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19권 천룡고궤(天龍古櫃)편 : 1화
제188장 배후세력
손노태야가 하루 중 가장 신경을 쓰는 것이 세 번의 식사 시간이라는 것은 그의 주변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다. 노인답게 아침잠이 별로 없는 손노태야는 남들이 겨우 침상에서 일어날 시간인 묘시경에 아침 식사를 하곤 했다. 저녁 식사만큼 화려하거나 풍성한 식탁은 아니었으나, 하루를 시작하는 아침의 식사인 만큼 소화가 잘되는 채소 위주의 식단에 몇 가지 영양가 높은 요리가 주로 올라왔다.
그중에서도 손노태야가 특히 좋아하는 것은 각종 해산물과 버섯을 넣고 끓인 해선일품족으로, 비단 영양이 풍부할 뿐 아니라 맛이 좋고 위에도 부담이 적어서 사오 일에 한번씩은 꼭 아침상에 오르는 음식이었다.
그런데 웬일인지 오늘은 손노태야가 좋아하는 해선일품족이 올라왔는데도 절반도 채 비우지 않은 채 아침상이 물려졌다. 뿐만 아니라 아침 식사 후에는 항상 공야중에게서 간단한 보고를 받았는데, 오늘은 그것도 생략되었다. 다만 늘 마시는 백호은침만은 정상적으로 방으로 들어갔다.
“과연 좋은 차로군.”
뜨거운 차를 한 모금 마신 손님이 천천히 찻잔을 내려놓자 손노태야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자네는 벽라춘을 즐겨 마시는 걸로 알고 있는데.”
“물론 내 입맛에는 벽라춘이 더 낫소. 백호은침은 비로 깨끗하긴 하지만 내게는 조금 심심하게 느껴져서 말이오.”
“그게 백호은침의 맛이지, 자네는 너무 자극적인 걸 좋아해서 탈이야.”
그 사람은 빙그레 웃었다.
“자극 없는 삶은 왠지 박제된 인생 같아서 말이오. 손노태야께서도 젊은 시절에는 꽤나 자극적으로 살아 오셨다고 들었소만.”
손노태야는 무덤덤한 음성으로 대꾸했다.
“모두 지난일이지. 자네가 나 정도로 나이를 먹게 되면 자극 없는 단조로운 삶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깨닫게 될 걸세.”
“먼 훗날 이야기로군.”
그 사람이 여전히 피식 웃으며 대수롭지 않게 말하자 손노태야는 힐끗 그를 쳐다보더니 특유의 낮게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했다.
“자네 생각보다는 그리 오래 남지 않았을걸.”
그 사람은 이를 드러내며 소리 없이 웃었으나, 더 이상 말하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적당할 때 물러설 줄 아는 것이 그의 장점 중 하나였다.
노인들은 대체로 자신의 나이를 남에게 비교당하는 것을 싫어한다. 나이 문제로 손노태야를 더 자극하는 것은 별로 바람직한 일이 아니었다.
아침 일찍 손노태야를 찾아온 그 사람은 다름 아닌 노해광이었다. 손노태야가 해선일품죽을 채 두 숟가락도 먹기 전에 방문이 소리 없이 열리며 노해광이 들어온 것이다. 손노태야는 그의 갑작스러운 등장에도 별로 놀라지 않고 해선일품죽을 조금 더 먹은 다음 사람을 불러 아침상을 치우게 했다.
지나가는 말로라도 노해광에게 아침 식사를 했느냐는 질문 같은 건 아예 던지지도 않았다. 노해광 또한 손노태야의 얼굴을 보면서 밥을 먹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는지 식사 대신 차를 한잔 요구했고, 손노태야는 자신의 소중한 아침 식사를 방해받은 것에 대한 불만은 전혀 내색하지 않은 채 순순히 그 부탁을 들어주었다.
손노태야는 노해광을 한동안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다시 느릿느릿 음성을 내뱉었다.
“오늘이 오 일째인가?”
“정확히 오 일째요.”
노해광이 마치 다짐이라도 하듯 입을 떼자 손노태야는 그제서야 노해광이 굳이 자신의 아침 식사를 방해하면서까지 이 시간에 온 이유를 알았다. 자신이 오 일 전에 노해광을 찾아간 시간과 똑같은 시간이었던 것이다.
손노태야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가 약속을 지키는 사람이라는 건 이미 알고 있었지.”
“너무 믿지는 마시오. 부담스러우니까.”
