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18권 월광천추(月光千秋)편 : 6화
제183장. 춘소일각(春宵一刻)
천하현의 서쪽은 제법 큰 구릉이 형성되어 있어 멀리서도 확연히 알아볼 수 있을 정도였다. 그 구릉의 정상에는 그리 크지 않은 누각 한 채가 자리하고 있었는데, 그 위치가 절묘하여 천하현에서는 누각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으나 그 누각에 올라서면 천하현 전체가 일목요연하게 보였다.
예전에 봉황 한 마리가 그 누각에 올랐다가 하늘 멀리로 사라졌다는 소문이 있고 난 후 사람들은 그 누각을 귀봉루(歸鳳樓)라 불렀다. 떠나간 봉황이 다시 돌아오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귀봉루는 비록 호화롭거나 뛰어난 경승(景勝)을 자랑하지는 않았으나, 천하현에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가 아끼고 사랑하는 장소였다. 오늘같이 봄의 포근함을 느낄 수 있는 날이면 적지 않은 연인들이 이곳에 와서 사랑을 속삭이기도 했고, 시인묵객(詩人墨客)들이 서로의 시상(詩想)을 뽐내기도 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오늘은 해가 떨어진 저녁 무렵부터 사람들의 모습이 뜸해지기 시작하더니 어둠이 짙게 깔린 유시(酉時)경에는 좀처럼 사람의 모습을 찾아보기가 힘들었다. 아무리 늦은 밤이라도 귀봉루에 모여 술잔을 기울이는 무리들이 제법 있었는데, 오늘은 그런 자들의 모습조차 보이지 않았다.
유시가 지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즈음, 하얗게 부서지는 별빛을 받으며 귀봉루로 올라오고 있는 한 인영이 있었다.
그 인영은 귀봉루의 안으로 들어오더니 주위를 한차례 둘러보고는 귀봉루의 서쪽 난간에 걸터앉았다. 그곳은 천하현 일대를 훤히 내려다볼 수 있는 곳으로, 귀봉루에서도 가장 좋은 풍광(風光)을 자랑하고 있었다.
그 인영은 하얀 백의를 입은 청년이었는데, 준수한 이목구비에 헌앙한 기상을 가지고 있어 좀처럼 보기 힘든 절세의 미남자였다.
봄밤의 정취는 무한했다. 공기는 따스했고, 은은히 불어오는 미풍(微風)에는 알 수 없는 꽃향기가 섞여 있어 사람의 마음을 푸근하게 했다. 달은 떠 있지 않았지만, 그래서 오히려 별빛은 더욱 밝게 빛나고 있었다.
백의청년은 불어오는 봄바람을 맞으며 난간에 기댄 채 하염없이 천하현을 내려다보더니 혼잣말처럼 나직하게 탄식을 토해내는 것이었다.
“봄밤의 한때는 천금과도 같다(春宵一刻置千金)고 했거늘, 지금은 천금의 가치를 느끼고 있을 여유가 없으니 실로 안타까운 일이로구나.”
젊은 나이답지 않게 무겁게 가라앉은 음성이었다.
그때 돌연 누군가가 어둠 속에서 불쑥 앞으로 나오며 그의 말을 받았다.
“자네는 앞길이 구만리(九萬里)같이 남았는데 어찌 여유가 없다고 하는가?”
백의청년은 나타난 사람을 보더니 반색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양 대협, 과연 이곳에 오셨군요.”
나타난 사람은 그토록 찾아 헤매던 양중초였다. 양중초는 백의청년, 낙일방을 보며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도 그 편지를 읽은 모양이군. 나는 오후부터 이 근처에 와서 계속 누군가가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어디에 있고 자네 혼자 이곳에 왔나?”
“맹 소협은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여 미리 퇴로(退路)를 알아보겠다며 이 근처를 돌아보고 온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전 사형은 두 명의 사질들과 함께 저 아래에 있는 객잔에 머물러 있습니다. 무공도 모르는 두 사질들만 두고 올 수가 없어서 말이지요.”
“진 장문인은?”
“장문사형과 동 사질은 양 대협을 찾겠다며 먼저 움직이셨다가 그 뒤로 소식이 끊겼습니다. 그래서 맹 소협이 소식을 전해 왔을 때는 우리만 남아 있는 형편이었습니다.”
양중초는 진산월이 오지 않았다는 말을 듣자 표정이 어두워졌으나 이내 사정을 이해한다는 듯 애써 밝은 모습을 되찾았다.
“그런 일이 있었군. 자네라도 와 주어 고맙네. 사실 나 혼자서는 불안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네.”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본파 때문에 공연히 이번 일에 끼어들어 화(禍)를 입으셨는데, 도와드리는 게 당연하지요. 다만 장문사형과 연락이 닿지 않아 저만 온 게 미안할 뿐입니다.”
“그거야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않나?”
“다른 두 분의 행방은 아직도 모르십니까?”
“나도 마차 바퀴를 따라왔다가 그 서신을 발견하고 이곳으로 곧장 왔기에 알 수가 없네. 그녀들의 생사(生死)만이라도 알았으면 좋겠는데 그에 대해서는 전혀 아무런 흔적을 찾을 수 없으니 답답할 뿐이네.”
“무사하실 겁니다. 흉수(兇手)의 목적이 그분들을 사로잡아 우리를 유인하기 위해서라면 목적을 달성할 때까지는 그분들의 신상에 위협을 가하지는 않을 겁니다.”
“자네 말대로 되길 바랄 수밖에 없군.”
두 사람은 한동안 귀봉루 안에서 경계심을 풀지 않은 채 누군가가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하나 유시가 거의 지나고 술시가 가까워 와도 좀처럼 나타나는 사람이 없었다. 심지어는 근처를 한 바퀴 둘러보고 오겠다고 했던 맹천익의 모습도 도무지 보이지 않았다.
시간이 갈수록 양중초의 얼굴에는 초조한 표정이 떠올랐다. 아무리 강호 경험이 풍부하고 자신의 무공에 상당한 자신감을 가지고 있어 항상 침착하기 그지없던 양중초라 할지라도 사랑하는 부인이 실종되어 생사조차 알 수 없는 상황에서는 평상시의 냉정심을 찾기가 쉽지 않은 모양이었다. 게다가 맹천익조차 돌아오지 않고 있으니 마음속으로 느끼는 불안감이 가중될 수밖에 없었다.
양중초가 굳어진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래도 안 되겠군. 일단 자네는 여기에 있게. 나는 조카를 찾아보겠네.”
“제가 갈 테니 양 대협이 이곳에 계십시오.”
양중초는 고개를 저으며 낙일방을 제지했다.
“자네에게 그런 수고까지 끼칠 수는 없네. 이 일대의 지리는 내가 오후부터 둘러본 덕에 어느 정도 알고 있으니 내가 찾아보는 게 더 빠를 걸세.”
“그럼 이곳에는 제가 있을 테니 양 대협께서 맹 소협을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무슨 일이 발생하면 휘파람을 두 번 세차게 불도록 하게. 가장 빠른 시간 내에 돌아오겠네.”
“알겠습니다.”
양중초는 주위를 한차례 둘러보더니 빠른 신번으로 귀봉루를 벗어났다. 짙은 어둠 속으로 총총히 사라지는 양중초의 뒷모습에서는 현재 그의 심정을 대변이라도 하듯 진한 암울함이 느껴졌다.
낙일방은 한동안 양중초가 사라진 곳을 우두커니 바라보고 있다가 다시 난간으로 가서 걸터앉았다. 허공의 한 점을 응시한 채 미동도 않고 있는 그의 얼굴에는 복잡한 상념의 빛이 어른거리고 있었다.
술시가 막 지났을 무렵, 한 사람이 불쑥 귀봉루 안으로 들어왔다.
낙일방은 고개를 돌려 들어온 사람을 쳐다보다 흠칫 놀란 표정이 되었다.
들어온 사람은 낙일방과 시선이 마주치자 하얀 이를 드러내며 빙긋 웃었다.
“뜻밖인가요?”
낙일방은 그 사람을 한참 동안이나 응시하고 있더니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술시가 되면 누군가가 나타날 줄은 알았지만 그 사람이 설마 당신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소.”
그 사람의 얼굴에 떠올라 있는 미소가 조금 더 짙어졌다.
“그래서 인생(人生)이 재미있는 거 아니겠어요? 예상대로 흘러가는 인생이란 너무 따분한 법이에요.”
낙일방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무겁게 입을 열었다.
“예측을 벗어난 삶은 비록 얼마쯤 흥미로울지 몰라도 그 불안함이 결국 자신의 목을 조이게 될 거요.”
그 사람은 낙일방의 준수한 얼굴을 빤히 쳐다보더니 다시 배시시 웃었다.
“처음 봤을 때부터 느꼈지만 당신은 상당히 고지식한 삶을 살아온 것 같군요. 인생은 자신이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다채롭고 복잡하며 흥미진진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적은 없었나요?”
“지금까지의 내 인생도 충분히 다채롭고 흥미로운 것이었소.”
그 사람은 그에게 한 걸음 다가오더니 마치 정인(情人)에게 속삭이듯 은근한 음성으로 소곤거렸다.
“그건 당신이 진정으로 다채로운 삶을 살고 있는 사람을 알지 못해서 그래요.”
