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18권 월광천추(月光千秋)편 : 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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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림천하 18권 월광천추(月光千秋)편 : 5화


제182장. 정도사도(正道邪道)

숲을 벗어난 것은 아침 해가 훤하게 뜬 아침 무렵이었다.
동쪽으로 방향을 잡고 한 시진쯤 지났을 때였다. 그토록 벌떼처럼 달려들던 흑의인들의 공세가 조금씩 주춤거린다고 느낀 순간 갑자기 거짓말처럼 숲이 끝나고 벌판이 나타났다.
밝은 아침 햇살 아래 펼쳐진 녹색 벌판은 피와 죽음이 난무하는 어두운 숲과는 너무도 이질적이어서 처음에는 제대로 실감이 나지 않았다. 불어오는 바람에 꽃향기가 섞여 있고, 발에 밟히는 풀잎에 이슬방울이 맺혀 있어 발이 축축하게 젖는 것을 알고서야 자신이 그 끔찍한 숲을 벗어났음을 확신할 수 있었다.
시야가 탁 트인 넓은 벌판으로 나오자 더 이상 흑의인들의 공세는 위협이 되지 않았다. 빠르게 신형을 움직여 앞으로 달려가기만 해도 흑의인들의 포위망은 급격히 엷어졌다. 숲을 빠져 나온 지 불과 일각도 되지 않아 진산월은 자신이 십방금쇄진을 완전히 벗어났음을 알았다.
그래도 진산월은 신형을 멈추지 않았다. 두 개의 얕은 야산을 지난 다음에야 비로소 진산월은 몸을 멈춰 세웠다. 흑의인들의 모습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었다. 그토록 집요하고 끈질기게 달라붙던 흑의인들은 아침 햇살에 부서지는 안개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진산월은 근처에 흐르는 작은 개울을 발견하고는 그곳으로 가서 피에 물든 얼굴과 팔을 씻었다. 수정(水晶)같이 맑기만 했던 개울물이 붉게 물들어 가는 모습이 유난히 시선을 끌었다.
몸을 대충 닦은 다음에야 진산월은 고개를 돌려 한곳을 바라보았다.

“이제 그만 나오는 게 어떻겠소?”

진산월의 음성이 아침 공기를 뚫고 조용히 주위에 울려 퍼졌다.
멀지 않은 바위 뒤에서 한 사람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 그 사람은 진산월과 시선이 마주치자 다소 의외인 듯 눈을 살짝 치켜떴다.

“놀라지 않는군. 전음을 날린 사람이 나라는 걸 알고 있었소?”

진산월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나타난 사람의 눈이 번쩍 빛났다.

“어떻게 알았소?”

“목소리로 확인을 했지.”

나타난 사람은 그제서야 알겠다는 듯 혀를 찼다.

“그렇군. 그래서 그때 이름을 물어 봤던 거로군?”

진산월은 부인하지 않았다.

“그곳에 있는 자들 중 목소리를 듣지 못한 사람은 당신들 세 명뿐이었소. 다른 사람들 중에 내가 찾는 음성의 주인이 없으니 당신들 세 사람 중에 있으리라고 생각했지.”

“그래서 내가 전음을 보낸 사람인 걸 알고는 일부러 내게는 살수를 쓰지 않은 거로군?”

진산월은 그 말에는 대답하지 않고 나타난 사람을 담담한 시선으로 쳐다보았다.

“이제 말해 주시오, 위관. 내 사매는 어디 있소?”

쌍극후 위관은 진산월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마주보더니 입가에 엷은 미소를 띠었다.

“그녀가 어디에 있는지는 이미 진 장문인도 알고 있지 않소?”

아마 다른 사람이었다면 위관이 자신을 놀리고 있다고 생각하고 화를 낼지도 몰랐다. 하나 진산월은 오히려 조용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그녀는 아직도 구궁보에 있군.”

“그렇고. 그곳 외에 그녀가 어디에 있을 수 있겠소?”

위관의 말 속에는 묘한 의미가 담겨 있었다.
진산월의 얼굴에는 별다른 표정이 떠올라 있지 않았다. 위관은 전혀 표정의 변화가 없는 그의 얼굴을 한동안 응시하고 있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대단한 정력(定力)이오. 그녀의 안위가 무척이나 궁금할 텐데도 묻지 않는 걸 보니 말이오.”

“그렇지 않아도 물어 볼 참이었소. 그녀는 잘 있소?”

“물론이오. 그녀가 구궁보에 있는 한 그녀의 신상(身上)에 무슨 일이 일어날 가능성은 없다고 보면 되오.”

“그런데 왜 그런 말을 했던 거요?”

“방금 말했지 않소? 그녀가 구궁보에 있는 한 별다른 일은 없을 거라고.”

진산월의 눈에서 처음으로 기광이 번뜩였다.

“그렇다면 그녀가 구궁보 밖으로 나온단 말이오?”

“그렇소. 그녀는 조만간에 구궁보를 나오게 되오. 그리고 특별한 이변이 없는 한 구궁보를 나온 지 한 달 안에 목숨을 잃고 말거요.”

진산월은 별달리 놀란 표정도 짓지 않았고, 당혹스러워하거나 충격을 받은 것 같지도 않았다. 오히려 개울 한쪽에 있는 바위로 가서 자연스럽게 앉았다. 그런 다음 두 손을 깍지 껴서 가볍게 기지개를 켜더니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자세하세 이야기해 보시오. 그녀는 무슨 일로 구궁보를 나오게 되며, 무엇 때문에 목숨을 잃게 된단 말이오?”

위관은 내심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진산월이 겉으로 드러난 모습과는 달리 내심으로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무표정해 보이는 얼굴이 조금 핼쑥해졌고, 깍지를 끼기 전의 두 손은 가늘게 떨리기조차 했었다. 그런데 짧은 순간에 평정을 되찾고 담담한 모습을 보이고 있으니 나이답지 않은 그의 침착함은 쉽게 찾아보기 힘든 것이었다.
위관은 자신도 진산월의 앞에 있는 바위로 가서 앉았다.

“그녀가 구궁보를 나오는 이유는 진 장문인 때문이오.”

“나 때문이라니?”

“그녀는 진 장문인을 만나기 위해서 구궁보를 나오려는 것이오.”

“……!”

“진 장문인이 실종되고 종남파가 멸문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그녀는 구궁보를 나와 종남파로 가려 했소. 하지만 사정이 여의치 않아 포기해야만 했지. 그런데 이번에 진 장문인이 다시 나타나고 종남파가 부활했다는 소식을 듣자 그녀는 마음을 굳히게 된 거요.”

위관은 그 말을 하면서 진산월의 표정을 세심하게 살폈으나 아쉽게도 별다른 점을 발견할 수 없었다. 진산월은 조용한 음성으로 물었다.

“그녀가 구궁보를 나온 후 한 달 안에 죽는다는 건 무슨 소리요?”

“그건 진 장문인이 직접 알아보도록 하시오.”

진산월은 위관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기껏 이런저런 이야기를 다 해주면서 정작 가장 중요한 것에 대해서는 왜 침묵을 지키려 한단 말인가?

진산월의 시선이 부담스러웠는지 위관은 한차례 어깨를 으쓱거렸다.
“아무리 나를 봐도 말할 수 없는 일은 말할 수 없는 법이오. 진 장문인이 정 알고 싶다면 그녀에게 직접 물어 보면 될 거 아니오?”

“그녀도 구궁보를 나오면 자신이 죽으리란 걸 알고 있단 말이오?”

“그렇소.”

