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18권 월광천추(月光千秋)편 : 9화
제186장. 준조절충(樽俎折衝)
들어온 사람은 새하얀 백의를 입은 미녀였다.
그녀의 옷은 평범했고, 머리나 몸에 별다른 장신구도 하지 않았다. 하나 그녀가 나타나는 순간 방안이 온통 환해진 듯한 착각이 들었다.
그녀의 용모는 아름답다는 형용이 무색한 것이었다.
진산월은 지금까지 적지 않은 여인들을 보아 왔고, 그중 대부분은 강호상에 이름이 널리 알려진 미녀들이었다. 하나 외모만 놓고 보자면 지금 자신의 눈앞에 서 있는 백의미녀보다 뛰어난 여자는 없다고 단언할 수 있었다. 심지어 자신의 마음속 연인인 임영옥보다도 아름다웠다.
단 한 사람, 천봉궁의 소궁주인 단봉공주라면 가능할지 몰랐으나, 아쉽게도 진산월은 단봉공주의 진짜 얼굴을 본 적이 없었다.
진산월과 시선이 마주치자 백의미녀는 곱게 웃으며 허리를 숙여 인사를 했다.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저는 정난향입니다.”
그녀의 음성은 그녀의 미모와 너무도 잘 어울려서 듣는 이의 마음에 깊은 인상을 남겨 주었다. 한없이 청량(淸凉)한 듯하면서도 달콤한 느낌을 불러일으키는 목소리여서 아무리 듣고 있어도 질리지가 않을 것 같았다.
“종남의 진산월이오.”
“강호에 명성이 높은 진 장문인께서 비천한 소녀를 찾아 주시니 영광입니다. 기다리시느라 지루하지는 않으셨는지요?”
“덕분에 좋은 친구를 사귈 수 있어서 지루함을 느낄 겨를이 없었소.”
“다행이군요. 친구를 사귀신 걸 축하드리겠습니다.”
정난향은 진산월의 앞에 다소곳이 앉았다.
장내는 다소 어수선했다. 한쪽에는 손풍이 머리를 처박은 채 코를 골며 자고 있었고, 실내의 여기저기에는 빈 술병이 널려 있어 한바탕 소동이라도 벌어진 것 같았다.
정난향은 두 명의 시비를 불러 방안을 치우고 술상을 다시 보게 했다. 여느 기루라면 주인이 직접 지시하지 않고 따로 시비들을 관리하는 사람이 있을 텐데 난향원은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시비들의 일솜씨도 그리 능숙하지 않아 보였고, 정난향 자신도 그런 것에 크게 신경을 쓰지 않는 눈치였다.
그런데도 손님에게 전혀 기분 나쁜 느낌이 들지 않게 하고 있으니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건 아마도 정난향과 시비들의 행동에 쓸데없는 허례(虛禮)나 가식(假飾)이 보이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비록 다른 기루처럼 세련되지는 않아도 미숙한 그대로 자신들의 최선을 다해 손님을 접대하고 있으니 그 정성이 손님들에게도 그대로 전달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난향원은 일반적인 기루들과는 확실히 달랐다.
다시 술상이 차려졌고, 만취한 손풍은 한쪽 구석으로 옮겨진 채 계속 잠들어 있었다.
정난향은 섬섬옥수(纖纖玉手)로 술병을 들어 진산월에게 술을 따랐다. 진산월은 그녀가 자신에게만 술을 따르고 손검당에게는 술을 따르지 않자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이 친구에게는 왜 술을 따르지 않는 거요?”
정난향은 살포시 웃더니 손검당을 향해 물었다.
“내가 당신께 술을 따라 주길 원하나요?”
손검당은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내 술은 내가 따라 마실 거요.”
그는 그녀의 손에서 빼앗듯 술병을 낚아채고는 자신의 술잔에 술을 따랐다. 그제서야 진산월은 두 사람이 서로 안면이 있는 사이임을 알아차렸다.
“자, 건배.”
손검당이 짐짓 쾌활하게 들고 있는 술잔을 쳐들자 진산월도 묵묵히 그를 따라 술잔을 들었다. 정난향은 술잔 대신 찻잔을 집었다.
“저는 술을 마실 줄 모르니 차로 대신하겠습니다. 양해해 주십시오.”