낙일방은 냉랭한 시선으로 자신의 눈앞에서 웃고 있는 사람을 바라보았다.
“당신이 바로 그런 사람이란 말이오?”
그 사람은 부인하지 않았다.
“평범하고 지루한 인생은 내게는 독약(毒藥)과도 같아요. 그런 인생을 사느니 차라리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게 나을 거예요.”
낙일방은 아무리 생각해도 그 사람의 의견에 동의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더니 갑자기 눈을 번뜩이며 그 사람을 뚫어지게 주시했다.
“이번 일은 어떻게 된 거요? 당신은 실종된 게 아니었소?”
“자기 발로 움직인 것도 실종이라고 하나요?”
“실종된 게 아니라면…… 대체 왜 갑자기 모습을 감추어 사람들을 놀라게 한 거요?”
“말했잖아요. 지루한 인생은 질색이라고.”
낙일방의 음성이 자신도 모르게 커졌다.
“그렇다면…… 이번 일은 단순히 재미를 위해서 당신이 꾸민 거란 말이오?”
“원래 사람은 자기 위주로 생각하는 법이에요. 당신에게는 단순한 재미에 불과해 보일지 몰라도 어떤 사람에게는 그것이 살아가는 존재의 이유가 될 수도 있지요.”
“대체 주변 인물들까지 위험에 빠뜨리면서까지 이런 일을 꾸민 이유가 무엇이오?”
낙일방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의 앞에 나타난 사람은 실종되었던 두 명의 여인 중 한 명인 선약연이었던 것이다.
양중초가 그녀의 행방을 알지 못해 노심초사하는 모습을 조금 전까지도 똑똑히 보았던 낙일방으로서는 갑작스럽게 나타나서 알 듯 모를 듯한 말을 내뱉는 그녀의 모습이 왠지 낯설게만 느껴졌다.
선약연의 두 눈에 묘한 열기가 담겨졌다.
“사람마다 원하는 게 다른 법이에요. 나는 내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는 어떤 일이든 감수할 수 있어요.”
“당신이 원하는 건 뭐요?”
선약연은 천천히 오른손을 들더니 낙일방의 가슴을 가리켰다.
“당신.”
낙일방은 자신이 잘못 들었나 싶어 눈을 크게 떴다.
“나라니? 그게 무슨 말이오?”
선약연은 다시 나직한 웃음소리를 냈다.
“호호…… 듣고도 모른다면 고지식한 게 아니라 멍청한 거예요. 당신은 멍청해 보이지는 않는데 내가 잘못 본 걸까요?”
낙일방의 얼굴에 붉은 홍조가 어렸다. 그것이 부끄러워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화가 나서 그런 것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가뜩이나 준수한 얼굴이 붉어지자 여인이라면 누구나가 매혹당하지 않을 수 없을 만큼 수려한 모습이 되었다.
낙일방의 얼굴을 빤히 응시하고 있던 선약연의 흑백이 분명한 두 눈이 가늘어지며 야릇한 광채가 반짝거렸다. 선약연은 유난히 도톰한 입술을 붉은 혀로 살짝 축였는데, 그 모습이 묘한 색기를 불러일으켜서 낙일방은 공연히 가슴이 두근거렸다.
낙일방은 어색함을 감추려는 듯 헛기침을 하며 퉁명스런 음성으로 말을 내뱉었다.
“나 때문에 이런 일을 꾸몄다니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구려. 양 대협의 부인은 어떻게 된 거요? 그녀도 스스로 모습을 감췄던 거요?”
“숙모님은 저녁때 내가 타 드린 차를 드시고 잠이 드셨죠.”
“그녀가 마신 차에 수면제를 탔단 말이오?”
“그래요.”
“촌장과 그 식구들도 당신이 손을 썼소?”
“그들에 대해선 나도 몰라요. 나는 단지 숙모가 잠이 들자 그녀를 안고 조용히 그 집을 빠져 나왔을 뿐이에요.”
“대체 왜 그런 짓을? 아니, 그보다 양 대협도 그 사실을 알고 있소?”
그녀는 야릇한 의미가 담긴 눈으로 그를 빤히 응시했다.
“당신 생각은 어때요? 조금 전에도 숙부를 만났잖아요?”
낙일방은 그녀의 뜨거운 시선을 정면으로 받게 되자 한편으로는 설레면서도 한편으로는 불편한 심정이 되었다. 여자라고는 기껏해야 같은 동문(同門)의 사형제 몇 사람만을 알고 있는 그로서는 이토록 노골적인 여인의 시선을 감당하기 쉽지 않았다.
원래 낙일방은 여자에게 관심을 기울이는 성격이 아니었다. 준수하고 곱상한 외모와는 달리 어려서부터 모진 고생을 하며 세상을 떠돈 데다, 종남파에 와서는 다른 사형제들과 함께 기울어 가는 문파를 재건하는 데 전력투구하느라 다른 것에 시선을 돌릴 여유가 없었다. 그리고 종남파가 재건된 후에는 무공의 새로운 경지에 막 눈을 뜨게 되어 그의 온 관심은 무공을 익히는 데 집중되어 있었다.
간혹 바깥에 나갈 때마다 자신을 보는 여인들의 눈초리가 조금 이상하긴 했으나, 원래 여인들이란 그런가 보다 하고 별다른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선약연의 집요하리만치 뜨거운 시선을 받고 은근한 의미가 담긴 말을 듣게 되자 마음 한구석이 이상야릇해지는 것을 어쩔 수가 없었다.
선약연이 생전 처음 보는 절세의 미녀여서는 아니었다. 오히려 미모라면 일전에 몇 번이나 보았던 천봉팔선자들이 훨씬 뛰어났고, 다정다감하기로는 사저와 사매인 임영옥이나 방취아에 비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들 중 어느 누구도 이토록 노골적인 유혹의 빛을 그에게 보낸 사람은 없었다.
이성(異姓)에게서 처음으로 끈적끈적한 유혹의 시선을 받고 있는 지금의 심정은 낙일방 자신도 알 수 없을 정도로 혼란스러운 것이었다. 낙일방은 절로 얼굴이 붉어지고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야…… 양 대협은 당신의 소식을 몰라 애를 태우고 있었소.”
선약연은 벌겋게 상기된 낙일방을 향해 살짝 눈웃음을 쳤다.
“그렇다면 숙부님은 모르고 계신 모양이지요.”
그 눈웃음을 보자 낙일방은 그녀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깨닫지 못할 만큼 당황해 버렸다.
‘무슨 여자가 저렇게 웃음이 헤픈가? 게다가 그 웃음이란 것이 참으로 요상하구나.’
아마 그가 강호의 경험이 조금만 더 풍부했다면 그녀의 눈빛이나 웃음이 자연스러운 것이 아님을 알아차렸을지도 몰랐다. 하나 여자에 관해서는 숙맥이나 다름없는 낙일방은 그저 울렁거리는 자신의 가슴을 달래는 것만도 벅찰 지경이었다.
선약연은 다시 낙일방 앞으로 다가오며 붉은 입술을 살짝 열었다.
“내가 왜 그들을 떼어놓고 이곳으로 왔는지 당신은 정말 모르겠어요?”
그 속삭이는 듯한 음성에는 필설로 형용키 어려운 매력이 담겨 있어 낙일방은 순간적으로 짜릿한 기분이 들었다. 더구나 그녀가 가까이 다가올수록 그녀의 몸에서 은은히 풍겨오는 체향(體香) 때문에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 같았다.
마침내 그녀는 낙일방의 바로 앞까지 다가왔다. 손을 조금만 내밀어도 그녀의 몸에 닿을 수 있을 정도였다. 그때까지도 낙일방은 그 자리에 꼼짝도 않고 가만히 있었다.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는 심정이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그녀는 눈도 깜박이지 않고 그를 응시한 채 느릿느릿 뱅어 같은 오른손을 들어 그의 가슴을 살짝 눌렀다.
“바로 당신…… 당신과 단둘이 있고 싶어서예요.”
그녀의 손가락이 자신의 가슴에 살짝 닿자 낙일방은 전기에라도 감전된 사람처럼 몸을 부르르 떨었다. 손가락 끝이 조금 닿았을 뿐인데도 가슴 부위에서 짜릿한 쾌감이 일어나 전신으로 퍼져 나가고 있었다.
게다가 그의 얼굴 가까이서 열려진 그녀의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숨결은 달콤하기 그지없는 것이었다.
때마침 귓전으로 들려오는 누군가의 전음성이 아니었다면 낙일방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그녀를 끌어안고 말았을 것이다.
“그녀는 지금 미혼공(迷魂攻)을 펼치고 있다. 어서 정신을 차리고 정심결(定心訣)을 운용해라!”
그 전음성은 그리 크지 않았으나 그 속에는 벽사(?邪)의 힘이 담겨 있어 낙일방은 찬물을 머리 위로 뒤집어쓴 듯한 충격을 느꼈다. 화들짝 놀란 낙일방은 자신도 모르게 천단신공 중의 정심결을 머릿속으로 되뇌었다. 정심결은 천단신공을 이루는 팔대신결(八大神訣) 중에서도 마음을 다스리고 사술(邪術)로부터 정신을 보호하는 데는 가장 탁월한 효능을 지니고 있었다.