“그러지, 조사한 걸 말해 주게.”
손노태야는 더 이상 쓸데없는 농지거리는 하지 않겠다는 듯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노해광은 손노태야의 이런 방식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고 즉시 입을 열었다.
“손노태야를 처음 암습했던 자들은 전귀 막고와 중조쌍살 마씨형제였소. 그리고 비밀리에 그들을 고용한 사람은 하태라는 자요.”
“하태?”
“낙남쪽에서 정보상인을 하던 자라 손노태야께선 잘 모를 거요.”
“계속하게.”
“두 번째로 습격해 왔던 자들은 모두 일곱 명인데, 그들은 흑풍삼괴와 태백사우라는 자들이오. 강호에 명성은 그다지 알려지지 않았으나, 나름대로 괜찮은 실력을 지닌 자들이었소. 그들을 섭외한 인물은 고당이라는 자인데, 그는 하오문의 남전분타에서 분타주 밑의 향주를 맡고 있소.”
“……!”
“그리고 세 번째의 습격 때는 단 두 명이 고용되었는데, 그들은 날수검 진혁과 혈치도 함용이라고 하오. 두 사람 모두 섬서성 전체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드는 특급살수들이오. 그들을 고용한 자는 하일풍이라고 하는 은퇴한 전직 살수요.”
단숨에 여기까지 말한 노해광은 찻잔을 들어 다시 한 모금을 마셨다. 손노태야는 묵묵히 그 모습을 보고 있다가 물었다.
“모두 처음 들어 보는 이름들이군. 그들 세 명 사이에 어떠한 연관성이라도 있나?”
노해광은 차 맛을 음미하듯 잠시 미동도 않고 있다가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을 이었다.
“하태는 고당과 고향 친구이고, 하일풍과는 숙질지간이오.”
손노태야는 묵묵히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하태와 고당은 삼십 년 전에 감천 일대에서 함께 자란 사이요. 나중에 하태는 낙남으로 흘러들었고, 고당은 하오문에 투신을 했으나 두 사람은 서로 연락을 주고받아 왔소. 하일풍은 별 볼일 없는 삼급 살수 생활을 하다가 나이를 먹어 은퇴를 한 후에 가끔 하태의 일을 도와주거나 하태와 고당 사이의 연락책 일을 하며 먹고 살고 있었소.”
“……!”
“세 사람은 비록 빈한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부유한 형편도 아니었소. 그런데 한 달 전부터 하태의 씀씀이가 갑자기 커지기 시작했소. 주변의 부채를 모두 정리했을 뿐 아니라, 낙남에서 조금 떨어진 상현에 비밀리에 제법 커다란 장원까지 마련할 정도였소. 그리고 그가 장원을 구입한 지 정확히 닷새 후부터 손노태야에게 살수들이 찾아오기 시작한 거요.”
불과 오 일 만에 이토록 상세하게 내막을 파헤친 노해광의 수단은 확실히 대단하다고 할 수밖에 없었다. 하나 손노태야는 그를 칭찬하기보다는 다른 점 먼저 물었다.
“하태 등 세 사람을 사주한 자들은 누구인가?”
노해광은 그 말에 바로 대답하지 않고 엉뚱한 말을 늘어놓았다.
“하태와 고당의 고향인 감천은 예로부터 교통의 중심지였소. 특히 서안 일대에서 서역이나 몽고와 교역을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감천을 거쳐야 하오.”
“……!”
“하태와 고당이 젊었을 적에 서안에서 몽고 쪽으로 가는 상단에서 함께 일한 적이 있었소. 그 시기는 불과 삼 년 정도밖에 되지 않았으나, 그 상단을 나온 후 두 사람은 각기 낙남과 남전에 뿌리를 내리고 활동을 시작했소.”
“그 상단이 어딘가?”
“유화상단.”
노해광의 말에도 손노태야는 전혀 놀라거나 당황한 표정을 짓지 않았다. 서안에서 자신에게 도전을 해올 세력이 있다면 그곳뿐이라고 생각해 오고 있었던 것이다.
어쩌면 노해광에게 이번 일을 부탁한 것도 단순히 살수들의 배후가 어디인지 알기 위해서만은 아닐지도 몰랐다. 손노태야는 보다 확실한 물증을 얻고자 했던 것이다.
“그 증거는?”