진산월은 잠시 침묵을 지켰다. 잠시 장내에는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위관은 그런 침묵이 어색하지도 않은지 가만히 진산월을 응시한 채 입을 다물고 있었다. 마치 네가 언제까지 말을 안 하고 버티는지 지켜보겠다는 듯이.

마침내 진산월이 그를 향해 말문을 열었다.

“당신은 어떻게 그런 사실을 알고 있소?”

위관은 이미 그런 질문이 나오리라는 걸 알고 있었다는 듯 빠르게 대답했다.

“구궁보에 있는 누군가에게서 들었소.”

진산월은 다시 입을 다물었다.
이번에는 위관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내가 누구에게 들었는지 궁금하지 않소?”

“내가 물어도 밝히지 않을 생각 아니오?”

위관은 싱겁게 웃었다.

“잘 보았소. 역시 진 장문인과는 대화하기가 편하구려.”

그 뒤로 두 사람의 대화는 짤막한 질문과 대답의 연속이었다.

“내게 이런 말을 해주는 이유가 무엇이오?”

“다른 사람의 부탁을 받았소.”

“그가 누구인지도 말하지 않을 생각이오?”

“물론이오.”

“그 사람이 왜 당신에게 그런 부탁을 한 거요?”

“그 사람은 진 장문인만이 그녀를 살릴 수 있다고 판단했소. 그래서 진 장문인이 한시라도 빨리 진실(眞實)을 알기를 바랐던 거요.”

“무슨 진실 말이오?”

“이대로 있다가는 진 장문인의 사매가 반드시 죽는다는 진실 말이오.”

진산월은 잠시 침음하다가 물었다.

“내가 어떻게 해야 내 사매를 살릴 수 있단 말이오?”

“그건 나도 모르겠소. 다만 나는 그에게서 그렇게만 들었을 뿐이오.”

진산월은 위관과의 대화가 겉돌고 있다고 생각했다. 위관은 모든 사실을 다 말해 주는 것 같으면서도 정작 중요한 몇 가지 일은 밝히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말하지 않은 그 몇 가지가 모든 의혹의 시발점이기도 했다.
임영옥에게 무슨 일이 있기에 그녀는 한 달 안에 죽어야 한단 말인가? 그 사실을 알려 달라고 위관에게 부탁한 인물은 대체 누구란 말인가? 그리고 자신만이 임영옥을 살릴 수 있다는 이유는 무엇이란 말인가?

진산월이 머릿속에 끊임없이 떠오르는 이런저런 상념에 잠겨 있을 때 위관이 갑자기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내 그에게 내밀었다.

“받으시오.”

“이게 뭐요?”

“진 장문인의 사매가 진 장문인에게 전해 달라고 한 물건이오.”

진산월은 묵묵히 위관의 손에서 물건을 건네받았다.
그의 얼굴에 처음으로 어떤 표정이 떠올랐다. 그것은 무어라 형용키 어려운 묘한 표정이었다. 한없이 씁쓸한 것 같으면서도 달콤하고, 그리운 것 같으면서도 고통스러운 것이었다. 하나 그 표정은 나타날 때보다 더욱 빠르게 사라졌다.
그것은 머리를 묶을 때 쓰는 머리띠였다. 그 머리띠를 힐끗 보는 것만으로도 진산월은 그것이 임영옥의 것임을 알아보았다.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그 머리띠는 임영옥의 열여덟 번째 생일에 진산월 자신이 서안 일대의 시장을 뒤져 골라 낸 선물이었다.
그 머리띠에는 열여덟 살을 상징하는 열여덟 개의 장미 문양이 정교하게 새겨져 있었고, 한쪽 끝에 임영옥의 이름이 작게 수놓아져 있었다. 그 선물을 받았을 때 임영옥의 얼굴에 떠오른 미소를 진산월은 지금까지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아울러 수줍음과 기쁨이 가득 담긴 얼굴로 그녀가 속삭였던 말도 잊지 않고 있었다.

“언제까지고 간직하고 있을게요.”

그녀의 음성이 아직도 귓전에 들려오는 것 같았다.
그녀에 대한 온갖 추억이 담긴 머리띠가 자신에게 되돌아온 것이다. 평범한 머리띠 하나에 이토록 많은 감정이 느껴진다는 것은 불가사의한 일이었다.
진산월이 머리띠를 손에 쥔 채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자 위관이 헛기침을 한 후 입을 열었다.

“그녀는 다음에 만날 때 이것을 돌려달라고 했소.”

진산월은 천천히 머리띠를 펼쳤다.
열여덟 송이의 장미 문양이 조금씩 모습을 드러냈다. 머리띠는 몇 년 전의 그때와 전혀 달라진 것이 없었다. 장미 문양도 그대로였고, ‘영옥’이라고 조그맣게 새겨진 글씨도 그대로였다.
단지 ‘영옥’이라는 글자 위에 여인의 필체인 듯한 짤막한 문장이 새롭게 씌어져 있을 뿐이었다.

<월광천추(月光千秋). 달빛은 천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으리…….>

진산월은 한동안 가만히 그 머리띠에 적힌 글자를 내려 보고 있다가 머리띠를 다시 곱게 접어 품속에 집어넣었다.
그런 다음에야 비로소 위관을 향해 정중하게 포권을 하는 것이었다.

“사매의 부탁을 들어준 것에 감사드리오.”

위관은 고개를 저었다.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니었으니 신경 쓰지 마시오.”

“일이 어렵고 어렵지 않고는 중요한 게 아니오. 중요한 건 그 일에 어떤 의미가 담겨 있느냐 하는 것이오. 이번 일은 내게는 아주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소.”

위관은 새삼스런 눈으로 진산월을 쳐다보았다.

강호에 알려진 신검무적의 소문은 그가 무척이나 담대하고 냉정한 인물이라는 것이었다. 놀라운 그의 검법만큼이나 성격 또한 침착해서 좀처럼 희로애락(喜怒哀樂)을 알아보기 힘들다고 했다. 그래서 모두들 그를 상대하기 까다로운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직접 만나 본 신검무적은 과연 소문대로 가공스러운 검법과 냉정한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더구나 비쩍 마른 몸매에 칼자국이 나 있는 얼굴로 가차 없는 살수를 전개하는 모습은 냉혹스럽다는 느낌마저 불러일으켰다. 위관은 다소 심술스런 마음으로 그가 평정을 잃는 모습을 보고 싶어서 이리저리 찔러 보았으나 적어도 겉으로 드러난 바로는 신검무적에게서 어떤 흔들림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런데도 지금은 그가 왠지 차갑고 비정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아마도 그건 겉으로 드러난 냉정함과 달리 자신의 사매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마다 그의 눈빛이 너무도 부드러워지고 살짝살짝 드러나는 어떤 애잔함 때문일 것이다. 조금 전에도 말없이 사매의 머리띠를 만지고 있는 신검무적의 모습은 한없는 쓸쓸함과 그리움을 느끼게 했다.
그리고 생전 굽힐 것 같지 않은 그가 정중하게 포권을 하는 모습에서 그런 마음이 더욱 강하게 들었다.

신검무적은 소문만큼 냉정하기만 한 사람은 결코 아닐 것이다. 그도 남들과 똑같이 뜨거운 가슴을 가지고 있는 젊은이일 뿐이다. 다만 강호의 삶이 이 젊은이에게 냉정함과 비정(非情)을 강요하고 있는 것이다.
강호인(江湖人)이 되지 않았다면 이 젊은이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살고 있을 것이다. 아마 그 모습이야말로 진산월이란 사람에게 가장 어울리는 모습이 아닐까?

