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18권 월광천추(月光千秋)편 : 1화
제178장. 흑백쌍사(黑白雙邪)
하마터면 진산월은 평정(平靜)을 잃고 그게 무슨 말이냐고 소리쳐 물을 뻔했다. 그가 마지막 순간에 목구멍 밖까지 튀어나오려는 말을 속으로 집어삼킨 것은 그 음성이 자신의 귀에만 들리는 전음(傳音)임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하나 마음속의 격동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이런 곳에서 그녀의 이름을 듣게 되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한 진산월이었다. 대체 여기서 임영옥이란 이름이 왜 튀어나온다 말인가?
차가운 전음성은 그 뒤로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았다. 대신에 처음의 호곡성이 들려왔다.
“흐흐…… 진산월, 정말 숲 속으로 들어오지 않겠느냐?”
차가운 전음성과 호곡성의 주인은 서로 다른 사람인 듯했다. 하나 진산월의 머릿속에는 오직 한 가지 생각만이 가득할 뿐이었다.
‘임영옥이 죽는다니…… 그게 대체 무슨 말이지? 그녀가 왜 죽는단 말인가?’
지난 몇 년 동안 진산월은 애써 그녀에 대한 생각을 자제해 왔다. 그녀만 떠올리면 가슴 깊은 곳에서 형용할 수 없는 슬픔과 고통이 치밀어 올라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전혀 예상치 못했던 장소에서 그녀에 대한 말을 듣게 되었다. 더구나 그 내용은 너무나 충격적인 것이었다. 자신이 잘못 들은 게 아닌가 싶기도 했으나, 결코 그런 것이 아님은 자기 자신이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진산월이 냉정을 되찾은 것은 그로부터 약간의 시간이 경과된 후였다. 진산월은 마음을 결정하고는 천천히 숲을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숲 속에서 무엇이 그를 기다리고 있는지 모르지만 그런 말을 듣고도 들어가 보지 않을 수는 없었다.
숲은 특별한 것이 없었다. 주위의 어디에서도 볼 수 있는 평범한 숲이었다. 진법(陳法)이 펼쳐져 있거나 무서운 암습이라도 있으리라 생각했었는데, 십여 장을 들어가도 울창한 나무들만이 우거져 있을 뿐 별다른 것은 보이지 않았다. 무언가를 발견한 것은 다시 오 장 정도 들어갔을 때였다.
허연 천 같은 것이 허공에서 너울거리고 있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허연 천이 텅 빈 허공에서 혼자 흔들리고 있는 광경을 본다면 누구라도 두려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하나 진산월은 담담한 눈으로 허공에 떠 있는 허연 천을 바라보았다. 얼핏 보기에는 유령의 움직임 같았으나. 진산월은 그것이 헐렁한 백포(白袍)를 걸친 누군가가 가느다란 나뭇가지 위에 서 있는 것임을 알아보았던 것이다. 백포인이 딛고 서 있는 나뭇가지는 어린아이의 손가락 굵기밖에 되지 않는 것이었다. 가느다란 나뭇가지 위에서 바람이 부는 대로 흔들리고 있는 백포인의 신법은 가히 놀랍다고 밖에는 표현할 수 없는 것이었다. 진산월조차도 저토록 표홀하게 움직일 자신은 없었다.
백포인은 얼굴에 은색 면구(面具)를 쓰고 있었는데, 그래서인지 얼핏 보면 정말 백면(白面)의 유령을 보는 것 같았다. 은색 면구를 자세히 보면 알록달록한 꽃무늬가 새겨져 있음을 알 수 있었는데, 아름답다기보다는 무언지 모를 사이(邪異)함이 느껴졌다. 게다가 은색 면구 사이로 보이는 백포인의 두 눈은 은은한 혈광(血光)을 띠고 있어 더욱 섬뜩한 느낌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진산월은 주위를 한차례 둘러보고는 혈광이 어른거리는 백포인의 눈을 마주보았다. 백포인은 여전히 휘청거리는 나뭇가지 위에 서 있었다.