과연 정심결의 구결대로 내공을 운기하자마자 낙일방은 흐릿했던 머릿속이 맑아지며 두근거렸던 가슴이 급속도로 안정을 되찾았다. 그때 문득 그는 자신의 가슴 위에 놓여진 선약연의 손이 자신의 가슴팍 대혈(大穴) 부근으로 움직이는 것을 알아차렸다. 부지불식간에 낙일방은 앉은 상태에서 뒤로 성큼 물러났다.
선약연의 눈이 거의 알아차릴 수 없을 만큼 살짝 찌푸려지더니 그가 물러난 만큼 그에게 바짝 다가왔다.
“왜 그래요, 방랑(方郞)? 내가 싫으세요?”
그녀의 음성은 그야말로 꿀을 발라 놓은 듯 달콤해서 조금 전이었다면 낙일방은 그대로 매혹당하고 말았을 것이다. 하나 일단 정심결을 펼치게 되자 그녀의 목소리는 더 이상 그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지 못했다. 오히려 낙일방은 이상한 불쾌감과 거부감 같은 것이 느껴졌다.
낙일방이 인상을 찡그리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방랑이라니? 언제 보았다고 나를 그런 식으로 부르는 거요?”
낙일방의 두 눈이 다시 초롱초롱하게 빛나며 얼굴 전체에서 은은한 노기가 풍겨 나오자 선약연은 자신의 미혼공이 깨어졌음을 알아차렸다.
‘이상하군. 그가 어찌 나의 소녀표향대법(素女飄香大法)에서 벗어날 수 있었을까?’
그녀의 소녀표향대법은 미혼공 중에서도 가장 익히기 어려운 것 중의 하나로, 발동하는 조건이 까다롭기는 하나 제대로 펼치게 되면 상대는 자신이 미혼공에 당한 것도 모르고 그녀의 포로가 되고 만다. 일단 소녀표향대법에 완전히 빠지게 되면 그때부터는 그녀의 꼭두각시가 되어 그녀의 수중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되고 마는 것이다.
소녀표향대법은 특정 부위에 집중하는 다른 미혼공과는 달리 몸동작과 손짓, 음성, 눈빛, 미소, 심지어는 몸에서 흘러나오는 체향까지 하나로 뭉쳐 조금씩 상대의 마음을 공략하는 고도의 수법이어서 비단 방비하기가 어려울 뿐 아니라 겉으로는 전혀 아무런 기척도 드러나지 않아서 쉽게 알아보기도 힘들었다. 그래서 조금 전에도 낙일방은 자신이 그녀의 미혼공에 빠진 것도 모르고 가슴만 두근대고 있었던 것이다.
강호의 경험이 풍부한 인물들도 그녀의 소녀표향대법에는 벗어나지 못하는데 강호의 경험도 별로 없고 여자에 대해서는 백지나 다름없는 낙일방이 빠져 나왔으니 그녀가 당혹해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녀는 낙일방의 두 눈을 빤히 쳐다보았으나, 낙일방은 조금 전과는 달리 얼굴을 붉히거나 고개를 돌리지 않고 오히려 성난 눈으로 그녀를 쏘아보았다.
“도대체 내게 무슨 짓을 했던 거요?”
그녀의 안색이 조금 변했으나, 목소리는 여전히 고혹적이었다.
“무슨 짓이라뇨? 난 그저 당신과 이야기를 나누었을 뿐이에요. 나야말로 낙 소협이 무슨 이유로 내게 그런 질문을 하는지 모르겠군요.”
낙일방은 무어라고 말을 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그녀가 미혼공의 일종을 펼친 것이 분명하다고 해도 실질적으로는 그녀를 추궁할 수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뚜렷한 증거도 잡을 수 없을뿐더러 그녀 말마따나 그녀가 트집 잡힐 만한 특별한 행동을 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한 짓이라고는 그에게 다가와 그의 가슴에 살짝 손가락을 댄 것밖에는 없었다. 젊은 여자가 젊은 남자에게 한 행동으로는 조금 지나치다고 할 수 있어도 그것만으로 그녀를 비난하기에는 미흡한 구석이 많았다.
일단 그녀의 미혼공에서 벗어나자 그의 머리는 여느 때처럼 영활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낙일방은 즉시 그녀를 향해 포권을 했다.
“내가 소저를 오해한 모양이오. 양해하시오. 그럼 나는 이만 가보겠소.”
낙일방이 완전히 냉정을 되찾은 데다 자신에 대한 호칭까지 바뀌자 선약연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어디를 간다는 거죠?”
“양 대협은 선 소저와 양 부인의 행방을 몰라 노심초사하고 계셨소. 지금도 이 근처에서 두 분의 행방을 찾고 계실 터이니 그분께 가서 소저가 무사함을 알릴 생각이오.”
선약연의 눈빛이 파르르 떨렸다.
“당신이 감히…….”
“소저의 행방을 양 대협께 알리는 것이 내가 할 도리라고 생각하오.”
낙일방이 금시라도 등을 돌리고 가버릴 듯하자 선약연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야릇한 눈빛에 요염함이 가득했던 얼굴이 마치 얼음장이라도 씌운 듯 싸늘한 한기가 풀풀 풍기고 있으니 마치 다른 사람을 보는 것 같았다. 그녀는 아무 말 없이 표독스러움이 가득한 눈으로 낙일방을 쏘아보고 있었다.
낙일방은 조금 전의 두근거림과는 다른 의미로 그녀를 계속 쳐다보고 있기가 거북하여 주저 없이 몸을 돌려 버렸다. 유혹해 오는 여자도 부담스러웠지만, 독기에 찬 여자도 감당하기 힘든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나저나 그녀가 왜 저토록 표독스런 눈으로 자신을 쏘아보고 있는지 영문을 알 수 없는 낙일방이었다.
대체 자신이 그녀에게 무슨 잘못을 했단 말인가? 잘못이라면 오히려 대뜸 나타나 미혼공을 써서 자신을 유혹하려 한 그녀가 저지른 게 아닌가?
‘어차피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낙일방이 애써 마음을 가다듬으며 막 귀봉루를 나가려 할 때였다.
“나를 찾고 있다면 굳이 갈 필요 없네.”
낭랑한 음성과 함께 한 사람의 신형이 귀봉루 안으로 날아 들어왔다. 낙일방은 들어온 사람이 양중초임을 알아보고는 반색을 했다.
“아, 양 대협. 돌아오셨군요.”
양중초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늦지 않게 올 수 있어 다행이군.”
“잘 오셨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선 소저를 찾게 되어 양 대협을 뵈려던 참이었습니다. 그런데…….”
막 양중초에게 저간의 사정을 설명하려던 낙일방이 무언가 이상함을 깨닫고 입을 다물었다. 양중초는 선약연을 뻔히 발견했음에도 불구하고 조금도 놀라거나 기뻐하지 않고 담담한 표정으로 자신을 향해서만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낙일방은 부지불식간에 한 걸은 물러서며 양손에 공력을 끌어올렸다. 그러자 금시라도 그에게 달려들 듯하던 양중초가 걸음을 멈추며 빙긋 웃었다.
“왜 그러나?”
낙일방은 의혹 어린 눈으로 양중초를 쳐다보았다. 양중초의 얼굴에는 의미 모를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왜 그렇게 긴장하고 있나?”
“가셨던 일은 어떻게 되셨습니까?”
“어떤 일 말인가?”
낙일방의 얼굴이 경직되었다. 그것을 본 양중초의 입가에 살짝 미소가 어렸다.
“조카 녀석을 찾는 일 말인가? 주변을 샅샅이 찾아보았지만 그 녀석은 보이지 않았네. 그래서 결국 나 혼자 돌아올 수밖에 없었지.”
양중초의 설명은 앞뒤가 맞았으나 낙일방의 표정은 펴지지 않았다. 오히려 마음속 의혹은 더욱더 커져 갔다.
“저 아이가 왜 저런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겠느냐?”
그의 말투는 어느새 미묘하게 변해 있었다. 선약연은 양중초를 보고도 전혀 놀라지 않고 여전히 냉랭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무언가 자기 생각대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걸 알아차린 거겠지요. 고지식하긴 하지만 아주 바보는 아니니까 말이죠.”
양중초는 다시 낙일방의 준수한 얼굴을 돌아보더니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멍청해 보이지는 않는군. 오히려 소문으로 듣던 것보다는 훨씬 더 총기가 느껴지는 인상이야. 게다가 저렇게 잘생겼으니 네가 탐을 내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선약연은 그 말에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으나, 여전히 표정은 찬바람이 쌩쌩 불 정도로 차가웠다. 양중초는 그 모습을 보고 다시 웃었다.
“그를 네 마음대로 할 수 없어서 단단히 삐친 모양이구나. 하지만 인생이란 원래 예상과 벗어나야 재미있는 법이라고 늘 네 입으로 말하지 않았느냐?”
“그 때문이 아니에요.”
“그럼 무엇 때문에 그렇게 화가 나 있느냐?”
선약연은 힐끗 낙일방을 쏘아보았다.
“그가 내 소녀표향에서 어떻게 빠져 나왔는지 알지 못해서 짜증이 났을 뿐이에요.”
“생긴 것과는 달리 정력(定力)이 대단한 아이인 모양이지. 아니면 달리 사랑하는 여자라도 있던가.”
