더구나. 어디 노부의 패황권에 비해서 어떤가 한번 보자!”

담소광은 불문곡직하고 낙일방을 향해 오른 주먹을 쭈욱 내뻗었다. 그야말로 평소의 성정을 나타내듯 화급한 일권(一拳)이 아닐 수 없었다.

낙일방은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추호도 당황하지 않고 묵령갑을 낀 주먹을 휘둘러 정면으로 맞서 갔다.

쾅!

주먹과 주먹이 정면으로 부딪치며 막강한 경기가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두 사람은 각기 한 걸음씩 물러났다. 담소광은 낙일방의 주먹과 부딪친 오른손에 적지 않은 통증을 느끼고 있다가 그가 자신과 똑같이 한 걸음밖에 물러나지 않자 내심 크게 놀랐다.

‘이 꼬마놈의 내공이 나와 비슷하다니……’

하나 그 놀라움은 이내 솟구치는 분노로 변해 버렸다.

“오늘 네놈을 육포로 만들어 버리지 못한다면 내 성(姓)을 갈아 버리겠다!”

그는 거친 노호성을 터뜨리며 낙일방을 향해 맹렬한 기세로 달려들었다. 낙일방은 기분 같아서는 피하지 않고 마음껏 주먹을 휘두르고 싶었으나 왼쪽 팔에 전흠을 안고 있기 때문에 운신(運身)이 자유롭지 못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종남산의 고동(古洞)에서 익힌 어운보(御雲步)를 펼쳐 일단 담소광의 주먹을 피하는 데 주력했다. 어운보는 소선 우일기가 남긴 일곱 종의 절학 중 하나로, 비선 조심향의 무염보에 못지않은 상승무공이었다.

우우웅!

주위의 공기가 진동을 하는 듯한 음향과 함께 담소광의 두 주먹이 가공할 위세로 낙일방의 전신을 압박해 들어왔다. 담소광은 낙일방의 무공이 만만치 않다고 생각하여 처음부터 자신의 절기인 철마권법을 펼쳐 단숨에 승부를 내려 했다.

하나 낙일방의 어운보가 위력을 발휘하여 철마권법의 가공할 경력 속을 유연히 뚫고 지나갔다. 낙일방으로서는 다른 사람을 안고 싸우는 것은 두 번 다시 하고 싶지 않은 색다른 경험이었다.

두 주먹을 무기로 사용하는 사람이 한 팔을 쓰지 못하니 그 답답함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게다가 자신의 몸도 지키기 힘든 마당에 자신의 팔에 축 늘어져 있는 전흠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신경을 써야 하기 때문에 반격은 꿈도 꾸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기분 같아서는 전흠이 어찌되든 한쪽에 내던져 두고 마음껏 주먹을 휘둘러 담소광의 권법에 맞서고 싶었으나 그건 이루어질 수 없는 꿈에 불과했다.

‘모처럼 권법의 고수와 싸우게 되었는데 이런 꼴이라니……’

낙일방은 준수한 얼굴을 찌푸렸으나 당장은 어운보를 최대한 이용하여 정면 대결을 피하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하나 그의 사정은 손풍과 동중산에 비하면 훨씬 나은 것이었다. 담소광이 낙일방을 향해 달려들 때 손풍에게도 한 사람이 다가왔다.

“흐흐…… 네놈은 내 몫이다.”

손풍은 다가온 사람이 운자개임을 보자 절로 얼굴이 구겨졌다. 말로야 얼마든지 상대할 수 있지만 직접 손을 겨루면 무공의 고수인 운자개에게 자신은 단 일초(一招)도 받아낼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던 것이다.

운자개는 얼굴 가득 음산한 웃음을 흘리며 살광이 이글거리는 눈으로 손풍을 노려보았다.

“네놈을 찢어 죽인다는 말이 거짓인 줄 알았겠지만, 본 공자는 한번 입 밖에 내뱉은 말은 반드시 실천을 하는 성미다.”

손풍은 전혀 기가 죽지 않고 눈을 부릅뜨며 큰소리를 쳤다.

“내 성격도 바로 그렇다. 너같이 사내인지 계집인지 분간이 안 되는 놈은 이 어르신이 확실하게 판가름 내 주겠다.”

운자개의 입술이 가늘게 떨리며 눈자위가 불그스름해졌다. 마음속의 살심(殺心)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치밀어 오른 모습이었다.

운자개는 더 이상 그와 입씨름을 하지 않으려는지 붉은 입술을 굳게 다문 채 손풍을 향해 몸을 날렸다. 바로 그 순간, 지금까지 손풍의 부축을 받으며 간신히 서 있던 동중산의 오른손이 움직였다. 그와 함께 그의 소맷자락 속에서 서너 개의 섬광이 튀어나와 운자개의 미간을 향해 날아갔다.

“흥! 허튼수작을 부리는군.”