위관은 잠시 그런 생각이 들었다가 이내 속으로 피식 웃고 말았다.
현재 강호에서 가장 빠른 시간 내에 가장 혁혁한 명성을 날리고 있는 신검무적이 강호에 어울리지 않는다면 대체 누가 강호에 어울리는 인물이란 말인가? 다만 신검무적은 젊은이다운 감상(感傷)을 가지고 있을 뿐인데 내가 너무 지나치게 앞서 나가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아마 틀림없이 그럴 것이다.

위관은 이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진산월의 음성이 다시 들려왔다.

“위 대협은 구궁보의 인물이시오?”

위관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진산월을 응시했다.

“한번 맞혀 보시오.”

진산월은 잠시 침음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구궁보에 소속되어 있지는 않은 것 같구려.”

“왜 그렇게 생각하시오?”

“듣기로 구궁보의 인물들은 모두 모용 대협을 추종하는 사람들이어서 모용 대협과 모용 공자에게 절대적인 충성심을 가지고 있다고 했소. 또한 구궁보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해서 외부의 어떤 유혹에도 일절 흔들리지 않는다고 하더군. 그런데 위 대협은 구궁보에 대해 그다지 존경심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것 같았소.”

“모용 대협은 나도 존경하고 있소.”

“하지만 구궁보에 대해서는 조금 다르게 생각하는 게 아니오?”

위관의 얼굴에 떠올라 있는 미소가 살짝 일그러지며 쓴웃음처럼 변했다.

“진 장문인은 사람 목소리만 잘 판별하는 줄 알았더니 사람 마음도 잘 꿰뚫어 보는구려. 확실히 나는 구궁보에 탐탁지 않은 점이 몇 가지 있소.”

“어떤 점이 그렇소?”

위관은 피식 웃으며 돌려 말했다.

“원래 한곳에 오래 고여 있는 물은 썩기 마련이오. 그보다 구궁보가 아니라면 내가 어디에 속한 사람인 것 같소?”

진산월은 솔직히 말했다.

“모르겠소.”

“짐작이라도 해보시오.”

“정말 모르겠소.”

진산월이 깊게 생각하지도 않고 고개부터 내젓자 위관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거렸다.

“조그만 생각해 보면 알 수 있을 텐데 진 장문인은 아무래도 나에게 별다른 관심이 없는 모양이구려. 나는 흑갈방의 아홉 명 순찰(巡察) 중 하나요.”

“다른 자들도 흑갈방의 순찰들이오?”

“가릉과 양후일은 나와 같은 순찰들이고, 강씨 다섯 늙은이들은 호법(護法)을 맡고 있었소. 그들이 모두 죽었으니 흑갈방에는 이제 일곱 명의 순찰과 다섯 명의 호법들이 남은 셈이오.”

“그럼 위 대협의 진짜 신분은 무엇이오?”

진산월의 말에 위관은 허를 찔린 듯한 표정이었다. 사실 위관이 흑갈방에 소속되어 있으리라는 것은 진산월도 충분히 짐작하고 있는 일이었다. 문제는 그것이 그의 진실한 신분은 아닐 거라는 점이었다.

위관은 잠시 망설이다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진 장문인은 혹시 ‘성휘만천(星煇萬千) 능조천하(能照天下)’라는 말을 들어 본 적이오?”

진산월은 눈을 빛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오. ‘별들이 온 세상을 밝히고 있으니 비추지 못하는 곳이 없다…….’ 그건 바로 천하제일의 신비인인 번신봉황 이 대협이 거느리고 있는 성숙해(星宿海)를 가리키는 말 아니오?”

“그렇소. 나는 성숙해의 십이비성(十二飛星) 중 백양좌(白羊座)를 맡고 있소.”

성숙해는 이북해가 만든 무림 최고의 정보 조직이었다. 성숙해의 총 인원이 얼마나 되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으나, 그들의 손길이 미치지 못하는 곳은 천하의 어디에도 없다는 것은 누구나가 알고 있었다.
성숙해의 조직 구성도 철저한 비밀에 가려져 있었다. 무림인들이 알고 있는 것이라고는 성숙해가 크게 십이비성과 이십팔숙(二十八宿)으로 나뉘어져 있으며, 그중 이십팔숙은 이북해의 아들인 산수재 이정문이 거느리고 있고, 십이비성은 이북해의 직접적인 지시를 받는다는 것 정도였다.
십이비성, 달리 십이성좌(十二星座)라고도 불렀다. 그들 열두 명이야말로 이북해의 충실한 심복들이며 성숙해를 실질적으로 움직이고 있는 실세들이었다.

강호에 소문만 무성한 십이비성 중 한 사람을 드디어 눈앞에서 직접 만나게 된 것이다.
위관의 강호에서의 위치를 생각해 볼 때 그가 십이비성 중 한 사람이라는 것은 누구도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위관이 비록 산서 일대에서 나름대로 알려진 고수라 해도 강호 전체에 퍼진 십이비성의 위명과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더구나 흑도 방파로 알려진 흑갈방의 일개 순찰이 되었다는 것은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었다. 대체 그가 스스로의 신분을 낮추고 무림인들이 경멸하는 흑도 방파인 흑갈방에 들어간 이유가 무엇일까?

위관은 그 이유를 설명해 주었다.

“흑갈방은 서장무림과 밀접한 관련이 있소. 아니, 사실을 말하자면 그들의 수뇌부는 모두 서장 사람들이니 서장무림이 만든 세력이라고 하는 게 더 정확할 거요.”

흑갈방이 서장무림과 끈이 닿아 있다는 것은 진산월도 어느 정도는 예상하고 있는 일이었다. 하나 수뇌부가 모두 서장 사람이라는 말은 그로서도 처음 듣는 것이었다.

“흑백쌍사가 서장의 고수들이란 말이오?”

“흑백쌍사뿐 아니라 흑갈방의 수석호법인 혼천마군(混天魔君), 총순찰인 무영천자(無影天子), 그리고 네 명의 봉공(奉公)들도 모두 서장의 인물들이오. 그들 중 상당수가 십육사(十六邪)에 속한 인물들이고 십이기(十二奇)도 몇 명 있소.”

십육사와 십이기라면 서장무림에서도 최고 수준의 고수들이었다. 그들이 정체를 감춘 채 중원의 방파를 장악하고 있다는 것이 알려진다면 무림은 커다란 충격에 빠질 것이다.

“흑갈방이 단시일 내에 강북무림 제일의 흑도 방파로 올라선 것도 그들이 뒤에 있기 때문이오.”

“위 대협은 그 사실을 알고 흑갈방에 잠입한 거요?”

위관의 얼굴에 한 줄기 차가운 미소가 떠올랐다.

“서장무림을 감시하는 것은 성숙해의 가장 큰 임무 중 하나요. 우리는 몇 년 전부터 서장무림의 움직임에 수상함을 느끼고 그들에게 포섭될 가능성이 있는 강호의 세력들을 예의 주시하고 있었소. 그러다 흑갈방에서 이상한 낌새가 있음을 알아차리게 된 거요.”

“흑백쌍사도 십육사의 인물들이오?”

“그들은 비록 십육사나 십이기에 속해 있지는 앉지만 어떤 면에서는 더욱 중요한 인물들이오.”

위관의 얼굴에 한 줄기 심각한 빛이 떠올랐다.

“흑의사신의 이름은 위태심이라 하고, 화면신사는 백석기란 자요. 진 장문인은 혹시 이들의 이름을 들어 본 적이 있소?”

