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20권 소림기변(少林奇變)편 : 1화

랜덤 이미지

군림천하 20권 소림기변(少林奇變)편 : 1화


제 199장 월녀지보

“이상하네.”

서문연상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바닥에는 몇 개의 발자국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분명히 제대로 걸은 것 같은데, 왜 일곱 번째 동작에서 자꾸 틀리는 걸까?”

바닥에 찍혀 있는 발자국은 모두 열여덟 개였다. 마치 누군가가 정성을 다해 조각해놓은 듯 선명하게 찍힌 발자국은 그리 크지 않아서 여인의 것임을 알 수 있었다. 그 발자국들은 얼핏 보기에는 두서없이 아무렇게나 찍혀 있는 것 같았으나, 그 발자국을 응시하는 서문연상의 표정은 진지함을 넘어 심각한 빛을 띠고 있었다.

그녀는 바닥에 찍힌 발자국들을 한참 동안이나 바라보다가 다시 발자국을 따라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천천히 앞으로 발을 내딛는 그녀의 모습은 평소와는 달리 신중하고 조심스러워 보였다.

하나 절반도 걷기 전에 그녀는 다시 고운 이마를 찡그리며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야. 이번에도 틀렸어. 대체 무엇이 문제일까?”

그녀는 바닥에 찍힌 발자국을 똑같이 밟으며 걷고 있었는데, 자세히 보면 그녀의 오른발이 일곱 번째 발자국에서 한 치쯤 옆으로 벗어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얼핏 보기에는 별로 대수롭지 않은 것 같았는데도 그녀는 몹시 신경이 쓰이는지 발자국을 벗어난 자신의 오른발을 못마땅한 눈으로 쏘아보고 있었다.

그때 등 뒤에서 누군가의 음성이 들려왔다.

“네가 벌써 월녀보를 익힐 단계까지 왔단 말이냐?”

난데없는 음성에 깜짝 놀란 서문연상이 고개를 돌려보니 노해광이 멀지 않은 곳에 우뚝 서서 신기한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제자가 사숙조님을 뵈옵니다.”

그녀는 그에게 다가가 얌전하게 인사를 했다. 평소의 천방지축인 모습과는 판이하게 다소곳한 모습에 언뜻 노해광의 입가에 엷은 미소가 스치고 지나갔다.

“보름 만에 보는구나. 그동안 본파에 별일은 없었느냐?”

“예. 사숙과 사고님도 모두 잘 계십니다.”

노해광의 시선이 그녀를 지나 조금 전까지 그녀가 밟고 있던 발자국으로 향했다.

“그나저나 네가 본파에 입문한 지가 몇 달 되지도 않았는데 어찌 월녀보를 익히고 있는 게냐?”

노해광의 음성에는 의아함과 놀라움의 빛이 숨기지 않고 담겨 있었다.

월녀보가 무슨 대단한 절학이어서는 아니었다. 사실 월녀보는 그 자체만으로는 별다른 효력이 없는 무공이었다. 월녀보는 월녀검법을 좀 더 쉽게 익히기 위해 만들어진 일종의 보조보법으로, 이 보법을 완벽하게 익혀놓으면 월녀검법의 검로를 보다 수월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그것은 월녀검법이 그만큼 복잡하고 난해한 무공이기 때문이었다.

월녀검법은 종남파의 무공 중에서도 삼락검에 비견할 만한 상승의 절학이었다. 특히 날카로운 위력을 지녔으면서도 변화가 무쌍하고 검로가 섬세해서 아미파의 난파풍검법과 화산파의 비연검법, 보타산의 은하무궁검법, 무산신녀궁의 옥녀집금검법, 천산목가장의 냉염절정검법 등과 함께 여인들이 익힐 수 있는 검법의 최고봉으로 손꼽히고 있었다.

그런데 종남파에 입문한 지 불과 서너 달밖에 되지 않은 서문연상이 월녀검법의 입문 무공인 월녀보를 익히고 있으니 노해광이 의아해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가 알기로 서문연상은 비록 재질이 뛰어나고 검법의 기초도 잘 닦여 있기는 했으나, 성격상 종남파의 무공을 익히는 데 약간의 어려움이 있어 종남무공의 기초가 되는 장괘장권구식을 배우는 일조차 상당히 애를 먹고 있다고 들었던 것이다.

자신의 실력을 무시하는 듯한 노해광의 말에 서문연상의 고운 이마가 살짝 꿈틀거렸으나 입 밖으로 나오는 음성은 여전히 예의 바르면서도 공손하기 그지없는 것이었다.

“사고께서 저는 권장보다는 검법이 더 적성에 맞는다며 본파의 검술을 익혀도 된다고 허락하셨습니다.”

