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20권 소림기변(少林奇變)편 : 2화
제 200장 망화왕회
마료군이 백일정에 도착했을 때는 해가 막 중천으로 기어오르는 정오 무렵이었다.
백일정은 낙양의 동문 밖 오 리 지점에 있는 정자로, 비록 외떨어져 있기는 했으나 완만한 구릉의 정상에 위치한 탓에 탁 트인 주변의 경관을 감상할 수 있는 곳이었다. 한낮에 내려다보이는 낙양성 밖의 경치가 가히 절경이라 할 만큼 뛰어난 반면에 해가 지면 특별히 구경하거나 지낼 만한 곳이 없어 ‘밝은 대낮에만 쓸모있는 정자’라는 의미에서 백일정이랑 이름이 붙게 되었다.
백일정 안에는 이미 이십여 명이 모여 앉아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그들 대부분이 문사 차림의 이삼십대 젊은이들이어서인지 장내는 그들이 뿜어내는 열기로 활기에 차 있었다.
그들 중 유난히 미간이 넓고 옷차림이 화려한 백삼청년이 문득 고개를 돌렸다가 막 백일정 안으로 들어서는 마료군의 모습을 발견하고는 반색을 하고 손짓을 했다.
“이제 오는군. 여길세. 어서오게.”
마료군은 빙긋 웃으며 성큼성큼 다가와 백삼청년의 앞에 털썩 주저 앉았다.
“일찍도 왔군. 모임의 시작은 미시경부터인데 벌써부터 나와 있는 건가?”
백삼청년은 하얀 이를 드러내며 활짝 웃었다.
“우리야 워낙 성질이 급하고 참을성이 없는 소인배들이니 오전부터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지만, 자네는 항상 군자연하면서 느긋하던 사람이 무슨 바람이 불어 한 시진이나 일찍 온 건가?”
“날이 너무 좋아서 집에서 조금 일찍 나왔을 뿐이네. 그나저나 오늘은 평소에 안 보이던 자들도 제법 모습을 보이는 걸 보니 근래에 보기 드물게 성황일 것 같군.”
“아무래도 올해의 화회도 거의 끝나가기 때문이 아닐까? 더구나 날씨마저 이렇게 화창하니 한 해의 화회를 마무리하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날 아니겠는가?”
“확실히 좋은 날씨로군.”
백삼청년이 마료군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다시 한 사람이 그들에게로 다가왔다.
“조보와 청람이 나란히 앉아 있으니 정말 보기 좋군. 이제 종학과 진현만 있으면 모처럼 낙양십수 중의 절반이 모이는 셈인가?”
그는 짙은 흑삼을 입고 얼굴이 길쭉한 이십대 후반의 문사였다.
병약한 모습이었으나, 눈빛이 날카로워서 다소 신경질적인 인상을 풍겼다.
백삼청년이 반색을 하며 그를 반겼다.
“어서 오게, 오유. 그런데 오늘 종학과 진현도 온다고 했던가?”
흑삼문사는 두 사람의 앞에 다가와 앉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제 종학을 만났는데, 오늘이 아무래도 올해의 마지막 화회가 될 것 같아 가급적이면 참석하겠다고 하더군.”
“그렇다면 오늘 모처럼 그들 두 사람을 모두 볼 수 있겠군. 진현은 종학과 늘 붙어 다니니 말일세.”
“그렇겠지.”
대화를 나누는 세 사람은 나름대로 낙양 일대에서 문명이 알려진 문사들이었다. 마료군을 처음 맞이했던 백삼청년은 하정소라는 인물로, 조보는 그의 친우들이 그를 부르는 이름이었다. 뒤늦게 온 흑삼문사는 자가 오유였고, 본명은 위한길이었다.
그들과 마료군은 모두 낙양의 수재들이라는 낙양십수에 속해 있었는데, 낙양십수 중 상당수가 망화왕희라는 화희에 몸을 담고 있었다.
낙양은 예로부터 모란이 유명해서 매년 봄이 되면 낙양 전체가 모란에 뒤덮이다시피 했는데, 이 모란꽃을 구경하기 위한 화회가 수백 개나 존재했다. 망화왕회는 그중에서도 규모나 참여 인원의 면면에서 제법 유명한 화회 중 하나로, 매년 삼월에서 모란이 지는 사월까지의 이 개월 동안 대략 열 번의 모임을 열었다.
초창기에는 단순히 낙양 일대의 모란을 감상하는 화회에 불과했으나, 이런 세월이 수십 년을 이어오면서 나름대로 탄탄한 인맥이 형성되고 이름이 알려져서 낙양의 학계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매번의 화회때마다 참석 인원은 이십 명을 넘지 못했었는데, 오늘은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모임 시간이 상당히 남아 있었는데도 벌써 삼십 명에 가까운 인원들이 모여들었다.
“나는 늘 궁금했는데, 진현과 종학은 왜 그렇게 같이 다니는 걸 좋아하는지 모르겠더군. 단순히 우의가 돈독하다고 하기에는 조금 심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지. 자네는 혹시 그 이유를 알고 있나?”