운자개는 동중산이 암기를 펼쳐 내리라는 것을 미리 알고 있기라도 한 듯 조금도 놀라지 않고 한차례 몸을 흔들었다. 그러자 동중상이 쏘아 보낸 암기들이 헛되이 허공을 가르고 지나가 버렸다.

“아깝다!”

그것을 본 손풍이 아쉬운 탄성을 내질렀다. 운자개는 마지막 발악을 하는 듯한 동중산의 공격도 우스웠고, 별로 대단할 것도 없는 공격을 보고 탄성을 터뜨린 손풍도 가소로워서 코웃음이 날 지경이었다.

‘내가 기껏 이런 놈들이나 처리해야 하다니……’

기분 같아서는 진산월이나 낙일방을 상대하고 싶었으나 자신의 실력으로는 아무래도 자신이 없었다. 예전의 기억을 되짚어 보면 삼년 동안 실력이 늘면 얼마나 늘었겠느냐는 생각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워낙에 강호에서의 소문이 놀라운 것이어서 굳이 모험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소문의 절반만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자신은 죽었다 깨어나도 그들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게다가 자신은 이번 계획의 주재자도 아니었다. 애초에 정한 계획대로 자신은 눈앞의 이 별볼일없는 두 놈만 해치우면 되는 것이다. 운자개는 먼저 동중산을 쓰러뜨리고 결심하고 그들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진짜 죽이고 싶은 놈은 손풍이었지만, 원래 맛있는 음식은 가장 나중에 아껴 먹는 법이었다.

반격할 가능성이 조금이라면 있는 동중산을 먼저 제거한 다음 손풍이란 놈을 실컷 데리고 놀면서 잘근잘근 밟아 줄 생각이었다. 아마 그놈은 살아 있는 걸 후회하게 될 것이다. 그 얄미운 놈의 살점을 하나하나 발라 줄 생각을 하자 운자개는 짜릿한 쾌감이 밀려와서 자신도 모르게 붉은 혀로 입술을 축였다.

손풍은 그 모습을 보고 왠지 모를 섬뜩함에 가슴이 떨려오면서도 욕지기가 치밀어 오르는 듯한 역겨움을 느꼈다.

‘저놈은 하는 짓마다 정말 마음에 들지 않는군. 사내 녀석이 저게 무슨 해괴한 짓이란 말인가?’

운자개의 행동은 해괴할지 몰라도 무공 실력만큼은 상당한 것이었다. 불과 몇 초 되지 않아 동중산은 상반신이 온통 피투성이가 되었고, 손풍도 덩달아서 피하다가 옆구리에 주먹을 맞고 바닥에 쓰러져 버렸다.

동중산이 정상이었더라면 어쩌면 한 가닥 기회를 잡을지도 몰랐으나, 취기 때문에 제 한 몸 가누기도 힘든 형편이라 운자개의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제발 누가 우리 좀 도와 줘!’

손풍은 옆구리가 으스러지는 듯한 통증을 억누르며 마음속으로 그렇게 소리치고 있었다.

장내에서 가장 치열한 격전을 벌이고 있는 사람은 진산월이었다. 진산월은 자신의 정면에서 다가오는 한충을 경계하고 있었는데, 뜻밖에도 선공(先攻)을 가해 온 것은 양옆에서 접근해 오던 도종과 포렴이었다. 그들의 공격은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날카로운 것이었다.

도종의 검은 철저하게 진산월의 상체만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그의 검은 거의 직선(直線)으로 움직였는데, 그래서인지 빠르기가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게다가 동작의 대부분이 찌르기여서 여타의 검법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진산월은 그의 검법이 동영(東瀛)에서 유래되지 않았을까 생각했으나 지금으로선 확인해 볼 수 없었다.

반면에 포렴의 도는 진산월의 하체를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그의 도는 변화가 무쌍하고 변초(變招) 속에 또 다른 변초를 숨기고 있어 잠시만 한눈을 팔아도 치명적인 위험을 초래하는 것이었다. 그런 변화무쌍한 도가 하체만을 노리고 들어오니 막기가 참으로 곤란했다.

두 사람의 합공은 전혀 다른 방식의 공격을 톱니바퀴처럼 완벽한 호흡으로 조화시켜 상대를 곤궁에 빠뜨리게 하는 것이었다. 강호에서 그들이 합격진(合擊陣)을 익혔다는 말 같은 건 전혀 없었는데, 지금 그들의 모습을 보니 오래 전부터 손발을 맞춰 왔던 것이 틀림없었다.

진산월은 유소응을 왼쪽 팔에 안은 채 천하삼십육검을 펼쳐 검도쌍괴의 함공에 맞서고 있었는데, 크게 열세에 몰리지는 않았으나 쉽게 우세를 점하지도 못했다. 유소응은 진산월의 옆구리에 매달린 채 자신의 눈앞으로 검광과 도기가 스치듯 지나가는 것을 눈도 깜박이지 않고 바라보고 있었다.

