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19권 천룡고궤(天龍古櫃)편 : 8화
제 195장 비단전쟁
유길상은 고개를 들고 눈앞의 사람을 바라보았다.
“개봉의 황 대인이라고?”
유길상의 오랜 측이며 서안에서 가장 큰 포목점인 취선방의 총지배인인 적송은 힘차게 머리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제가 개봉 일대의 일을 잘 알고 있는 담노대에게 물어보았는데, 개봉 일대에서는 몇 손가락 안에 드는 거부라고 합니다.”
“그런데 비단 만 필이라?”
“주문량이 많기는 하지만, 선불로 은자 이천 냥을 지불한다고 하니 일이 잘못될 리는 없습니다.”
은자 이천 냥의 선불이라면 확실히 적은 금액은 아니었다. 하지만 비단 만 필이라면 무려 이만 오천 냥어치였다. 원가만 해도 만 팔천 냥이니 아무리 서안의 포목점을 주름잡고 있는 유길상이라 해도 신중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반면에 거래만 무사히 성사되면 칠천 냥이라는 엄청난 순이익이 떨어지는 것이다. 그가 운영하는 취선방이 서안은 물론 섬서성에서 제일 큰 포목점이라 해도 일 년의 순이익은 불과 오륙천 냥밖에 되지 않는다. 남들에게는 눈이 뒤집혀질 정도의 커다란 금액이기는 했으나, 지금 칠천 냥의 순이익을 볼 수 있는 거래를 앞에 두게 되자 왠지 미흡하게만 느껴졌다. 일만 잘되면 일 년에 벌어들이는 금액보다 더욱 큰 이익을 얻게 되는 것이다.
유길상은 몇 번이나 궁리를 해 보았으나 결론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상인이라면 이런 큰 이익을 눈앞에 두고 포기할 수 없었다. 결국 그는 마음을 정한 채 적송을 향해 말했다.
“한 번 더 다른 사람을 통해 황 대인이란 자의 신분을 확인하도록 하게. 그래도 확실하다면 거래를 진행하세.”
“알겠습니다.”
황 대인은 듬직한 체구에 이목구비가 제법 준수한 중년인이었다. 그가 입고 있는 옷은 화려하지는 않지만 몹시 귀한 재질로 이루어져 있었다.
평생을 포목점에서 보낸 유길상은 황 대인이 입은 의복만 보아도 그의 성격이나 생활 습관을 짐작할 수 있었다.
‘비단 중에서도 최고급인 능라의에 서역에서 최근에 들어왔다는 천망결을 수놓았으니 유행에 민감한 성격이고, 허리춤에 배달린 향낭에서 흘러나오는 향은 가남에서만 난다는 귀하디귀한 기남향이니 풍류를 즐기는 자임을 나타낸다. 게다가 손에 들고 있는 부채는 얼핏 보기에는 평범한 듯하지만 사실은 값비싼 곤륜옥을 깎아 만든 것이니 돈에 구애받지 않고 자신만의 멋을 추구하는 자로구나.’
일단 상대에 대한 판단이 서자 더욱 결정을 내리기가 쉬웠다.
“정말 비단 만 필을 기일 내에 준비할 수 있겠소?”
황 대인이 미심쩍은 듯 묻자 유길상은 듬직한 웃음을 떠올렸다.
“비단 만 필이 적은 물량은 아니지만 불가능한 물량도 아닙니다. 강북에서 이 정도의 물량을 준비할 수 있는 곳은 저희 취선방뿐일 겁니다.”
“확실히 그런 것 같소. 개봉 일대의 제법 큰 포목점에 모두 의뢰를 해보아도 고개를 흔들기 일쑤였소. 오죽했으면 서안까지 달려왔겠소?”
“그런데 이토록 많은 물량이 필요한 이유가 무엇인지 알 수 있겠습니까?”
황 대인은 한차례 주위를 둘러보더니 자신들 외에는 아무도 없음을 확인하고는 쓴웃음을 머금었다.
“무얼 속이겠소? 이건 모두 황도로 보내질 것들이오.”
“황도라면……”
“왕 대인이지 누구겠소?”