서문연상도 이제는 눈앞의 이 점잖은 상인처럼 보이는 중년인이 서안 일대의 뒷골목에서 제왕 같은 위세를 떨치는 실력자임을 알고 있었다.

노해광의 첫인상은 어딘지 모르게 호락호락해 보여서 넉살 좋은 호인 같았으나, 실상은 전혀 달랐다. 사실 그는 무척이나 냉정하고 치밀한 성격의 소유자일 뿐 아니라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냉혹한 인물이었다. 그러지 않았다면 실력을 숨긴 고수들이 우글거리고 음모와 귀계가 난무하는 복마전과도 같은 서안의 무림계에서 그토록 짧은 시간에 확고한 뿌리를 내릴 수 없었을 것이다.

전산월이 강호행을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검보의 고수들 몇 사람이 종남파를 찾아온 적이 있었다. 그들을 이끌고 온 사람은 검보의 오대검객 중 한 사람이며 서문연상과 유독 친한 비룡검 위소룡이었는데, 그는 검보의 보주인 서문장천이 진산월에게 보내는 친필 서신을 소지하고 있었다.

위소룡은 진산월이 이미 종남파에 없는 것을 알고 하루 만에 돌아가 버렸다. 돌아가기 전에 그는 서문연상에게 이런저런 주의사항을 말해주었는데, 그중에는 노해광에 관한 것도 있었다.

위소룡의 말에 따르면, 노해광은 서안은 물론이고 최근 섬서성 전체에서 가장 유력한 정보통일 뿐 아니라 최고의 해결사로 불리고 있다고 했다. 위소룡은 그가 정말 상대하기 까다로우며 적으로 삼기 두려운 인물이니 행여라도 함부로 행동하여 그의 눈밖으로 벗어나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몇 번이나 신신당부를 했던 것이다.

서문연상의 성격상 위소룡의 그런 당부를 제대로 새겨들을 리가 없었으나, 어찌된 일인지 그 후로 노해광을 대하는 서문연상의 태도는 다소곳하면서도 예의 바르게 변해 있었다. 노해광은 그런 그녀의 태도 변화를 눈치채고 있었으면서도 전혀 내색하지 않고 여전히 입가에 빙글빙글 미소를 매달았다.

“검에 소질이 있다면 검법부터 익히는 것도 괜찮겠지. 그렇다면 천하삼식육검은 모두 익혔겠구나?”

천하삼식육검은 종남무공의 근간이라고 할 수 있으므로 장괘장권구식과 함께 종남파의 문하라면 반드시 익혀야 하는 무공이었다.

서문연상의 얼굴이 조금 붉어졌다.

사실을 말하자면 그녀는 천하삼식육검을 초반 열두 초식만 배웠을 뿐이다. 그것도 방취아의 시범을 몇 번 보고 사오 일쯤 대충 흉내만 내다가 그친 것에 불과했다.

그때 방취아가 서문연상에게 가르쳐 준 것이 바로 월녀검법의 기초가 되는 월녀보였다. 그녀는 서문연상이 열흘 이내에 월녀보를 완벽하게 익히면 월녀검법을 배울 수 있게 해주겠다고 약속했다.

하나 일은 그녀의 예상처럼 전개되지 않았다. 처음에는 한나절이면 충분히 익힐 줄 알았는데, 벌써 열흘 중 절반이 넘게 지나도록 월녀보를 제대로 터득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열여덟 개의 발자국을 따라 움직이기만 하면 되는데, 언뜻 보면 식은 죽 먹기처럼 간단해 보이던 것이 실제로 걸음을 밟으면 밟을수록 몸이 마음먹은 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그제서야 서문연상은 단순해 보이는 월녀보에 무언가 심오한 현기가 있음을 알아차리고는 호승심이 일어 더욱 보법을 밟는데 매진했다. 아마 그녀가 진즉에 이토록 열심히 무공연마에 몰두했다면 장괘장권구식과 천하삼십육검 등 종남파의 기초무공을 모두 배우고도 남았을것이다.

하나 그토록 전심전력을 기울였는데도 월녀보의 문은 좀처럼 열리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점차로 초조한 생각이 들고 있던 터였다.

이런 자세한 사정을 일일이 밝힐 수가 없던 서문연상은 약간은 어색하고 약간은 공손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저의 무공 수준은 사고께서 잘 알고 계시니 궁금하시면 사고께 직접 여쭈어 보세요.”

그녀가 방취아에게 공을 넘기는 것을 알면서도 노해광은 안면에 부드러운 웃음을 지어 보였다.

“알겠다. 그나저나 월녀보를 익히는 게 생각만큼 쉽지가 않지?”