무시무시한 도검(刀劍)이 눈앞에 어른거리는데도 그의 얼굴에는 전혀 겁을 먹거나 두려워하는 빛이 보이지 않았다. 그의 간담이 크기 때문은 아니었다. 단지 그는 자신의 사부인 진산월에게 절대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처음에만 조금 당혹스러웠을 뿐, 시간이 흐를수록 사부의 팔에 안겨 있는 것이 그다지 불편하지 않았다. 그토록 상대의 검이 예리하게 날아들고 도가 기이한 각도에서 짓쳐들어도 사부의 검은 너무도 수월하게 그들의 공세를 막고 있었다.

사부는 집요할 정도로 천하삼십육검의 초식들만을 사용하고 있었다. 처음에 유소응은 그것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으나, 수십 초가 지나도록 진산월이 천하삼십육검만을 고집하는 것을 보고는 그 안의 의미를 깨닫게 되었다.

며칠 전에 유소응은 연회의 마지막에 진산월이 펼치는 천하 삼십육검의 연무를 본 적이 있었다. 그리고 오늘 다시 진산월의 옆구리에 매달린 채 자신의 눈앞에서 펼쳐지는 똑같은 검초들을 목격하고 있었다. 당시에는 그저 화려하게만 생각했던 천하삼십육검의 초식들이 언제 사용되는지, 어떤 식으로 움직이고 있고 어느 정도의 위력을 가지고 있는지를 시간이 갈수록 조금씩 깨닫게 되었다.

‘사부님은 내게 천하삼십육검의 변화들을 직접 보고 느끼게 해주시려는 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자 갑자기 가슴 한구석이 뜨거워졌다. 두 명의 고수들에게서 무서운 합공을 당하는 와중에도 사부는 자신에게 무공에 대한 눈을 뜨게 해주려고 위험을 무릅쓰고 있는 것이다. 유소응은 사부의 그런 배려를 저버리지 않기 위해서 눈도 깜박이지 않고 사부의 검에서 펼쳐지는 천하삼십육검의 모든 초식들을 놓치지 않게 바라보았다. 다시 오십여 초가 지나갔다. 그동안에 진산월은 천하삼십육검의 초식들 중 전반부와 중반부 이십사 초를 연환(連環)하여 계속 사용했다. 아무리 그의 검술이 탁월하고 천하삼십육검이 다채로운 변화를 가지고 있다고 해도 도종과 포렴이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자신들이 상대하고 있는 초식들이 계속 같은 것의 반복임을 모를 리가 없었다. 그제서야 그들은 겉으로는 치열한 것 같았으나 사실은 진산월이 최선을 다하고 있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순간 두 사람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지며 서로의 눈빛이 빠르게 교환되었다. 무공도 모르는 어린아이를 데리고 있으면서도 자신들의 합공을 백여 초나 가볍게 막아내는 절세의 고수를 지금까지와 똑같은 방법으로 격파할 수는 없었다. 무언가 특별한 조치가 필요했다. 짧은 시선을 교환하는 사이에 그들은 마음을 결정했다. 그동안 직선으로만 움직이던 도종의 검이 갑자기 유연한 곡선을 그리며 진산월의 인후혈을 찔러 왔다. 좌에서 우로 비스듬히 파고들어오는 그 검초는 진산월에게 가까이 올 때쯤 검봉(劍鋒)이 흔들리더니 갑자기 수십 개의 검화(劍花)를 그려냈다.

“앗?”

