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19권 천룡고궤(天龍古櫃)편 : 10화
제 197장 철혈홍안
삼금헌을 벗어난 진산월은 숙소인 정연각으로 가기 위해 걸음을 재촉하고 있었다.
제법 커다란 화원 부근을 지날 때였다. 멀지 않은 곳에서 한 명의 여인이 우두커니 선 채로 화원을 감상하고 있었다. 처음 진산월은 신경 쓰지 않고 그녀를 지나쳐 가려 했다. 그런데 무언가가 그의 신경을 자극했다.
진산월은 그 이유를 몰라 자신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었다. 그러다 문득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내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그녀의 눈 때문이었다.
여인은 이십대 후반에서 삼십대 초반쯤으로 보였다. 이목구비가 수려했고, 우윳빛 피부는 탄력이 넘쳐 보였다.
여인치고는 상당히 큰 키에, 호리호리한 몸매를 지니고 있었다.
노란색 저고리에 짙은 남색 치마를 입고 있었고, 풍성한 머리에 몇 개의 장신구를 꽂고 있었다.
보기 드물게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하나 며칠 전에 만났던 정냔향 같은 절세미인이라고 하기에는 약간의 손색이 있었다.
그런데도 진산월이 그녀에게서 강한 인상을 받은 것은 그녀의 두 눈 때문이었다.
진산월은 아직까지 이토록 차갑고 냉정한 눈을 본 적이 없었다.
무색투명할 정도로 아름답고 영롱한 눈이었지만, 그 눈 속에 실린 감정은 극도의 무심함과 얼음장처럼 차가운 냉정함뿐이었다.
그녀는 그런 눈으로 진산월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녀와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진산월은 짜릿한 통증을 느꼈다. 중봉의 고동을 나온 이후 처음으로 느껴보는 강력한 무형지기의 흔적이었다.
그녀의 시선이 천천히 그의 두 눈을 떠나 그의 코를 거쳐 목과 가슴을 쓸어내려 갔다. 그녀의 시선이 자신의 전신을 흝는 동안 진산월은 자신이 마치 알몸으로 그녀 앞에 서 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진산월에 대한 관찰을 마쳤는지 그녀는 느릿느릿 앞으로 걸어왔다.
사각사각….
남색 치맛자락이 바닥을 스치는 음향이 감미로울 정도로 부드럽게 귓전을 울렸다. 그녀가 가까이 다가올수록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달콤한 향기가 풍겨 왔다. 임영옥이 사용하는 사라옥정향의 내음도 아니었고, 정난향의 난초 향기도 아니었으나 사람의 마음을 묘하게 뒤흔드는 야릇한 내음이었다.
마침내 그녀는 그의 앞에 다가와서 예의 냉정한 눈으로 그의 얼굴을 가만히 응시했다.
그녀의 붉은 입술이 살짝 열리며 눈빛만큼이나 차갑고 냉정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몸이 잘 닦인 아이로군. 이곳은 외인들은 들어올 수 없는 곳인데 어떻게 들어올 수 있었느냐?”
그녀는 대뜸 하대를 했는데 그것이 오히려 그녀에게는 더욱 잘 어울려 보였다.
그녀의 시선을 받고 음성을 듣자 진산월의 마음속 흔들림이 한층 커졌다.
그녀에게 여인으로서의 매력을 느껴서는 절대로 아니었다. 오히려 진산월은 그녀에게 복잡하고 미묘한 기운이었다.
진산월은 태을신공을 한 차례 운용하고 나서야 비로서 그 중압감에서 벗어나 평상시의 자신으로 되돌아올 수 있었다.
“석곤 장주를 만나고 가는 길이오.”
진산월이 담담한 음성을 내뱉자 그녀의 투명한 눈에 한 차례 기광이 번뜩였다.
“내 정심안에 흔들리지 않는 걸 보니 몸만큼이나 마음도 잘 닦였구나. 그렇군. 네가 바로 진산월이란 아이로구나? 곤아에게서 네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난다.”
그녀가 무언가를 느낀 듯 진산월의 얼굴을 묘한 눈으로 응시하자 진산월 또한 그녀의 정체를 대충이나마 짐작할 수 있었다.
석가장의 장주인 석곤을 아명으로 부를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더구나 이런 기세를 지닌 여인은 오직 한 사람 밖에는 없었다.
진산월은 즉시 그녀를 향해 정중하게 포권을 했다.
“인사가 늦었습니다. 종남의 진산월이 철혈홍안 노선배님을 뵙습니다.”
그녀는 가볍게 손을 내저었다.
“노선배라니 끔찍한 말을 하는군. 그냥 조 대랑이라고 불러라.”