노해광이 마치 모든 사정을 짐작하고 있다는 듯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물어보자 서문연상의 얼굴에 살짝 홍조가 어렸다. 그녀는 자존심이 구겨지고 속이 상하기도 했으나 용기를 내어 시인을 했다.

“사숙조님 말씀대로 자꾸 일곱 번째 걸음이 어긋나는군요. 분명 사고께서 가르쳐준 대로 따라했는데도 영 진도가 나가지 않아 고민입니다.”

“그럴 것이다. 네가 왜 월녀보를 쉽게 익히지 못하는지 아느냐?”

“겉보기와는 달리 월녀보에 나름대로 독특한 묘용이 있다는 건 알겠는데, 왜 동작이 제대로 이어지지 않는지는 도무지 모르겠습니다.”

노해광은 서문연상의 얼굴 표정이 시무룩해지는 광경을 재미있다는 듯 빙글거리며 바라보더니 알쏭달쏭한 말을 내뱉었다.

“월녀보는 월녀의 걸음을 본떠서 만든 것이다. 그런데 너는 월녀가 아니니 당연히 따라 하기 어려울 수밖에 없지.”

서문연상의 눈이 동그랗게 뜨여졌다.

“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잘 생각해보거라, 왜 하고많은 이름 중에서도 하필이면 월녀보라는 이름이 붙었는지. 본 파의 무공은 단 하나도 허투루 만들어진 것이 없느니라.”

그 말만을 하고는 노해광은 서문연상이 더 무어라고 묻기도 전에 휑하니 몸을 돌려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서문연상은 멀어져 가는 노해광의 뒷모습을 멍하니 응시하고 있다가 배꽃 같은 얼굴을 빨갛게 상기시켰다.

“나를 놀리는 거야, 뭐야? 월녀가 뭐 어쨌다구? 나는 당연히 월녀가 아니지. 그 강남 촌구석 여자들이 나하고 비교가 되겠어?”

그녀는 정신없이 투덜거리며 노해광이 사라진 곳을 쏘아보았다.

“사숙조라고 모처럼 얌전히 대해줬더니 나를 아예 가지고 노는구나. 이 서문연상이 어쩌다가 강남의 엉덩이만 크고 미련곰탱이 같은 여자들에 비교당하는 신세가 되었단 말이…..”

쉴 새 없이 무언가를 조잘거리던 서문연상이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가만, 그러고 보니 월녀라는 게…..’

그녀는 그 자리에서 우두커니 선 채로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원래 월녀검이란 오래된 설화에 나오는 이야기였다.

<오월춘추에 의하면, 월나라의 깊은 산속에 격검을 매우 좋아하는 소녀가 살고 있었다. 월나라의 재상 범여가 그녀에 대한 소문을 듣고 그녀를 초빙하여 왕에게 데려오라 했다. 그녀는 왕을 만나러 가는 도중 원공과 겨루게 되었는데, 그녀의 검술이 너무도 빠르고 날카로웠기 때문에 원공은 당해내지 못하고 도망쳐버리고 말았다. 월왕을 만난 그녀는 월왕에게 검도에 대해 강론하여 월왕을 감복시켰고, 월왕은 그녀에게 월녀라는 호칭을 내렸다. 그리고 군사들로 하여금 그녀의 검술을 배우게 하니, 당세에 월녀검을 당해내는 이가 없었다.>

이것이 서문연상이 알고 있는 월녀검에 얽힌 설화였다.

그녀는 지금까지 종남파의 월녀검법이 이 월녀검의 설화에서 따온 이름인 것으로만 생각했었는데, 노해광은 사정이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고 언질을 준 것이다.

월녀란 ‘월나라의 여인’들을 말한다. 월나라는 강소성과 절강성 일대에 세워진 나라였으니, 지금의 강남 지방이었다. 그래서 통상적으로 강남의 여인들을 월녀라고 지칭하기도 했다.

서문연상은 대대로 하복의 명문인 검보의 출신이니 전형적인 강북 여인이라고 할 수 있었다. 대체로 강북 여자들은 키가 크고 몸이 날씬한 반면에 강남의 여인들은 키가 그리 크지 않은 대신 몸매가 풍만하고 피부가 고왔다.

서문연상은 강남 여인들의 걸음걸이가 어땠는지 생각해보다가 갑자기 안색이 환해지며 눈빛이 영롱하게 반짝거렸다.

“그래, 그거였구나!”

그녀는 뾰족한 탄성을 내지르더니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황급히 어딘가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서문연상과 헤어진 노해광이 제일 먼저 찾아간 곳은 전풍개의 거처였다.