“흐흐…… 설마 했지만 혼자서 이곳으로 들어오다니 과연 듣던 대로 배짱 하나는 제법이구나. 일파의 장문인으로 자격이 있다고 인정해 주지.”
그의 음성은 예의 호곡성과 같은 것이었다. 그렇다면 전음을 보냈던 차가운 음성의 주인은 다른 사람임이 분명했다. 진산월은 다시 한 번 주위를 살펴보았으나. 일시지간은 다른 인기척을 발견할 수 없었다. 솔직히 진산월은 다른 무엇보다도 전음성의 주인에 대해 묻고 싶었으나 자신의 속마음을 그대로 드러낼 만큼 허술한 성격은 아니었다. 그래서 막상 그의 입 밖으로 흘러나온 말은 전혀 다른 것이었다.
“이제 내가 들어왔으니 양중초 일행이 어디에 있는지 알려줘야 하지 않겠소?”
의외로 백포인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야 어렵지 않지. 이곳에서 백여 장쯤 안으로 들어가면 그들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진산월의 시선이 백포인의 뒤쪽을 향했다. 짙은 어둠에 휩싸인 울창한 숲이 장막처럼 펼쳐져 있을 뿐, 사람의 흔적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에 백포인의 신형이 아주 자연스럽게 진산월의 시선을 가로막았다. 몸을 움직이는 것을 보지도 못했는데 백포인의 신형은 어느새 옆에 있는 나뭇가지로 움직여 진산월의 시선을 차단했던 것이다.
그 동작이 뜻하는 것은 너무도 명확했다. 진산월은 한동안 백포인을 가만히 올려보고 있더니 혼잣말처럼 나직한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그들을 보려면 당신을 지나쳐 가야 한다는 말이로군.”
“바로 그렇다.”
“그들은 아직 살아 있소?”
백포인은 냉랭하게 웃었다.
“그렇게 궁금하면 직접 확인해 보든지.”
“그렇지 않아도 그럴 생각이오.”
진산월은 주저하지 않고 그를 향해 몸을 날렸다. 어차피 그를 사로잡거나 물리치지 않고서는 오늘의 일을 해결할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어딘가에 몸을 숨기고 있을 차가운 음성의 주인을 한시라도 빨리 자신의 앞에 나타나게 하려는 의도도 있었다.
백포인은 진산월이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광경을 내려 보고 있다가 돌연 오른손을 앞으로 쭈욱 내밀었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는데, 그에게로 날아들던 진산월이 갑자기 신형을 옆으로 비틀었다.
파아아…….
진산월의 뒤쪽에 있던 커다란 나무 한 그루에 오리알만한 구멍이 뻥 뚫렸다. 아무런 기척도 없이 날아든 무형(無形)의 기운이 만들어낸 것이다.
백포인이 발출한 기운은 무형무성(無形無聲)의 것으로, 손동작을 보지 않고서는 발출했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없을 정도로 은밀하고 쾌속했다. 지금도 백포인이 오른손을 가볍게 흔들기만 했는데도 진산월은 자신의 앞가슴과 미간으로 두 개의 날카로운 기운이 쇄도하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이번에는 진산월도 무작정 피하지만은 않았다.
진산월이 왼쪽 소매를 크게 휘두르자 세찬 경력이 구름처럼 일어났다.
팡팡!
그의 면전으로 날아들던 두 가닥의 기운이 경력과 부딪치며 요란한 파공음을 냈다.
진산월의 눈살이 거의 알아차릴 수 없을 만큼 살짝 찌푸려졌다. 소맷자락으로 태진강기를 뿌렸는데도 왼손을 커다란 정(釘)에 쪼인 듯한 통증이 느껴졌던 것이다. 문득 진산월의 뇌리에 오래 전에 절전(絶傳)된 것으로 알려진 강호상의 유명한 절기 하나가 떠올랐다.
“염왕추(閻王錐)?”