대랑이란 마님이란 뜻이었다. 일파의 장문인에게 자신을 마님이라고 부르라고 말할 수 있는 여인은 천하에서 오직 그녀 한 사람뿐일 것이다.
철혈홍안!
그렇다. 그녀야말로 석가장의 최고 어른이며 석곤의 할머니인 철혈홍안 조여홍이었던 것이다.
조여홍은 석가장의 전전대 가주인 석동의 부인으로, 당시 가세가 기울어가는 석가장을 혼자의 힘으로 일으켜 세우다시피 했다. 장사보다는 다른 일을 더 좋아했던 석동이 모습을 감추어 버린 후 그녀는 석가장을 완전히 장악하여 백 년 가까운 세월 동안 석가장을 막후에서 지배해 오고 있었다.
그녀는 석가장의 사업이 정상으로 돌아오자 아들인 석담을 가주로 내세웠고, 석담은 그녀의 기대에 부흥하여 석가장을 한층 더 부흥시켰다. 석담의 아들인 석곤이 가주에 오른 후, 그녀는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채 조용히 칩거에 들어갔다고 알려져 있었다.
진산월이 알기로 그녀의 나이는 올해로 백삼십 세가 되었다. 그런데 막상 만나본 그녀는 삼십대 초반 이상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피부의 탄력과 몸매를 보면 도저히 백 세가 훨씬 넘은 여자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조여홍은 진산월의 눈동자만 보아도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훤히 알고 있는지 특유의 차가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자기 인생에 충실하다 보면 나이 같은 건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는다. 육체의 외피 따위는 잘 다스려진 마음에 비하면 한낱 먼지보다 못한 것이다.”
진산월은 즉시 자신의 실태를 깨달았다.
“제가 조 대랑께 실례를 범했습니다. 사과드립니다.”
“이해가 빠른 아이로군. 만약 다른 사람이 그런 눈으로 나를 보았다면 눈알을 파 버렸을 것이다. 너는 아직 나이가 어리고 곤아의 당부도 있고 하니 손을 쓰지 않은 것이다.”
아름다운 여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살벌한 말이었다. 그런 말을 표정도 변하지 않은 채 꺼내는 그녀의 모습은 철혈홍안이라는 외호에 너무도 어울리는 것이었다.
진산월은 묵묵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 조여홍은 냉정한 눈으로 진산월을 응시하고 있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손을 내밀어 보아라.”
진산월은 순순히 그녀에게 오른손을 내밀어 보였다. 그녀의 시선이 그의 손바닥에 잠시 머물렀다가 거두어졌다.
“그 나이에 귀면상을 가진 사람은 정말 모처럼 보는군. 생각보다 대단한 아이로구나.”
진산월은 자신의 손바닥에 이리저리 갈라진 흉터와 손금이 어우러져 자연스레 생겨난 귀면을 물끄러미 내려보다가 불쑥 물었다.
“제 나이에 귀면상을 가진 사람이 또 있습니까?”
“너는 올해 몇 살이냐?”
“스물다섯입니다.”
“그렇다면 너보다 두 살 어린 나이의 사람이다. 내가 그의 손에서 귀면상을 보았을 때 그의 나이는 스물세 살이었으니까?”
진산월은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누구입니까?”
가뜩이나 차갑고 냉정했던 조여홍의 얼굴에 엷은 얼음이 끼인 듯한 싸늘함이 풍겨 왔다.
“네가 알 것 없다. 이미 오래전 사람이니까.”
아무리 진산월이 담대한 성격의 소유자라 해도 이토록 차가운 음성의 주인에게 재차 질문을 던질 수는 없었다. 진산월은 자신보다 어린 나이에 귀면상을 소지했다는 그 인물이 누구인지 궁금하기 그지없었으나 그 궁금증을 속으로 삼킬 수밖에 없었다.
잠시 두 사람 사이에 묘한 침묵이 감돌았다. 진산월은 여전히 마음속으로 그 사람이 누구일까 생각하고 있었고, 그녀 또한 무언가 깊은 상념에 잠긴 듯한 모습이었다.
그러다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곤아의 부탁을 들어주기로 했느냐?”
진산월은 그녀가 말하는 것이 풍림서각에서 물건을 건네받아 구궁보의 모용 대협에게 전해 주는 일임을 알아차렸다.
‘그녀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구나. 혹시 그 물건의 진짜 주인은 석곤이 아닌 그녀인 게 아닐까?’
진산월은 왠지 그럴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예. 내일 출발할 생각입니다.”
“구궁보까지는 먼 거리지. 쉽지 않은 일이 될 것이다. 보수는 흡족하게 받았느냐?”
“맛있는 차를 대접받았습니다.”
냉정함으로 뒤덮여 있던 조여홍의 얼굴에 묘한 빛이 떠올랐다.
“이상한 아이로군. 차 한 잔에 그런 일을 승낙하다니.”