위한길의 물음에 하정소는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하하….별다를 게 있겠나? 어려서부터 동문수학한 데다 나이도 비슷하고 쌍둥이처럼 어울리다보니 특별히 친해진 거겠지.”
옆에서 묵묵히 그들의 말을 듣고 있던 마료군이 불쑥 입을 열었다.
“단순히 그것만이 아닐걸.”
하정소가 눈을 휘둥그렇게 뜨며 그를 돌아보았다.
“엥? 내가 모르는 다른 거라도 있나?”
“진현이 어려서부터 맺고 끊는 게 없이 우유부단한 성격이라 그의 부친께서 비슷한 나이의 어린이들 수천 명을 모아 그중에서 특별히 한 명을 선별해서 함께 어울리도록 했다고 하더군. 성격도 고치고 말벗으로 삼기 위해서 말이지. 처음에는 두 사람의 성격이 너무 달라서 서로 먼 산 닭 보듯 했었는데, 진현의 부친께서 일 년 동안 무조건 한 방에서 기거하도록 명령을 내리셨지.”
“그분이라면 능히 그런 명을 내리실 만도 하지.”
“일 년 후에 그 명이 해제되어 서로 각방을 쓸 수 있게 되었는데, 그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두 사람은 그 후로 삼 년 동안이나 같은 방에서 생활했다고 하더군. 그때부터 늘 같이 붙어 다니더니 지금은 친형제들보다도 더욱 가까운 사이가 되어버린 것일세.”
하정소와 위한길은 처음 듣는 이야기인 듯 흥미로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런 일이 있었군. 진현이 우유부단한 성격이었다니 믿어지지 않는 일일세. 일처리가 확실하고 진퇴가 분명해서 ‘단칼’이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지 않은가? 그에 비하면 종학은 좀처럼 말도 없고 행동이 불분명해서 ‘새가슴’이라고 놀리는 자들도 있는 형편인데… 정말 모를 일이로군.”
“진현의 아호가 무엇이었는지 아나?”
하정소가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재빨리 대답했다.
“노호 아니가? 그래서 모두들 강단 있는 진현의 성격과 잘 어울리는 이름이었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마료군은 알 듯 모를 듯한 묘한 미소를 지었다.
“그건 자네가 그 집 식구들의 성향을 몰라서 그런 걸세. 그들 형제들의 아호는 모두 그들의 부친께서 직접 지으셨는데, 아들들의 성격이 아니라 당신의 소망을 감안한 것들이지. 노호라는 이름도 진현이 어렸을 때부터 워낙 소심하고 일을 행하는 데 주저함이 많아서 노한 호랑이처럼 추진력 있게 살라는 뜻에서 붙여진 것일세. 그의 둘째 형님의 지우라는 아호도 성격이 너무 급해서 느린소처럼 차근차근 일을 해결하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고 하네.”
“그러고보니 그런 말을 들었던 것도 같군. 그렇다면 그림자 친구를 이용한 진현의 성격 개조가 확실히 효과를 본 모양이군.”
그때 위한길이 나직한 음성으로 속삭였다.
“그들이 왔네.”
마료군과 하정소가 퍼뜩 고개를 돌려보니 과연 두 명의 인물들이 정자 안으로 막 들어오고 있었다.
그들은 각기 회색 장삼과 황삼을 입은 삼십대 중반의 문사들이었는데, 회삼문사가 키가 크고 체구가 당당한 반면에 황삼문사는 키가 작고 왜소해서 멀리서 보기에도 확연히 구분이 될 정도로 판이한 인상을 풍기고 있었다. 마료군과 하정소를 비롯한 장내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그들에게로 쏠렸다. 중인들의 따가운 시선을 받으면서도 두 사람은 전혀 당황하거나 어색해하는 기색도 없이 정자의 중앙으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어서들 오게. 정말 모처럼 모임에서 자네들을 보는 것 같군.”
그는 갈효명이란 인물로, 망화왕회의 현재 회주였다. 망화왕회의 회주는 삼년에 한 번씩 선임되는데, 전대 회주가 다음 회주를 지명하는 방식이어서 모임을 소집하고 진행하는 일 외에는 특별히 의미 있는 자리가 아니었다. 하나 회의 전반적인 운영을 책임질 뿐 아니라 대외적인 상징이 되기 때문에 모든 회원들이 나름대로 우대를 해주고 있었다.
회삼문사가 가볍게 인사를 하며 빙긋 웃었다.
“오늘 모임에도 안 나오면 회에서 제명시키겠다고 회주께서 일부러 사람까지 보내 그렇게 엄포를 놓았는데 어지 빠질 수 있겠소?”
갈효명은 껄껄 소리 내어 웃으며 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하하…. 그렇게라도 하지 않았으면 자네들 두 사람의 얼굴을 언제 볼 수 있겠나? 아무튼 모처럼 어려운 걸음을 했으니 좋은 시간을 보내기 바라네.”
