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17권 재출강호(再出江湖)편 : 8화
제 174장. 위수풍운(渭水風雲)
강바람은 아직 차가웠다. 검은 물살이 일렁이는 가운데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강물 위를 환하게 밝혔던 그 많은 화방들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삼경(三更)이 가까워 오는 시간이니 당연한 일이었으나, 화방이 대부분 사라져 컴컴해진 강변은 왠지 모를 스산함이 느껴졌다. 달도 없는 검은 하늘이 더욱 그러한 느낌을 강하게 해주었다. 진산월은 한차례 주위를 둘러보고는 동중산을 향해 물었다.
“몸은 어떠냐?”
동중산은 여기저기에 멍이 들고 얼굴에 마른 피가 잔뜩 묻어 있었으나, 눈빛은 조금 전보다 오히려 맑아져 있었다.
“다행이 뼈가 부러지거나 심하게 다친 곳은 없습니다.”
진산월은 손풍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너는?”
손풍은 인상을 잔뜩 찡그리고 있다가 짤막하게 말했다.
“괜찮습니다.”
진산월은 손풍이 슬쩍 뒷짐을 지고 있는 것을 보고는 그에게로 다가갔다.
“손을 내밀어 보거라.”
손풍은 머뭇거리다가 뒷짐지었던 양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의 양손은 퉁퉁 부어 있었다. 진산월은 그의 손을 만져 보고는 가볍게 꾸짖었다.
“아무리 화가 치밀었기로서니 자신의 몸을 상하게 하면서까지 화풀이를 해야 했느냐?”
손풍의 손은 운자개를 두들겨 패다 다친 것이었다. 어이없게도 일행 중 그의 부상이 가장 심해 보였다. 손등 뼈에 금이 가서 당장 완치가 힘들었던 것이다. 손풍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끙끙거리고만 있었다. 때릴 때는 몰랐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손이 너무 아파서 말도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동중산이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쓴웃음을 떠올렸다.
“모르는 사람이 보았다면 우리 중에서 손 사제가 제일 심하게 싸운 줄 알겠군.”
손풍은 고통을 억누르느라 오만가지 인상을 쓰면서도 동중산을 흘겨보며 쏘아붙이는 걸 잊지 않았다.
“그럼 남자가 되어 가지고 누구처럼 그런 기생오라비 같은 놈에게 맞고 있어야 한단 말이오? 적어도 나는 실컷 때려 보기라도 했소.”
동중산은 그와 말타툼할 기력이 없는지 고개만 설레설레 흔들었다. 진산월은 직접 자신의 옷자락을 찢어 손풍의 손을 단단하게 동여매 주었다. 동중산이 하겠다고 나섰으나 진산월은 고개를 저어 거절하고는 끝마무리까지 마친 다음에야 비로소 부드러운 눈으로 손풍을 바라보았다.
“적어도 삼 일 정도는 이 손을 쓰지 않도록 조심해라. 금이 간 뼈가 잘못 아물게 되면 앞으로 무공을 배울 때 큰 지장을 초래할 것이다.”
손풍은 항상 무뚝뚝해 보이고 어렵게만 느껴졌던 장문인이 직접 옷자락을 찢어 붕대를 매어 주자 감격했는지 고분고분하게 머리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진산월은 특별히 다른 말은 하지 않고 손풍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 주었는데, 손풍은 그게 마음에 들었는지 진산월의 손이 닿은 자신의 어깨를 한차례 으쓱거려 보았다. 진산월은 전흠을 돌보고 있는 낙일방에게로 다가갔다.
“그는 괜찮으냐?”
낙일방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 별일은 없습니다. 그 담소광은 성미가 너무 급해서 피하는 것에 별 어려움은 없었습니다.”
“담소광은 주먹 솜씨는 괜찮지만 너무 자부심이 강해서 명성에 비해 실력은 조금 뒤처지는 편이다. 고수의 조건은 강한 무공이 아니라 언제라도 침착성을 유지할 수 있는 평정심인데, 그는 그것이 부족하지.”