기녀가 술을 마실 줄 모른다는 것도 무척이나 특이한 일이었다. 설사 술을 마실 줄 모른다 할지라도 처음 찾아온 손님 앞에서 술 대신 차로 건배를 하겠다는 것은 자칫하면 손님으로 하여금 자신이 무시당했다고 느끼게 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도 그녀는 태연하게 그렇게 말했고, 듣고 있는 진산월도 그녀의 행동이 자연스럽게 생각되어 별다른 거부감이 들지 않았다.
‘그녀의 가장 큰 장점은 아름다운 얼굴이 아니라 바로 이러한 자연스러움이로구나.’
진산월은 그제서야 왜 낙양의 많은 풍류남아들이 정난향을 최고의 여인으로 여기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단순히 미모만 탁월해서는 남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없었다. 미모란 아무리 뛰어난 것이라도 자꾸 보게 되면 점차 식상해질 수 있었다.
하나 사람의 성격과 몸에서 은연중에 흘러나오는 기품은 아무리 자주 보아도 쉽게 질리지가 않는 것이다.
정난향은 단순히 얼굴만 아름다운 여인이 아니라 차분하면서도 매혹적인 음성과 자연스런 태도, 그리고 진심 어린 마음과 거짓 없는 당당함을 지닌 여인이었다. 그러한 여러 가지 면모가 모여서 그녀를 오늘의 낙양제일화로 만든 것이다.
세 사람은 각기 술과 차로 건배를 했다. 처음 만나는 세 명의 남녀가 있는 자리치고는 장내의 분위기는 그다지 나쁘지 않았다.
정난향은 찬찬한 눈길로 진산월을 응시했다. 이런 미녀의 시선을 한 몸에 받고 있다면 남자라면 누구라도 가슴이 두근거릴 텐데 진산월의 얼굴에는 별다른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사실 진산월이라고 그녀의 이런 시선이 기분 나쁠 리는 없었다. 다만 그는 쉽게 경동(驚動)하는 성격이 아니었고, 여인의 눈길 한 번에 가슴이 두근거릴 만큼 순진한 풋내기도 아니었을 뿐이다.
정난향의 붉은 입술이 살짝 열리며 사람의 마음을 매혹케 하는 듯한 그녀 특유의 청량하면서도 달콤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진 장문인에 대한 말씀은 많이 들었지만, 직접 뵙게 되니 소문과는 또 다른 느낌이 드는군요.”
여인에게서 이런 말을 들었다면 남자라면 묻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어떤 느낌말이오?”
정난향의 별빛처럼 영롱한 두 눈은 진산월의 얼굴에 고정되어 있었다.
“소문으로 듣기로는 진 장문인은 상당히 예리하고 빈틈없는 사람이라고 하더군요. 심기가 깊고 좀처럼 남에게 속지 않으며 손속도 매서워서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없다고도 했어요. 그래서 저는 진 장문인이 차갑고 냉정하며 무서운 사람일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직접 만나보니 그렇지 않다는 말이오?”
“심기가 깊고 냉정한 분이라는 건 알겠어요. 하지만 빈틈이 없거나 차가운 분 같지는 않군요. 무섭다는 생각도 들지 않구요.”
“내가 허점투성이에 물러터진 인간이란 말처럼 들리는군.”
정난향은 입을 가리고 나직하게 웃었다.
“호호…… 제가 한 말이 그런 뜻이 아니라는 건 진 장문인께서 더 잘 알고 계실 거예요.”
웃고 있는 여인은 언제나 아름답다. 하물며 그 여인이 낙양 최고의 미인이라면 더할 나위 없을 것이다. 진산월 또한 그녀가 아름답다고 느꼈다. 미녀를 보고 아름다움을 느끼지 못한다면 죽어 있는 시체와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하나 아름다움을 느꼈다고 해서 꼭 그 아름다움에 취하란 법은 없었다. 진산월 또한 그녀가 보기 드문 미녀라고 생각하고 있었고, 그녀의 차분한 음성과 태도가 마음에 들었으나 그뿐이었다.
그의 마음속에는 이미 누군가의 그림자로 가득 채워져 있었기에 다른 사람이 뚫고 들어갈 여지가 별로 없었다.
그래서 그는 정난향의 은근한 웃음에도 담담하게 대꾸할 수 있었다.
“나는 물론 여자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사람은 아니오. 그런데 왜 내가 빈틈이 있다고 생각했소? 나는 아직 당신에게 허술함을 보인 것 같지는 않은데……”
정난향은 살짝 눈웃음을 쳤다.
