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19권 천룡고궤(天龍古櫃)편 : 9화
제 196장 일다적가
석가장에 머무른 지 삼 일째 되는 날 아침.
“손님이 오셨습니다.”
정연각을 담당하는 모일우가 한 장의 배첩을 공손하게 내밀었다.
진산월은 배첩을 펼쳐보았다.
<낙양 철가장 철평>
처음 보는 이름이 씌어 있었다.
모일우는 진산월의 표정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떻게 할까요?”
“들여보내.”
“알겠습니다.”
모일우가 머리를 조아리고 물러나자 옆에 있던 낙일방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모르는 인물인데 무조건 만나셔도 되겠습니까?”
“걱정하지 마라. 너도 아는 인물이니까.”
“네?”
낙일방이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한 눈으로 쳐다보았으나 진산월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빙긋 웃기만 했다.
잠시 후에 모일우의 뒤를 따라 들어오는 두 사람을 보자 낙일방은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점잖은 장삼을 걸친 그 두 사람은 다름 아닌 개방의 낙양분타주인 철골개 이동평과 낙일방의 친구인 위적풍이었던 것이다.
이동평은 턱에 수염을 붙이고 머리에는 이상한 관을 써서 얼핏 보기에는 전혀 다른 사람 같았으나, 위적풍은 별다른 분장은 하지 않고 헝클어진 머리만 두건으로 가렸을 뿐이었다.
그런데도 제법 그럴듯해서 눈여겨보지 않는다면 누구도 그들이 개방의 고수들인지 알지 못할 것 같았다.
‘철평이란 결국 철골개 이동평의 앞글자와 뒷글자만 딴 이름이로군. 작명 솜씨하고는…..’
낙일방은 속으로 투덜거리면서도 자리에서 일어나 반갑게 그들을 맞이했다.
누가 뭐라 해도 위적풍은 낙일방의 가장 절친한 친구였고, 그를 만나는 일은 언제나 즐거울 수밖에 없었다.
“어서 오십시오. 이 분타주. 그리고 잘 왔다, 적풍. 머리에 쓴 두건이 제법 잘 어울리는구나.”
위적풍은 잇몸을 송두리째 드러내며 활짝 웃었다.
“그러냐? 이렇게 차려입으니까 이 형님도 제법 귀공자 같지?”
낙일방은 피식 웃고 말았다.
“귀공자는 무슨 얼어 죽을…… 두건을 쓰니까 그만큼 보기 싫은 얼굴이 가려져서는 나아 보인다는 말이지.”
“네 말대로 얼굴을 가릴수록 나아 보인다면 복면이라도 쓰면 내가 천하의 미남자가 된단 말이로구나. 오늘 저녁부터 당장 실험해볼까?”
위적풍은 한바탕 너스레를 떨더니 진산월을 향해 정중하게 포권을 했다.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잘 지냈네. 자네도 여전한 것 같군.”
위적풍은 습관적으로 머리통을 긁적거리려다 두건을 쓰고 있는 바람에 애꿎은 두건만 구겨 버리고 말았다.
낙일방이 웃음을 참느라 킥킥대는 동안 이동평이 진산월에게 인사를 한 후 그의 앞에 마주 앉았다.
“내일이면 진 장문인께서 낙양을 떠나신다고 해서 오늘 찾아뵈었소. 너무 늦지 않았는지 모르겠구려.”
“적당한 시기에 잘 왔소. 부탁한 일은 어떻게 되었소?”
“다행히 어젯밤에 간신히 마칠 수 있었소.”
이동평은 품에서 두툼한 서책 하나를 꺼내어 진산월에게 내밀었다.
“진 장문인께서 부탁하신 보고서요. 읽어 보기 편하시도록 앞부분에 간략하게 내용을 정리해서 기술했고, 뒤에는 보다 상세한 사항을 첨부했소.”
진산월은 묵묵히 서책을 받아 읽어 보았다.
상당히 많은 분량이었기 때문에 앞부분에 있는 약식 보고서만 읽는 데도 적지 않은 시간이 소요되었다.
보고서에는 공상춘의 최근 동향과 인적 사항, 교우 관계 및 재산 상황 등이 일목요연하게 적혀 있었다.