노해광의 얼굴에 처음으로 표정 비슷한 것이 떠올랐다. 턱 아래나 있는 짧은 수염을 쓰다듬는 그의 얼굴에는 얼음장 같은 냉정함이 서려 있었다.
“나는 사람을 보내 우선 서안에서 가까운 곳에 있는 하일풍을 먼저 잡아오게 했소. 하나 내 수하들에게 잡히자마자 하일풍은 입에 문 독단을 깨물고 자결했소. 그래서 고당을 찾아갈 때는 조금 더 신중하게 기하도록 했소. 그런데도 고당의 자살을 막지 못했소.”
손노태야는 노해광이 이런 쪽으로는 무척이나 철저하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약간은 의아한 듯 물었다.
“어떻게 된 건가?”
“내 수하들을 보자마자 고당은 스스로 자신의 목을 잘라 버렸소. 제압하고 자시고 할 사이도 없이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수하들로서도 어쩔 수 없었소.”
“자네들이 올 것을 알고 있었던 게 아닌가?”
“그렇지는 않았을 거요. 알고 있었다면 몸을 숨겼든지 미리 목숨을 끊든지 했겠지. 아마 꼬리를 잡힐 경우에 대한 대비를 마음속으로 철저히 하고 있었던 모양이오.”
“하태는 어떻게 되었나?”
“하태의 경우에는 방법을 조금 달리했소. 하태는 제법 여색을 밝히는 인물인지라, 수하들 중 미모가 뛰어난 여자로 하여금 접근하게 했소. 하태는 이번 일을 준비하느라 상당히 오랫동안 여자를 접해 보지 못했기 때문인지 어렵지 않게 우리들의 수중에 잡아들일 수 있었소.”
손노태야의 주름투성이 얼굴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는 두 눈에서 예리한 광망이 흘러 나왔다.
“그 자를 이곳으로 데리고 왔나?”
의외로 노해광은 고개를 저었다.
“데리고 오지 못했소.”
“왜 그런가?”
“하태는 죽었소.”
손노태야는 노해광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노해광의 속마음이야 어떻든 그는 자신의 표정을 숨기는 데 무척이나 익숙한 사람이었고, 손노태야는 다시 한 번 그 사실을 절감할 수 있었다.
“자세한 사정을 말해 보게.”
“하태를 잡자마자 그가 자살할 것에 대비해서 아혈을 제압하고 심맥을 끊을 것을 막기 위해 대맥을 모두 봉쇄했소. 그런 다음 관속에 집어넣고 시신을 운반하는 행렬로 위장하여 서안으로 데리고 왔소.”
노해광은 마치 시장에서 물건이라도 사온 사람처럼 담담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서안에 도착해서 관 뚜껑을 열어 보니 그는 숨이 끊어져 있었소. 사인을 조사해 보니 질식사였소.”
손노태야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질식사? 그를 운반해 올 때 관을 밀봉했단 말인가?”
“그런 초보적인 실수를 저지를 리 있겠소? 관에는 세 개의 숨구멍이 뚫려 있고, 운반 중에도 두 번씩이나 관 뚜껑을 열어 상태를 확인했었소. 관 주위에는 항상 네 명 이상이 붙어 있었고, 그중 두 명은 관에서 단 한시도 눈을 떼지 않았소.”
손노태야는 노해광의 일처리에는 문제가 없음을 알았다. 낙낙에서 서안까지 하루 거리밖에 되지 않으니 그 정도로 철저를 기했다면 문제가 발생할 리 없었다. 그런데도 하태가 죽어 있다니 기이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자네 수하들은 모두 믿을 만한가?”
손노태야의 물음에 노해광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손노태야께선 수하들을 얼마나 믿고 계시오?”
손노태야는 물끄러미 노해광을 응시하고 있다가 낮게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했다.
“노부가 실수했군. 못 들은 걸로 해두게.”
손노태야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경우란 거의 없다고 봐도 옳을 것이다. 그런데도 지금 선뜻 자신의 실수를 시인한 것은 노해광의 수하들을 믿지 못한다고 하는 것은 노해광 본인을 믿지 못한다는 말과 하등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노해광 같은 사람이 허투루 수하들을 쓸 리가 없었다. 손노태야 자신도 중요한 일일수록 철저히 믿을 만한 사람만을 몇 번이고 선별하지 않았는가?