“그런 것 같더군요. 제가 정면으로 맞서지 않고 피하기만 하니까 나중에는 자기 성질을 자기가 못 이겨 허둥거렸습니다. 다음에 만나면 그자에게 본파의 무서움을 확실하게 보여 주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낙일방의 얼굴에는 희미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초가보와의 싸움 이후 그는 무공으로나 성격적으로 부쩍 성장하여 이제는 충분히 믿고 일을 맡길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낙일방은 문득 생각난 듯 뒤를 돌아보았다.
“그런데 이자들이 쫓아올 기미를 보이지 않는 것을 보니 포기한 모양이군요. 처음의 분위기로 보았을 때는 이토록 쉽게 물러설 것 같지 않았는데 말입니다.”
“둘 중 한 가지겠지. 아마 전열을 정비한 다음 본격적으로 추격해 오거나……”
낙일방의 눈이 번쩍 빛났다.
“아니면 우리가 이쪽으로 올 줄 알고 미리 대비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말씀입니까?”
진산월은 빙긋 웃었다.
“바로 그렇다.”
볼수록 낙일방의 성장이 흐뭇한 진산월이었다. 때마침 그들에게 다가오던 동중산이 그 말을 들었는지 심각하게 굳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저도 크게 걱정이 되어 조금 전부터 계속 주변을 살폈습니다만, 그 많던 화방들이 거의 대부분 사라져서 불빛이 보이지 않습니다. 더 늦기 전에 아무 배라도 하나 구해서 이동 수단을 확보하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낙일방이 의아한 듯 물었다.
“그럼 위남으로는 돌아가지 않을 생각입니까?”
“지금 상태에서 위남으로 돌아간다면 그들의 함정에 제 발로 뛰어드는 격이 될 겁니다.”
낙일방도 그런 사실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으나, 장복객잔의 별채에 맡겨 놓은 짐과 말들이 아까웠다. 특히 그 말들은 특별히 신경을 써서 고른 것들이라 나름대로의 애착도 있기에 아쉬움이 더욱 클 수밖에 없었다.
“이 시각에 배를 구한다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닐 겁니다. 게다가 그들이 미리 대비를 했다면 그 정도 생각했을 게 아닙니까?”
“저도 그 점이 불안스럽긴 하지만, 그렇다고 강변을 따라 이동한다는 건 더더욱 위험을 자초하는 일이 될 겁니다. 이 일대는 그들이 손바닥처럼 알고 있기 때문에 어느 곳으로 가도 그들의 수중을 벗어날 수 없을 겁니다.”
낙일방은 수긍하는 빛을 띠었으나, 그래도 찝찝함이 가시지 않았다. 진산월은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더니 결심한 듯 중인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일단 배를 먼저 구하도록 하자. 위남을 떠날 수 있으면 좋고, 최악의 경우 강 위에서 암습을 당하더라도 강폭이 그리 넓지 않으니 강을 건널 수 있을 것이다.”
한쪽에서 이들의 말을 듣고 있던 손풍이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난 헤엄칠 줄 모르는데요.”
동중산은 하마터면 ‘그러면 할 줄 아는 게 뭐냐’고 물을 뻔했다. 그가 그렇게 묻지 않는 건, 손풍의 옆에 있는 유소응의 작은 얼굴에도 그와 비슷한 난감해하는 표정이 떠올라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대초원에서만 자란 유소응이 헤엄치는 걸 배웠을 리가 없었다. 아마도 이런 강을 본 것도 몇 번 되지 않을 것이다. 진산월은 담담한 음성으로 말했다.
“어차피 너희들은 육지에 있느나 강에 있으나 누군가가 지켜 주어야 한다. 넓은 지역에서 조금 전처럼 많은 사람들에게 습격을 받는다면 난전이 벌어져서 너희들을 지키기가 힘들게 될 뿐 아니라 자칫하면 뿔뿔이 흩어질 수도 있다.”
중인들은 눈을 초롱히 빛낸 채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하지만 우리가 배를 탄다면 그들이 공격할 수 있는 길은 물속밖에는 없다.”
낙일방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게 더 위험하지 않을까요?”