“사숙, 그동안 별래무양하셨습니까? 자주 찾아뵙지 못해 죄송합니다.”

전풍개는 정중하게 인사를 하는 노해광을 다소 냉랭한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요즘 장사에 재미가 들려서 정신이 없다고 하던데 무슨 바람이 불어서 찾아온 거냐?”

“하하…. 사숙께서도 소식을 들으신 모양이군요. 급하게 일을 진행하느라 미리 알려드리지 못했으니 용서해주시기 바랍니다. 사실 제가 이번에 작은 포목점 하나를 새로 차렸는데, 아래 녀석들이 제법 똑똑해서 당초 예상보다 수월하게 자리를 잡을 수 있었습니다.”

“네놈이 예전부터 상재가 있는 줄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의 본분이 무엇인지 잊어버리는 일은 없어야 한다.”

전풍개의 엄격한 말에도 노해광은 전혀 인상을 찡그리지 않고 공손하게 대답했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가끔이라도 사숙을 찾아뵙고 가르침을 청하겠습니다.”

전풍개의 눈이 날카롭게 번뜩였다.

“그럼 지금 한 수 겨뤄 보겠느냐?”

노해광은 빙긋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아이구, 오늘은 용서해주십시오. 가게를 여느라 그간 너무 바빠서 몸 상태가 엉망입니다. 다음에 제대로 몸을 간수한 다음에 가르침을 받겠습니다.”

맹렬한 기세를 끌어올렸던 전풍개가 이내 기세를 거두며 퉁명스런 음성을 내뱉었다.

“네가 요즘 서안에서 제법 명성을 얻는 것 같다만, 그럴 때일수록 배에 기름기가 끼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손에 검을 드는 것을 두려워하는 순간, 무인으로서의 생명은 끝난 것이나 마찬가지다.”

노해광은 얼굴의 미소를 거두고 진지한 표정으로 머리를 조아렸다.

“사숙의 당부를 명심하겠습니다.”

전풍개는 지단 초가보와의 격전에서 입은 부상에서 거의 회복된 상태였으나 아직도 약간의 후유증이 남아 있었다. 제갈외는 전풍개의 나이로 보아 그가 예전의 실력을 완전히 되찾기는 어려울 거라는 판정을 내렸다.

그런데도 그의 기상은 예전보다 한층 더 매서워졌고, 무공에 대한 열정은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지금도 그는 종남파의 누구보다도 아침 일찍 일어나 무공을 수련했으며, 술과 기름진 음식을 멀리하고 나태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노해광은 그런 전풍개를 어려워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무척이나 존경하고 있었다. 한 사람이 평생 동안 자신의 모습을 흐트러뜨리지 않고 초심을 간직한 채 일로매진한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더구나 그 사람이 사문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존장이라면 누구라도 공경하는 마음을 갖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노해광을 보는 전풍개의 시선 또한 처음과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젊은 시절의 노해광은 사람 사귀기를 즐겼고, 한곳에 머물러 있기보다는 여기저기 떠돌아다니기를 좋아했다. 무공에 매진하기보다는 무공 외적인 것에 더 신경을 쓰는 것 같아서 종남파의 어른들은 그를 걱정스런 눈으로 바라보고는 했다.

그중에서도 전풍개는 성실치 못하고 금전적인 이득에 민감한 노해광의 행동거지를 무척이나 못마땅해했었다. 평생을 종남파의 부흥을 위해 전심전력을 다해온 전풍개로서는 문파보다는 개인의 영달을 더 중히 여기는 노해광의 모든 행동거지가 눈에 거슬릴 수밖에 없었다. 아마 장문인이었던 천치검 하원지가 노해광을 감싸지 않았다면 전풍개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노해광을 종남파에서 쫓아내고 말았을 것이다.

하나 사람 좋은 하원지는 노해광이 무슨 짓을 해도 화를 내는 빛이 없이 허허거리며 웃기만 해서 전풍개도 차마 장문인에게 노해광을 내보내라고 강권을 할 수가 없었다. 전풍개로서는 그저 마음씨 좋은 하원지 같은 사람을 사부로 모신 노해광의 운이 엄청나게 좋다는 생각에 씁쓸한 웃음을 흘리는 게 고작이었다.

그런 노해광이 사부인 하원지가 죽고 종남파가 기산취악의 치욕을 당한 후에 자신의 사형인 임장흥이 장문인에 오른 것에 불만을 품고 종남파를 뛰쳐나가 버렸으니, 나중에 그 사실을 알게 된 전풍개가 얼마나 이를 갈며 원통해했는지는 보지 않아도 짐작이 가는 일이었다.