그리고 원래 사람과 사람 사이의 믿음처럼 허망한 것은 없는 법이다. 아무리 믿고 있어도 배신당하는 경우는 늘 생기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다지 믿지 않는 자에게서 의외의 충성심을 발견하는 경우도 있다. 결국 부하에 대한 신뢰란 일을 맡은 그 사람에 대한 신뢰로 대체하는 것이 가장 합당한 일이다.
노해광은 의뭉스런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나야말로 손노태야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소. 아무튼 하태는 죽었고, 나는 그의 시신을 부검해 보았소.”
“자네가 직접 말인가?”
노해광은 히죽 웃었다.
“마땅히 맡길 사람이 없어서 말이오.”
“그래서 사인을 알아냈나?”
“확실한 질식사였소.”
“어떻게 그럴 수가 있나?”
“처음에는 나도 영문을 몰라 당황했소. 그런데 호흡기관을 잘라보니 식도와 코에 이상한 점막 같은 것이 눌어붙어 있었소. 그것을 보고 겨우 사정을 짐작할 수 있었소.”
“그 점막 때문에 질식했단 말인가?”
“그렇소. 식도와 코가 모두 점막으로 뒤덮여 있었으니 숨을 쉴 수 없는 건 당연한 일이지.”
“그 점막은 어떻게 생긴 것인가?”
“그건 흡룡공이라는 특이한 무공으로 생긴 것이오.”
손노태야는 무공에 대해서는 별로 아는 것이 없는지라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흡룡공?”
“흡룡공은 원래 수공의 일종으로, 물속에서 펼칠 때 비로소 제 위력을 발휘할 수 있는 거요. 수중에서 펼치게 되면 식도와 코를 점막이 보호하여 익사를 막아 줄 뿐 아니라 점막 자체가 물속에 미량으로 남아 있는 공기를 정화시켜 주기 때문에 아주 효과적인 무공이라고 할 수 있소.”
“그렇군.”
“그런데 이걸 물속이 아닌 바깥에서 펼치게 되면 오히려 그 점막이 몸속으로 들어오는 공기의 통로를 막아 버려 질식하게 되오.
그런 맹점 때문에 그 탁월한 효능에도 불구하고 오래전에 강호상에서 모습을 감추어 버렸소. 그런데 그 무공이 이제는 자살 도구로 사용되다니 정말 재미있는 일 아니오?”
손노태야의 표정은 별로 재미있어 하는 것 같지 않았다.
“듣고 보니 그렇군. 그런데 결국 자네 말은 하태를 비롯해 이번 일을 사주한 세 사람이 모두 죽어 버려 아무런 증거도 찾을 수 없다는 것이 아닌가?”
손노태야가 다소 냉랭한 음성으로 말하자 노해광의 입가에 예의 사람을 조롱하는 듯한 미소가 떠올랐다.
“증거는 있소.”
손노태야의 눈꼬리가 꿈틀거렸다.
“그들 외에 또 살아 있는 자가 있단 말인가?”
“하태가 유화상단에 있을 때 그의 직속상관이 누구인지 아시오?”
“누군가?”
“유현상이오.”
유현상은 유화상단의 주인인 유방현의 큰아들이었다.
손노태야는 잠시 침음하다가 다시 물었다.
“유현상이 하태에게 지시를 했다는 증거는 있나?”
“한 달 전에 유현상은 개인적인 볼일을 본다며 경촌으로 갔소.”
경촌은 낙남의 바로 옆에 있는 도시로, 서안에서 경촌을 가기 위해서는 낙남을 반드시 지나쳐야만 했다.
“유현상이 경촌에서 돌아온 지 이틀 후에 하태는 낙남을 떠나 남전을 거쳐 서안으로 왔소. 서안에서 다시 이틀을 보낸 그는 상현으로 가서 장원 하나를 구입한 후 낙남으로 돌아왔소.”
노해광의 말을 듣는다면 누구라도 유현상이 하태를 사주한 인물임을 의심치 않을 것이다. 하나 손노태야의 태도는 여전히 냉랭했다.
“자네가 말한 건 모두 상황에 대한 설명일 뿐, 실질적인 증거가 될 수는 없네.”
손노태야가 무어라고 말하든 노해광은 전혀 거리낌 없이 말을 이었다.
“나는 다시 사람을 상현으로 보내 하태가 구입한 장원을 조사하게 했소. 그리고 어제 비로소 그 장원을 하태에게 판 자를 찾아내어 그가 하태에게서 받은 전표를 입수할 수 있었소.”