백포인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거푸 오른손을 휘둘러 무형의 경력을 계속 발출했다. 진산월은 다시 네 가닥의 송곳 같은 예리한 강기가 자신의 가슴팍과 목덜미, 양쪽 옆구리를 향해 쏘아져 옴을 알아차리고는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용영검을 뽑아 들었다.
염왕추는 육십 년 전의 괴걸이었던 염왕신군(閻王神君) 요인동(姚印冬)의 독문무공(獨門武功)으로, 요인동이 죽은 후 아무도 익힌 사람이 없다고 알려져 있었다. 염왕추는 사람의 심맥(心脈)을 으스러뜨리는 데 가장 효과적인 수법으로 알려진 소림사의 고심종(叩心鐘)에 비견되는 절학 중의 절학이었다. 당시 요인동은 이 염왕추와 염왕십팔보(閻王十八步)로 감숙성과 선서성 일대를 십여 년이나 무인지경으로 휩쓸고 다녔었다.
백포인의 염왕추는 오욕백의 혈라인에 못지않은 위력이 있었다. 다행히 그동안 진산월의 태진강기에 대한 조예가 깊어졌기에 과거 오욕백을 상대했을 때처럼 큰 낭패를 당하지는 않았지만 맨손으로 상대하기에는 아직 부족함이 있었다.
용영검 특유의 우윳빛 검광이 어른거리는 순간, 장내의 상황은 급격히 변화하기 시작했다.
백포인은 자신이 발출한 염왕추의 강기들이 검광에 닿자마자 순식간에 흩어지는 것을 느끼고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이놈이 손에 검을 쥐면 당세(當世)에 당할 자가 없다더니 과연 대단하구나.’
사실 백포인은 신검무적이라는 이름은 귀가 따갑도록 들어왔으나 자신의 염왕추 공력에 절대적인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기에 그에게 뒤진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일단 진산월의 손에 검이 쥐어지자마자 자신의 온몸이 빙굴(氷窟) 속에 들어온 듯 싸늘해지며 염왕추의 공력이 맥없이 흩어지자 갑자기 두려운 생각이 들었다.
고수들 간의 격전에서는 단 한 번의 부딪침으로도 쉽게 우열이 판가름 나는 수가 종종 있었다. 아주 작은 차이라도 어느 한쪽이 우세하게 되면 급격하게 승부의 추가 기울어지게 되는 것이다.
백포인은 황급히 칠성(七成)이었던 염왕추 공력을 최대한 끌어올리며 자신이 딛고 서 있던 나뭇가지에 살짝 힘을 가했다. 가느다란 나뭇가지가 크게 흔들리면 그의 몸이 마치 태풍 속의 가랑잎처럼 세차게 출렁거렸다. 그 바람에 용영검의 검광은 헛되이 허공을 가르고 지나갔다.
얼핏 보기에는 나뭇가지에 의지해 제멋대로 움직이고 있는 것 같아도 백포인의 이 동작이야말로 염왕신군 요인동의 양대 절학 중 하나인 염왕십팔보 중의 염왕편엽(閻王片葉)이었다. 염왕편엽은 워낙 가볍고 표홀해서 한 가닥의 실 위에서도 신형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뛰어난 보법이었다.
진산월은 자신이 펼쳐낸 검광이 백포인의 옷깃도 건드리지 못하고 헛되이 허공을 가르고 지나가자 그의 몸놀림에 특이한 묘용이 있음을 알아차리고 검법을 빠르게 변화시켰다.
파파파팍!
마치 세찬 빗줄기가 나뭇잎을 때리는 듯한 음향과 함께 조금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삼엄한 검광이 폭죽처럼 피어올라 백포인의 상반신을 뒤덮어 갔다. 백포인은 갑자기 변한 진산월의 검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신형을 흔들거리며 양손을 교묘하게 앞으로 찔러댔다.