일부러 그를 유혹하기 위한 동작이 아니라 흥에 겨울 때 자신도 모르게 나오는 일종의 습관 같은 것이었다.
“물론 진 장문인은 제게는 한 치의 틈도 보여 주지 않으셨어요. 저로서는 서운한 일이지만 말이죠. 다만 손검당 같은 사람을 친구로 사귀었다는 게 뜻밖일 뿐이에요.”
진산월의 음성은 여전히 담담했다.
“그가 어때서 그렇소?”
“진 장문인은 그의 성격이나 신분, 지위도 모르지 않나요? 그런데도 처음 본 그를 선뜻 친구로 사귀었다고 해서 놀랐습니다.”
“친구란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사귀는 법이오. 신분이나 지위 따위는 전혀 고려할 대상이 아니란 말이오.”
“성격은 어떤가요?”
“그의 성격이 어때서 그렇소?”
정난향은 여전히 부드럽게 웃고 있었으나 흘러나오는 음성에는 일말의 냉정함이 담겨 있었다.
“그는 타고난 거짓말쟁이예요. 식언(食言)을 밥 먹듯이 하며 순간의 쾌락을 위해서 가까운 사람을 서슴없이 구렁텅이 속으로 집어넣기도 하죠. 그래도 본인은 그게 풍류라고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에요.”
진산월은 손검당을 돌아보았다. 손검당은 처음의 자세 그대로 앉아 있었다. 표정 또한 별로 달라진 것이 없어서 그녀의 말을 전혀 듣지 못한 사람 같았다.
진산월은 다시 그녀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건 성격이 아니라 행태요. 행태만으로 그 사람의 성격을 규정할 수는 없소.”
정난향은 그 말에 입을 다물고 한동안 침묵을 유지했다. 그러더니 특유의 차분하면서도 매혹적인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그의 어떤 점이 진 장문인의 마음에 들었는지 모르겠네요. 확실히 남자들 사이의 일은 여자인 저로서는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 면이 있군요.”
“나도 마찬가지로 여자들 사이의 일은 종종 이해하지 못할 때가 있소.”
정난향은 다시 엷은 미소를 떠올렸다.
“그건 진 장문인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남자들도 마찬가지랍니다. 남자들에게 이해가 돼는 순간, 여자는 여자로서의 매력을 잃어버리게 되지요.”
“여자들을 잘 이해해 주는 남자도 있지 않소?”
정난향의 눈빛이 어느 때보다도 영롱하게 반짝거렸다.
“여자들을 완벽하게 이해해 주는 남자도 아주 가끔 있긴 하지요. 그런 남자들은 대체로 여자들을 불행하게 만든다는 것이 문제지만 말이죠.”
“여자들을 이해해 주는 것이 그녀들을 불행하게 만든단 말이오?”
“그건 이해해 주고 안 해 주고의 문제가 아니에요. 남자의 문제예요.”
진산월은 언뜻 그녀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반문했다.
“남자가 문제라니? 남자가 여자를 불행하게 만든다는 뜻이오?”
“여자를 완벽하게 이해해 주는 남자일수록 결국에는 그 여자를 불행하게 만들어 버려요. 자신이 여자를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다고 믿든 순간, 남자는 그 여자에게서 더 이상의 매력을 느끼지 못하게 되니까요.”
진산월은 잠시 침음하다 말을 내뱉었다.
“그건 무척 잔혹한 일이로군. 완벽한 이해가 결국에는 상대를 멀어지게 만드는 원인이 되어 버리다니…….”
정난향의 입가에 떠올라 있는 미소가 왠지 씁쓸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여자는 남자가 자신을 완벽하게 이해해 주기를 너무 바라서는 안 돼요.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일수록 더욱더.”
“하지만 완벽한 이해 없이 사랑을 유지할 수 있겠소?”
“그래서 저는 세상에는 완벽한 사랑이란 없다고 생각해요.”
“적당한 이해와 적당한 사랑…….”
정난향의 미소가 조금 더 고혹적으로 변했다.
“바로 그거예요.”
진산월은 그녀의 말을 수긍하지도, 그렇다고 부인하지도 않았다. 사라에 대한 그녀의 이론은 무척이나 흥미로웠지만, 그것이 옳은지 그른지는 누구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건 각자가 판단할 문제였다.