노해광은 품속에서 전표 하나를 꺼내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손노태야는 그 전표를 펼쳐 보았다. 유화상단에서 발행한 은자 일천 냥짜리 전표로, 한쪽 구석에 ‘유현상’의 수결이 선명하게 적혀 있었다.
“이것으로도 증거가 부족하다고 생각한다면 한 가지 보다 더 확실한 방법이 있지.”
“그게 무엇인가?”
“유현상 본인을 잡아오는 것이오.”
노해광의 말에 손노태야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유현상을 잡아오겠다는 것은 일종의 공갈이었다. 지금 상황에서 유현상을 잡아오는 것은 타초경사일뿐, 손노태야에게는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 일이었다.
“사실 오늘 아침까지도 조금 고민을 했지. 유현상을 끌고 와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하고 말이오. 하지만 유화상단의 핵심 인물을 직접 건드리는 건 아무래도 손노태야께서 직접 결정해야 할 일 같아서 포기했소.”
손노태야는 한동안 노해광을 가만히 쳐다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잘 생각했네. 간세는 파악을 했나?”
“그렇소. 듣고 싶소?”
노해광은 너무도 당연한 질문을 했다. 그런데 그 질문을 듣자 손노태야의 얼굴에는 한 줄기 갈등의 빛이 떠오르는 것이었다.
자신의 측근에 간세가 있다는 건 손노태야도 이미 알고 있었고, 그 간세가 누구인지 알아내 달라고 노해광에게 특별히 당부까지 했었다.
그런데 막상 노해광이 간세의 정체를 밝히려 하자 손노태야는 망설이고 있는 것이다.
그 간세는 필시 손노태야가 오랫동안 믿고 있던 수족 중 한 사람일 것이다.
좀처럼 사람을 믿지 않는 손노태야이지만, 그래서 일단 믿음을 준 사람에게는 더욱 신뢰를 아끼지 않았다. 그런 믿음이 배반당했다는 것은 손노태야로서는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하나 일단 신뢰는 깨졌고, 배반자가 누구인지는 알아내야 했다. 아무리 그 일이 고통스럽고 참담한 일일지라도 반드시 해결해야 할 일이었다.
손노태야는 마음을 결정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로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모습이었다.
“말하게.”
노해광은 천천히 한 사람의 이름을 말했다. 그 이름을 듣고 난 손노태야의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도 떠올라 있지 않았다. 하나 노해광은 항상 냉정한 빛으로 일렁거리던 손노태야의 두 눈이 깊게 가라앉아 있음을 알아차렸다.
별로 달라진 곳이 없는데도 손노태야는 왠지 피곤하고 지쳐 보였다.
한참 후에야 손노태야는 혼잣말처럼 나직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공야명은 그가 가장 아끼는 아들이었지. 어려서부터 명석하고 잘생겨서 그는 그 아이에게 큰 기대를 하고 있었네. 그래서 공야명이 부정을 저지른 것을 알면서도 차마 그를 제지하지 못했던 거야. 그같이 치밀한 사람이 자식의 부정을 모른대서야 말이 안 되지.”
노해광은 묵묵히 그의 말을 듣고 있었다.
“공야명이 자네의 손에 병신이 되었을 때 그는 겉으로는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았네. 오히려 자식의 잘못이 자신의 책임이라며 일선에서 완전히 물러나겠다고 했지. 내가 말려서 그는 생각을 바꾸었지만, 그 뒤로 단 한 번도 웃는 얼굴을 보인 적이 없었네.
그는 여전히 평상시와 다름없이 일을 수행해 왔지만, 나는 언젠가는 오늘 같은 일이 일어날 줄 알았지.”
“……!”
“두 번이나 살수들이 내 지척까지 접근했었네. 그때부터 나는 그를 의심했지. 하지만 그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주고자 했네.”
손노태야는 일부러 점주들의 회식을 계획하며, 그 일의 주관을 그에게 맡겼다. 손노태야로서는 일종의 신호를 보낸 셈이었다.
‘너를 의심하고 있다. 그러니 더 이상 쓸데없는 생각을 하지 말아라.’
그 회식 때 아무런 일이 없다면 손노태야는 그를 용서해 주려고 마음먹었다. 하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
오히려 세 번째 암습은 더욱 치명적인 것이어서 응계성이 스스로의 몸으로 대신 칼을 맞지 않았다면 손노태야는 살수들의 손에 끊어지고 말았을 것이다.