진산월은 물론 들어 본 적이 있었다.
위태심과 백석기는 바로 서장의 제일기인이었던 천애치수 단목초의 제자들이 아닌가?
원래 단목초에게는 네 명의 제자들이 있었다. 감종간, 위태심, 백석기, 상관욱이 그들이었다.
삼년 전, 상관욱은 이정문의 손에 살해되었고, 감종간은 이정문의 꼬임에 넘어가 사부인 단목초를 제거하는 데 앞장섰다. 단목초가 쓰러진 후 감종간은 종적을 감추었고, 단목초의 제자들인 위태심과 백석기 또한 그 뒤로 행적이 묘연해져서 그들의 소식을 아는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그들이 중원으로 들어와 흑갈방의 방주와 부방주가 되어 있다니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동안 흑갈방의 방주인 흑백쌍사에 대해서는 강호에서 여러 가지 소문이 많이 나돌았다. 하나 누구도 그들의 진실한 정체를 알지 못했다.
성숙해에서는 그들의 정체를 파악하기 위해 골몰했으나 워낙 그들의 행적이 신비하고 사람들 앞에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기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심지어 흑갈방의 순찰로 발탁된 위관조차도 흑백쌍사의 정체는 알 수가 없었다. 흑갈방의 최고 수뇌들 몇몇을 제외하고는 누구도 흑백쌍사의 정확한 신분을 알지 못했다. 위관이 흑갈방에 들어온 이후 흑백쌍사를 멀리서나마 본 것도 서너 번에 불과했다. 그리고 그때마다 흑백쌍사는 금색과 은색의 면구를 쓰고 있어서 얼굴조차 볼 수 없었다.
그러다 진산월 일행이 종남산을 떠날 때부터 흑갈방 내의 움직임이 분주해졌다. 특히 진산월을 제거하기 위해 흑백쌍사 본인들이 직접 전면에 나서자 성숙해로서는 반색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의 실체를 파악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찾아온 것을 알아차린 것이다. 성숙해는 흑백쌍사의 정확한 신분을 알 수 있는 모처럼의 기회를 절대로 놓칠 수가 없었다.
진산월도 그 점에 대해서는 별로 서운한 생각이 없었다. 애초부터 그는 성숙해에 대해 별다른 호감도, 불만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성숙해 같은 조직이 사안(司案)에 따라 얼마나 사람을 쉽게 기만하고 이용할 수 있는지는 이미 뼈저린 경험으로 알고 있을 터였다. 성숙해에 대해 애초부터 기대하는 마음도 없으니 실망할 것도 없었다.
하나 위관은 나름대로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는지 묻지도 않았는데 계속 말을 이었다.

“그들이 진 장문인을 노리고 있는 것은 알았지만, 진 장문인에게 사전에 알리지 못했던 것은 그들의 정체를 보다 확실하게 파악하기 위해서였소. 내가 흑백쌍사의 정체를 파악한 것은 이번 일이 일어난 다음이었소.”

“…….”

“그래도 우리 나름대로는 진 장문인을 돕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했소. 원래 위태심이 고안한 십방금쇄진은 진 장문인이 겪은 것보다 몇 배나 더 삼엄한 것이었소. 하나 한쪽 방향에 투입되기로 했던 인원들을 우리가 다른 곳으로 유인한 탓에 그 위력이 많이 반감되어 버렸소.”

“그래서 동쪽 방향의 방어진이 유난히 얇았던 거로군.”

“그렇소. 원래는 그곳이 가장 무서운 공격로였소. 위태심이 당초 구상한 대로라면 진 장문인의 힘이 소진되었을 때 최종적으로 그쪽 방향으로 이백 명 이상이 투입되기로 되어 있었소.”

만일 위관의 말대로였다면 진산월은 훨씬 더 위험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을지도 몰랐다.

“그런데 어떻게 그들을 유인할 수 있었소?”

위관은 진산월이 자신들의 노고를 알아주었다고 생각했는지 안색이 한결 가벼워졌다.

“위태심의 필체를 위조해서 가짜 명령서를 만들었소.”

“대단하군.”

“대단한 건 진 장문인이오. 비록 우리가 최종 투입될 자들을 다른 곳으로 유인했다고 해도 진 장문인이 별다른 부상도 입지 않고 십방금쇄진을 뚫고 나올 줄은 몰랐소. 모르긴 해도 위태심도 크게 당황했을 거요.”

진산월은 성숙해가 자신을 이용한 것에 대해서는 더 이상 거론하기가 싫었다. 비록 그들의 행동을 이해한다고 해도 그다지 유쾌한 일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래서 재빨리 화제를 바꾸었다.

“흑백쌍사의 정체를 알았으니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이오?”

“사실 위태심과 백석기는 결코 호락호락한 인물들이 아니오. 그들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소?”

“그들이 단목초의 둘째와 셋째 제자라는 것 정도요.”

“삼년 전에 야율척이 서장무림을 이끌고 중원으로 왔을 때 백석기는 자금과 물자를 조달하는 일을 맡아서 완벽하게 처리했소. 하지만 그의 진짜 장점은 그가 천하제일의 미남자(美男子)라는 것이오. 듣기로는 아직까지 그가 유혹해서 넘어오지 않은 여자가 없다고 하더군. 게다가 남자들도 반할 정도여서 심지어는 그를 직접 만나 본 사람들 중에는 그를 요물(妖物)이라고 부르는 자들도 적지 않소.”

진산월은 화면신사가 천하제일의 미남자라는 말을 듣자 은빛 면구를 벗겨 그의 진면목을 확인하지 않은 것이 왠지 아쉽게 생각되었다.
자신이 아는 최고의 미남자는 사제인 낙일방이었다. 하나 낙일방이 여자들을 자기 마음먹은 대로 유혹할 수 있다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그러니 대체 얼마나 뛰어난 미남이기에 세상의 모든 여자들을 유혹하는 건 물론이고 같은 남자들마저 반하게 할 수 있는지 호기심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더욱 경계해야 할 자는 위태심이오. 위태심은 당시에 단목초를 대신해 거의 모든 작전을 입안(立案)한 인물이오. 한마디로 그는 작전(作戰)의 천재(天才)이고, 계략을 꾸미는 일에는 오히려 단목초보다 뛰어나다고 알려져 있소.”

단목초는 대제자인 감종간의 손에 살해되기 전만 해도 서장 역사상 가장 탁월한 지략가로 알려져 있었다. 그런 단목초보다 뛰어나다고 하니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위태심은 이번에 진 장문인을 제거하는 일에 실패한 것에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을 거요. 하나 그가 이대로 물러날 리는 없으니 진 장문인은 앞으로 행보에 더욱 신중을 기해야 할 거요.”

“그들이 왜 그토록 집요하게 나를 노리는지 알고 있소?”

“정확한 건 모르오. 하지만 내 짐작에는 서안에서 진 장문인의 손에 멸망한 초가보와 관련이 있지 않나 싶소.”

그런 예측은 진산월도 진작부터 하고 있었다. 진산월이 알고 싶었던 것은 그 안에 얽힌 보다 자세한 내막이었다. 진산월은 위관이 더 자세한 내용을 알고 있으면서도 말을 하지 않는 것인지, 아니면 진짜로 잘 모르고 있는 것인지 쉽사리 판단할 수가 없었다.

어찌되었건 위태심이 자신을 계속 노리고 있다면 언젠가는 보다 자세한 내용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진산월은 문득 생각이 난 듯 물었다.

“양중초 일행은 어떻게 되었는지 아시오?”

위관은 고개를 저었다.

“위태심이 양중초 일행에게 무언가 수작을 부린 건 알고 있지만, 위태심이 그 일을 다른 자에게 맡겼기 때문에 정확하게 알 수가 없었소.”

“그자가 누구요?”

“잠사(潛邪) 교등(喬騰)이란 자요.”

“교등?”

진산월의 처음 듣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리자 위관이 그에 대한 설명을 덧붙였다.