회삼문사와 황삼문사가 자리에 앉자 갈효명은 일어나서 주위를 한차례 둘러보더니 낭랑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이제 대충 올 사람들은 모두 온 것 같으니 오늘의 화회를 시작할까 하오.”
소란스러웠던 장내가 점차로 조용해지고 사람들의 시선이 자신에게로 향하자 갈효명은 목소리를 가다듬은 다음 다시 말문을 열기 시작했다.
“험. 오늘 모임은 모두들 짐작했겠지만 아무래도 올해의 마지막 화회가 될 것 같소. 그래서 화회가 끝난 후 작은 연회를 열 계획이니 가급적이면 모두 그 연회까지 참석해주기 바라겠소.”
갈효명은 간략하게 오늘 모임의 의미를 설명한 후 화회의 개회를 선언했다. 이제부터 대략 두 시진 동안 낙양성 동문 일대의 모란을 감상한 후 다시 모여서 자신이 지은 시를 발표하거나 부를 읊으며 모란의 아름다움을 칭송하는 것으로 모임이 마무리된다.
모란을 감상하는 장소는 그때그대 달랐는데, 오늘의 목적지는 백일정에서 가까우면서도 풍광이 뛰어나기로 유명한 함월원이란 정원이었다.
함월원은 여타의 정원에 비해 그리 넓은 편은 아니었으나, 연못과 건물들이 절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어 사시사철 온갖 기화이초들이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곳이었다. 특히 모란이 만발하는 이맘때면 정원 전체가 온통 분홍빛 구름에 파묻힌 듯해서 그야말로 좀처럼 보기 힘든 선경을 이루고는 했다. 연홍색 모란 사이로 언뜻언뜻 보이는 노랗게 채색된 처마 지붕과 파란 하늘은 보는 이의 넋을 앗을 듯한 절경 중의 절경이라 할 수 있었다.
다섯 개의 크고 작은 건물들과 일곱 개의 연못, 그리고 십여 개의 화원들은 몇 개의 작은 소로들로 연결되어 있어 소로를 따라 걷다보면 어느새 함월원 전체를 한 바퀴 돌게 되어 있었다. 망화왕회의 문사들은 각기 마음에 맞는 지인들과 어울려 함월원의 경내를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마료군이 하정소, 위한길과 담소를 나누며 걷고 있을 때, 회삼문사와 황삼문사가 그들에게 다가왔다.
“오랜만일세. 그동안 잘 있었나?”
회삼문사가 먼저 말을 건네자 마료군이 활짝 웃으며 그를 반겼다.
“어서 오십시오. 대체 무슨 일을 하시느라 겨우내내 그렇게 꽁꽁 숨어 계셨습니까?”
“숨긴 누가 숨었다고 그러나? 작년에 너무 이런저런 일에 쓸데없는 심기를 소모한 것 같아 잠시 휴식을 취했을 뿐이네.”
회삼문사와 황삼문사는 낙양십수에 속해있는 인물들로, 회삼문사의 자는 진현, 황삼문사는 종학이었다. 그들 두 사람은 마료군 일행보다 대여섯 살 연상이었으나, 낙양십수간의 모임에서 자주 만나서인지 평소에도 제법 친분이 있는 사이였다.
마료군이 다시 무어라 입을 열기 전에 진현이 먼저 말을 내뱉었다.
“그보다 요즘 좋은 소식이 들리던데 미리 축하하겠네.”
마료군은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가 이내 무슨 말인지 알아차린 듯 계면쩍은 미소를 흘렸다.
“아직 확정된 건 아닙니다. 양가에서 제대로 된 상견례도 하지 않았고 단지 매파만 서너 차례 왔다 갔을 뿐입니다.”
“그 콧대 높은 송대부인께서 매파가 들락거리는 것을 허락했다는 것만으로도 일은 성사된 거나 다름없지 않겠나. 송가장의 실권은 뭐니 뭐니 해도 대부인이 쥐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니 말일세.”
송가장은 낙양에서도 손꼽히는 명문 중의 하나로, 현재의 가주는 내각대학사를 지낸 송일도였다. 송일도의 둘째 딸인 송혜린은 미모가 뛰어날 뿐 아니라 시서금화에 두루 능한 일대재녀로 알려져 있었는데, 마료군은 얼마 전부터 그녀와 혼담이 오가는 중이었다.
그들은 담소를 나누며 함월원의 경내를 거닐다가 마침 멀지 않은 곳에 정자 하나를 발견하고는 그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정자 일대는 제법 커다란 연못이 있을 뿐 아니라 유달리 풍광이 수려해서 근처를 지나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한 번쯤 잠시 쉬어가고 싶은 충동이 들 정도였다.
한데 정자로 막 들어서던 마료군 일행은 잠시 주춤거릴 수밖에 없었다. 정자에는 이미 한 사람이 자리를 잡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선객이 계셨군.”