손노태야가 노해광을 찾을 생각을 한 것은 그 직후였다.
노해광은 비록 일처리는 확실했지만 수단이 잔인할 때가 많아서 손노태야는 그를 그다지 탐탁지 않게 생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해광을 찾아온 것은 그만큼 절박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노해광은 그의 기대대로 이번 암습에 대한 내막을 상세하게 파헤쳐 냈다.
비록 손노태야는 원했던 결과를 모두 얻었지만 그것이 진정 만족스러운 것이었는지는 손노태야 본인 외에는 아무도 알 수 없을 것이다.
이제 손노태야는 가장 가까운 심복 한 사람을 잃었다. 그리고 유화상단이라는 만만치 않은 세력과 목숨을 건 승부를 내어야 했다.
하나 손노태야는 그 승부에 대해서는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심복을 잃은 것이 마음이 아픈 게 아니라 믿음을 배반당한 것이 마음 아픈 것이다. 그리고 손노태야는 그 심복을 대신할 만한 믿을 수 있는 사람을 하나 알고 있었다.
“알아내느라 수고했네. 이제 혼자 있고 싶군.”
손노태야가 은근한 축객령을 내렸으나, 노해광은 침착한 음성으로 말했다.
“아직 한 가지가 더 남았소.”
“그게 무엇인가?”
손노태야는 칼날같이 예리한 시선으로 노해광을 응시하더니 이내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왔다.
“나이를 먹으니 갈수록 귀가 어두워지는군. 좀 더 자세히 말해 주지 않겠나?”
“유화상단은 화산파의 장로인 해정설과 사돈 관계를 맺은 데다 이씨 세가의 가주였던 이세적과 친분을 쌓아 맹렬하게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소.
그런데 이세적이 죽고 화산파 또한 매장원의 배신으로 타격을 받게 되자 외부로의 확장을 억제하고 조심스러운 행보를 보이고 있는 중이었소.”
“……!”
“그런데 그렇게 움츠리고 있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아 갑자기 손노태야에게 손을 써 왔다는 게 이상하지 않소?”
“자네 말은 꼭 그들 배후에 또 다른 누군가가 있다는 말처럼 들리는군.”
“얼마 전부터 유화상단에 정체 모를 자들의 모습이 간간이 보이곤 했었소. 나는 호기심이 동해서 부하들을 풀어 살펴보게 했는데, 그들의 정체를 파악하는 데 실패하고 말았소.”
손노태야는 적어도 서안 일대에서 노해광의 이목을 속일 수 있는 사람은 결코 흔하지 않다는 걸 잘 알고 있기에 흥미로운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런데 이번에 하태라는 자가 흡룡공을 펼쳐 자살을 했단 말이오.”
“그게 어떻단 말인가?”
“흡룡공을 강호상에서 가장 마지막으로 익혔던 자는 수룡신군 황충으로, 그는 십여 년 전부터 강호상에서 모습을 감추었소.”
수룡신군 황충은 손노태야도 들은 적이 있는 이름이었다. 황충은 수공에 관한 한은 강호 무림의 제일인자 소리를 들을 만한 인물이었다.
게다가 도법 또한 뛰어나서 한때는 무림구봉 중의 도봉인 금도무적 양천해와 자웅을 겨룰 만하다는 평가까지 받을 정도였다.
“황충이 모습을 감춘 후 아직까지 흡룡공을 익힌 사람이 있다는 말은 들은 적이 없소.”
“자네의 말은 그 황충이 유화상단의 배후에 있다는 것인가?”
“그 정도라면 별로 걱정하지 않았을 거요.”
황충이 제아무리 절세의 고수라 해도 개인에 불과할 뿐이었다. 유화상단과 손노태야 같은 상인들의 다툼에서 일개인의 무력은 승부를 좌우하기에 미흡한 것이었다.
“그럼 무엇이 걱정인가?”
처음으로 노해광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지며 음성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다른 사람들은 황충이 왜 갑자기 모습을 감추었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우연히 그 이유를 알게 되었소.”
“그 이유가 무엇인가?”
“황충이 어떤 비밀 세력에 포섭되어 신분을 바꾸었기 때문이오.”
손노태야는 자신도 모르게 물었다.
“그 세력이 어디인가?”
노해광은 평소의 그답지 않게 진지한 음성으로 말했다.
“쾌의당. 쾌의당의 칠대용왕 중 수중용왕이 현재 황충의 또 다른 신분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