진산월 개인적으로는 완벽한 이해 없이는 완벽한 사랑도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다시 말해서 그는 완벽한 사랑이란 분명히 존재한다고 믿고 있었다. 물론 그 안에는 완벽한 이해라는 전제조건이 붙긴 하지만 말이다.
진산월이 묵묵히 상념에 잠겨 있는 광경을 정난향은 조용히 지켜보고만 있었다. 그러다가 혼잣말처럼 나직한 음성을 토해냈다.
“누군가가 그러더군요. 여자란 마치 공기와 같아서 잡았다고 느낀 순간 어느새 손가락 사이로 빠져 나가 버린다고. 여자인 제 입으로 이런 말을 한다는 게 우습긴 하지만, 저도 그 말이 어느 정도는 맞다고 생각해요. 확실히 여자들에게는 그런 면이 있지요.”
진산월의 시선이 정난향의 얼굴로 향했다.
“당신도 그렇소?”
정난향은 빙긋 웃었다.
“저는 여자가 아닌가요?”
진산월은 씁쓸하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남자들에 대해서는 들은 바 없소? 여자가 공기라고 주장하는 그 대단한 고인(高人)께 말이오.”
“호호…… 진 장문인도 가끔은 그런 심술궂은 말씀을 하실 때가 있군요. 물론 그 사람은 남자에 대해서도 나름대로의 의견을 피력했어요.”
“그가 무어라고 했소?”
“남자는 불과 같다고 하더군요. 끝내는 재가 될 줄 알면서도 계속 타오르기만 한다고. 진 장문인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진산월은 조금 전에 정난향이 했던 말을 그대로 따라했다.
“어느 정도는 맞는 말 같소. 확실히 남자들에게는 그러한 일면이 있기는 하지.”
정난향은 살짝 눈을 흘겼으나 이내 다시 교소를 터뜨렸다.
“호호…… 진 장문인도 그런 면이 있으세요?”
“당신이 보기에는 어떨 것 같소?”
정난향은 진산월의 얼굴을 다시 한 번 찬찬히 살펴보았다. 그녀의 시선은 그의 속을 알 수 없는 담담한 눈을 지나 듬직한 코와 입술을 거쳐 홀쭉한 뺨에 선명하게 새겨진 칼자국에 잠시 고정되었다.
“진 장문인은 불보다는 물에 더 가까운 분 같군요.”
진산월의 얼굴에 흥미롭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 거요?”
“진 장문인은 남들처럼 분노를 겉으로 표현하지 않을 것 같아요. 항상 냉정하고 침착해서 좀처럼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는 편 아닌가요?”
“계속해 보시오.”
“하지만 그렇다고 무작정 참고만 있는 성격도 아닌 것 같군요. 그러니 언뜻 보기에는 거대한 물처럼 고요한 것 같아도 일단 움직이면 성난 바다처럼 누구도 막을 수 없는 격렬함도 가지고 있을 것 같아요.”
“듣고 보니 그럴듯하군. 나도 미처 몰랐던 내 성격을 어찌 그리도 잘 알고 있소?”
정난향은 진산월이 농담을 하고 있는 것을 알고는 자신도 방긋 웃으면 가볍게 말을 받았다.
“많은 남자들을 만나면서 여기저기서 주워들은 풍월을 읊었을 뿐이니 비웃지 말아 주세요.”
“비웃다니 그럴 리 있소? 당신의 말이 상당히 정확한 것 같아서 놀라고 있던 참이오.”
진산월은 한쪽에서 묵묵히 술잔을 기울이고만 있는 손검당을 슬쩍 눈으로 가리켰다.
“저 친구는 어떤 사람일 것 같소?”
손검당은 힐끗 진산월을 쳐다보며 쓸데없는 짓을 한다는 표정을 지었으나 여전히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정난향은 깊게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재빨리 입을 열었다.
“모르겠군요. 굳이 말하자면 스스로를 바람이라고 생각하는 가짜 풍류공자(風流公子) 정도?”
“내가 보기에도 바람 같은 면이 있기는 한 것 같군. 그런데 가짜 풍류공자라니 그를 너무 비하한 게 아니오?”
“그는 풍류의 진정한 의미가 무언지도 모르는 사람이에요.”
한없이 부드러우면서도 포근할 것 같은 정난향이 손검당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면 왠지 모르게 날카롭고 냉랭해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손검당은 그런 심한 말을 들으면서도 전혀 화를 내거나 불쾌한 표정을 짓지 않았다. 이런 대우를 받을 거면서 무엇 때문에 난향원을 찾아왔단 말인가?