“진 장문인은 잘 모르겠지만, 서장 쪽에서는 무척이나 대단한 명성을 날리는 자요. 심계가 깊고 일처리가 확실해서 위태심의 신임이 대단하오.”

“그자도 십육사에 속해 있소?”

“교등은 십이기 중의 한 명이오.”

진산월은 십이기가 십육사보다도 배분이 높은 인물들임을 알고 있기 때문에 약간은 의아해졌다.

“그렇다면 나이가 적지 않을 텐데 위태심의 지시를 받는단 말이오?”

“서장무림에서의 위태심의 지위는 무척 특이하오. 삼년 전에 단목초를 대신하여 실질적인 군사(軍師)의 역할을 한 이후 그는 배분에 상관없이 서장무림에서 야율척 다음으로 중요한 인물이 되었소. 단목초가 없는 지금, 그는 명실상부한 서장무림의 이인자요.”

진산월은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다시 물었다.

“야율척은 지금 어디에 있소?”

위관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사실은 그의 행방이야말로 현재 성숙해의 최대 현안(懸案)이라 할 수 있소. 삼년 전에 모용 공자와의 일전(一戰) 이후 그의 모습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소. 마치 바람 속으로 사라진 향기처럼 모습을 감추어 버려 많은 사람들이 당혹해하고 있소.”

진산월은 야율척의 행방에 대해 호기심이 일었으나 크게 관심이 가지는 않았다. 그의 행방보다는 자신의 사제들과 종남파 고수들의 안위가 더욱 시급했기 때문이다.

자신이 그런 일을 당했는데 뒤에 남아 있는 종남파의 제자들에게 아무 일도 없으리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었다. 특히 혼자 두고 온 동중산이 유독 걱정이 되었다.

제자들에 대한 생각을 하자 진산월은 갑자기 마음이 급해져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 도움을 준 것에 감사드리오. 다음에 다시 만나게 되길 기대하겠소.”

진산월이 인사를 하고 떠나려 하자 위관이 급히 그를 제지했다.

“잠시만 기다리시오.”

위관은 진산월이 의아한 얼굴로 자신을 쳐다보자 얼굴에 엷은 미소를 지었다.

“진 장문인이 급히 떠나려는 것은 종남파의 제자들 때문이 아니오?”

“그렇소.”

“그렇다면 조금만 더 기다려 주시오.”

진산월이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했다. 그때 위관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이내 반색을 했다.

“마침 저기 오는군.”

위관이 말한 곳으로 시선을 돌리던 진산월의 얼굴이 밝아졌다.

언덕 저편에서 세 사람이 빠른 속도로 달려오고 있었다. 그들 중 가운데 인영은 다른 아닌 동중산이 아닌가?

단숨에 진산월의 앞까지 도착한 동중산은 진산월의 전신이 피로 범벅이 되어 있는 것을 보고는 깜짝 놀라서 그의 몸을 훑어보다가 별다른 부상이 없는 것을 알고는 안도의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장문인, 불편한 곳은 없으십니까?”

진산월 또한 걱정했던 동중산의 무사한 모습을 보자 한시름을 던 기분이었다.

“나는 괜찮다. 그런데 어찌된 일이냐?”

동중산은 사정을 설명해 주었다.

진산월이 촌장의 집을 떠난 후 동중산은 시체로 분장해 있던 철혈쌍응의 손에 사로잡히는 신세가 되었다. 무공이 약했던 그로서는 서장 십육사에 속하는 두 명의 절정고수들에게 대항해 볼 엄두조차 내지 못했던 것이다.

철혈쌍응은 동중산을 흑갈방의 수하들에게 인계하고 떠나 버렸다. 동중산이 흑갈방 수하들의 손에 끌려 갈 때 두 명의 고수들이 나타나 흑갈방도들을 쓰러뜨리고 동중산을 구출한 것이다.

진산월은 동중산과 함께 나타난 두 명의 인물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들은 청의를 입은 삼십대 중반의 중년인들이었는데, 안광이 잘 갈무리되어 있고 태양혈이 튀어나와 있는 것으로 보아 내외공(內外功)을 겸비한 고수들임을 알 수 있었다.

“본파의 제자를 구해 준 것에 감사드리오. 나는 진산월이라 하오.”

청의중년인들은 서로 마주보더니 그들 중 조금 더 나이가 들어 보이는 중년인이 포권을 했다.

“별말씀을. 우리는 좌장(座長)님의 지시를 따랐을 뿐이니 진 장문인의 인사를 받을 수 없소. 나는 광곤(匡鯤)이라 하고, 이쪽은 내 동생인 광표(匡彪)요.”

진산월은 그들 형제의 이름을 들은 적이 없었으나, 그들이 위관의 수하들임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성숙해의 십이비성들은 각기 일좌(一座)의 우두머리이며, 자신들만의 수하들을 거느리고 있었다. 그들의 정확한 숫자와 정체는 성숙해의 주인인 이북해도 모르고 오직 해당 좌(座)를 이끌고 있는 십이비성만이 알고 있을 뿐이었다.

점조직을 연상케 하는 이러한 독특한 조직 체계가 성숙해를 강호 제일의 정보 조직으로 성장시킨 원동력이었다. 이북해는 십이비성에게 지시만 할 뿐이고, 실제로 어떤 식으로 활동을 할지는 전적으로 십이비성 스스로가 결정하는 것이다.

이런 방식은 십이비성의 자율성을 최대한 보장하는 동시에 어떠한 상황 변화에도 능동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이점이 있었다.

반면에 하부 조직에 대한 이북해의 영향력이 떨어질 가능성도 있으나, 십이비성이 워낙 이북해에게 절대적인 충성을 바치고 있기 때문에 조직에 대한 이북해의 지배력은 확고한 것이었다.

진산월이 무어라고 입을 열기도 전에 위관이 먼저 선수를 쳤다.

“함정이 있음을 알면서도 미리 진 장문인에게 말하지 않은 것에 대한 사례라고 생각해 주시오. 아무튼 일이 원만히 해결되어 다행이오.”

이어 위관은 광씨형제들과 나직하게 대화를 주고받더니 다시 진산월에게로 다가왔다.

“이들의 말을 들으니 흑갈방의 무리들이 남동쪽으로 이동했다고 하오. 나도 더 늦기 전에 그곳으로 가야 할 것 같소.”

그는 가볍게 인사를 한 후 몸을 돌리려다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다시 입을 열었다.

“혹시 양중초 일행을 찾을 의향이 있으면 천하현(天河縣) 쪽으로 가 보시오.”

“그건 왜 그렇소?”

“교등의 모습이 제일 마지막으로 나타난 곳이 천하현이오. 양중초 일행이 교등의 마수(魔手)에 빠졌다면 그곳으로 유인되었을 확률이 가장 높소.”

“알겠소.”

“그럼 우리는 이만 가보겠소.”

위관은 광씨형제들과 함께 빠른 속도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진산월이 멀어져 가는 그들의 뒷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을 때 동중산이 다가왔다.

“저 사람이 십이비성입니까?”

“그렇다. 백양좌를 맡고 있다고 하더군.”

“겉으로 보아서는 그렇게 대단한 사람 같지가 않습니다.”

“외모로 사람을 판단할 수는 없는 법이지.”

동중산은 외눈을 반짝이고 있다가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성숙해가 이번 일에 깊이 관여했을 줄은 몰랐습니다. 그들이 우리를 도와준 것이 잘된 일인지 아닌지 판단이 서지 않는군요.”

“왜 그렇게 생각하느냐?”