황 대인이 목소리를 한층 낮추어 말하자 유길상은 퍼뜩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황도, 즉 북경의 최고 실권자는 장인태감인 왕전이었다. 왕전은 뇌물을 좋아하여 많은 문제를 일으켰으나 워낙 황제의 총애가 대단해서 누구도 그의 권위에 도전하지 못했다. 그 왕전이 머지않아 육순을 맞이하여 대대적인 연회를 준비하고 있다는 말은 유길상도 들은 적이 있었다.
“그럼 이 비단은 왕 대인의 회갑연 때 쓰려는 것이로군요.”
“정확히 말하면 회갑연의 손님들에게 선물로 하사할 것들이오.”
당대 최고 실권자의 회갑연이니 손님이 적을 리 없었다. 그러니 비단 만 필이 결코 무리한 분량은 아니었다. 한 가닥 남아 있는 의문마저 해소한 유길상은 기꺼운 마음으로 황 대인과 계약을 맺었다.
삼 일 후에 비단 만 필을 은자 이만 삼천 냥에 넘겨주기로 한 것이다, 시중 가격보다 이천 냥이나 깎아 주긴 했으나, 이번 거래만 성사되면 매년 정기적으로 비슷한 물량을 주문하겠다는 말에 혹해 아무런 불만이 없었다. 계약금은 당초 말한 대로 이천 냥으로 정했으며, 만에 하나 비단을 준비하지 못하면 그 열 배인 이만 냥을 배상하기로 하고 서로 수결을 맺고 도장을 찍었다.
황 대인은 계약서를 몇 번이나 꼼꼼하게 점검한 다음에야 비로소 만족한 웃음을 띠며 계약서를 잘 접어 품속에 집어넣었다.
“좋은 거래를 하게 되어 다행이오.”
유길상은 황 대인이 계약금으로 내놓은 이천 냥짜리 전표가 천하에서 가장 신용이 좋은 산서은호의 것임을 눈으로 재빨리 확인하고 잘 보관을 했다.
“저도 황 대인을 알게 되어 기쁩니다. 앞으로도 계속 황 대인과 친분 관계를 이어 나가고 싶습니다.”
“하하….. 이번 건만 잘되면 이를 말이겠소? 아무튼 유방주 덕분에 내가 이번에 큰 고민을 해결하게 되었구려.”
황 대인은 흐믓한 미소를 지으며 떠나갔다.
그로부터 이틀 동안 유길상은 정신없이 일을 했다. 그가 운영하는 취선방이 아무리 서안에서 제일 크다고 해도 비단 만 필을 가지고 있을 리 없었다. 그는 서안 일대의 포목점을 깡그리 섭렵한 것은 물론 자신의 본가인 유화상단의 도움까지 받아 섬서성의 포목점을 정신없이 뒤지고 다녔다.
그리하여 불과 이틀 만에 비단 만 필을 모두 모으는 업적을 이루고야 말았다. 비단 만 필이 거대한 창고에 쌓이는 광경을 지켜보고 나서야 유길상은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 침상에 곯아떨어졌다. 그날 밤 유길상은 자신이 구름을 타고 하늘 높이 날아오르는 꿈을 꾸었다. 구름은 솜처럼 포근했고, 푸른 하늘은 청명하기 그지없어 유길상은 전신이 날아갈 듯 상쾌했다.
하나 시간이 지날수록 너무 높이 날아오르는 것 같아 조금씩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그러다 문득 발아래를 내려다보니 조금 전만 해도 자신을 포근히 감싸고 있던 구름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는 것이 아닌가?
“아악!”
깜짝 놀란 유길상이 비명을 내지르는 순간에 그의 몸은 끝도 모를 바닥으로 추락해 버렸다. 그 순간, 유길상은 잠을 깼다.
“방주 어른, 큰일 났습니다.”
누군가가 방문을 두드리며 요란을 떨고 있었다.
유길상은 단잠에서 깨어난 것이 불쾌하여 버럭 소리를 질렀다.
“누가 꼭두새벽부터 이런 소란을 떨고 있느냐?”
그의 목소리가 들리자 방문이 벌컥 열리며 한 사람이 뛰어 들어왔다.
“방주 어른, 깨어나셨군요.”
유길상은 흠칫 놀라 그 사람을 보다 그가 자신의 심복인 적송임을 알고는 눈살을 찌푸렸다.
“자네 제정신인가? 지난 며칠 동안 내가 얼마나 무리한 줄을 알면서도 소란을 부려 잠을 깨운단 말인가?”