진산월의 옆구리 쪽에서 아이의 짤막한 외침 소리가 들려왔다. 유소응이 갑자기 변한 도종의 검에 놀라 자신도 모르게 경호성을 내리른 것이다. 그와 함께 진산월의 하체를 노리고 날아들던 포렴의 칼 또한 지금까지와는 달리 무섭도록 빠른 속도로 짓쳐들었다. 지금까지 포렴의 도는 변화가 다양하기는 했으나 속도가 그리 빠르지 않았는데, 지금은 마치 강호제일의 쾌도(快刀)인 질풍추혼(疾風追魂) 견동(甄動)을 보는 것 같았다. 견동은 천하제일쾌검인 분광검객 고심홍과 함께 무림쌍쾌(武林雙快)로 불리고 있는 절세의 도객이었다. 갑자기 변한 두 사람의 공격은 사람을 당혹케 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변화가 심한 도법으로 상대의 하체에 대한 움직임을 제어하고 빠르고 강력한 검법으로 상체를 공격하는 게 이제까지의 방식이었다면, 지금은 변화무쌍한 검광으로 눈을 어지럽히고 움직임이 둔해진 하체를 피할 사이를 주지 않는 빠른 도법으로 날카롭게 공격하고 있었다. 처음의 방식이 상체를 노리는 검이 주공(主攻)이었다면, 지금은 아랫배를 파고드는 도가 주공이었다. 하나 진산월은 조금도 표정이 변하지 않았다. 그는 한눈에 두 사람이 서로 상대방의 무공을 바꾸어 전개한 것임을 알아보았던 것이다. 그는 적절한 시기에 몸을 허공으로 띄워 아랫배를 찔러 오는 포렴의 도를 너무도 수월하게 피한 후 위에서 아래로 떨어져 내리며 용영검을 수직으로 내리그었다. 지금까지 펼쳤던 초식과는 다른 천하삼십육검 중의 후반 십이 초 중 하나인 천하수조였다. 쾌애액! 마치 도끼로 장작을 패는 듯한 음향이 터져 나오며 도종이 만들어 낸 수십 개의 검화들이 모조리 깨어졌다. 검화들이 사라진 자리에는 두 눈을 경악으로 부릅뜬 도종의 얼굴이 드러나 보였다. 도종의 마간에 한 줄기 붉은 선이 나타나더니 이내 그 선이 콧등을 지나 입술을 타고 아래고 쭉 그어졌다. 진산월은 유소응의 몸을 팔뚝에 낀 후 그의 몸을 잡고 있던 왼손으로 살며시 그의 눈을 가렸다. 다음 순간, 도종의 몸은 그대로 두 조각으로 갈라져 버렸다.

“이…… 이럴 수가……”

포렴은 학질 걸린 사람처럼 이를 달달 떤 채 망연자실한 표정이었다. 장내의 싸움도 어느새 그쳐 있었다. 너무도 처참한 도종의 죽음에 모두들 자신들도 모르게 일순간이나마 손을 멈추고 만 것이다. 한쪽에서 보도를 든 채 다소 느긋한 표정으로 진산월과 검도쌍괴의 싸움을 지켜보고 있던 한충 또한 얼굴이 철갑을 씌운 듯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는 승부가 이토록 단숨에 갈리리라고는 미처 예상치 못하고 있었다. 백 초가 지나도록 검도쌍괴는 진산월을 쓰러뜨리지 못했지만, 진산월 또한 특별히 그들을 압도한다고 할 수 없어서 좀 더 지켜보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끼어들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검도쌍괴가 갑자기 수법을 변화시켜 조금 전과 비할 수 없는 괴이한 살수를 날렸다 싶더니 순식간에 승부가 가려지고 오히려 도종이 두 조각 나 버렸다. 포렴은 이미 기가 꺾여 더 이상 싸울 수 없는 상태였다. 한충은 천천히 진산월의 앞으로 걸어갔다.

“무서운 솜씨군. 소문보다 더 독한 솜씨야.”

진산월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용영검을 들어 그를 가리켰다. 그것은 본 한추의 얼굴에 차가운 미소가 떠올랐다.

“말 같은 건 필요 없다는 건가? 하긴…… 이런 상황에서는 어떤 말도 의미가 없는 것이겠지.”

한충은 수중의 도를 자신의 얼굴 부위까지 올리더니 천천히 돌리기 시작했다. 손목만을 살짝 이용하는 것 같은데 두 자 반이 넘는 도가 마치 장난간처럼 그의 손안에서 회전하기 시작했다. 멀리서 보면 손에 커다란 바람개비를 든 것 같은 모습이었다. 하나 회전하는 도는 바람개비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흉험한 것이었다.

우우우웅……

점점 회전하는 속도가 빨라지면서 사람의 마음을 뒤흔드는 듯한 괴이한 음향이 울려 퍼졌다. 그와 함께 주위의 공기를 짓누르는 듯한 압력이 느껴지더니 마침내 한충의 손에서 맹렬하게 회전하던 보도가 폭발하듯 진산월을 향해 날아왔다. 한충의 이 특이한 도법은 겁륜구절도(劫輪九截刀)라는 것이었다. 겁륜구절도는 무서운 속도로 회전하는 도의 기세 때문에 당하는 사람은 스치기만 해도 참혹한 꼴로 변하고 만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무적사도 중에서도 그를 제일 두려워했다.

지금 진산월을 향해 날아오는 보도는 어찌나 빨리 회전하던지 마치 거대한 둥근 원반이 날아오는 듯한 착각이 들 지경이었다. 진산월은 피하지 않고 자신의 앞으로 육박해 들어오는 보도를 용영검으로 후려쳤다.

따따따땅!

단 한 번 마주쳤을 뿐인데도 용영검과 한충의 보도는 무려 열곱 번이나 격돌을 했다. 그 격돌은 점차로 켜져서 종내에는 듣는 사람의 귀청을 찢어 놓을 듯한 소리가 터져 나왔다. 진산월은 용영검을 쥔 손에 상당한 통증을 느끼고 내심 놀랐다.

‘정말 특이한 도법이로군. 도를 이런 식으로 사용할 수도 있는 건가?’