“그들의 도움으로 당장의 위험은 벗어날 수 있었으나, 앞으로 상대는 더욱 집요하고 치밀하게 우리를 노릴 겁니다. 그때마다 성숙해의 도움을 기다릴 수도 없고, 설사 그들이 도와준다고 할지라도 어떤 식으로든 대가를 치러야 할 테니 쉽지 않은 일입니다.”

“……!”

“게다가 제가 듣기로 성숙해는 가까이하기에는 너무 위험한 조직이라고 하더군요.”

진산월은 침음하고 있다가 담담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들은 그들대로 정도(正道)를 걷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우리 나름의 길을 걷듯이 말이다.”

“그렇겠지요. 하지만 그들에게 정도인 길이 우리에게도 정도라는 법은 없지 않습니까?”

진산월은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 정도와 사도(邪道)는 한걸음 차이다. 첫 걸음을 어느 쪽으로 내딛느냐에 따라 정도가 될 수도 있고 사도가 될 수도 있지. 그들과 우리 사이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동중산은 진산월의 말 속에 담긴 의미를 생각하고 있다가 밝게 웃었다.

“그렇다면 그들과 우리 사이의 관계는 정도를 걷는 셈이로군요. 그들과의 첫 만남이 그리 나쁘지 않았으니 말입니다.”

진산월은 아무 대꾸 없이 한동안 가만히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러다 혼잣말처럼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오늘 일만 따지면 그렇겠지. 그런데 그들과의 만남은 이미 삼 년 전에 시작했고, 그것은 결코 좋은 만남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게 문제지.”

  • * *

마차 바퀴는 끝없이 이어졌다.

“이 망할 놈의 자국은 어디까지 계속 이어지는 거야?”

손풍은 자신도 모르게 투덜거리다가 맹천익의 표정이 좋지 않은 것을 보고는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그들이 운룡신차를 보관했던 창고에서 마차 바퀴를 따라 움직이기 시작한 지도 벌써 두 시진이 넘었다. 그동안 건량으로 간단하게 식사를 하기도 했고, 두 번쯤 짧은 휴식을 취하기도 했다. 그런데도 마차 바퀴는 계속 이어지고 있었고, 양중초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그동안 걸어온 거리만도 오십 리는 족히 되었으니, 손풍같이 성질이 급한 사람이 아니더라도 갑갑함을 견디기 힘들었을 것이다. 우연인지 아니면 의도된 것인지 마차 바퀴는 인적이 없는 길만을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적지 않은 시간을 따라왔는데도 아직 마을 하나 발견하지 못했다.

맹천익은 양중초에 대한 걱정 때문에 안색이 수시로 변한 채 불안한 표정을 숨기지 못하고 있었다.

전흠이 가장 앞에서 걷고 있는 낙일방의 곁으로 다가왔다.

“언제까지 따라갈 셈이냐? 이러다 장문사형을 찾기란 갈수록 요원해질 게 아니겠느냐?”

낙일방은 의외로 별로 걱정하는 표정이 아니었다.

“오늘 하루 정도는 투자할 생각입니다.”

뜻밖의 말에 전흠이 어이가 없다는 듯 낙일방을 쳐다보았다. 낙일방의 준수한 얼굴에 박혀 있는 두 개의 눈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별빛처럼 반짝거리고 있어 그가 결코 정신이 나가거나 엉뚱한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님을 알게 했다.

“정말이냐?”

낙일방은 손으로 마차 바퀴 자국을 가리켰다.

“보십시오. 이곳은 땅이 무르지도 않고 풀이 나 있지도 않습니다. 그런데도 마차 바퀴가 선명하게 보이고 있지 않습니까?”

전흠은 낙일방이 가리킨 자국을 유심히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운룡신차가 비록 상당히 무거운 마차이긴 하지만 이렇게 계속 흔적을 남기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바퀴 자국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는 건…….”

그제서야 전흠이 그의 말을 알아차린 듯 눈을 번쩍 빛냈다.

“누군가가 일부러 흔적을 남겨 우리를 유인하고 있다는 말이냐?”

“그렇습니다.”

“그런데도 마차 바퀴를 따라가야 한단 말이냐?”

낙일방은 하얀 이를 살짝 드러내며 웃었다.

“누군가가 우리를 유인한다는 건 그만한 목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유인당하지 않는다고 포기하겠습니까? 필시 다른 방법을 쓰겠지요.”

“……!”

“상대가 어떤 방법을 써 올지 몰라 고민하느니 이렇게 알면서 넘어가 주는 것이 훨씬 더 편하지 않겠습니까?”

전흠은 한동안 낙일방을 가만히 응시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옳은 말이다.”

“아마 양 대협도 우리와 같은 생각으로 추적을 중지하지 않은 채 계속 바퀴 자국을 쫓아간 것일 겁니다. 엄밀히 말하면 이 바퀴 자국은 양 대협 자신을 노리고 남겨진 것이니 말입니다.”

“하지만 장문사형은…….”

“장문사형이 무사하시다면 우리를 찾아오실 겁니다. 바퀴 자국을 따라오시든, 아니면 그자들의 뒤를 추적해 오시든 말입니다.”

“그자들이라니……?”

“장문사형을 유인한 자들과 이 바퀴 자국을 남긴 자들은 같은 굴 속의 여우들입니다. 어느 한쪽을 쫓아가든 결국에는 만나게 되어 있습니다.”

낙일방의 자신에 찬 말에 전흠은 새삼스런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종남파를 떠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낙일방은 하루가 다르게 새로운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전흠은 예전의 낙일방이 어떤 성격이었는지 알지 못했기 때문에 낙일방에게 감탄하기는 했으나 놀라지는 않았다.

하나 예전의 낙일방이 얼마나 경솔하고 철없는 성격이었는지 아는 사람이라면 낙일방의 변화된 모습에 경악을 금치 못할 것이다.

자신의 무공에 자신감을 가지게 되면서 낙일방은 육체적인 것은 물론이고 정신적으로도 부쩍 성장하고 있었다. 원래부터 두뇌가 명석하고 눈치가 빨랐던 낙일방은 그동안의 조급했던 성격이 사라지면서 당당하면서도 침착한 면모를 보여 주고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혼자 강호를 떠돌면서 쌓아온 다채로운 경험들이 튼튼한 밑바탕이 되어 이제 비로소 조금씩 결실을 맺고 있는 것이다.

“다만 걱정스러운 건 아직 무공을 모르는 두 사질이 체력이 바닥나서 뒤처지지 않을까 하는 점입니다.”

낙일방의 말에 전흠은 손풍과 유소응을 차례로 돌아보았다.

아닌 게 아니라 손풍은 벌써부터 비 오듯 땀을 흘리며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반면에 나이 어린 유소응은 의외로 별로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아 다부진 일면을 여실히 보여 주고 있었다. 어려서부터 몽고의 대초원에서 자란 유소응에게는 이 정도 거리는 산책하는 수준밖에 되지 않았다. 단순히 걷거나 뛰는 정도라면 이삼 일을 달려도 견딜 수 있는 것이 유소응이었다.

두 사람을 살펴본 전흠이 혀를 찼다.

“소응은 몰라도 저놈은 오래 버티지 못하겠군. 사내놈이 한창 젊은 나이에 저렇게 허약해서야……”

이 말을 들었는지 손풍이 얼굴을 붉게 물들이며 씩씩하게 앞으로 걸어 나갔다. 하나 얼마 지나지 않아 조금 전보다 한층 더 기진맥진한 모습으로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손풍으로서도 나름대로 할 말은 있었다. 손의 부상 때문에 배에서도 며칠째 제대로 잠을 자지 못했으며, 배에서 내린 후에도 어젯밤을 꼬박 새우다시피 했으니 몸 상태가 정상일 리 없었다.