마료군이 아쉽다는 듯 탄성을 토하며 돌아서려 하자 정자에 홀로 앉아 있던 사람이 그들을 제지했다.
“어차피 공간도 많이 남았는데 몇 분쯤 더 앉는다고 해도 충분한 것 같소.”
그 사람은 키가 유달리 크고 몸이 비쩍 마른 청년이었는데, 한쪽 뺨에 칼자국이 있어 첫인상은 다소 차가워 보였다. 하나 눈빛이 부드럽고 음성이 정중해서 크게 거부감이 들거나 하지는 않았다.
마료군은 어찌해야 할지 묻는 시선으로 진현과 종학을 돌아보다가 진현이 살짝 고개를 끄덕이자 이내 그 사람에게 가볍게 인사를 하고는 정자의 한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실례가 안 된다면 잠시 신세를 지겠소.”
다른 사람들도 모두 그의 뒤를 따라 자리를 잡았다.
정자는 밖에서 보던 것보다 넓어서 그들이 모두 자리에 앉고도 넉넉할 정도였으나, 그래도 먼저 와 있던 사람에게 신경이 쓰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은 서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틈틈이 그 사람을 힐끔거리고 있었다.
그 사람은 중인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계속 쏠려 있는 것을 알고 있을 텐데도 전혀 표정의 변화가 없이 담담한 모습으로 앉아 있었다. 무언가 깊은 상념에 잠긴 것처럼 보이기도 했고,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모습 같기도 했다. 하나 무심한 듯 조용히 앉아 있는 태도에는 자연스런 위엄이 풍기고 있어 범속한 인물이 아님을 느끼게 했다.
마료군은 그 사람의 전신을 조심스럽게 살펴보다가 진현을 돌아보며 목소리를 낮추어 소곤거렸다.
“나이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은데도 범상치 않아 보이는군요. 허리춤에 검을 차고 있는 것을 보니 강호인 같은데, 혹시 누군지 아시겠습니까?”
진현은 고개를 저었다.
“처음 보는 인물일세. 그나저나 그렇게 사람을 계속 힐끔거리면 상대가 기분 나빠하지 않겠나? 정 관심이 간다면 직접 인사를 하고 안면을 트는 게 좋을 것 같군.”
마료군의 얼굴에 멋쩍은 웃음이 떠올랐다.
“옳은 말씀입니다. 제가 조금 경솔했군요.”
마료군은 얼굴에 칼자국이 있는 강호인가 안면을 트고 싶은 생각까지는 없는지 그 사람에 대한 관심을 끊고 동료들과 이야기를 나누는데 주력했다.
그때 다시 한 사람이 정자 안으로 불쑥 들어왔다. 중인들의 시선이 자연스레 그 사람에게로 향했다. 들어온 사람은 짙은 색의 청삼을 입은 청년이었다. 옷이 비록 깔끔하기는 했으나 여기저기에 기운 자국이 있어 전체적으로 추레한 인상이었는데, 반면에 얼굴에 떠오른 표정만큼은 무척이나 생동감이 넘쳐 있어 활기에 차 보였다.
청삼청년은 정자 안을 한차례 둘러보더니 이내 입가에 엷은 미소를 지은 채 정자 안에 제일 먼저 앉아 있던 사람에게로 다가갔다.
“자네로군. 이런 곳에서 우연히 만나다니 확실히 자네와 나는 인연이 깊은 모양일세.”
정자 안의 사람은 담담한 시선으로 청삼청년을 응시하더니 조용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지금 자네가 이곳에 나타난 것이 우연이란 말인가?”
“그렇지. 원래 오늘같이 화창한 날이 모란을 감상하기에는 제일 좋은지라 방구석에만 처박혀 있을 수 없어 나왔다가 이곳까지 흘러왔네. 그런데 뜻밖에도 자네를 보게 되다니 실로 운이 좋았다고 할 수밖에 없지 않겠나.”
정자 안의 사람은 잠시 생각에 잠겨 있는 듯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운이 좋았군.”
청삼청년은 자연스런 동작으로 정자 안의 사람 앞에 앉으며 빙긋 웃었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나? 도통 소식도 없고 모습을 볼 수도 없어서 나는 자네가 이미 낙양을 떠난 줄로 알았다네.”
“그렇지 않아도 내일쯤 길을 떠날 생각이었네. 그래서 오늘 저녁에 자네를 불러 술이라도 마시려고 했지.”
“그랬군. 그렇다면 굳이 저녁까지 기다릴 필요 없이 지금 한잔하는 게 어떻겠나?”
“이곳에서 말인가?”
“안 될 것도 없지 않나?”
청삼청년은 어깨를 한 차례 으쓱거리더니 품속에서 작은 술병 하나를 꺼냈다.
“마침 이렇게 술도 준비되어 있네.”
정자 안의 사람은 청삼청년이 들고 있는 술병을 힐끗 쳐다보더니 청삼청년의 얼굴을 가만히 응시했다.