용영검과 부딪친 보도는 회전하는 기세를 조금도 잃지 않고 오히려 공이 튀어 오르듯 전혀 다른 각도로 계속 날아들었다. 진산월은 다시 용영검으로 보도를 후려쳤다.

따따땅!

격렬한 마찰음과 무시무시한 검기가 사방으로 휘몰아쳤다. 두 사람은 한 치도 물러나지 않은 채 계속적으로 검과 도를 정면으로 맞부딪쳤다. 한충의 보도는 부딪치면 부딪칠수록 계속 튀어 올라 더욱 맹렬한 속도로 진산월의 허점을 파고들었다. 한치만 방심해도 그 무섭게 회전하는 칼날은 여지없이 상대의 숨통을 끊어 놓을 게 분명했다. 겁륜(劫輪)이라는 말이 고스란히 실감나는 장면이 아닐 수 없었다.

진산월의 옆구리에 매달려 있는 유소응도 조금 전과는 차원이 다른 살벌함은 느끼고 있었다. 검과 도가 부딪칠 때마다 터져 나오는 파열음에 고막이 멍멍해져 있었고, 그때마다 사방으로 퍼져 나가는 검기와 도기는 피부에 소름이 돋게 했다. 그중 한 번은 도기 한 가닥이 자신의 얼굴 정면으로 날아온 적도 있었다. 순간적으로 눈을 질끈 감았다가 다시 떠 보니 어느새 진산월의 검기가 그 도기를 막아내어 한숨을 돌리기도 했다.

지금도 한충의 보도는 진산월의 검을 맞고 튀어 오르더니 오른쪽 옆구리로 파고들었다. 무슨 놈의 칼이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스스로 제멋대로 움직이는지 유소응으로서는 당최 눈으로 보고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 안에 얼마나 치밀한 손의 조종과 섬세하면서도 강력한 진기의 흐름이 담겨 있는지는 지금의 유소응으로서는 알 수도 없었고 느낄 수도 없었다. 그저 막연히 정말 무서운 칼이라고만 생각할 뿐이었다.

진산월은 막 용영검으로 보도를 막으려다 무슨 생각을 했는지 갑자기 신형을 뒤로 움직였다. 그 바람에 무섭게 파고들던 보도가 텅 빈 공간을 난자하듯 선회하더니 다시 되돌아갔다. 지금까지 진산월이 상대의 공격에서 뒤로 물러난 적은 한 번도 없었기 때문에 유소응은 의아함을 느꼈다. 뒤로 물러난 진산월의 몸이 어딘가로 빠르게 움직였다.

유소응은 그저 귓전으로 스치는 바람 소리에 눈을 크게 뜨고 있다가 이내 진산월이 무엇 때문에 뒤로 물러났는지를 알게 되었다. 한쪽에서 운자개에서 공격을 당하고 있던 동중산과 손풍이 절체절명의 위급한 순간에 처해 있는 것이다.

동중산을 그동안 운자개의 손에서 용케도 쓰러지지 않고 버텨 왔다. 운자개는 그를 경시하여 전력을 기울이지 않은 탓도 있지만, 결정적인 순간마다 손풍이 방해를 해왔던 탓이 컸다. 방해라고 해봤자 마구잡이 주먹질과 욕설뿐이었지만, 워낙 물불을 안 가리고 막무가내로 덤벼 오는지라 운자개의 신경이 분산되어 동중산을 쓰러뜨리는 데 집중할 수 없었던 것이다.

원래 손풍도 처음부터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사력을 다해 맞설 생각은 없었다. 그런데 운자개가 일부러 자신은 공격하지 않고 동중산만을 집요하게 노리는 것을 보고는 그의 속셈을 짐작할 수 있었던 것이다. 동중산이 쓰러지는 순간이 바로 자신이 운자개에게 된통 당하는 때였다.

그걸 알게 되자 손풍도 마냥 손을 놓고 뒤로 물러나 있을 수만은 없었다. 어차피 이판사판이라고 생각한 손풍은 동중산이 위기에 처할 때마다 온갖 욕을 퍼부으며 운자개에게 주먹을 휘둘렀다.

운자개 입장에서는 참으로 가소롭기 그지없는 일이었으나, 처음에는 별 신경도 쓰지 않고 피하기만 하다가 보니 제법 시간이 흘렀는데도 아직도 동중산을 쓰러뜨리지 못하고 있었다. 결국 분노가 폭발할 운자개는 손풍을 나중에 따로 요리할 생각을 포기하고 본격적인 살수(殺手)를 쓰기 시작한 것이다.