그런데다 비록 걷고 있다고는 해도 낙일방 등은 무공을 익힌 고수들이라 걷는 속도가 일반인들과 비교할 바 없이 빨라서 거의 뛰는 것과 비슷했다. 그러니 아무리 손풍이 일반인치고는 강한 체력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지칠 수밖에 없었다.

손풍은 멀쩡한 얼굴로 열심히 걷고 있는 유소응을 째려보았다.

‘내가 문제가 아니라 저 꼬마가 정상이 아닌 거지. 저게 무공도 모르는 꼬마 녀석의 체력이란 말이냐? 꼬마면 꼬마다워야 귀여운 맛이라도 있지.’

손풍은 한 번 더 쉬었으면 하는 표정으로 낙일방을 쳐다보았으나, 낙일방은 그럴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런데 갑자기 낙일방의 몸이 거짓말처럼 멈춰졌다.

손풍은 역시 낙 사숙이 최고라고 속으로 소리치며 그 자리에 주저앉으려 했다.
그런데 낙일방뿐 아니라 전흠과 맹천익도 걸음을 멈추더니 세 사람의 시선이 일제히 어느 한 곳을 향해 움직였다.
손풍도 그들의 시선이 향한 곳을 바라보았다.
두 개의 바퀴 자국이 선명하게 나 있는 길 한복판에 거무스름한 자국이 있었다.
처음에는 먹물이라도 쏟은 자국인 줄 알았으나, 이내 손풍은 그것이 피가 말라붙은 흔적임을 알 수 있었다.
그 핏자국의 크기로 보아 누군가가 한 사발의 피를 토한 것이 분명했다.
낙일방은 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은 채 그 핏자국을 만져 보더니 안색이 심각하게 굳어졌다.

“피가 아직 완전히 굳지 않았습니다. 반 시진 이전에 만들어진 것입니다.”

맹천익의 표정은 침울하다 못해 처참할 지경이었다. 그는 당장이라도 앞으로 달려 나갈 듯하더니 무거운 표정으로 낙일방을 돌아보았다.

“아무래도 쫓아가는 속도를 올려야 할 것 같습니다. 삼숙께서 무슨 일을 당하셨을지 모르는데 이렇게 유유자적하게 움직일 수는 없습니다.”

손풍은 비명이라도 내지르고 싶었다.

‘유유자적이라니…… 네놈은 날 보고도 그런 말이 나온단 말이냐?’

하나 맹천익의 표정이 워낙 무거운지라 손풍은 감히 무어라고 입을 열지 못했다.
낙일방은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더니 마음을 굳힌 듯 전흠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전 사형께서는 손풍과 소응을 데리고 천천히 오십시오. 저는 맹 소협과 함께 먼저 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전흠의 짙은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다.

“내가 갈 테니 네가 저놈들을 데리고 와라.”

“이 일대는 제가 예전에 다녀간 적이 있어서 그나마 어느 정도는 길을 압니다. 전 사형께선 아직 중원의 지리에 익숙지 않으시니 제가 가는 게 나을 듯싶군요.”

낙일방의 조리 있는 말에 전흠은 차마 반박할 수가 없었다.

“어쩔 수 없구나. 만약 바퀴 자국이 아닌 다른 곳으로 가게 된다면 길가에 표식을 남기도록 해라.”

“그렇게 하지요.”

낙일방이 몸을 일으키자 이미 마음이 급했던 맹천익이 먼저 신형을 날렸다. 낙일방도 그의 뒤를 바짝 따라가며 전흠을 향해 전음을 날렸다.

“이 근처에서 가장 가까운 마을은 천하현입니다. 동쪽으로 이십여 리만 더 가면 천하현이니 혹시라도 저를 찾지 못하시면 천하현으로 가십시오. 그곳에서 가장 큰 주루에 가 계시면 제가 찾아가겠습니다.”

전흠이 무어라고 대꾸할 사이도 없이 두 사람의 신형은 길 저편으로 멀어져 갔다.
손풍은 그들의 질풍 같은 모습에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정말 무섭게 빠르구나. 낙 사숙이야 그렇다 치고 저 맹가 놈의 신법도 보통이 아닌데?”

전흠이 그 말을 들었는지 못마땅한 눈으로 그를 쏘아보았다.

“남들은 네 나이에 저런 무공을 익혔는데 너는 그동안 무엇을 한 거냐? 쓸데없는 파락호 짓을 하느라 좋은 시절을 다 보냈겠지?”

손풍은 찔끔하여 고개를 떨구었다.
전흠의 심기가 사나운 이때 공연히 말이라도 잘못 꺼냈다가는 호된 꼴을 당할 게 뻔했는지라 절로 어깨가 움츠러든 것이다.

‘제길, 내가 이게 무슨 꼴이람?’

손풍이 종남파에서 제일 상대하기 껄끄러워하는 사람이 전흠이었다.
나이는 자기보다 서너 살 많은 정도에 불과했지만, 성격이 거칠고 사나워서 다른 사람들처럼 함부로 대할 수가 없었다.
특히 화가 났을 때 눈빛이 살벌하게 번뜩이는 것을 보면 이러다 그냥 칼부림 당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들 때가 여러 번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 종남파를 내려온 후로는 전흠과 자주 얽히게 되어서 손풍으로서는 매순간이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이었다.

때마침 유소응이 전흠을 향해 입을 열었다.

“전 사숙, 조금 쉬었다 가면 안 될까요?”

전흠은 손풍을 쏘아볼 때와는 달리 한결 부드러워진 눈으로 유소응을 돌아보았다.

“피곤해서 그러느냐?”

“그것도 그렇고, 소피도 급합니다.”

“알았다. 잠시만 쉬었다 가도록 하자.”

전흠이 승낙을 하자 유소응은 길 한 편으로 달려갔다. 손풍은 이때다 싶어 재빨리 근처의 풀 위에 주저앉았다.

“어이구, 살겠다!”

손풍은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터뜨리고는 제풀에 놀라 전흠을 힐끔 쳐다보았다.
전흠의 얼굴에 못마땅한 표정이 떠올랐으나 무어라고 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두 다리를 쭉 뻗고 앉아 있는 손풍에게로 다가오더니 퉁명스런 음성을 내뱉었다.

“손을 내밀어 봐라.”

“예?”

손풍이 엉겁결에 왼손을 앞으로 내밀자 전흠이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그쪽 말고 일전에 다친 손 말이다.”

“아, 예.”

손풍은 쭈뼛거리며 아직도 붕대를 감고 있는 오른손을 조심스레 내밀었다.
전흠은 그의 손을 이리저리 만져 보더니 특유의 카랑카랑한 음성으로 말했다.

“뼈는 대충 아문 것 같군. 너는 네 몸뚱어리에 고마워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런 상처를 입고도 이렇게 쉽게 낫는 것이 쉬운 일인 줄 아느냐?”

손풍은 이자가 또 무슨 트집을 잡으려고 이러나 싶어 시큰둥한 어조로 대답했다.

“그거야…… 몸뚱어리 단단한 게 저의 큰 밑천 중 하나죠. 솔직히 이 정도 다친 건 다친 것도 아닙니다. 일전에는 술을 진탕 마시고 말을 탔다가 떨어져서 옆구리가…….”

“몸뚱어리가 중요한 걸 알면 소중하게 다뤄라. 지금처럼 함부로 굴리다가는 언젠가 크게 후회할 날이 있을 거다.”

“글쎄 제 몸뚱이는 워낙 튼튼해서…….”

손풍이 계속 말에 토를 달자 전흠이 버럭 노성을 질렀다.