선약연도 그렇게 생각하는지 표정이 조금 누그러졌다.
두 사람이 자신을 앞에 놓고 마치 품평회라도 하듯 이런저런 말을 나누는 광경을 낙일방은 물끄러미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 모습이 다소 의외였던지 양중초가 낙일방을 향해 입을 열었다.
“자네는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하고 있나?”
낙일방은 무뚝뚝한 음성으로 말했다.
“궁금한 게 있소.”
낙일방을 대하는 양중초의 태도나 말투가 변한 것처럼 낙일방의 말투도 조금 바뀌어 있었다.
양중초는 전혀 개의치 않고 물었다.
“무엇인가?”
“당신은 대체 누구요?”
낙일방이 준수한 얼굴을 굳히며 진지한 음성으로 묻자, 양중초는 그가 그런 질문을 하리라고 미처 생각지 못했던지 눈을 반짝 빛냈다.
“조금 전에 만났으면서 그새 내가 누구인지 잊었단 말인가?”
“아니, 당신은 양 대협이 아니오.”
낙일방이 단정적인 어조로 말하자 양중초는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나? 내 얼굴을 알면서도 그런 말을 한단 말인가?”
“외모가 같다고 해서 그 사람의 기질까지 흉내 낼 수는 없소. 비록 당신의 겉모습은 양 대협과 비슷할지 몰라도 그 얼굴 속에는 전혀 다른 사람이 들어 있소.”
양중초는 눈을 크게 치켜뜨더니 돌연 대소를 터뜨렸다.
“하하…… 과연 대단한 아이로군. 신검무적에 대한 이야기는 많이 들었지만, 설마 그말고도 종남파에 이토록 뛰어난 젊은이가 있을 줄은 몰랐다. 정말 나이답지 않게 침착하고 영민하구나.”
양중초의 말투가 완연히 바뀐 것처럼 그의 음성 또한 원래의 목소리에서 점차로 달라져 늙수그레한 노인의 음성이 되었다. 양중초는 주저 없이 소맷자락을 가볍게 휘저었다. 그러자 중년이었던 얼굴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주름살이 가득한 노인의 모습이 나타났다.
그 노인의 동작이 너무도 신묘해서 낙일방은 바로 눈앞에서 지켜보고도 노인이 인피면구(人皮面具)를 썼던 것인지 아니면 단순한 역용(易容)을 했던 것인지 알아보지 못했다.
노인은 유난히 가늘고 쭉 찢어진 두 눈에 매부리코, 얄팍한 입술을 가지고 있어 차갑고 냉정해 보였다. 특히 주름진 이마 아래 드러나 있는 두 개의 눈은 아무런 감정도 담겨 있지 않은 무심한 것이어서 보는 이로 하여금 오싹하는 느낌이 들게 했다.
“노부는 교등이라 한다. 아이야, 노부의 이름을 들어 본 적이 있느냐?”
낙일방은 고개를 저었다.
“듣지 못했소.”
사람에 따라서는 기분 나쁠 수도 있는 반응이었으나, 노인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나이에서는 당연한 일이겠지. 노부가 중원에 잠시나마 이름이 알려진 것은 벌써 삼십 년도 더 지난 과거의 일이었으니까.”
낙일방은 교등의 말에서 이상한 점을 느꼈다.
“노인장은 혹시 변황(邊荒)에서 오셨소?”
교등의 심유(深幽)한 시선에 번쩍하는 신광(神光)이 피어올랐다.
“그렇다. 노부가 중원인(中原人)이 아니라는 건 어떻게 알았느냐?”
“노인장의 말투가 중원을 마치 타지(他地)처럼 여기는 것 같았소. 더구나 억양에 장성(長成) 너머에서 볼 수 있는 거친 콧소리가 섞여 있어서 짐작해 보았을 뿐이오.”
“아이야, 너는 점점 노부를 놀라게 하는구나.”
교등은 스스로의 정체를 드러낸 후 낙일방을 어린아이 대하듯 했는데, 이상하게도 그게 그에게는 몹시도 잘 어울려 보였다.
“이런 곳에서 너 같은 아이를 만난 것도 무척이나 흥미로운 일이다. 확실히 세상은 아직 살아 볼 가치가 있는 것 같구나.”
“양 대협 부부는 어떻게 되었소?”
“그들은 모두 잘 있다. 비록 행동의 자유는 없지만, 털끝 하나 다치지 않은 채 건강하게 살아 있다.”
“그분들을 어쩔 셈이오?”
교등의 주름진 얼굴에 언뜻 흐릿한 미소가 스치고 지나갔다.
“너는 너 자신보다 그들의 안위를 더 신경 쓰는구나. 너무 걱정하지 말아라.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나면 그들은 다시 원하는 곳으로 가게 될 것이다.”
“맹 소협이 아직 오지 않은 것도 노인장의 작품이오?”
“허허…… 역시 눈치가 빠른 아이로구나.”
맹가 녀석이 이 근처에 잠복해 있다는 것은 이미 예측하고 있던 바다. 내가 양중초의 모습으로 근처에 나타나자 반색을 하며 숨어 있던 곳에서 나오더구나. 그 녀석도 지금은 양중초와 함께 잘 있을 테니 너는 마음을 놓도록 해라. 더 궁금한 게 있으면 얼마든지 물어 보거라.”
교등이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하면 할수록 낙일방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질 수밖에 없었다. 교등이 여유를 부린다는 것은 그만큼 사태를 확실히 장악하고 있다는 자신감의 발로이기 때문이었다.
“노인장이 이런 일을 저지른 것은 우리를 유인하기 위해서요?”
“그렇다. 원래는 신검무적도 함께 걸려들길 바랐지만, 그는 다른 길을 선택했더구나. 그래도 이번에 너를 볼 수 있어서 노부는 만족하고 있다.”
“대체 노인장은 우리와 무슨 원한이 있기에 이런 일을 꾸민 거요?”
지금까지 낙일방의 물음에 순순히 답해 주던 교등이 순간적으로 잠깐 멈칫거리다 입을 열었다.
“노부가 나이도 어린 너와 무슨 직접적인 원한이 있겠느냐? 다만 노부의 일에 너희들이 방해가 되었다는 것만 알아 두거라.”
낙일방은 눈을 번쩍 빛냈으나, 더 이상 그 점에 대해서는 묻지 않고 한쪽에 말없이 서 있는 선약연을 힐끗 쳐다보더니 다시 물었다.
“선 소저와는 어떤 관계요?”
“서로 필요에 의해 만난 사이지. 그녀는 답답한 삼월보를 벗어나 좀 더 자유롭고 자극적인 삶을 살기를 원하고, 우리는 그녀에게 약간의 도움을 주는 대신 필요한 정보를 얻고 있지.”
“선 소저가 자신의 집안을 배신했단 말이오?”
“허허…… 그럴 리가 있느냐? 다만 삼월보에 직접적인 해(害)가 되지 않는 한도 내에서 우리와 협력한다고 생각하면 된다.”
“이번 일처럼 말이오?”
“그렇지. 역시 말이 잘 통하는 아이로구나.”
낙일방은 강북삼보 중의 하나인 삼월보의 보주를 아버지로 둔 선약연이 단순히 재미를 위해서 외부인들과 손을 잡았다는 것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평생을 마음 편하게 쉴 틈 없이 분주하고 격렬하게 살아온 낙일방으로서는 변화 없고 단조로운 일상이 시시하다며 스스로 번잡스러움을 선택한 그녀가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생각되었다. 그녀가 경멸하고 무시하는 평온한 삶이야말로 자신으로서는 너무도 간절히 바라고 꿈꾸고 있는 궁극적인 삶이 아닌가?
이런 여자의 농간에 놀아나 하룻밤을 꼬박 헤매고 다닌 자신의 처지가 어쩐지 어처구니없게 생각되었다.
낙일방이 멍하니 상념에 잠겨 있을 때 교등이 느릿느릿 손을 들어올렸다.
“궁금증을 모두 해소한 모양이구나. 그렇다면 이제는 노부의 일을 해결하도록 하마.”
딱!
그가 손가락을 마주쳐 소리를 내자 귀봉루 안으로 다시 두 사람이 들어왔다. 좌측은 짙은 갈삼을 입은 청년이었고, 우측은 머리를 깎은 중년인이었다.
그들은 낙일방의 앞으로 어슬렁거리며 다가오더니 어깨를 나란히 하고 우뚝 섰다.
교등의 음성이 이어졌다.
“네가 어젯밤에 연씨형제와 염라십팔귀(閻羅十八鬼) 중 두 명의 합공을 물리쳤다고 들었다. 그 정도 실력이면 이들 두 사람과 제법 좋은 승부가 될 것이다.”
낙일방은 두 사람을 일별하는 것만으로도 자신이 좀처럼 보기 힘든 어려운 상대들을 만나게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들 두 사람은 개개인이 자신에 결코 못지않은 무서운 실력자들이었다.
낙일방은 그들을 찬찬히 둘러보다가 물었다.
“내가 이들을 물리치면 나를 순순히 보내 주는 거요?”
교등은 주름진 얼굴이 일그러지도록 크게 웃었다.
“하하…… 정말 당돌한 아이로구나. 너는 그들이 누구인지 아느냐?”
낙일방이 알 리가 없었다.
“모르오.”