어떤 부분은 너무 세밀하고 상세하여 어떻게 이런 부분까지 조사할 수 있었는지 신기한 생각이 들 정도였다.
“짧은 시간 내에 아주 충실하게 조사를 했군. 수고 많으셨소.”
“별말씀을. 이번 일로 종남파와 본방 사이의 불필요한 오해가 해소된다면 그것으로 충분하오.”
“오해 같은 건 애초부터 없었소. 앞으로도 잘 지내게 될 거요.”
이동평은 진산월의 얼굴을 가만히 응시하다가 머리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다행스러운 일이오. 듣자 하니 며칠 전에 이곳에서 점창파 고수들과 종남파 사이에 비무가 벌어졌다고 하던데, 그게 사실이오?”
진산월은 굳이 그 사실을 부인하지 않았다.
“그런 적이 있기는 했소. 별로 대단한 건 아니고 양쪽에서 제자 두 사람씩이 나와 간단하게 서로의 재주를 비교해 보았을 뿐이오.”
진산월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으나 이동평은 눈을 빛내며 정색을 했다.
“사실 그 일 때문에 낙양 일대가 한동안 소란스러웠소.”
“단순히 제자들 간에 비무를 벌였을 뿐인데 그 일로 낙양이 소란스러워지다니 선뜻 이해가 되지 않는구려.”
“진 장문인의 말씀처럼 단순한 일이 아니오. 사람들은 이번 일을 종남파가 구대문파에 복귀하기 위해 본격적인 행동에 나선 신호탄으로 해석하고 있소.”
그래서 점창파뿐만 아니라 구대문파의 다른 곳에서도 예의 주시하고 있다고 하오.
“그건 너무 지나친 해석이군.”
“그만큼 진 장문인과 종남파 고수들의 행도에 많은 무림인들의 관심이 집중되어 있다는 뜻이오. 더구나 그 비무에서 점창파가 손해를 보았다는 소식이 퍼지자 사태가 묘하게 돌아가고 있소.”
“당시의 비무는 누가 이기고 지는 상황이 아니었소. 그런데 사태가 묘하게 돌아간다는 건 무슨 말이오?”
“비무 결과가 어찌되었건 강호에 점창파가 불리했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으니 실제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는 더 이상 중요한 게 아니오. 그 소문을 들은 점창파의 고수 몇 사람이 낙양으로 오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소.”
“점창파의 고수라면?”
이동평의 진산월의 얼굴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신응검협이 이쪽으로 오고 있다고 하오.”
진산월의 얼굴은 전혀 표정이 변화가 없었다. 놀라거나 당혹해하는 빛도 없었고, 그렇다고 흥미진진해하거나 호승심을 불태우지도 않았다. 너무도 담담한 그 모습에 이동평은 자신이 정말 상대하기 힘든 사람을 만났다는 걸 다시 한 번 절감했다.
어쩔 수 없이 이동평은 몇 마디 말을 더 주고받은 다음 석가장을 나와야 했다. 위적풍은 대청을 벗어나기 전에 낙일방에게 무슨 말인가를 하려는 듯 한참이나 머뭇거렸으나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를 한차례 꽉 끌어안더니 휑하니 몸을 돌려 떠나고 말았다. 멀어지는 위적풍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낙일방의 얼굴은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이동평과 위적풍이 나간 다음 동중산이 들어왔다. 그는 문밖에서 지금까지의 대화를 듣고 있었는지 차분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이동평의 말이 사실이라면 일이 묘하게 흘러가는군요. 어디서 그런 소문이 퍼진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동중산이 묻는 것은 점창파와의 비무에 관한 소문이었다. 당시에 비무 현장에 있던 사람은 양파의 고수들 외에 석가장의 공자 두 사람과 구양가의 이공자, 그리고 뇌일봉뿐이었다. 점창파가 자신들에게 불리한 소문을 낼 리는 없고 종남파 또한 일부러 그런 소문을 퍼뜨릴 리가 없으니 결국 그들 외에 다른 누군가의 소행이라는 말인데, 언뜻 떠오르는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진산월은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내기를 빨리 끝내고 싶었던 누군가겠지.”