“자네가 이렇게 준비성이 철저할 줄은 미처 몰랐군.”
“언제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니 늘 비상용 술 한 병은 가지고 다니지. 자네도 배워두도록 하게. 크윽! 좋군.”
청삼청년은 술병을 들어 크게 한 모금 들이마시더니 입술을 훔치며 술병을 내밀었다. 정자 안의 사람은 주저하지 않고 술병을 입으로 가져갔다. 두 사람은 서로 번갈아 가며 술병을 나누어 마시기 시작했다.
달콤한 주향이 정자안을 감돌며 주위의 꽃향기에 뒤섞이자 사람으로 하여금 묘한 흥취를 불러일으키게 했다. 마료군은 청삼청년이 들어올 때부터 그를 응시하고 있다가 두 사람이 술을 마시는 모습을 보고는 자신도 모르게 입맛을 다셨다.
“쩝…..”
옆에 있던 진현이 나직한 웃음을 흘리며 그의 옆구리를 툭 쳤다.
“자네도 마시고 싶은가?”
“오늘 같은 날에 저런 광경을 본다면 누구라도 그러지 않겠습니까?”
진현의 얼굴에 떠올라 있는 웃음이 조금 더 짙어졌다.
“확실히 자네는 순진한 구석이 있군. 나라면 아무리 술 생각이 간절해도 저런 술은 마시지 않으려고 할 걸세.”
마료군의 눈에 의아한 빛이 떠올랐다.
“저런 술이라니요? 그들이 어때서 그렇습니까?”
“그들이 어떤지 내가 알 리가 없지 않나? 내가 말하는 것은 그들이 마시고 있는 술이라네.”
“술이라뇨? 그게 무슨 특별한 것으로 만든 술이라도 된단 말입니까?”
“그 술이 무엇으로 만들어졌는지는 나도 모르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히 알고 있지.”
“그게 뭡니까?”
진현의 두 눈이 야릇한 빛으로 번쩍거렸다.
“일단 저 술을 마신 이상 두 사람 중 한 사람은 앞으로 두 번 다시 술을 마실 수 없게 된다는 것이지.”
마료군은 평소에 두뇌가 영활하고 총명하기로 이름난 인물이었으나 지금은 어리둥절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고 멀거니 진현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무슨 말씀인지 이해하지 못하겠군요. 둘 중 한 사람이 앞으로 술을 마실 수 없을 거라니…. 그건 두 사람 중 누군가가 곧 죽게 될 거란 뜻입니까?”
진현은 번쩍이는 눈으로 마료군을 응시했다.
“잘 아는군. 둘 중 누가 그렇게 될지 한번 맞혀 보겠나?”
마료군의 시선이 자신도 모르게 술을 마시고 있는 두 사람에게로 향했다. 그들도 진현과 마료군의 대화를 들었는지 술을 마시는 것을 멈춘 채 그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정자 안에 먼저 와 있던 사람은 여전히 담담한 모습인 반면에 청삼청년의 얼굴에는 무어라 형용키 어려운 묘한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마료군은 두 사람을 가만히 살펴보다가 무언가를 느낀 듯 번쩍이는 눈으로 진현을 돌아보았다.
“형님이 말씀하시는 사람은 혹시…..”
진현은 더 이상은 아무 말도 하지 말라는 듯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손가락으로 입술을 가렸다.
청삼청년은 그 광경을 보고 있다가 슬쩍 턱으로 진현을 가리키며 앞에 앉은 사람에게 말을 건넸다.
“저자의 말을 어떻게 생각하나?”
앞에 앉은 사람은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관심 없네.”
“그런가? 나는 자네가 저자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는 줄 알았는데…”
“왜 내가 저자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나?”
청삼청년의 입가에 한 줄기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렇지 않았다면 자네같이 바쁜 사람이 한가하게 이곳에 죽치고 있을 까닭이 없지.”
청삼청년이 이렇게까지 말하자 앞에 앉은 사람도 예의상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저자가 누구인데 내가 관심을 가져야 한단 말인가?”
“소문에 듣자하니 자네가 석가장주를 만났다고 하던데, 저자가 바로 석가장주의 셋째 아들인 노호 석단일세. 낙양의 학계에서는 진현이라는 자로 더 알려져 있지.”
앞에 앉은 사람은 고개를 돌려 진현을 가만히 바라보더니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저자가 석단이란 말이지. 그러고 보니 며칠 전에 그의 아버지를 만난 기억이 나는군.”
“자네가 저자를 만나러 일부러 이곳에 왔다는 걸 알고 있네.”
청삼청년이 단정적으로 말하자 앞에 앉은 사람은 굳이 부인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두지 그럼 자네는 그걸 확인하려고 날 찾아온 것인가?”
청삼청년은 멋쩍게 웃었다.
“말이 그렇게 되나?”
앞에 앉은 사람은 다시 술을 마시려 했으나 술병이 비었는지 몇 번 흔들어 보고는 다시 내려놓았다.