“바보 같은 놈! 누가 네놈이 걱정돼서 그러는 줄 아느냐? 네놈 때문에 다른 사람이 유형무형의 피해를 입고 있다는 걸 모르느냐? 그 나이를 처먹었으면 적어도 남에게 짐이 되지는 않아야 할 게 아니냐?”

느닷없는 호통에 손풍의 어깨가 절로 처졌다. 하나 마음 한구석에는 반발심도 일어났다.

‘제길, 내가 무슨 피해를 줬다고 이렇게 닦달을 한단 말인가? 내가 이런 괄시까지 받아 가며 꼭 종남파에 머물러 있어야 한단 말인가?’

성질 같아서는 종남파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서안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하나 두 눈을 무시무시하게 번들거리며 자신을 노려보는 전흠의 험악한 얼굴을 보자 막 나오려던 욕설이 목구멍 속으로 쑥 들어가고 말았다.
여기서 말 한마디 잘못했다가는 주먹으로 몇 대 맞는 것에 그치지 않을 게 분명했다.
손풍은 마음이 넓은 자기가 참기로 했다.

‘아무튼 남쪽으로 내려갈수록 성질이 더럽다고 하더니 그 말이 딱 맞군. 게다가 이놈은 남쪽에서도 가장 아래쪽 바닷가에서 온 촌놈이 아닌가? 이런 놈과 입씨름해 봐야 내 모양새만 우스워지지.’

손풍이 이리저리 눈알만 굴린 채 아무 대꾸가 없자 전흠의 눈이 한층 더 살벌하게 변했다.
그때 유소응이 돌아오지 않았다면 손풍은 자신이 예상한 것보다 더 험한 꼴을 당했을지도 몰랐다.

유소응은 눈치 빠르게 두 사람 사이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 것을 알아차리고는 재빨리 입을 열었다.

“낙 사숙과 너무 떨어지면 안 되니 우리도 출발하죠.”

손풍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는 게 좋겠습니다. 낙 사숙이 우리를 얼마나 기다리겠습니까?”

전흠은 팔을 휘적거리며 앞으로 걸어가는 손풍의 뒷모습을 밉살스러운 듯 쏘아보고 있다가 자신도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또 다른 핏자국을 발견한 것은 오백여 장쯤 달려갔을 때였다.

마음이 급해 앞만 보고 달려가는 맹천익과는 달리 주위를 세심하게 살피며 몸을 날리던 낙일방의 눈에 검붉은 핏자국이 들어온 것이다.

그 핏자국은 처음의 것보다 더 선명해서 생긴 지가 그리 오래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었다. 손으로 만져 보니 끈적한 찰기가 느껴질 정도였다.

두 사람은 아무 말 없이 더욱 신법을 배가하여 바퀴 자국을 따라 몸을 날렸다. 오 리쯤 갔을 때 그들의 앞에 울창한 죽림(竹林)이 나타났다.

죽림은 그리 크지 않았으나 푸른 대나무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구쳐 있어 흡사 병풍을 펼쳐 놓은 듯했다. 바퀴 자국은 그 죽림 사이로 나 있는 길을 따라 이어지고 있었다.

두 사람은 죽림 앞까지 단숨에 달려왔으나 쉽게 죽림 안으로 들어서지 못하고 있었다. 죽림은 생각보다 더욱 울창해서 안력을 돋우어 보아도 그 안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이런 곳에 무작정 들어섰다가 암습이라도 당한다면 낭패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하나 그때 죽림 입구에서 멀지 않은 곳에 세 번째 핏자국이 있음을 본 맹천익이 입술을 질끈 깨물고는 죽림 안으로 성큼 발을 들여놓았다. 낙일방도 여기서는 다른 방법이 없음을 깨닫고 양손에 공력을 끌어올린 채 맹천익의 뒤를 따라 죽림으로 들어섰다.

대나무 특유의 내음이 코를 찌르는 가운데 주위는 깊은 정적에 휩싸여 있었다. 죽림 사이에 난 길은 그다지 넓지 않아서 장정 세 사람이 어깨를 나란히 하면 꽉 찰 정도였다. 이런 길로 커다란 크기의 운룡신차가 들어왔다는 것은 쉽게 믿어지지 않는 일이었으나, 바닥에 선명하게 파여 있는 바퀴 자국은 그것이 사실임을 증명해 주고 있었다.

죽림을 삼십여 장쯤 뚫고 가자 갑자기 시야가 탁 트이며 제법 넓은 공터가 나타났다. 공터의 한쪽에는 한 채의 모옥(茅屋)이 있었는데, 그 모옥의 옆에 반쯤 부서진 운룡신차가 있는 게 아닌가?

두 사람은 시선을 마주치더니 눈짓으로 의사를 교환하고는 맹천익은 운룡신차를 향해, 낙일방은 모옥으로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모옥은 두 개의 방과 하나의 부엌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얼마 전까지도 사람이 산 듯 여기저기에 살림을 한 흔적이 남아 있었다.

낙일방은 먼저 안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부엌을 살펴보았으나 특별한 점을 발견할 수는 없었다. 살림살이가 단출한 것으로 보아 살고 있는 사람의 수는 둘을 넘지 않을 게 분명했다.

다시 두 개의 방 중 우측에 있는 방으로 다가간 낙일방은 조심스럽게 방문을 열었다. 방은 비어 있었다. 그리 크지 않은 방은 벽 쪽으로 침상이 하나 있었고, 그 앞에 작은 탁자와 의자가 있었는데 탁자 위에 종이 한 장이 놓여 있는 것이 유난히 시선을 끌었다.

낙일방은 방안으로 들어가 탁자 위에 놓인 종이를 들어 보았다.

종이에는 여인의 필체인 듯한 단정한 글씨가 짤막하게 적혀 있었다.

<천하현(天河縣) 귀봉루(歸鳳樓) 술시(戌時).>

밑도 끝도 없이 적혀 있는 그 글귀를 낙일방이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을 때 맹천익이 방안으로 들어왔다.

“운룡신차에는 아무런 흔적도 찾을 수 없었소.”

낙일방은 말없이 종이를 그에게 내밀었다. 종이를 읽어 본 맹천익이 눈살을 찌푸렸다.

“이게 무슨 뜻일까요?”

낙일방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사람을 찾고 싶다면 그 시간에 그곳으로 오라는 말일 거요.”

맹천익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다시 물었다.

“우리에게 남긴 글일까요?”

“양 대협에게 남긴 글이라도 마찬가지요. 양 대협이 이 글을 보았다면 그곳으로 갈 테니 그곳에 가면 양 대협을 찾을 수 있을 거요.”

“누군가가 삼숙을 사로잡고 우리를 유인하기 위해 남긴 것이라면…….”

“그러면 더욱더 가야 하오. 그래야 양 대협을 구할 수 있을 테니까.”

맹천익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결국은 함정인 줄 알면서도 가야 한단 말이군요.”

“어차피 우리가 마차 바퀴 자국을 따라온 이상 각오했던 일 아니오?”

맹천익은 이내 무거웠던 표정을 풀어 버리고 각오를 다지는 모습이었다.

“그렇지요. 이제 와서 물러서거나 꼬리를 뺄 수는 없지요.”

“우리에게도 한 가지 좋은 점은 있소.”

“그게 무엇입니까?”

“적어도 상대가 어디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지는 알고 있으니 이번에는 우리도 약간의 대비를 할 수 있지 않겠소?”

맹천익은 그 말이 무슨 의미를 담고 있나 어리둥절하여 낙일방을 쳐다보았으나 낙일방의 준수한 얼굴에는 별다른 빛이 담겨 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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