“그들은 철혈쌍응이라 한다. 신강에서는 상당히 알려진 자들이지.”
낙일방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으나, 물론 그들이 누구인지 알았다는 뜻은 아니었다. 강호의 고수들 이름도 정확히 모르는 낙일방이 서장의 이름난 고수들인 십육사의 두 사람을 어찌 알겠는가?
“네가 그들을 꺾을 리는 없지만, 혹시라도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노부가 직접 상대해 주도록 하겠다. 그것만으로도 네게는 큰 영광이 될 것이다.”
교등이 큰 선심이라도 쓴 듯이 말하자 낙일방은 피식 웃더니 어깨를 으쓱거렸다.
“결국 어떤 식으로든 나를 이곳에서 보내 주지 않겠다는 말이로군.”
“바로 보았다. 비록 네 재주가 아깝기는 하지만 너는 오늘 이곳에서 뼈를 묻게 될 것이다. 그녀의 미혼공에 걸렸다면 꼭두각시가 되었을망정 목숨은 부지할 수 있었을 텐데 네가 너무 잘난 것이 죄로구나.”
교등은 문득 생각난 듯 말을 덧붙였다.
“아, 노파심에서 말하는데 혹시라도 종남파의 다른 고수들이 너를 구해 줄 것을 기다리고 있다면 일찌감치 포기하는 게 좋을 것이다.”
“그건 무슨 말이오?”
“네 입으로 그들이 산 아래 객잔에서 기다리고 있다고 하지 않았느냐? 이미 그쪽으로 사람들을 보냈으니 그들은 단 한 명도 요행을 바랄 수 없을 것이다.”
그제서야 낙일방은 양중초로 변장한 교등이 자신을 만난 다음 맹천익을 찾겠다며 황급히 귀봉루를 나갔던 것도 바로 객잔으로 부하들을 보내기 위해서였음을 알아차렸다.
낙일방의 두 눈이 날카롭게 번뜩이며 전신에서 맹렬한 기세가 일어났다.
“그들의 털끝 하나라도 건드렸다가는 이곳의 누구도 무사하지 못할 거요.”
그저 유약한 미남자로만 보였던 낙일방이 기세를 끌어올리자 귀봉루 안은 삽시간에 팽팽한 긴장감에 휩싸여졌다. 질식할 듯한 공기가 주위를 무겁게 짓누르자 여유 만만했던 교등의 얼굴에도 심각한 빛이 떠올랐다.
“정말 나이답지 않은 기도로구나. 아쉬운 일이다. 종남파의 제자만 아니었다면 정말 제대로 성장할 수 있었을 텐데…… 그저 네가 종남파의 제자인 것을 원망하도록 해라.”
“내가 종남의 제자였기에 이 정도라도 클 수 있었던 거요.”
낙일방은 묵령갑을 낀 양손의 손가락을 몇 차례 꼼지락거리더니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앞으로 성큼 달려 나왔다.
“본파를 건드린 대가를 받아낼 테니 단단히 각오하시오.”
낙일방의 음성이 채 사라지기도 전에 그의 몸이 무서운 속도로 자신의 앞에 나란히 서 있는 철혈쌍응을 향해 날아갔다. 추호의 망설임도 없이 강적을 향해 몸을 날리는 그의 이 행동은 귀봉루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마음에 진한 인상을 남기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철혈쌍응은 낙일방이 어제 상대했던 연씨형제들과는 차원이 다른 고수들이었다. 서장에서 십육사라면 중원의 어떠한 절정고수에도 뒤지지 않는 무서운 무공의 소유자들이었다. 그런 고수들을 한 명도 아니고 두 명과 맞서고 있으면서도 추호도 두려워하거나 꽁무니를 빼지 않고 서슴없이 달려드는 낙일방의 모습은 패기만만하기 이를 데 없는 것이었다.
“좋아. 과연 우리가 오늘 여기까지 온 것이 헛걸음은 아니었구나!”
철혈쌍응 중의 혈비응 희표가 이를 드러내고 웃으며 낙일방의 주먹에 정면으로 맞서 왔다.
“희표는 나이는 이제 막 서른을 조금 넘은 정도여서 십육사 중에서도 혈린도 탁극과 함께 가장 어린 축에 속했다. 탁극이 얼마 전에 진산월의 손에 죽은 것을 생각해 본다면 십육사 중의 실질적인 최연소자라고 할 수 있었다. 아직 젊은이다운 패기를 가지고 있는 희표에게 낙일방의 거칠 것
없는 모습은 그의 가슴을 뜨겁게 달구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희표의 갈퀴처럼 변한 두 손이 낙일방의 양쪽 옆구리를 노리고 날아들었다. 희표의 장기는 조법(爪法)과 각법(脚法)으로, 특히 쇄박조(碎剝爪)라는 그의 독문무공은 뼈를 수수깡처럼 부수고 살을 종잇장처럼 찢어 버리는 무시무시한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빠빠빡!
마치 뼈와 뼈가 마주치는 듯한 음향이 터져 나오며 두 사람의 신형이 잠시 주춤했다. 희표의 손과 낙일방의 주먹이 허공에서 무려 다섯 번이나 정면으로 격돌한 것이다.
두 사람 모두 적지 않은 충격을 받은 듯 표정이 무겁게 굳어졌다. 하나 누구도 물러나지 않고 오히려 더욱 맹렬하게 손을 주고받았다. 삽시간에 그들은 바짝 붙어서 무서운 살초(殺招)들을 펼치며 이십여 초나 공방(攻防)을 벌였다.
이들처럼 손만 내밀어도 상대의 몸이 닿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서 벌이는 싸움은 흉험하기 이를 데 없는 것이어서 강호에서도 좀처럼 보기 힘들었다. 서로 간에 부담감이 너무 커서 모두들 꺼려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두 사람은 처음부터 바짝 붙어서 조금도 물러나지 않은 채 주먹과 손을 휘두르고 있으니 그 격렬함은 보는 이의 가슴을 떨리게 할 정도였다.
그들의 공방이 어찌나 살벌했던지 희표와 나란히 서 있던 철독응 호황조차도 그들의 싸움에 끼어들지 못하고 뒤로 물러난 채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었다. 이렇게 거리가 전혀 없는 상태에서의 박투(搏鬪)에 잘못 끼어들었다가는 오히려 자기편에게 방해가 되기 십상이었다.
순식간에 다시 오십여 초가 지나갔다. 두 사람의 몸은 이미 흘러내리는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고, 양쪽 소맷자락은 모두 찢겨져 맨살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서로를 노려본 채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주먹과 손을 휘두르고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은 차라리 장렬해 보였다.
파파파팍!
다시 또 두 사람의 주먹과 손이 십여 차례나 부딪치며 묵직한 파공음을 토해냈다. 두 사람의 손은 팔뚝 부근까지 시커멓게 피부가 죽어 있어 그들의 격돌이 얼마나 살벌하고 처절한 것인지를 여실히 보여 주고 있었다.
하나 시간이 흐를수록 조금씩 우열이 판가름 나고 있었다. 그것을 제일 먼저 알아차린 사람은 호황이었다. 호황은 얼마 전부터 낙일방의 주먹과 부딪칠 때마다 희표의 눈썹이 꿈틀거리는 것을 보고는 희표가 불리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눈썹이 꿈틀거리는 것은 희표가 손에 통증을 느끼고 있다는 신호였다. 희표와 같이 조법을 특기로 삼는 고수에게 그것은 치명타나 마찬가지였다. 상대의 주먹과 부딪칠 때마다 손이 아파서야 어떻게 계속 격돌할 수 있겠는가?
호황은 희표와 오랫동안 붙어 있다시피 했기 때문에 희표가 열세에 처한 것을 남들보다 훨씬 빨리 알아차렸으나, 그만큼 놀라움도 컸다. 이제 겨우 약관에 접어든 애송이가 신강에서 죽음의 손가락이라고까지 불리고 있는 희표와 정면으로 겨루어 그를 궁지에 몰아넣고 있는 것이다.
희표는 싸움에서 물러나는 법이 없었다. 온몸에 피칠을 하고 맹목적으로 상대를 공격하여 결국에는 쓰러뜨리는 것이 희표가 싸우는 방법이었다. 그의 혈비응이라는 외호는 그렇게 해서 붙여진 이름이었다.
그런데 그 희표가 뒤로 밀리고 있는 것이다.
조금 더 시간이 흐르자 이제는 누구라도 희표가 머지않아 패하게 되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희표는 얼굴이 창백하게 굳어진 채 여전히 날카로운 기세로 조법을 펼치고 있었으나, 계속 몸이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었고 속도 또한 조금씩 느려졌다.
그에 비해 낙일방의 주먹은 오히려 처음보다 더욱 빠르고 강력해진 것 같았다. 그리 크지 않은 그의 체구 어디에 저런 힘과 투지가 솟구치고 있는지 의아함을 느낄 정도로 그의 기세는 맹렬했고, 주먹은 무서웠다.
“큭!”
마침내 희표가 인상을 찡그리며 뒤로 세 걸음이나 물러났다. 그의 오른손 손가락은 대부분이 부러졌는지 제멋대로 흔들거리고 있었고, 입가로는 검붉은 선혈이 조금씩 흘러나오고 있었다.