전풍개가 이십 년 만에 종남파로 돌아온 후에도 노해광은 여전히 종남파 밖을 떠돌고 있었다. 전풍개는 노해광이 위기에 처한 종남파를 도와주기는커녕 오히려 나이 어린 장문인을 위협하여 그나마 남아 있던 알토란 같은 주루들을 빼앗아 갔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고는 당장이라도 그를 찾아서 요절을 내주고 싶어했다. 아마 초가보의 거듭된 습격으로 종남파가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한 상황이 아니었다면 전풍개는 정말로 검을 뽑아들고 노해광의 주루로 뛰어들었을지도 몰랐다.

그런데 동문이었던 백동일의 죽음으로 충격을 받았는지 뒤늦게 종남파로 돌아온 노해광은 예전과는 판이하게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다. 잔꾀가 많고 자기 잇속만 차리던 모습은 어딘가로 사라지고 생각이 깊고 치밀하면서도 냉정한 인간이 되어 있었다. 게다가 어지간한 일로는 평정심을 흐트러뜨리지 않는 여유마저 지니고 있어, 짧은 시간 내에 종남파 제자들의 신망을 얻어가고 있었다.

노해광이 아니었으면 종남파가 초가보와의 결전 이후 서안 일대의 상권을 그토록 수월하게 되찾을 수 없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제대로 파악조차 하지 못했던 종남파의 전답들을 찾아내어 체계적인 관리를 통해 빠르게 재산을 불려가고 있으니, 그의 수단을 보는 것만으로도 전풍개를 비롯한 종남파의 제자들은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이런 상태로 몇 년만 지나면 적어도 금전적인 면에서는 전혀 부족함이 없이 문파를 운영할 수 있을 것이다.

전풍개는 비록 종남파에 칩거하여 밖으로 나간 적이 극히 드물었으나, 들려오는 풍문으로 노해광이 짧은 시간에 서안의 유력자 중 한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서안의 최고 실력자였던 이세적의 죽음으로 힘의 공백이 생긴 서안의 세력 판도에 교묘하게 끼어들어 자신의 자리를 확고하게 잡아가고 있는 것이다.

전풍개는 노해광의 그런 모습이 한편으로는 믿음직스럽게 생각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그가 종남파의 안위를 위해 너무 위험한 줄타기를 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불안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노해광이 서안에 세력을 쌓으면 쌓을수록 필연적으로 그들을 노리는 자들은 늘어날 수밖에 없었고, 그들의 면면 또한 강력한 것일 수밖에 없었다.

전풍개로서는 그저 노해광이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상대를 만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만일 노해광이 스스로 감당할 수 없는 상대를 만나게 된다면 그때는 노해광 한 사람이 아니라 종남파 전체의 안위가 위태로워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눈부신 검광이 반경 일 장 이내를 뒤덮고 있었다. 그 검광의 검로는 변화무쌍했고, 검기는 삼엄했다. 일각이 지나도록 장내를 뒤덮은 검광은 끊임없이 이어지며 오묘한 변화를 일으키고 있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검광이 씻은 듯이 사라져 버렸다.

검광이 사라진 자리에는 한 사람이 가쁜 숨을 헐떡이고 서 있었다. 약간은 창백한 안색에 비 오듯 땀을 흘리고 있는 사람은 아직 약관도 되지 않은 십대 후반의 소년이었다.

소년의 이름은 방화, 이제 막 열여덟 살이 된 종남파의 젊은 제자였다.

방화는 잠시 숨을 고른 다음 한쪽에 우두커니 서 있는 소지산을 돌아보았다.

소지산은 아직도 홍조가 어려 있는 방화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나직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천하삼십육검은 그만하면 됐다. 내일부터는 유운검법을 배우도록 해라.”

방화의 얼굴에 기쁜 빛이 떠올랐다.

“감사합니다, 사부님.”

얼마 전, 방화는 정식으로 소지산을 사부로 모시고 그의 제자가 되었다. 종남파의 제자들은 입문 시기를 거쳐 일정한 수습 단계를 지나면 스스로 스승을 고를 자격이 주어진다. 방화보다 입문이 빠른 유소옹은 이미 중원으로 떠나기 전에 진산월을 스승으로 선택했으며, 나이가 많아서 특정인을 스승으로 삼기 어려운 동중산은 그냥 일대제자의 신분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단리상과 손풍은 수습 단계가 끝나려면 몇 달의 시간이 더 필요했고, 오직 서문연상만이 아직 뚜렷한 방향을 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는 방취아에게 가르침을 받는 형편이므로, 당연히 방취아를 스승으로 모셔야 함에도 불구하고 아직 아무런 의사 표시도 하지 않고 있었다.