“처음 마셔 보는 맛있는 차였습니다.”
조여홍은 진산월의 얼굴을 한동안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혼잣말처럼 나직한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곤아가 왜 너를 선택했는지 알 것도 같구나.”
그녀는 잠시 무언가를 망설이는 것 같더니 마음을 정한 듯 돌연 그를 향해 몸을 돌렸다.
“잘 봐라. 딱 한 번뿐이다.”
그 말에 진산월은 무심결에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러고는 이내 벼락이라도 맞은 듯 안색이 딱딱하게 굳어지고 말았다.
그녀는 걷고 있었다. 마치 산책이라도 하는 듯 평온한 모습이었다. 화원 속을 걷는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을 한 폭의 그림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 같았다. 하나 그 걸음 속에서 필설로 형용 못할 현기가 가득 담겨 있었다.
그녀가 한 걸음 한 걸음을 걸을 때마다 그녀의 몸은 한없이 자유로워 보였고, 어디로도 움직일 수 있을 것 같았다. 또한 무엇으로도 잡을 수 없을 것 같았다. 마치 나비처럼, 때로는 안개처럼, 가끔은 유성처럼 그녀는 움직였다.
그 움직임이 멈춰졌을 때 진산월은 자신도 모르게 탄식을 토해냈다.
“아…..!”
언제까지고 그녀의 걷는 모습을 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녀의 걸음은 단지 열두 발자국에 불과했지만, 그녀가 열두 걸음을 걷는 그 짧은 순간은 진산월의 뇌리에서 영원히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그 보법에 서려 있는 무수한 변화와 현오한 의미를 어떻게 말로 설명할 수 있단 말인가?
조여홍은 격동으로 몸을 떨고 있는 진산월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냉정한 음성으로 말했다.
“네가 내 걸음에서 무언가를 얻을 수 있다면 이번 일에 적지 않은 도움이 될 것이다.”
진산월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 급히 물었다.
“조금 전의 그 보법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이름은 알아서 무엇하겠느냐? 네가 무엇을 얻든 아니면 아무것도 얻지 않든 나는 이것으로 이번 일에 대한 보수를 지불한 것이니 차 한 잔으로 일을 맡았다는 불평은 하지 않도록 해라.”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구궁보까지 가다 보면 생각이 바뀔 것이다.”
그녀는 냉랭한 한 마디를 내뱉고는 그에게 가차 없는 축객령을 내렸다.
“이제 그만 가 보아라. 앞으로 이 화원에는 내 허락을 받기 전에는 절대로 들어와서는 안 된다.”
“명심하겠습니다.”
진산월은 그녀에게 정중하게 포권을 하고는 몸을 돌려 화원을 벗어났다.
그녀는 그의 모습이 화원 너머로 사라질 때까지 그 자리에 꼼짝도 않고 선 채로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붉은 입술을 열었다.
“곤아가 사람을 잘 선택했군.”
어느새 나타났는지 그녀의 뒤에는 한 사람이 그림처럼 조용히 시립해 있었다. 검은 수염을 기르고 청삼을 입은 그 인물은 다름아니 이집사 공상춘이었다.
“그가 마음에 드십니까?”
그녀의 음성이 칼날같이 날카로워졌다.
“내가 종남파의 인물을 마음에 들어 할 것 같으냐?”
공상춘은 즉시 머리를 조아렸다.
“제자의 생각이 짧았습니다. 그런데 왜 그에게 그런 은혜를 베푸셨습니까?”
“그 무공은 한 번 모아서는 익힐 수 없는 것이다. 죽을 길을 찾아들어가는 놈에게 그 정도 아량은 베푸는 게 공정하겠지.”
“하지만 그가 만약에 그 무공의 연원을 알게 되기라도 한다면 곤란하지 않겠습니까?”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다. 당대에 그 무공을 알아보는 자는 존재하지 않을 테니 말이다.”
공상춘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부님의 말씀이 옳습니다.”
그녀는 문득 고개를 돌려 공상춘을 돌아보더니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떠올렸다. 차가운 미소였으나, 그만큼 매력적이기도 했다.
“네 말투를 보니 그를 질투하고 있는 모양이구나.”
공상춘은 더욱 깊숙이 허리를 숙였다.
“제자가 그럴 리 있습니까?”
“너는 항상 누군가를 시샘하게 되면 오히려 상대를 추켜세우거나 내 말에 무조건적으로 순응을 하곤 했지.”
“……!”
“하지만 안심해라. 많은 제자들 중에서 내가 가장 아끼고 있는 사람은 바로 너다. 하물며 다른 외부인을 너보다 아낄 것 같으냐?”