진산월은 순식간에 십이검(十二劍)을 떨쳐냈는데, 그것은 장괘장권구식 중의 금강서벽의 변화에 천하삼십육검 중의 천하제탄을 섞은 것이었다. 사실 두 초식은 각기 떨어져 있으면 그리 뛰어난 절초라고 할 수 없는 것들이었으나, 지금 진산월의 손에 의해 연거푸 펼쳐지자 공수(攻守)가 완벽히 조화를 이룬데다 빠르고 날카롭기가 실로 대단해서 천하의 어떤 절초에도 못지않았다.
백포인은 염왕추 수법 중의 최고 절학인 십전염왕(十展閻王)으로 맞섰는데, 그가 대뜸 염왕추의 최고 수법을 펼친 것은 그만큼 진산월의 검법에 두려움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었다.
팡팡!
염왕추의 열 가닥 경기가 진산월이 펼친 삼엄한 검광에 연거푸 부딪치며 괴이한 파공음이 터져 나왔다. 압축된 공기가 폭발하는 듯한 그 음향만 들어도 염왕추에 실린 위력이 얼마나 가공스러운 것인지 여실히 알 수 있었다. 그런데도 뒤로 물러난 것은 오히려 백포인이었다. 백포인은 자신이 펼쳐낸 십전염왕이 진산월의 검에 완전히 가로막히며 오히려 막강한 검기가 자신의 목덜미 쪽을 압박해 들어오자 짤막한 경호성을 터뜨렸다.
“과연 명불허전이구나! 하지만…….”
그는 채 말을 맺지 못하고 자신이 딛고 있던 나뭇가지를 살짝 밟았다. 그의 신형이 허깨비처럼 허공을 날아 검은 하늘 위로 솟구쳐 올랐다.
다음 순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백포인의 신형이 길쭉하게 늘어지더니 돌연 대여섯 개의 그림자로 나뉘어져 버린 것이다. 그것은 괴이스럽고도 음산한 광경이 아닐 수 없었다. 가뜩이나 허깨비를 연상시켰던 백포인이 마치 분신술(分身術)이라도 펼치는 듯 여러 개의 신형으로 나뉘자 그야말로 사람인지 귀신인지 분간이 안 갈 정도였다.
“너는 결코 살아서 이 숲을 빠져 나가지 못한다.”
냉혹한 음성과 함께 여섯 개로 나뉜 백포인의 신형이 일제히 진산월을 향해 달려들었다. 진산월의 전후좌우와 상하(上下)를 향해 무시무시한 기세로 돌진해 오는 백포인의 모습은 가히 공포스러운 것이었다. 진산월도 순간적으로 당황한 듯 그 자리에 가만히 선 채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 여섯 개의 그림자에서 수십 가닥의 경기가 폭풍노도처럼 진산월의 전신으로 퍼부어졌다. 염왕십팔보 중의 염왕육현(閻王六顯)과 염왕추의 최고 수법인 십전염왕이 결합한 이 수법이야말로 요인동의 이름을 천하에 떨치게 했던 염왕강신무(閻王降神舞)였다. 당년에 요인동은 이 염왕강신무로 화북(?北)의 전설적인 고수였던 칠살신군(七煞神君)과 그의 다섯 사제들을 단숨에 격살하여 사람들을 공포에 떨게 했었다. 염왕강신무의 그림자에 진산월의 몸이 파묻혀 버리는가 싶은 순간, 갑자기 진산월의 손에 들린 용영검이 기이한 변화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거의 알아차리기 힘들 만큼 느리게 움직이는가 싶더니 어느새 용영검은 맹렬한 속도로 회전하며 수십, 수백 개의 서릿발 같은 검광을 토해내는 것이다. 그 검광들은 이내 사방으로 확산되어 진산월에게 달려드는 백포인의 그림자들을 향해 쏘아져 갔다. 그 검광들이 확산되는 속도는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파파파파파팡! 마치 수백 개의 가죽북이 동시에 찢어지는 듯한 파열음이 숨가쁘게 터져 나오며 세찬 경기가 사방을 휩쓸고 자나갔다. 그 와중에 여섯 개로 나뉘어졌던 백포인의 신형은 어느새 하나로 합쳐진 채 실 끊어진 연처럼 허공에서 바닥으로 뚝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쿵! 요란한 소리와 함께 바닥에 추락한 백표인은 간신히 몸을 일으켰으나 이미 입고 있던 백포는 누더기처럼 변해 있었고, 찢어진 백포 사이로 붉은 선혈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은색 면구 사이로 내비치는 백포인의 눈빛은 처음과 달리 예리한 빛이 사라진 채 끊임없이 흔들거렸다.