진산월은 두 사람 사이에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일이 있음을 알았지만 지금 굳이 그걸 캐묻고 싶지는 않았다. 때로는 모르고 넘어가는 게 더 좋을 수도 있는 법이다.
“그렇다면 낙양에서 제일가는 풍류공자들이라는 초일화나 봉태평은 어떻소? 그들 정도라면 제대로 된 풍류를 즐길 줄 아는 인물들이었을 텐데.”
진산월이 슬쩍 얼마 전에 피살된 초일화와 봉태평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자 정난향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남들이 볼 때는 그들이 제법 풍류를 아는 사람들 같아도 그들 역시 여느 남자들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어요.”
“그들을 만나 본 적이 있소?”
“낙양에 살면서 그들을 보지 않을 수는 없지요. 두 사람은 여러 번이나 수하들을 보내거나 자신들이 직접 찾아오곤 했어요.”
“자신들도 기루를 운영하면서 이곳을 찾아왔단 말이오?”
초일화와 봉태평이 운영하는 기루들은 대부분이 몸을 파는 청루들이었다. 그렇기는 해도 기루의 주인이 다른 사람의 기루에 출입한다는 것은 확실히 쉽게 보기 힘든 일이라고 할 수 있었다.
“남들의 시선이 있어서 늦은 밤에 찾아올 때가 대부분이었어요.”
진산월은 그들에 대해 흥미가 동한 듯 계속 질문을 던졌다.
“그들은 어떤 자들이었소?”
정난향은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더니 조용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초일화는 제법 깔끔한 사람이었어요. 예의가 바르고 항상 웃고 있어서 소소공자(笑笑公子)라고 부르기도 했지요. 듣기로는 화를 내는 경우를 보기가 일 년에 한두 번도 힘들다고 하더군요. 말을 무척 잘했고, 술을 즐겼으며, 금(琴)에도 상당한 재능이 있었어요.”
“그야말로 풍류의 전형(典型) 같은 인물이었구려.”
“남자들은 모두 그렇게 생각했겠지요.”
“당신은 어떻소?”
“사람이 살면서 기쁠 때 웃고 슬플 때 울고 화가 날 때 화를 내는 것은 자연스런 일이에요. 그런데 그는 평생 동안 남들 앞에서 화를 내 본 적이 없다고 하니 그런 위선(僞善)이 어디 있겠어요?”
“그가 위선자(僞善者)란 말이요?”
그녀의 말은 듣기에 따라서는 상당히 문제가 될 수도 있는 발언이었으나 정난향은 별로 개의치 않는 것 같았다.
“위선자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그의 웃음이 결코 그의 성격을 나타내는 것은 아니라는 건 분명해요. 초일화는 웃으면서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사람이고, 실제로 종종 그런 일을 했지요. 몇 년 전에 그는 자신의 기루에서 도망친 기녀(妓女)를 찾아내어 자신의 손으로 직접 죽인 적도 있었어요. 초일화는 그 기녀를 마음에 들어 했는데, 그 기녀는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있었지요. 질투심에 눈이 먼 초일화가 순간적으로 가면을 벗었던 거예요.”
“봉태평은 어떻소?”
“봉태평은 초일화보다는 그나마 나은 인물이에요. 그는 그다지 잘생기지는 않았으나 옷을 무척 잘 입었고, 태도에 기품이 있었지요. 손 씀씀이도 커서 낙양 일대에 천재지변이 발생하면 항상 거금(巨金)을 풀어 이재민들을 도왔어요. 듣기로는 한 번도 여자들을 강압적으로 취해 본 적도 없고, 일단 취한 여자는 어떤 식으로든 책임을 졌다고 하더군요.”
“그렇다면 그자야말로 낙양 제일의 풍류아(風流兒)라고 할 수 있겠구려?”
정난향은 웃으며 고개를 저았다.
“그렇지도 않아요. 그가 이재민을 도왔던 것은 남들의 칭송을 바라고 한 일이에요. 실제로 그는 이재민들에게 거금을 푼 것 외에는 불쌍한 거지들에게 동냥 한 푼 준 적이 없는 인물이에요. 여인을 함부로 취하지 않는 이유도 그의 본처(本妻)가 워낙 투기(妬忌)가 심하기 때문이에요. 실제로 그는 무척 색을 밝혀서 자신이 운영하는 기루의 모든 기녀들을 건드렸다고 하더군요. 그녀들이라면 당연히 그에게 아무런 반항도 하지 못했겠죠.”