동중산은 어제의 일을 기억해 내고는 외눈을 번뜩였다.
“석성이란 말입니까?”
“아마 석성보다는 구양전월일 것이다. 석성이라면 우리가 내기에 관해 알고 있는데도 이렇게 뻔히 눈에 보이는 짓을 하지는 않았을 테니 말이다.”
진산월의 말을 듣고 보니 동중산은 사태의 추이를 훤하게 짐작할 수 있었다. 점창파가 종남파와 비무를 벌여 불리하게 끝났다는 소문이 퍼지게 되면 점창파의 다른 고수들이 찾아올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그렇게 되면 종남파와 점창파는 다시 격돌하게 될 것이고, 그 와중에 낙일방과 사인기가 비무에서 끝맺지 못한 승부를 가르게 될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자 동중산은 어제 보았던 구양전월의 번지르르한 얼굴이 한없이 밉살스럽게 여겨졌다.
하나 지금에 와서 자신들이 달리 할 일은 없었다. 이미 소문은 파다하게 퍼진 상태였고, 점창파의 최고 고수라는 신응검협까지 낙양으로 오고 있다고 하니 손을 놓고 기다릴 수밖에 없는 형편이었다.
신응검협이 점창파의 최고 고수라고는 하지만, 보다 정확하게는 점창파에서 외부에 알려진 고수들 중 최고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당장 신응검협의 사부인 점창일독만 해도 신응검협보다 훨씬 뛰어난 고수일 게 뻔하지 않은가? 하나 그래도 신응검협이 강호에서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 신법의 대가이며 최절정의 고수임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신응검협 조빙심이 벌인 일화 중 가장 유명한 것은 같은 구대문파에 속해 있는 공동파의 회도인과의 신법 대결이었다. 회도인은 공동파의 최고 고수인 공동삼도 중의 한 사람으로, 일찍부터 신법에 관한 한 강호에서 최정상을 달리는 인물로 알려져 있었다. 두 사람은 수많은 무림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동정호반에서 서로의 신법을 겨루었는데, 결과는 무승부였다. 하나 당시 조빙심의 나이가 회도인의 절반도 되지 않았음을 생각해 본다면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조빙심이 회도인과 함께 십대 신법 대가 중의 한 사람으로 꼽히게 된 것도 그 대결 이후였다. 조빙심이 두려운 것은 아니었다. 다만 조빙심과의 다툼으로 점창파와 완전히 등을 돌리게 된다면 종남파의 앞으로의 행보에 커다란 지장을 초래하게 될까 봐 걱정스러울 뿐이었다.
‘닥치지도 않은 일을 미리부터 걱정할 필요는 없다. 신응검협이 온다고 해서 반드시 본파와 시비가 벌어진다고 할 수 없지 않은가?’
동중산은 마음을 추스르고는 차분해진 눈으로 진산월을 응시했다.
“공상춘에 대한 보고서는 어떻습니까?”
“직접 확인해 보거라.”
진산월이 보고서를 내밀자 동중산은 보고서를 받아들고 읽어 보더니 몇 쪽 읽지도 않고 이내 한쪽으로 내려놓았다.
“쓸데없이 상세하기만 하군요.”
“바로 보았다.”
“얼핏 보기에는 치밀하고 완벽한 것 같아도 알맹이는 쑥 빠져 있습니다. 무엇보다 공상춘이 철혈홍안의 제자라는 사실도 적혀 있지 않지 않습니까?”
“우리가 모을 거라고 생각했겠지.”
동중산의 입가에 쓴웃음이 떠올랐다.
“석 공자에게 듣지 않았다면 정말 까맣게 몰랐을 겁니다. 공영춘에 대해 묻자 그의 동생인 공상춘의 이야기가 나왔는데, 석 공자가 공상춘은 증조모가 가장 아끼는 막내 제자라는 말을 하는 바람에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습니다.”
“확실히 뜻밖이긴 하지.”
“공상춘은 그렇다고 치고 공영춘의 행방이 묘연한 것이 마음에 걸립니다.”