“우엑!”
백포인은 시뻘건 핏물을 토해낸 다음에야 겨우 고개를 들어 자신의 삼 장 앞에 서 있는 진산월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이…… 이것을 무슨 검법이냐?”
진산월은 조금 전과 전혀 달라진 것이 없는 담담한 모습이었다.
“천하삼십육검.”
진산월의 말에 백포인은 믿을 수 없다는 듯 경악성을 내뱉었다.
“처…… 천하삼십육검이라고? 겨우 그따위 검법에 어찌 이런 위력이 있을 수 있단 말이냐?”
백포인이 불신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천하삼십육검은 종남파의 무공 중 강호상에서 가장 유명한 무공이었으나, 사실 절학이라고 하기에는 미흡한 점이 적지 않았다. 점창(點蒼)의 사일검법(射日劍法)처럼 빠르지도 않았고, 무당(武當)의 태청검법(太淸劍法)처럼 표홀한 맛도 없었으며, 화산의 매화검법 같은 날카로운 변화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게다가 널리 알려진 만큼이나 그 무공에 대한 장단점도 거의 드러나 있는 형편이었다. 허나 진산월의 말은 한 치의 거짓이 없는 진실이었다. 조금 전에 진산월은 천하삼십육검 중의 천하도도와 천하성진, 천하비사의 세 절초를 연환하여 펼쳤는데, 그 연환되는 속도가 어찌나 빠르던지 마치 거의 동시에 펼쳐진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진산월의 천하삼십육검에 대한 화후(火候)는 그야말로 절정에 다다라 초식의 수발(收發)은 물론이고 변초(變招)의 운용과 속도의 가감(加減), 초식과 초식 사이의 연계가 마음먹은 대로 이루어지는 경지에 이르러 있었다. 지금도 얼핏 단순해 보이는 천하삼십육검의 세 초식을 연환하는 것만으로 한때 무림을 경동시켰던 요인동의 최고 절학을 격파해 버린 것이다.
백포인은 아직도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듯 끊임없이 몸을 떨며 비틀거리고 있었다. 진산월이 그를 향해 한 걸음 앞으로 다가가려 할 때였다.
“거기까지. 상견례에 대한 첫인사는 그 정도로 간단하게 하는 게 좋을 것 같소.”
돌연 들려온 음성에 진산월은 막 앞으로 내디디려던 걸음을 멈추고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언제 나타났는지 오 장여 떨어진 커다란 나무 옆에 우람한 체구의 흑포인이 우뚝 서 있었다. 흑포인의 얼굴에는 금색(金色)의 면구가 씌워져 있었다. 금색 면구 사이로 내비치는 흑포인의 안광은 얼음장처럼 차갑고 냉정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흑포인의 등장은 전혀 기척도 없는 갑작스러운 것이었으나 진산월은 조금도 놀라거나 당황하지 않고 조용한 음성으로 물었다.
“이게 간단한 거라면 제대로 된 인사는 어떤 거요?”
흑포인의 면구 속 두 눈이 조금 가늘어졌다. 아마도 웃고 있는 것이리라.
“이제 슬슬 시작할 참이오.”
“당신이 나서겠단 말이오?”
흑포인은 고개를 저었다.