묵령갑을 낀 낙일방의 주먹이 비틀거리는 희표의 옆구리를 가격하려는 순간, 한쪽에서 지금까지 말없이 지켜보고만 있던 호황의 신형이 한발 먼저 움직였다.
일단 움직이기 시작하자 호황의 몸은 무지막지할 정도로 빨랐다. 그는 주먹을 휘두르지도 않았고, 병장기를 꺼내지도 않았다. 그저 무서운 속도로 낙일방을 향해 돌진해 들어왔을 뿐이다. 특이하게도 호황의 양쪽 어깨가 풍선처럼 부풀어 올라 있었다.
얼핏 보기에는 무모해 보이는 이 공격이야말로 호황이 가장 자신하는 쇄혼철벽(碎魂鐵壁)의 수법이었다. 호황의 이 몸통 공격은 단순한 만큼이나 빠르고 강력해서 제대로 격중 당하면 어지간한 호신강기도 두부처럼 으스러지고 마는 무시무시한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낙일방은 막 희표의 오른쪽 옆구리를 왼쪽 주먹으로 가격하려다 무언가 사나운 기세가 맹렬하게 자신의 정면으로 다가오는 것을 깨닫고 잠깐 머뭇거렸다. 이대로 피해도 되었지만, 모처럼 찾아온 기회를 놓치기 싫었던 것이다.
희표와의 격전은 그로서도 상당히 힘들고 고통스러운 것이었다. 온몸이 땀으로 범벅이 되고 두 주먹이 으스러지는 듯한 아픔에도 불구하고 간신히 희표를 쓰러뜨릴 기회를 잡았는데 이대로 물러나기는 정말 아쉬웠다.
순간적으로 마음을 굳힌 낙일방은 왼 주먹을 계속 내뻗으면서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맹렬한 기세를 향해 오른쪽 주먹을 세 번 빠르게 내질렀다. 그의 이 수법은 낙뢰신권 중에서도 삼대절초 중 하나인 신뢰삼격(迅雷三擊)이란 것으로, 처음의 주먹보다 두 번째 주먹이, 두 번째 주먹보다 세 번째 주먹이 더 빠르게 뻗어 나가 종내에는 세 개의 주먹이 거의 동시에 상대를 가격하게 되는 놀라운 초식이었다.
낙일방의 왼쪽 주먹은 아직 채 중심을 잡지 못하고 있던 희표의 옆구리에 사정없이 틀어박혔다.
우두둑!
갈비뼈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희표의 몸이 옆으로 푹 꼬꾸라졌다. 그와 동시에 낙일방의 오른 주먹은 일직선으로 달려들던 호황의 앞가슴을 정확하게 가격했다.
파파팡!
세 번의 북 치는 듯한 음향이 거의 동시에 터져 나와 마치 하나의 북소리처럼 들렸다. 하나 그 순간, 낙일방은 자신의 오른 주먹이 부러지는 듯한 통증을 느끼고 자신도 모르게 짤막한 신음성을 토해냈다.
“윽!”
마치 주먹으로 쇠로 된 벽을 때린 듯한 무지막지한 통증이 오른 주먹을 타고 전신으로 퍼져 나갔다. 낙일방이 이를 악물고 자신의 오른손을 내려 보니 묵령갑을 낀 오른 손목이 탈골(奪骨)되어 있었다. 묵령갑을 끼지 않았다면 오른손의 뼈가 모두 으스러지고 말았을 것이다.
그때 다시 세찬 경기와 함께 호황의 신형이 그의 코앞으로 쏘아져 왔다. 박박 깎은 머리에 험상궂은 용모의 호황이 무시무시한 안광을 번뜩이며 무섭게 돌진해 오는 광경은 모골이 송연할 정도로 공포스러운 것이었다.
호황 또한 완전히 무사한 것은 아니었다. 앞가슴의 옷자락이 먼지처럼 으스러져서 맨가슴이 그대로 드러나 보였고, 가슴 한가운데에 거무스름한 주먹 자국 세 개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하나 맹렬한 기세로 다가오는 호황의 얼굴에는 전혀 부상당한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낙일방은 탈골되었던 오른 손목을 재빨리 맞추며 어운보의 신법으로 옆으로 이 장쯤 이동했다.
쉬아악!
호황의 몸이 방금 전까지도 낙일방이 서 있던 공간을 휩쓸며 지나갔다. 한데 막 스쳐 지나갈 듯하던 호황의 몸이 갑자기 회전하더니 낙일방이 움직인 곳으로 돌진해 오는 것이 아닌가? 마치 낙일방이 그쪽으로 피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기라도 한 듯 거침없는 동작이었다.
낙일방은 손목뼈가 맞춰지는 고통을 참느라 땀을 뻘뻘 흘리고 있다가 느닷없는 호황의 선회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자칫했다가는 미처 피하지 못하고 그대로 호황의 몸과 충돌하고 말 것 같았다. 낙일방이 재차 어운보를 펼쳐 삼 장 밖으로 움직였으나, 그가 채 신형을 안정시키기도 전에 호황의 몸이 선회하여 다시 다가왔다.
어찌된 영문인지 이리저리 방향을 바꾸어도 호황의 돌진해 들어오는 속도는 전혀 늦춰지지 않았다. 이것은 호황이 익힌 도영섭허(蹈影攝虛)라는 특이한 신법 때문으로, 도영섭허는 상대방이 움직일 때 발생하는 미묘한 공기의 흐름을 이용하여 상대가 이동하는 방향으로 몸을 움직이는 상승의 절학이었다. 이 도영섭허와 결합했을 때 비로소 쇄혼철벽이 그 진정한 위력을 발휘하게 되는 것이다.
낙일방은 그 뒤로 두 번이나 더 몸을 피했으나, 호황과의 거리가 멀어지기는커녕 점점 더 가까워져서 금시라도 부딪칠 것만 같았다. 낙일방은 이런 식으로는 호황의 공격을 피할 수 없음을 깨닫고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피할 수 없다면 정면으로 깨부순다.’
낙일방은 더 이상 몸을 움직이지 않고 그 자리에 우뚝 선 채로 두 눈을 번뜩이며 자신을 향해 돌진해 들어오는 호황을 쏘아보았다. 양쪽 어깨가 유난히 부풀어 오른 호황의 신형이 그야말로 노도(怒濤)와 같은 기세로 날아왔다. 낙일방은 무서운 속도로 자신에게 다가오고 있는 호황의 몸을 눈도 깜박이지 않은 채 주시하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호황의 양쪽 어깨가 묘하게 떨리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마치 경련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두 어깨가 가늘게 떨릴 때마다 호황의 날아오는 각도가 조금씩 변하는 것이다.
이 두 어깨의 움직임이야말로 호황이 자신하는 쇄혼철벽의 비밀이었다. 단순한 몸통 공격 같아도 두 어깨로 자신의 몸을 완벽하게 제어하여 상대의 가장 취약한 부위로 공격해 들어가는 것이 바로 쇄혼철벽의 가장 큰 비밀 중 하나였던 것이다.
조금 전에 낙일방이 낙뢰신권 중의 절초를 펼치고도 호황의 공격에 맥없이 손목이 탈골되었던 것도 희표를 가격했던 왼 주먹에 비해 오른쪽 주먹에 실린 공력의 힘이 상대적으로 미약했기 때문이었다. 짧은 순간에 그 허점을 놓치지 않고 예리하게 파고든 호황의 안목도 대단한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막 호황의 어깨가 낙일방의 몸을 가격하려는 순간, 낙일방의 팔이 눈에 보이지도 않을 속도로 빠르게 선회했다.
그리고 내찔러지는 주먹 하나!
얼핏 보기에는 평범한 일권(一拳) 같았으나, 그 주먹이 어깨에 닿는 순간 호황은 마치 거대한 나선형의 추(鎚)가 자신의 몸 속을 산산이 휘젓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내 자신이 그토록 자신하던 쇄혼철벽의 기운이 무참하게 깨어지는 것을 느꼈다.
파아아…….
낙일방의 주먹에 격중 당한 호황의 왼쪽 어깨가 터져 나가며 시뻘건 핏물이 사방으로 흩뿌려졌다.
“크으으……”
호황의 입에서는 마치 상처 입은 짐승의 울음소리 같은 괴이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는다고 해서 철혈(鐵血)의 사나이라고까지 불렸던 호황도 자신의 왼쪽 팔과 어깨가 짓이겨지는 통증은 견뎌내지 못하는 것이다.
호황의 왼쪽 상반신은 그야말로 철저히 파괴되어 도저히 사람의 몸이라고 부를 수 없을 정도였다. 갈라진 피부에서 흘러나오는 핏물이 그의 몸을 타고 바닥으로 흥건히 흘러내렸고, 살이 뭉개진 자리에 부서진 뼛조각이 허옇게 붙어 있어 목불인견(目不忍見)의 끔찍한 모습을 나타내고 있었다.
낙일방 또한 무사한 것은 아니었다. 낙일방은 비록 가공할 일권으로 호황을 반신불수의 폐인(廢人)으로 만들어 버렸으나 호황의 몸에서 흘러나온 반탄력을 이기지 못하고 삼 장 밖으로 튕겨 나가 있었다.