어제 동중산은 석지명을 찾아가 공영춘에 대해 물었는데 그 자리에서 놀라운 말을 들었다. 공영춘이 며칠 전부터 세가 내에서 모습이 보이지 않아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다는 것이다. 공교롭게도 공영춘이 사라진 시기는 진산월이 이동평에게 공상춘에 대한 조사를 부탁한 날 저녁 무렵이다.
진산월은 그의 실종에 나름대로의 해답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가 미처 생각지 못한 것이 있다.”
“그게 무엇입니까?”
“우리는 공영춘과 공상춘이 친형제이기 때문에 한통속이었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었다. 하지만 그 반대로 그들이 서로 등을 돌린 사이였다면… 그렇지 않더라도 각기 다른 주인을 섬기고 있다면 어떻게 되겠느냐?”
동중산은 외눈을 쉴 사이 없이 깜박거리며 입을 열었다.
“장문인의 말씀대로 공상춘은 이동평이 자신을 조사하는 것을 알고 그 원인을 찾아보았을 것입니다. 이동평은 철혈홍안의 제자인 그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서라도 장문인께 청탁을 받은 사실을 어떤 식으로든 그에게 알렸을 겁니다.”
“그럴 확률이 높겠지.”
“공상춘은 자신이 그런 일을 하지 않았으니 장문인이 찾는 문제의 인물은 자신이 아닌 공영춘임을 직감적으로 알았을 것입니다.”
“옳은 생각이다.”
“그래서 공상춘은…..”
동중산은 제대로 말을 잇지 못했다. 진산월이 조용한 음성으로 그 뒤를 이었다.
“공영춘이 석가장의 배반자임을 알고 어떤 식으로든 조치를 취했겠지.”
동중산은 잠깐 망설이다 물었다.
“아무리 그래도 두 사람은 형제지간인데 설마 공상춘이 공영춘의 신상에 위해를 가하겠습니까?”
“그보다 더한 일도 일어날 수 있는 게 강호임을 잊었느냐?”
동중산은 진산월의 말에 수긍하지 않을 수 없었다. 확실히 강호에서는 어떠한 일도 벌어질 수 있었다. 부모와 자식 간에도 험악한 일이 벌어지는 판국에 형제 사이는 오죽하겠는가?
동중산은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어찌되었건 겨우 실마리를 잡나 보다 했는데 다시 끊기게 되니 답답한 생각이 드는군요.”
“실마리는 아직도 남아 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석지명의 말로는 평소에 공영춘이 자주 따르던 사람은 십이지공자 중의 셋째인 석단이라고 하지 않았느냐?”
“그렇습니다. 석단은 은밀히 초가보를 지원한 상태였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초가보가 본파의 손에 몰락한 이후 석단은 도선출재에 실패하여 석가장에서도 쫓겨나 거의 폐인처럼 살고 있다고 합니다.”
“내가 알기로 일단 도선출재를 통과하면 설사 그 후에 망한다 할지라도 석가장에서 다시 몇 번의 기회를 준다고 들었다. 석단은 삼십 대 중반이니 나이로 보아 도선출재를 예전에 통과했을 게 분명하다.”
“그렇다면…..”
“도선출재에 실패하자 쫓겨난 게 아니라 자기 발로 석가장을 나간 것이겠지. 그렇다면 폐인이 되었다는 말도 사람들 눈을 속이기 위한 것일지도 모른다.”
동중산은 열심히 머릿속으로 생각을 굴리고 있다가 의혹 어린 음성을 내뱉었다.
“만일 장문인 말씀이 사실이라면 왜 석 공자는 저에게 그런 말을 한 것일까요?”
“석지명 입장에서는 일이 더 확대되기를 바라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에게는 생사가 달린 일이지만 그들 형제에게 이 일은 단순한 투자처를 확보하기 위한 다툼이었을 테니 말이다.”
동중산은 침음하지 않을 수 없었다. 확실히 석지명과 자신들은 이번 일을 보는 시각이 달랐다. 도선출재가 유력해진 마당에 석지명으로서는 형제 사이에 더 이상의 반목을 바라지 않았을 게 뻔하다. 더구나 석단은 십이지공자 중에서도 친분 관계가 넓기로 유명한 인물이었다. 나이도 석지명보다 한참 위였으니, 석지명으로서는 그를 적대시하는 게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동중산은 자신도 모르게 가슴속에서 우러나오는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 이번 일에 석 공자의 도움을 더 이상 기대해서는 안 되겠군요.”