“우리뿐이라면 그렇겠지. 하지만……”
진산월은 아직도 술에 취해 잠들어 있는 전흠을 힐끗 돌아보았다.
“우리에게는 수공(水功)의 고수가 있지. 그가 물속을 맡고 내가 물위를 책임진다면 이곳을 벗어나는 일이 그다지 어렵지 않을 것이다.”
낙일방이 눈을 크게 떴다.
“전 사형이 수공의 고수였습니까?”
“그가 어디 출신인지 잊었느냐?”
그제야 낙일방은 자신의 머리를 쳤다.
“아! 그렇군요.”
전흠은 해남도에서 평생을 살아온 인물이었다. 그러니 물과 친하지 않을래야 친할 수 없었다. 게다가 전흠은 어려서부터 물속에서 노는 것을 무척이나 좋아하여 자연스레 높은 수준의 수공을 익히게 되었다.
동중산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전흠을 바라보았다.
“그렇다면 문제는 전 사숙께서 언제 깨어나느냐 하는 것이로군요.”
진산월은 대수롭지 않은 표정이었다.
“그거야 언제라도 깨울 수 있지.”
이어 그는 전흠에게 다가가서 그의 몸을 번쩍 들더니 강가로 가서 그대로 강물 속으로 집어 던졌다.
풍덩!
중인들이 멍하니 쳐다보고 있는 가운데 전흠의 몸은 시퍼런 강물 속으로 그대로 잠겨 버렸다. 모두 어안이벙벙하여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저…… 전 사형!”
낙일방이 사색이 된 채 전흠이 빠진 강 쪽으로 달려갔다. 하나 그가 채 반도 가기 전에 강물 속에서 사람 머리 하나가 튀어나왔다.
“푸우……!”
중인들이 놀라 보니 그는 다름 아닌 전흠이었다. 전흠은 언제 잠들었느냐는 듯 눈을 시퍼렇게 뜬 채 주위를 둘러보더니 능숙한 솜씨로 진산월이 있는 쪽으로 헤엄쳐 왔다.
강변으로 걸어 나오는 그의 몸은 흠뻑 젖어 있어 그야말로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되었다.
“뭐야?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전흠은 중인들을 쏘아보며 버럭 고함을 질렀다.
“내가 대체 왜 물에 빠져 있는 거야?”
낙일방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전 사형,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으십니까?”
“무슨 생각? 좋은 술 잘 마시고 있던 사람을 강 속으로 집어 넣은 놈이 누구냐? 너냐?”
전흠의 얼굴에 험악한 표정이 떠오르자 낙일방은 활급히 고개를 저었다.
“제가 그럴 리가 있습니까?”
“그럼 누구냐? 동중산 당신인가?”
동중산은 전흠이 깨어난 것을 보자 마음이 놓여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제가 어찌 감히 그럴 수 있습니까?”
전흠의 두 눈에 분노에 찬 광망이 이글거리더니 그의 몸이 바람처럼 한 사람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럼 볼 것도 없이 네놈이구나. 그렇지 않아도 네놈을 어떻게 혼내 주나 고민하고 있었다!”
손풍은 멍하니 전흠을 쳐다보고 있다가 그야말로 날벼락을 맞고 말았다.
“억? 내가 뭘 어쨌다고……”
전흠은 그의 말을 들어 보지도 않고 일단 손풍의 밉살스런 얼굴을 향해 주먹부터 날렸다. 때마침 진산월이 그를 제지하지 않았다면 손풍은 난생처음으로 자기가 하지도 않은 일 때문에 남에게 두들겨 맞고 기절할 뻔했다.
손풍은 너무 억울해서 눈물이 핑 돌 지경이었으나, 전흠의 살기가 뚝뚝 떨어지는 얼굴은 보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놓으시오, 아무리 장문인이 말려도 더 이상을 참을 수 없소. 오늘은 기필코 저 버르장머리 없는 놈에게 세상 무서운 걸 가르쳐 주고야 말겠소!”
“너는 왜 애꿎은 사람을 탓하느냐?”