“술은 제법 맛이 있었네. 우리 둘 중 누가 죽게 될지는 모르지만 말일세.”
청삼청년의 눈이 번쩍 빛났다.
“관심 없다고 하더니 석단이 했던 말을 믿는단 말인가?”
앞에 앉은 사람은 오히려 되물었다.
“자네는 믿지 않나?”
청삼청년이 아무런 대꾸도 없이 자신의 얼굴을 쳐다보고만 있자 그는 피식 웃으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사실 그건 중요한 게 아니지.”
청삼청년은 낮게 가라앉은 음성으로 물었다.
“그럼 무엇이 중요한가?”
“자네 입으로 말하지 않았나? 내가 오늘 이곳에 온 것은 누군가를 만나기 위한 목적이 있어서라고, 그러니 이제 그 목적을 이뤄야 하지 않겠나?”
그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석단을 향해 몸을 돌렸다. 하나 그가 채 걸음을 옮기기도 전에 어느새 석단이 그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안녕하시오, 진 장문인? 인사가 늦었소. 내가 바로 석단이오.”
“나를 알고 있소?”
석단의 입가에 한 줄기 야릇한 미소가 떠올랐다.
“진 장문인은 요즘 강호에서 가장 큰 명성을 떨치는 분인데 내가 모를 리 있겠소?”
청삼청년과 술을 마셨던 인물은 다름 아닌 진산월이었다. 그리고 청삼청년은 진산월이 낙양에 와서 친구를 사귀게 된 손검당이었다.
진산월이 이곳에서 손검당을 만나게 된 것은 확실히 뜻밖의 일이었다. 그리고 당연히 자신을 피하리라 생각했던 석단이 먼저 다가와 아는 척을 한 것은 더욱 뜻밖의 일이라고 할 수 있었다.
“진 장문인이 나를 찾고 있다는 말을 듣고 조만간 만날 자리를 마련하려고 했소. 다행히 늦지 않게 이렇게 만나게 되었구려.”
“그렇소? 나는 석 공자가 나를 만나는 것을 꺼려할 줄 알았는데 내가 잘못 생각한 것 같구려.”
석단의 얼굴에 떠올라 있는 미소가 조금 더 짙어졌다.
“진 장문인은 일부러 만나려고 해도 만나기 어려운 분인데 내가 왜 진 장문인을 피하겠소?”
“그렇다면 다행이오. 혹시 내가 석 공자를 만나려고 한 이유를 알고 있소?”
“나같이 평범한 졸부가 어찌 진 장문인의 대해와 같은 흉중을 짐작할 수 있겠소?”
석단의 말은 제법 정중했지만 그 속에는 은근한 비꼬임의 기색이 담겨 있었다. 하나 진산월은 전혀 눈치 채지 못한 듯 담담한 시선으로 석단을 응시했다.
“작년에 내 사제가 석가장을 방문한 적이 있었소. 그때 집사 한 사람에게 각별한 은혜를 입었는데, 이번에 석가장에 가보니 그 집사의 행방이 묘연하여 알 길이 없구려. 그래서 혹시 석 공자가 알고 있지 않을까 하여 만나려고 했던 거요.”
“그런 일이 있었군요. 그 집사가 누군지 알 수 있겠소?”
“공영춘이라고 하오.”
석단은 고개를 끄덕였다.
“진 장문인은 확실히 나를 잘 찾아왔소. 공 집사라면 물론 내가 잘 알고 있소.”
“그가 지금 어디 있소?”
석단은 문득 의미 모를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행방을 알려주는 건 어렵지 않으나 한 가지 문제가 있소.”
“그것이 무엇이오?”
“공 집사가 지금 어디 있는지 알아봤자 진 장문인은 그에게 은혜를 갚을 수 없을 테니 이 어찌 문제가 아닐 수 있겠소?”
“내가 왜 그에게 은혜를 갚을 수 없단 말이오?”
“그건 진 장문인이 오늘 살아서 이 정자를 벗어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오.”
석단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정자 안으로 몇 개의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삼남일녀였다. 세 명의 남자는 각기 삼십대 후반에서 사십대 초반의 장한들이었는데, 각기 다른 행색을 하고 있음에도 하나같이 전신의 기세가 잘 갈무리되어 있어 상당한 수련을 한 무인들임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반면에 여인은 이십대 후반으로 보였는데, 풍만한 몸매에 요염한 눈매를 지니고 있어 남자라면 누구나가 호감을 가질 만한 용모를 가지고 있었다. 붉은색 저고리에 짙은 남색 비단치마의 평범한 복장이었으나 의복이 몸에 딱 달라붙어 있어 몸매의 굴곡이 그대로 드러나는 바람에 묘한 풍정을 느끼게 했다.