조금 전에 낙일방이 펼친 일권은 낙뢰신권의 최절초인 일점천뢰(一點天雷)에 천단신공의 천층결(千層訣)을 가미한 것으로, 단 한 곳에 자신의 모든 공력을 쏟아 부어 파괴해 버리는 극강(極强)의 수법이었다. 하나 그 위력이 강한 만큼 진력의 소모 또한 대단하여 낙일방은 제대로 서 있기조차 힘들 정도로 몸이 지쳐 버렸다.
게다가 호황의 쇄혼절벽을 깨면서 그 반탄력에 내부가 진탕되어 적지 않은 내상(內傷)까지 입은 상태였다. 그런데도 그가 쓰러지지 않은 것은 순전히 상대 앞에 약세를 보일 수 없다는 자존심 때문이었다.
더구나 이곳에는 아직도 철혈쌍응보다 더욱 무서운 인물이 남아 있지 않은가?
낙일방이 목구멍을 타고 치밀어 오르는 핏물을 억지로 눌러 삼키며 몸을 똑바로 가누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귀봉루 밖에서 하나의 검광이 날아들었다. 그 검광이 어찌나 은밀하고 빠르게 날아들던지 제법 넓은 귀봉루 안이 온통 삼엄한 검기에 휩쓸려 버렸다.
그 검광은 아직도 몸을 가누지 못하고 있는 호황과 희표의 목을 그대로 잘라 버렸다.
“크악!”
“아아악!”
두 개의 처절한 비명이 밤하늘을 갈가리 찢어 놓은 가운데, 두 사람의 수급이 허공을 날아 바닥으로 굴러 떨어졌다.
“이…… 이럴 수가……”
검광이 날아들자 황급히 몸을 피했던 교등은 검광이 처음부터 자신이 아닌 부상을 당한 철혈쌍응을 노리고 있음을 뒤늦게 알아차리고 그것을 막으려 했으나 그때는 이미 철혈쌍응은 목 없는 시신이 되어 버린 후였다. 너무도 어처구니없게 서장의 최고 고수들인 십육사 중의 두 사람이 검하고혼(劍下孤魂)이 되고 만 것이다.
철혈쌍응이 심각한 부상을 입어서 제대로 운신(運身)할 수 없었다고 할지라도 그 검광의 날아드는 속도와 변화의 예리함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가공스럽지 않았다면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누구보다도 강호의 경험이 풍부하고 무공이 뛰어난 교등조차도 자신의 눈앞에서 벌어진 일을 믿을 수 없어 순간적으로 몸이 굳어질 정도였다.
쿵! 쿵!
머리를 잃은 철혈쌍응의 몸뚱어리가 몇 번이나 경련을 일으키다가 폭포수 같은 선혈을 뿜어내며 바닥에 쓰러져 버렸다. 그리고 어느새 귀봉루의 입구에는 한 사람이 천천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평범한 회의를 입은 헌칠한 키의 사나이였다. 그 사나이의 칼자국이 나 있는 얼굴을 보는 순간, 선약연은 자신도 모르게 경악성을 터뜨리고 말았다.
“진 장문인……!”
진산월은 그녀에게는 시선조차 주지 않은 채 낙일방의 앞으로 다가왔다. 조금 전만 해도 그토록 무
시무시한 위력을 발했던 용영검은 언제 뽑혔냐는 듯 그의 허리춤에 얌전하게 매달려 있었다.
“수고했다. 이제부터는 내게 맡기도록 해라.”
낙일방은 난데없이 나타난 진산월의 출현에도 별로 당황하거나 놀라지 않았다. 다만 피바다 속에 쓰러져 있는 철혈쌍응을 돌아보며 약간 어리둥절해하는 모습이었다.
“장문사형, 왜 이들을…….”
진산월은 담담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중산에게 듣자니 이들은 구마회혼공이라는 특이한 공력을 익혀 목이 잘라지지 않는 한 죽지 않는다고 하더구나. 아마 조금 전에도 약간만 지체했다면 오히려 네가 이들의 손에 쓰러지고 말았을 것이다.”
그제서야 낙일방은 진산월이 느닷없이 살수를 써서 철혈쌍응을 제거한 이유를 알아차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진산월이 결코 이유 없는 살인을 할 사람이 아님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조금 전에는 반항도 못하는 자들을 죽인 줄 알고 순간적으로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던 것이다.
그것은 아마도 최근 들어 너무 많은 살인을 보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진산월의 시선이 한쪽에 우두커니 서 있는 교등에게로 향했다.
“내가 나타난 게 뜻밖이오?”
교등의 주름살투성이 얼굴에 유달리 깊은 고랑이 파여졌다. 교등은 어느새 조금 전의 경악했던 마음을 가라앉히고 평정을 되찾은 상태였다.
“확실히 뜻밖이네. 자네가 신검무적인가?”
“그렇소. 당신이 잠사라 불리는 교등이오?”
“노부를 알고 있군.”
“당신이 이곳에 있을 거라는 말을 들었소.”
교등의 심연처럼 깊은 눈에서 칼날같이 예리한 안광이 번뜩거렸다.
“노부에 대해 말한 자가 누구인가?”
“그건 별로 중요한 게 아니오.”
교등은 그 말에 입을 다문 채 한동안 진산월을 응시하고 있더니 느릿느릿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이제 와서 그런 건 중요한 일이 아니지. 어차피 노부가 이곳에서 살아남지 못한다면 누가 그런 말을 했는지 알아 보았자 아무 소용없는 일이 될 테니 말일세.”
교등은 생각에 잠겨 있다가 다시 물었다.
“자네는 언제부터 이곳에 있었나?”
“당신이 양중초로 분장하고 이곳에 왔을 때부터요.”
교등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렇다면 처음부터 자네는 우리의 계획을 훤히 알고 있었다는 말이군그래. 이상한 일이로군. 대체 일이 어디서부터 잘못되었을까? 노부 나름대로는 꽤 치밀했다고 생각했었는데…….”
“당신의 계획은 나름대로 괜찮았소. 다만 내가 이토록 빨리 이들과 다시 만나게 되리라고 미처 예상치 못했던 게 유일한 실수였소.”
교등은 그의 말을 부인하지 않았다.
“노부는 솔직히 자네가 두 번 다시 이들을 만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었네. 흑의사신은 좀처럼 허술하게 일을 처리하는 사람이 아닌데 이번에는 무언가 잘못 생각한 모양이군.”
“사실 고생을 하긴 좀 했었소. 하지만 어쨌든 나는 그들의 함정을 빠져 나왔고, 오늘 오후에 천하현에 도착했소.”
“천하현은 제법 넓은데 어떻게 일행들을 쉽게 만났나?”
“천하현 입구에 본파의 독문표식이 남겨져 있었소.”
그제서야 교등은 전후 사정을 대략이나마 짐작할 수 있었다. 진산월은 이미 몇 시진 전에 천하현에 도착해서 낙일방 등을 만났던 것이다. 그들은 귀봉루에 필시 상대의 함정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그 함정을 역이용할 계획을 세워 두었던 것이다.
교등은 문득 생각난 듯 물었다.
“그렇다면 노부가 객잔으로 보냈던 자들은…….”
“당신은 모두 여덟 명이나 보냈더군. 물론 그들은 두 번 다시 당신의 지시를 받을 수 없게 되었소.”
“맹천익은 어떻게 되었나?”
“당신이 직접 확인해 보시오.”
진산월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귀봉루 안으로 몇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맹천익과 전흠, 동중산과 손풍, 그리고 유소응이었다. 맹천익은 이미 자세한 사정을 알았는지 분노와 착잡함이 담긴 눈으로 선약연을 응시하고 있었다. 선약연은 그가 자신을 보고 있는 것을 알면서도 그에게는 시선을 주지 않고 무표정한 얼굴로 허공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미동도 않고 있었다.
교등은 귀봉루에 나타난 종남파의 고수들을 차례로 둘러보다가 나직한 탄식을 토해냈다.
“모두가 하나같이 뛰어난 인재들이로군. 좋은 재목들은 모두 종남파에만 몰리는 것 같구나.”
“칭찬이라면 고맙게 듣겠소.”
“물론 칭찬일세. 그중에서도 특히 자네에게 감탄하지 않을 수 없군.”
교등의 시선이 진산월에게로 향했다. 그는 진산월의 담담한 눈과 칼자국이 선명하게 나 있는 얼굴을 한동안 쳐다보더니 다시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노부 평생 오늘처럼 남에게 호되게 당해 보기는 처음일세. 자네는 자부심을 가져도 좋을 것이네.”
“자부심을 느끼려고 한 일이 아니오. 살기 위해 한 일이었소.”
“그렇지. 자네들을 유인하고 죽이려 한 것은 우리였지. 하지만 그 일의 발단에는…….”
교등은 무어라고 말을 하려다 손을 내저었다.
“이제 와서 그런 걸 따지는 일도 무의미하군. 자네는 어서 손을 쓰도록 하게.”
교등은 반항할 기운도 없는지 다소 무기력한 모습이었다. 그의 얼굴이 부쩍 늙어 보였다.
진산월은 그의 주름진 얼굴에 한 줄기의 피곤함이 어려 있는 것을 지켜보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한 가지 부탁만 들어주면 당신을 이대로 돌려보내겠소.”