“그게 무슨 말이오?”
“너를 강에 집어 던진 사람은 바로 나다.”
진산월의 말에 전흠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부릅떴다. 그가 아는 진산월은 결코 그런 막돼먹은 일을 할 사람이 아니었다.
“저놈을 감싸기 위해 나를 속이는 거라면……”
“자세한 사정은 중산에게 듣도록 해라.”
때마침 동중산이 다가와서 그동안 벌어진 일을 말해 주었다. 동중산의 말을 듣고 있던 전흠의 표정이 수시로 변했다.
자신이 술을 마시다 말고 인사불성으로 취해서 정신을 잃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불신의 표정이 역력했고, 그 뒤에 운자개를 비롯한 고술들이 습격해 왔다고 하자 분기탱천한 모습이었으며, 결국 진산월이 그들을 물리치고 강변으로 와서 술에 취한 그를 깨우기 위해 강물 속으로 집어 던졌다는 말을 듣고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얼굴이 되었다.
“그 말이 모두 사실인가?”
전흠이 다짐하듯 물어 보자 동중산이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어찌 사숙께 거짓을 아뢸 수 있습니까?”
전흠은 얼굴을 있는 대로 찡그러다가 진산월을 향해 퉁명스런 음성으로 말했다.
“사람을 깨우는 데 그런 방법밖에는 모르시오?”
“내가 아는 방법은 그것뿐이다.”
“제기랄……”
전흠은 낮게 중얼거리더니 한쪽에 서 있는 손풍을 힐끔 쳐다보았다. 손풍은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들어 보려고 귀를 쫑긋 기울였다.
과연 전흠은 나직하게 탄식을 토하는 것이었다.
“저놈은 정말 운도 좋군. 버르장머리를 뜯어 고칠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는데……”
자신이 착각하여 엉뚱한 사람을 잡을 뻔한 것은 신경도 쓰지 않는 전흠의 모습을 보고는 손풍은 마음을 다시 잡았다.
‘이제부터 내 경계 대상 일 호는 서문 계집애가 아니라 저자다.’
서문연상은 그래도 여자라 최수의 순간에는 사정을 봐주거나 손길을 늦추었으나, 전흠의 성격으로 그런 일은 절대로 없을 게 뻔했다.
손풍은 전흠의 인정사정 보지 않는 무자비한 손길에 두들겨 맞는 자신의 모습을 그려 보고는 정신이 아득해졌다.
‘그 계집의 마수를 피할 수 있다고 좋아했는데 이게 무슨 날벼락이냐? 여우를 피하려다 늑대를 만났다는 게 바로 이런 경우로구나.’
손풍은 왜 자신에게는 이런 일만 일어나는지 하늘을 저주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전흠은 옷이 모두 젖어 있어서 기분이 영 좋지 않은지 카랑카랑한 음성으로 말했다.
“강으로 이동한다고 했소? 그럼 어서 배부터 찾아봅시다. 여기서 밤을 샐 작정이오?”
동중산이 재빨리 앞으로 나섰다.
“제가 구해 보겠습니다.”
진산월이 갑자기 고개를 돌려 어둠 속을 쳐다보더니 이내 조용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서둘러야겠구나. 그자들이 추적을 시작한 모양이다.”
전흠이 흠칫하는 눈길로 진산월을 바라본 곳을 잠시 쏘아보더니 이내 사나운 표정이 되었다.
“굳이 배를 찾을 필요가 뭐 있소? 여기서 모조리 해치웁시다.”
전흠은 자신이 술에 취해 다른 사람의 신세를 졌다는 걸 안 순간부터 설욕할 기회를 노리고 있던지라 투지가 끓어오르는 모양이었다. 하나 진산월은 냉정하게 고개를 저었다.
“일단은 피하는 게 순리다. 너야 상관이 없다고 해도 손풍과 소응을 데리고 어둠 속에서 난전을 벌일 수는 없다. 더구나 그들의 세력이 어느 정도나 되는지도 모르지 않느냐?”