세 명의 남자는 정자 기둥에 등을 기댄 채 비스듬히 서 있었고, 여인만 석단의 옆으로 다가와서 그와 나란히 섰다. 두 사람이 나란히 서자 제법 잘 어울려 보였다. 여인은 찬찬히 진산월을 살펴보다가 그와 시선이 마주치자 차분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소문으로 듣던 것과는 조금 다르군요.”
진산월은 담담한 음성으로 물었다.
“무엇이 다르오?”
“소문으로는 진 장문인이 무척이나 냉정하고 까다로운 사람이라고 하더군요.”
“그런데 실제로 보니 어떻소?”
여인은 살짝 눈웃음을 쳤다. 철담목석이라도 울렁거리게 만들 만큼 매혹적인 모습이었다.
“진 장문인이 이렇게 매력적인 사람이라고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어요. 아마 적지 않은 여인들이 진 장문인에게 넋이 나가 있을 거에요. 그렇지 않나요?”
“그런 말은 들어본 적이 없소.”
“그럴 리가요? 그 냉정한 시선에 사나워 보이는 얼굴의 칼자국하며 낮게 가라앉은 음성까지 조금이라도 남자에 대해 아는 여자라면 매혹당하지 않을 리 없어요.”
“그래서 그 말을 하려고 이곳에 온 거요?”
여인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부드럽지도 않고 달콤하지도 않았으나 남자라면 가슴이 두근거릴 만한 미소였다.
“그건 아니에요, 나는 진 장문인을 죽이려고 왔어요.”
그녀 같은 여인의 입에서 나왔다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살벌한 말이었으나, 그 말을 하는 그녀도, 듣는 진산월도 조금도 표정이 변하지 않았다.
“내가 누군지 알면서도 나를 죽이겠다고 왔다니 자신의 실력에 대한 자신감이 대단하구려.”
“내 무공이 제법 괜찮긴 하지만 솔직히 진 장문인을 상대로 하기에는 별로 자신이 없어요.”
“그런데도 나를 죽이려고 온 거요?”
“평소의 진 장문인이라면 어려워도 지금은 가능성이 있지요.”
“내가 마신 술 때문에?”
그녀의 눈에 한 줄기 별빛 같은 섬광이 스치고 지나갔다.
“알고 있었어요?”
진산월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보기와는 달리 입맛이 제법 까다로운 사람이오.”
“그렇다면 말하기 더욱 쉽겠군요. 진 장문인이 마신 술에는 우리가 특별히 주문한 것이 들어 있었어요. 그 술을 마신 이상 진 장문인은 오늘 살아서 이곳을 벗어나지 못할 거예요.”
“그 특별한 것이 무엇이오?”
“장인몽.”
진산월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 이름은 들어본 적이 없는데….”
“진 장문인 같은 사람을 상대하기 위해 어렵게 만든 거예요. 당대 최고의 독 전문가 열 사람이 그걸 만들기 위해서 모진 고생을 했지요. 그들의 장인정신을 높이 사서 ‘장인몽’이란 이름을 붙일 정도였으니까요.”
“그렇게 무서운 독이오?”
“그렇게 위험하지는 않아요. 공력을 끌어올리지만 않으면 하룻밤을 잔 후에 자연스레 몸 밖으로 배출되지요.”
“공력을 사용한다면 어떻게 되오?”
그녀는 진산월의 두 눈을 뚫어지게 주시하며 신중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공력이 높을수록 빨리 죽게 돼요. 일 갑자쯤 되는 고수라면 향 한 자루 탈 동안에 내장이 모두 녹아버리더군요.”
“섬뜩한 이야기군. 그런 독을 어떻게 만들었소?”
“운이 좋았죠. 실험하다가 죽은 독의 전문가도 세 사람이나 되니까 말이에요.”
“그렇게 무시무시한 독을 내가 마신 술에 넣었단 말이오?”
“아쉽게도 우리로서는 그럴 수밖에 없었어요. 진 장문인의 실력이 너무 뛰어나서 정면으로 부딪쳤다가는 피해를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아서죠.”
진산월의 시선이 슬쩍 손검당에게로 향했다.
“나와 같이 술을 마신 저 친구는 어떻소?”
그녀는 배시시 웃었다.
“말했잖아요. 공력을 끌어올리지만 않으면 아무 일 없이 다음날 체외로 배출된다고요.”
“저 친구도 당신들과 같은 무리요?”
“그렇다고 해두는 게 진 장문인으로서는 마음 편하겠죠?”
“그건 무슨 의미요?”
“말 그대로에요. 그는 오래 전부터 우리와 함께 일해 온 사이에요. 그러니 친구에게 배신당했다는 기분은 가지지 않았으면 좋겠군요. 그는 당신을 배신한 게 아니라 우리의 동료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에요.”
진산월은 문득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까지 말해준다니 고맙소. 당신들이 이런 수고를 하면서까지 나를 죽이려고 한 이유는 내가 공영춘을 찾고 있기 때문이오?”
“그건 별로 중요한 일이 아니에요.”
“내 사제를 암습한 자가 공영춘이 아니란 말이오?”