유길상의 호통에도 적송은 안색이 시커멓게 변한 채 다급한 음성으로 떠들어 댔다.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닙니다. 정말 큰일이 일어났습니다.”
“대체 무슨 일이기에 이렇게 호들갑이란 말인가?”
“어서 창고로 가 보셨야겠습니다. 비단이…..”
그 말에 유길상이 안색이 핼쑥하게 굳어졌다.
“비단이 어떻게 되었단 말인가?”
“창고에 쌓아 두었던 비단이 송두리째 사라져 버렸습니다.”
“뭐라고?”
유길상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 순간 머리가 핑하니 어지러워서 그는 몸을 한차례 휘청거렸다. 하나 이내 다시 흔들리는 몸을 똑바로 세우며 허겁지겁 밖으로 달려 나갔다.
“방주 어른, 옷부터 갈아입으시고…..”
적송이 밖으로 나왔을 때는 이미 유길상은 잠옷 차림으로 대문 밖으로 달려 나간 후였다.
단숨에 창고로 달려간 유길상은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어제 저녁만 해도 창고 가득 쌓여 있던 비단들은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드넓은 창고가 문도 닫히지 않은 채 휑하니 열려 있는 모습이 왠지 비현실적으로 보였다.
원가로만 따져도 만 팔천 냥어치나 되는 비단들이 밤사이에 깡그리 사라져 버린 것이다.
유길상이 정신을 차린 것은 그로부터 일각이 지난 후였다.
제일 먼저 그의 머릿속을 지배하는 것은 황 대인에게 지불해야 할 이만 냥의 배상금이었다. 비단 만 필을 끌어 모으느라 여유자금을 모두 소비했는데 이만 냥이라는 거금을 그냥 날려버릴 수는 없었다.
‘비단을 구해야 돼…..’
배상금을 지불할 바에는 다시 비단 만 필을 구하는 게 백 배 나았다. 적어도 배상금 지불할 필요가 없을뿐더러 비단을 거래함으로써 생긴 이익으로 이번의 손실을 어느 정도 보충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유길상은 재빨리 머릿속으로 계산을 했다.
‘도단당한 비단 만 필 중 실제로 구입한 것은 오천 필이고 나머지는 재고가 쌓였던 것이었으니 손해는 구천 냥 정도다. 하나 거래에 성공하면 순 이익이 오천냥이 떨어지므로 결국 사천 냥의 손실만 입게 된다. 그 정도라면 비상금으로 보충할 수 있다.
그가 가진 비상금은 만 냥이 조금 넘었다. 비단 만 필을 구입하자면 일만 팔천 냥이 필요하므로 모자라는 금액이 칠천 냥 남짓되었지만, 다음날이면 황 대인에게 잔금을 받을 수 있으니 결국 하루 정도만 융통하면 된다.
칠천 냥을 하루 동안 빌리는 것은 그로서는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문제는 기간 내에 비단 만 필을 다시 구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이제 내일이면 황 대인에게 비단을 전해 주어야 한다. 오늘 하루 동안 비단 만 필을 구할 생각을 하니 유길상은 하늘이 노랗게 변하는 것 같았다.
하나 그렇다고 손을 놓고 있다가는 그야말로 나락으로 굴러 떨어지게 될 것이다.
유길상은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연줄을 동원해 비단을 찾아 나섰다. 하나 도단당한 만 필도 간신히 구한 것인데, 다시 또 만 필이나 되는 비단을 구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아무리 서안이 비단 교역의 중심이라고 해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오후가 되도록 비단을 구하지 못한 유길상은 속이 타들어가는 듯한 느낌에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때 그의 오랜 심복인 적송이 허겁지겁 달려왔다.
“방주 어른, 구했습니다!”
“뭐라고?”
“이제 살았습니다. 비단을 구했습니다!”
적송의 외침에 유길상은 지옥에서 부처를 만난 사람처럼 뛸 듯이 기뻐했다.
“그게 정말인가? 대체 어디서 비단을 구했나?”
“서역으로 떠나려는 상단들을 뒤졌습니다. 그랬더니 마침 서역으로 비단 구천 필을 가지고 가려는 상단이 하나 있더군요.”
유길상은 그의 등을 마구 두드렸다.
“잘했네. 정말 잘했어. 내가 미처 그 생각을 못했군. 그들에게서 구천 필을 구입한다면 나머지 천 필이야 못 구하겠나?”