“그렇다. 문제는 시간이다. 우리가 언제까지고 낙양에 머무를 수는 없으니 조만간에 석단을 만나 자세한 내막을 알아내야 하는데, 시간상으로 너무 촉박해졌다.”
“저는 일단 석단이 어디에 있는지 행방을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일방과 동행하도록 하고 너무 무리는 하지 마라. 계성의 복수도 중요하지만 그건 이미 지나간 일이다. 그것 때문에 위험을 자초할 필요는 없다.”
동중산은 듬직하게 웃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석단도 우리가 이토록 집요하게 자신의 뒤를 쫓으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하고 있을 겁니다. 석단의 위치만 알아내면 바로 돌아오도록 하겠습니다.”
동중산이 인사를 하고 나가자 진산월은 한동안 깊은 침묵에 잠겨 있었다. 그러다 모일우를 불렀다.
“부르셨습니까?”
모일우가 들어오자 진산월은 그에게 장주인 석곤을 만나고 싶다고 말했다.
“일전에 석 장주께서 괜찮은 차를 맛보게 해준다고 하셨는데 오늘 날이 화창하니 불현듯 차 생각이 나는군. 석 장주께 찾아뵈어도 좋으냐고 여쭈어봐 주겠나?”
“알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잠시 후에 돌아온 모일우는 석곤이 진산월의 방문을 승낙했음을 밝히고 그를 삼금헌으로 안내해 주었다. 삼금헌 입구에는 공상춘이 미리 나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수고했네. 자네는 이만 돌아가게.”
모일우를 돌려보낸 진산월은 공상춘을 향해 가벼운 인사를 건넸다.
“또 보게 되는군. 장주께서는 안에 계시오?”
공상춘은 정중하게 허리를 숙였다.
“진 장문인이 찾아오신다고 하자 장주께서 무척 기뻐하셨습니다. 안으로 드시지요.”
진산월은 삼금헌을 두 번째로 방문하게 되었다. 석곤의 방에 들어가자 석곤은 서탁 앞에 앉아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서 오게. 그렇지 않아도 오늘쯤 자네를 불러 차를 마시려고 했었네.”
“기대가 되는군요.”
“기대해도 좋을 것이네.”
석곤의 말에 진산월은 내심 의외라고 생각했다. 석곤 같은 사람의 입에서 저런 식의 말이 나온다는 것은 어지간히 자신이 있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석곤은 뜻밖에도 시비를 부르지 않고 자신이 직접 물을 끓이고 차를 우려내었다.
“이 물은 이 건물의 뒤쪽에 있는 우물에서 길어 온 것일세. 좋은 물을 얻기 위해 수맥을 살펴 자리를 잡은 다음 거의 오십여 장이나 파 들어갔지. 고생을 제법 하긴 했는데, 덕분에 최상급의 물을 얻을 수 있었네.”
석곤은 끓인 물에 차를 집어넣으며 말을 계속했다.
“이 차는 내가 재배에 실패한 후에 천하에 이름난 명차를 모아 배합한 것일세. 호구와 양선, 용정을 특정 비율로 섞은 다음 불에 살짝 말려서 보관한 것이지. 각각의 비율은 노부만이 비밀이므로 누구에게도 알려 줄 수 없네.”
차가 우러나자 석곤은 따뜻하게 데워진 두 개의 찻잔을 가져와서 서탁 위에 올려놓았다. 다병과 찻잔은 모두 순금으로 만들어진 것이라 소박한 실내와는 어울리지 않아 보였다.
석곤은 순금 찻잔에 차를 따르며 차분한 음성으로 말했다.
“이 다병과 찻잔은 노부가 유일하게 사치를 부린 물건들일세. 이런저런 찻잔을 써 보았으나 결국 순금으로 만든 것이 제일 좋다는 걸 알았지.”
석곤은 찻잔의 절반 조금 넘게 차를 따른 다음 진산월에게 찻잔을 내밀었다.
“마셔 보게.”