“내 사제(師弟)가 진 장문인의 실력을 믿지 못하는 것 같아 확인하게끔 그를 내버려두었지만, 나는 사제와 조금 다른 생각을 갖고 있기에 처음부터 진 장문인과 정면으로 부딪치고 싶은 마음은 없소.”
“그럼 양중초 일행을 놓아주고 물러나겠다는 말이오?”
흑포인은 고개를 저었다.
“내 말을 곡해(曲解)하고 있구려. 내가 진 장문인에게 직접 손을 쓸 필요가 없다는 뜻이었소. 굳이 내가 나서지 않아도 대신할 사람은 충분히 있으니까 말이오.”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옷자락 스치는 소리가 거푸 들리며 칠팔 개의 인영이 진산월의 주위를 에워쌌다. 진산월은 담담한 눈으로 그들을 돌아보았다. 진산월을 에워싼 무리는 모두 여덟 명이었다. 그들 중 다섯 명은 키가 작고 비슷한 용모를 한 난쟁이 노인들이었고, 나머지 세 명은 삼십대 후반에서 사십대 중반까지로 보이는 중년인들이었다. 다섯 명의 난쟁이 노인들은 각기 흑백청홍황(黑白靑紅黃) 색의 옷을 입고 있었는데, 하나같이 눈빛이 살벌하고 얼굴에 흉악한 기운이 가득했다. 진산월은 그들의 특이한 외모와 체구를 일별하는 것만으로 그들의 정체를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오색마왜(五色魔矮) 강씨오형제(康氏五兄弟)는 오랫동안 중조산(中條山) 일대에서 공포스런 존재로 군림해 오던 인물들이었다. 그들은 비록 쌍둥이는 아니었으나 같은 부모를 둔 형제들로, 태어날 때부터 불구의 신체를 지니고 있었다.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낸 탓인지 그들은 손속이 잔인하기 이를 데 없었고, 한번 눈에 벗어난 자는 결코 살려 두지 않아 순식간에 강호에서 이름난 살성(煞星)이 되었다. 나중에 어느 정도 나이를 먹자 그들은 중조산의 중턱에 산장(山莊)을 하나 짓고 함께 생활했는데, 자신들의 허락 없이 산장에서 십 리 안에 들어온 사람은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잔인하게 살해하는 바람에 결국에는 산장이 있는 봉우리 전체가 일종의 금역(禁域)처럼 변해 버렸다.
강씨오형제의 옆에 있는 세 명의 중년인 중 가장 왼쪽의 인물은 손에 커다란 감산도(坎山刀)를 든 삼십대의 청삼인이었다. 기골이 우람하고 얼굴에 수염이 가득했는데, 전신에는 패기무쌍한 기운이 완연하여 위풍당당해 보였다. 청삼인의 옆에는 녹의의 장년인이 서있었는데, 특이하게도 옆구리에 한 자 가량 되는 두 개의 극(戟)을 매고 있었다. 원래 극은 두 자 이상의 길이가 대부분이라 장병(長兵)으로 분류되는데, 이 녹의인이 가지고 있는 쌍극(雙戟)은 단병(短兵)에 가까운 길이였다. 게다가 하나는 붉고 하나는 검은색을 띠고 있어서 더욱 보는 이의 시선을 끌었다.
마지막 중년인은 치렁치렁한 길이의 회색 장포를 입고 있었는데 앙상하게 마른 체구에 유달리 키가 커서 마치 커다란 고목나무에 회포를 걸쳐 놓은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소맷자락 사이로 드러난 회포인의 손목은 반질반질한데다 거무튀튀해서 사람의 피부 같지 않았다. 진산월은 조금 더 안력을 돋운 다음에야 그 거무스름한 것이 회포인의 피부가 아니라 하나의 검은 채찍임을 알 수 있었다.