방화는 고민 끝에 소지산의 제자가 되기로 결심했으며, 지금도 자신의 결정을 후회하지 않았다. 물론 종남파의 최고 고수이며 장문인인 진산월을 사사하지 않은 것에 일말의 미련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중원으로 떠난 진산월이 돌아오기만을 막연히 기다리는 것보다는 소지산 밑에서 충실히 수련하는 것이 더 낫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런 판단의 바탕에는 소지산에 대한 굳은 신뢰가 깔려 있었다. 소지산은 입이 무겁고 과묵한 성격에 좀처럼 경거망동을 하지 않았고, 문파에 대한 충성심도 각별했다. 그의 무공 실력은 강호의 절정 검객에 손색이 없었고, 적을 대함에 있어 한 치의 두려움도 없었다. 무엇보다 그는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방화에게는 그의 그러한 점이 다른 어떤 것보다 중요하게 생각되었다.

소지산의 제자가 된 지 열흘 남짓밖에 되지 않았으나 방화는 자신의 선택이 올바른 것이었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소지산의 지도 방식은 진산월과는 많이 달랐다. 진산월은 처음에는 자세 하나하나와 초식의 사소한 변화까지 꼼꼼하게 설명해주었지만, 일단 어느 정도 틀이 잡혔다고 판단되면 그 후의 성과는 전적으로 본인에게 맡겨 버렸다. 어찌 보면 방임에 가까울 정도로 내버려 두어서 너무 성의 없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에 비해 소지산은 매일매일의 성과를 면밀히 지켜보았고, 잘못된 동작이 없는지 몇 번이고 확인을 했다. 진산월이 초식 자체의 이해에 더 비중을 두어 초식의 운용에 융통성을 용인하는 반면, 소지산은 초식을 구현하는 동작에 한 치의 착오도 용납하지 않았다.

두 사람의 방식은 일장일단이 있지만, 방화는 소지산의 방식이 더 자신에게 적합하다고 생각했다. 아직 뚜렷한 자기 주관이 부족한 방화에게는 세심한 곳까지 지적하는 소지산의 가르침 하나하나가 금과옥조처럼 여겨졌던 것이다. 누군가가 관심을 가지고 자신을 지켜본다는 것이 그렇게 기쁘고 든든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오늘 비로소 소지산의 제자가 된 후 처음으로 작은 성과를 이루어냈다. 비록 입문 무공에 불과한 천하삼십육검이었지만, 칭찬에 인색한 소지산의 입에서

“이제 됐다.”

라는 말이 나왔다는 것은 적어도 초식의 구현만큼은 완벽하다고 인정을 받은 셈이었으니 방화로서는 가슴 벅찬 느낌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소지산의 옆에 나란히 서 있던 방취아가 방화의 앞으로 다가오더니 손에 들고 있는 수건을 내밀었다.

“수고가 많았다. 확실히 요즘 들어 검법이 부쩍 늘었구나.”

방화는 공손하게 수건을 받아들고는 땀으로 흠뻑 젖은 얼굴을 닦으며 멋쩍은 듯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모두 사부님 덕분입니다. 미흡한 점이 없도록 세세한 부분까지 지적해주셔서 더 빨리 깨우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방취아가 입을 가리고 나직한 웃음소리를 냈다.

“호호….. 그 소심한 성격은 여전하구나. 최근에 네가 얼마나 열심히 무공을 수련하고 있는지를 내가 잘 알고 있다. 너무 무리해서 몸을 상하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을 정도니까 말이다. 그 아이가 너의 반만 따랐어도 좋았을 텐데…”

방취아가 딱 꼬집어 누구라고 지칭하지 않았으나 방화는 그녀의 말이 서문연상을 가리키는 것임을 알고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사매도 요즘 들어서는 상당히 열중하는 것 같습니다. 어제도 보니까 제법 늦은 시간까지 보법을 연마하고 있더군요.”

방취아는 서문연상을 생각하자 못마땅한지 얼굴 표정이 그다지 좋지 않았다.

“눈앞에 보이는 욕심에 나름대로 애를 쓰고 있는 모양이지만, 정신을 차리려면 아직도 멀었다.”

방화는 무어라고 할 말이 없어 쓴웃음을 지으며 입을 다물고 말았다.

그때 마침 노해광이 그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곳에 있는 줄 모르고 한참을 찾았구나.”

소지산과 방취아가 황급히 그에게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사숙께서 오신 줄도 모르고 번거롭게 해드렸으니 송구스럽습니다.”

노해광은 손을 휘휘 내저으며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허허… 말도 없이 불쑥 찾아온 내 탓이니 신경 쓰지 말거라. 그보다 너의 차 끓이는 솜씨가 제법 일품이라고 들었는데, 차 한잔 마실 수 있겠느냐?”