진산월은 찻잔을 들고 한 모금 마셨다. 석곤은 묵묵히 그가 차를 마시는 모습을 보더니 자신도 앞에 놓인 찻잔을 들었다.
한동안 두 사람은 아무 말 없이 차를 마셨다. 석 잔을 마신 다음에야 비로소 진산월은 조용한 음성을 내뱉었다.
“정말 좋은 차로군요. 옛말에 ‘향기로운 차는 육청(여섯 가지의 음료)보다 뛰어나고, 넘치는 맛은 천하에 퍼진다’고 했는데 이제 비로소 그 말뜻을 알 것 같습니다.”
석곤의 주름진 얼굴에 엷은 미소가 떠올랐다.
“자네는 차를 대접할 가치가 있는 사람이로군. 오늘은 아주 흥겨운 날일세.”
“이렇게 좋은 차를 마셨으니 그냥 지나칠 수는 없지요. 제게 부탁하실 일이 있으면 말씀하십시오. 제 능력이 닿는 한 들어드리겠습니다.”
석곤의 흐릿한 눈에 한 줄기 광채가 번뜩였다가 사라졌다. 석곤은 한동안 진산월을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이윽고 고개를 끄덕였다.
“노부가 찻값을 제대로 받는군. 한 가지 부탁이 있네.”
“무엇입니까?”
“낙양의 남문 근처에 가면 하나의 제법 오래된 고서점이 있네.”
“풍림서각 말씀이시군요.”
“그래. 그 서각주는 노부의 오래된 친구일세. 그에게 이 편지를 전해 주게.”
석곤은 소맷자락 속에서 잘 접은 봉투 하나를 꺼내어 진산월에게 내밀었다. 봉투는 단단히 밀봉되어 있어서 내용물을 알 수 없었다.
“그러면 서각주가 자네에게 물건 하나를 건네줄 걸세.”
“그 물건을 가져오면 되는 겁니까?”
석곤은 고개를 흔들었다.
“그렇게 단순한 일이면 자네에게 부탁할 것도 없지. 듣자 하니 자네는 사매를 찾으러 구궁보로 간다고 하던데 그게 사실인가?”
이번에는 진산월의 눈이 번쩍 빛났다.
“그걸 어떻게 아셨습니까?”
“노부 정도가 되면 듣지 않아도 들려오는 말이 있고, 보지 않아도 알게 되는 사실이 있지.”
“확실히 그럴 계획이 있습니다.”
“구궁보로 가는 김에 풍림서각주가 건네준 물건을 구궁보의 모용 대협에게 가져다주게. 그게 내 부탁일세.”
진산월은 좀처럼 놀라거나 냉정을 잃지 않는 성격이었으나 지금 이 순간만큼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석곤의 부탁이 너무도 예상치 못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대체 풍림서각주가 건네준다는 물건은 무엇인가? 그 물건과 모용 대협은 어떤 관련이 있는가? 그리고 석곤은 왜 하필이면 진산월에게 이런 부탁을 하는 것일까?
석곤은 몇 차례 표정이 변하는 진산월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다가 낮게 가라앉은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너무 심각하게 고민할 필요는 없네. 마침 물건 하나를 모용 대협에게 전해 줄 일이 생겼고, 자네라면 모용 대협이 있는 구궁보까지 안심하고 운반을 해줄 것 같아 부탁하게 된 것일세. 정 부담스럽거나 내키지 않는다면 거절해도 좋네.”
진산월은 잠시 침음하다가 천천히 말했다.
“차는 정말 맛있었습니다.”
“다행이군.”
“제가 조금 비싼 차를 마신 것으로 생각하겠습니다.”
석곤은 깊게 가라앉은 눈으로 진산월을 응시하더니 느릿느릿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네.”
진산월은 비어 있는 찻잔을 내밀었다.
“그 비싼 차를 한 잔 더 마시고 싶군요.”
“오늘은 얼마든지 마셔도 좋네.”
석곤이 차를 따르자 진산월은 한 모금을 마신 다음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왜 젊은 사람이 그렇게 한숨을 쉬고 있나?”
“제 사제가 생각나서 그렇습니다.”
“사제가 죽기라도 했나?”
진산월은 씁쓸한 웃음을 머금었다.