그녀의 말을 모두 듣고 나자 진산월도 헛웃음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낙양에 알려져 있는 두 사람에 대한 명성과 그녀에게서 들은 실제의 모습이 너무도 달랐던 것이다.
“그런데도 그들에 대한 좋지 않은 소문이 전혀 퍼지지 않았다는 건 다소 이해하기 어렵구려. 낙양 사람들이 모두 눈과 귀가 멀지 않은 한 그들의 진면목을 알고 있는 자들도 상당히 있었을 거 아니오?”
“물론 적지 않은 자들이 그들이 어떤 자들인지 알고 있었죠. 하나 그들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는 자들일수록 입을 굳게 다물었어요. 공연히 그들의 심기를 건드려 위험을 자초하고 싶지 않았던 거죠.”
진산월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다른 자들이야 그들의 눈치를 보았다고 해도 그들 본인들은 그렇지 않았을 거 아니오?”
“그들이 왜 서로를 헐뜯지 않았느냐는 말씀이에요?”
“그렇소. 듣자하니 그들은 세상에 둘도 없는 앙숙지간이라고 하더군. 만약 그렇다면 그들은 왜 상대에 대한 험담을 퍼뜨리지 않은 거요?”
“그건 그들이 소문만큼 나쁜 사이가 아니었기 때문이죠.”
“소문이 잘못되었다는 거요?”
“그래요. 어떻게 해서 그들이 앙숙지간이라는 소문이 퍼졌는지 모르지만 내가 본 바로는 두 사람 사이는 특별히 친밀하지는 않아도 그렇게 나쁜 관계는 아니었어요.”
“어떻게 그걸 알고 있소?”
“그들은 그런 소문에 대해 별로 탐탁지 않아 하는 것 같았어요. 그들이 진짜 앙숙이었다면 나를 만났을 때 어떤 식으로든 상대방을 헐뜯거나 폄하했을 거예요. 하지만 그들은 그러지 않았어요. 오히려 가끔 상대에 대해 물어 보면 서로 간에 약간의 존경심마저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될 정도였어요.”
진산월은 잠시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더니 정난향을 향해 물었다.
“당신이 생각하는 진정한 풍류란 어떤 것이오?”
정난향은 분명한 어조로 말했다.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라고 생각해요.”
진산월은 전혀 예상치 못했던 말에 다소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남을 배려하는 마음?”
“풍류란 사실 지극히 개인적인 만족에서 시작한 취미 생활이에요. 그래서인지 남자들은 풍류를 너무 자기중심적으로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요. 여러 여자들을 닥치는 대로 섭렵하고, 명승지를 찾아다니며 좋은 술을 마시고 시라도 한 수 읊조리면 최고의 풍류를 즐기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지요.”
그녀의 표현이 다소 과격하기는 했으나 진산월은 내심 수긍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다수의 남자들이 풍류를 그런 식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 분명한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개중 조금 나은 사람들은 평범한 일상(日常)의 생화에서 여유를 찾는 것으로 나름대로의 풍류를 즐기고 있기도 하지만 그건 정말 극소수의 일일 뿐이에요. 그리고 그러한 삶도 진정한 풍류라고는 할 수 없다고 생각해요.”
진산월은 소소한 생활에서 여유를 찾는 것도 상당히 멋진 풍류의 한 방법이라고 믿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의 평가에 선뜻 공감이 가지 않았다.
“그건 왜 그렇소?”
“생활의 여유를 즐긴다는 건 결국은 단순히 자기만족에 불과해요. 진정한 풍류란 혼자가 아닌 여럿이 누릴 수 있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상대에 대한 배려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이 저의 생각이에요.”
진산월은 그녀의 말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낙양제일화가 생각하는 풍류는 전혀 남들이 예상치 못했던 거이었다. 그녀의 독특한 사고방식과 마음 씀씀이에 진산월은 깊은 인상을 받았다.
“정말 멋진 생각이오. 당신의 말을 듣고 있으니 왠지 나도 지금까지 풍류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지내왔던 것 같구려.”
정난향은 진산월을 향해 화사한 미소를 보여 주었다.
“진 장문인께선 틀림없이 진정한 풍류를 즐기실 수 있을 거예요.”
“나도 그렇게 되길 바라겠소.”
- * *
밤이 깊었다.