적송의 얼굴에 난처한 빛이 떠올랐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무엇인가?”
“그들도 서역에 미리 계약이 되어 있어서 다른 사람에게 팔기 힘들다고 합니다.”
유길상은 펄쩍 뛰었다.
“그래서 그냥 빈손으로 돌아왔단 말인가?”
“그게 아니라…… 그들이 서역의 거래처에 줄 위약금까지 우리가 물어 줘야만 계약하겠다고 합니다. 그들로서도 위약금을 우리가 배상하면 굳이 힘들게 서역까지 갈 필요가 없으니 좋은 일이겠지요.”
유길상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위약금이 얼마라고 하던가?”
“오천 냥이라고 합니다.”
“음…..”
유길상의 입에서 신음성이 터졌다.
“무슨 놈의 서역과 거래하는 데 위약금이 오천 냥이나 된단 말인가?”
“그것도 적은 거라고 하더군요. 계약금이 천냥이나 받았기 때문에 원래는 만 냥의 위약금을 물어야 하지만 오래된 거래처라 다섯 배만 물어내면 될 거라고 하더군요.”
유길상은 갑자기 의혹이 생겼다.
“대체 서역의 어디와 거래를 하기에 그렇게 많은 물량을 계약했단 말인가?”
“토번국이라고 합니다.”
그 말에 유길상은 마음속에 떠올랐던 일말의 의혹을 씻어 버렸다. 토번국은 실크로드에서도 가장 번성한 나라로, 특히 최근 들어 왕비의 사치로 인해 비단의 수요가 급격히 증가하고 있었다.
유길상은 다시 재빨리 계산에 들어갔다.
‘오천 냥이 추가된다면 결국 황 대인에게 파는 가격에 구입한 꼴이 된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배상금을 물지 않게 된 것만도 다행이다. 지금 내 수중의 돈에다. 황 대인에게 계약금으로 받은 이천 냥을 포함시키면 만 냥만 더 융통하면 된다.’
계산을 끝낸 유길상은 평소 거래하는 전장으로 가서 만 냥을 급전으로 융통한 다음 적송을 재촉하여 그 상단을 찾아 나섰다. 상단을 향해 가는 동안 유길상은 마음이 타들어가는 듯 초조했다. 만에 하나라도 상단이 기다리지 않고 토번으로 출발했다면 자신은 헛고생을 할 뿐 아니라 꼼짝없이 이만 냥을 토해내야 하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하늘이 도왔는지 그 상단은 수십 대의 마차에 탄 채로 기다리고 있었다. 반 시진만 더 기다렸다가 안 오면 그냥 출발하려 했다는 상단주의 말에 유길상은 가슴을 쓸어내려야 했다.
흥정하고 자시고 할 엄두도 내지 못하고 유길상은 비단 구천 필의 가격과 위약금을 포함하여 이만 천이백 냥을 지불했다. 그리고 저녁과 밤을 꼬박 새워 나머지 비단 일천 필을 이천 냥에 구할 수 있었다.
다음날 아침에 떠오르는 해를 보며 유길상은 자신이 멀쩡한 정신으로 저 해를 다시 보게 된 것이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비단을 구하지 못했다면 자신은 아마도 아침 해가 떠오르는 것을 보고 그대로 실성해 버렸을지도 몰랐다.
비록 밤을 꼬박 새웠으나 유길상은 간단하게 세면을 하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상쾌해졌다. 비록 비단 만 필을 도둑맞기는 했으나, 어쨌든 더 큰 피해 없이 이번 일을 마무리 지을 수 있게 된 것은 천행이 아닐 수 없었다.
이번 일이 잘 끝나서 황 대인과 계속 거래를 할 수만 있다면 비단을 도둑맞은 손실쯤은 쉽게 복구할 수 있을 것이다.
비단을 훔쳐 간 도둑에 대해서도 유길상은 분노하기는 했으나 큰 걱정은 하지 않았다. 그토록 많은 비단을 어떻게 훔쳐 갈 수 있었는지 그 재주는 신통하다고 하겠지만, 그 비단을 돈으로 바꾸는 일은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만 필이나 되는 비단을 거래할 곳은 그리 많지 않았다. 아니 거의 없다고 봐야 옳을 것이다. 자신만 해도 이번 일이 아니었으면 그런 거대한 물량을 소화하는 것은 꿈도 꾸지 못하지 않았겠는가?