회포인의 오른손에는 팔뚝까지 검은 채찍이 칭칭 감겨져 있었던 것이다. 그 채찍은 아무런 문양도 없고 장식도 없어서 무슨 재질로 만든 것인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세 명의 중년인은 각기 다른 기도를 풍기고 있었고 하나같이 강호에서 좀처럼 보기 힘든 기형병기(奇形兵器)를 지니고 있어 범상치 않은 고수들임을 쉽게 알 수 있었다. 원래 이런 기형병기들은 다루기가 쉽지 않아서 자칫하면 오히려 자기 자신이 다치기 일쑤였다. 그래서 강호상에서 이런 기형병기를 소지하고 있는 자들에게는 누구나 경원(敬遠)의 시선을 보내기 마련이다. 자신의 실력에 확실한 자신감이 있지 않고서는 이와 같은 기형병기를 가지고 다니지 못하기 때문이다.
진산월은 자신을 둘러싼 여덟 명의 고수들을 차례로 둘러보더니 세 명의 중년인에게로 시선을 고정시켰다.
“오색마왜 다섯 분은 대충 알겠는데, 세 분은 전혀 안면이 없어 모르겠구려. 어느 방면의 고인들이시오?”
세 명의 중년인은 진산월이 유독 자신들만을 지목해 신분을 물어 오자 잠시 흠칫하는 기색이었으나 이내 서로 시선을 교환하더니 그중 삼첨양인도를 지닌 청삼인이 먼저 입을 열었다.
“이런 상황에서 진 장문인을 만나게 되어 유감이오. 나는 양후일(梁侯日)이라 하오.”
녹의인이 짤막하게 그 뒤를 이었다.
“위관(葦冠)이오.”
마지막으로 검은 채찍을 팔뚝에 감고 있는 회포인이 징그럽게 웃었다.
“흐흐…… 내 이름은 가릉(賈凌)이라 한다. 들어 본 적이 있느냐?”
진산월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 세 사람은 모두 강호에서 상당한 명성을 쌓고 있는 고수들이었다. 양후일은 잔살(殘殺)패도(覇道)라는 별호로 널리 알려진 도객(刀客)이었으며, 위관은 두 개의 붉고 검은 극으로 인해 쌍극후(雙戟候)라 불리고 있었다. 흑살편(黑煞鞭) 가릉도 그들에 못지않은 이름난 고수였다. 그들 세 사람은 모두 산서 지방에서 주로 활약하며 서로 간에 별다른 친분 관계가 없다고 알려져 있었는데, 오늘 이곳에 함께 나타난 것이다.
진산월은 그들의 정체를 알게 되자 오히려 흥미를 잃었는지 이내 금색 면구를 한 흑포인 쪽으로 시선을 돌려 버렸다. 얼핏 보기에는 그들 세 사람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듯한 모습이어서 양후일 등의 얼굴에 언뜻 노기가 스치고 지나갔다. 특히 가릉은 평소에도 성격이 난폭하고 거칠기로 이름난 인물답게 두 눈에 살광을 이글거리며 금시하도 달려들 것 같은 기세를 풍겼다.
하나 그의 표정이야 어떻든 진산월은 전혀 신경 쓰지 않고 흑포인을 향해 담담한 음성을 내뱉었다.
“이들이 나를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시오?”
흑포인은 나직하게 웃었다.
“하하…… 정말 진 장문인이 배포는 소문대로 대단하구려. 걱정 마시오. 이들 외에도 충분한 인원들이 준비되어 있으니까 말이오.”
진산월의 얼굴은 전혀 아무런 표정의 변화가 없었으나, 그의 마음은 조금 전보다 한층 더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흑포인의 말대로 아무런 기척도 느낄 수 없었던 주위에 미미한 인기척이 계속 들려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 기척이 어느 한쪽이 아니라 사방에서 들려왔다. 대체 이 숲 속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숨어 있는지 짐작조차 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진산월은 다시 한차례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더니 문득 평소의 그답지 않은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이토록 남들의 뜨거운 관심을 받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소. 나 한 사람을 위해서 이렇게 많은 인원을 동원했다는 것이 선뜻 이해가 되지 않는구려.”
흑포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얼마 전까지만 해도 어느 한 사람 때문에 내가 가진 세력을 대거 동원하게 되리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소.”