“지금 서안에 있습니다. 차를 무척이나 좋아해서 이름난 찻집이 있다는 말을 들으면 아무리 먼 곳이라도 달려가고는 했습니다.”
“누구와 시비라도 붙었나?”
“아는 사람의 집에 찾아갔다가 야밤에 살수의 습격을 받았다고 하더군요. 덕분에 제 사제는 영원히 한쪽 다리를 쓸 수 없는 불구의 몸이 되고 말았습니다.”
석곤은 혀를 찼다.
“젊은 친구가 안됐군.”
“이번에도 비슷한 일이 생길까 봐 걱정입니다.”
석곤의 얼굴에 모처럼 표정 비슷한 것이 생겨났다.
“왜 그런 걱정을 하는가?”
“사제들뿐 아니라 나이 어린 제자들도 있는데 또다시 그런 일을 당하게 되면 어떤 불상사가 일어날지 모르니 장문인으로서 걱정이 되지 않을 수 없지요.”
석곤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물었다.
“그 절름발이 사제가 살수의 습격을 받았다는 곳이 혹시 본가인가?”
“안타깝게도 그렇습니다.”
“그런 일이 있었군. 본가를 대신해서 자네 사제에게 위로의 말을 전하겠네.”
“장주께서 관심을 가져 주신 것을 알면 제 사제도 기뻐할 겁니다.”
“적어도 본가에서 종남파의 제자들이 봉변을 당하는 일은 없도록 하겠네.”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진산월은 남아 있는 차를 모두 마신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려는가?”
“며칠간 잘 쉬었습니다. 내일 떠나도록 하겠습니다.”
“다음에 다시 만날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하겠네. 잘 가게.”
진산월이 인사를 하고 방을 벗어날 때까지 석곤은 가만히 그의 뒷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자 석곤은 허공을 응시하다가 나직한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그에게 고궤를 맡기는 것이 잘한 일인지 모르겠군.”
그 혼자만 있던 방 안에 갑자기 하나의 인영이 불쑥 나타났다. 그런데도 석곤은 아무것도 보지 못한 사람처럼 그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나타난 인영은 새하얀 백발에 유난히 큰 주먹코를 가진 늙은이였다. 백발 늙은이는 조금 전에 진산월이 앉았던 의자에 가서 털썩 앉더니 비어 있는 찻잔을 보고 코를 킁킁거렸다.
“삼선음이로군. 삼선음을 내올 정도로 쓸 만한 녀석이었나?”
석곤은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은 친구였네. 나이답지 않게 몹시 침착하더군.”
“그래도 고궤를 맡긴다는 건 지나친 모험이 아닌가?”
“하지만 자네도 알지 않는가? 더 이상은 어쩔 수 없다는 걸.”
백발 늙은이는 심드렁한 표정을 짓더니 퉁명스런 음성을 내뱉었다.
“그녀의 닦달이 심해진 모양이군.”
“나도 슬슬 한계에 도달하는 느낌일세.”
“그래서 아예 고궤를 밖으로 유출할 생각을 한 건가?”
“이번 일은 그녀가 지시한 걸세.”
그 말이 뜻밖인 듯 백발 늙은이의 눈에서 예리한 신광이 흘러나왔다.
“그녀가 말인가? 무덤 속으로 들어갈 때까지 품에서 놓지 않을 줄 알았더니 무슨 속셈이지?”
“내 생각에는 그녀도 어떤 식으로든 새로운 돌파구가 필요하다고 판단한 듯하네.”
“그 애송이가 그녀가 선택한 새로운 돌파구란 말인가?”
“그를 선택한 건 나일세. 그녀는 단지 고궤를 밖으로 옮기라고만 말했지.”
“그렇다면 자네는 그가 새로운 돌파구가 될 거라고 생각하나?”
“그거야 아무도 모르는 일이지. 하지만 적어도 무슨 변화가 일어나지 않겠나.”
백발 늙은이의 주름진 시선이 석곤의 흐릿한 눈에 못 박히듯 고정되었다.
“자네는 그 변화를 감당할 자신이 있나?”
석곤의 무표정한 얼굴에 언뜻 미소 비슷한 것이 스치고 지나갔다.