더구나 제법 큰 비단 거래처에는 모두 이번 도난 사건에 대해 말해 두었기 때문에 일정 분량 이상의 비단을 팔러 오는 자는 모두 보고하도록 조치를 해놓은 상태였다. 그러니 비단 도둑이 아무리 용의주도한 인물이라고 해도 결국에는 꼬리를 잡히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 도둑을 잡기만 하면…..
유길상의 얼굴에 차가운 미소가 떠올랐다.
‘살아 있는 것은 뼈저리게 후회하도록 만들어 주겠다.’
아침을 간단하게 먹은 유길상은 느긋한 마음으로 차를 마시며 황 대인과 약속한 시간이 오기를 기다렸다. 황 대인은 오시경에 오기로 했는데, 계약이 끝나면 제법 푸짐한 점심 식사를 할 생각이었다.
마침내 오시가 되었다. 하나 황 대인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유길상은 그가 조금 늦게 출발한 모양이라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미시가 지났다. 그래도 유길상은 희망을 잃지 않았다. 개봉에서 서안까지 가까운 거리가 아니었다. 한 시진 정도는 충분히 늦을 수 있었다.
더구나 비단 만 필을 운반하기 위해 적지 않은 마차를 대동하고 있다면 더욱 그렇지 않겠는가?
신시가 되자 취선방의 식솔들은 안절부절못하기 시작했다. 적송은 아예 개봉에서 서안으로 오는 관도의 입구에 나가서 기다리고 있었다.
유길상은 우왕좌왕하며 어쩔 줄 몰라 하는 하인들에게 오히려 호통을 쳤다.
“경망스럽게 무슨 짓들이냐? 술상이나 내오도록 해라.”
“길이 막히는 모양이지. 황 대인은 느긋하고 풍류를 아는 인물이라 시간이 조금 늦는다고 해도 결코 허겁지겁 길을 재촉할 분이 아니야. 암, 그렇고말고.”
유길상이 술 한 병을 다 마실 때까지도 황 대인은 오지 않았다. 마침내 유시가 되자 날이 어두워졌다. 유길상은 술병을 치우고 대청마루 한쪽에 걸터 앉아서 생각에 잠겼다.
‘대체 무엇이 잘못되었을까?’
평소 술을 거의 입에도 대지 않던 유길상이었으나, 술 한 병을 다 마셨는데 취기는 오르지 않았다. 유길상은 어둠 속에 홀로 앉아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술 시경에 한 사람이 휘청거리며 그에게 다가왔다. 유길상이 쳐다보니 적송이었다.
적송은 머리가 잔뜩 헝클어지고 온몸에 먼지가 수북이 쌓인 채로 울고 있었다.
“방주 어른…..”
유길상은 그를 손짓해 불렀다.
“자네인가? 이리 오게 저녁은 먹었나?”
적송은 그의 발밑에 와서 털썩 엎드리며 울부짖었다.
“방주 어른, 우리는 사기 당했습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 차분히 말해 보게.”
적송은 눈물과 콧물이 범벅이 된 얼굴로 더듬거렸다.
“그….. 그는….. 황 대인은 가짜였습니다. 개봉에는 그런 사람이 없다고 합니다….. 우리는 철저히 속았습니다.”
유길상은 정신이 아찔했으나 겉으로 내색하지 않고 적송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황 대인의 신분은 자네가 두 번이나 확인했지 않았나?”
“그게 …. 저도 감쪽같이 속았습니다. 처음 황 대인을 소개한 사람은 담노대였습니다. 담노대는 방주 어른도 아시다시피 저와 상당히 오랫동안 사귀어 온 인물이었습니다. 성격도 괜찮고 발도 넓어서 서로 도움을 주고받으며 이십 년 가까이 지내왔지요.”
“담노대는 나도 잘 알고 있지. 제법 믿을 만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담노대가 거짓말을 했단 말인가?”
“예. 담노대는 황 대인이 자신이 예전에 모시고 있던 어른이며 개봉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부자라고 했는데 모두 철저한 거짓말이었습니다. 담노대는 황 대인을 잘 알지도 못했고, 황 대인은 개봉에서 존재하지도 않은 사람이었습니다.”
“담노대는 지금 어디에 있나?”
“혹시나 하여 제가 찾아가 보았으나 이미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습니다. 이 사실도 담노대가 제가 찾아올 것을 대비해 써놓은 글에 적혀 있기 때문에 알게 된 것입니다.”