그의 음성은 그리 크지 않았으나 발음이 무척 정확하고 문장의 끝맺음이 분명하여 귀가 어두운 사람이라도 쉽게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였다. 이제는 확연히 알 수 있을 만큼 사방에서 옷자락 스치는 소리와 인기척이 거푸 들려오고 있었다. 마치 숲 전체가 사람의 물결로 뒤덮이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상황이 점점 절박해지는데도 진산월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오히려 손에 들고 있던 용영검을 다시 검집으로 집어넣었다. 우유빛 검광이 어른거리는 용영검이 소리도 없이 검집 속으로 천천히 사라지는 광경은 왠지 보는 이로 하여금 섬뜩한 느낌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그 검이 다시 검집 밖으로 모습을 드러낼 때는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참혹한 일이 벌어질 것 같은 예감을 진하게 풍겼던 것이다.
흑포인의 금색 면구 사이로 내비치는 안광이 한층 더 강렬해졌다.
“그건 무슨 뜻이오? 설마 진 장문인 성격에 저항을 포기하고 순순히 굴복하겠다는 건 아닐 테고.”
진산월은 담담하게 미소 지었다. 조용하고 차분한 미소였으나, 뺨에 나 있는 흉터 때문인지 어딘지 모르게 차갑고 냉정해 보였다.
“나에 대해 무척이나 잘 알고 있는 듯하구려.”
흑포인은 굳이 부인하지 않았다.
“비록 진 장문인을 본 건 오늘이 처음이지만, 그동안 진 장문인에 대해서는 여러 사람에게서 제법 많은 말을 들었소.”
진산월은 궁금한 듯 물었다.
“무슨 말을 들었소?”
“진 장문인이 나이답지 않게 침착하고 심기(心機)가 깊어 쉽게 흥분하거나 좌절하지 않는 성격이라고 하더군.”
“다른 말도 있소?”
“몇 가지 더 있소. 신중해서 좀처럼 먼저 움직이지 않지만 일단 마음을 먹으면 과감한 행동도 서슴지 않으며, 의외로 손속도 잔인해서 피를 보는 걸 두려워하지 않는다고도 했소. 검법은 절정에 이르렀으며, 권장(拳掌) 또한 상당한 수준이라 능히 강호의 젊은 층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들 만하다고 하더군.”
“나를 그처럼 잘 보아주었다니 고마운 일이오. 그 고마운 사람들이 누구인지 알 수 있겠소?”
“흐흐…… 그건 밝힐 수 없으니 양해해 주시오.”
진산월도 흑포인에게서 대답을 들으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기 때문에 화제를 돌렸다.
“나도 당신에 대해 몇 가지 들은 게 있소.”
뜻밖의 말에 흑포인의 몸이 순간적으로 움찔거렸다.
“내가 누구인지 안단 말이오?”
진산월의 입가에 떠올라 있는 미소가 조금 더 짙어지며 흉터가 움푹 파였다. 냉정함을 넘어 냉혹해 보이는 미소였다.
“흑의사신(黑衣死神)이 불과 몇 년 만에 섬서성의 일개 도적 무리였던 흑갈방을 강북에서 몇 손가락 안에 꼽히는 거대 방파로 만들었다는 것은 이미 모르는 사람이 없소.”
흑포인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진산월은 한쪽에서 말없이 서 있는 백포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또한 화면신사(花面神邪)는 흑의사신을 도와 흑갈방을 일으켜 세운 인물로, 강호에서는 이들을 흑백쌍사(黑白雙邪)라 부르며 두려워하지 않는 자가 없다는 소문이 파다한데 내가 어찌 그런 소문을 듣지 않았겠소?”
백포인은 여전히 입을 굳게 다문 채 진산월을 쏘아보고 있었다. 그의 은색 면구 사이로 내비치는 두 눈에는 연신 시퍼런 살광(殺光)이 이글거리고 있어 간이 약한 사람은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할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