“제길……”
전흠이 분노를 참지 못하겠다는 듯 이를 부드득 갈자 손풍은 잘못도 없으면서 도둑이 제 발 저린 격으로 괜히 찔끔거렸다.
낙일방은 동중산에게 눈짓을 하고는 배를 찾기 위해 강변으로 갔다. 두 사람은 강변을 이리저리 뛰어다녔으나 좀처럼 배를 구하지 못했다. 거의 모든 화방들이 이미 철수를 한데다 나루터도 이곳에서는 멀리 떨어진 곳에 있어 배를 구하기는커녕 구경도 하기 힘들었다. 장소치고는 정말 최악의 곳을 고른 셈이었다.
그때 그들을 따라 강변에 나와 있던 유소응이 한곳을 가리켰다.
“저길 보세요.”
동중산과 낙일방이 황급히 돌아보니 과연 멀지 않은 곳에서 한 척의 배가 떠내려 오고 있었다. 그 배는 다른 화방처럼 등불을 내걸지 않아서 가까이 올 때까지도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것이다. 어둠이 짙게 깔린 강물 위에 등불도 켜지 않은 배가 내려오는 모습은 왠지 괴기스러워 보였다.
하나 동중산은 급한 마음에 소리를 질렀다.
“여보시오. 거기 아무도 없소?”
배에 있는 선실에서 휘장이 펄럭이더니 한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나온 사람을 보자 동중산을 흠칫 놀랐다. 약간 짜증스런 표정으로 선실 밖으로 나온 그 인영도 진산월 일행을 보고는 안색이 변했다. 그 인영은 뜻밖에도 조금 전에 장복객잔에서 손풍과 실랑이를 벌였던 화의청년이었던 것이다.
“엇? 당신들은……”
화의청년의 놀란 외침을 들었는지 선실 안에서 청수한 음성이 들려왔다.
“무슨 일인데 그러느냐?”
이어 선실 밖으로 청삼중년인의 모습이 나타났다. 청삼중년인 또한 강변에 서 있는 진산월 일행을 발견하고는 어리둥절한 모습이었다.
“이것 참 공교롭군. 여기서 또 만나게 될 줄은 몰랐소. 당신들은 이 늦은 시간까지도 야경을 구경하고 있었소?”
청삼중년인의 말에 동중산은 쓴웃음을 지었다.
“사정이 있었소.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당신들의 배에 신세를 질 수 있겠소?”
청삼중년인은 약간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낮에 잠깐 보았을 뿐인 정체 불명의 일행들을 좁은 배에 태운다는 게 선뜻 내키지 않았던 것이다. 게다가 그들은 모두 남자들인 데 비해, 자신에게는 여자가 두 명이나 있었다.
그때 배 안에서 누군가가 나직한 음성으로 청삼중년인에게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거기가 제법 떨어져 있어서 동중산은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으나, 여자의 음성인 것은 확실했다.
청삼중년인은 잠깐 망설이는 듯했으나 이내 생각을 정리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보아하니 급한 사정이 있는 모양이구려. 배를 그쪽으로 댈 테니 조금만 기다리시오.”
화의청년이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으나 청삼중년인은 아랑곳않고 배의 뒤쪽에 있는 노를 움직여 배를 동중산 등이 있는 강변으로 이동시켰다.
배가 강변에서 이삼 장 떨어진 곳까지 다가오자 성질 급한 전흠이 제일 먼저 배 위로 뛰어올랐다. 이어 낙일방이 유소응을 안고 올랐고 동중산도 신형을 날리려 했다. 그러자 손풍이 급히 그를 불렀다.
“나도 데려가야지요.”
동중산은 그들 돌아보며 짤막하게 웃었다.
“내 실력으로는 사제를 안고 저곳까지 가지 못하네. 장문인께 부탁해 보게.”
동중산이 땅을 박차고 배 위로 오르자 손풍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진산월을 돌아보았다.
하나 그가 입을 열기도 전에 진산월은 그의 소맷자락을 잡고 신형을 날리고 있었다.
“어어?”