“이미 늙고 지친 내가 새로운 변화를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은가? 나는 다만 모든 일이 순리대로 돌아가길 기대할 뿐이네.”
“그 와중에 자네 자신은 어떻게 되어도 좋단 말인가?”
“이보게, 치명. 나는 이미 못 볼 걸 너무 많이 보아 왔고, 남들이 겪지 못했던 일도 모두 겪은 몸일세. 그런 내가 이제 와서 무엇을 아쉬워할 것 같은가?”
백발 늙은이는 못마땅한 눈으로 그를 쏘아보았다.
“겨우 육십이 조금 넘은 나이로 내 앞에서 늙었다고 위세를 부리는 건가?”
“자네가 나보다 열두 살이나 많은 건 알고 있지. 하지만 내가 살아온 삶은 자네보다 몇 배나 더 고단한 것이었네.”
백발 늙은이는 그 말에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석곤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작고 왜소한 체구에 여기저기 검버섯이 나 있는 석곤의 얼굴은 나이보다 훨씬 더 늙어 보였다.
백발 늙은이는 천하제일의 거부 소리를 들은 석곤이 왜 이렇게 빨리 늙어 버렸는지 그 이유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석곤이 흐릿하게 잠겨 있는 눈을 보고서야 그의 속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는 쉬고 싶은 거구나. 너무나 지치고 힘들어서 이제 그만 손을 놓고 싶은 거야.’
그 생각을 하자 백발 늙은이의 얼굴에는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착잡한 빛이 떠올랐다. 가슴 깊은 곳에서 뜨거운 것이 울컥 치밀어 오르자 백발 늙은이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거친 음성을 내뱉었다.
“그렇게 힘들어 하기에 잘 키워 쓰라고 아들 세 놈을 모두 보내 줬는데 겨우 한 놈밖에 다스리지 못하다니 자네는 정말 못난 사람일세.”
석곤의 얼굴에 한 줄기 씁쓸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 점에 대해서는 늘 자네에게 미안해하고 있네. 내 능력이 그것밖에는 안 되었던 모양이지.”
백발 늙은이는 아쉬운 탄식을 토해냈다.
“첫째는 너무 순후해서 요령이 부족했고, 둘째는 귀가 얇고 끈기가 부족해서 남의 꼬임에 잘 넘어갔지. 셋째는 요령도 좋고 재주도 많았지만 너무 재승박덕해서 이기적인 놈이 되고 말았네. 어찌 생각하면 자네를 도와주려는 것이 아니라 문제 덩어리를 넘겨준 셈이 된 것 같아 늘 마음 한 구석이 찜찜했다네.”
“자네 탓이 아닐세. 각자 본성이 다른 걸 아무리 부모라고 해도 어쩔 수 있겠나? 그래도 셋 중 하나를 건졌으니 아주 쓸모없는 일은 아니었지 않은가?”
“어차피 둘째와 막내는 예전부터 내 자식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었네. 그놈들도 나를 애비로 여지지 않을 걸세.”
“너무 극단적으로 생각하지 말게. 사필귀정이라고 했으니, 그들도 언제가는 자네의 품으로 되돌아올 걸세.”
백발 늙은이는 냉소를 날렸다.
“정말 그렇게 믿고 있다면 자네는 세상을 헛산 걸세.”
석곤은 평상시의 그답지 않게 조용하게 웃었다.
“그거야 두고 보면 알 일이지.”
백발 늙은이는 그의 검버섯 가득한 얼굴을 보고 있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마녀가 올 시간이 됐군, 나는 이만 가 보겠네.”
“배웅하지 않겠네.”
“농담도 잘하는군. 길 잃어버릴 염려는 없으니 걱정하지 말게.”
백발 늙은이의 어깨가 가볍게 흔들린다 싶은 순간, 그의 신형은 나타날 때와 마찬가지로 신비스럽게 사라져 버렸다. 석곤은 그 자리에 꼼짝도 않은 채 허공을 응시하고 있다가 뜻 모를 한숨을 내쉬었다.
“흐음……”
조용한 방 안에 앉아 있는 그의 모습은 왠지 모르게 한없이 외롭고 쓸쓸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