운자개는 전신의 경력을 양손에 담아 오른 주먹으로는 동중 산의 관자놀이를 후려쳐 갔고, 왼손을 손바닥을 칼날처럼 세워 손풍의 목덜미를 찔러 갔다. 그의 이 수법은 부권도수(斧拳刀 手)라는 것으로, 양손을 권(拳)과 장(掌)으로 변환시켜 담숨에 두 사람의 목숨을 끊어 버리는 무서운 무공이었다.
진산월은 격전을 벌이고 있으면서도 장내의 광경을 면밀히 파악하고 있었다. 그래서 동중산과 손풍이 위기에 처하자 즉시 전권(戰圈)에서 벗어나 그쪽으로 몸을 날린 것이다.
운자개는 막 동중산의 머리를 부수려다가 등뒤에서 무언가 엄청난 기운이 다가옴을 느끼고 힐끗 돌아보았다. 그의 얼굴이 시커멓게 변했다. 하나의 검이 엄청난 기세로 자신을 향해 쏘 아져 오고 있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그 검의 위세가 어찌나 가공스러웠던지 운자개는 상대할 엄두도 내지 못하고 그대로 바닥으로 몸을 굴렸다.
쑤아앙!
듣기만 해도 모골이 송연해지는 음향과 함께 무시무시한 검기가 그의 머리 위를 스치고 지나갔다. 운자개는 삼 장이나 떼 구르르 구른 후에야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바로 그때 그의 귀로 차가운 음성이 들려왔다.

“몸이 느리군. 이 정도 실력으로 본파를 건드리려고 했나?”

운자개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음을 느끼고 재차 몸을 날리려 했다. 하나 그 순간 허공에서 하나의 발이 불쑥 튀어나와 그의 아랫배에 사정없이 틀어박혔다. 검을 날린 진산월이 어느새 다가와 그의 배를 발로 걷어찬 것이다.

“크윽!”

운자개는 아랫배를 작살에 꿰뚫리는 듯한 통증에 입을 딱 벌렸다. 시커먼 핏물이 꾸역꾸역 흘러나오며 가뜩이나 창백했던 얼굴이 핏기 한 점 없이 백지장처럼 새하얗게 변했다.
단순한 발길질이었으나 운자개로서는 난생처음으로 당해 보는 지독한 고통이었다. 운자개는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허리를 구부린 채 바닥에 엎드려 있었다. 그의 입과 코로는 계속 시커먼 선혈이 흘러나왔다.
그때 거친 숨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운자개에게 달려들었다.

“이놈, 이번에는 내 차례다.”

운자개의 손에 목이 잘려 나갈 뻔했던 손풍이 어느새 다가와 바닥에 엎드려 있는 운자개의 몸 위로 올라탔다. 그러고는 그의 몸을 사정없이 두들겨 패는 것이다.
퍽! 퍽!
운자개는 아랫배를 맞을 때의 충격으로 단전(丹田)이 파괴되어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삽시간에 그의 몸은 유혈이 낭자해졌고, 얼굴이 퉁퉁 부어올라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가 되었다.
그래도 손풍은 손길을 늦추지 않고 사정없이 주먹을 휘둘렀다. 어찌나 험악하게 때리는지 손풍의 주먹도 뼈에 금이 갈 정도였다.

“끄으응……”

마침내 운자개는 온몸이 부서지는 듯한 통증을 이기지 못하고 정신을 잃고 말았다. 그때는 이미 그의 얼굴은 사람의 몰골을 하고 있지 않았다. 운자개의 몸이 축 늘어지자 손풍은 그의 옷을 찢기 시작했다. 껍질을 홀라당 벗기겠다는 자신의 말을 실천하려는 모양이었다.
그때 한충의 도가 예의 무시무시한 회전을 동반하며 날아들었다.
진산월의 눈에는 모처럼 번뜩하는 섬광이 뿜어 나왔다.

“당신의 도는 이미 실컷 구경했으니 이제 그만 끝내야겠소.”

진산월은 옆구리에 안고 있던 유소응을 빠르게 내려놓고는 한충의 도가 날아오는 곳으로 몸을 날렸고, 눈치가 비상한 유소응은 바닥에 내려서자 재빨리 동중산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진산월의 검이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변화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그는 한중의 도를 후려치지 않고 도가 회전하는 한복판으로 검을 찔러 넣었다. 단순한 동작 같았는데도 구름 같은 검기가 일어나더니 그토록 무섭게 회전해 들어오던 도의 가운데에 뻥 구멍이 뚫려 버렸다. 드디어 진산월이 유운검법을 펼친 것이다.
한충은 자신이 펼친 겁륜탈혼(劫輪奪魂)이 상대의 일검(一劍)에 위세를 잃고 허점을 드러내자 흠칫 놀라더니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과연 명불허전(名不虛傳)이구나! 하지만 이 정도로는 어림없 다.”