“담노대 말고도 다른 사람에게 황 대인의 정체를 알아보라고 했던 것 같은데….”
“저는 담노대 외에 종일에게도 부탁을 해서 비슷한 대답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종일에게도 가 보니 그도 이미 모습을 감춘 후였습니다.”
종일은 취선방의 오래된 거래처를 운영하는 자로, 유길상도 잘 알고 있었다. 역마살이 있어 떠돌아다니기를 좋아했으나, 잘 웃고 쾌활해서 좋아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런 종일이 담노대와 함께 유길상을 속인 것이다.
유길상은 계속 울고 있는 적송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혼잣말처럼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나는 오후 내내 이곳에 앉아 대체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를 생각하고 또 생각했지.”
적송은 울다 말고 유길상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유길상은 별로 흥분하거나 절망하는 기색도 없이 차분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그래서 내린 결론이 무언인지 아나? 누군가가 처음부터 나를 파멸시키기 위해 철저한 계획을 세웠다는 것이지. 그 계획은 너무나 치밀하고 완벽해서 내가 아닌 다른 구구라도 해도 빠져 나갈 수 없었을 걸세.”
“…..!”
“그 사람은 내 성격까지 훤히 파악하고 있음이 분명해. 나는 거래하기 전에 상대의 복장이나 행동거지를 보고 그 사람의 습성을 알아내어 거래에 이용하고는 했지. 내가 만난 황 대인은 완벽한 부자에 믿을 만한 사람이었어. 나처럼 풍류를 좋아했고, 겉으로 드러난 호화스러움보다는 내실 있는 고급스러움을 추구했지. 그래서 나는 그를 만난 이후 그에 대한 모든 의심을 깨끗하게 지워 버렸네.”
유길상은 적송이 듣든 말든 신경 쓰지 않고 자신의 할 말만 계속 늘어놓았다.
“거래의 조건 자체는 아주 좋았네. 적당한 이윤도 확보되었고, 무엇보다도 일단 거래를 트면 매년 꾸준한 물량을 보장받는다는 게 아주 큰 매력이었지. 그래서 처음에 비단이 도난당했을 때도 나는 도난당한 비단을 걱정했지 그를 의심하지는 않았네.”
적송이 무어라고 말하려 하자 유길상은 손을 들어 그를 제지했다.
“내 말을 좀 더 들어 보게. 비단을 도둑맞은 순간에는 하늘이 무너지는 듯 눈앞이 캄캄했던 게 사실이야. 하지만 마음이 가라앉자 생각만큼 큰일은 아니라는 판단이 들더군, 도둑맞은 비단은 쉽게 돈으로 바꿀 수 없는 것일세, 판로를 내가 모두 막았으니 언젠가는 다시 내 수중으로 돌아올 물건이지. 결국 거래만 무사히 마치면 내 손해는 거의 없게 되는 것일세. 그래서 나는 다시 비단을 구해 황 대인과의 거래를 계속할 생각을 한 걸세.”
“……!”
“때마침 자네가 구천 필이나 되는 비단을 가진 상단을 물색해왔고, 나는 그들의 위약금을 지불하면서까지 그들에게서 비단을 구입했네. 비록 손해는 적지 않았지만 황 대인과의 거래만 성사되면 머지않아 복구될 금액으로 본 것이지. 그런데 결국 가장 중요한 황 대인과의 거래가 깨어져 버린 걸세. 이쯤에서 나는 내 자신에게 질문을 던졌지. ‘이 거래는 어디에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머지않아 답변이 나오더군.”
유길상이 시선이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있는 적송에게로 향했다.
“이 거래는 처음부터 잘못된 것일세. 황 대인이란 자는 실제로 존재하지도 않은 인물이며, 비단 만 필을 구입할 의사도 없었지. 그런데 이번 거래를 내게 처음 가져온 사람은 바로 자네일세. 비단 만 필은 결코 적은 분량이 아니라서 그 거대한 창고가 가득 넘지 않았고, 창고의 열쇠도 보통 것과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을 사용했네. 그 창고를 관리하는 사람도 자네였고, 경비를 책임진 인물도 자네였지.”
어둠 속에서 훤히 알 수 있을 만큼 적송의 눈이 번쩍거렸다. 유길상은 그 눈을 빤히 쳐다보면서 말을 계속했다.