뜻밖의 말에 교등은 물론이고 장내의 모든 사람들이 놀랐다. 종남파의 고수들은 이내 진산월에게 무언가 생각이 있겠지 하는 심정으로 놀라운 마음을 가라앉혔으나, 교등은 믿어지지 않는지 표정이 여러 차례 변했다.
그러다 갑자기 냉랭한 음성으로 말했다.
“지금 노부에게 사정을 봐주는 건가? 노부가 남에게 값싼 동정심 따위를 받을 사람으로 보이나?”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는 별로 궁금하지 않소. 그리고 사정을 봐준다니 터무니없는 소리지. 나는 나를 죽이려는 자를 순순히 용서해 줄 만큼 마음이 넓은 사람이 아니오.”
“그럼 조금 전의 말은 무슨 뜻인가?”
“말 그대로요. 나는 당신에게 원하는 것이 있고, 당신은 내게 줄 것이 있소. 서로 조건만 맞다면 굳이 검을 겨누어 끝장을 볼 필요까지는 없지 않겠소?”
교등은 진산월의 의중을 파악하려는 듯 예리한 눈으로 그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하나 한참을 보아도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그제서야 교등은 강호에 퍼진 신검무적의 소문이 결코 허언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교등의 얼굴에 씁쓸한 미소가 내걸렸다.
“신검무적이 나이답지 않게 심계가 깊어 상대하기 까다롭다고 하더니 정말 소문대로였군. 오늘 노부는 정말로 크게 안계(眼界)를 넓히는구나.”
탄식인지 넋두리인지 모를 소리를 내뱉고 난 교등은 이내 평소의 모습으로 되돌아왔다.
“자네가 원하는 건 무엇인가?”
“양중초 부부요.”
“그들 부부를 놓아주면 노부가 이곳을 순순히 떠나도록 용인하겠단 말인가?”
“그렇소.”
교등은 잠시 생각하더니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그들 부부는 두 사람이고 노부는 한 명인데, 그렇게 하면 노부가 손해 보는 게 아닌가?”
“그렇게 숫자를 맞추고 싶다면 선 소저를 데리고 가도 좋소.”
교등의 눈살이 살짝 찌푸려졌다.
“어차피 그녀는 삼월보의 사람이라 남아 있어도 양중초가 어쩌지 못할 텐데 무엇 때문에 노부가 데려간단 말인가?”
“그녀가 이곳에 있어도 상관없지만, 아마 그렇게 된다면 나는 그녀에게서 당신들에 대한 제법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 거요.”
“그녀는 우리에 대해서는 별로 아는 게 없네.”
처음으로 진산월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아무런 감정도 담겨 있지 않은 차가운 미소였다.
“그건 당신 생각이지. 그녀 같은 여자가 당신들과 손을 잡으면서 당신들에 대해 별로 조사해 보지도 않았을 것 같소?”
교등의 몸이 잠시 멈칫거렸다. 그는 고개를 돌려 선약연을 쳐다보았으나, 선약연은 여전히 허공에 시선을 둔 채 꼼짝도 않고 있었다.
교등은 선약연을 향해 입을 열었다.
“우리의 말을 들었느냐?”
선약연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교등은 다시 물었다.
“네 생각은 어떠냐? 노부를 따라가겠느냐?”
선약연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교등은 그녀의 말없는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는 표정이었다.
그때 그녀가 모처럼 입을 열었다.
“나를 처음 유혹해서 삼월보를 나오게 한 자가 누구인지 잊지 마세요.”
그 말에 교등의 표정이 순간적으로 굳어졌다. 교등은 이내 얼굴의 표정을 풀며 온화하게 웃었다.
“허허…… 노부가 잊을 리 있겠느냐? 아무튼 잘 생각했다. 너는 노부와 함께 가도록 하자.”
모르는 사람이 보았다면 손녀를 챙겨 주는 자상한 할아버지라고 생각할지도 몰랐으나, 다행히 장내의 누구도 그런 생각을 하지는 않았다.
교등은 마음을 정하자 한결 홀가분해진 듯 사라졌던 여유로운 표정이 되살아났다.
“그 조건을 받아들이기로 하겠네.”
진산월은 이미 그가 어떤 결정을 내릴지 짐작하고 있던 터라 담담히 대꾸했다.
“잘 생각했소.”
“그런데 어떤 식으로 해야 할지 모르겠군. 그들 부부는 지금 이곳에 없으니 노부와 함께 그들이 있는 곳으로 갈 텐가? 아니면 노부를 믿고 일단 우리를 먼저 보내 주겠나?”
진산월이 무어라고 대답하려는 순간, 선약연이 먼저 입을 열었다.
“우리를 보내 줘요. 내일까지 그들이 당신을 찾아가도록 할 테니.”
진산월이 그녀를 쳐다보자 그녀는 냉정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들 두 사람은 어차피 더 데리고 있을 필요가 없으니 며칠 내로 풀어 주려고 했어요. 아무리 그래도 아버지의 형제분을 내가 죽도록 내버려둘 것 같아요?”
“선 소저의 말을 믿겠소. 그럼 두 분은 잘 가시오.”
진산월이 축객령을 내리자 선약연은 주저하지 않고 귀봉루 밖을 향해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까부터 애증(愛憎)이 뒤덮인 눈으로 선약연을 노려보고 있던 맹천익이 그녀의 앞을 막아섰다. 하나 그녀가 무심한 시선으로 자신을 가만히 응시하고 있자 맹천익은 여러 차례 얼굴 표정이 변하더니 끝내는 무거운 한숨을 내쉬며 몸을 비켜서고 말았다.
그가 달리 그녀에게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그녀의 몸은 이내 귀봉루 밖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교등은 진산월을 향해 낮게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했다.
“오늘 자네에게 배운 교훈은 결코 잊지 않겠네. 아마 조만간 이 빚을 갚을 수 있을 걸세.”
이어 그는 진산월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선약연의 뒤를 이어 귀봉루 밖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맹천익은 그때까지도 그녀가 사라진 어둠 속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그 모습이 안되어 보였는지 낙일방이 진산월을 향해 다가오며 말했다.
“저자를 놓아준 건 이해를 합니다만, 선 소저가 걱정되는군요. 선 소저의 정체가 발각된 이상 그녀의 효용 가치가 없어진 셈인데, 과연 그들과 계속 동등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을까요?”
“그녀는 보기보다는 강한 여자다. 어떤 수를 써서라도 그들에게 자신이 필요한 존재라는 것을 납득시킬 것이다.”
멍하니 있던 맹천익이 그 말에 귀가 번쩍 뜨였는지 급히 진산월을 돌아보았다.
“정말 그럴까요?”
진산월은 그를 향해 담담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럴 자신이 있지 않았다면 그녀는 교등을 따라가지 않았을 거요.”
맹천익은 곰곰이 생각하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군요. 예전부터 그녀는 상당히 독특한 성격이었습니다. 여자치고는 지나치게 독립적이었고, 어떤 식으로든 남에게 조금도 신세를 지려 하지 않았지요. 이번에도 틀림없이 자신만의 방식으로 살아남을 겁니다.”
그의 음성에는 무어라 형용키 어려운 착잡함이 담겨 있었다.
중인들은 모두 그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기에 묵묵히 그를 지켜보고만 있었다. 심지어는 그와 가장 친해서 수시로 농담을 주고받던 손풍조차도 입을 굳게 다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설픈 위로는 하지 않느니만 못하기 때문이었다.
일행이 귀봉루를 벗어난 것은 그로부터 반 시진이 지난 후였다. 낙일방이 내상을 치료하기 위한 운기조식을 마칠 때까지 기다렸던 것이다.
운기조식을 끝낸 낙일방의 두 눈에는 어느 때보다 강한 신광이 어른거렸고, 얼굴에는 자신감이 가득 담겨 있었다. 철혈쌍응과의 싸움은 비록 살벌하기 그지없었으나, 그 싸움을 승리로 이끈 낙일방은 비로소 자신의 무공에 대해 보다 확실한 믿음을 가질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진산월이 낙일방으로 하여금 홀로 철혈쌍응과 대적하도록 내버려둔 진정한 이유였다.
귀봉루를 벗어나기 직전, 낙일방은 문득 귀봉루 안을 한차례 쓸어보았다. 귀봉루 안은 여기저기 선혈이 낭자해 있고 한쪽에는 머리를 잃은 두 구의 시신마저 나뒹굴고 있어 그야말로 참혹한 풍경이었으나, 낙일방에게는 왠지 그다지 살벌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의 뇌리에 문득 자신을 향해 속삭이던 야릇한 음성과 뜨거운 시선이 떠올랐다. 비록 결정적인 순간에 진산월의 전음성으로 정신을 차리긴 했으나, 그 음성과 시선에 사로잡힌 동안의 일은 낙일방으로서는 처음으로 겪어 본 희귀한 경험이 아닐 수 없었다.
그 음성과 시선에 담긴 진한 유혹의 그림자와 당시의 자신이 느꼈던 가슴속 두근거림은 쉽게 잊혀지지 않을 것 같았다.
낙일방의 입가에 한 줄기 고졸한 미소가 떠올랐다.
‘오늘 일은 그야말로 봄밤의 한때에 벌어진 한바탕 꿈(春宵一刻一場夢) 같구나…….’
낙일방은 뜻 모를 한숨을 내쉬고는 일행 중 제일 마지막으로 귀봉루를 빠져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