그의 손이 거의 눈에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빠르게 움직였다. 그러자 도의 회전하는 속도가 다시 빨라지며 삼엄한 도기를 사방으로 뿌려댔다.
진산월은 오히려 앞으로 성큼 다가서며 유운검법 중의 운무중첩과 운중암전을 거푸 전개했다. 그러자 무섭게 확산되어 나가던 도기들이 급격히 줄어들더니 한충의 몸이 뒤로 주르르 밀려났다.
한충의 앞가슴은 어느새 맨살이 훤히 드러나 있었고, 군데군데 핏물이 보였다.

“정말 무서운 검법이구나……”

한충의 입에서 자신도 모르는 침은성이 흘러나왔다. 하나 그는 이내 이를 악물려 재차 겁륜구절도의 절초들을 펼쳐 진산월을 공격해 들어갔다.
두 사람의 격전은 처음과는 전혀 다른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검과 도가 한 번도 마주치지 않았고, 무시무시한 검기와 도기만이 장내를 폭풍처럼 휩쓸고 있었다.
그 여파가 어찌나 살벌했던지 한쪽에서 싸우고 있던 낙일방과 담소광 또한 영향을 받고 싸움 장소를 옆으로 이동할 정도였다. 동중산과 유소응 등은 이미 멀찌감치 떨어진 곳까지 물러난 상태였다.

파파파팡!
검기와 도기가 뒤섞이더니 곧이어 짤막한 신음성이 터져 나왔다.

“윽……”

한충은 상반신이 온통 피투성이가 된 채 뒤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그토록 가공할 겁륜구절도로도 진산월의 검을 당해내지 못하는 것이다.
한충의 위급함을 알았는지 정자 주위에 늘어서 있던 수십 명의 흑의인들이 일제히 정자 안으로 뛰어들었다. 그 바람에 정자 안은 삽시간에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진산월은 한충을 공격하려다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흑의인들을 먼저 상대해야만 했다.
파파팍!
검광이 번뜩이며 피비가 정자 안을 뒤덮었다.

“크아악!”

처절한 비명 소리가 거푸 터져 나오는 가운데 순식간에 네 명의 흑의인들이 그의 검에 쓰러져 버렸다.
하나 한쪽에 몰력 있던 동중산과 손풍 등은 이내 위급한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진산월은 이런 난전(亂戰)이 벌어질 것을 가장 염려했기 때문에 즉시 동중산이 있는 곳으로 몸을 날리며 낙일방을 향해 전음을 날렸다.

“일방, 강변으로 몸을 피해라.”

진산월은 동중산을 향해 칼을 휘두르던 흑의인 두 명과 유소응을 공격하던 한 명을 단숨에 베어 버린 후 다시 유소응을 안아들더니 동중산을 향해 빠르게 말했다.

“손풍을 데리고 강 쪽으로 가라. 뒤는 내가 맡겠다.”

동중산은 운자개와 싸우면서 제법 많은 부상을 당했으나 그 바람에 오히려 취기가 조금 깨어 있는 상태였다. 그는 즉시 고개를 끄덕이며 아직도 한쪽에서 운자개의 옷을 찢고 있는 손풍의 뒷덜미를 잡아끌었다.

“놔오. 조금만 더 하면 이놈을 아주 벗겨 버릴 수 있다구요.”

손풍이 끌려가지 않으려고 바둥거렸으나 동중산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의 팔을 잡은 채 정자 밖으로 몸을 날렸다.
흑의인들이 그의 뒤를 따르려 할 때 갑자기 정자 안이 온통 구름 같은 검영(劍影)에 휩싸여 버렸다.
파파파파파……
보이는 것은 오직 새하얗 검광과 혈우(血雨)뿐이었다. 낙일방과 담소광조차도 그 검광의 폭우를 감당하지 못하고 싸움을 멈추고 정자 밖으로 뛰쳐나오고 말았다.

“크아악!”

“아악!”

끔찍한 비명이 장내를 뒤흔들었다. 그와 함께 정자는 완전히 박살나서 그대로 주저앉아 버렸다.
잠시 후에 먼지가 가라앉자 장내의 광경이 드러났다.
사십 명이 넘던 흑의인들은 불과 칠팔 명이 살아난 채 서로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고, 담소광 또한 망연자실한 모습이었다.

“이…… 이 정도일 줄이야……”

담소광은 신검무적의 검법이 뛰어나다는 말은 들었지만 자신의 예상을 훨씬 웃도는 광경에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 조금 전에 자신이 보았던 것은 그야말로 개세적(蓋世的)이라고밖에 는 표형할 수 없는 장면이었다.
단순히 검을 휘두르기만 했는데도 어찌 그런 위력이 나타날 수 있다는 말인가?
진산월 일행은 이미 어둠 속으로 사라져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담소광은 그들의 뒤를 쫓을 엄두도 내지 못한 채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때 한 사람이 그에게 다가왔다.

“그들은 어디로 갔소?”