“만 필의 비단을 애타게 찾고 있는 나에게 갑자기 구천 필이나 되는 비단을 가지고 있는 상단을 소개한 사람도 자네일세. 이 얼마나 공교로운 일인가? 내가 손해 본 모든 일의 가장 핵심이 되는 부분에는 모두 자네가 연관되어 있으니 말일세, 더욱 결정적인 게 뭔지 아는가?”
적송은 불쑥 물었다.
“무엇이오?”
유길상은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내들었다. 그것은 비단 조각이었다.
“이건 오늘 서역으로 떠난다는 상단에서 구입한 비단의 일부분일세. 자세히 보게. 여기에 아주 조그맣게 글자가 씌어 있지 않나?”
적송은 힐끗 그 비단을 쳐다보았으나 글자가 있는지도 제대로 확인도 하지 않았다.
“자네는 보지 않고도 알겠지? 이 ‘묘금도’라는 글자 말일세. 이건 우리 유화상단에서 취급하는 비단이란 뜻일세. 결국 그 서역 상단에서 나에게 판 비단은 내가 잃어버린 바로 그 비단이었던 것일세.”
유길상은 비단 조각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나야 나머지 비단 천 필을 구하느라 이리저리 쫓겨 다녀서 정신이 없었다 치고 비단 구천 필을 이곳 창고로 옮겨온 자네가 이 비단이 원래 우리의 것임을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것은 정말 우스운 일 아닌가? 어떤가? 내 말을 모두 들었으니 이번에는 자네가 말해 보게”
적송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유길상은 천천히 뒷짐을 진 채 허공을 쳐다보았다.
“자네가 처음 황 대인을 소개해 주었다는 담노대 말일세. 나도 사람을 풀어 담노대를 찾아보았네. 어렵긴 했지만 결국 찾았지. 자네의 집 우물 속에 있더군. 차가운 시신이 되어 말일세. 그곳에서 종일의 시신도 발견했다는 말은 굳이 덧붙일 필요가 없겠지. 그들은 원래 이번 일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자들일세. 모든 일은 오직 적송, 자네 혼자 꾸민 일일세. 그렇지 않나?”
적송은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렇게 잘 알면서도 무엇 때문에 물어 보는 거요?”
“자네가 왜 이런 일을 했는지 궁금했기 때문일세. 그래도 나와 이십 년 가까이 일해 온 자네가 아닌가? 단순히 금전을 노린 일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복잡하고 치밀한 계획이었네. 자네에게는 이번 일을 사주한 배후가 있겠지? 그가 누구인지 말해 주게.”
적송의 칼날같이 예리한 시선이 유길상을 향했다.
“내가 말하리라고 생각하오?”
유길상은 조금도 화를 내거나 당황하지 않고 오히려 빙긋 웃었다.
“배후가 있기는 있단 말이로군, 사실 굳이 자네 입으로 말할 필요는 없네. 자네 뒤에 배후가 있다면 그가 누구인지는 쉽게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니까”
적송은 의혹을 참지 못하겠는지 급히 물었다.
“그걸 어떻게 안단 말이오?”
“서안에서 우리 유화상단을 건드릴 만한 인물은 오직 한 사람뿐일세. 마침 얼마 전부터 우리와 그 사람 사이에는 몇 가지 일들이 있었지. 그런데 이런 식으로 보복을 해오는군, 과연 대단한 노인네야.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
적송의 눈자위가 실룩거렸다.
“나는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모르겠소.”
유길상은 혀를 찼다.
“쯧. 이보게, 적송 그렇게 오랫동안 나를 모셨으면서도 아직도 내 성격을 모른단 말인가? 나는 확실치 않은 일은 벌이지 않는 사람일세. 내가 자네에게 사정을 밝힌 것은 이미 모든 일을 소상하게 파악했다는 뜻일세. 자네가 손노태야의 지시를 받고 이번 일을 저질렀다고 꼭 내 입으로 밝혀야 알아듣겠나?”
적송은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 있다가 문득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둠 속에서 어느새 수십 개의 인영이 그를 에워싸고 있었다.
적송의 안색이 시커멓게 변했을 때 유길상은 한숨을 내쉬었다.