손풍은 몸이 붕 뜨는 듯한 기분을 느끼고 입을 딱 벌렸으나 어느새 자신의 몸이 배 위에 내려서 있는 것을 보고는 신기한 표정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진산월은 손풍을 데리고 배 위로 내려선 다음 청삼중년인을 향해 포권을 했다.
“늦은 밤에 무리한 부탁을 했는데도 선뜻 들어주어 고맙소. 잠시 신세를 지겠소.”
청삼중년인은 점찮게 웃었다.
“별말씀을. 배가 그리 크지 않지만 당신들 정도는 태워도 가라앉지 않을 정도는 되니 신세랄 것도 없소.”
그러다 문득 그의 시선이 진산월 일행이 떠나온 강변으로 향했다. 강변은 짙은 어둠에 잠겨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하나 그는 그곳에서 삼엄한 살기가 흘러나오는 것을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동중산이 눈치 빠르게 그를 향해 먼저 입을 열었다.
“보시다시피 우리를 쫓은 무리가 있어 추적을 피하기 위해 부득히 신세를 지게 된 것이오. 미리 밝히지 않은 걸 사과드리겠소.”
청삼중년인은 잠시 눈썹을 찌푸렸으나 이내 다시 정상적인 표정이 되었다.
“강호에서 벌어지는 일을 모두 알 수는 없겠지. 어차피 무슨 사정이 있어 그러려니 했던 것이니 신경 쓰지 마시오.”
“하하…… 과연 대범한 성격이시오. 그런데 이 늦은 시간에 배를 타고 계시다니 정말 놀랐소.”
“별로 의아하게 생각할 것 없소. 저녁때 화방을 타러 이곳에 나왔다가 화방을 구하지 못해 아예 배 한 척을 사 버렸소. 이번 기회에 이 배를 타고 며칠 여행을 할 생각이오.”
“짐은 어떻게 하실 생각이시오? 주루에 있을 때 말씀을 들어보니 따로 숙소가 있는 모양이던데……”
동중산을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물었으나, 청삼중년인은 그가 자신의 말을 의심하고 은밀히 탐색한다는 것을 알고는 담담하게 웃었다.
강호에서 경험이 풍부한 인물이라면 이 정도의 조심은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었다. 오히려 특별한 의심도 없이 진산월 일행을 순순히 배에 태워 준 청삼중년인의 행동이 경솔한 편이었다.
“숙소는 따로 인편(人便)을 보내 짐을 가지고 미리 삼문협(三門峽)으로 가 있으라고 했소.”
삼문협은 위수르 타고 내려가다 보면 위남에서 낙양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해 있었다.
동중산은 짐짓 눈을 크게 뜨며 반색을 했다.
“오! 잘됐굴. 우리도 마침 그쪽으로 가던 길이오. 이왕이면 살문협까지 신세를 집시다.”
“그렇게 하시오.”
조용히 웃던 청삼중년인이 문득 눈살을 찌푸린 채 바닥으로 시선을 떨구었다. 동중산을 그 행동에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했으나, 그때 진산월이 불쑥 전흠을 돌아보았다.
“네 솜씨를 빌려야겠다.”
청삼중년인은 물 속으로 누군가가 접근하는 것을 알고 인상을 찌푸렸던 것이다. 배에 구멍이라도 뚫린다면 아무리 그가 고강한 무공의 소유자라 할지라도 곤경에 처할 게 분명했다.
진산월 또한 수중(水中)에서 들려오는 기척을 알고 전흠에게 때맞춰 지시를 했다.
전흠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않아도 손이 근질거리던 참이었소. 맡겨 주시오.”
전흠은 재빠르게 웃옷과 신발을 벗더니 자신의 검을 뽑아 들었다. 그러고는 어두운 강물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배에서 물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 광경을 보고 있던 청삼중년인이 나직한 탄성을 터뜨렸다.
“허! 수공이 대단한 친구로군.”
아닌게아니라 전흠이 배에서 물 속으로 뛰어들어가는데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런 입수(入水) 동작만 보아도 전흠이 수공에 상당한 실력을 지니고 있음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진산월은 청삼중년인을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우리를 쫓아온 자들이 이 배를 추적해 오는 것 같소. 약간 귀찮은 일이 벌어질지도 모르는데 두 분은 선실로 들어가 계시는 것이 어떻소?”