그녀는 그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가 방문을 열고 나간 후 진산월과 손검당은 한동안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그렇다고 장내의 공기가 무거운 것은 아니었다.
한참 후에야 진산월은 담담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그녀는 정말 특이한 여자로군.”
손검당의 시선이 그를 향했다.
“어떤 면에서 말인가?”
“자신의 입으로 자기가 공기 같은 여자라고 말할 수 있는 여자가 과연 얼마나 되겠나?”
손검당은 잠시 생각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확실히 그녀는 쉽게 볼 수 없는 여자일세.”
“왜 아까 그녀의 말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나?”
진산월이 묻는 것은 손검당을 향해 정난향이 가혹한 평가를 했을 때 왜 가만히 있었느냐는 것이었다.
손검당의 얼굴에 쓸쓸한 빛이 감돌았다.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나? 그녀의 말은 모두 사실일세.”
“자네가 정말 타고난 거짓말쟁이란 말인가?”
“타고났는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살다 보이 어쩔 수 없이 거짓말이 늘게 되긴 하더군.”
“거짓말이라면 나도 제법 하는 편일세.”
손검당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자네가 말인가?”
“자네 말대로 살다 보니 그렇게 되더군.”
“자네 같은 사람도 거짓말을 하다니 뜻밖이네. 오늘도 거짓말을 했나?”
진산월은 부인하지 않았다.
“거짓말에도 종류가 있네. 일부러 상대를 속이기 위해서 하는 거짓말과, 꼭 해야 할 말을 하지 않아 상대로 하여금 스스로 속아 넘어가게끔 하는 거짓말. 내가 하는 거짓말은 주로 후자(後者)일세.”
“어떤 말을 하지 않았나?”
“내가 그녀를 만나러 여기까지 온 것은 그녀의 미모를 보기 위해서가 아니었네.”
“그 정도는 나도 짐작하고 있었네. 아마 그녀도 지금쯤은 눈치 채지 않았겠나? 자네가 여색(女色)을 즐기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쯤은 그녀도 알게 되었을 테니 말일세.”
“그럴 테지. 그녀는 어리석은 여자가 아니니.”
“자네가 다른 목적이 있어서 그녀를 만났다면 그 목적은 이루어졌나?”
진산월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네.”
“자네의 목적이란 게 혹시 초일화와 봉태평에 관한 것이었나?”
“어떻게 알았나?”
손검당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어깨를 한차례 으쓱거렸다.
“자네 같은 사람이 이미 죽어 버린 파락호들에게 너무 지나친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했지. 그들의 무엇을 알고 싶었던 것인가?”
“나는 그들이 소문대로 앙숙지간인지, 아니면 소문과 달리 친분이 있는 사이인지 궁금했을 뿐이네.”
손검당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게 무슨 중요한 일이라고 명문정파의 장문인 신분으로 남들의 손가락질을 받을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일개 기녀를 찾아왔나?”
“내가 진정으로 알고 싶었던 것은 지금 낙양성에서 벌어지고 있는 연쇄살인의 진정한 목표가 무엇인가 하는 것이었네.”
“초일화와 봉태평의 친분 관계를 조사하면 그 목표를 알 수 있단 말인가?”
손검당은 반 농담 삼아 말했으나 의외로 진산월은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네.”
“이거 정말 궁금하군. 어서 말해 주게. 자네도 알지 모르지만 난 보기보다는 성미가 급한 사람일세.”
“들어 보게. 이번 연쇄살인 사건의 피해자들에게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네.”
“그들이 모두 상인이라는 점이지.”
“바로 그렇네. 그리고 낙양의 상인들은 대부분이 어떤 식으로든 한곳과 연결되어 있지.”
손검당은 짤막하게 말했다.
“석가장!”
“바로 그렇네. 그렇다면 연쇄살인의 흉수가 최종적으로 노리고 있는 것은 석가장일까? 하지만 다른 피해자들과는 달리 나는 두 명에 대해서는 그들이 석가장과 관련이 있다는 확신을 가질 수 없었네.”
“그들이 바로 초일화와 봉태평이란 말인가?”
“그렇지. 석가장의 당대 가주인 석곤은 여색에 무척이나 엄격한 인물이어서 자신의 아들들은 물론이고 석가장의 모든 식솔들이 기루에 출입하는 것을 싫어했네. 그래서 다른 업종이야 얼마든지 석가장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기루를 운영하는 두 사람만큼은 장담할 수 없었던 거지.”