“진 장문인의 사제를 암습한 사람은 공영춘이 맞아요. 사실 그때 종남파는 초가보에 의해 거의 멸문에 처한 상태라 진 장문인의 사제 한 사람을 죽이고 살리는 건 큰 의미가 없었어요, 그런데 공영춘이 괜한 공명심 때문에 번거로운 일을 저지른 거죠.”
“그는 지금 어디 있소?”
진산월의 뒤에 서 있던 세 명의 장한 중 검은 수염을 기르고 남색 장포를 걸친 중년인이 앞으로 나섰다.
“내가 바로 공영춘이오.”
진산월은 담담한 시선으로 그를 응시했다.
공영춘은 진산월이 만났던 공망춘이나 공상춘과는 또 다른 인상이었다. 이목구비는 그들과 마찬가지로 청수했으나, 입술이 얄팍하고 눈빛이 날카로워서 성격이 예민한 인물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당신 때문에 내 사제가 절름발이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소?”
공영춘은 눈가를 살짝 찡그렸으나 이내 냉랭한 웃음을 매달았다.
“흐흐…. 그것 참 안타까운 일이로군. 그는 단지 지독하게 운이 나빴을 뿐이오.”
“당신의 운도 그리 좋아 보이지 않는구려.”
“나보다 진 장문인은 본인의 운을 더 걱정해야 할 거요. 오늘 진 장문인은 최고의 악운을 만나게 된 거요.”
진산월은 한 번 더 공영춘을 응시하다가 그의 옆에 서 있는 두 명의 장한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다른 분들도 소개해주시겠소?”
두 사람 중 황의를 입고 체구가 건장한 장한이 먼저 입을 열었다.
“나는 노중련이라 하오”
“오, 이제 보니 천동에서 명성이 자자한 황천비룡이셨구려. 그 옆의 분은?”
제일 오른쪽에 서 있는 강퍅한 인상의 남삼인이 차가운 음성으로 말했다.
“내 이름은 형일손이다. 들어본 적이 있느냐?”
진산월은 서슴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오. 왕옥산 일대에서 악명을 떨치고 있는 혈수객을 내가 어찌 모를 수 있겠소?”
진산월은 가볍게 말했으나 노중련과 형일손은 결코 호락호락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중원의 한쪽 지방을 뒤흔드는 절정고수들일 뿐 아니라 행적이 신비하고 손속이 잔인하여 모두들 상대하기 꺼려하는 인물들이었다.
진산월은 세 사람을 차례로 훑어보다 여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여인은 그와 시선이 마주치자 다시 눈웃음을 쳤다. 일부러 유혹하려 하기보다는 습관적인 것 같았다.
“이제 내가 누군지 궁금한가요?”
“그렇소.”
“나는 소조림이라고 해요”
“숲을 비춘다라….. 무척 낭만적인 이름이오.”
“어렸을 적 달빛에 비추인 숲이 너무 아름다워서 밤새 숲속에 가만히 앉아 있곤 했었어요. 그러자 사부님께서 아예 이름으로 붙여 주었지요.”
“그렇다면 소저의 사부님은 풍류재사라 할 만하겠구려.”
그녀는 나직하게 웃었다.
“호호…. 내 사부님은 여자에요.”
“그것 참 아쉬운 일이오.”
“사부님께서도 당신이 여자로 태어나신 걸 종종 아쉬워하곤 했죠. 사부님께서는 늘 남자로 태어나셨더라면 낙화수사 조옥린 못지않은 풍류남아가 되었을 거라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셨어요.”
“정말 대단하신 분이구려. 그분의 함자를 알 수 있겠소?”
그녀는 진산월을 빤히 쳐다보더니 다시 야릇한 웃음을 날렸다.
“이름 알려주는 거야 뭐가 어렵겠어요. 그분의 이름은 섭소심이라고 해요.”
“이름만 들어도 그분의 용태가 떠오르는 것 같구려. 그런데 내가 과문해서인지 그분의 이름을 처음 듣는데, 별호도 알 수 있겠소?”
“진 장문인의 강호의 모든 사람을 알고 있는 건 아니잖아요. 내 이름도 오늘 처음 들었을 거에요.”
“솔직히 그렇소.”
소조림은 진산월의 얼굴을 빤히 응시하다가 한숨 섞인 음성을 내뱉었다.
“진 장문인이 궁금해하는 건 대충 정리가 된 것 같군요. 솔직히 진 장문인 같은 사람이 영문도 모르고 죽는 것은 너무 아쉬운 일 같아서 지금까지 편의를 봐드린 거에요.”
“그 점에 대해서는 고맙게 생각하고 있소.”
“그럼 더 이상 물어볼 말이 없겠죠?”
“마지막으로 한 가지가 남았소.”
“그게 뭔가요?”
진산월은 별빛같이 번뜩이는 눈으로 그녀를 응시하며 나직하면서도 묵직한 음성으로 물었다.
“당신들은 쾌의당에서 왔소?”