진산월은 청삼중년인과 화의청년에게 싸움에 휘말리지 않도록 선실로 들어갈 것을 권했으나 청삼중년인은 고개를 저었다.
“불구경과 싸움 구경을 일부러 돈을 내고라도 보려는 게 사람의 심리요. 더구나 이 배에 함께 탄 이상 당신들과 우리는 어차리 같은 운명에 처하게 된 신세가 아니겠소?”
청삼중년인의 태연자약한 모습에 진산월은 내심 미안한 마음을 금치 못했다. 어쨌든 자신들은 상대의 호의(好意)를 이용한 셈이 되었던 것이다.
“가급적이면 폐가 되지 않도록 하겠소.”
청삼중년인은 진산월의 마음을 알고 있는지 점잖게 웃었다.
“하하…… 사람을 도우려면 끝까지 도우라는 말이 있소. 어차피 번거로움을 피하기는 힘든 이상 조금이라도 손을 맞잡으면 좀더 수월하게 헤쳐 나갈 수 있지 않겠소?”
진산월로서는 그저 상대의 배려에 감사해할 뿐이었다.
청삼중년인은 은근한 시선으로 진산월을 응시했다.
“이제 함께 싸우게 된 사이가 되었으니 이름을 밝히는 게 어떻겠소? 최소한 같은 편이 누구인지는 알아야 하지 않겠소?”
진산월은 주저하지 않고 자신의 신분을 밝혔다.
“나는 종남의 진산월이라고 하오.”
그 말에 청삼중년인은 물론이고 지금까지도 한쪽에서 퉁퉁 부은 얼굴을 하고 있는 화의청년까지 얼굴이 크게 변했다.
“신검무적? 귀하가 종남파의 장문인인 신검무적이란 말이오?”
청삼중년인의 놀란 외침에 선실 안에서도 약간의 웅성거림이 일어났다.
“내가 종남을 맡고 있는 진 모요.”
진산월이 시인을 하자 청삼중년인은 새삼스런 표정으로 진산월의 모습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흔들림 없이 침착하게 가라앉아 있는 그의 두 눈과 흔들리는 배 안에서도 안정되어 보이는 그의 자세를 보고는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많지 않은 나이에 일파의 종주(宗主) 분위기를 풍긴다 했더니 그가 바로 신검무적일 줄이야……’
청삼중년인이 이번 여행에서 가장 많이 들은 이름이 바로 신검무적이었다. 특히 섬서성 일대에서 그의 명성은 너무나 확고하여 단시일 내에 한 사람이 이런 명성을 얻었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더구나 그의 나이는 고작 이십대 중반이 아닌가?
무공이라는 것이 결코 하루아침에 쌓아지는 것이 아닌데 그 나이에 자타가 공인하는 강호제일검객 중 하나가 되었으니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 청삼중년인은 이번 여행에서 그의 모습을 한번이라도 볼 수 있게 되기를 은근히 기대하고 있었다.
어디 그뿐이랴? 화의청년은 소문만으로도 이미 신검무적의 열렬한 추종자가 되었으며, 다른 두 여인도 모두 그를 만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그런 당사자를 직접 만나게 되었으니 침착한 성격의 청삼중년인도 흥분을 억누르기가 힘이 들었다.
“이거 정말 반갑소. 설마 그 유명한 진 장문인을 뵙게 될 줄은 정녕 상상도 못했소.”
이어 청삼중년인의 시선이 종남파의 다른 사람들을 향했다. 그는 제일 먼저 임풍옥수 같은 낙일방을 쳐다보았다.
“그렇다면 저 소협이 바로 강북제일의 미남자라는 그 옥면신 권이겠고……”
이어 그는 동중산을 보며 빙그레 미소 지었다.
“귀하가 바로 종남파의 지낭(知囊)이라는 비천호리 동중산이 구려.”