“그래서 그들에 대해 조사하려고 했던 것이군?”
“그들에 대해 알고 싶어도 알려진 소문 외에는 조사할 것이 없었네. 나는 낙양에 별다른 연고가 없어서 그 일을 조사해 줄 사람이 마땅히 없었지. 그래서 이곳에 오게 된 것일세.”
손검당은 알겠다는 듯 그의 말을 받았다.
“풍류를 즐긴다는 그들이라면 필시 낙양제일화에게 눈독을 들였을 것이고, 그렇다면 낙양제일화는 그들에 대해 남들이 모르는 사실을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한 거로군.”
“바로 보았네. 무엇보다도 낙양제일화는 낙양에 아무 연고도 없는 내가 쉽게 만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 아닌가?”
손검당이 피식 웃었다.
“그녀를 만나는 게 쉽다니…… 어디 가서 그런 말을 하지 말게. 자네가 종남파의 장문인이 아니었다면 이토록 쉽게 그녀를 만나지 못했을 걸세.”
“그랬다면 다른 방법을 썼겠지. 어쨌든 나는 그녀를 만났고, 필요한 정보를 모두 얻었네.”
“초일화와 봉태평이 소문과는 달리 서로 친분이 있다는 건 알겠는데, 그게 석가장과 무슨 관련이 있단 말인가?”
“초일화와 봉태평이 앙숙이 아니면서도 그런 소문이 난 건 누군가가 그런 상황을 조장했기 때문일세.”
“그가 누구인가?”
“초일화와 봉태평은 그런 소문이 퍼진 것을 달가워하지 않으면서도 감히 부인하지도 못했네. 오히려 남들 앞에서는 그럼 소문이 사실인 것처럼 행동했지. 그러니 그들을 암중으로 조종하면서 그들로 하여금 감히 불만을 표시할 엄두도 내지 못하게 할 만큼 영향력이 강한 자가 누가 있겠나?”
손검당의 눈이 크게 뜨여졌다.
“석가장이란 말인가?”
“그렇지.”
“하지만…… 석가장에서 누가 감히 석곤의 비위를 거스르면서까지 기루를 운영할 수 있단 말인가?”
“한 사람 있네.”
“그게 누군가?”
“석곤 본인일세.”
손검당은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럴 리가? 석곤은 기루라면 아주 질색을 하는 사람일세.”
“그건 모두 소문일 뿐이지. 친분이 있는 두 사람 사이도 앙숙지간으로 만들어 버린 석곤이라면 그런 일은 얼마든지 조종할 수 있을 걸게.”
손검당은 멍청히 진산월을 보고 있다가 황급히 물었다.
“석곤이 무엇 때문에 그런 일을 한단 말인가?”
“석가장의 사업은 비록 방대하지만 그만큼 공개되어 있네. 석곤으로서는 아마도 남들이 모르는 새로운 사업체가 필요했을 걸세. 그런 점에서 본다면 기루는 가장 이득이 많을뿐더러 세인들의 이목을 속이기에도 적당하지.”
손검당은 속으로 부지런히 생각을 굴리고 있는지 눈빛이 어느 때보다 반짝거리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번 연쇄사건은 확실히 석가장을 노리고 벌어진 것이로군.”
“그렇지. 그중에서도 최종 목표는 석곤이 아닐까 생각하네.”
손검당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제일 처음 살해당한 무쌍루의 연삼야는 석곤과 무척이나 친밀한 사이였네. 복손홍과 조패 또한 뿌리를 내릴 때 석곤의 도움을 많이 받았던 자들로 알려져 있지.”
손검당은 새삼스런 눈으로 진산월을 쳐다보았다.
낙양에서 살인 사건이 벌어진 지 보름 가까이 지났어도 누구도 알지 못한 흉수의 목표를 진산월은 낙양에 도착한 지 불과 이틀 만에 꿰뚫어 본 것이다. 손검당은 담담한 표정으로 술잔을 기울이고 있는 진산월의 모습이 거대한 산처럼 느껴졌다.
‘사람들은 모를 것이다. 신검무적에게 진짜 무서운 것은 그의 검이 아니라 심계라는 것을.’
손검당은 다시 정신을 차리고 질문을 던졌다.
“이제 그 사실을 알았으니 자네는 앞으로 어찌할 텐가?”
진산월은 별반 변화 없는 얼굴로 담담하게 대꾸했다.
“석곤을 만나러 가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