눈치가 빠른 방취아는 식사를 준비하겠다며 방화를 이끌고 사라졌다.

소지산은 노해광을 자신의 거처로 안내했다. 방에 들어와 차 한잔을 다 마실 때까지도 노해광은 가벼운 안부만을 물었을 뿐 소지산을 찾아온 용건을 말하지 않았다.

소지산은 노해광이 차를 모두 마신 것을 확인한 다음에야 비로소 진중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제게 하실 말씀이 있으면 하교해주십시오, 사숙.”

노해광은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으며 소지산의 얼굴을 가만히 응시했다.

소지산은 그다지 잘생긴 사람이 아니었다. 얼굴은 말상으로 길었고, 피부는 가무잡잡했으며, 볼이 홀쭉해서 다소 초췌해 보이기도 했다. 하나 유난히 각진 턱에 굳게 다물어진 입술과 헝클어진 머리카락 사이로 번뜩이는 차갑고 냉정한 눈빛은 그가 얼마나 의지견정한 성격인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노해광도 소지산을 만난 것은 채 열 번도 되지 않았으나, 그가 입이 무겁고 행동거지가 진중하며 쉽사리 경동하지 않는 침착하고 다부진 성격임을 파악하고 있었다. 노해광은 한동안 의미를 알 수 없는 눈길로 소지산을 응시하고 있다가 불쑥 말문을 열었다.

“이번에 내가 작은 가게를 낸 건 알고 있겠지?”

“만화원이라는 포목점이라고 들었습니다.”

만화원은 엄밀히 말하면 단순한 포목점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상회라고 할 수 있었다. 주 업무는 비단을 파는 것이었지만, 그 외에도 다양한 물품들을 취급하고 있어 노해광의 말과는 달리 상당히 커다란 규모였다.

소지산은 정해를 통해서 서안 일대의 소식을 듣고 있기 때문에 노해광이 차린 만화원이 빠른 시간에 서안에서 자리를 잡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동안 애를 쓴 끝에 이제는 제법 가게다운 틀을 갖추게 되었다. 시작치고는 그럭저럭 괜찮은 편이라고 할 수 있지. 이런 상태라면 올해가 가기 전에 투자한 돈을 모두 회수하고 이익을 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노해광이 말꼬리를 흐리자 소지산이 의아한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노해광은 상당히 배짱이 좋고 성격이 담대해서 좀처럼 남 앞에서 말을 머뭇거리는 법이 없었다. 노해광은 문득 쓴웃음을 짓더니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이번에 한 가지 문제가 생겼다. 그래서 네 도움이 필요해서 찾아온 것이다.”

노해광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올 줄은 몰랐는지라 소지산은 놀랍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궁금증이 일기도 했다.

“제가 도와드릴 일이 있다면 당연히 도와드리겠습니다. 그런데 어떤 문제가 생긴 것입니까?”

“이틀 전에 만화원의 창고가 모두 털렸다.”

소지산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세 개 모두 말입니까?”

“그렇다.”

“피해 금액이 얼마나 됩니까?”

“대략 팔천 냥 정도 될 거다. 액수도 액수지만 중요한 건 그 창고를 지키던 내 부하 다섯 명이 죽었다는 것이다. 그들 중 두 명은 제법 괜찮은 실력을 지닌 녀석들이었다.”

노해광은 다른 사람의 평가에 무척이나 박한 편이었다. 그의 입으로 괜찮은 실력이라고 한다는 것은 실제로는 상당히 뛰어난 무공을 지닌 고수들이라는 의미였다.

“범인들에 대한 단서는 잡았습니까?”

노해광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런 흔적도 남아 있지 않았다. 심지어는 내 부하들과 싸운 흔적도 없었다.”

“의심이 가는 자들은 있습니까?”

“창고 세 개에 가득 든 물품들을 밤사이에 들키지 않고 모두 빼간 걸로 보아 흉수는 적어도 절정의 무공을 지닌 고수들이 포함된 상당히 잘 짜여진 조직임이 분명하다. 내가 알기로는 현재 서안에서 그 정도 솜씨를 보일 수 있는 자들은 모두 세 부류뿐이다.”

노해광의 음성은 담담했으며 얼굴 표정 또한 전혀 변화가 없었다.

“첫째는 손노태야다. 하지만 손노태야는 나와 언약한 것이 있어 적어도 몇 년 동안은 나를 적대시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그가 손을 썼을 가능성은 별로 없다고 생각한다.”