담소광이 돌아보니 한충이 비틀거린 채 걸어오고 있었다. 상반신이 온통 피로 물들어 있었고 머리는 잔뜩 헝클어져 봉두난발이 되었으나, 다행히 치명적인 부상은 입지 않은 듯 눈빛은 여전히 강렬했다.
담소광은 한충의 실력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한충이 이토록 낭패한 모습을 보이리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더듬거리며 물었다.

“몸은 괜찮나?”

한충의 풀어 헤쳐진 머리카락 사이로 드러난 얼굴은 창백하게 굳어 있었다.

“아직은 움직일 만하오. 하지만 신검무적이 한 번만 더 공격해 왔다면 이렇게 서 있지 못했을 것요.”

담소광은 몸을 한차례 부르르 떨었다.

“정말 믿을 수 없군. 자네의 겁륜구절도가 어떤 무공인데……”

“하늘 위에 하늘이 있는 법이오. 그보다 그들이 어디로 갔는지 보았소?”

담소광은 어둠 속의 한 부분을 가리켰다.

“강 쪽으로 간 것 같네. 더 늦기 전에 어서 뒤쫓아 가세.”

“서두를 필요 없소.”

한충은 황급히 몸을 날리려는 담소광을 제지하고는 한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미 그쪽은 철저하게 대비가 되어 있을 테니까. 그렇지 않소?”

한충이 보고 있는 어둠 속에서 한 사람의 신형이 불쑥 나타났다. 그는 새하얀 백의를 입고 있는 젊은 청년이었는데, 어둠 속에서도 훤히 알 수 있을 만큼 준수한 용모를 지니고 있었다.
백의미남자는 철갑을 씌운 듯 차가운 얼굴로 한충을 힐끗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몇 가지 준비해 놓은 게 있기는 하지. 하지만 당신들로서도 어찌지 못했다면 그것도 장담할 수는 없소.”

한충은 백의미남자를 한참 동안이나 쳐다보더니 눈을 살짝 찡그렸다.

“그가 저 정도의 고수라는 걸 왜 말하지 않았소?”

백의미남자의 표정도 그리 밝지만은 않았다.

“솔직히 저 정도이리라고는 나도 알지 못했소. 내가 아는 것은 삼년 전의 그였으니까. 그동안 실력이 많이 늘었다는 말은 들었지만 당신이라면 충분히 감당할 수 있을 줄 알았지.”

백의미남자는 말을 하다 말고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긴…… 얼마 전에 잠깐 보았을 때 예전과는 달라졌다는 느낌이 들긴 했지. 매장원도 당해내지 못할 실력이니 오죽하겠소? 하지만 당신의 그 특이한 도법이라면 쉽게 패하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내가 틀린 모양이오.”

백의미남자는 자신을 책했지만 한충은 오히려 자신을 책망하는 것으로 받아들였는지 표정이 좋지 않았다.

“그 태백소인가를 너무 믿었던 건 아니오? 그자는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았던 것 같던데……”

백의미남자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전형 영향이 없었던 건 아니지. 만약 그가 태백소를 마시지 않았다면 승부가 좀 더 빨리 가려졌을 테니까.’

백의미남자는 형일환의 보고를 듣고 진산월이 태백소를 석 잔 정도 마셨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태백소 석 잔이면 자신이 애초에 기대했던 양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몸의 움직임에 상당한 지장을 초래할 정도는 되었다.
절정고수들 간의 격전은 아주 사소한 것으로도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하게 되니 그 정도라면 한충에게도 충분한 승산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진산월의 무공이 자신의 예상보다 훨씬 더 고강하여 반대의 결과가 나왔던 것이다.
하나 자존심 강한 한충에게 그런 말을 밝혀 그를 자극할 필요는 없었다. 아마 한충도 어리석은 사람은 아니니 어느 정도는 짐작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한충은 생각에 잠겨 있는 백의미남자를 보더니 다시 물었다.

“이제 어떻게 할 거요? 당신의 준비로도 자신이 없다면 오늘 일은 틀린 게 아니오?”

백의미남자는 준수한 얼굴에 차가운 미소를 떠올렸다.

“강호의 일이 꼭 무공으로만 해결되리라는 법이 있소? 그가 비록 내 예상을 뛰어넘는 절정검객이긴 하지만 강물 위에서라면 사정이 달라질 거요.”

한충은 귀가 번쩍 뜨이는 모양이었다.

“강물 위라니?”

백의미남자는 진산월 일행이 사라진 강변을 턱으로 가리켰다.

“저쪽으로 가면 위수를 건너는 것 외에는 다른 길이 없소. 그러니 그들이 운 좋게 배를 구할 수 있다 하더라도 결국은 강으로 갈 수밖에 없진 않겠소?”

“그렇다면……”

백의미남자의 두 눈에 진득한 살광이 번뜩였다.

“배를 타고 강으로 도망가는 순간, 그는 고기밥 신세를 면치 못할 것이오. 오늘이야말로 신검무적의 제삿날이 될 것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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