“제자가 어찌 감히 사부님을 믿지 못하겠습니까? 다만 사부님께서 워낙 재질이 뛰어난 젊은 인재들을 좋아하시니 그자 또한 사부님 눈에 든 것이 아닌가 생각했을 뿐입니다.”
조여홍은 문득 낭랑한 교소를 터뜨렸다.
“호호….. 역시 내 짐작대로군. 그 아이가 정말 모처럼 만난 좋은 재목임은 분명하다. 종남파의 장문인이라는 게 아쉬울 따름이지. 하지만 한 가지 소식을 듣고 나면 너도 안심을 할 것이다.”
공상춘은 재빨리 물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이번 일 때문에 쾌의당 칠대용왕 중에서 세 명이 움직이고 있다는 소식이다.”
조여홍의 얼굴에는 냉엄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다시 말해서 그 아이는 결코 살아서 이번 일을 마치지 못한다는 것이지.”
다음날 정오 무렵.
진산월고 종남파의 고수들은 석지명에게 작별을 고하고 석가장을 나섰다. 이번에는 진산월의 당부로 석가장의 식솔들이 대문을 열고 그들을 배웅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일행 중에는 뇌일봉도 끼어 있었다. 이번 여정이 구궁보에 있는 임영옥을 데려오기 위한 것임을 알게 된 뇌일봉은 무섭도록 흥분하여 불문곡직하고 그들을 따라가겠다고 나선 것이다. 아직 몸도 완쾌되지 않은 상태에서 석지명을 비롯한 몇 사람이 말리려 했으나, 불같이 노한 뇌일봉의 호통에 모두들 입을 다물어야 했다. 결국 뇌일봉의 거듭된 요구에 진산월이 승낙을 하여 뇌일봉은 그들 일행에 합류할 수 있었다.
석가장을 벗어난 진산월 일행은 우선 중인들의 눈을 피해 일전에 들렀던 객잔에 잠시 머물기로 했다. 몇 가지 사소한 일들이 아직 마무리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진산월은 그중 한 가지 일을 마무리 짓기 위해 일행들을 객잔에 기다리게 한 후 혼자서 풍림서각으로 향했다. 낙일방과 동중산이 따라오겠다고 나섰으나, 그들에게는 석단의 현재 행적을 좀 더 정확하게 파악하라는 지시가 내려졌다. 손풍은 눈치도 없이 난향원 운운했다가 전흠에게 끌려가서 끝도 없는 잔소리를 들었으며, 유소응은 뇌일봉에게 붙들려 자신의 신상에 대한 이야기를 상세하게 늘어놓아야 했다.
모처럼 일행들과 떨어져 혼자 낙양의 거리로 나오자 진산월은 갑자기 표현하기 힘든 해방감을 느꼈다. 밝은 얼굴로 거리를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모습만 보아도 상쾌해졌다. 언제 살인 사건으로 분위기가 흉흉했느냐는 듯 낙양은 예전의 활력을 완전히 되찾아서 거리는 사람들로 넘쳐났고, 천지에 화향이 감돌았다.
진산월은 느긋한 걸음으로 낙양의 거리를 걷다가 남문대로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머리에 방립 하나를 쓰고 있기 때문인지 그를 알아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서 진산월은 자유로움을 만끽한 채 남문대로를 걸어갔다.
얼마쯤 걸어가니 멀리 고풍스런 풍림서각의 건물이 시야에 들어왔다. 진산월은 천천히 풍림서각 안으로 들어갔다. 풍림서각은 여전히 유생들로 북적거리고 있었고, 가끔은 검을 찬 무인들이 서가를 뒤적거리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진산월이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자 점원 한 사람이 다가왔다.
“무슨 책을 찾으십니까, 손님?”
진산월은 그에게 각주를 만나려 왔다고 말했다. 그러자 점원의 얼굴에 난색이 떠올랐다.
“각주님은 지금 외인을 만나실 수 없는 상황입니다.”
“왜 그런가?”
“최근에 본각에 여러 가지 큰일들이 발생하여 그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외부인을 접견하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진산월은 잠시 고민에 빠졌다. 그리고 이번 일은 최대한 은밀히 처리해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결국 진산월은 점원에게 알았다고 말하고는 책 몇 권만 사든 채 풍림서각을 나서야 했다.
그가 풍림서각을 막 벗어났을 때 계산대에서 멀지 않은 서가에서 책을 고르고 있던 사람이 그가 사라진 곳을 쳐다보고 있었다.
“역시 이곳에 왔군. 그렇다면 당초 예상대로 천룡궤는 풍림서각 안에 있음이 분명하다. 문지상에게 좀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듣지 못하고 그를 잃은 것이 정말 아쉽군.”
자의중년인은 무언가 생각에 잠긴 듯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더니 이윽고 신형을 움직여 풍림서각 밖으로 사라져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