소지산은 묵묵히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둘째는 유화상단이다. 그들은 어느 정도 가능성이 있다. 아무래도 포목점은 그들의 주 업종인데다 이번에 만화원을 차리면서 그들과는 약간의 마찰이 있었지. 앞으로도 그들은 지속적으로 문제가 될 소지가 있다.”

노해광은 말을 더 잇지 않고 입을 굳게 다문 채 앉아 있었다.

소지산은 나직한 음성으로 물었다.

“세 번째는 어디입니까?”

노해광의 시선이 소지산에게로 향했다. 잠시 그의 얼굴을 가만히 쳐다보던 노해광이 차를 한 모금 마신 후 천천히 입을 열었다.

“화산파다.”

그 말에야 비로소 소지산은 노해광이 자신을 찾아온 이유를 알아차렸다. 이번 일이 단순히 유화상단과의 분쟁이라면 노해광 혼자의 힘으로 충분히 수습이 가능할 것이다. 하나 화산파가 배후에 있다면 아무리 노해광이 서안에 탄탄한 세력을 구축하고 많은 부하를 거느리고 있다고 할지라도 어려움에 처할 수밖에 없었다. 범인으로 화산파를 염두에 두었다면 노해광으로서는 종남파의 힘을 빌리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소지산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물었다.

“사숙께선 그들 중 어느 곳이 더 유력하다고 보십니까?”

“가능성은 어느 곳이나 마찬가지다. 심지어는 손노태야도 예외일 수는 없지. 물증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섣부른 판단은 화를 자초할 수 있다.”

“제가 어떻게 해드렸으면 좋겠습니까?”

노해광은 이미 생각해놓은 것이 있는 듯 주저하지 않고 말했다.

“정해를 빌려다오.”

정해는 종남파의 당대 장문인인 신검무적의 사제일 뿐 아니라 현재 종남파 소유의 객잔들을 모두 관리하고 있는 중추적인 인물이었다. 게다가 기지가 뛰어나고 판단력이 좋아서 사태를 올바로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무공이 그리 뛰어나지 않다는 것이 흠이지만, 정말 위급할 경우에는 장인인 비룡객 상원건의 도움을 받을 수도 있기 때문에 그리 큰 약점은 되지 않을 것이다.

소지산은 노해광이 정해를 택한 이유를 어렵지 않게 짐작하고는 선뜻 승낙을 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소지산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묵직하면서도 단호한 음성으로 말했다.

“혹시라도 이번 일에 화산파가 연루되었다면 다시 연락을 주십시오. 그때는 제가 직접 나서겠습니다.”

노해광은 무거운 표정으로 그를 응시하더니 혼잣말처럼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그런 일이 없기를 바라야지.”

저녁 준비를 하려다 문득 생각나서 서문연상을 찾아가던 방취아는 무엇을 보았는지 눈을 크게 떴다. 의당 자신이 새겨놓은 월녀보의 발자국을 앞에 놓고 골머리를 싸매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서문연상이 머리 위에 커다란 물동이를 인 채 휘청거리고 있는 광경을 목격한 것이다.

서문연상은 물동이를 머리에 올려놓은 채 발자국을 따라 걸음을 옮기고 있었는데, 한걸음을 움직일 때마다 물동이의 물이 흘러넘쳐 상반신이 흠뻑 젖어 있었다. 그런데도 용케도 쓰러지지 않고 한걸음 한걸음씩 조심스런 동작으로 걸음을 내딛고 있었다. 그 표정이 어찌나 진지하고 신중한지 평소의 쾌활하고 다소는 산만하기조차 했던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다.

방취아는 한동안 물끄러미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 서문연상이 마침내 버티지 못하고 물동이를 떨어뜨린 채 바닥에 나뒹구는 모습을 보고는 피식 웃고 말았다.

“용케도 월녀보를 익히는 방법을 알아냈군. 운이 좋은건지 잔머리가 비상한건지…”

서문연상은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된 채 물바다로 변한 땅바닥에 주저앉아 있더니 돌연 벌떡 일어나 어딘가로 부리나케 달려가기 시작했다. 잠시 후 다시 돌아온 그녀의 머리 위에는 물이 가득 담긴 물동이가 얹혀 있었다. 무거운 물동이를 머리에 인 채 엉덩이를 흔들며 아슬아슬하게 걷고 있는 그녀의 뒷모습은 영락없는 강남 여인들의 그것이었다.

방취아는 서문연상이 다시 휘청거리는 걸음으로 바닥에 새겨진 발자국을 따라 앞으로 내딛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더니 이내 가느다란 한숨을 불어 내쉬었다.

“아무래도 이번에는 저 말괄량이에게 월녀검법을 넘겨줘야 할 것 같구나.”


랜덤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