“불쌍한 사람 같으니. 이런 일을 저질렀을 때는 일이 잘못되었을 때 어떤 꼴을 당할지 각오하고 있었어야지. 자네는 어떤 꼴을 당하고 싶나? 말해보게. 그동안 지내온 정을 생각해서 자네의 소원대로 해주지.”
적송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러다 갑자기 입으로 폭포수 같은 검붉은 피를 토해내더니 힘없이 바닥에 쓰러져 버렸다.
스스로의 심맥을 끊은 것이다.
유길상은 피를 흘린 채 싸늘히 식어가고 있는 적송에게는 시선도 주지 않은 채 허공을 올려보며 씁쓸한 탄식을 토해냈다.
“자네가 고아였을 때 손노태야의 도움을 받았다는 건 알았지만 그 빛을 꼭 이런 식으로 갚을 필요는 없지 않았나? 그토록 오래전의 일인데 말이야. 자네는 너무 잔정이 많은 게 흠이었네. 저승에 가면 단단히 반성하도록 하게.”
유길상은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의 시체를 양지바른 곳에 묻어 주어라.”
비단 만 필의 처치는 유길상을 계속 고민스럽게 했다. 더구나 그 만 필을 구입하기 위해 빌린 급전 만 냥은 자칫하면 커다란 독이 되어 그를 위협할지도 몰랐다. 하나 그 고민은 너무 쉽게 해결되었다.
“정말 비단 만 필을 구입하겠단 말이오?”
“그렇소.”
유길상은 자신의 앞에서 능글맞게 웃고 있는 중년인을 한동안 가만히 쳐다보았다. 그러다 물었다.
“그 많은 비단을 무엇에 쓸 생각이오?”
중년인은 히죽 웃으며 대꾸했다.
“비단 장사가 제법 짭짤하다고 해서 이번 기회에 뛰어들어 보려하오.”
“그 정도 분량이면 어렵지 않게 뿌리내릴 수 있겠지.”
“바로 그렇소.”
유길상은 잠시 생각에 잠겼으나 자신이 고민하고 자시고 할 필요가 없다는 걸 깨달았다. 이 중년인이 비단을 사주지 않는다면 유길상은 파산하게 되는 것이다. 비록 본가인 유화상단이 건재하다고 해도 작은 포목점으로 시작해서 서안 일대의 비단 시장을 좌지우지했던 유길상 본인은 완전히 실패한 인생이 되고 마는 것이다.
“하지만 삼 할은 너무 심한 것 같소.”
유길상의 말에 중년인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물량이 너무 많아서 나로서도 위험부담이 심해서 그 정도 이익이 보장되지 않는다면 뛰어들 수가 없소.”
“비단 만 필의 원가가 만 팔천 냥인, 그것의 삼 할이면 오천냥이 넘소, 그건 본 취선방의 일 년 순이익과 맞먹는 금액이오.”
중년인은 비릿한 미소를 머금었다.
“싫으면 관둡시다. 나야 최악의 경우 비단 장사를 포기하고 다른 업종에 뛰어들면 되지만, 당신은 좀 더 심한 꼴을 당하게 되지 않겠소?”
유길상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독사의 그것을 보는 듯 싸늘한 눈이었다. 하나 중년인은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소리내어 웃었다.
“하하….. 생각의 관점을 조금 바꿔 보는 게 어떻겠소? 오천 냥을 손해 본다고 생각하지 말고 골칫덩어리를 처분하면서 만 삼천냥이나 받는다고 생각해 보란 말이오. 그 금액이면 다시 사업을 시작해서 본궤도에 오를 때까지 버티기에 충분하지 않겠소?”
물론 그렇다. 급전 만 냥을 상환하고도 삼천 냥의 여윳돈을 가질 수 있는 금액이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유길상이 이번 일로 잃게 되는 손해는 그야말로 천문학적인 숫자가 된다.
유길상은 한동안 중년인을 쳐다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거래하겠소.”
중년인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활짝 웃어 보였다.
“잘 생각했소.”
유길상은 빙글거리며 웃고 있는 중년인을 밉상스러운 듯 노려 보다가 마침내 참지 못하고 물었다.
“당신은 대체 누구요?”
중년인은 오른쪽 귀에 비해 유난히 작은 왼쪽 귀를 쓰다듬더니 만족한 웃음을 흘리며 입을 열었다.
“내 이름은 노해광이라 하오.”
그는 짤막하게 한마디를 덧붙였다.
“남들은 나를 철면호라고 부르기도 하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