동중산 또한 청삼중년인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단순한 허명(虛名)일 뿐이오. 그보다 이쯤에서 귀하도 자신이 누구인지 밝히는 게 공평하지 않겠소?”
청삼중년인을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오. 나는 육반산(六盤山)에서 온 양중초(梁中初)라고 하며, 저 아이는 내 조카벌인 맹천익(孟天翼)이오.”
그의 이름을 듣자 동중산의 얼굴에 한 줄기 경악의 빛이 떠올랐다.
“이제 보니 삼월보(三月堡)의 셋째 보주인 동월(銅月) 양 대협이셨군요. 실례를 용서하시오.”
동중산은 정중하게 포권을 했다.
그 말에 다른 중인들도 모두 깜짝 놀랐다.
삼월보는 초가보, 검보와 함께 강북삼보로 꼽히는 거대세력으로, 장성(長城) 일대를 석권한 문파였다. 그들은 감숙성의 육반산에 근거를 두고 있으며, 세 명의 의형제가 보주(堡主)를 맡고 있었다.
청삼중년인, 양중호는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었다.
“나야말고 허명에 불과한 자요. 어찌 초가보를 실력으로 누르고 자신의 가치를 입증한 종남파의 고수들과 비교하겠소?”
그의 겸손한 말과는 달리 양중초는 삼월보의 보주들 중 가장 막내였으나, 인물됨이 침착하고 행동거지가 사려가 깊어 삼월보의 내부 일을 실질적으로 책임지는 인물이었다. 알려지기로는 다른 두 보주의 그에 대한 신임은 대단해서 삼월보 내에서 그의 위치는 절대적인 것이라고 했다.
동중산의 시선이 화의청년에게로 향했다.
“맹씨란 성(姓)을 흔한 성이 아닌데, 저분은 혹시 삼월보의 이보주(二堡主)이신 은월(銀月) 맹동야(孟東野) 맹 대협의 아드님이 아시시오?”
“그렇소. 싸우는 걸 밥 먹는 것보다 좋아하는 사고뭉치이긴 하지만 본성은 그리 나쁜 아리가 아니니 어여삐 봐주시기 바라오.”
이어 양중초는 화의청년을 손짓해 불렀다.
“이리 와서 네가 그토록 만나고 싶어했던 진 장문인께 인사를 드리지 않고 뭐 하는 거냐?”
화의청년, 맹천익은 어색한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삼숙부님도 참…… 제가 언제 그랬다고……”
“그걸 꼭 내 입으로 밝혀야겠느냐? 진 장문인이 매장원과 겨루어 승리한 이야기를 전해 듣고 흥분해서 당장이라도 서안으로 달려가겠다고 난리법석을 친 걸 벌써 잊었단 말이냐?”
맹천익은 얼굴을 벌겋게 상기시켰다. 그는 진산월을 힐끔거리더니 그에게 정중하게 포권을 했다.
“진 장문인을 뵙니다. 맹천익입니다.”
진산월은 담담하게 웃으며 답례를 했다.
“진산월이오. 맹 공자를 만나 반갑소.”
맹천익의 얼굴이 더욱 붉게 변했다.
“저야말고…… 진 장문인을 뵙게 되어 얼나나 기쁜지 모르겠습니다.”
얼굴을 붉히며 더듬거리는 그의 모습은 얼마 전 주루에서 심통을 부리며 손풍과 시비를 벌이던 모습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동중산은 자신도 모르게 속으로 웃었다.
‘겉으로 보기보다는 의외로 순진한 구석이 있는 친구로군. 손 사제가 저 정도만 돼 주어도 좋을 텐데……’
손풍이 알면 길길이 뛸 생각을 하고 있던 동중산은 문득 외눈을 크게 떴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던 컴컴한 강물 위에 돌연 수십 개의 등(燈)이 나타난 것이다. 하나 동중산은 이내 그것이 단순한 등이 아니라 화방에 걸어 놓은 것임을 알아차렸다. 강물 위에 기척도 없이 다가오던 수십 개의 화방에서 동시에 등을 내걸었던 것이다.
그 바람에 컴컴했던 강물 위가 일순간에 밝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